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한 평생을 어둠 속에서 살아왔건만 카라마츠는 이 지하의 분위기가 싫었다. 카라마츠는 형제들의 맨 뒤를 따라가면서 몰래 한숨을 쉬었다. 지하로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추워졌고, 희미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전등들도 줄어들었다. 다른 형제들도 비슷하게 느낀 건지, 아니면 화가 단단히 난 오소마츠의 눈치를 보고 있는 건지 아무도 말이 없었다. 카라마츠는 토도마츠의 어깨 너머로 이치마츠의 손목을 흘끗 보았다. 하얗게 마른 손목이 밧줄에 단단히 묶여 검붉은 멍이 들어있었다. 쵸로마츠는 규칙에 관한 일엔 유달리 엄격했다. 저렇게 하면 손이 한참 저릴 텐데, 오늘 밤 내내 아플 텐데. 이치마츠의 희멀건 손이 더 하얗게 질려있었다.

콘크리트 벽에 맺힌 물방울이 조용히 굴러 떨어져 곳곳에 작은 물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이치마츠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서 기관지도 약하고, 한번 병을 앓으면 한참을 앓았다. 외부와 단절된 이 곳에선 병에 걸리면 방법이 없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아버지가 어떻게든 해결해주셨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 만약 이치마츠가 심한 병을 앓으면 다른 형제들은 그저 곁에서 발만 동동 굴러야 했다. 카라마츠는 걱정이 되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오소마츠를 묵묵히 지켜보았다. 오소마츠는 허리춤에 매달고 있던 열쇠뭉치 중 가장 작고, 가장 볼품없는 열쇠를 꺼내들어 문을 열었다.

오랜만이지? 다음에 올 때는 여기에 이치마츠 방이라고 문패라도 걸어놔야겠어?”

오소마츠가 입 꼬리만 올리며 비아냥거렸다. 이치마츠는 아무런 표정도 대답도 없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창문도, 전등도, 가구도 아무것도 없는 콘크리트 방이었다. 아니, 이건 상자다. 사람이 들어가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다.

형님, 오늘은 추운데 담요라도…….”

카라마츠가 머뭇거리며 오소마츠에게 다가가 손에 한참을 쥐고 있던 담요를 내밀었다. 오소마츠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카라마츠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주고 담요를 빼앗았다.

카라마츠, 이치마츠는 지금 벌을 받는 거야. 우리 여섯 명이 정한 규칙이었고, 우리 여섯 명이 정한 벌칙이야. 거기엔 분명히 이치마츠도 껴있었다고. 그런데 이치마츠가 규칙을 어겼으니까 우린 우리의 벌칙을 따라 이치마츠에게 벌을 줘야 해.”

오소마츠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뭔가 이치마츠에게 말을 하고 싶어서 한참 오소마츠의 눈치를 보고 있던 쥬시마츠도 풀이 죽어 토도마츠의 뒤에 숨었다. 등 뒤에서 이치마츠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 소리가 났다. 카라마츠가 재빨리 몸을 돌렸지만, 오소마츠는 순식간에 문을 닫아버렸고, 이 넓고, 좁은 지하 복도에 쾅, 하고 문 닫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섯 명중에 한명이 자리를 비웠지만 다섯 명은 아무렇지 않은 척 저녁 일과를 수행했다. 오늘 식사당번이었던 쵸로마츠가 고기야채를 끓였고, 다섯 명은 여섯 명의 식탁에 둘러 앉아 각자 먹어야 할 양을 꼭꼭 씹어 삼켰다. 젓가락과 밥그릇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카라마츠는 깨작깨작 식사를 하며 다른 형제들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 속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만약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오소마츠의 이런 벌칙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실 수 있었을까?

아버지는 과학자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아버지는 아들들의 머리맡에서 자장가처럼 바깥세상과 핵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사람들의 탐욕이 결국 인류가 이룬 모든 것들을 날려버리는 핵전쟁으로 이어졌고, 아버지는 이를 미리 예측하고 그가 목숨처럼 사랑하는 아들들을 위해 이 지하 방주를 지었으며 언젠가 시간이 오염된 세상을 완전히 씻겨낸 후에야 아들들이 나갈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두셨다고. 산채로 몸이 끓어오르다 죽는 사람들과 핵의 영향으로 태어난다는 기형아들에 대한 얘기를 듣고 나면 꼭 악몽을 꿨다.

카라마츠는 잠자리에 누워서 한참 이치마츠와 핵전쟁, 그리고 그들이 앞으로 이 답답한 방주에서 더 견뎌내야 할 이십년에 대해 생각하다가 설핏 잠이 들었다.

눈앞에서 꼭 전구가 터지듯 펑, 하고 새하얀 불빛들이 가득 찼다. 하얗고, 카라마츠가 여태 살아오면서 본 그 어느 것보다 희고, 노랗고, 어쩌면 투명한 불빛들이 카라마츠의 위로 무너져 내렸다. 뇌가 절절 끓는다. 이렇게 밝은 빛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카라마츠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고 귓가에서 삐이이 하는 이명이 울리는 것 같았다. 괴로워, 괴로워, 괴로워.

카라마츠는 한참 고개를 젓다 눈가에서 흐르는 뜨거운 눈물을 느끼고 잠에서 깼다. 제 손조차 보이지 않는 익숙한 어둠. 한참을 울었는지 귀까지 눈물이 흘러 축축했다. 카라마츠는 눈물을 대충 훔치고 곁을 더듬었다. 고른 숨소리를 내며 깊은 잠에 들어있는 토도마츠가 만져졌다. 카라마츠는 조심스럽게 토도마츠의 얼굴까지 만져보고 나서야 숨을 돌렸다. 이상한 꿈이었다. 이치마츠가 누워있어야 할 옆자리는 차갑게 식어있었다. 이치마츠는 잘 버티고 있을까.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뼈까지 시려올 냉기를 견뎌내고 있을까.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베개를 찾아 끌어안고 한참 이치마츠의 살 냄새를 맡았다. 이치마츠가 보고 싶다. 아주 잠깐, 오소마츠가 눈치 채기 전에 잠깐만 다녀오면 되지 않을까. 카라마츠는 숨을 멈추고 가만히 형제들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이 몇 시나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다들 깊은 잠에 빠져있는 것 같았다. 카라마츠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신발을 집어 들었다.

텅 빈 복도에 카라마츠의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카라마츠는 둥근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서 저 벽에 매달린 전구들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앞으로 이십년이나 남았는데, 아버지의 창고에 남아있는 전구들은 그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을까. 만약 그 시간을 버티지 못한다면 이치마츠는 어둠을 틈타 이 방주 어딘가로 숨어버릴지도 모른다. 카라마츠는 눈을 감고 계단손잡이에 의지해 밑으로 밑으로 내려갔다. 꿈결 같은 어둠이었다.

계단이 끝났다. 카라마츠는 눈을 뜨고 저 멀리 보이는 독방을 향해 걸어갔다. 이치마츠는 자고 있으려나. 카라마츠는 손에 쥔 보온병을 품에 안았다. 이치마츠가 싫어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어쩔 수가 없어. 카라마츠는 손에 든 것을 내려놓고 바닥에 난 조그만 틈새로 귀를 기울였다. 폭이 얼마나 좁은지 안이 보이지는 않는다. 작은 기침소리가 들렸다.

이치마츠.”

카라마츠가 작게 속삭였다. 기침소리가 잠깐 멎더니, 잔뜩 갈라진 이치마츠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너도 들어오고 싶냐.”

, 카라마츠의 생각보단 나았다. 카라마츠는 가져온 접시에 뜨거운 물을 조금 부어 틈사이로 밀어 넣었다. 마음 같아선 보온병을 통째로 주면서 이치마츠에게 마시라고 하고 싶었지만 틈이 너무 좁아 약간 오목한 접시정도밖에 들어가지 않는데다가 손을 뒤로 묶어 제대로 마실 수가 없을 것이다. 이치마츠가 바닥을 기어 접시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뜨겁지는 않아?”

적당해.”

이치마츠의 목소리가 조금 나아졌다.

다 마시면 접시 이쪽으로 밀어. 더 부어줄게.”

물이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카라마츠는 문에 기대앉아 엎드려 힘겹게 물을 마시고 있을 이치마츠를 상상했다.

서재에 뭐가 있길래 그렇게 들어가고 싶은 거야?”

매번 이렇게 고생하면서. 카라마츠가 조용히 물었다. 물소리가 멈췄다. 카라마츠는 혹시 어딘가에서 오소마츠나 다른 형제들이 그를 지켜보고 있지는 않은지 멀리까지 내다보고 다시 문에 귀를 기울였다. 문가로 이치마츠가 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카라마츠는 바닥에 바짝 엎드려 문 틈사이로 귀를 들이밀었다.

우린 속고 있는 거야.”

이치마츠가 속삭였다.

눈을 뜨니 낯선 방이었다. 꼭 영화에서나 봤을 법한 하얀 천장과 하얀 벽, 하얀 바닥으로 이루어진 비현실적인 공간이었다. 천장에는 조명도 붙어있지 않은데 은은하게 빛이 나 창문도 하나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딱딱한 바닥에 오래 누워있던 탓인지 몸이 뻣뻣했다. 묘한 쇠 비린내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카라마츠는 대체 여기가 어딘지 알아보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바로 뒤에, 낯선 쇳덩이를 이리저리 들여다보고 있는 동생을 발견했다. 그가 사랑하는 동생이었다.
이치마츠? 혹시 지금 장난치는 거냐?”

이치마츠가 미간을 찌푸리며 총을 바로 잡았다. 철컥, 하고 총알이 장전되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장난으로 보여?”

총은 작았다. 저걸 무슨 총이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화에서 보던 것과 거의 흡사해 꼭 장난감 같았다. 그리고 그 반짝거리는 총구는 카라마츠를 향해 있었다.

그거 진짜 총이야?”

안에 총알도 제대로 들어있어. 딱 한 발.”

이치마츠가 카라마츠의 눈앞에서 총을 흔들어보이곤 카라마츠의 이마에 총구를 꾹 눌렀다가 땠다. 묵직했다. 사람을 죽이는 게 맞구나. 카라마츠는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걸 네가 왜 들고 있는 건데?”

이치마츠는 말없이 총으로 바닥에 놓인 종이를 가리켰다. 흔한 복사용지에 매직으로 대충 찍찍 쓴 문구가 적혀있었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쏘지 않으면 지구는 멸망한다.’ 하고. 카라마츠는 종이를 주워들어 읽어보고, 뒤집어서 다른 글이 쓰여 있지는 않은지, 혹시 종이에 이게 장난임을 알려주는 조그만 멘트라도 남아있진 않은지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중2병 환자의 일기장에나 쓰여 있을법한 저 글귀가 다라서, 카라마츠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도대체 누구 짓이지? 오소마츠 형? 형은 이런 공간을 빌릴만한 돈이 없을 텐데……. 컨셉 러브호텔 같은 덴가?”

이치마츠의 마스크 너머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웃음소리가 들리자 괜히 기분이 좋아져 입가에 미소가 띄려는 걸 억누르며 벽에 손을 짚고 한 바퀴 쭉 걸었다. 카라마츠와 이치마츠가 이 방에 들어온 이상 어딘가에 입구가 있을 테고,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카라마츠가 영화에서나 본 두드리면 열리는 비밀 문같은 걸 찾아 한참 방을 빙빙 돌았지만 그들을 둘러싼 벽은 그저 평범한 벽에 불과했다. 조금 매끈한 느낌의 벽. 카라마츠는 다시 이치마츠에게로 돌아와 이치마츠와 마주보고 앉았다.

문이 없는 것 같아.”

이치마츠는 아무 대답 없이 총을 만지작거렸다. 방이 꽉 막혀있어서 그런지 조금 답답했다. 온통 하얀 방에 갇혀있으니 혹시 꿈이 아닌가 싶어 손등을 꼬집어봤지만 분명한 현실이었다.

날 쏠 수 있겠어?”

이치마츠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널 쏘다니. 카라마츠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어떻게 널 쏴. 만에 하나 이게 진짜라면, 네가 날 쏴야 돼.”

이치마츠가 다시 웃었다. 그 순간 한 쪽 벽에 한가득 영상이 떠올랐다. 카메라는 빨간색의 동그란 스위치 같은 것을 찍고 있었다. 그리고 화면이 둘로 갈라지면서 다른 한 쪽에선 실시간 뉴스를 방송하고 있었다. 화면 위에 찍힌 날짜를 보니 오늘이었다.

대체 저게 뭐야?”

꼭 카라마츠의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스위치 위에 조그만 타이머가 생겨났다. 5. 그리고 동시에 타이머가 작동되기 시작했다.

진짜야? 이게 말이 돼?”

카라마츠가 이치마츠의 팔을 붙잡고 그를 돌아보았다. 이치마츠는 아무런 표정변화도 없이 총을 꼭 쥐고 놓지 않았다. 뉴스에선 사람이 바글바글한 어느 놀이동산을 비추고 있었다. 간만에 나들이를 나온 가족들이 행복한 표정으로 놀이기구를 타러 가거나 간식을 샀다.

저 타이머가 그건 아니겠지?”

이치마츠는 대답이 없었다. 그는 그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화면을 노려봤다. 꼭 노려보면 타이머가 멈출 거라고 믿는 것처럼. 카라마츠는 화면과 이치마츠를 번갈아 보다가 시간이 4분으로 줄어들자 이치마츠의 팔을 꽉 붙잡았다.

