이상한 소리가 났다. 카라마츠는 문을 열고 들어서려다 멈추고 병원 안쪽에 귀를 기울였다. 자세히 들어보니 요즘 유행하는 아이돌이 부른 댄스곡이 병원 벽에서 진동이 느껴질 만큼 꽝꽝 울려 퍼지고 있었다. 닥터의 병원에서 아이돌 노래가? 카라마츠는 문손잡이를 잡고 잠깐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카라마츠 씨!”

카라마츠와 눈이 마주치자 쥬시마츠가 양손에 길쭉한 풍선을 이리저리 꼬아 만든 강아지와 꽃 같은걸 들고 카라마츠에게 다가와 불쑥 내밀었다. 그리고 카라마츠에게 뭐라고 막 말을 걸었는데 노래 소리에 묻혀 들리지를 않았다. 카라마츠는 일단 그걸 받아들고 병원 천장의 네 모서리에 붙어 있는 스피커를 가리켰다.

!!!! !!!!! !!!!”

쥬시마츠는 알아듣지 못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다 카라마츠가 스피커를 가리키고, 그리고 풍선을 들고 있는 양 손으로 귀를 막는 시늉을 하자 그제야 아하! 하고 달려가 리모컨으로 음악을 껐다. 병원 안쪽의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던 유리병들이 음악소리에 펄쩍거리고 있었는지 제자리에 우수수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카라마츠는 풍선을 구석에 내려놓고 먹먹한 귀를 문질렀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그러자 쥬시마츠가 책상으로 달려가더니 폭신폭신한 호랑이 앞발 모양의 장갑을 꺼내들어 손에 끼웠다. 그리곤 양손을 흔들면서 활짝 웃었다. 예전에 쥬시마츠와 놀이공원에서 데이트를 했을 때 카라마츠가 사준 것이었다.

놀이공원 스타일이에요!”

, 그래서 그랬구만. 카라마츠는 피식 웃고 쥬시마츠가 만들다 실패했는지 처참한 꼴로 널려 있는 풍선조각들을 모아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간신히 살아남은 풍선들을 주워 책상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아마도 봉제인형 가게에서 어린이 동물원이라고 나온 시리즈를 전부 다 사온 것으로 보이는 인형 세트들을 들여다보았다.

어때요?”

쥬시마츠의 목소리가 한껏 들떠있었다. 어젯밤 카라마츠가 출근을 해야 한다고 졸린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쥬시마츠가 한참을 망설이더니 카라마츠의 손을 잡고 놀이공원 일은 그만두고 하루 종일 자기랑 같이 병원에 있어주면 안되냐고 물었던 것이다. 사실 카라마츠도 쥬시마츠와 병원에서 이것저것 신기한 것들을 구경하고, 쥬시마츠가 들려주는 요상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끔은 뽀뽀도 하고 하는 일이 꽤 즐거워 쥬시마츠의 제안이 솔깃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카라마츠도 살아오면서 연애를 몇 번 해봤고, 무작정 붙어 있기만 하는 게 좋은 점만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카라마츠는 지금 그가 하는 일도, 함께 일하는 오소마츠도 좋았기에 쥬시마츠의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안 된다는 얘기를 들어도 쥬시마츠는 카라마츠의 손을 꽉 붙잡고 입을 삐죽거리며 왜 안 되는 거냐고 물었고, 카라마츠는 차마 그들이 하루 종일 붙어 있으면 질려버릴 거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놀이공원 분위기가 좋아서 일을 계속 하고 싶다고 둘러대고 말았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 모양인거지. 카라마츠는 어느새 곁으로 다가와 뒤에서 카라마츠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있는 쥬시마츠의 손을 겹쳐 잡았다. 아마 쥬시마츠는 오늘도 휴일팻말을 걸어놓고 신나게 쇼핑을 하고 병원 안을 꾸몄을 것이다. 카라마츠는 샹들리에에 걸린 빨갛고 노란 리본들을, 나름 동물원처럼 같은 우리를 쓰는 애들끼리 나눠서 늘어놓은 인형들과 그리고 쥬시마츠가 오늘 산 것으로 보이는 반짝반짝한 오디오를 둘러보았다. 카라마츠가 쥬시마츠의 손을 토닥거리며 잡고 있자 쥬시마츠의 팔에 힘이 더 들어갔다.

나랑 같이 병원에 있어주면 안돼요?”

쥬시마츠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려왔다. 그 목소리엔 두 번째 거절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과 옅은 기대감이 깔려있었다. 카라마츠는 몸을 돌려 쥬시마츠의 양 뺨을 잡고 코끝에 쪽 하고 뽀뽀했다. 쥬시마츠의 눈이 반짝거렸다.

하루 종일 붙어있으면 우리 일 안 할 거잖아요?”

할건데에....”

맨날 낚시가고 여행가고 맛있는 거 해먹고 재밌는 거 구경하러 가고 하다보면 굶어죽을걸?”

쥬시마츠가 입을 삐죽거렸다.

왜 굶어죽어요? 맛있는 거 해먹을 건데?”

쥬시마츠는 몰라도 나는 매일매일 세끼 밥이랑 고기를 못 챙겨먹으면 죽어요. 진짜로.”

카라마츠는 대답을 하고 곁에 놓여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쥬시마츠가 잠깐 생각을 하는가 하더니 자기 의자를 끌고 와 카라마츠 곁에 바싹 붙어 앉았다.

우리 농사지을까요? 그리고 돼지랑 소랑 닭이랑 양이랑 참치도 키우고?”

그걸 다?”

할 수 있어요.”

쥬시마츠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난데없이 참치라니. 카라마츠는 웃음이 나오려는걸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

열심히 키워놓은 걸 잡아서 먹으려면 슬퍼서 안돼요.”

그럼 열심히 안 키우고 씨앗만 뿌려서 다 자라면 잡아먹는 건?”

씨앗? 카라마츠는 쥬시마츠가 밭이랑에 훠이훠이 하면서 씨를 뿌리자 그 자리에서 소랑 닭, , 돼지, 참치가 쑥쑥 자라는 걸 상상했다. 바로바로 먹으면 좋을 것 같긴 한데, 매번 고기를 먹을 때마다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고기가 먹기 싫어질 것 같았다.

쥬시마츠는 병원을 해야 되니까 안돼요. 오늘은 손님 왔어요?”

카라마츠가 화제를 돌려버리는 게 못마땅했는지 쥬시마츠가 카라마츠의 손을 잡고 뾰로통한 표정을 짓다가, 아차 하고 고개를 들었다.

오늘 토도마츠한테 전화가 왔어요.”

동생분?”

동생이 취미로 바둑클럽을 나가는데 거기서 만난 친구랑 내기 바둑을 두다가 동생이 관리하는 과수원을 날려버렸나 봐요. 애가 소소한 운은 좋은데, 그런 데서는 약하다니까요.”

쥬시마츠가 혀를 차면서 고개를 저었다. 토도마츠와는 몇 번 만나서 인사를 한 적이 있었다. 한창 겨울이 깊어갈 때쯤 햇살 원액을 맞으러 주인 없는 작업장을 방문하기도 했었고. 토도마츠는 쥬시마츠와 닮았지만 조금 더 일반인 같은 느낌이 드는 사람이었다. 내키는 대로 옷을 골라 입는 쥬시마츠와는 다르게 평범한 대학생 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지. 토도마츠는 꽤 활동적인 사람으로 보였다. 바둑도 뒀구나. 카라마츠는 쥬시마츠가 바둑판을 앞에 두고 진지한 표정으로 바둑을 두는 걸 상상해보았다. 어울리지 않네. 카라마츠는 쥬시마츠가 병원 안을 이리저리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간식거리를 내오는 걸 보면서 씩 웃었다. 쥬시마츠는 그냥 쥬시마츠 그대로가 제일 잘 어울렸다.

그럼 이제 쥬시마츠랑 동생분이랑 같이 사는 거에요?”

왜요?”

쥬시마츠가 김이 오르는 커피 두 잔을 들고 오며 물었다. 카라마츠가 보너스를 탄 기념으로 캡슐커피를 사주면서 쥬시마츠는 커피에 푹 빠졌다. 캡슐커피, 믹스 커피, 그리고 핸드드립으로 이어지면서 쥬시마츠는 커피콩을 키우겠다고 옥상 화분에 커피를 잔뜩 심었다. 카라마츠는 커피를 받아 한 모금 마시고 날이 좀 더 따뜻해지면 옥상에 본격적으로 농사를 지어보기로 결심했다.

동생 분은 그 과수원에서 사는 거 아니었어요? 그런데 그걸 날려버렸으면 갈 데가 쥬시마츠 병원 밖에 없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과수원을 주면 안돼요.”

?”

그래서 과수원을 숨길 생각이에요.”

과수원을 숨겨? 카라마츠가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표정을 짓자 쥬시마츠가 커피 향을 맡더니 한 번에 다 마셔버리고 컵을 내려놓았다.

카라마츠 씨 내일 쉬니까, 오늘 병원에서 자고 내일 아침에 같이 토도마츠네 과수원으로 가요.”

쥬시마츠의 뺨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카라마츠가 거의 매일같이 퇴근을 하면 쥬시마츠의 병원으로 와 한밤중이 될 때까지 있었지만 쥬시마츠는 매일 헤어지는 걸 아쉬워했다. 그리고 카라마츠가 쉬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카라마츠가 고개를 끄덕이자 쥬시마츠가 신나게 달려가 안쪽으로 사라졌다. 세면대에 양치 컵을 떨어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카라마츠는 그의 입맛에 딱 맞는 커피를 홀짝이면서 진짜 쥬시마츠랑 여기서 살아버릴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쥬시마츠의 트럭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아무것도 없던 조수석에는 카라마츠의 야외용 선글라스와 예비용 선글라스, 고글, 카라마츠가 좋아하는 과자와 껌 같은 군것질거리가 구석구석에 자리를 잡았고 카라마츠가 좋아하는 음악 CD도 몇 개 꽂혀 있었다. 달라진 것은 트럭뿐만이 아니었다. 카라마츠도 더 이상 쥬시마츠가 그를 업고 옥상에서 바닥까지 뛰어내린다고 놀라지 않았다. 사실 다른 사람이 볼까봐 무섭긴 했지만 여태까지 운이 좋았는지 그들을 발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해가 막 뜰 무렵이었다. 초봄이었지만 해가 뜨기 전에는 좀 쌀쌀해 카라마츠는 담요를 꺼내 무릎에 두르고 창문을 닫았다. 잔잔한 바람에 길가에 핀 빨갛고 하얗고 노란 꽃들이 소리 없이 흔들렸다. 쥬시마츠가 시동을 걸고 내비게이션을 켰다.

 

















닥터 쥬시마츠와 환자 카라마츠의 외전입니다 ㅇ0ㅇ

사람잡아먹는 걸 쓰고 나니 포카포카한 걸 쓰고 싶어졌어요....

고기를 굽는 냄새가 온 집안에 진동했다. 본능적으로 식욕이 돌았다. 그리고 이치마츠는 눈을 꼭 감고 입에 고인 침을 바늘처럼 삼켰다.

어젯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를 숨이 막힐 정도로 꽉 끌어안고 놓아주질 않았다. 이치마츠 나름대로의 위로가 통했던 걸까. 이치마츠의 귓가에 카라마츠의 고른 숨결이 산들바람처럼 스쳤다. 그리고 이치마츠는 악몽을 꿨다. 그가 간밤에 거칠게 베어냈던 가는 발목이 이치마츠의 숨통을 꾹 누르고 있었다. 한참을 발버둥 치다 간신히 꿈에서 깨어났지만 카라마츠는 깨지도 않고 계속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새벽이려나. 이치마츠는 해가 뜰 즈음이 되어 새소리가 들리는지 귀를 기울여보려다 곧 새들도 없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이치마츠는 다시 잠이 찾아올 때까지 가만히 카라마츠의 자는 얼굴을 바라보다가,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귀 뒤로 넘겨주었다. 다행히 카라마츠는 옅게 웃는 표정이었다. 행복한 꿈을 꾸고 있니? 너는?

진짜 먹을 생각이야?”

카라마츠는 찡그린 표정을 숨기지도 못하고 그대로 드러내보였다. 이건 우리가 고기를 먹음으로서 의미가 완성된다고. 하지만 이치마츠는 대답하지 못하고 말을 삼켰다. 정신병자 같은 얘기겠지. 카라마츠도 이치마츠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진 않았다. 우린 이제 집 밖을 돌아다니는 것들과 다른 종족이고, 우리가 저지른 것이 살인이 아닌 사냥이 되기 위해선 피해자를 묻어줄게 아니라, 전리품을 먹어야 했다. 이치마츠는 밤새 벗겨낸 가죽과 내장을 해가 뜨자마자 집에서 먼 골목까지 나가 버렸다. 등 뒤로 무언가가 느리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고갤 돌리지 않았다.

남은 것은 마트에서 팔던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어 보이는 붉고 흰 살코기였다. 이치마츠는 어머니가 쓰던 식칼로 그걸 적당한 크기로 썰어내고, 간밤에 밥을 끓인 불구덩이에 석쇠를 올려 고기를 얹었다. 고기는 느리게 익었다. 카라마츠는 안절부절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노릇하게 고기 익는 냄새가 나는데 이치마츠는 계속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약해빠진 새끼. 이치마츠는 계속해서 침을 삼켰다. 그의 목구멍에 바늘이 박혀서 피 냄새가 나는 것일지도 몰랐다.

익은 고기는 접시에 담겨져 식탁에 올려졌다.

남은 건 훈제를 하던가 하자.”

이치마츠는 젓가락을 건네주며 말했다. 카라마츠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곧 굳은 어깨를 펴고 식탁 앞에 앉았다.

신선한건 오랜만이네.”

이치마츠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카라마츠도 고개를 끄덕였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와 눈을 한번 마주치고는 먼저 고기를 한 점 집어 입에 넣었다. 망설이지도 않았다. 카라마츠는 늘 이렇게 결정적인 순간에 어른스러운 척하곤 했었지. 이치마츠도 이어 고기를 입에 넣었다. 이상한 맛이었다. 고기 맛은 맞는데, 뭐랄까, 낯선 맛이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고기를 먹었다. 형제들 중 카라마츠가 유달리 고기를 좋아했고, 다른 형제들도 한창 성장기였던 만큼 고기를 먹으러 가면 서로 사정 봐줄 것 없이 달려들어 입에 하나라도 더 밀어 넣기 위해 다투곤 했었다. 그러나 이제 식탁은 텅 비어있었고, 둘은 꼭 공장에서 뭔가를 조립하는 것처럼 규칙적으로 입에 고기를 밀어 넣었다.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진다. 처음에는 견뎌내는 것일 수도 있지만 어느 순간 삶은 일상이 되어 적당히 타협해가며 살게 된다. 이치마츠와 카라마츠는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텅 빈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했다. 어둡고 낯선 곳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은 다른 것들도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해가 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오고, 해가 지면 잠을 자고, 해가 뜨더라도 주변을 분간할 수 있을 만큼 밝아져야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서로 한마디도 언급하진 않았지만,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이 세상의 규칙이었다.

 

오늘은 어디를 가볼까?”

카라마츠가 가방에 작은 물통을 넣고 참치 통조림과 빵 통조림을 챙겼다. 이치마츠는 얼마 전 옷가게에서 훔쳐온 옷의 포장을 뜯다 멈춰 고민에 빠졌다. 이건 그들 나름대로의 적응방법이었다. 꼭 주인을 잃어버린 것처럼 텅 비어버린 세상은 두 고등학생에겐 제법 스릴 넘치는 놀이터였다. 그 차가운 자유 속에서 이치마츠는 담배를 시작했고, 카라마츠는 평소 그들이 갈 수 없었던 구역에 들어가 보는 데에 재미를 붙였다.