난 널 못 쏘겠으니까, 네가 쏴. 아니면 내가 자살할거야.”

이치마츠가 인상을 쓰면서 마스크를 내렸다.

쓰렉마츠, 저걸 믿어? 그냥 너 혼자 개죽음하고 끝나면 어쩔 건데.”

그래도 만약 내가 죽지 않았다가 온 인류가 다 죽어버릴지도 모르는 거잖아. 나 하나로 해결 될 문제면 내가 죽는 게 맞아.”

멍청한 새끼. 그리고 자살은 룰 위반이야. 잘 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죽여야 된다잖아.”

이치마츠가 총을 등 뒤로 숨겼다.

죽을 생각하지 마. 네가 무슨 히어로야? 지구를 위해 희생하게?”

시간은 소리 없이 흐르고 있었다. 뉴스는 이제 사람들이 들뜬 얼굴로 이리저리 걷고 있는 번화가를 비췄다.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으면 괜찮았을 텐데, 카라마츠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선택으로 죽는다고 생각하니 죄책감이 들었다. 안 돼.

어차피 살면서 한 번 죽을 거, 지금 죽고 영웅이 되면 돼.”

카라마츠는 애써 웃으며 이치마츠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치마츠가 흠칫 떨었다.

내가 여기서 죽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네가 여길 나가서 내가 영웅이란 걸 사람들에게 알려. 아마 그 날은 전 인류적 기념일이 되어 온 지구의 카라마츠 걸이 내 이름을 목 놓아 부르지 않겠어?”

지랄하네.”

이치마츠가 카라마츠의 팔을 거칠게 떼어내고 뒤로 조금씩 물러났다. 이치마츠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네가 여기서 개죽음을 하든 뭘 하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누가 믿을 거 같아? 그냥 누가 장난하는 걸 멍청하게 믿은 새끼라고 까일 거라고. 넌 진짜 머리에 든 게 있냐.”

3. 카라마츠는 마음이 조급해져 이치마츠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이치마츠의 멱살을 잡았다.

정말 모두가 나 때문에 죽어버리면 난 정말 큰 죄를 짓는 거야. 만약 이게 장난이었다 그래도 내가 여기서 나가고 집으로 가는 길에 뺑소니로 죽을지도 모르는 거잖아. 날 쏴, 이치마츠.”

이치마츠가 아랫입술을 깨물고 카라마츠의 이마에 총구를 겨눴다가 다시 내리고, 안에 장전된 총알을 꺼냈다. 누런 총알은 꼭 때 묻은 감정 같았다. 매일 닦고 닦아도 세월에 빛이 바래버린 감정. 카라마츠는 총알을 뺏으려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치마츠가 잽싸게 몸을 돌려 총으로 카라마츠의 어깨를 내리쳤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카라마츠는 어깨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끝까지 멍청한 새끼. 네가 죽는다고 진짜 지구가 멸망하지 않을 거란 보장 있어? 대뜸 사람을 가둬놓고 살인을 하라는 새끼가 약속을 지킬 것 같냐고. 그걸 어떻게 믿고 죽겠다고 지랄이야? 네가 그렇게 대단해? 네 목숨 하나가 지구랑 똑같은 줄 알아?”

아냐, 이치마츠. 이건 내 문제야.”

어깨가 욱신거렸다. 카라마츠는 간신히 일어나 이치마츠에게 달려가 총알을 뺏으려고 손을 뻗었다. 2. 마음이 조급해진다. 카라마츠가 이치마츠의 무릎을 걷어차 이치마츠를 넘어뜨리고 올라타 총을 뺏고, 총알마저 뺏으려고 몸을 돌렸다. 그러나 이치마츠가 빨랐다. 이치마츠는 꼭 입이라도 맞출 것처럼 카라마츠의 멱살을 잡아당기곤, 자기 입에 총알을 던져 넣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총알이 제대로 넘어가지 않는지 이치마츠가 오만상을 찌푸렸지만 카라마츠의 멱살을 잡은 손은 놓지 않았다. 카라마츠는 바로 눈앞에서 이치마츠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걸 멍하니 지켜봤다. , 이치마츠는 힘겹게 총알을 넘기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이치마츠, 우린 지금 엄청난 잘못을 한 거야.”

이치마츠가 고개를 돌려 시간을 확인하곤 카라마츠의 멱살을 놓았다. 이젠 화면에서 소리도 들리기 시작했다. 어느 다정한 커플이 팔짱을 꼭 끼고서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마침내 봄이 와서 너무 좋다고, 그리고 꽃이 만발할 즈음에 결혼을 할 거라고. 카라마츠는 온몸에 힘이 풀려 이치마츠의 위로 엎어졌다. 이치마츠가 카라마츠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입을 열었다.

어차피 여기서 네가 죽고 내가 살아서 나갔대도 내가 다 죽여 버렸을 거야. 우릴 가둔 놈부터 시작해서 저기 나온 사람들도 다 찾아서 죽여 버리고 엄마도 아빠도 형제들도 안 가리고 눈에 띄는 인간들은 다 죽이고 나도 죽었을 거야.”

?”

왜긴 뭐가 왜야. 너도 알고 있잖아.”

이치마츠가 일어나 앉아 다시 타이머를 돌아보았다. 1.

떡치기엔 시간이 모자라겠네.”

이치마츠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카라마츠의 양 뺨을 붙잡고 거칠게 입을 맞췄다. 카라마츠는 멍하니 이치마츠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다가 이치마츠가 입술을 깨물자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처음이자 마지막일 동생과의 키스를 느꼈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키스였다. 달칵, 하고 스위치가 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거의 동시에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리고, , , 하고 뭔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화면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바닥이 꼭 지진이 난 것처럼 진동했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이치마츠는 잠깐 입술을 뗐다가, 눈이 반쯤 풀린 카라마츠를 보고 뭔가 말을 할 것처럼 입을 달싹거리다 다시 입을 맞췄다. 말을 하기엔 너무 아까운 시간이었다. 순간 벽이 사방으로 펑, 하고 날아가면서 고막이 터질 것처럼 큰 소리로 바닥이 폭발했다

글자가 완전히 말을 표현할 수 있게 된 후로 간혹 몸에 사람 이름을 단 아이들이 태어났다. 그건 남자 이름일 때도 있었고, 여자 이름일 때도 있었고, 아이가 태어난 곳에선 쓰지 않는 언어로 된 글자일 때도 있었다. 사람들은 그 이름의 의미가 무엇일지 한참 고민을 하다 이는 신이 아이에게 내려주신 이름이라 생각하고 아이에게 그 이름을 지어주었다. 오랜 전통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런 이름에 얽매이는 걸 촌스럽게 여기기 시작했고 다른 이름을 붙여주는 부모들이 늘어났다. 사실 몸에 보이는 곳에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건 여러모로 불편한 경우가 많았으니까.

그리고 마츠요가 여섯 쌍둥이를 낳았다. 그런데 여섯 명이 일란성 쌍둥이임에도 불구하고 단 두 명만 몸에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발바닥에, 하나는 손바닥에. 이상하네. 왜 그 두 명만 이름이 새겨져 있는 걸까. 마츠요는 남편과 상의한 끝에 두 사람이 좀 더 특별한 운명으로 태어난 것이라 믿고 한평생 서로를 의지하는 좋은 형제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름을 바꾸어 지어주었다.

 

토도마츠, 몸에 이름 새겨져 있는 거 없지?”

토도마츠가 갤러리를 정리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 그게 왜?”

요새 도는 소문인데, 자기 몸에 새겨진 이름이 사실 운명의 상대라나 봐. 그런 사람들을 찾아주는 사이트도 생겼어. 토도마츠는 이름이 없다니 아쉽네.”

글쎄. 토도마츠는 피식 웃고 다시 핸드폰 액정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형들은 서로의 이름을 몸에 새기고 있었지만 그다지 잘 맞는 구석도 없었고, 친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일방적으로 싫어하는 것에 가까웠다. 사실 이름이라는 게 절대적인 것도 아니고 바꿔버리면 그만인 것을. 그 둘이 운명의 상대라면 좀 이상하지 않아?

 

아들 여섯을 키우는 일은 쉽지 않다. 초등학교 때까지야 어머니가 아들들을 통제해보겠다고 나섰지만 머리가 굵어질 대로 굵어진 후엔 제발 범죄만 저지르지 말고 고등학교까진 졸업해달라며 방목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담배는 집 밖에서. 이건 어머니의 마지막 보루였고, 이치마츠는 어쩔 수 없이 집 옆 골목에서 담배를 태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늦은 밤이었다. 집에 남아있는 형제들과 부모님은 이미 잠이 들었을 때였다.

그런데 부엌에 불이 켜져 있었다. 이 시간에? 혹시 형제들이 야식이라도 만드는 걸까? 이치마츠는 잠깐 고민하다 조용히 부엌으로 다가가 안을 들여다보았다. 뜻밖에도 카라마츠가 잠옷차림으로 가스레인지 앞에 서 철사를 달구고 있었다. 저걸로 뭘 하려고? 이치마츠는 인기척을 내지 않고 조금 뒤로 물러나 어둠속에 몸을 숨겼다. 카라마츠는 나무젓가락으로 철사를 집어 불에 한참 달구다 부엌 바닥에 앉아 왼쪽 발을 오른쪽 허벅지 위에 올렸다. . 이치마츠가 속으로 웃었다. 카라마츠는 손을 벌벌 떨면서 빨갛게 달군 철사를 조심스럽게 발바닥 위로 가져다 댔다가, , 하고 철사를 떨어뜨렸다. 그 정도 각오로 뭘 하겠다고. 이치마츠가 부엌창문을 열었다.

이치마츠!”

카라마츠가 당황해 아직 뜨거워 보이는 철사와 나무젓가락을 급히 주워 등 뒤로 숨겼다.

봤어.”

이치마츠는 부엌 불을 끄고, 카라마츠의 앞으로 다가가 쭈그리고 앉아 카라마츠와 눈을 마주쳤다. 카라마츠의 눈이 있는 힘껏 커다랗게 뜨여서 벌벌 떨고 있었다.

그걸로 될 것 같아?”

아니, 이치마츠, 형이 설명할 수 있어.”

소문 들었구나.”

카라마츠가 이를 악물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고 해도 얼굴 표정이 일그러져서, 꼭 이치마츠가 괴롭히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사람 눈에 띄지도 않는 발바닥인데, 그걸 왜 이 한밤중에 남모르게 지우려고 하겠어. 그치?”

이치마츠가 웃으며 마스크를 내렸다. 카라마츠가 계속 고개를 저으며 변명을 하려고 했으나 이치마츠는 기분이 좋아 카라마츠의 조잡한 변명 따윈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지우고 싶은 사람은 나지. 나는 손바닥에 이름이 있으니까 사람들이 툭하면 그걸 내 이름으로 오해한다고. 기분 나쁜 쪽은 오히려 나잖아.”

기분이 나쁘다는 말에 카라마츠가 고개를 젓는 것도 멈추고 멍하니 이치마츠의 눈을 바라봤다. 상처받은 척 하지 마. 네가 잘못한 거잖아.

네가 날 좋아하는 게 이름 탓일 것 같아?”

아냐……. 그런 거 아냐…….”

카라마츠는 이치마츠를 피해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옷자락을 잡아 당겨 도로 자리에 앉혔다.

좋은 핑계야. 그저 내 이름이 네 몸에 있다는 것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겠지.”

카라마츠가 이치마츠의 어깨를 퍽 밀치고 뛰쳐나갔다. 카라마츠가 부엌에서 거실을 가로질러 형제들이 있는 방문을 잡았을 때, 이치마츠가 카라마츠의 머리채를 잡았다.

날 위해서 해줘. 카라마츠.”

이치마츠가 카라마츠의 머리채를 힘껏 휘어잡고 카라마츠의 귓가에 속삭였다. 카라마츠가 움찔거리며 이치마츠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손에 힘이 제대로 실리지가 않았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머리채를 놓고, 카라마츠의 잠옷 소매를 잡아 다시 부엌으로 끌고 갔다. 카라마츠가 뒤에서 따라오고 있어 표정을 보지는 못했지만, 이치마츠는 카라마츠가 지을 표정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힘이 센 카라마츠가 그가 이끄는 데로 힘없이 끌려온다는 게 즐거웠다.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고 있고, 내가 마음껏 휘두를 수 있다는데서 오는 감미로운 만족감. 늘 짐작을 하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확인받는다는 건 더 짜릿했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를 부엌 바닥으로 밀치고 주머니를 뒤적여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몇 글자 안 되니까, 이정도면 되지 않을까?”

이치마츠는 담배를 한 개비 입에 물고 끝에 불을 붙였다. 어두운 부엌 한가운데서 담뱃불이 새빨갛게 빛났다. 부엌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에 카라마츠의 얼굴이 반만 드러났다. 이치마츠와 똑같이 생긴 얼굴이었고, 보기 좋은 표정이었다. 이치마츠는 담배 연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카라마츠의 얼굴을 감상했다.