학교?”

학교?”

카라마츠가 되물었다. 여태 그들이 가본 곳들과는 달리 너무나 일상적인 공간이었다. 학생이 들어가지 못하는 구역도 얼마 되진 않았고, 같은 학교 여자애들이 쓰던 여자화장실은 이미 금단의 맛을 알아버린 그들에겐 그다지 매력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치마츠는 학교에 가보고 싶었다. 그들이 제 2의 집처럼 생활하던 공간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간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집이랑은 다를 것 같은데. 카라마츠를 붙잡고 이렇게 센티멘털한 얘길 하는 건 좀 부끄러웠다. 다행히 카라마츠도 더 묻지 않고 짐을 챙겼다. 그는 얼마 전 백화점에서 훔쳐온 선글라스를 쓰곤 웃었다. 이치마츠는 코랑 입 밖에 보이지 않는 그 얼굴을 보면서 덩달아 웃었다. 그리곤 자기도 모르게 카라마츠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학교로 가는 길은 너무나 익숙하고도 낯설었다. 카라마츠는 기왕에 어른이 될 거면 차까지 몰아보자고 나섰지만 열쇠가 꽂힌 채로 버려진 차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또래들이 좀처럼 만져볼 수 없는 가격의 선글라스를 쓰고, 독한 담배를 제법 능숙하게 피우며 손을 잡고 걸었다. 카라마츠의 손은 이제 이치마츠의 또 다른 손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손을 잡고 있으면 이치마츠는 안심이 되었고, 아침에 눈을 뜰 수 있었다. 힘이 넘치는 손. 버려진 길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그들의 무릎께에서 일렁였다. 학교로 가는 길에 작은 하천을 건너면서 이치마츠는 힐끗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강은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위로 내려쬐는 햇살은 물결의 흐름을 따라 갈라지면서 거대한 금빛 그물 같았다. 이치마츠는 잠깐 그 그물이 잉어니 붕어니 하는 것들을 남김없이 잡아 하늘로 올라가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상상을 했다.

예상외로 학교 안엔 그것들이 꽤 모여 있었다. 그리고 꼭 짠 것처럼 그들과 함께 학교를 다니던 학생들이었다. 교복을 입고 있는 사람은 없었지만, 모두 그들이 학교를 다니면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던 얼굴이었다. 이치마츠는 교우관계가 좁아 아는 얼굴이 얼마 없었지만 카라마츠는 누군가와 마주칠 때마다 멈춰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어느새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어 셔츠 주머니에 끼워 넣었다. 학생으로 되돌아간 것처럼. 이치마츠는 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리고 문득 이치마츠를 괴롭게 했던 신입이 떠올랐다. 이치마츠는 그의 이름을 생각해내려고 해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는 카라마츠와 손을 잡고 걸으면서 마주치는 얼굴을 꼼꼼하게 뜯어보았다. 카라마츠는 다섯 번째 아는 얼굴을 만나 멈춰 섰다가 아, 하고 작게 탄식하더니 이치마츠의 손을 놓고 위층으로 달려갔다. 카라마츠가 이치마츠의 손을 놓고 가버리는 건 처음이었다. 고작 손이었는데 이치마츠는 놀라 카라마츠의 뒤를 쫓아 달렸다. 순식간에 온몸에 소름이 돋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카라마츠는? 카라마츠는 이런 기분을 느끼지 않아? 혼자 남는 게 무섭지 않아? 이러다 둘 중 하나가 사라져 버릴까봐 무섭지 않아? 이치마츠의 뒷목이 뻐근하게 당겨왔다. 카라마츠는 어느 교실 앞에 서서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카라마츠는 교실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카라마츠는 그저 교실 문을 붙잡고 그 안을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었다. 곧 이치마츠도 숨을 헐떡이며 따라와 카라마츠의 어깨를 거칠게 부여잡았다.

왜 그래?”

이치마츠.”

카라마츠가 교실 안쪽을 가리켰다.

어쩌면...”

카라마츠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치마츠도 고개를 내밀어 교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고약한 냄새가 났다. 다들 아는 얼굴이었다. 그들 중 몇 명은 이치마츠에게 그가 대본을 쓰고, 카라마츠가 연극을 하면 되지 않겠냐고 진지하게 말을 걸어왔던 사람이었다. 그들이 그 곳에 있었다. 그들의 연극부실에서, 엉망이 된 꼴을 하고 교실 안을 맴돌고 있었다. 카라마츠의 숨이 거칠어졌다. 어쩌면. 이치마츠는 카라마츠가 하려던 말을 알 것 같았다. 어쩌면 그들이 죽인 것은, 그리고 함께 이 세상을 견뎌내고 있는 것들은 짐승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카라마츠는 헐떡거리면서 뒷걸음질 쳤다. 이치마츠도 입이 바짝 말라왔다. 그 순간, 이치마츠의 머릿속을 섬광처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이치마츠는 계속 거기서 물러나려고 하는 카라마츠의 멱살을 잡아 그 교실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이치마츠, 그만 가자... 여기에 있으면 안 돼...”

카라마츠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이치마츠는 마른 입술을 적셨다. 그 안에 있는 것들이 텅 빈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잘 봐.”

누구에게 하는 말이었을까?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멱살을 잡고 무작정 입을 맞췄다. 첫 키스였다. 로맨스 영화나 소설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부드러운 움직임도 없었고, 혀가 오가지도 않았으며 애무하지도 않았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가 입을 맞추자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았다. 이치마츠는 그런 카라마츠의 멱살을 잡고 그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치마츠!”

이치마츠가 입술을 깨물자 카라마츠는 정신이 도로 들었는지 이치마츠를 밀쳐냈다. 이치마츠는 칠판에 어깨를 꽝 소리가 나게 부딪치고 얼얼한 어깨를 문지르며 카라마츠를 노려보았다.

, 쟤네가 사람이었으면 우리끼리 키스하는 걸 보고 가만히 있었을 것 같아?”

카라마츠는 손등으로 거칠게 입술을 문지르다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증거야! 저것들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고!”

그게 과연 카라마츠를 위한 말이었을까? 이치마츠는 한참을 씩씩거리며 카라마츠를 노려보았다. 카라마츠는 먼저 돌아서 교실을 빠져나갔다. 이치마츠는 조금 자라 옷깃을 덮는 카라마츠의 뒷머리가 문 너머로 사라지기가 무섭게 달려가 카라마츠의 손을 꽉 쥐었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지만 손은 잡도록 내버려두었다. 이치마츠도 아무렇지 않은 척 그 손을 잡고 있었다. 카라마츠가 짊어진 배낭에서 덜그럭거리며 통조림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계단을 내려오면서 이치마츠는 이곳으로 느릿느릿하게 모여들었을 그 짐승들을 생각했다. 아무래도 여긴 익숙한 곳일 테고, 그럼 밖에서 한참을 돌다가 익숙한 장소를 찾아갔을 수도 있다. 보면 고양이들도 고양이들마다 자주 가는 곳이 있잖아? 그렇지?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에게 묻고 싶었지만 카라마츠는 입을 꾹 다물고 꼭 이치마츠가 없다는 것처럼 걸었다. 문득 저 사이에 형제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형제들을 카라마츠가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아니, 이치마츠가 보고 싶지 않은 건가. 자꾸 눈앞에서 카라마츠가 손등으로 입술을 닦아내던 모습이 어른거렸다

의외로 여섯 살이라는 나이 차이는 꽤 컸던 모양이다. 카라마츠는 집 앞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의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카라마츠는 쥬시마츠와 함께 살기 전까진 자기 방에 불이 켜져있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어려서 아버지가 어머니와 이혼을 하고 아버지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을 모두 연구에 쏟아 붓는 동안 카라마츠는 혼자서 자랐다. 어두운 집으로 들어가서 불을 켜는 건 일상이었고, 슬프다거나 외롭다거나 할 때는 이미 지난 지 오래였다. 카라마츠는 한숨을 푹 쉬고 현관문을 잡았다. 누군가 집 안에서 달리는 소리가 들렸고, 문이 벌컥 열렸다. 카라마츠는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던 걸 단숨에 풀고 씨익 웃어보였다.

카라마츠 형!”

쥬시마츠가 달려들어 품에 안겼다. 쥬시마츠는 한참 성장기라 그런지 하루가 다르게 자랐고, 그들이 함께 살기 시작한지 반년이 다 되어가자 어느새 카라마츠의 키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자랐다. 그만큼 무거워지기도 했다. 카라마츠는 휘청거리다 겨우 쥬시마츠를 붙잡고 손에 들려있던 아이스크림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쥬시마츠는 카라마츠를 놓고 곧바로 카라마츠의 손을 확인하더니 아이스크림을 집어 들고 부엌으로 달려갔다. 카라마츠는 쥬시마츠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쥬시마츠가 소리를 질렀다.

! 아이스크림 지금 먹어도 돼?”

그래! 잠깐만, 옷만 갈아입고!”

카라마츠도 큰 소리로 대답을 하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소리가 나지 않게 조용히 문고리를 돌려 문을 잠갔다. 처음엔 그저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카라마츠는 혼자서 살던 버릇처럼 문을 열어놓고 지냈지만 언제부턴가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 그의 물건을 하나하나 만졌던 것 같았고, 그의 옷이, 심지어 속옷이 한두 벌씩 없어지곤 했다. 새어머니는 카라마츠를 어려워했다. 카라마츠를 부를 때도 문 앞에서 이야기를 마쳤고, 청소도 카라마츠가 직접 한다는 얘길 아버지에게 전해 들었는지 따로 건드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원래 카라마츠의 물건에 관심이 없었고.

남은 건 쥬시마츠뿐이다. 카라마츠는 실내복으로 갈아입다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문을 보았다. 카라마츠는 외동으로 이십여 년을 살다 갑작스럽게 동생이 생긴다는 얘기를 듣고 걱정하고 있었다. 그의 친구들은 고등학교 1학년이면 한창 사춘기일 때이고, 낯선 아저씨가 형노릇을 하겠다고 덤비면 자다가 칼을 맞을 거라고 겁을 줬다. 하지만 쥬시마츠는 처음부터 카라마츠의 손을 피하지 않았고, 카라마츠가 무슨 말을 하든 생긋생긋 웃으며 따랐다. 카라마츠도 그다지 말이 많은 편이 아니라 친해질 수 있을까 하고 걱정했는데, 쥬시마츠는 카라마츠가 돌아오면 그를 붙잡고 학교에서 있었던 얘기를 늘어놓았다. 카라마츠가 다녔던 고등학교를 다니는 만큼 제법 말도 통했고, 쥬시마츠는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르게 애교도 부렸고 카라마츠에게 애정 표현도 잘 했다. 동생이 생겨도 나쁘진 않구나. 카라마츠는 안심했다. 쥬시마츠가 카라마츠의 물건들에 관심을 갖는 건 그저 호기심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물건을 건드리지 말라고 얘기하면 사이가 어색해질 것 같아 그의 물건들을 나눠주면 쥬시마츠가 그의 의도를 알아차릴 거리고 믿었는데, 쥬시마츠는 멈추질 않았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 말자. 카라마츠는 아주 미묘하게 조금씩 위치가 바뀐 물건들을 바라보다 실내복을 마저 입고 벗은 옷을 들고 나왔다. 새어머니는 아직 오시지 않은 것 같았다. 카라마츠는 깜빡하고 잠금장치가 된 그대로 문을 열었다. , 하고 잠겼던 문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던 소리가 멈췄다가, 쥬시마츠가 고개를 불쑥 내밀고 카라마츠를 불렀다.

! 아이스크림에 초코 시럽 뿌려서 먹어볼까?”

못 들은 건가? 카라마츠는 안심하고 벗은 옷을 세탁바구니에 넣고 부엌으로 들어왔다.

그러다 이 썩는다? 고등학생인데 충치 생기면 쪽팔릴 거야.”

카라마츠가 쥬시마츠의 머리를 헝클어뜨리자 쥬시마츠가 배시시 웃으며 아이스크림을 크게 한 스쿱 덜었다. 아주 잠깐, 카라마츠는 쥬시마츠가 욕실 쪽을 향해 시선을 돌린 것을 본 것 같았다.

야구부는 어때?”

카라마츠가 먼저 말을 꺼냈다. 쥬시마츠는 아이스크림을 입에 가득 넣고 녹여먹다 머리가 아픈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고 있었다.

급하게 먹지 말라니까. 매번 아이스크림 먹을 때마다 그러네.”

쥬시마츠는 울상을 지으며 한참 미간을 찌푸리다 간신히 표정을 풀고 아이스크림을 더 덜어 그릇에 담았다.

야구부 코치님도 좋고, 같이 하는 친구들도 다 좋아! 그리고 방학하자마자 합숙 간다는데, 많이 힘들까?”

카라마츠는 비록 야구부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의 친구들 중 하나는 붙어서 3년 내내 카라마츠를 약 올리며 열심히 부활동을 했었다. 그 친구가 합숙을 가긴 갔었던 것 같은데, 재밌다고 했었나, 아님 힘들었다고 했었나.......

다른 건 모르겠고, 친구가 엄청 까맣게 타서 왔었어.”

카라마츠가 웃으며 아이스크림을 한 스푼 떠서 입에 넣었다. 쥬시마츠는 카라마츠를 빤히 바라보다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까만 게 좋을까?”

, 요샌 일부러 태닝도 많이 하니까? 하얗기만 한 것 보다는 건강해보이겠지?”

좋아하는 여학생이라도 생긴 건가? 카라마츠는 자신의 고등학교 생활을 떠올려보고 피식 웃었다.

공학이었으면 예쁜 여학생이 매니저 해줬을 텐데, 아쉽겠네?”

아니, 안 그래.”

쥬시마츠가 딱 잘라서 대답하고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의외였다. 이미 좋아하는 상대가 있으니 매니저 같은 건 상관없다는 건가? 카라마츠는 곰곰이 주변에 있는 다른 학교들을 떠올려보았다. 여고도 하나 있었고, 공학도 하나 있었다. 꼭 학생이 아닐 수도 있지. 카라마츠는 잠깐 고민하다가 스푼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카라마츠는 방으로 돌아가 지갑을 꺼냈다. 새어머니나 아버지가 용돈을 챙겨주는 것 같았지만 카라마츠도 용돈을 좀 쥐어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돈 문제로 쩔쩔매는 건 영 보기 싫으니까. 지갑을 들고 돌아오니 쥬시마츠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재채기라도 했나? 카라마츠는 자리에 앉아 지갑을 열었다. 그리곤 지폐 몇 장을 꺼내 쥬시마츠에게 내밀었다.

청춘도 잠깐이야. 여자 친구 생기면 맛있는 것도 사주고 그래야 돼.”

여자 친구 없는데.......”

쥬시마츠가 말끝을 흐리다 고개를 들었다. 고백하기 전인가? 카라마츠는 쥬시마츠를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았다. 아직 귀여운 얼굴이긴 하지만 어린 티도 많이 벗었고, 면도도 하기 시작했다. 야구부 활동을 열심히 하더니 키도 크고 어깨도 더 넓어진 것 같았고. 카라마츠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혹시 모르는 거야. 일단 받아.”

쥬시마츠는 입을 꾹 다물고 카라마츠가 내민 돈을 빤히 바라보다 받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감사합니다.”

내가 괜한 짓을 했나? 생각해보면 사춘기 남자애고, 이렇게 돈 받는 게 자존심이 상한다던가... 하지만 쥬시마츠는 곧 웃으며 아이스크림을 마저 퍼서 먹었다. 슬쩍 보니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가장 큰 통으로 사온걸 벌써 반은 되게 먹은 것 같았다. 이렇게 먹고 또 쑥쑥 크겠지. 카라마츠는 쥬시마츠가 자기보다 커져버리면 자존심이 좀 상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더 안 먹어?”

이제 씻고 공부해야지. 다 먹고 나서 뚜껑 꼭 닫아서 냉동실에 넣어놔.”

쥬시마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라마츠는 빈 그릇과 스푼을 싱크대에 가져다 놓고 욕실로 들어갔다. 카라마츠가 가려는 대학원엔 아버지와 친한 분들이 많았다. 특혜를 받을 수 있다면 받는 게 좋긴 하겠지만, 아버지의 체면을 생각하면 공부를 게을리 할 수가 없었다. 카라마츠는 뜨거운 물을 한참 맞고 있다가 쥬시마츠 생각을 했다. 쥬시마츠는 성적이 나쁜 편도 아니었고, 머리도 꽤 좋은 것 같았다. 저번에 얘기했을 땐 대학을 가면 좋겠다고 생각만 하고 있었지 집안 사정을 생각해서 포기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젠 사정이 다르다. 친 아들은 아니지만 쥬시마츠도 아버지의 아들이었고, 아버지는 웬만하면 쥬시마츠도 대학에 보내고 싶어 할 것이다. 카라마츠만큼 좋은 대학에 가진 못하더라도 어디 가서 부끄럽진 않을 정도로. 쥬시마츠가 3학년이 되어 본격적으로 수험을 준비할 때가 되면 카라마츠는 이미 출국해 이 집에 없을 것이다. 카라마츠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면서 그 전까지 쥬시마츠에게 공부를 가르쳐야겠다고 결심했다.

카라마츠는 목욕가운을 두르고 나왔다. 부엌에는 불이 꺼져있었다. 아마 쥬시마츠도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방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러다 배탈 날라. 카라마츠는 쥬시마츠의 방문을 슬쩍 돌아보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조용히 방문을 돌려 잠갔다. 카라마츠는 잠깐 거울을 보면서 보습제를 바르고 서랍에서 속옷을 꺼냈다.

그때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카라마츠는 깜짝 놀라 반쯤 푼 목욕가운 끈을 다시 고쳐 묶고 고개를 돌렸다. 카라마츠의 이불이 둥그렇게 위로 튀어나와 있었다. 그리곤 쥬시마츠가 얼굴을 빼꼼 내밀어 카라마츠를 보고 웃었다.

쥬시마츠, 안자고 뭐해?”

카라마츠는 무심결에 조금 날카로운 목소리로 묻고 후회했다. 쥬시마츠는 카라마츠의 손에 속옷이 들린걸 보고 앗! 하면서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얼른 입어!”

카라마츠는 주섬주섬 속옷을 입고 가운을 벗어 옆 옷장 문고리에 가운을 걸었다. 쥬시마츠가 다시 고개를 내밀고 카라마츠가 옷을 입는 걸 보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잠옷을 꺼내 바지부터 입었다. 쥬시마츠의 시선이 느껴졌다. 끈적끈적하다고 하기 보단 뜨겁고, 따끔거렸다. 카라마츠의 문 틈 사이로 느껴지던 그 시선. 카라마츠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상의 단추까지 다 잠그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쥬시마츠가 이불 밑에서 꼼지락거리다 카라마츠 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카라마츠를 올려다보았다. 자기 방으로 돌아가라고 해야지. 어떻게 말을 꺼내지? 하지만 쥬시마츠가 조금 더 빨랐다.

나 혼자서 공부하면 금방 졸리니까, 형 방에서 하면 안 될까? 조용히 할게.”

공부를 하겠다는데 어떻게 말리겠어. 카라마츠는 어쩔 수 없이 책상 한쪽을 치워주었다.

그럼 보조 의자 좀 가져올래? 여기 옆에 앉아서 해.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고.”

하지만 쥬시마츠는 이불 밑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머뭇거리다 이불 바깥으로 발 한쪽을 내밀어보였다. 카라마츠는 새삼 쥬시마츠의 발이 자기 발과 크기가 비슷하거나, 혹은 조금 더 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 한참 숨어있었더니 발이 저려. 형이 갖다 주면 안 될까? 보조의자가 어디있는지도 모르겠어.”

그러고 보니 쥬시마츠가 이 집으로 오고 보조의자를 쓴 적이 없었다.

그래. 저린 거 풀리면 가서 책도 가져오고.”

카라마츠는 방문을 열고 나가 부엌에 딸린 세탁실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뒤에서 타다닥, 하고 뛰는 소리가 나더니, 쥬시마츠가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발 저린 게 이렇게 금방 풀린다고? 카라마츠는 화장실을 한번 돌아보고 다시 부엌으로 들어갔다

*강신재의 젊은 느티나무를 모티브로 작성한 글입니다.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멋 부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인만큼 향수도 여러 개를 사다가 기분 내키는 대로 뿌리는 것 같지만 그의 곁에서 가만히 숨을 쉬다 보면 그 노랗고 파란 향수 냄새는 어딘가로 사라져버리고 은은한 비누 냄새만 남아 코끝을 간질인다그와 나는 같은 비누를 쓰는 게 분명한데어째서인지 그에게서 나는 비누 냄새는 더 청량하고 상큼하게 느껴진다아마도 그의 체향일지도 모른다고나는 멋대로 추측하고 있었다.

쥬시마츠시작한지 얼마나 됐다고 딴생각이야?”

바로 곁에 그의 동맥이 뛰고 있는 하얗고 긴 목이 있다그 말랑해 보이는 목에 코를 박고 한참 비누냄새를 맡는 상상을 하다 고개를 들었다그가 웃으면서 내 이마를 샤프로 쿡 찍고 옆에 있던 컵을 들어 물을 마셨다나는 이마가 아픈 척 웃으며 이마를 문지르면서도 그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데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내가 당신의 친동생이었다면나도 여섯 살을 더 먹으면 당신처럼 섹시해질 수 있을까요나는 입술만 뻐끔거리며 뾰족뾰족하고 자극적인 말을 입안에서 굴렸다달고시고씁쓰름한 불량식품 맛이 났다.

 

그를 처음 만난 곳은 어머니의 결혼식장이었다아저씨는 나와 처음 만난 날부터 그를 소개하지 못해 미안해했다.

미리 만나서 인사도 하고 친해지는 게 좋을 텐데 카라마츠가 아직 학기가 다 안 끝났다고 못 온다고 하네미안하다.”

나는 착한 아들의 표정을 짓고 고개를 저었다카라마츠가 오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어머니의 얼굴에 어둠이 옅게 깔렸다어머니는 카라마츠가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애써 칭찬을 하려고 했지만 카라마츠가 어머니를 만나는 걸 거부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가엾은 어머니나는 한번 만나보지도 않은 형이 미워졌다아무리 공부를 하고 있어도 어머니에게 전화라도 하는 게 예의 아닌가요즘 세상에 외국이라고 연락이 안 되는 것도 아니고그런 아들을 둔 아저씨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버지가 죽고 난 이후로 나는 지나치게 어머니를 보호하려고 하고 있었다그건 머리로는 이해를 하고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만 하려고 한다 해도 그만둘 수 있는 게 아니었다나는 난생처음 와인을 맛보고 인상을 찌푸렸다포도 쥬스 같은 색깔을 해놓고 떫은맛이 났다아저씨는 어머니에게 먹을 걸 이것저것 권해가며 나에게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얼마든지 더 시켜도 좋다고 어색하게 웃었다아저씨는 좋은 남편이 될 수 있을까나는 다시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떫은맛은 가시질 않았다.그렇지만 아저씨에게 와인도 마시지 못하는 어린애처럼 보이고 싶진 않았다.

어머니는 나에게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워주고 싶다고 했지만 나에겐 아버지는 공석도 남기지 못하고 그 자리를 완전히 잃어버렸다나에게 아버지란툭하면 집을 나가 며칠이고 떠돌다 거지꼴이 되어 돌아오는 남자였고술을 마시면 집안을 엉망으로 뒤집어놓는 남자였다없는 게 좋았고없는 게 익숙한 아버지의 자리그리고 초등학생이면 모를까고등학교 신입생으로 들어가는 소년에게 진짜 남자로서의 롤모델은 꼭 집안에서 찾아야 하는 게 아니니까나는 간신히 와인 한 잔을 다 비웠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이었다나는 몸에 딱 맞는 정장이 어색해 넥타이를 조금 풀었다어머니는 둘 다 재혼인 만큼 결혼식은 하지 않고 그저 혼인신고만 하겠다고 했지만 아저씨가 고집을 부려 간단한 결혼식을 하게 되었다나는 그 편이 좋았다어느 날 갑자기 입적을 했다고 주변사람에게 알리는 것보다 당당하게 결혼식을 하면서 알리는 게 좋았으니까세간의 암묵적인 룰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았다어머니가 예쁜 옷을 입고 가족들을-우리 쪽의 가족들은 얼마 없지만모아놓고 어머니가 이렇게 사랑받는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어머니가 신부 대기실에 앉아있는 동안 나는 친척들과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구석에 앉아있었다피아노 앞엔 아저씨의 친척인듯한 여자가 앉아 손을 풀고 있었고나는 어젯밤 본 야구 경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비누 냄새가 났다그리고 찬바람에 하얗게 마른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네가 쥬시마츠구나?”

남자가 웃었다남자는 뛰어왔는지 머리가 바람에 흐트러져서 엉망이었고어깨에 아직도 눈이 조금 남아 있었다나는 얼떨결에 그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남자의 손이 차가웠다길쭉하고 가지런한 손가락이 손바닥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남자에게선 시원한 향수 냄새가 났다.

지금 돌아오느라 늦었어결혼 준비하는 거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제야 존재조차 까먹고 있었던 아저씨의 아들이 떠올랐다.

이제 고등학교 들어간다고 했나내가 형이었지?”

남자가 웃으면서 내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나는 그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가 머리를 만지는 대로 가만히 내버려두었다괜히 웃음이 나왔다.

 

어머니와 아저씨는 짧은 신혼여행을 떠났다나는 공항까지 따라가서 그들을 배웅했다어머니는 새 옷을 곱게 차려입고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형 말 잘 듣고 있어야 돼?”

나는 활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옆에서 그도 손을 흔들며 웃었다아저씨는 선물을 사오겠다고 하며 어머니의 손을 잡아끌었다어머니는 계속해서 나와 카라마츠를 돌아보았다어머니와 아저씨가 자동문 너머로 사라지고나는 이제 그와 단 둘이 남았다는 걸 깨달았다슬쩍 그를 돌아보니 그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다.

배고프지뭐 좀 먹을까뭐 좋아해?”

아무거나 잘 먹어요.”

나는 예의바르게 대답했다사실 아무거나 다 먹는다는 건 거짓말이었지만 음식을 가린다는 유치한 꼴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그는 잠깐 고민을 하다 근처 패스트푸드점으로 향했다.

일곱 살 때?”

그래서 그런지 어머니는 저를 장례식에도 데려가지 않고 옆집에 맡겨놨어요다 끝나고 홀가분해져서 데리러오겠다고 약속하고.”

나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틈 사이에서 그에게 아버지가 죽었을 때 얘기를 하고 있었다그와 이렇게 길게 얘기를 해본 건 처음이었고누군가에게 아버지의 무책임한 인생에 대해 애기하는 것도 처음이었다누군가 엿듣고 있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안심한 것도 있을 것이다우리가 앉은 테이블의 양 옆만 봐도 금발에 푸른 눈을 한 외국인들이 앉아있었으니까그는 두 번째 햄버거를 남김없이 먹어치우고 너겟을 먹기 시작했다나는 반쯤 먹은 햄버거를 들고 그가 또 뭔가를 물어봐주길 기대했다그와 얘기를 하겠다고 아버지를 팔아넘기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그가 동정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봐주는 게 좋았다그리고 아버지는 그 따뜻한 미소에 비교도 못할 정도로 값싼 인물이었고.

어머니께 섭섭하진 않았고?”

그의 낮은 목소리가 내 귀로 흘러들어왔다어머니가 아버지의 장례식에 나를 데려가지 않았다고 내가 섭섭했을 것이라고 해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나는 한참동안 얘기를 한다고 마른입에 콜라를 가득 머금었다가 꿀꺽 마셨다나는 혹시 내가 너무 어리광을 부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가만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진심인 것 같았다진심으로 일곱 살도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할 수 있고어머니를 위로하고 힘이 되어주고 싶어 한다는 걸 믿는 것 같아서나는 계속해서 콜라를 마셨다입이 자꾸 말랐다그의 짙고 까맣게 맑은 눈을 계속 보고 싶으면서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아닌 사람과 단 둘이 집에 남아 있다는 건 이상한 기분이었다그는 내가 어색해하는 걸 느꼈는지 아침에 같이 아침식사를 하고는 나갔다가 이른 저녁에 돌아왔다나는 현관에서 그를 배웅하고 나면 그의 방에 몰래 들어가 구경을 했다책장에는 남성 패션잡지가 한가득 꽂혀있었고어려워보이는 대학 교재들이 그보다 더 많이 꽂혀있었다세수를 하고 바르는 스킨로션도 있었고화려하고 조그만 향수들도 가지런히 놓여있었다나는 하나씩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았다그러나 그에게서 나는 비누냄새와 같은 향수는 없었다그런 비누냄새가 나는 향수가 있으면 하나 갖고 싶었는데나는 아쉬워하며 향수 뚜껑을 닫았다고등학생은 향수를 뿌리기엔 아직 어리다.그렇지만 나중에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스무 살이 되고아마도 그가 다니는 대학에 진학한다면 향수를 뿌려도 어색하지 않겠지나는 그가 나에게서 그와 같은 비누냄새를 맡는 걸 상상했다내가 그를 설레게 할 수 있을까나는 소리 나지 않게 옷장을 조심스럽게 열어 그의 옷 사이에 파묻혀 그의 냄새를 맡았다그가 나를 보면서 설렜으면 좋겠다고소원을 빌었다그의 검은 가죽 재킷과 트렌치코트와 후드에 나를 보고 나를 궁금해해달라고 속삭였다.

 

그는 집에 오면서 꼭 간식거리를 사들고 왔다나는 그의 방에서 한참을 놀다가 그가 올 시간이 되면 방을 정리해두고 거실에 나가 티비를 켜서 보고 있었던 척을 했다.그가 현관문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면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다이상한거야나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의 존재에 흔들리는 걸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쥬시마츠형 왔다!”

그는 평생 외동으로 자랐으면서 형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하고 있었다나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그의 존재를 알아챈 것처럼 웃으며 현관으로 달려가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셨어요?”

쥬시마츠말 놓으라니까?”

그가 웃으며 고개를 젓고는 손에 들려있던 케익 상자를 내밀었다유명한 체인점의 그것이 아니라 내가 들어본 적이 없는아마도 비쌀 게 분명한 제과점의 케익이었다.

저녁 먹고 디저트로 먹자!”

그는 겉옷을 벗으며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나는 케익을 식탁위에 올려놓고 발소리가 나지 않게 조용히 그의 방 문 앞으로 걸어갔다조금 열린 틈으로 그가 보였다그는 옷장을 열어 옷걸이를 꺼내 가디건을 옷장 문고리에 걸었다그리곤 내가 의미를 읽어낼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옷장 안을 한번 훑어보고그의 방을 쭉 돌아보았다나는 미친 듯이 뛰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꾹 누르며 숨을 참았다.