모를 줄 알았어? 나 의식하는 거 정말 기분 더러웠는데. 옷 갈아입을 때나 목욕탕 갈 때 눈도 못 마주치지. 잘 때는 토도마츠한테 바짝 붙어서 자고. 내가 없으면 내 물건들 뒤적거리고 나중에 내가 좋아하는 거 아는 척 하면서 말 붙이고. 티 나게 이것저것 챙겨주려고 하는 거. 내가 네 형제라는 자각은 있어? 다른 형제들이 학교에서 소문 다 들었을 텐데 왜 얘기를 안했겠어? 네가 그렇게 티 나게 구니까 다들 말도 못 꺼낸 거 아냐.”

카라마츠가 입술을 깨물더니 고개를 숙였다. 이정도로 울면 안 되잖아. 나는 아직 할 말이 더 남았는데.

나보고 발정하지? 내가 따먹어줬으면 좋겠어? , 아님 네가 박는 쪽이야? 내생각하면서 자위하지? 내가 너한테 사랑한다고 예쁘다고 하면서 키스라도 해줬으면 좋겠어? 씨발, 더러워.”

이치마츠가 담뱃재를 싱크대에 툭툭 털고 카라마츠에게 다가갔다. 카라마츠는 고개를 숙인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가족들 깨우지 않게 적당히 해.”

이치마츠가 카라마츠의 왼쪽 발목을 잡아 달빛 아래로 이끌었다. 발바닥 한 구석에 희미하게, 이치마츠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한때는 이 이름이 우릴 특별하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했어. 그걸 네가 망친거야.”

이치마츠가 망설임도 없이 카라마츠의 발바닥을 담뱃불로 지졌다. 살이 타들어가는 냄새가 나고, 카라마츠가 다리에 경련을 일으키면서도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입을 막았다. 한순간이었다. 이치마츠는 담배를 싱크대 바닥으로 던졌다. 고여 있던 물기에 칙, 하고 담배가 꺼졌다.

 

그 후로 카라마츠는 조금 달라졌다. 텅 빈 것 같기도 했고, 속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더 이상 이치마츠를 다른 형제들과 다르게 대하지도 않았고, 학교에 좋아하는 여자애가 생겼다고 형제들에게 수줍게 고백을 하기도 했다. 너 게이잖아. 이치마츠는 목 끝까지 말이 올라왔지만 참았다. 카라마츠가 게이인걸 이치마츠가 어떻게 알았냐고 형제들이 묻는다면 이치마츠는 대답할 수가 없었기에, 이치마츠는 멀리서 카라마츠가 평범하게 생긴 여자애와 등하교를 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좋아서 맨 살을 태울 각오도 했으면서 이렇게 쉽게 포기할 수가 있나. 아니, 나를 정말 좋아하긴 했던 건가. 더 이상 카라마츠가 거북하지 않아 이치마츠는 속이 시원하면서도 어딘가 허전했다. 뭔가, 태어날 때부터 존재를 의심한 적이 없는 팔다리가 하나 잘려나간 기분.

그리고 한참 후에, 이치마츠는 스스로 손바닥에 새겨진 이름을 태웠다. 하지만 그걸로 해결 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고, 이름은 그저 이름일뿐이라는 걸 시간이 더 지나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흑임자 전병입니다............

이 썰 좀 또라이 같았죠........................

저도 고어나 잔인한거 식인소재 잘 못보는데 얼마 전에 꾼 꿈이 인상이 강렬해 한번 써보고 싶었습니다 ㅇㅅㅇ)/

자세한건 기억이 안나고 꿀 항아리에 거꾸로 빠져 죽은 아기를 누군가가 벌벌 떨면서 잡아먹는 꿈이었는데

아마 그리스 신화 중에서 미궁속에 꿀 항아리에 빠져죽은 왕자 얘기랑 제 아이를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그림이 합쳐진게 아니었을까요

그게 강렬해서 왜 아기를 벌벌 떨면서 잡아먹어야 했을까 아기를 먹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고 생각하다 보니

이런 또라이같은게 나왔습니다............................................


참 그리고 저는 찻집 남자가 카라마츠라는걸 처음부터 다들 눈치채시고 카라마츠가 남 얘기인척 천연덕스럽게 얘기하는거라고 다들 아실줄 알았는데

남자의 정체가 뭔지 긴가민가 하셨다는 분들이 계셔서 놀랐어요

아마 제가 모자란 탓이겠죠...........ㅎㅎ....................빠가새끼...................................................

카라마츠는 쵸로마츠에게 자기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카라마츠가 임신하는 부분이 나왔기 때문에 여자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카라마츠는 본인이 원하지 않았지만 이치마츠를 사랑하게 되고

오소마츠는 그렇게 된 게 자신의 죄 탓이라고 생각해서 떠돌게 되어요

오소카라도 이치카라도 다 정말 좋아하는데

제가 캐릭터를 셋이나 굴리려고 하니까 한계가 있더라구요.... 삼각관계는 보기는 좋은데 쓰는건 힘든거같아요.....

파카카라 존잘님들 대다내...........................................................

참 세번째 쌍둥이는 쥬시마츠였어요

;ㅁ; 톳티는 어디 있을까요 엉엉 톳티 미안해


사실 별 내용이 없어서 후기를 안써도 되겠다 싶었는데

읽어주시는 분들이 저를 그냥 또라이로 아실까봐 살포시 달아봅니다............................


잔인한 묘사가 있습니다 

취향타는 소재 주의





남자가 다시 주전자에 뜨거운 물을 가득 담고 돌아왔다.

피곤하지는 않으세요?”

쵸로마츠는 잠깐 졸리진 않는지, 눈이 뻑뻑하진 않은지 느껴봤지만 아무 문제가 없었다. 아마 차에 각성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아니요. 아마 차를 마셔서 그런 건지 아직 쌩쌩하네요.”

다행이네요. 이야기가 곧 끝날거라서요.”

남자가 웃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남자는 긴 이야기를 오래 하면서도 차로 그저 입술만 축일뿐 많이 마시지 않았다. 이상하네. 차를 이만큼 마셨으면 화장실에 가고 싶어질만도 한데.

어디까지 했더라, , 카라마츠가 이치마츠를 피하기 시작했죠. 하지만 이치마츠는 포기하지 않고 카라마츠의 주변을 맴돌았습니다. 아니, 같은 집에 사니까 맴돌았다기보단 늘 곁에 있었다고 해야 할까요. 오소마츠가 집을 비우는 날엔 카라마츠의 방 문 앞에서 밤을 지새우다 새벽녘이 되서야 자리를 떴고, 카라마츠가 혼자 있을 때엔 멀리서 카라마츠를 지켜보다가 카라마츠와 눈이 마주치면 스윽 사라지곤 했습니다. 카라마츠도 이치마츠가 싫은 건 아니었어요. 물론 카라마츠가 이치마츠에게 그런 가족 이상의 호감을 느꼈다는 것은 아닙니다.”

남자가 잠깐 말을 멈췄다가 쵸로마츠를 응시했다.

아니, 그럴 수도 있었겠네요. 이치마츠는 조용히 상대방에게 스며드는 사람이었어요. 카라마츠가 만약 이치마츠를 정말 싫어했다면 그의 주변에서 이치마츠가 맴도는 걸 견디지 못하고 오소마츠에게 도망가버렸을지도 몰라요. 오소마츠는 아기가 눈에 어른거린다고 말도 없이 찾아와 카라마츠와 아기를 꼭 끌어안고 쪽잠을 잔 뒤 돌아가기도 했고, 아기가 바깥바람을 쐴 수 있을 때가 되자 이 집을 나가 극단에선 좀 떨어져 있지만 셋이서 알콩달콩하게 살 수 있는 집을 찾자고 카라마츠에게 속삭였습니다. 카라마츠는 행복했어요. 아기는 날이 갈수록 살이 통통하게 오르고 귀여워졌습니다. 아기가 방긋방긋 웃을 때면 오소마츠가 보이기도 했고, 카라마츠가 보이기도 했습니다. 아주 가끔은, 이치마츠가 보이기도 했죠. 오소마츠와 떨어지지 않고 매일매일 그를 볼 수 있다면, 그리고 오소마츠도 아기가 커 가는 것을 카라마츠와 함께 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하지만 카라마츠는 망설였습니다. 오소마츠의 어머니가 아기를 너무 아끼고 사랑해 혹시 그들이 분가하면서 아기를 데리고 가버리면 상심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죠. 카라마츠는 시어머니를 정말 자신의 어머니처럼 사랑했고,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오소마츠는 달랐습니다. 그는 매물로 나온 집을 하나 둘 찾아 카라마츠에게 보여줬고, 아기가 뛰어놀 마당이 있고, 안전하고, 교육환경이 좋은 곳으로 이사를 가자고 계획을 뚜렷하게 짜기 시작했어요. 카라마츠는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좋았고, 아기가 빡빡한 도시와는 달리 자연 속에서 성장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소마츠가 골라온 집들이 눈에 차지 않았죠. 카라마츠가 계속해서 퇴짜를 놓았지만 오소마츠는 포기하지 않고 점점 더 많은 집들을 찾아왔습니다. 꼭 오소마츠가 조급해하는 것 같아 카라마츠는 오소마츠에게 혹시 신경 쓰이는 것이 있냐고, 아기는 아직 어리니 천천히 생각해도 된다고 부드럽게 얘기했지만 오소마츠는 아무 대답 없이 그저 카라마츠를 끌어안았죠. 오소마츠가 내색은 하지 않지만 혼자 사는 게 많이 외로웠구나, 카라마츠는 이렇게 가족들이랑 함께 있지만 오소마츠는 아침에 눈뜰 때부터 밤에 잠들 때까지 혼자였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카라마츠는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카라마츠는 눈치가 없는 거야 아님 멍청한 거야? 쵸로마츠가 미간을 찌푸렸다.

카라마츠와 오소마츠가 밤늦게까지 집들을 둘러보고 오던 날이었습니다. 오소마츠의 어머니는 이미 잠자리에 든 후였고, 오소마츠를 먼저 욕실로 보내고 카라마츠는 아이를 찾아 아기 방으로 갔습니다. 아기방이라고 해서 특별할 것은 없었고, 아기용 장난감이랑 침대, 그림책 같은걸 갖다 둔 방이었어요. 방문이 조금 열려있었습니다. 불도 켜져있었구요. 카라마츠는 아마도 시어머니가 깜빡하고 주무시러 간 모양이구나, 하고 조용히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말소리가 들렸어요. 아주 조그만 목소리가, 아빠야. 아빠라고 불러. 아빠. 하고. 이치마츠였습니다. 이치마츠가 엉거주춤하게 아기를 안고 아기의 이마에 뺨을 부비며 아빠라고 부르라고 속삭이고 있었죠. 카라마츠는 찬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놀랐습니다. 그리고 이치마츠가 그에게 보이는 비정상적인 관심과 집착을 카라마츠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어요. 카라마츠가 문을 열고 들어서려는 순간 뒤에서 오소마츠가 나타나 카라마츠의 어깨를 잡았죠. 카라마츠가 해명을 하기도 전에 오소마츠는 카라마츠를 부드럽게, 하지만 힘을 줘 뒤로 밀었고,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습니다. 잠시 후에 새근새근 잠이 든 아기를 안고 나타나 카라마츠에게 안겨주고 방으로 돌아가 있으라고 말했죠. 카라마츠는 아기를 안고 어쩔 줄 몰라 하며 문 앞을 서성였습니다. 곧 두 사람이 말다툼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뭔가를 집어 던지는 소리도 들렸고, 부서지는 소리도 들렸죠. 이러다 아기가 깨겠다 싶어 카라마츠는 빠른 걸음으로 카라마츠의 방에 아기를 안고 가 아기 침대에 눕히고, 다시 아기방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치마츠가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는 게 들렸습니다. 형이 무슨 낯짝으로 그럴 수가 있냐고, 형이 먼저 약속을 어기지 않았냐고, 왜 자기한테 딱 한번만 양보할 수는 없는 거냐고. 카라마츠는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습니다. 두 사람이 이제 치고 박고 싸우는 건지 둔탁한 소리가 들렸고, 카라마츠는 말려야겠다 싶어 문고리를 잡았지만 문은 안에서 잠겨있었어요. 오소마츠는 단 한 번도 문을 잠근 적이 없었는데. 카라마츠는 저러다 누구 하나가 심하게 다치기라도 할까봐 겁이 나 집 안을 한참 뒤져 마스터키를 찾았습니다. 차마 오소마츠의 어머니를 깨울 순 없었어요. 아들 둘이 저렇게 싸우는 걸 본다면 시어머니가 마음이 아플 게 분명했으니까요.”

형제간에 치정싸움이라니. 시어머니가 마음아파야 할 부분은 그 부분 아닌가? 쵸로마츠는 손이 조금 시려와 찻주전자를 손으로 감싸 안았다.