그러나 내가 그 짧은 찰나에 상상했던 최악의 경우와는 달리 그는 문을 등지고 돌아서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나는 몸을 돌려 부엌으로 돌아갔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나와 앞치마를 두르고 소매를 걷었다나는 착하게 웃으면서 그가 요리를 하는 걸 거들었다그는 그가 다녔던 외국대학 얘기를 해줬고,거기서 만났던 특이한 사람들 얘기를 했다나는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지만 그는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나는 조금 마음이 놓여 계란을 휘저으며 대학을 다닌다는 건그것도 외국에 있는 대학에 간다는 건 무슨 기분일지 상상했다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내가 모국어로 무슨 말을 하더라도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쥬시마츠는 전공으로 생각해둔 거 있어?”

그가 내 손에서 계란 그릇을 빼앗아가 팬에 부으며 말했다.

글쎄요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나는 사실 대학에 갈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어머니 혼자 일을 해서 나를 먹여 살리는데 어떻게 대학까지 보내달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그는 의외라는 눈빛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중에 결정하면 늦으니까 미리 진로를 생각해보는 게 좋아.”

“...형은 무슨 과에요?”

나는 경영학과.”

그럼 나도 경영학과로 가고 싶어요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와 저녁을 먹고설거지를 하고 케익을 잘라 접시에 담았다그는 씁쓸한 커피도 두 잔 내려 쟁반에 담았다.

쥬시마츠는 우유랑 설탕 넣어줄까?”

그냥도 괜찮아요.”

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그는 웃으면서 쟁반을 들고 그의 방으로 향했다나는 당연히 거실로 가서 먹거나 아니면 식탁에서 먹을 줄 알았는데혹시 나를 혼내려는 건가나는 쟁반을 대신 들 생각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그를 따라 들어갔다.

그는 책상위에 쟁반을 내려놓고 침대에 털썩 앉았다그리곤 향수를 쭉 훑다가 하나를 집어 들어 뚜껑을 열었다역시 내가 건드린 걸 안 건가나는 애써 웃으려고 했지만 입가가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게 제일 새 거니까 선물로 줄게향도 무겁지 않고 가벼우니까 몰래몰래 뿌리고 다녀.”

그의 커다란 손이 내 손목을 붙잡고 소매를 조금 걷어 올렸다그리곤 향수를 한번 뿌리고반대쪽 손목을 들어 맞대고 문질렀다상큼한 향이 났다그가 내 손목을 잡아 코끝에 대고 향을 한번 맡고 웃었다그의 입이 시원하게 호선을 그리며 웃었고 나는 그제야 그를 따라서 웃을 수가 있었다나도 손목을 들어 향을 맡았다꽃향기같은 게 났다그에게는 너무 가벼운 향이었고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향이었다그렇지만 나는 한참동안 손목을 코끝에 대고 향을 맡았다이 향수 냄새 밑에 그의 체향이 티끌만큼이라도 남아있을 것 같았다.

그는 꼭 태어날 때부터 형 노릇을 했던 것처럼 나를 앉혀놓고 그의 소지품을 하나둘씩 꺼내서 보여주며 그 중에서 제일 좋고 제일 새것인 것을 하나씩 꺼내 품에 안겨주었다그는 좋아하는 스타일의 사진을 보면 스크랩해서 모아두고 있었다취미로는 기타를 쳤고학교를 다닐 땐 야구부에 들고 싶었지만 선발테스트에서 떨어졌다고 했다그는 외국에서 가져온 조그만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 주었고 가방도 외투도 꺼내주면서 얘기를 했다형은 이런 건가.

나는 밤 열두시가 다 되어가도록 그와 웃고 떠들고 보드게임을 하다 그가 준 물건들을 한아름 끌어안고 방으로 돌아갔다부엌에서 그가 달그락거리며 설거지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아저씨가 교수로 있는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외국에는 교환학생으로 다녀왔고대학을 마치면 그 곳의 대학원으로 진학하겠다고 했다나는 그가 다녔던 고등학교에 들어갔다학교는 시골학교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넓고 세련된 곳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입학식까지 부모가 따라올 필요는 없다고 두 사람을 뜯어말렸다어머니는 꽤 서운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이제 어머니로부터 독립을 해야 된다고 느꼈기에그리고 아저씨가 그의 아들이 입었던 교복을 입은 날 보며 그의 사랑스러운 막내아들이라고 감상 젖은 눈으로 바라보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가 오겠다고 하는 것까지 말릴 수는 없었다나는 입학식 연습을 해야 된다고 모인 강당에서 탈출해 학교 정문에 서서 그가 오는 걸 기다렸다정문에서 저 멀리 지하철역까지 길이 뻥 뚫려있었고그 길을 따라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입학식 하는 날에 이렇게 빠져버리면 담임에게 찍힐게 분명했지만 나는 그가 그 꽃길을 걸어 나에게 오는 걸 보고 싶었다입학식을 하는 날이라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나는 이리저리 치이면서도 고개를 쭉 내밀고 그를 찾았다입학식이 시작할 시간이 다 되어가고사람들이 점점 줄어들었지만 그는 올 기미가 없어보였다나는 어제 어머니가 빳빳하게 다려준 교복 상의의 끝을 잡고 손을 꿈지럭거렸다안에 들어가 있으면 그가 나를 찾으러 올까하지만 나는 그에게 몇 반인지 가르쳐주질 않았고핸드폰으로 전화를 한다고 해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 틈에서 나를 찾는 건 쉽지가 않을 것이다그래도 만나기만 하면 되지 않을까그리고 나중에라도 그에게 다시 학교로 와달라고 하면 이 길을 걸어올 테니까.

단념하고 돌아서려는 찰나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저만치 멀리서 들려오는 발소리였지만 나는 귀신같이 알아듣고 고개를 들었다.

쥬시마츠!”

그가 달려오고 있었다품에는 커다란 프리지아 꽃다발을 안고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꽃잎이 날리는 그 길에 그가 있었다나는 정문을 꽉 붙잡고 그가 나에게 다가오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길쭉하게 큰 키와 긴 다리가 먼저 눈에 들어왔고아슬아슬하게 재킷에 매달린 선글라스가한 손으로 단단히 붙잡은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이 시간까지 기다린 날 보며 그가 놀랍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그의 짙은 눈썹이 보였고날카로운 코가 보였고 웃는 입이그리고 맑고 깊은 눈이 보였다아니보였다고 할 수 없다나는 그가 던지듯 품에 안겨준 프리지아의 향기를 맡으면서 그의 눈이 내 마음 어딘가에 깊이 새겨졌다고 생각했다죽을 때까지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거라고.

 

물은 삼일 만에 끊겼고전기는 사일을 버티다 끊겼다이치마츠와 카라마츠는 집밖으로 나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집안에 남은 음식들로 연명했다통조림이나 오래 먹을 수 있는 음식들보다 상하기 쉬운 것들을 먼저 먹었다물이 끊기고 나서는 생수를 목욕탕에 부어놓고 씻었지만 물은 금세 동났다지진이 난 것도 아니고 전쟁이 난 것도 아닌 조용한 도시에서 생존을 걱정하기 시작한다는 건 오묘한 기분이었다이치마츠와 카라마츠는 마지막 생수통을 탁탁 털어 마지막 물 한 방울까지 마시곤 햇볕에 잘 널었다비가 오면 빗물을 받아 수돗물 대신 쓸 수 있을 것이다이치마츠와 카라마츠는 이제 집 밖으로 나가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카라마츠는 쌍안경을 들고 발코니로 나가 한참 골목을 돌아보았다아무도 없었다이치마츠는 편한 옷을 챙겨 입고 커다란 배낭을 찾아 멨다카라마츠도 배낭을 찾아 메고 손수레를 집어 들었다가 아차하고 이치마츠에게 넘겨주었다.

?”

이치마츠가 운동화 끈을 단단히 조여 묶다가 물었다.

혹시 공격받을지도 모르니까?”

카라마츠는 쥬시마츠의 알루미늄 야구배트를 챙겼다그리고 잠깐 고민하는 것 같더니 부엌으로 가 식칼을 들고 현관으로 걸어왔다칼날이 번뜩거리는 걸 보고 이치마츠는 고개를 돌렸다카라마츠는 식칼을 허리춤에 어떻게 고정을 시키곤 이치마츠의 옆에 걸터앉아 신발을 신었다.

거리는 그들이 마지막으로 나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했다이치마츠는 배낭을 꽉 붙잡고 서서 카라마츠가 나오길 기다렸다가 카라마츠의 손을 잡았다집밖에서 다시 손을 잡고 있으려니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그들을 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카라마츠도 이치마츠의 손을 꼭 잡았다고양이도 없고참새도 없고심지어 쥐도 한 마리 보이지 않는 조용한 골목이었다.

둘은 슈퍼마켓을 향해 걸었다마시고 몸을 씻을 때 쓸 물을 좀 가져오고라면이니 통조림이니 하는 것들이 아닌 좀 신선한 것을 먹고 싶었다이치마츠는 아삭한 배의 식감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배가 있을까카라마츠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카라마츠도 먹는 걸 좋아했고마음이 급했겠지그러나 상가 골목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뭔가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둘은 나는 듯 빠르게 걸어가다 상가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기 전에 벽에 몸을 숨기고 조용히 골목을 내다보았다.

저번에 봤던 것보다 사람껍질을 한 것들의 수가 줄어있었다그리고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고이치마츠는 헛구역질이 나려는 것을 참고 입을 막았다저번에 보았을 때는 그 사람들이 느긋하게 드러누워 있거나 햇볕을 피해 숨어있었는데지금은 엉거주춤하게 골목을 배회하며 뭔가를 찾는 듯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뭘 찾는 거?”

카라마츠가 작게 속삭였다이치마츠는 고개를 더 내밀고 안쪽을 들여다보았다가게에 쌓여있던 과일이며 야채들의 찌꺼기가 길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다아마도 이 골목에 머무르는 무리들은 먹을 수 있는 것들을 모조리 먹어치우고 새 먹이를 찾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새 먹이는 뭘까이치마츠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사람이 사람의 생살을 뜯어먹을 수 있을까?”

이치마츠가 물었다카라마츠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 줄을 놓아버리면 못할 건 없지 않을까?”

다른 집을 털어볼까물이나 비상식량 같은 건 쌓아두고 있잖아보통.”

좁고 격리된 공간에서 공격당하는 것 보단 밖이 낫지.”

카라마츠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맞는 말이었다.

아니면 저 뒤쪽에 작은 슈퍼 쪽으로 가볼까?”

아냐발코니에서 봤을 때 거긴 셔터를 다 내려뒀더라고못 들어갈 거야.”

방법이 없었다이치마츠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구름 한  이 맑은 날이었다이 도시 어딘가에 이치마츠와 카라마츠 같은 조난자들이 남아 있을까?만약 혼자 남아있다면 이미 죽어버렸을까무섭고 외로워서 산체로 뜯어 먹히는 걸 선택했을까아니면 조용히 목을 맸을까카라마츠가 허리춤에서 식칼을 꺼내 이치마츠에게 건네주었다.

여차하면 눈 꼭 감고 찔러버려.”

이치마츠가 마른 침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카라마츠는 소매를 걷어 올리고 야구배트를 고쳐 쥐었카라마츠가 앞장서서 천천히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손수레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조용한 골목 안을 울렸다그 순간골목 안에 있던 것들이 전부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이치마츠는 놀라 헉하고 숨을 들이마셨다다들 이상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옷을 반쯤 벗은 사람도 있었고오물에 뒤덮인 것 같은 꼴을 한 사람도 있었다손 하나가 떨어져나가 허전한 팔을 휘두르며 어기적거리고 걷던 사람이 고개를 돌려 이치마츠와 카라마츠에게 한발자국 다가왔다.

그리고 카라마츠가 야구배트를 있는 힘껏 휘둘러 전봇대를 후려쳤다쇳덩이가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귀를 찔렀다손 엄청 아프겠는데소리에 놀랐는지 사람들이 뒷걸음질 치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카라마츠는 전봇대를 시작으로 마트 앞에 도착할 때까지 배트로 계속해서 큰 소리를 냈다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뒤에 바짝 달라붙어 그를 따라갔다.

마트 입구엔 쓰레기가 산처럼 쌓여있었다아마도 이치마츠는 저번에 편의점 안에서 봤던 사람들의 흔적을 떠올렸다봉투를 뜯는 법은 모르고 무작정 힘으로 봉투를 뜯어 안에 든 것들을 먹어치웠었지카라마츠는 먼저 마트 입구에 서서 숨을 가다듬더니 문 옆을 배트로 후려치며 요란하게 소리를 냈다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놀란 표정을 한 사람 몇이 마트 바깥으로 튀어나왔다그들이 이치마츠의 코앞을 스쳐지나가서 이치마츠는 놀라 뒷걸음질 치다 넘어졌다카라마츠도 뒤로 물러나 이치마츠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이렇게 가까이에서 그들을 본 건 처음이었다그들의 뒤로 퀴퀴한 냄새가 남았고팔에 소름이 돋았다.

칼 계속 들고 있어야 돼안 나온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

카라마츠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안으로 들어갔다이치마츠는 그들을 사람이라고 지칭하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마트 안에서 썩는 냄새가 났다이치마츠는 입으로 숨을 쉬려고 안간힘을 썼다그들과 비슷한 때에 전기가 끊겼다면 끊긴지 제법 오래되었을 거그러면 고기나 야채두부 같은 것들도 모조리 썩어버렸을 것이다카라마츠는 일단 라이터를 한 움큼 들어 주머니에 쑤셔 넣고 안으로 들어갔다예상대로 야채와 과일들은 썩어 문드러져있었다이치마츠는 상자채로 썩어버린 배 앞을 지나치지 못하다 카라마츠가 소매를 잡아끌어 겨우 발걸음을 옮겼다야채와 과일생선 코너는 황급히 지나쳤고그들은 라면과 국수레토르트 식품과 통조림을 배낭에 담았다손수레에는 물을 가득 실었다뭔가 다른 걸 먹고 싶었는데 선택의 폭이 너무 좁았다이치마츠는 낑낑거리며 손수레를 끌고 가다 마트 안쪽엔 창고가 있다는 게 떠올랐다.

마트 안쪽에 창고가 있어.”

창고?”

카라마츠가 독한 술을 집어 들면서 물었다.

거기에 다른 물건이 있을지도 몰라.”

카라마츠는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이미 그들의 배낭과 수레는 무거웠고들고 가기 힘들 정도로 물건을 많이 가지고 나가면 갑자기 공격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반격하기 힘들 것이다그렇지만 이치마츠는 창고 안쪽을 확인해보고 싶었다예전에 어머니를 따라 장을 보러 왔을 때 안에서 직원이 물건을 들고 나오는 걸 본적이 있었다아득하리만치 오래된 것처럼 느껴졌다창고는 손잡이를 아래로 내려 여는 문이었다저 사람은아니 짐승들은하여간에 저것들은 들어가지 못했을 것 같았다이치마츠는 손수레를 놓고 카라마츠를 향해 손짓했다카라마츠는 고개를 끄덕이고 맥주병 하나를 옆 기둥에 부딪쳐 깨뜨렸다파삭하는 소리가 나고 맥주가 줄줄 흘러나왔다.

터프하네.”

이치마츠가 자기도 모르게 웃으며 말했다카라마츠도 씩 웃으며 바닥이 깨져 뾰족하게 위협적인 무기가 된 맥주병을 칼처럼 휘둘러 보였다웃는 것도 간만이었다.

이치마츠는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내려 문을 열었다안에는 빛도 하나 없이 어두웠고카라마츠는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켰다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불꽃이 켜졌다.

그 순간캬아아악!!! 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고이치마츠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카라마츠가 먼저 손을 뻗었다라이터는 바닥에 떨어져 잠깐 타오르다 꺼졌다누가 새된 소리로 작게 신음소리를 흘렸고바닥으로 쓰러졌다.

카라마츠!”

이치마츠가 놀라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손으로 바닥을 더듬었다축축한 액체가 만져졌다설마설마 카라마츠가어둠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고이치마츠는 혹시 가까이서 보면 조금이라도 보일까 싶어 손을 앞으로 뻗었다그때이치마츠의 어깨에 무거운 손 하나가 얹어졌다.

가자.”

카라마츠의 목소리였다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카라마츠였다이치마츠는 왈칵 눈물이 날 것만 같아 카라마츠의 손을 붙잡았다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손을 잡아 창고 바깥으로 빠져나갔다카라마츠는 창고 문을 열고 이치마츠를 먼저 내보냈다이치마츠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다시 어둠속에 잠기는 창고 안쪽을 흘깃 보았다.작은 손이 보였다가창고 문 너머로 사라졌다.

카라마츠는 창고 바깥으로 나와 문을 닫고선 문에 기대 스르륵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카라마츠의 손에 피가 엉망으로 묻어있었다이치마츠는 자기도 모르게 카라마츠의 손을 붙잡았다카라마츠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이치마츠는 옷 상의로 카라마츠의 손에 묻은 피를 문질러 닦았다카라마츠의 피가 아니었다이치마츠는 배낭을 내려놓고 윗옷을 벗어 카라마츠의 얼굴과 목손에 튄 검붉은 핏방울을 닦아냈다손이 떨려 자꾸 옷을 놓쳤다카라마츠의 눈동자가 힘없이 이치마츠의 손을 따라 움직이다 이치마츠가 결국 옷을 떨어뜨리자 이치마츠의 손을 잡아 당겨 안았다카라마츠는 떨고 있었다이치마츠의 맨 목과 가슴에 카라마츠의 마른 숨이 닿았다울지는 않았지만 울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내가 창고에서 뭘 보고 싶어 했던 거지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어깨를 끌어안고 토닥거렸다창고 안에 뭐가 있을 거라고 기대한 거야?쓰레기새끼카라마츠의 옷 뒤쪽에 누군가 피 묻은 손으로 움켜잡은 흔적이 남아있었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윗옷을 벗겨 손에 둘둘 말았다그리고 카라마츠에게 손수레를 맡기고카라마츠가 했던 것처럼 야구배트로 전봇대 같은 곳을 후려치며 큰 소리를 냈다야구배트가 부딪칠 때마다 이치마츠의 팔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왔다카라마츠는 말없이 손수레를 끌고 따라왔다이치마츠는 차마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그저 손수레 바퀴가 구르는 소리를 듣고 카라마츠가 따라오고 있음을 짐작했을 뿐.

 

이치마츠는 뒷마당 한 구석을 파 안에 말라죽은 나뭇가지를 좀 뜯어 넣고 불을 붙였다불이 적당히 타기 시작하자 냄비에 쌀과 물을 넣어 구덩이 위에 얹었다.

카라마츠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물을 한 병 들고 욕실로 들어가더니 나올 생각을 하질 않았다이치마츠는 욕실 문 앞에 앉아 카라마츠가 나오길 기다리다 가져온 물건들을 정리해 부엌 한 구석에 쌓았다그리고 카라마츠가 벗어서 밖에 내놓은 옷에 핏자국이 있는지 꼼꼼히 살펴보고핏자국을 발견하면 칼로 긁어냈다까맣게 말라붙은 핏자국을 긁어내면서이치마츠는 지금 그가 칼로 긁고 있는 것이 자신의 목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이치마츠와 카라마츠만 세상에 남은 이후로 처음 느끼는 자기혐오였다.

쌀은 밥보다는 미음 같은 것이 되었다이치마츠는 그래도 그걸 그릇에 덜고구덩이의 잔열로 레토르트 카레를 데웠다뜨뜻미지근한 온도에서 더 데워지질 않아 포기하고 그릇에 담았다카라마츠는 여전히 욕실에서 나오지 않았다이치마츠는 커다란 타월과 카라마츠의 속옷그리고 얇은 옷을 가지고 나와 문을 두드렸다.

카라마츠.”

“....”

카라마츠도 문 앞에 기대있었는지 바로 앞에서 대답이 들렸다.

밥 먹자.”

.”

문이 천천히 열렸다카라마츠는 욕실 창문의 블라인드도 다 내리고 어두컴컴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있었던 것 같았다몸이 차게 식어있었다이치마츠는 타월을 펼쳐 카라마츠를 감싸고대충 얼굴과 머리의 물기를 닦아내고 속옷을 내밀었다카라마츠는 얌전히 이치마츠가 시키는 대로 옷을 입었다.

 

꾸역꾸역 밥을 먹고 카라마츠는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둘만 남게 된 이후로 처음으로 카라마츠가 먼저 떨어져 있으려고 하는 것이었다이치마츠는 거실에 앉아 습관처럼 티비를 켜려고 리모컨을 들었다그러나 티비는 켜지지 않았고거실 베란다에 조금 열린 틈으로 작게 바람이 불어와 이치마츠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평소와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오후였다이치마츠는 어서 밤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카라마츠가 얼른 잠에 빠져들어 모든 걸 잊어버릴 수 있다면 좋을 거야이치마츠는 고개를 돌려 베란다 바깥을 보았다해가 조금 진 것 같았다.

아니카라마츠는 잠들지 못했다이치마츠는 카라마츠가 헛구역질 하는 소리에 잠이 깨 방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카라마츠는 어두운 화장실에서 변기통을 붙잡고 나오지도 않는 것을 토해내느라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었다.

카라마츠.”

카라마츠가 옆에 있던 생수병으로 입을 씻었다가다시 구역질을 시작했다이치마츠는 화가 났다자기 자신에게 나는 화였다이치마츠는 현관으로 걸어갔다신발장 위엔 말끔한 식칼이 얌전히 놓여있었다이치마츠는 식칼을 집어 들어 단단히 쥐고 문 바깥으로 나갔다.

 

오래 걸리지 않아서 다행이었다이치마츠는 손에 든 것을 다시 고쳐 잡고 집을 향해 걸어갔다카라마츠가 문 앞에서 쩔쩔매면서 이치마츠를 찾고 있었다그러다 이치마츠를 발견하고달려와 이치마츠의 멱살을 잡았다.

이치마츠그렇게 나가버리면 걱정하잖아!”

사냥을 했어.”

?”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손을 잡아끌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손에 들린 것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이치마츠는 손에 든 것을 질질 끌면서 뒷마당으로 나갔다카라마츠가 보기 힘들어할 머리나발 같은 건 다 잘라서 내버리고 왔으니 좀 덜할 것이다.

카라마츠가 이치마츠의 멱살을 잡았다.

누가 너보고 이런 짓 하래이러면 내가 죄책감이 덜해질 것 같아?”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손을 뿌리치고 칼로 사냥감의 목에서 배까지를 길게 잘랐다도살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그렇지만 대충 이렇게 하지 않을까하고 이치마츠는 뼈를 따라 고기를 잘라냈다.

이건 고기야.”

이치마츠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짐승을 잡았고.”

내장이 바깥으로 우르르 쏟아졌다.

나는 사냥을 했어.”

카라마츠가 이치마츠의 등 뒤에 주저앉아 이치마츠의 허리를 끌어안았다그리곤 곧 엉엉 소리 내며 울기 시작했다이치마츠의 등이 뜨끈하게 젖어왔다이치마츠는 달빛을 받으며 고기를 썰어냈다내장은 금방 썩을 테니까 내일 해가 뜨면 바깥에 버리고 오고고기는 훈제를 하든 뭘 하든 먹을 만한 것으로 보이게 만들자비릿한 피냄새가 났다이치마츠는 아까 뱃속에 든 것을 모조리 토해버리고 와서 그런지 신물이 올라왔다

해가 지기 시작했다이치마츠는 걷는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길을 따라 늘어서있는 가로등에는 하나 둘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지만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빌딩들은 꼭 커다란 기둥처럼 그저 어두운 침묵을 하고 있었다카라마츠는 그들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입을 열었다.

이제 돌아갈까?”

이치마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대로변에는 가로등이 켜져 있어 앞이 보이긴 하지만 여기서 조금이라도 옆으로 벗어나면 캄캄하게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이치마츠는 낮에 본 시체를 떠올렸다그들은 여전히 잠옷차림이었고애초에 평범한 고등학생은 무기를 쓸 줄 모르는 게 정상이었다카라마츠는 눈을 조금 찌푸리고 도로의 표지판을 읽었고이치마츠는 주변을 둘러보다 주먹만한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이걸 누군가에게 던질 수 있을까이치마츠도 남자애니만큼 형제들과 치고 박고 싸워본 적이 있었지만 자신을 해치려고 하는 상대방을 죽일 각오를 하고 덤벼본 적은 없었다카라마츠가 이치마츠를 돌아보며 손짓을 하자 이치마츠는 손에 든 돌멩이를 등 뒤로 숨기고 걸어갔다.

해가 지기 전에 들어가야 했었는데너무 늦어버렸네.”

카라마츠는 걱정스럽다는 얼굴을 하고 이치마츠의 손을 잡았다이치마츠는 얌전히 그 손을 잡고 걸었다풀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이치마츠는 이 풍경을 글로 써야 한다면 어떻게 묘사할지를 상상하며 걸었다가로등 너머로 불 꺼진 건물들은 꼭 거대한 장벽 같았고저 벽들의 핏줄 같은 골목 사이사이에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사람 아닌 것들이 숨어 이치마츠와 카라마츠를 노리고 있을지도 몰랐다텅 빈 사무실과 텅 빈 가게들텅 빈 집들카라마츠는 무슨 소리라도 나면 고개를 돌리고 혹시 사람이 있지는 않은지 한참을 노려보았다하지만 사람은 없었다.

아까 그미친 것 같은 사람들도 결국엔 사람이니까 낮에 돌아다니고 밤엔 잠을 자지 않을까?”

이치마츠가 물었다카라마츠는 잠깐 생각을 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그 사람들도 해가 지면 보이지 않을 거고그럼 힘들겠지.”

조금 안심이 됐다고 하면 너무 순진한 생각일까이치마츠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두 사람은 다시 한참을 걸었다아마도 이치마츠가 살아오면서 이렇게 긴 거리를 걸었던 적이 없었을 것이다사람이 자리를 비운 곳들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는 있었지만한참동안 긴장을 했던 터라 피곤하고 다리가 축축 처졌다카라마츠도 그런 것 같았다카라마츠는 잠이 오는 건지 눈을 비비다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있잖아어머니랑 아버지랑 다른 형제들이아까 우리가 봤던 그 사람들처럼 되어버렸으면..... 그럼 어떡하지?”

이치마츠는 입을 꾹 다물었다이치마츠가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던 생각이었다만약에정말로 만약에 어머니랑 아버지가 아까 그 짐승들같이 되어버렸으면그걸 어머니와 아버지라고 불러도 될까그리고 이치마츠와 똑같은 얼굴을 한 형제들이 다른 사람을 해치는 걸 보면 이치마츠는 그들을 경멸하지 않을 수 있을까?

카라마츠는 이치마츠가 대답하지 않아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을 한 모양이었다카라마츠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뭔가 북받쳐 오르는 듯 숨을 고르려다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이치마츠의 손을 놓지는 않았지만카라마츠는 잠옷 소매를 당겨 눈가를 문질렀다이치마츠도 덩달아 눈물이 날 것 같았다이렇게 하루 종일 텅 빈 도시를 걸었는데도 이치마츠와 카라마츠 단 둘만 남았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꼭 거대한 몰래카메라 방송에 말려든 것 같았다하지만 카라마츠가 가족들의 부재를 슬퍼하고 걱정하며 울기 시작하자 이치마츠는 그제야 그들을 보호하고 있던 거대한 방어막이 산산조각 났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이치마츠는 손에 들고 있던 돌멩이를 툭 떨어뜨리고 바지에 손을 슥 닦았다그리고 카라마츠와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카라마츠를 끌어안았다카라마츠는 놀랐는지 잠깐 굳었다가 이치마츠의 허리를 끌어안고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이치마츠도 눈앞이 부옇게 흐려지려고 하는 걸 눈을 깜빡거리면서 참았다어디선가 오소마츠가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그러면 이치마츠는 오소마츠의 멱살을 잡고 이 미친놈이 무슨 장난을 친 거냐고진짜 놀라서 죽어버릴 뻔 했다고 화를 낼 수 있을 텐데하지만 이치마츠가 아무리 어두운 골목을 노려보아도 오소마츠는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가는 쪽인 상가 골목에선 가로등이 전부 꺼져있었다이치마츠는 낮에 본 것들을 떠올리고 이를 악물었다가로등이 켜져 있는 쪽으로 돌아갈까 하고 둘러보았지만 그들의 집이 있는 블록 자체가 전부 어둠에 휩싸여있었다카라마츠도 목을 쭉 빼고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여기가 그들이 전깃불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구간이었다.

길은 다 알고 있지?”

카라마츠가 쭈그리고 앉아 자기 신발 끈을 고쳐 매고이치마츠의 신발 끈을 다시 묶어주었다.

집까지 달려가자.”

무섭냐?”

엄청.”

카라마츠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이치마츠는 여기서 자기가 무섭다는 걸 인정해버리면 그게 겁쟁이일지 아닐지를 생각해봤지만 별 의미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상가 건물에 가려 꼭 영화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깔려있었다이번엔 이치마츠가 먼저 카라마츠에게 손을 내밀었다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손을 꽉 붙잡고이치마츠가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전에 먼저 그 어둠속으로 뛰어들었다이치마츠는 하마터면 넘어질 뻔 했고겨우 카라마츠의 뒤를 쫓아 달렸다카라마츠의 손이 축축해졌지만 이치마츠는 놓지 않았다달빛에 언뜻 가게들의 외관이 보일 듯 말 듯 하며 스쳐지나갔다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들렸다등골이 오싹해졌다다들 자고 있을까어디선가 가족들이 누군가를 해치고 있진 않을까아니면 가족들을 누군가가 해치고 있진 않을까짐승 같은 섹스는 잊어버리려고 이치마츠는 기억 속에서 장면을 밀어냈다카라마츠는 정말로 빨랐다이치마츠는 헉헉거리면서 카라마츠의 속도에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왼쪽으로 꺾는다!”

카라마츠가 소리를 지르며 코너를 돌았다이 골목에도 가로등은 꺼져있었다그렇지만 이 골목의 끝에는 집이 있다이치마츠는 옆구리가 욱신욱신 아파오고 종아리가 당기면서 발이 터질 것 같았지만 꾹 눌러 참고 달렸다누군가 이치마츠의 발목을 낚아챌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죽을 것 같았다카라마츠도 무섭겠지이치마츠는 고개를 들어 카라마츠의 뒤통수가 있을법한 곳을 바라보았다카라마츠도 무섭겠지만 이치마츠가 그저 달리기만 하면 되도록 이치마츠를 잡아 이끌어주고 있었다이치마츠는 눈을 감았다카라마츠가 급정거를 하고선 대문 안으로 이치마츠를 밀어 넣었다.

지옥 같은 레이스가 끝났다카라마츠는 현관문을 잠갔고이치마츠는 신발도 벗지 않고 드러누워 숨을 골랐다잠옷 윗도리가 흠뻑 젖어있었고얼굴에도 차게 식은땀이 흘렀다카라마츠가 잠옷 상의를 벗어 얼굴을 닦았다.