그러다 카라마츠는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발견했습니다. 오소마츠와 이치마츠, 그리고 그들과 똑같이 생긴, 또 하나의 쌍둥이. 세 명이 저택의 거실을 배경으로 나란히 앉아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분명히 다들 똑같이 생겼는데 카라마츠는 왠지 오소마츠와 이치마츠를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어요. 어느 부분이 다르고, 어느 부분을 보니 오소마츠고 이치마츠다 하고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카라마츠는 분간할 수가 있었죠. 그리고 카라마츠가 처음 본 세 번째 쌍둥이는 다른 형제들보다 표정이 훨씬 밝고, 더 어린애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오소마츠는 왜 이 세 번째 형제에 대해 말하지 않았던 걸까? 카라마츠는 싸움을 말리러 가는 것도 잊은 채 사진을 들고 한참동안 서있었습니다. 오소마츠와 이치마츠는 예전부터 사이가 좋아 보이지 않았으니 그려려니 해도, 왜 그들이 세 쌍둥이었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 세 번째 형제는 어디로 갔을까. 병이나 사고로 일찍 세상을 뜬 걸까? 카라마츠는 사진과 마스터키를 들고 다시 아기방으로 돌아갔습니다. 방문은 활짝 열려있었고, 불이 꺼져있었습니다. 카라마츠는 설마 하는 생각이 들어 불을 켰죠. 방 안은 난장판이었습니다. 어느 하나 성한 것 없이 모조리 박살이 나있었고, 누가 흘린 건지 알 수 없는 피가 곳곳에 튀어있었죠. 큰일 났구나. 카라마츠는 구급차를 부르려고 전화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전화기 앞엔 오소마츠가 먼저 와있었죠. 카라마츠의 발소리가 들리자 오소마츠가 고개를 돌렸습니다. 얼굴 여기저기에 멍이 들었고 손에는 피가 묻어있었어요. 카라마츠는 손에 힘이 풀려 사진과 열쇠를 떨어뜨리고 벌벌 떨면서 오소마츠의 손을 잡았습니다. 카라마츠가 혹시, 혹시, 하면서 말을 잇지 못하자 오소마츠는 씩 웃으면서 카라마츠를 끌어안았어요. 설마 내가 하나뿐인 동생을 죽이겠어? 그냥 의견차이로 다퉜을 뿐이야, 하고 카라마츠를 달랬죠. 오소마츠의 목소리엔 사람을 설득하는 힘이 있었어요. 카라마츠는 마음을 놓았고, 오소마츠의 품에 안겨 그의 멍든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그 세 번째 쌍둥이가 생각나 사진을 다시 주워들었습니다. 오소마츠는 카라마츠가 내미는 걸 보고 뭔데? 하고 고개를 숙였다가 사진을 알아보자 그걸 빼앗듯 가져가 구겨 바지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카라마츠가 이상하단 표정으로 그를 보자 오소마츠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막내동생이 어려서 사고로 죽었다고, 그의 어머니가 보면 마음이 찢어질 거라며 사진을 치워야 한다고 했죠. 오소마츠는 카라마츠와 함께 욕실로 들어가 대충 씻고 약을 발랐습니다. 카라마츠는 계속 이치마츠가 걱정되었지만 오소마츠의 앞에서 이치마츠를 찾아봐야겠다고 할 수가 없었어요. 오소마츠가 어련히 힘조절을 했겠지 싶었고, 이제 정말 이 집을 나가야겠다고 결심했죠. 이치마츠가 외로웠고, 그저 가까이 있는 사람이 카라마츠였기 때문에 그에게 품어서는 안 될 감정을 품은 거라고 생각했어요.”

카라마츠가 좋게만 생각하려고 하는 것도 카라마츠가 어려서였을까요?”

쵸로마츠는 자기도 모르게 삐딱하게 물었다. 남자는 음, 하고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건 아마도 카라마츠의 천성이었을거에요. 뭐든지 좋게, 긍정적으로만 보려고 하는 성격.”

좀 답답하네요.”

남자가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남자는 쿠키를 하나 집어 조금 베어 물곤 차를 마셨다.

새벽녘에 카라마츠는 뭔가 타는 냄새를 맡고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이 새벽에 탄내라니, 혹시 집에 불이난건가? 하고 놀라 문을 열고 나갔지만 집 안은 조용했어요. 카라마츠가 다시 방 안으로 돌아와 창밖을 내다보니 이치마츠가 담배를 입에 물고 드럼통에서 뭔가를 태우고 있었습니다. 아마 이치마츠가 쓴 걸로 보이는 종이가 가득 든 박스가 있었고, 이치마츠는 그걸 몇 장씩 꺼내 불길이 넘실거리는 드럼통 안에 던져 넣었어요. 카라마츠는 혹시 이치마츠가 많이 다쳤을까 걱정이 되어 한참 이치마츠를 훑어보았고,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습니다. 이치마츠의 표정은 어떤 감정이 담겨있다고 뚜렷하게 읽어낼 수 있는 게 아니었어요. 이치마츠가 곧 카라마츠의 눈길을 피했고, 카라마츠는 오소마츠가 뒤척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죠.”

이제 카라마츠랑 이치마츠가 도망치는 건가? 쵸로마츠는 흥미진진하게 귀를 기울였다.

그날 아침, 오소마츠의 어머니는 아들들의 얼굴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카라마츠는 여차하면 자기가 나서서 둘러대려고 변명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오소마츠의 어머니가 아무것도 묻지 않아서 좀 의아하게 생각했죠. 네 사람이 거의 식사를 마칠 무렵 오소마츠가 말했습니다. 카라마츠와 아이와 함께 이 집을 떠나 극단에서 좀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겠다고. 오소마츠의 어머니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고개를 끄덕였어요. 이치마츠는 꼭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죠. 카라마츠는 이제 아이를 데리고 오소마츠와 함께 집을 보러 다녔어요. 하지만 마음에 쏙 드는 집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창이 넓었으면, 조금 더 조용했으면, 하고 한참을 돌아다녔지만 늘 허탕을 쳤죠. 아기도 매일 차를 오래 타고 다니다 보니 힘이 들었는지 보챘고, 나중엔 감기를 앓기 시작해 카라마츠는 어쩔 수 없이 시어머니에게 아기를 맡기고 오소마츠와 함께 집을 보러 갔습니다. 완벽한 집이었어요. 남쪽으로 난 창에는 햇빛이 환하게 들어왔고, 어디 바람이 새는 곳도 없었고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깨끗하고 아늑했죠. 카라마츠는 여기다 싶어 그 자리에서 계약을 하고 오소마츠와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늦은 저녁식사를 하며 세 사람의 독립을 축하했죠.”

남자가 이야기를 멈추고, 자기 찻주전자 뚜껑을 열어 안을 들여다봤다. 그리곤 잠시 만요, 하고 찻주전자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들어갔다가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아까와 표정이 좀 달랐다. 열심히 이야기를 하던 때와는 달리, 좀 더 삭막한 느낌이었다. 쵸로마츠는 기분탓이려니, 하고 남자기 이야기를 시작하길 기다렸다. 클라이막스였다.

늦은 시간이었죠. 집 안은 조용했어요. 꼭 사람이 한동안 살지 않았던 것처럼 고요했습니다.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게 처음은 아니었는데, 카라마츠는 현관에 발을 들이는 순간 불안함을 느꼈죠. 뭔가 잘못됐다고. 그리고 바로 카라마츠와 오소마츠의 방으로 뛰어가 문을 열었습니다. 아기 침대는 비어있었어요. 아기방이 어떻게 손도 대지 못할 만큼 망가졌으니 시어머니가 거기에 아기를 둘리는 없고, 카라마츠는 다시 내려가 시어머니의 방문을 두들겼죠. 아기는 없었어요. 시어머니가 막 잠에서 깼는지 눈을 비비며 나와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카라마츠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방문을 하나하나 열어 재끼면서 아기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이치마츠를 불렀죠.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어요. 오소마츠도 다른 층에서 아기를 찾으며 방문을 열었지만 아기도, 이치마츠도 없었어요. 카라마츠는 점점 겁에 질려 미친 듯이 방문을 열다 갑자기 총에 맞은 것처럼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습니다. 한 군데가 남아있었죠. 지하실. 카라마츠는 천천히 지하실 문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습니다. 뭔가 찌덕거리는 소리가 났어요. 카라마츠는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며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손잡이를 잡고 계단을 하나씩, 하나씩 내려갔죠. 저 멀리, 시어머니의 꿀 항아리의 뚜껑이 열려있었어요. 그리고 그 앞에, 이치마츠가. 이치마츠가 꿀범벅이 된 아기를 붙잡고 살을 뜯어먹고 있었습니다. 카라마츠는 정신을 잃기 직전에 이치마츠와 눈이 마주쳤어요. 이치마츠의 눈에는 슬픔과 절망, 고통, 그리고 공포가 어려 있었죠.”

남자의 목소리가 점점 빨라지다가 꼭 단칼에 끊은 것처럼 멈췄다. 뭐야. 쵸로마츠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남자는 쵸로마츠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카라마츠는 한참을 앓았습니다. 얼마나 누워있었는지 카라마츠가 어질어질한 머리를 붙잡고 다시 깨어났을 땐 그의 곁에 오소마츠의 어머니가 앉아있었습니다. 카라마츠는 한숨을 쉬고, 이상한 꿈을 꿨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오소마츠의 어머니는 고개를 젓고 카라마츠의 손을 부여잡았습니다. 카라마츠가 사흘 밤낮을 앓았다고. 시어머니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카라마츠는 오소마츠를 찾았습니다. 젖 먹던 힘까지 짜내 오소마츠를 찾았지만 오소마츠는 나타나지 않았어요. 카라마츠가 허우적거리며 침대에서 나오려고 몸을 비틀자 오소마츠의 어머니가 카라마츠를 붙잡고 다시 자리에 눕혔습니다. 그리고 이상한 이야기를 시작했죠. 아주 이상하고, 오래된 이야기를.”

곧 끝납니다. 남자가 말했다.

오소마츠네 집안사람들은 재주가 많았습니다. 다들 한 가지씩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어 이름을 널리 떨쳤죠. 베토벤의 환생이 아니냐는 소리를 들은 음악 천재도 있었고, 세계 왕족들의 결혼 예복을 지은 디자이너도 있었고, 우주의 비밀을 조금이지만 밝혀낸 과학자도 있었습니다. 각 분야에서 거의 정상에 오른 사람이 하나도 아니고 여럿이라니. 이 집안에 대한 얘기를 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들을 부러워했죠. 그러나 이 집안사람들에게 있는 것은 사실 재능이 아니라 욕망이었습니다. 그들은 대대로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었어요. 그들에게 주어진 재능의 한계를 뛰어넘어 세상 사람들을 내려다보고자 하는 욕망이었죠. 채울 수 없는 욕망은 정신을 좀먹었고, 그 욕망으로 눈이 하얗게 뒤집어지면 사람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렀습니다. 바로 피붙이를 잡아먹는 것이었죠.”

그럼……. 그 세 번째 쌍둥이는…….”

그들은 유달리 혈육에 대한 집착이 강했습니다. 서로를 잡아먹는 집안이 대를 잇고자 하는 발악이었을까요. 오소마츠의 아버지는 화가였어요. 그는 집안 대대로 내려온 광기를 무시하고 그에게 주어진 재능만으로 성공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거기엔 한계가 있었고, 그는 점점 미쳐가다 결국 그의 동생을 잡아먹었습니다. 그리고 그걸 오소마츠와 두 동생이 지켜보고 있었죠. 아버지의 눈에 띄지 않게 숨어서, 아버지가 숙부를 뼈까지 씹어 먹는걸 벌벌 떨면서 보고 있었어요. 그리고 세 사람은 약속을 했습니다. 우린 절대 서로를 잡아먹지 말자고.”

설마…….”

하지만 약속은 깨지기 마련이죠. 제일 먼저 욕망이 차오르기 시작한 건 오소마츠였어요. 그는 늘 사람들의 중심에 서고 싶었고, 늘 특별하고 대단한 존재로 인정받고 싶어 했어요. 그는 한동안 집을 떠나 여기저기를 떠돌며 욕망을 억누르려고 애썼지만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집에 돌아온 어느 날 오소마츠는 식욕이 돌았고 동생들을 사랑하는 마음 위에 그의 욕망이 넘실거려 결국 막내 동생을 삼켜버렸죠.”

괴상한 이야기다. 남자가 꼭 실제로 있었던 일 마냥 생생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오소마츠는 원하던 것을 쟁취했습니다. 그는 순식간에 그가 원하던 사람이 되어 모두의 이목을 사로잡았어요. 어딜 가든 그는 눈에 띄었고, 자연스럽게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곤 했습니다. 이치마츠는 형의 행동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오소마츠의 어머니는 그들을 너무도 사랑했기 때문에 자식을 잡아먹은 자식마저 감싸 안았어요. 이치마츠는 그가 알고 있던 모든 게 뒤집어진 것처럼 느껴졌고, 점점 안으로 파고들었습니다. 그들의 어머니는 이치마츠가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했고, 감싸주기만 할 뿐이었어요. 그는 답답해 죽을 것 같을 때 글을 썼습니다. 시도, 소설도, 희곡도, 가리지 않고 글을 썼죠. 이치마츠는 글에 재주가 있었기에 그는 부업처럼 글을 팔아 돈을 벌었습니다. 그리고 카라마츠가 왔고,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와 오소마츠의 아이를 잡아먹었죠.”

쵸로마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입을 떡 벌리고 남자를 응시했다. 남자는 다시 말을 이었다.

오소마츠의 어머니는 카라마츠에게 정말 많은 돈을 줬어요. 차 트렁크에 현금을 가득 실어주고, 그의 이름으로 된 통장을 건네주었죠. 그리고 아기의 뼈가 들어있는 조그만 단지도 주었습니다. 카라마츠는 그 집을 떠나 한참을 헤맸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생각을 했죠. 오소마츠와 이치마츠와 그의 아기. 살이 뽀얗게 올라서 카라마츠가 이름을 부르면 팔다리를 귀엽게 버둥거렸던 아기. 늘 카라마츠에게 웃어주고 사랑한다고 속삭였던 오소마츠. 그리고 겁에 질린 눈으로 여린 살점을 뜯어먹던 이치마츠. 가끔 오소마츠로 보이는 사람이 그의 주변을 맴돌았지만 카라마츠는 멀리서 그가 보이면 바로 주거지를 옮겼습니다. 아무도 만날 수가 없었어요.”