우리 문 열어놓고 나갔나?”

이치마츠가 헐떡이며 물었다순간 정적이 흘렀다문을 열어둔 사이에 누군가 집 안으로 들어왔었다면카라마츠가 다시 현관문을 확인하고 불을 켰다.

집 안은 조용했다이치마츠와 카라마츠는 말 한마디 없이 옆에 놓여있던 쥬시마츠의 야구배트를 집어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심장이 다시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현관에서 가장 가까운 방부터 문을 열고불을 켰다아무도 없었다부엌에도거실에도그들이 자는 방에도화장실에도골방에도안방에도아무도 없었다이치마츠와 카라마츠는 발코니까지 확인을 하고 난 다음에야 야구배트를 떨어뜨렸다그들이 집에서 나갔을 때와 똑같은 풍경이었다밝은 전등불을 켜놓고 있으니 살 것 같아서 이치마츠는 땀에 젖어 불쾌하게 달라붙는 잠옷을 벗어 방구석으로 내던졌다.

그때 현관문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설마 가족들이 돌아온 건가이치마츠는 한걸음에 현관문으로 달려가 문을 잡았다그러나 카라마츠가 한 발 더 빨랐다카라마츠는 오만상을 쓰고 이치마츠를 뒤로 밀쳐내더니 현관문에 귀를 대고 소리를 들었다.

뭐야!”

덜컹거리면서 문을 열려고 하는 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그렇지만 사람의 말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카라마츠는 한참동안 현관문에 귀를 기울이다 옆에 있던 신발장을 밀어 문을 막았다.

이치마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카라마츠는 말없이 방을 돌며 불을 껐다다시 집이 어둠속에 잠겼다이치마츠가 자리에서 일어나 우물쭈물하며 서있자 어디선가 카라마츠가 나타나 이치마츠의 손을 잡아끌었다.

땀에 젖었으니까 씻자.”

지친 목소리였다이치마츠는 고개를 끄덕이며 카라마츠를 따라 걸었다현관문 너머도 다시 조용해졌다.

 

잠을 자고 일어나도 꿈은 끝나지 않았다이치마츠가 눈을 떴을 땐 카라마츠가 어제보다 더 달라붙어 잠을 자고 있었다어제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탓에 일어나서 뭔가를 먹고 싶었지만 이치마츠는 일어나지 않고 가만히 카라마츠가 자는 얼굴을 바라보았다살짝 흔들어보았지만 카라마츠는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이치마츠는 어제 카라마츠가 현관문에 귀를 기울이던 걸 떠올렸다목욕을 하고 나서 이치마츠는 새 잠옷으로 갈아입고 이불을 덮자마자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는데 카라마츠는 아마도 주변을 살피다 간신히 눈을 붙였을 것이다이치마츠는 이불을 끌어당겨 카라마츠의 목 끝까지 이불을 덮어주었다.

먼저 일어날 수가 없었다만약 카라마츠가 혼자 잠에서 깨어나면 죽을 만큼 무서울 것이다어제 이치마츠가 빈 도시를 걸었을 때처럼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붙어 다시 잠을 청했다.

 

이치마츠와 카라마츠는 아침에 잠에서 깨서 밤에 눈을 감을 때까지 하루 종일 붙어 다녔다어색하다고 느낄 틈도 없었다삼일 째 되는 날까지는 세상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눈을 떴지만지금은 눈을 떴을 때 다른 하나마저 사라지지 않았을까 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눈을 떴다이치마츠는 잠에서 깨면 곧바로 팔을 뻗어 카라마츠가 옆에 있는지 확인을 했다카라마츠도 마찬가지였다둘은 함께 식사를 하고함께 씻고함께 잠자리에 들었다일주일이 지난 다음부터는 밤마다 악몽을 꿨다고기를 뜯다 고개를 돌려보니 아버지의 다리였던 꿈을 꾸기도 했고괴물 같은 얼굴을 한 형제들이 그의 뒤를 쫓아와 밤새 달리는 꿈을 꾸기도 했다카라마츠가 사라져 텅 빈 방에서 깨어나는 꿈을 꾸는 날에는 눈물에 베개가 푹 젖어 잠에서 깼다말하는 법을 잊어버리진 않았을까 싶어 쉰 목소리를 억지로 내어 카라마츠를 불렀다그러면 카라마츠는 부스스 일어나 이불로 대충 이치마츠의 얼굴을 닦아주고 이치마츠를 끌어당겨 안았다이치마츠는 한쪽 팔로 카라마츠를 있는 힘껏 끌어안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이 온기를 잃는 게 무서웠다.

두 사람은 한참동안 멍하니 앉아있었다이치마츠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이불을 덮고 카라마츠 몰래 손바닥을 맵게 꼬집었다아팠다이치마츠는 손바닥이 얼얼해질 때까지 손톱 끝으로 살을 꼬집었다꿈이 아니란 게 실감나지 않았다카라마츠는 마른세수를 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이치마츠에게 손을 내밀었다.

밤새 지진 같은 게 일어나서 다들 대피한 걸 수도 있지 않을까일단 나가보자.”

그랬으면 우릴 남겨둘 리가 없지 않아그렇지만 이치마츠는 대답하지 않고 카라마츠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카라마츠의 손이 축축했다.

거리엔 아무도 없었다이치마츠는 카라마츠보다 한 발자국 앞서 걷다가 오싹한 기분이 들어 아무렇지 않은 척 카라마츠와 나란히 걸었다거리에선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인기척도 없었고이치마츠가 평소 먹이를 챙겨주던 고양이들도 보이지 않았다살아있는 것들은 다 없어져버린건가 싶다가도 거리에 나무들이 남아 있는걸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한참을 걸었다그들이 한 평생을 살아온 골목이었다이 집엔 누가 살고저 집엔 누가 살다가 이사를 갔고이 상가 건물에는 누가 살다가 이사를 갔고다른 사람에게 별 관심이 없는 이치마츠도 줄줄 읊을 수 있을 만큼 익숙한 골목이었다그러나 살아있는 것의 기척이 없는 거리는 너무도 낯설었다이치마츠는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무성영화를 보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말도 없이 걷다보니 저 앞에 상가 거리가 보였다저 골목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지면 편의점이니 슈퍼마켓이니 하는 것들이 모여 있었다이치마츠는 주머니에 뭘 사먹을 돈이 있는지 주머니를 만져보다 그들이 잠옷을 입고 나왔다는 걸 깨달았다카라마츠도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이치마츠처럼 주머니를 만져보고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이치마츠를 돌아보았다이치마츠는 괜히 오기를 부리고 싶었다.

아무도 없으면 그냥 가게를 털어버리지 뭐.”

가게를 털어? CCTV에 찍힐 텐데?”

그래도 보는 사람도 없는 걸게다가 그 정도 훔친다고 감옥 안가.”

카라마츠가 당황한 얼굴을 했다그걸 보니 이치마츠는 기분이 좀 좋아져서 빠르게 걸었다편의점에서 먹을 걸 좀 훔친다고 해도 고등학생이면 초범으로 끝날 거고나중에 부모님이 대신 계산을 해주러 오실 수도 있는 거니까편의점 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뭘 먹을까이치마츠는 달달한 군것질거리를 먹을지 아니면 식사대용으로 먹을 수 있는 걸 고를지 고민을 하며 문을 열었다.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뭔가 질척질척하게 미끄러지는 소리가 들렸고헉헉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사람이 있는 건가부상당해서이치마츠는 급히 편의점 안쪽으로 달려갔다.

두 사람이 있었다이치마츠는 그 중 하나와 눈을 마주치고 그 자리에 묶인 듯 굳어버렸다아니눈이 마주치긴 했나이치마츠는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여자의 엉덩이에 성기를 박고 있는 남자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이치마츠가 야한 책이나 야한 비디오 같은걸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건 아닌데지금 이치마츠의 눈앞에서 섹스를 하고 있는 남녀는 사람으로 보이질 않았다두 사람은 새된 비명소리를 지르기만 할 뿐 사람의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무엇보다 이치마츠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들을 보고 있어도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꼭 이치마츠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속이 메슥거렸다두 사람은 이치마츠가 동네에서 몇 번 마주쳤던 사람들이었고그 중에 하나는 이미 결혼을 한 사람이었다아이를 품에 안고 나와서 아이스크림을 사주는 걸 본거 같은데이치마츠는 뒷걸음질을 치다 실수로 매대에 전시되어 있는 통조림들을 떨어뜨렸다바닥에 통조림 대여섯 개가 떨어지며 우당탕하고 큰 소리가 났는데도 두 사람은 이치마츠를 돌아보지 않았다사람이 아니다이치마츠는 위액이 올라오려는 걸 꾹 참고 입을 막았다저들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안에 든 건 사람이 아니다만약 저 사람들이 이치마츠와 카라마츠를 제외하고 이 마을에 남아있는 유일한 인간이면 어떡하지이치마츠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치마츠다른 사람이 있어?”

카라마츠였다카라마츠가 어느새 이치마츠가 있는 편의점 안쪽까지 찾아와 이치마츠의 팔을 잡았다이치마츠는 꼭 마법이 풀린 것처럼 카라마츠의 팔을 잡고 자리에 주저앉았다카라마츠가 놀라 이치마츠를 붙잡고서 곁을 돌아보았다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손을 붙잡고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애썼다.

“...봤어?”

카라마츠가 그 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이치마츠는 고개를 끄덕였다카라마츠도 이치마츠와 똑같이 느낀 모양이었다카라마츠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그쪽에서 고개를 돌렸고이치마츠의 손을 단단히 잡고 편의점 밖으로 달려 나갔다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손에 잡혀 끌려 나가면서 편의점 바닥에 빵이나 케이크과일 같은 것들의 봉지가 마치 비닐 포장을 처음 본 사람이 마구잡이로 뜯어 간신히 안에 든 내용물을 먹은 것처럼 엉망이 되어 바닥에 널려있는 것을 보았다.

카라마츠는 편의점 문 밖으로 나와 이치마츠의 손을 놓고 숨을 골랐다카라마츠는 꼭 달리기를 한 사람처럼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상체를 수그리고 숨을 쉬다 카라마츠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사람들이 정신병자일지도 모르는데 그걸 멍하니 보고만 있어도망쳐야 될 거 아냐!”

카라마츠는 정말로 화가 나 있었다카라마츠가 진심으로 화내는 건 거의 이삼 년 만에 보는 것 같아 이치마츠는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카라마츠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 사람들이 공격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지금 부모님도 안계시고 근방 이웃들도 없는데!”

카라마츠의 눈에는 아직 그들이 사람으로 보였던 건가부모님은 가끔 집을 비우거나 하면 오소마츠와 카라마츠를 불러다 부모님이 없으면 형들이 동생들을 잘 챙겨야 한다고 당부하곤 했다장남과 차남을 따로 부르긴 했지만 동생들이 충분히 들을 수 있는 거리였다그러면 오소마츠와 카라마츠는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하지 마시라며 부모님을 배웅했고그런 날이면 이치마츠는 이상하게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동갑내기 쌍둥이들인데 몇 분 먼저 태어났다고 부모노릇을 대신 할 수 있어오소마츠는 부모님이 신신당부를 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 같았지만 카라마츠는 달랐다어설프게 저녁을 차려서 형제들과 나눠먹고아침엔 제일 먼저 일어나 다른 형제들을 깨웠지.

카라마츠는 지금도 자기가 엄마처럼 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이렇게 둘만 남았는데이치마츠는 놀란 것보다 카라마츠가 화난 표정으로 이치마츠가 잘못했다는 대답을 하길 기다리는 게 싫었다이치마츠는 카라마츠를 노려보다 앞서 걸었다골목의 가게들은 열려 있었다그러나 평소와는 다르게 누군가 엉망으로 어질러놓은 쓰레기가 가득했고군데군데 사람의 배설물로 보이는 것도 널려 있었다이치마츠는 과일가게 문 밖으로 사람의 발이 하나 튀어나와 있는 걸 보고 멈췄다카라마츠가 순식간에 따라와 이치마츠의 팔을 잡았다이치마츠는 카라마츠가 뭐라고 말을 하기 전에 그 발을 가리켰다손가락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카라마츠는 무의식적으로 이치마츠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발은 핏기가 하나도 없이 그냥 그 자리에 툭 튀어나와 있었다이치마츠는 작은 발톱동그란 발뒤꿈치복사뼈를 하나씩 훑어보다 너덜너덜하게 찢어진 발목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이치마츠의 팔을 잡은 카라마츠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누가 저 발의 주인을 해쳤을까이치마츠는 햇살이 눈부셔 눈을 찌푸리고 카라마츠를 돌아보았다카라마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이번엔 내 차례네이치마츠는 자신이 시체를 보는 것보다 짐승 같은 섹스를 보는 게 충격이 더 큰 건지아니면 처음 그런걸 보고 놀라 시체를 봐도 충격이 덜한 건지 고민하며 카라마츠의 손을 잡아끌었다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손에 끌려 나오면서도 안색이 돌아오질 않았다.

돌아갈까?”

이치마츠가 물었다하지만 카라마츠는 고개를 저었다.

멀쩡한 사람이 우릴 찾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집에서 멀리 떨어지지는 말고 돌아보자.”

아무도 없을 것 같은데그렇지만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손을 잡고 계속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시커먼 고등학생 둘이 손을 잡고 걷는다니 징그러워 보이겠지만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이 손을 놓아버리면 순식간에 혼자가 되어 버릴 것 같았다카라마츠도 이치마츠의 손을 아프도록 꼭 잡았다이치마츠는 손에 피가 통하질 않아 저릿하게 아파왔지만 손을 빼지 않았다.

한낮의 햇살이 푸석하게 메마른 거리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이치마츠는 자기 쪽의 상가들을 계속해서 훑어보았지만 산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간혹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면 텅 빈 눈을 한 사람이 반쯤 벗은 차림새로 아무렇게나 누워있었다그런 사람이 네다섯 명쯤이치마츠는 혹시 저렇게 되는 것이 정상이고자신과 카라마츠가 미쳐버린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봤지만 알 수가 없었다카라마츠도 계속해서 상가를 둘러보았지만 말을 걸만한 사람은 발견하지 못했다어느새 골목이 끝났다.이치마츠와 카라마츠는 자연스럽게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서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렸다그러나 차는 한 대도 오지 않았고신호등은 깜빡거리기만 할뿐 바뀔 생각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횡단보도를 건너 계속해서 걸었다.

몇 시간이나 걸었을까이치마츠는 발바닥이 아파 멈춰 섰다카라마츠는 이치마츠가 멈추자 이치마츠를 돌아보고 그 옆에 주저앉았다아버지의 회사가 있는 곳이었다아버지의 회사가 있고지하철역이 있고축제가 있는 밤이면 야시장이 열리는 넓은 마당그러나 아무도 보이질 않았다이치마츠는 배도 고팠고 발도 아파 짜증이 났다세상이 이상하게 변해버렸는데도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아서 그런가카라마츠가 옆자리를 툭툭 치더니 고갯짓을 했다이치마츠가 바닥에 주저앉자 카라마츠가 조금 움직여서 이치마츠의 발을 잡고 신발을 벗겼다이치마츠가 인상을 찌푸리며 발을 빼도 카라마츠는 발을 놓아주지 않았고이치마츠의 발바닥을 꾹꾹 눌렀다.

지금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지만 그래도 조금만 버텨보자.”

카라마츠가 이치마츠의 반대쪽 발을 잡아 신발을 벗겼다.

그 왜영화 같은 걸 봐도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는 사람이 살아남잖아?”

이치마츠는 대답하지 않았다현실도 그렇게 영화 같고 소설 같은 결말로 끝이 날까이치마츠는 문득 어젯밤 그가 잠들기 전에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만약 아무도 없다면 이치마츠는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할 일이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심장에 커다란 바위가 떨어진 것처럼 무겁게 아파왔다이치마츠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카라마츠를 바라보았다카라마츠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이치마츠는 자신이 단 한자도 쓰지 못할 것이란 걸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이치마츠는 손이 하얗게 질리도록 꽉 붙잡고 있던 샤프를 내려놓고 낡은 스탠드 전원을 껐다.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이치마츠는 그 어둠이 눈에 익을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스탠드 전원을 켰다누런 불빛이 텅 빈 원고지 위로 쏟아졌다빛이 바랜 원고지 첫 칸엔 샤프심 자국이 가득했다.

초등학생 때까지는 분명히 여섯이 다 똑같았는데언제 이렇게 달라져버린 걸까이치마츠는 쌍둥이들의 방에서 한참 달게 잠을 자고 있을 형제들을 떠올려보았다오소마츠는 지나치리만큼 뻔뻔하고카라마츠는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어도 전혀 상처받지 않고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한다그나마 쵸로마츠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고 또 남들이 하는 건 그대로 따라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갖고 있지만그 또한 하나의 마츠노이기에 한번 핀트가 나갔다 하면 오소마츠 못지않게 날뛰는 짐승이 된다쥬시마츠는 논외로 치고토도마츠는 자존심이 세고 또 자기가 형제들 중에선 제일 낫다는 자부심이 있다하지만 이 어두운 골방에서 혼자 원고지를 펼쳐놓고 있는 이 마츠노 이치마츠는세상에 자신이라는 존재를 붙들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글을 선택해놓고도 흔들리고 있었다아니수단이 아니다이치마츠는 두꺼운 원고지 뭉치를 한 장씩 떼어내 구겨 방구석으로 집어던졌다이치마츠는 글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다른 형제들은 자기 자신을 의지해 삶을 살아가지만 이치마츠는 보잘것없는 글재주를 내세워 이것이 그의 정체성이고 자존심이고 자부심이라고 여태껏 소리쳐왔다그러나 기생하는 것은 숙주가 죽어버리면 살수가 없다기생하고 있던 것이다이치마츠는 조그맣게 소리를 내어 기생하는 삶을하고 중얼거렸다만약에이치마츠가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모르고 홀로 살아왔더라면 이렇게 다른 사람이 흔드는 데로 흔들리지 않고 세상 어딘가를 단단히 붙잡아 인간 이치마츠로 자립할 수 있었을까?

이치마츠는 간만에 깊은 잠을 잤다정신은 점점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지만 이치마츠는 눈을 뜨지 않고 이불의 온기를 즐겼다이치마츠는 문예부에 새로 들어온 신입생이 진짜 천재라는 걸 인정하고 일주일도 넘게 밤잠을 설쳤다이치마츠를 정말로 괴롭게 한 것은 신입생이 뽑아내는 소설과 시극본에세이 같은 것들이 아니었다이치마츠의 밤을 하얗게 지새운 것은 신입생의 칭찬이었다. ‘과연선배님은 선배님이시네요.’ 하는 칭찬이치마츠는 그 짧은 말 한마디에서 그가 생각하기에도 지나칠 정도로 많은 의미들을 만들어냈다신입생보다 오래 글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고등학생의 수준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한 실력을 비웃는다던가자신의 글이 훨씬 낫다는 걸 확인하고 가련한 이치마츠를 위로하려한다던가 하는이치마츠의 삶을 방해해온 피해의식이었다그러나 지금 이치마츠는 여섯 명이 맞춰놓은 여섯 개의 알람시계도당장 일어나지 않으면 지각을 할 거라는,

지각이다!”

이치마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오전 열시로이미 한참 늦은 시간이었다다 같은 학교를 다니면서 형제들은 왜 그를 깨우지 않은 거지이치마츠는 뒷골이 확 당겨오면서 인상을 쓰고 옆을 돌아보았다잠자리가 텅 비어있었다딱 하나그의 옆에 달라붙어 느긋하게 잠을 자고 있는 카라마츠를 빼고.형제들이 그를 놀리려고 한 건가이치마츠는 짜증을 내며 카라마츠의 어깨를 밀치려고 하다가 뭔가 위화감을 느끼고 형제들의 자리를 돌아보았다.

베개 네 개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꼭 아무도 잠들지 않았던 것처럼이불은 밤새 이치마츠와 카라마츠가 당겨 덮은 탓인지 흐트러져 있었지만 베개는 처음 잠자리를 정리하면서 곱게 내려놓은 모양 그대로 텅 빈 자리에 놓여있었다그의 형제들은 하나같이 이상한 잠버릇을 가지고 있었다아침에 일어나면 베개도이불도심지어 형제들까지 제자리에 있는 게 하나도 없었는데 이게 어떻게 된 거지이치마츠는 멍하니 옆을 돌아보다 고개를 돌렸다머리맡에 있는 행거에 교복 여섯 벌이 나란히 걸려있었다오늘 학교를 가지 않는 날인건가아니다오늘은 문예부의 모임이 있는 날로이치마츠는 어젯밤 오늘 내놓을 글을 쓰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단 한 자도 쓰지 못하고 잠자리에 누우면서 모임에 빠져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학교를 가는 목요일이었다어딘가 이상했다이치마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빠져나왔다.

집 안이 고요했다이 시간대가 되면 어머니는 거실에서 아침드라마를 보느라 정신이 없다그러나 이치마츠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거실은 텅 비어있었다.티비도 전원이 꺼져있었고소파에는 어머니가 앉았던 흔적도 없다이치마츠는 리모컨을 들어 티비를 켰다그러나 티비에서는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하얗고 까만 선들이 어지럽게 흔들리기만 할뿐 방송을 하고 있는 채널을 하나도 없었다이상했다어머니가 티비 수신을 끊어버릴 리도 없고티비 수신료를 내지 않았을 리도 없는데.이치마츠는 다시 티비를 끄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늘 밥솥에 밥을 가득 채워놓곤 했다사춘기의 아들 여섯은 밥을 먹고 돌아서면 배가 고팠고어머니는 밖에서 일일이 사먹느니 차라리 집에서 밥을 챙겨먹으라며 식사를 마치면 곧바로 새로 밥을 지었다그런데 밥솥은 밥을 해 먹었다는 흔적도 없이 차가웠고식기건조대에 가지런히 정리되어있는 그릇엔 물기가 하나도 없이 바짝 말라 있었다오늘 아침 이 집에서 식사를 한 사람이 없다는 건가이치마츠는 부엌문을 열고 나와 안방으로 향했다처음에는 걸었지만곧바로 달리기 시작했다이치마츠는 안방 문을 부서져라 열었다그러나 안방 또한 사람의 기척도 온기도 하나도 없이 차갑게 식어있었다이치마츠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벽장문을 열고 부모님의 서랍을 뒤졌다집문서도어머니의 결혼반지도 모두 제자리에 있었다부모님이 형제들을 버리고 도망친 것도 아니다이치마츠는 안심하고 벽장문을 닫았다바보 같은 생각이었지딱 고등학생 수준의 유치한 생각그러나 곧이어 이치마츠는 다시 겁이 나기 시작했다그러면 부모님과 형제들은 다 어디로 사라져버린 거지이치마츠는 안방을 나와 아직도 잠을 자고 있을 카라마츠를 깨울까 하다 포기하고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카라마츠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대체 가족들이 무슨 장난을 치는지는 모르겠지만카라마츠와 같이 세트로 남겨졌다는 것도 불쾌했고또 카라마츠가 멍청하게 구는 데에 같이 엮이기 싫었다이치마츠는 잠옷 바람인 게 좀 신경 쓰였지만 대충 신발을 구겨 신고 현관문을 나섰다.

골목이 고요했다옆 건물 카페에서 늘 흘러나오던 유행가도요란하게 벨을 울리는 자전거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이치마츠는 현관문을 붙잡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그러나 도시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차 엔진소리라던가사람들의 말소리 같은 게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이치마츠의 청력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닐 텐데이치마츠는 한참동안 귀를 기울이다 현관문을 닫고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오싹한 기분이 들었다이치마츠는 현관문을 잠그고 신발을 벗어 카라마츠가 잠들어 있는 방으로 달려갔다심장이 쿵쾅거렸다.

카라마츠는 팔다리를 대자로 뻗고 잠을 자고 있었다왜 나랑 카라마츠만 남은거지카라마츠가 내가 아는 그 카라마츠가 아닌 건가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코 밑에 손가락을 대보고 카라마츠가 숨을 쉬는 걸 확인했다뭐라고 얘기를 해야 하지세상 사람들이 우리만 남고 모두 사라진 것 같다고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손목을 붙들고 어떻게 하면 덜 멍청하고 덜 겁쟁이처럼 보일 수 있을지 고민했다그와 동시에 고민을 하다가 카라마츠가 투명해지면서 사라질까봐 겁이 났다혼자만 남는 건 죽기보다 싫었으니까.

이치마츠가 자기도 모르게 카라마츠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줬는지 카라마츠가 인상을 쓰다가 눈을 반쯤 뜨고 이치마츠를 돌아보았다.

이치마츠손목이 아픈 것 같다만....”

잠긴 목소리가 이치마츠의 이름을 불렀다지난 십여 년간 들어온 그 목소리가 맞았다안도감이 들었다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손목을 잡은 손을 놓고 카라마츠의 멱살을 잡아 한 번에 일으켰다카라마츠는 눈이 부어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버둥거리다 이치마츠의 손에 이끌려 일어나 앉았다.

지금 내가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는데

카라마츠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비볐다이치마츠는 마른침을 삼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가서 안방이랑 부엌이랑 둘러보고 집 밖으로 나가서 한번 둘러봐.”

그보다 우리 학교 가야되지 않아?”

카라마츠가 눈을 간신히 떠 시계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지금 학교가 중요한 게 아니야멍청아이치마츠는 거칠게 고개를 저으며 이불을 잡아당겼다이불을 빼앗기자 카라마츠는 잔뜩 움츠러들어서 이불안에 발을 집어넣으려고 달라붙었다그러나 이치마츠는 카라마츠를 발로 밀어내고 방문을 가리켰다.

지금 진짜 심각하니까 한번 돌아봐.”

카라마츠는 한숨을 푹 쉬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나섰다방문 너머로 카라마츠가 느리게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렸다그리고 그 발소리는 조금씩 빨라지다가한참 멈춰 있다가현관문 쪽으로 달려 나갔다현관문이 쾅소리가 나게 열렸다가 닫혔고다시 열렸다.

이치마츠다들 어디로 간 거야?”

이치마츠가 잘못 본 게 아니었다다행이네순식간에 미쳐버린 줄 알았는데카라마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들어와 방의 창문을 열었다그리곤 창밖으로 상체를 내밀어 한참을 보다가 다시 이치마츠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어.”

아무도.”

이치마츠가 대답했다하룻밤사이에 세상은아니 최소 마츠노 가가 있는 거리는 카라마츠와 이치마츠만을 남겨놓고 텅 비어버렸다사람들의 흔적이 남은 물건들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주인들은 없었다이치마츠와 카라마츠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떨리는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장마가 시작되는 계절이 왔다. 하늘에는 오래된 먼지 같은 먹구름이 가득 끼어 그 경계를 알아볼 수조차 없고, 습한 공기가 무겁게 깔렸다. 카라마츠의 기분이 끝도 없이 가라앉는 시간이었다. 이치마츠는 방구석에 앉아 카라마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카라마츠는 계속해서 뭔가를 중얼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카라마츠는 그저 커다란 창문을 활짝 열고 낡은 커튼이 조금씩 펄럭이기 시작하는 걸 내버려둔 채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아마 너는 말하는 연습을 하는 거겠지. 이치마츠는 속으로 생각했다. 한 방울이라도 비가 오기 시작하면 카라마츠는 목소리를 잃는다. 성대가 빗물에 녹아 사라지는 것처럼. 첫 번째 빗방울이 지붕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카라마츠도 분명히 들었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카라마츠의 말소리가 멈췄다. 곧이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마른 땅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사방에 울리고, 다른 소리들은 거기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사라진다. 빗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이치마츠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카라마츠와, 그 무기력한 뒷모습을 바라보는 이치마츠만 남았다.

목소리와 비는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이치마츠는 기억을 더듬었다. 어느 늦은 밤, 이치마츠는 조용히 방을 빠져나가 안방 문에 귀를 기울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열 시간이 넘도록 비행기를 타느라 죽는 줄 알았다고 하소연을 하고, 카라마츠의 목에는 이상이 없더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지친 목소리였다. 비가 온다는 이유만으로 카라마츠가 말을 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뭘까. 이치마츠는 쌍둥이들의 방문 앞에 주저앉아 빗소리를 들었다. 한참 빗소리를 듣다가, 이치마츠는 눈을 감고 빗물이 카라마츠의 폐안에 가득 차오르는 상상을 했다. 카라마츠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기쁘다던가, 슬프다던가, 혹은 아프다던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해도 그 빗물은 카라마츠의 목 끝까지 차올라 카라마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파도처럼 철썩이고 있었다. 하얀 물거품이 카라마츠의 치아에 부딪쳐 사라졌다.

카라마츠는 창 밖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치마츠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주먹을 꽉 쥐었다가 힘을 풀었다. 가까이서 말을 할 자신은 없었다.

카라마츠.”

카라마츠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응? 하고 대답을 할 것처럼 입을 벌렸다가, 자기가 말을 하지 못한다는 걸 깨닫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저 양 입 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을 뿐.

좋아해.”

카라마츠가 눈썹을 올리며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치마츠는 문 쪽으로 한발자국 걸어가 다시 카라마츠를 돌아보았다.

좋아하고 있어.”

빗소리가 점점 거세졌다. 카라마츠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걸 보고 이치마츠는 달려가 문을 붙잡았다.

더럽지. 미안. 이 비가 그치면 자살할게.”

마지막 말이 카라마츠에게 들렸을까. 이치마츠는 물을 열어젖히고 현관으로 달려 나갔다. 뒤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이치마츠는 아랑곳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신발을 꿰어 신고 현관문을 빠져나갔다. 비가 온몸을 적시고 있었다. 차가운 빗방울이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목덜미를 따라 가슴으로 흘러들었다.

 

사흘이 지나도록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치마츠는 바다로 난 절벽 위에 쪼그리고 앉아 시꺼멓게 요동치는 바다위로 번개가 번쩍거리며 내리꽂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바다는 하루 종일 그저 보고만 있어도 좋았다. 바다가 늘 새파랗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해가 떠오를 때는 꼭 저 지평선 너머에서 부글부글 끓는 용암이 물 밑을 따라 흐르는 것 같았고, 해가 진 뒤에는 밤하늘 한 쪽을 끌어다 저 물밑 깊은 곳에 카펫처럼 고르게 깔아놓은 것 같았다. 그리고 이렇게 장마의 끄트머리에선 바다가 거무죽죽한 빛으로 어두워져 화를 내고 있었다. 보고만 있어도 좋았어. 다른 사람들은 그저 파랗다고밖에 말하지 못하는 바다를 나는 그들보다 조금 더 가까이에서, 조금 더 오랜 시간 지켜보면서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너를 알 수 있어서 좋았어. 그렇게 보고 있으면 너랑 좀 더 가까워지는 것 같았고, 너는 내 안으로, 나는 네 안으로 들어가는 것 같아서.