이치마츠는 자기가 대단한 작가가 되면 카라마츠가 돌아봐줄거라고 생각한건가요?”

카라마츠는 어느 골방에서 아기의 뼈가 담긴 단지를 끌어안고 반쯤 죽어가다가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한적한 땅을 찾았죠. 어느 조용한 주택가에 주인이 방치한 공터였어요. 카라마츠는 그 곳에 작은 가게를 짓기로 했습니다. 전문 업체가 땅을 고르고 기반을 다졌어요. 그리고 바닥 공사가 거의 마무리 됐을 때 카라마츠는 한밤중에 가게로 찾아와 바닥에 아기의 뼈 단지를 묻고, 아무도 모르게 흙을 덮어 가렸습니다. 그리고 가게를 찻집으로 꾸몄죠.”

쵸로마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의 뒤를 돌아보았다. 가게 안을 가득 채운 테이블에는 아무도 없었다. 설마. 설마. 쵸로마츠는 설마, 하는 마음에 다시 남자를 돌아보았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욕망이 뭐였는지 깨달았어요. 아무도 카라마츠에게 얘기해주지 않았지만 카라마츠는 알 수 있었습니다. 깨달음과 함께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와 분노가 치밀어 올랐죠. 내 아기를, 내 행복하던 삶을 망가뜨렸는데. 나는 어떻게 이치마츠를 사랑할 수가 있지.”

그 때 가게 출입문에 매달린 종이 울렸다. 마스크를 쓰고 눈에 힘이 없는 남자가 들어오고 있었다.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걸어가 축음기를 껐다. 그와 동시에 가게 안에 있던 불이 모조리 꺼졌다. 쵸로마츠는 황급히 테이블 사이로 달리며 출입문을 향해 달렸다. 카라마츠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분노는 도저히 이치마츠를 향할 수가 없었어요.”

이치마츠의 앞을 지나치며 쵸로마츠는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지만 이치마츠는 쵸로마츠를 붙잡지 않았다. 쵸로마츠는 문을 열어젖히고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한참을 달렸다. 그는 어느 새 기숙사 뒷문에 도착해있었다. 한참동안 이야기를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한밤중이었고, 쵸로마츠가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손목시계의 시간을 확인해보니 막 열두시를 지난 때였다. 말도 안 돼. 쵸로마츠는 철문틈 사이에 손을 밀어 넣어 문을 뛰어넘으려고 했다. 하지만 쵸로마츠가 철문을 잡는 순간 문이 부글부글 끓으며 천천히 녹아내려 쵸로마츠는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그의 눈앞에 연보라 빛으로 반짝거리는 너울이 날아다녔다. 넘어지면서 머리를 박은 걸까. 쵸로마츠는 정신이 아찔해 머리가 빙빙 돌았고, 눈앞에서 낮과 밤이 쉴 새 없이 바뀌는 것을 멍하니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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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오소마츠는 이치마츠를 견제하는 것 마냥 더 자주 전화를 걸고, 집에 돌아올때면 카라마츠에게 더 집요하게 달라붙어 관계를 요구했어요. 꼭 그게 카라마츠의 사랑을 증명하듯. 카라마츠는 아이가 신경 쓰였지만 오소마츠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게 싫지 않았죠. 목요일에 갑자기 카라마츠를 데리고 나가 근처 러브호텔에서 주말까지 머무르기도 했고, 본가에 있을 땐 하루 종일 카라마츠를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며 애무했어요. 카라마츠는 행복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날 버리지 않고, 가끔 기분이 오락가락하며 신경이 예민해져도 오소마츠는 그저 카라마츠가 좋다고, 사랑스럽다고 안아줬으니까요. 어느 순간 카라마츠가 밤늦게 혼자 영화를 보고 있어도 이치마츠가 나타나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랑 친해질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하고 아쉬워했죠. 하지만 카라마츠가 먼저 이치마츠의 방문을 두드리며 같이 영화를 보자고 할 수는 없었어요. 시어머니에게 물어보니 이치마츠는 글을 쓴다고 했습니다. 소설, , 희곡 이것저것 두루 쓰면서 책도 몇 권 냈다고. 하지만 그 말을 듣고 카라마츠가 한참 서재를 뒤졌지만 이치마츠의 책은 찾을 수가 없었어요. 잘 팔리기는 한데 가족들에겐 보여주지 않는다고 시어머니가 서운해 했죠. 그러던 어느 날, 오소마츠가 오랫동안 준비하던 연극을 무대에 올린다고 온 가족을 초대했어요. 그의 어머니, 이치마츠, 카라마츠까지. 배가 그렇게까지 불러오진 않았지만 카라마츠는 신경이 쓰여 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들어갈 때, 나올 때만 조심하면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을 거라고 카라마츠를 안심시켰어요. 그리고 연극 당일, 이치마츠와 카라마츠, 그리고 오소마츠의 어머니가 함께 극장을 찾았습니다. 규모가 꽤 컸어요. 카라마츠는 자리를 찾아 가면서 이러면 배우들 눈에도 띄지 않겠다고 안심했죠. 다른 생각을 해서 그런지, 카라마츠가 계단에서 옆으로 넘어가다 발을 헛디뎌 휘청거리자 이치마츠가 손목을 낚아채 카라마츠를 붙잡았습니다. 카라마츠가 어색하게 고맙다고 인사했지만 이치마츠는 아무 대답 없이 카라마츠를 그의 곁에 앉혔어요. 그리고 연극이 시작됐습니다. 훌륭했어요. 수많은 배우들 사이에서 오소마츠 혼자 반짝거리며 빛났죠. 카라마츠는 연극의 절정에서 그만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카라마츠가 조용히 훌쩍거리자 이치마츠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고 그걸 꼭 붙잡은 채로 연극의 마지막까지 눈을 돌리지 않았어요. 연극이 끝났습니다. 오소마츠의 어머니는 오소마츠와 그 동료들에게 인사를 하고 오겠다고 앞으로 나갔고, 카라마츠는 차마 극단 사람들을 볼 수가 없어 조용히 극장을 빠져나왔죠. 곧 이치마츠가 뒤따라 나와 차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카라마츠는 그제야 손에 꽉 쥐고 있던 손수건을 눈치 채고 미안하다고, 집에 가서 세탁해서 돌려주겠다고 사과했어요. 하지만 이치마츠는 고개를 젓고 손수건을 가져가 다시 바지 주머니에 넣었죠. 그리고 잠깐 있다가, 그 아이를 정말 낳을 거냐고. 이치마츠가 물었습니다. 예전에 그가 카라마츠를 비웃는 것과는 다른 목소리였어요. 카라마츠는 이치마츠가 그렇게 아이가 싫은 건가,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건가 싶어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고개를 끄덕이면서 사랑하는 오소마츠의 아이고, 한 번도 아이를 낳으리라곤 생각해본 적이 없었지만 이건 기적이라고 대답했어요. 자긴 포기하고 싶지 않은 기적이라고. 이치마츠가 깊은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리고 오소마츠의 어머니가 돌아와 세 사람은 집으로 돌아갔어요.”

카라마츠는 불임이었나요? 어린 나이라 아이를 가질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고 해도, 보통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같이 살면서 아이를 낳고 싶다고 생각했을 법 한데.”

쵸로마츠가 물었다.

어렸으니까요.”

남자가 짧게 대답하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라 쵸로마츠는 더 묻지 않기로 했다.

그 뒤로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에게 조금 더 다정하게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카라마츠와 함께 영화를 보기 시작했고, 책장에 꽂힌 비디오 중에 자긴 이 영화가 재미있었다고 추천해주기도 했어요. 알고 보니 두 사람의 영화 취향이 비슷해서 내일은 그 영화를 보자고 약속을 하고 만나기도 했습니다. 카라마츠가 집 주변을 산책하러 간다고 하면 말없이 따라와 같이 걷기도 했고, 카라마츠가 용기를 내 이치마츠가 쓴 글을 읽어보면 안 되겠냐고 묻자 부끄러워하면서 책을 내주기도 했어요. 나쁘지 않았죠. 어딘가 모르게 오소마츠 같은 느낌도 나서, 카라마츠는 두 사람이 정말 형제인가봐요, 하고 책을 돌려주었습니다. 그게 이치마츠를 불쾌하게 만들었는지 그 뒤로 이치마츠가 다시 책을 보여주는 일은 없었죠. 시어머니는 이치마츠의 책이 꽤 팔리는데, 베스트셀러까지 가지는 못했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재능이 있지만 천재가 아닌 수재의 수준이라고.”

이치마츠가 쓴 책을 가지고 계세요?”

저 쪽에 꽂혀있는데. 나중에 보여드릴게요.”

남자가 축음기 옆에 서있는 책장을 가리켰다. 이치마츠의 글이 궁금했다.

어느새 시간이 흘러 산달에 다다랐습니다. 카라마츠는 불안해했죠. 오소마츠는 휴가를 내고 본가에 머무르면서 카라마츠를 돌봤습니다. 가끔 자다가 카라마츠가 벌떡 일어나 너무 불안하고, 무섭고, 혹시나 잘못될까봐 걱정된다고 울면 오소마츠는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기가 카라마츠의 뒤를 따라갈 거라고 달랬습니다. 이 집은 이치마츠가 독차지 한다는 게 아쉽지만, 하면서 농담을 하기도 했죠. 카라마츠가 배에 손을 대고 있으면 태동이 느껴졌습니다. 이치마츠는 오소마츠가 집에 계속 머무르자 카라마츠와 거의 마주치지 않았지만 간혹 오소마츠가 자리를 비울 때 와 카라마츠가 잘 있는지 들여다보곤 했습니다. 카라마츠가 이치마츠에게 배를 만져보라고 하면, 이치마츠가 오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배를 만져보고, 카라마츠를 말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곤 했죠. 이치마츠가 감격한 건지, 아님 생리적인 불쾌함을 느끼는 건지 카라마츠는 한참 생각을 해봤지만 알 수가 없었어요.”

오소마츠는 꽤 괜찮은 남편이네요.”

남자가 빙그레 웃었다.

맞아요. 좋은 사람이었어요. 그러다 카라마츠가 아이를 낳는 날이 왔죠. 카라마츠는 병원에 가고 싶어했지만 오소마츠의 어머니가 한사코 의사를 부르겠다고 카라마츠를 말렸어요. 오소마츠는 카라마츠의 편을 들어주지 않고 그저 카라마츠의 손을 붙잡고 어쩔 줄 몰라 했고, 카라마츠가 고통에 까무러쳤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아이는 세상 밖으로 나온 뒤였습니다. 카라마츠의 배엔 긴 수술 자국이 남아있었죠. 의사는 이미 돌아갔다고 시어머니가 카라마츠에게 아기를 안겨주었습니다. 카라마츠가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사랑스럽고 예쁜 아기였어요. 오소마츠도 카라마츠의 곁에 매달려서 펑펑 울었고, 카라마츠는 한참 아기를 들여다보다가 잠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꿈을 꿨어요. 이번에는 아기가 없는 꿈이었습니다. 오소마츠를 닮은 남자가 카라마츠의 곁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늘 방안을 뛰어다니던 아이는 구석에 서서 방문을 쳐다보고 있었죠. 카라마츠는 한참을 떨다 꿈에서 깼습니다. 그렇지만 그건 그냥 꿈이었어요. 오소마츠가 곁에 있었고, 아기가 곁에 있었죠.”

, 쵸로마츠는 그제야 눈치 챘다. 아마도 이건 이치마츠가 쓴 소설의 내용일 것이다. 이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남자는 사실 이치마츠고, 오소마츠와 카라마츠, 그리고 자기가 등장하는 이야기를 한껏 지어놓고 쵸로마츠에게 꼭 실제로 있었던 일처럼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글 쓰는 사람의 오만인가. 이렇게 찻집을 하고 있는 걸 보면 글을 써서 버는 돈이 얼마 되지 않아 부업을 해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 남자가 잠깐 찻주전자 안을 들여다보는 동안 쵸로마츠는 여태 들은 이야기의 화자에 저 남자를 끼워보았다. 어린 카라마츠가 잘생긴 오소마츠와 연애를 하다 아이를 낳고, 그의 쌍둥이 동생인 이치마츠와 위험한 관계에 있으면서 눈치 채지를 못하다니. 좀 진부했다. 그렇지만 쵸로마츠는 쿠키를 집으면서 이 이야기를 소설로 읽는 다면 좀 재미가 덜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이야기를 하는데 재주가 있었다. 꼭 연극배우처럼.

아기가 태어나고, 오소마츠는 2주간 더 머무르다 어쩔 수 없이 극단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는 한참 아기를 손에서 놓지 못하고 힘들게 돌아서야 했죠. 카라마츠는 하루 종일 아기를 돌보면서 그에게 온 기적에게 감사하고 아기가 건강하게만 자라줬으면, 하고 기도했죠. 그의 시어머니가 아기를 돌봐주겠다고 나서느라 그렇게까지 육아가 힘들지는 않았어요. 카라마츠는 다시 무대에 오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건 카라마츠의 오랜 꿈이었고, 어쩌면 이 경험이 그가 연기를 하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오소마츠가 읽었던 것으로 보이는 연극과 연기에 관한 책들을 쌓아놓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오소마츠의 어머니가 병원에 데리고 간다며 집을 비운 날이었습니다. 카라마츠는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었죠. 그때 이치마츠가 서재 문을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카라마츠가 반가워하면서 책을 내려놓자, 이치마츠가 카라마츠가 앉은 소파에 조심스럽게 앉아선 카라마츠의 손을 잡았죠. 자기랑 도망가자고, 이 집은 아기에게 너무 위험하다고. 카라마츠는 깜짝 놀라 손을 빼면서 그게 무슨 소리냐고 재차 물었지만 이치마츠는 대답도 하지 않고 계속 아기를 이런 곳에서 키워서는 안 된다고, 아이에게 다른 기회를 줘야 된다고 하면서 카라마츠에게 매달렸습니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가 왜 자기가 평생 살아온 집에 대해 그렇게 얘기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또 사랑하는 사람의 동생인 이치마츠가 자기를 그런 식으로 대하는 게 불편했어요. 꼭 이치마츠가 카라마츠를 사랑하는 것처럼. 카라마츠는 혹시나 하고 드는 의문을 애써 무시하면서 서재를 도망치듯 빠져나와 방으로 돌아갔죠. 이치마츠가 쫓아와 문을 두드렸지만 카라마츠는 듣고 싶지 않으니까 가달라고, 못들은 걸로 하겠다고 소리쳤어요. 문을 잠그지도 않았는데, 이치마츠는 문을 열고 들어오지도 않고 문 앞만 맴돌다가 사라졌습니다. 카라마츠는 밤새 이 얘기를 오소마츠에게 해야 되나 하고 고민했지만 형제를, 그것도 쌍둥이 형제를 서로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고 또 카라마츠가 오해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잊어버리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뒤로 이치마츠와 단 둘이 남는 때를 피했고, 더 이상 밤늦게 영화를 보지도 않았죠.”

그럴 줄 알았지. 쵸로마츠는 속으로 혀를 차며 차를 마셨다. 어느 새 차가 식어 쵸로마츠는 직접 찻주전자에 뜨거운 물을 따랐다. 뜨거운 물이 담겨있던 주전자도 가벼워져 남자가 물을 더 끓여오겠다고 주전자를 들고 부엌으로 돌아갔다. 쵸로마츠는 차를 홀짝이다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무도, 단 한명도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고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날 저녁은 오소마츠의 어머니가 성대하게 저녁식사를 차렸습니다. 카라마츠도, 시어머니라고 부를까요. 그게 헷갈리지 않고 좋을 것 같네요. 카라마츠도 시어머니를 도우려고 했지만 시어머니는 자기가 다 하겠다고 카라마츠를 부엌에서 내보내고 두 형제를 불러오라고 부탁했습니다. 부엌을 나왔지만, 저택은 하도 넓고 복도가 이리 저리 꺾여있던터라 카라마츠는 어디에 형제들이 있을지 알 수가 없었어요. 카라마츠는 일단 그가 시어머니와 이치마츠를 만났던 거실로 가서, 이치마츠가 사라진 복도 쪽으로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복도는 중간 중간에 불이 켜져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둡고, 꼭 옛날 드라큘라 영화에 나올법한 오래된 집이었어요. 벽에는 그림에 문외한인 카라마츠가 보기에도 대단한 작품들이 걸려있었고, 조각품이 전시되어있었죠. 카라마츠는 하나하나를 감상하면서 복도를 걷다가, 2층 복도 끝에서 누군가 말다툼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두 사람이구나 싶어 카라마츠는 다가가 문손잡이를 잡았죠. 그 순간 말다툼하는 소리가 딱 멈추고, 오소마츠가 문을 열었습니다. 오소마츠는 웃으며 카라마츠의 이마에 살짝 입 맞추고 문손잡이를 잡고 있는 카라마츠의 손을 떼어냈습니다. 동생이랑 잠깐만 얘기하다가 갈게. 하고. 문 너머에서 이치마츠가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카라마츠는 어쩔 수 없이 얼른 얘기를 끝내고 내려오라고 하고 부엌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마 이 남자는 자기가 영화에서 본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런 스토리의 영화가 뭐가 있을까. 쵸로마츠도 영화를 꽤 많이 봤다고 생각했는데 딱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카라마츠와 그의 시어머니가 한참을 기다리고 나서야 오소마츠와 이치마츠가 식당으로 내려왔습니다. 주먹다짐은 하지 않았는지 누가 다친 기색은 보이지 않았어요. 오소마츠는 늦어서 미안하다고 웃으며 카라마츠의 곁에 앉았고, 식사를 시작했습니다. 이치마츠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대충 끼적거리기만 하다가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카라마츠는 마음이 불편했어요. 앞으로도 계속 볼 사람인데 이치마츠는 카라마츠가 싫어 오소마츠와 다투기까지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죠. 식사를 마치고 오소마츠는 카라마츠를 자기 방으로 데려갔습니다. 오소마츠의 방은 3층 끝에 있어 저택을 둘러싼 숲이 훤히 보이는 곳이었어요. 카라마츠가 창밖을 내다보니 집 뒤편에 양봉장이 있었습니다. 오소마츠의 어머니가 취미로 양봉을 한다고, 오소마츠가 고개를 저었죠. 오소마츠는 카라마츠를 끌어안고 날 믿고 따라와줘서 고맙고, 앞으로도 행복하게 살자고. 카라마츠와 아기가 자기에게 와줘서 정말 기쁘다고 속삭였습니다. 카라마츠는 행복했죠. 결혼식은 꿈도 꾸지 못했지만, 어쩌면 둘이서 결혼식 비스무리한 걸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한창 나이의 연인답게 두 사람은 한참 사랑을 속삭이다 늦은 시간에 잠이 들었죠. 그리고 카라마츠는 다시 악몽을 꿨습니다. 이번에도 세 사람이 꿈에 나왔어요. 오소마츠를 닮은 아이가 뛰어다니고, 갓난아기가 울면서 엄마를 찾고, 문 앞에는 오소마츠를 닮은 남자가 서서 두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카라마츠가 자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신음소리를 내자 오소마츠가 카라마츠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악몽이라도 꾼 거냐고. 카라마츠는 오소마츠의 품에 안겨 꿈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소마츠는 가만히 카라마츠의 이야기를 듣다가 그건 전부 카라마츠가 아직 불안해서 그런 거라며 카라마츠를 다독였죠.”

결혼식은 왜 하지 못한다는 거지? 카라마츠의 나이가 어려서? 쵸로마츠는 차를 다시 한 모금 마셨다. 남자는 오래 이야기를 하면 지친다더니, 영 이야기를 멈출 생각이 없어보였다. 하지만 흥미로운 이야기다. 악몽에 나오는 사람들은 누굴까?

다음날 오소마츠는 다시 시내로 돌아갔습니다. 오소마츠는 주연을 맡았고, 그가 하는 일들이 많아 어쩔 수 없이 카라마츠와 떨어져야 했죠. 카라마츠는 집 대문 앞까지 나가 오소마츠를 배웅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오소마츠의 어머니는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와 친해져볼까 싶어 어제 이치마츠와 오소마츠가 싸우던 방으로 갔습니다. 카라마츠가 노크를 하자 잔뜩 화가 난 표정의 이치마츠가 문을 열었습니다. 우리 잠깐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하고 카라마츠가 물었지만, 이치마츠는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으며 너 같은 정신 나간 애랑은 할 얘기 없어, 하고 문을 쾅 닫았죠. 생각보다 이치마츠가 자길 노골적으로 싫어해 카라마츠는 상처받았고, 다시 문을 두드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다른 방을 하나하나 구경하기 시작했습니다. 집은 굉장히 넓었고, 쓰는 사람이 없어 손님방이라고 생각했던 방마다 그 방의 소유주였던 사람의 흔적이 가득 남아있었어요. 어느 방에는 한쪽 벽을 완전히 가릴 정도로 큰 책장에 가득 악보가 꽂혀있었고, 어느 방에는 카라마츠가 읽을 수 없는 언어로 쓰여진 상 같은 것이 액자에 담겨 다닥다닥 걸려있었죠. 이젤과 먼지가 쌓여가는 캔버스로 가득찬 방이 있었고, 옷을 만들 때 쓰는 마네킹 같은 것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방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오소마츠의 가족들은 끼가 많은 사람이었겠구나 싶어 카라마츠는 괜히 웃음이 나왔죠. 그가 사랑하는 오소마츠도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였고, 뭐든지 잘하는 남자였으니까요. 집 뒤편으로 나가자 오소마츠의 어머니가 막 양봉할 때 입는 옷을 벗으며 카라마츠를 향해 손을 흔들었습니다. 그녀의 손에는 갓 딴 꿀로 가득찬 유리병이 들려있었어요. 시어머니는 카라마츠에게 우리 손주를 건강하게만 낳아주렴, 하고 유리병을 건네주었죠. 갓 딴 꿀을 드셔본 적이 있으신가요?”

남자가 갑자기 쵸로마츠에게 물었다.

글쎄요, 슈퍼에서 파는 꿀밖에 못 먹어본 것 같은데. 맛있나요?”

남자가 고개를 저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건 정말이지, 그저 달콤하다고 수식하기엔 죄스러울 정도에요. 카라마츠가 꿀을 한입 맛보고 감탄하자 오소마츠의 어머니는 그에게 보여줄 것이 있다며 카라마츠의 손을 잡고 지하실로 내려갔습니다. 어두컴컴한 방 한 구석에 거대한, 거의 카라마츠의 키만한 높이의 꿀 항아리가 있었어요. 유리로 된 것이라 안에 황금빛 꿀이 가득 차 있는 게 보였죠. 카라마츠는 보고 깜짝 놀라서 이 많은 꿀들을 시어머니가 모으신 거냐고 물었고, 시어머니는 자랑스럽게 그렇다고 말했죠. 아마 자기가 죽은 뒤에 카라마츠의 아이가 평생을 먹어도 다 먹지 못할 양일 거라고 하면서.”

꿀이 상하지 않는다고 들은 적이 있긴 하지만, 조금씩 꿀을 모아서 그렇게 보관해도 되는 걸까?

오소마츠는 수요일, 그리고 금요일에 본가로 돌아와 카라마츠를 만났습니다. 일이 많을 때는 카라마츠에게 전화해 카라마츠가 잠들 때까지 가지 못해서 미안하고, 정말 사랑한다고 이야기했죠. 카라마츠는 좀 아쉬웠지만, 카라마츠는 그렇게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오소마츠가 더 멋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카라마츠가 오소마츠와 전화를 끊고 나면 무대에 대한 미련이 남아 밤잠을 설쳤죠. 카라마츠는 아직 어렸으니까요. 그렇다고 아이와 오소마츠를 원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어떻게 아이가 생긴 건지는 몰라도 카라마츠는 오소마츠만큼 아이를 사랑했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카라마츠는 밤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조용히 방문을 나와 큰 TV가 있는 방으로 갔습니다. 그 방에는 오소마츠가 좋아했다던 영화 비디오들이 많이 있었죠. 카라마츠가 그 중에 재밌어 보이는 걸 하나 골라 비디오 플레이어에 넣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한 삼십분쯤 봤을까, 누군가 조용히 방문을 열었죠. 이치마츠였습니다. 카라마츠는 놀라 혹시 소리가 시끄러웠으면 미안하다며 볼륨을 줄였습니다. 하지만 이치마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TV화면을 보다가, 카라마츠가 앉아 있는 소파 끝에 털썩 앉아 같이 영화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가 신경 쓰여 자리에서 일어날까 했지만 혹시 그게 이치마츠를 불쾌하게 하지는 않을까 싶어 계속 영화를 봤습니다. 좀 슬픈 영화였어요. 카라마츠는 어느새 영화에 빠져들어 눈가에 눈물이 고였고, 이치마츠는 카라마츠를 빤히 보다가 물었죠. 영화가 재밌었냐고. 카라마츠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치마츠는 그런가,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습니다. 그 후로 가끔 카라마츠가 밤늦게 그 방에서 영화를 보고 있으면 꼭 이치마츠가 중간에 나타나 영화를 같이 보곤 했습니다. 따로 약속을 하지도 않았는데, 또 영화는 전부 카라마츠가 고른 영화였는데 이치마츠는 중간에 나가지도 않고 끝까지 카라마츠와 함께 영화를 봤습니다.”

불륜느낌이 나는구만. 쵸로마츠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남자는 쵸로마츠의 표정을 보고 그의 찻주전자에 다시 뜨거운 물을 따라주었다.

지루하십니까?”

아니요, 재밌습니다.”

남자가 웃었다.