빗소리 너머로 작은 돌멩이가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누군가가 미끄러운 돌 위에 지친 발을 내려놓는 소리도. 이치마츠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다가갔다. 맨 손이 바위를 오르고 있었다. 하얗게 힘이 들어간 손가락 끝에는 흙과 모래가, 젖은 이끼가, 물에 녹아 흐려진 핏방울이 묻어있었다. 너무 이르게 날 찾아왔어. 이치마츠는 차마 그 손을 잡아당기지 못하고 뒷걸음질 쳤다. 비가 아직 그치질 않았는데.

그리고 카라마츠가 절벽 위로 올라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사흘 만에 눈 밑이 퀭하게 들어갔고, 조금 마른 것 같았다. 카라마츠는 거친 숨을 고르다 고개를 들고 이치마츠를 향해 걸어왔다. 등 뒤로 천둥치는 소리가 들렸다. 카라마츠가 손을 내밀고 입을 벙긋거렸다. 그러나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가 만약 말을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빗소리에, 천둥소리에 묻혀서 들리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카라마츠의 손을 더운 물에 씻겨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이치마츠는 그 손을 잡지 못하고 다시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어떻게 날 찾았는지, 나를 찾아서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물어보고 싶었고, 동시에 대답을 듣고 싶지 않았다. 말을 하고 싶어.

여기서 보는 바다가, 나 혼자서 보는 바다가 너 같았어.”

카라마츠가 이치마츠에게 다가오다 멈춰서 이치마츠를 바라보았다. 내 목소리가 들릴까. 이렇게 비가 쏟아지고 천둥이 치고 파도가 잡아먹을 것처럼 비명을 지르는 날에.

여기서 보는 바다가 너 같았는데, 지금은 너무 어두워.”

카라마츠가 내밀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파도치는 소리가 무섭고, 비가 바다 위로 떨어지는 소리가 무서워.”

뺨으로 뜨거운 게 흘러내렸다. 이치마츠는 손등으로 눈가에 고인 물을 닦았다. 아니, 그런 건 무섭지 않았다. 무서운 건 다른 거야. 지금 이 비가 그쳐버리고, 네 안을 가득 채운 빗물이 순식간에 말라 버릴까봐 무서워.

축축한 지면을 박차고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치마츠가 고개를 들자, 하얗게 질린 카라마츠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카라마츠의 숨소리가 들렸다. 카라마츠의 눈은 우는 것 같기도 했고, 또 겁에 질린 것 같기도 했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카라마츠는 잠깐 그런 눈으로 이치마츠의 얼굴을 바라보다 이치마츠의 손을 잡았다. 온기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시린 손이었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손을 들어 자신의 입을 가리켰다. 파랗게 핏기가 가신 입술이 열렸다. 카라마츠는 아주 천천히 입을 움직였다.

노력할게.

이치마츠는 멍하니 그 입술을 보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잠깐 이치마츠의 대답을 기다리다, 다시 입을 움직였다.

노력할 테니까. 사랑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

 

바다 밑바닥에는 뭐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바닷물을 한참 파헤치고 들어가도 그 무겁고 부드러운 물이 머리 위로 쏟아져서, 그 안에 잠겨있으면, 단념하게 된다. 그 시퍼렇고 깊은 곳에 뭐가 있는지, 내가 꿈꾸고 바라던 것이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저 이대로도 나쁘지 않겠구나, 하고

강당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이치마츠가 멀쩡한지 보러간 거겠지. 오소마츠는 강당 문을 닫았다. 강당 안에 쥐죽은 듯한 적막이 흘렀다. 오소마츠는 강당 무대 앞으로 걸어가 딱 하나 세워져 있는 간이 의자에 앉았다. 의자는 정면, 무대를 향해 세워져있었다. 카라마츠가 앉기 위해 세워둔 의자가 아니다. 오소마츠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고 텅 빈 무대를 노려보았다. 새빨간 벨벳 커튼으로 가려진 저 구석에서 카라마츠가 과장된 몸짓으로 걸어 나오길 바랐다. 오랜만에 그의 무대에 관객이 온 걸 보고 카라마츠가 뛸 듯이 기뻐하며 그가 좋아하는 대사 몇 마디를 읊조리길 바랐는데. 배우는 무대를 비웠고, 관객은 하염없이 연극이 시작하길 기다렸다. 강당은 카라마츠의 구역이었다.

수면실과 도서관은 같은 층이었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를 지나쳐 걸어가더니 도서실 문을 잡고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카라마츠를 돌아보았다. 이치마츠의 도서관에 들어가는 것도 오랜만이다. 이치마츠가 두꺼운 문을 잡아 열었고, 카라마츠에게 얼른 들어가라며 눈짓을 하곤 뒤를 돌아보았다. 아마도 오소마츠가 신경 쓰이는 거겠지.

거대한 도서관이었다. 예전엔 카라마츠도 연극대본을 찾겠다고 들락날락했었는데, 형제들의 구역이 하나 둘 정해지기 시작하면서 이 도서관이 잠정적으로 이치마츠의 구역이 되자 카라마츠는 자연히 발길을 끊었다. 이치마츠가 먼저 도서관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던 건 아니지만, 뭐랄까, 도서관은 이치마츠의 사적인 공간처럼 느껴졌다. 책들이 카라마츠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는 다르게 정리되어 있는 것 같았다. 카라마츠는 눈앞에 있는 책장으로 다가가 책등에 적힌 제목을 훑어보았다.

도서관에는 카라마츠의 키보다 한참 높은 책장들이 못해도 이삼백 개는 들어차있었다. 예전에 이치마츠와 카라마츠가 수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책장 개수를 세었던 것 같은데 하도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나질 않았다. 바닥에는 때가 탄 건지 아님 원래 그 색이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회갈색의 카펫이 깔려있었고, 벽은 짙은 보라색이었다. 카라마츠는 책을 한 권 꺼내 위에 쌓인 먼지를 후, 하고 불었다.

책 읽을 시간 없어.”

이치마츠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카라마츠는 깜짝 놀라 책을 책장에 내려놓았다. 바닥에 깔린 카펫 때문에 이치마츠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치마츠는 책장 그림자 안에 서서 카라마츠의 손목을 잡아 이끌었다. 이치마츠의 손이 차가웠다.

여기서 여태까지 읽었던 책들 기억나?”

이치마츠가 카라마츠의 손목을 잡고 책장 사이사이를 빠르게 걸었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가 걷는 속도에 맞춰 따라가느라 발이 꼬였고, 헛디뎌 책장에 어깨를 부딪쳤다. 그러면 이치마츠는 멈춰 카라마츠가 아픈 어깨를 매만지는 걸 잠깐 기다려주다가, 다시 카라마츠의 손목을, 아니 이젠 손을 꼭 잡고 책장 사이사이를 걸었다. 어느새 책이 차있는 책장의 숲은 끝났고 하얗게 먼지가 쌓여가는 빈 책장의 구역이 시작됐다. 종이가 누렇게 삭는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 많이 읽었었지.”

이치마츠는 점점 더 빠르게 걷기 시작해 거의 달리는 것에 가까웠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손을 잡고 따라 달리면서 간신히 대답했다. 카라마츠의 취미는 거의 이치마츠와 함께 시작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전등 하나를 켜 놓고 나란히 앉아 책 한권을 나누어 읽었다. 카라마츠가 빨간 모자가 되면 이치마츠는 늑대가 되었고, 카라마츠가 앨리스가 되면 이치마츠는 정신없이 시계를 보는 토끼가 되었다. 이치마츠는 늘 주인공 역할을 양보해주는 착한 동생이었다. 두 사람은 도서관 구석에 모여앉아 소곤소곤 그들이 알지 못하는 단어를 읽어 내려가곤 했다. 이치마츠도 그때 생각을 하고 있을까. 카라마츠는 이치마츠가 이어서 뭐라고 얘기를 해주길 바랐지만 이치마츠는 말없이 달리기만 했다. 어느새 도서관의 끝이 보였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를 한번 돌아보고 카라마츠의 손을 놓고 달려가 벽의 스위치를 눌렀다.

천장에 매달린 전등들이 동시에 켜졌다. 그들이 책을 읽을 때는 입구에서 가까운 책상위에 놓인 스탠드를 켰고, 책이 있는 서가가 얼마 되지 않아 이렇게 도서관 전체를 밝힐 일이 거의 없었다. 카라마츠는 눈이 부셔 눈을 반쯤 감고 이치마츠를 돌아보았다. 이치마츠가 상기된 얼굴을 하고 카라마츠를 돌아보곤 책장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잘 봐, 카라마츠.”

카라마츠가 손바닥으로 전등 불빛을 가리고 책장을 돌아보았다. 텅 빈 책장들이 빽빽하게 들어차있었다.

너무 많은 책장들이 비어있다고 생각해본 적 없어?”

이치마츠가 카라마츠에게 다가와 카라마츠가 전등 불빛을 가린 손을 억지로 잡아 내렸다. 밝은 불빛에 카라마츠는 눈을 제대로 뜰 수조차 없었다. 이치마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누군가 책을 다 빼버린 거야.”

누가? ?”

아마도 아버지겠지. 책을 왜 빼버렸는지는 알 수가 없어. 그렇지만 어떤 책들이 있었는지는 대충 짐작이 돼.”

우리가 읽은 책들 말고? 그리고 불 좀 끄면 안 될까?”

이치마츠가 벽으로 돌아가 스위치를 눌러 껐다. 다시 도서관 안이 어두워졌다. 카라마츠는 눈물이 맺힌 눈을 깜빡이며 초점을 맞추려고 이리저리 눈을 돌렸다. 이치마츠가 다가와 카라마츠의 손목을 잡았다.

우리가 본 책들은 아주, 아주 한정된 것들이었어. 어릴 때 읽던 이야기책이나 소설, , 희곡. 그러니까 오로지 시간 때우기로 읽기 위해서 존재하는 책들이었다고.”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게 아닌 책들이 있어?”

이치마츠가 고개를 끄덕이고 이번엔 천천히 책장 사이를 걸어갔다.

읽었던 책을 다시 읽고, 또 읽고 하는 걸 반복하다 보니까 이상한 게 눈에 보이기 시작했어.”

이상한 거?”

책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필요에 따라 책을 읽는다는 묘사가 나오는 거야. 의사는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서 치료법이 쓰여 있는 책을 읽고, 변호사는 피고를 변호하기 위해 법이 쓰여 있는 책을 읽어. 그리고 과학자는 발명을 하기 위해 과학에 관한 내용이 쓰인 책을 찾아 읽고. 그런데 이 도서관에는 그런 책이 단 한권도 없었어.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이치마츠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그저 아버지가 문학 서적만을 위해 도서관을 짓고 책장을 가져다 두었다고 하기엔 빈 책장들이 너무도 많았고, 이치마츠의 말대로 그런 내용의 책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럼 그 책들은 다 어디에 있을까. . 카라마츠가 이치마츠를 돌아보았다. 이치마츠의 눈에 희미한 열기가 비쳤다.

그게 아버지 서재에 있다는 건가?”

아마도.”

아버지는 그걸 왜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으려고 하셨던 거지?”

내 생각엔,”

이치마츠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 책들을 읽게 되면 아버지의 말을 의심하게 되고, 아버지가 우리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것들을 깨닫게 될까봐 두려웠던 게 아닐까.”

카라마츠는 묘한 죄책감을 느꼈다. 아버지를 의심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카라마츠가 살아온 삶의 기반을 뒤흔드는 것과 같았다. 카라마츠와 형제들은 아버지의 밑에서 아버지의 말에 따라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이십년을 살았고, 지금도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와 별반 다를 바 없이 생활을 유지해오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머리에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에 뭔가가 스며들어오고 있었다.

아버지 서재에 들어가 보자.”

안 돼.”

카라마츠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대답이 먼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버지의 서재에 들어가지 말라는 건 규칙이었다. 그리고 오소마츠는 거기에 그가 생각하는 벌 중에서 가장 엄한 벌인 독방행을 내걸고 있었다. 그러니 이건 매우 중요한 규칙이었고, 카라마츠는 이를 어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치마츠가 아랫입술을 깨물고 카라마츠를 노려보았다. 카라마츠는 순간 당황해 변명을 해야 되나 하고 생각했지만 카라마츠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일상에 작은 즐거움은 나쁘지 않다. 카라마츠가 오소마츠와 입을 맞추거나 가끔 그 이상을 하는 건 다른 형제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아니었고, 규칙을 어기는 것도 아니었으며 재밌는 일이었다. 그렇게 단 둘이서 시간을 보내고 나면 오소마츠는 카라마츠에게 더 다정하게 대했으며 카라마츠는 그런 오소마츠가 좋았다. 그러나 이치마츠가 지금 카라마츠에게 제안하는 것은 모두의 생활을 의심하고 규칙을 어기며 오소마츠의 신뢰를 저버리는 일이었다. 이야기책이 아닌 다른 책들의 존재라는 건 확실히 카라마츠의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카라마츠는 이 방주의 구성원으로서, 그리고 네 동생의 형으로서, 오소마츠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동생으로서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각자의 자리를 잘 지켜야 그들은 싸우지 않고 이십 년을 더 살아갈 수 있었다.

오소마츠 때문에 그래?”

이치마츠의 목소리에 날이 서있었다. 카라마츠는 지금 여기서 오소마츠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고 대답을 하면 안 그래도 나쁜 두 사람사이의 관계가 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갈라지지 않을까 싶어 망설였다. 그러나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침묵을 읽어낸 모양이었다.

왜 오소마츠한테만 그러는 거야?”

오소마츠한테만 뭘? 이치마츠가 책장에 기대 고개를 숙였다. 어깨가 힘없이 늘어져있었다.

너랑 가장 시간을 많이 보낸 건 나잖아.”

이치마츠의 어리광인가. 카라마츠는 다가가 이치마츠의 어깨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손을 잡아당기면서 카라마츠를 책장으로 밀쳤다. , 하는 소리가 도서관 안을 울렸다가 사라졌다.

다른 애들이 그림이니 음악이니 하는 거나 들여다보고 있을 때 우린 여기에 있었는데.”

이치마츠는 억울해하는 것 같았다. 카라마츠는 어린 이치마츠가 울먹이며 안아달라고 하던 것이 다시 떠올랐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가 잡지 않은 손을 들어 이치마츠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얹었다. 이치마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카라마츠가 연극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무대가 있는 강당에 자리를 잡자 이치마츠는 카라마츠가 멀어진 것처럼 느껴졌을 거고, 그게 좀 서운했던 모양이었다. 마주치는 시간이 줄어들고 또 함께 있는 시간엔 다른 형제들도 있었으니 솔직하게 얘기하기도 어려웠을 거고, 그러다보니 점점 얘기하기가 어려워지고. 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오소마츠가 책임을 맡게 되면서 카라마츠는 오소마츠를 도와 동생들을 돌보고 생활을 꾸려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오소마츠와 많은 시간을 보내곤했다. 그 이전엔 이치마츠의 말대로 카라마츠와 이치마츠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으니 그만큼 카라마츠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겠지.

이치마츠는 카라마츠가 어깨에 손을 얹자 뭔가 더 말할 것처럼 숨을 들이 쉬었다가 카라마츠의 손목을 놓고 그를 끌어안았다. 이치마츠의 손이 카라마츠의 등을 긁듯 더듬어 꽉 붙잡았다. 카라마츠는 숨이 막힐 것 같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이치마츠의 등을 토닥였다.

나랑 여기서 나가자.”

이치마츠가 속삭였다. 카라마츠는 단번에 이치마츠가 말하는 곳이 도서관이 아님을 알았다. 그리고 그가 이치마츠를 멈춰야 한다는 것도. 카라마츠는 아무 대답없이 이치마츠의 뒷머리를 쓰다듬다 이치마츠의 뺨에 짧게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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