다행이네요. 이야기가 지루해지면 꼭 말씀해주세요. 주말이 되면 오소마츠는 카라마츠와 함께 교외로 드라이브를 나갔습니다. 사실 그 집도 도시 외곽에 간신히 걸쳐 있었지만, 오소마츠는 혹시 카라마츠가 우울해하지는 않는지, 가족들하고 문제가 있진 않은지 계속 신경을 썼고, 카라마츠는 그런 다정한 오소마츠가 좋았어요. 날씨가 좋을 땐 도시락을 싸서 소풍을 가기도 했습니다. 나무그늘에 돗자리를 깔아놓고 카라마츠는 오소마츠의 무릎을 베고서 낮잠을 자고, 오소마츠는 카라마츠의 머리를 쓰다듬거나 혹은 카라마츠가 눈을 뜰 때까지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췄어요. 연극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일할 때의 얘기를 하고, 카라마츠가 연극에 대한 미련 때문에 침울해하면 오소마츠는 혹시 카라마츠가 밤에 외롭지 않느냐며 농담을 했죠. 카라마츠를 집에 두고 나갈 때마다 오소마츠는 카라마츠가 자기를 버리고 도망가버릴까봐 잠을 잘 수가 없다고 하면서요. 카라마츠는 그제야 생각이 난 듯 이치마츠와 자주 영화를 본다고 얘기했습니다. 둘이 영화를 보기로 한 게 아닌데 이치마츠가 어떻게 알았는지 꼭 와서 영화를 같이 보게 된다고. 오소마츠는 순간적으로 표정을 굳혔지만 카라마츠는 그게 그저 카라마츠가 잠들지 못하는 것 때문에 걱정을 한 거라고 생각했어요. 곧 오소마츠는 혹시 그 음침한 놈이 나랑 똑같은 얼굴이라 대신보고 만족하는 거냐며 웃었죠. 그런가? 카라마츠도 웃으면서 생각을 하는 척 하다가, 아니, 이치마츠는 이치마츠대로 다른 분위기가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치마츠는 좀 슬프고, 음울하고, 신기하리만큼 오소마츠와 정반대라고. 두 사람이 어렸을 때 어땠냐고 카라마츠가 물었지만 오소마츠는 대답을 피하고, 카라마츠에게 키스했습니다. 평소와는 달리 잡아먹는 듯한 키스였어요. 이런 야외에서 하면 자극적이지 않겠냐고 오소마츠가 속삭이자 카라마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오소마츠를 밀쳐냈습니다.”

남자의 이야기가 만약 실화라면 아마도 남자는 오소마츠일 거라고 쵸로마츠는 생각했다. 자기 자신을 보고 순식간에 자신을 사랑하게 만드는 남자라고 묘사하다니. 나르시스트인가? 남자는 제법 잘생겼다. , 한번 보고 말 사람인데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으니까.

쿠키 좀 더 먹을 수 있을까요? 나중에 같이 계산하겠습니다.”

쵸로마츠가 머쓱해하며 빈 접시를 내밀자 남자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제가 같이 먹자고 한 건데요. 맛있으셨다니 다행이네요.”

남자가 빈 접시를 들고 다시 부엌으로 사라졌다. 이번에는 다른 종류의 쿠키가 접시에 담겨있었다. 남자가 직접 굽는 건가? 쵸로마츠는 사양하지 않고 하나를 집어먹었다. 남자는 뿌듯하다는 표정으로 쵸로마츠를 보곤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상 카라마츠에겐 첫사랑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오소마츠도 카라마츠를 사랑했죠. 두 사람은 거의 모든 일들을 함께 했어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서로에게 전화를 하고, 출근하기 전에 만나 같이 아침을 먹고, 같이 일을 하고, 같이 퇴근해서 저녁을 먹고. 곁에서 봤으면 눈꼴시다고 했을 법한 그런 연애를 했어요.”

남자가 살짝 웃었다. 카라마츠는 이 남자에게 어떤 사람일까. 쵸로마츠는 곰곰이 생각했다. 저렇게 자세하게 알 정도면 카라마츠는 남자의 여동생이거나, 혹은 누나거나 하지 않을까. 잠시 만요.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서 부엌으로 가더니 접시에 쿠키를 몇 개 담아와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렇게 길게 얘기를 한 게 오랜만이라 조금 지치네요. 같이 드시죠.”

내가 계산해야 되는 건가? 쵸로마츠는 긴가민가하면서도 사양하지 않고 쿠키를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달콤한 설탕 맛이 혀끝에서 녹아내렸다.

이야기에서 이렇게 행복한 부분은 쉽게 질려버립니다. 조금 뛰어넘어볼까요.”

남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카라마츠는 아이를 가지게 됩니다. 당연히 오소마츠의 아이였죠. 카라마츠는 사랑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카라마츠가 아이를 가지리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어 크게 놀랐습니다. 기적 같은 일이었죠. 카라마츠는 아직 어렸고, 아이를 갖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다가 오소마츠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오소마츠와 연락을 끊고 혼자 방에 틀어박혀 괴로워했습니다. 밤에는 이상한 꿈을 꾸었죠. 카라마츠가 울다 지쳐서 잠이 들면 오소마츠를 닮은 아이가 카라마츠의 머리맡에서 뛰어다니고, 오소마츠가 방문 앞에 서서 잠든 카라마츠를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기어 다니지도 못하는 어린 아기가 침대 밑에서 엄마를 찾으며 빽빽 우는 이상한 꿈이었어요. 그러면 카라마츠는 마치 가위에 눌린 것처럼 꼼짝도 하지 못하고 세 사람과 함께 밤을 지새웠죠.”

확실히 무서웠겠네요. 남자라서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카라마츠는 나이도 어리고.”

남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연락을 끊은 지 나흘이나 지났을까. 오소마츠가 새벽부터 카라마츠의 집 대문을 두들겼습니다. 사실 카라마츠는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기 때문에 오소마츠가 찾아오기 힘들었어요. 하지만 카라마츠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렇게 말도 없이 연락을 끊어버리자 오소마츠는 견디다 못해 카라마츠의 부모님과 한판 할 각오를 하고 카라마츠를 찾아온 겁니다. 부모님 마음에 들진 않았겠죠. 카라마츠는 아직 어렸고, 오소마츠는 직장 상사 같은 사람인데다가,”

남자가 잠깐 말을 멈췄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직장 상사 같은 사람인데다가, 배우라는 직업은 불안정하니까요. 딸을 가진 부모님에게 오소마츠의 연기력이라던가 카리스마를 설명하며 이 사람의 가능성을 믿어달라고 하는 건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카라마츠는 연애하는 것도 숨기고 있었는데, 오소마츠가 여기에 카라마츠가 있냐고 대문을 두드리니 집에선 난리가 났습니다. 부모님이 당황해 오소마츠를 집으로 들이자 오소마츠는 대뜸 허리를 깊게 숙이며 이 댁 따님과 교제를 하고 있는데 카라마츠와 연락이 되지 않아 찾아오게 되었다고 말했죠. 오소마츠가 대문을 두드리며 카라마츠를 찾는 소리를 듣고 카라마츠가 잠옷 차림으로 헐레벌떡 뛰어와 오소마츠를 맞닥뜨렸습니다. 오소마츠도 눈 밑이 퀭했고, 입술이 다 터서 카라마츠를 보고 달려가 끌어안았습니다. 부모님은 안중에도 없이. 왜 연락을 받지 않았으며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냐고,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거냐고 오소마츠가 반쯤 울먹거리자 카라마츠는 자기도 모르게 오소마츠에게 얘기해버렸죠. 임신했다고.”

그 뒤의 얘기는 다른 드라마들이랑 비슷하죠. 남자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부모는 도저히 딸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더러운 벌레를 보듯 저주를 하면서 카라마츠를 잠옷 바람으로 쫓아냈습니다. 오소마츠는 펑펑 울면서 자리에 주저앉는 카라마츠를 품에 안고 이젠 다 괜찮다고, 자기만 믿으면 된다고 하면서 자기 집으로 데려갔죠.”

오소마츠는 카라마츠가 임신한 걸 듣고도 놀라지 않았나요?”

쵸로마츠가 묻자 남자는 쵸로마츠의 주전자에 아직 식지 않은 뜨거운 물을 부어주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소마츠는 놀라지 않았어요. 놀라지 않은척한걸지도 모르죠.”

배우니까요.”

그렇죠. 배우니까요. 오소마츠의 집은 시내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굉장히 크고, 을씨년스러운 저택이었어요. 카라마츠가 깜짝 놀라 오소마츠를 돌아보자 오소마츠는 극단 일 때문에 시내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고, 여긴 본가라고 얘기했죠. 카라마츠는 부담스러워졌어요. 이런 집에 오소마츠가 혼자 살았을리도 없고, 오소마츠의 가족들이 과연 카라마츠를 받아줄 수 있을까. 카라마츠는 오소마츠에게 오소마츠가 살던 자취방에서 함께 살수는 없냐고 물었지만 오소마츠는 극단 동료들이 자주 오소마츠의 자취방을 찾아오기 때문에 카라마츠가 마음 놓고 있을 수가 없다고 거절했어요.”

카라마츠와 오소마츠가 사귀고 있는 걸 극단 사람들도 다 알지 않았나요?”

알고 있었죠.”

그런데 카라마츠가 임신한 걸 왜 극단 사람들이 알면 안 되는 거죠?”

남자는 한숨을 푹 쉬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건 저도 알 수가 없는 문제네요. 아마 둘만의 사정이 있었겠죠.”

남자는 정말 이유를 모르는 걸까? 쵸로마츠는 처음으로 남자의 말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오소마츠가 카라마츠를 데리고 저택으로 들어가니 그의 가족들이 나와서 카라마츠를 맞이했죠. 그의 어머니와, 오소마츠의 쌍둥이 동생. 오소마츠는 단 한 번도 카라마츠에게 동생이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없어 카라마츠는 깜짝 놀랐죠. 하지만 오소마츠의 동생은 오소마츠와 정말 닮았지만, 분위기는 정반대였어요. 어둡고, 조금은 음울한 분위기에 눈에 힘이 없었죠. 이 동생의 이름은, 이치마츠라고 할까요.”

쌍둥이 동생이 있다는 얘기를 안 하다니. 오소마츠와 이치마츠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쵸로마츠는 쿠키를 하나 더 집었다.

오소마츠의 어머니는 푸근하게 생긴 중년 부인이었습니다. 오소마츠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카라마츠는 자신의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오소마츠의 어머니와 이치마츠에게 욕을 먹고 저주받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오소마츠의 어머니는 카라마츠의 손을 부여잡고 고맙다고, 정말 잘 된 일이라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카라마츠는 예상외의 반응에 놀라 오소마츠를 돌아보았으나 오소마츠도 웃으며 카라마츠의 어깨에 손을 얹었죠. 하지만 이치마츠는 조금 달랐습니다. 이치마츠는 표정이 조금 굳었다가 그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불 꺼진 복도로 사라져버렸습니다. 아마도 이치마츠가 자길 탐탁치않게 여긴다고 생각한 카라마츠는 풀이 죽었지만, 오소마츠의 어머니가 카라마츠에게 얼마나 놀랐겠느냐, 힘들었겠느냐 하고 달래주는데 마음이 풀렸고, 이치마츠와도 잘 지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쵸로마츠는 남자가 그저 카라마츠와 그저 조금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야기의 묘사가 점점 자세해지고 있었다

룸메이트는 오늘도 외박을 했다. 쵸로마츠는 방에 혼자 남아 시계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기숙사 창문 너머로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어두운 방 벽에서 번쩍거렸다. 오늘은 혼자 있고 싶지 않아. 하지만 지금 기숙사에 남아있는 사람 중에 쵸로마츠가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는 편은 아닌데, 이렇게 늦은 시간에 사적으로 불러 대화를 할 만한 사람을 사귀지 못했다. 쵸로마츠는 한참 이불을 뒤집어쓰고 뒤척이다 결국 잠자기를 포기하고 외투를 입었다. 벌써 열한 시가 넘었으니 기숙사 문을 닫았을 시간이다. 하지만 오늘 밤 쵸로마츠는 조금 일탈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쵸로마츠는 기숙사 담을 뛰어 넘었다. 고등학교 때도 해보지 않은 짓을 이제야 해보다니. 쵸로마츠는 외투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한참 걸었다. 목적지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발 닿는 대로 반쯤 잠든 도시의 거리를 이리저리 헤집고 싶었다. 노란 가로등 불빛에 그림자가 길게 지는 골목을 따라 걸으며 쵸로마츠는 이 골목의 끝에 뭔가 새로운 것이, 쵸로마츠의 무료한 일상에 알록달록하게 색을 입혀줄 무언가가 있지는 않을까하고 기대했다.

과연 뭔가가 보였다. 고만고만한 크기의 주택가의 끝에 꼭 성냥갑 같은 작은 가게가 불을 밝히고 있었다. 쵸로마츠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열두시를 한참 넘긴 시간이었다. 혹시 아직 영업을 하고 있을까? 이 시간에만 문을 여는 곳일까? 뭘 파는 가게일까? 쵸로마츠는 가게에 가까이 다가가 창 너머로 가게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창가에 두꺼운 커튼을 반쯤 묶어놔 안이 잘 보이지 않았으나, 가게가 제법 넓었고, 테이블마다 사람들이 한 명씩 앉아 뭔가를 홀짝이고 있었다. 찻집인 모양이었다. 혹시 비싼 가게면 어쩌나 싶어 쵸로마츠는 창 너머로 아마도 계산대 위에 붙어있을 메뉴판을 찾았으나 그런 것은 보이지 않았다. 쵸로마츠는 잠깐 고민을 하다 문을 열고 가게에 들어섰다.

문에 붙은 작은 종이 울렸다. 하지만 가게 안에 앉아있는 사람들 중 단 한 명도 쵸로마츠를 돌아보지 않았다. 가게 안은 훈훈했고, 구석에 놓인 축음기에서 조용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기요.”

쵸로마츠가 계산대 앞에 서서 사람을 찾았다. 잠시 후에 아마도 부엌으로 보이는 곳에서 젊은 남자가 얇은 커튼을 헤치며 나타났다. 아마도 주인인 모양이었다. 남자의 외모는 꽤 매력적이었다. 자세가 곧았고 이목구비가 뚜렷했다. 남자가 미소 짓자 입이 시원하게 호선을 그리며 입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쵸로마츠는 남자가 여자들한테, 아니, 남자들한테도 제법 인기가 좋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지갑을 꺼내들었다.

커피 될까요?”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여기는 하루에 딱 한 가지 메뉴만 팔고 있습니다.”

쵸로마츠는 다른 손님들이 마시고 있는 것을 흘끗 돌아보았다. 다들 같은 음료를 마시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오늘은 뭘 마실 수 있나요?”

메뉴는 단 한가지뿐입니다. 오늘의 차를 팔고 있어요. 다만 차의 재료가 매일 매일 달라질 뿐.”

이상한 가게다. 쵸로마츠는 왠지 그 오늘의 차라는 것도 꺼림칙해 가게를 나가려고 했으나, 어느새 주인은 쵸로마츠의 팔꿈치를 잡고 빈 테이블로 안내하고 있었다.

앉아계세요. 곧 차를 내오겠습니다.”

쵸로마츠를 테이블에 앉히고 남자는 커튼 뒤로 사라졌다. 쵸로마츠는 좀 걱정이 되었으나 의자가 편해 곧 마음이 풀어졌다. 잠시 후에 남자가 투명한 유리 주전자와 찻잔을 내왔다.

유리 주전자 안에는 여러 색의 이파리 같은 것들이 떠다녔다. 짙은 선홍색인 것이 있었고, 투명하게 노란 것도, 새벽하늘을 한 자락 잘라놓은 것처럼 파란 것도 있었다. 남자는 쵸로마츠의 테이블 앞에 서서 차를 찻잔에 따랐다. 찻잎 색과는 다르게 찻물은 연한 녹색이었다.

잠깐만 기다렸다가 드세요. 많이 뜨겁거든요.”

남자는 쵸로마츠의 맞은편에 앉아 쵸로마츠에게 미소 지었다. 주인이 차를 따라주고 테이블에 앉아 접객을 하는 찻집이라니. 낭패다. 쵸로마츠는 얼른 차를 마시고 가게를 떠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벌써부터 찻값이 걱정되었다. 쵸로마츠는 찻잔을 들어 살짝 입술을 축였다. 차향이 독특했다. 한 모금 마셔보니 온몸에 온기가 퍼졌다. 나쁘지 않다. 물도 좋은 물을 쓴 것 같고, 찻잎도, 아니, 저게 보통 말하는 찻잎 같지는 않지만 꽤 향이 좋았다.

이 늦은 시간에 어딜 다녀오는 길이셨나요?”

남자가 물었다. 쵸로마츠는 차를 홀짝이다 찻잔을 내려놓았다.

다녀오는 길이 아니라 나오는 길이었습니다. 산책이죠.”

여기가 산책할만한 곳은 아닌데, 어딜 가려고 하셨는데요?”

목적지를 정해 두진 않았어요. 그냥 걷고 싶었거든요. 뭔가 재밌는 걸 찾고 싶기도 했고.”

, 남자가 테이블에 팔꿈치를 얹고 턱을 괴었다. 시선은 저 멀리 가게 전면창 너머를 향해있었다. 쵸로마츠도 남자의 시선을 따라 창을 돌아보았다. 지나가는 사람도 한 명 없이, 어두운 골목뿐이었다.

사실 우리 가게에는 눈에 확 띄게 재미있는 건 없어서, 안타깝네요.”

쵸로마츠는 속으로 생각했다. 고향 친구들한테 이런 가게에서 차를 마셨다고 하면 미쳤나고 할걸요. 남자는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쵸로마츠를 돌아보았다.

제가 아는 사람 얘기 중에 꽤 흥미로운 얘기가 있는데, 혹시 들어보실래요?”

나쁘지 않지. 쵸로마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자기 몫의 찻주전자와 찻잔, 그리고 뜨거운 물이 가득 든 주전자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 쵸로마츠의 유리주전자에 뜨거운 물을 더 부어주고, 자기 몫의 주전자에 물을 부었다. 남자의 찻주전자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보이지가 않았다.

제 친구 이름을 뭐라고 할까요. , 일단 카라마츠라고 불러봅시다.”

남자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상한 이름이네. 쵸로마츠는 다시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남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카라마츠라고 하니 남자이름 같지만 사실 여자에요. 하지만 이름은 바꾸지 않을게요.”

쵸로마츠가 피식 웃었다. 여자 이름이 카라마츠라니, 남자는 센스가 없었다.

카라마츠는 연극배우가 되고 싶어 성인이 되기도 전에 극단을 들어갔습니다. 학업에는 흥미가 없어 일찍이 학교를 그만두고 배우를 할 수 있는, 최대한 빨리 무대에 오를 수 있는 극단을 찾았죠.”

딱 사기당하기 좋은 먹잇감인데. 배우가 되겠다는 여고생이라니. 쵸로마츠는 벌써부터 카라마츠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카라마츠는 물어물어 어느 작은 극단을 찾았습니다. 비록 단원이 많지는 않았으나 제법 인지도가 높은 극단이었죠. 특히 엔터테인먼트 회사 관계자들이 자주 연극을 보러와 신인 연기자를 발탁해가기로 유명한 곳이었어요. 카라마츠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연극배우도 괜찮지만, TV에 나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하고 매달렸고, 운 좋게도 오디션을 통과해 극단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카라마츠가 연예인이 되는 이야기인가? 아님 연극배우로 대성한다던가? 쵸로마츠는 어느새 차를 한 잔 다 비우고 새로 차를 따랐다.

극단 생활은 나쁘지 않았어요. 카라마츠는 단원들과 두루두루 잘 어울렸고, 그러다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상대 남자의 이름은 뭐로 할까요. 여자 이름이 카라마츠니, 남자는 오소마츠라고 부를게요.”

쵸로마츠는 웃지 않으려고 애썼다. 남자가 잔잔하게 웃으면서 얘기하는 것으로 봐선 아마 남자가 그런 유머를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쵸로마츠도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변변찮은 남자였나봐요.”

남자가 씩 웃었다.

이름은 변변찮았지만, 오소마츠는 제법 연기를 잘 하는 배우였습니다. 동시에 극단에서 큰 영향력을 휘두르는 중요한 사람이었고, 카라마츠가 오소마츠에게 호감을 갖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몰라요. 오소마츠는 자기 개성이 강한 배우들 사이에서도 늘 중심에 서서 사람들을 이끌었고, 뻔뻔하리만치 자신감이 넘쳤죠. 아마 오소마츠를 좋아하는 사람도 꽤 있었을 텐데, 카라마츠가 오소마츠를 낚아채버렸죠.”

그럼 다른 여자들이 카라마츠를 질투했나요?”

아니요. 이상하지만 아무도 카라마츠를 질투하지 않았어요. 한명쯤은 시기했을 법도 한데 그렇지 않고 모두가 두 사람을 축복하고 응원해줬죠. 그런데 딱 한 명이 카라마츠를 따로 불러내 오소마츠를 조심하라고 귀띔해주었죠. 하지만 카라마츠는 사랑에 눈이 멀어 듣지도 보지도 않고 오소마츠에게 푹 빠져버렸습니다. 그만큼 오소마츠가 매력적이었어요. 어떨 때는 장난꾸러기 소년 같았고, 어떨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모든 걸 이해해주는 포용력 넓은 남자 같았고.”

남자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순식간에 자기를 사랑하게 만드는 사람.”

쵸로마츠는 기억을 되짚어 여태 만난 사람들을 떠올려보았지만 오소마츠 같은 사람은 없었다. 타고난 연예인 타입인가? 남자는 잠깐 이야기를 멈추고 찻주전자 뚜껑을 열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쵸로마츠는 찻잔의 온기를 느끼며 남자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길 기다렸다

전신이 욱신거렸다. 카라마츠는 온몸이 아프고 지쳐 반쯤 잠들었다가 불현듯 구역질이 올라와 그 집에서 뛰쳐나왔다. 고요한 밤, 온 거리에 크리스마스 장식이 가득한 날이었다. 크리스마스 이틀 전, 그리고 카라마츠가 첫 경험을 한 날이었다.

급하게 뛰쳐나오다 보니 외투도 제대로 걸치지 못했다. 카라마츠는 공원 벤치에 앉아 낡은 자켓을 힘겹게 여미며 몸을 옹송그렸다. 귀가 홧홧하게 달아오르고 입에서 단내가 났다. 아마 열이 좀 오른 모양이었다. 코끝이 차가워 고개를 들어보니 먼지 같은 눈이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나를 사랑한다고 했다. 카라마츠는 이를 악물었다. 형은 좋은 사람이었다. 길거리에서 노숙을 하던 카라마츠를 깨워 따뜻한 도시락을 사주고 자기 집으로 데려가 쉴 수 있게 해줬다. 바람이 들지 않는 방에서 자는 게 좋았다. 형이 아침 일찍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는 날이면 카라마츠는 그보다 더 일찍 일어나 밥을 짓고 국을 끓였고, 형을 배웅하고 나면 비록 작은 원룸이었지만 구석구석을 쓸고 닦았다. 진짜 가족 같았다. 죽은 듯이 누워있지도 않고, 일주일에 두세 번밖에 보지 못하면서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눈 적 없는 가족이 아니라, 매일 얼굴을 맞대고 그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초라하지만 따뜻한 밥을 나눠먹는 가족 같았다. 행복했다.

어제도 행복하고 오늘도 행복했어. 형은 크리스마스 내내 아르바이트를 해야 한다며 편의점 케이크와 달콤한 술을 사왔다. 카라마츠는 한 번도 크리스마스를 챙겨본 적이 없었다. 형이 조그만 케이크에 초를 켜고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분명히 캐롤로 시작했을 텐데 생일축하 노래로 끝나버린 이상한 노래였다. 어두운 방 안에서 케이크위에 꽂힌 초만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지만 꾹 참고, 형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게 걱정되어 발을 동동 굴렀다.

케이크 싫어해?”

형이 케이크를 잘라 주면서 걱정스럽게 물었다. 카라마츠는 고개를 젓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선물 준비를 못 했어…….”

형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코르크 마개를 따 카라마츠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단 냄새가 났다. 카라마츠는 잔을 들어 냄새를 맡아보고, 살짝 혀를 대보았다. 싸한 알콜 냄새와 단 맛이 어우러진 이상한 맛이었다.

건배하고 마셔야지.”

형이 자기 잔에도 술을 가득 따르고 잔을 들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카라마츠는 천천히 술을 마셨다. 목이 타들어갈 것 같았지만 카라마츠는 한 번에 잔을 비웠다. 역시 형이 좋아했다. 카라마츠는 나이는 어려도 어른이라니까. 형이 다시 잔을 채웠다. 케이크는 한 입쯤 먹었나. 카라마츠는 형이 따라주는 대로 단 술을 전부 마셨다. 나중에는 머리가 핑핑 돌고 속이 울렁거려 그만 마시고 싶었지만 형은 계속해서 술을 따랐다. 그러다 잠이 든 것 같기도 하고, 기절한 것 같기도 하고.

정신이 들었을 땐 몸이 반으로 접혀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다. 형이 한 번도 본적 없는 무서운 얼굴을 하고 카라마츠의 양 손목을 잡아 눌렀고, 카라마츠는 몸이 반으로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왔다. 아파. , 아파. 미처 아프다고 느끼기도 전에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 내렸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형이 짓누르는 무게가 무섭고, 꼼짝없이 그 밑에 깔려 힘없이 흔들린다는 무력감이 무서웠다. 한 번도 뭔가가 들어갈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곳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형은 카라마츠가 깬 걸 보고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카라마츠의 귓가에 속삭였다. 네가 예뻐서 그래. 네가 좋아서 그런 거야. 네가 널 사랑하게 만들어서 그러는 거야. 그 말을 듣고 카라마츠는 마음 놓고 엉엉 울었다. 형이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울어도 버리지 않겠지, 하는 마음에 카라마츠는 어린애처럼 울면서 형의 이름을 불렀다. 형은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몸짓이 빨라졌다.

추운데 앉아있어서 그런 건지 몸이 더 굳은 것 같았다. 형이 헉헉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다시 돌아가야 할까? 가고 싶지 않았지만, 카라마츠는 갈 곳이 없었다. 그때 저 앞에서 덜컹 하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들어보니 카라마츠 또래의 남자애가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었다. 그 아이도 카라마츠의 시선을 느꼈는지 이쪽을 바라보았다. 카라마츠처럼 집을 나온 건지 행색이 초라했다. 더벅머리에 커다란 마스크를 써 눈 한쪽밖에 보이지 않았고, 몸에 맞지 않게 큰 옷을 겹겹이 입어 우스꽝스러웠다. 카라마츠는 자기도 모르게 말을 걸었다.

거기서 뭐해.”

남자애는 잠깐 멈칫하다가 아무런 대답도 없이 다시 쓰레기통을 뒤졌다. 한참 깡통이 구르는 소리가 났다. 그러다 남자애가 누군가 먹다 버린 과자봉지 같은걸 찾아내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리 겨울이래도 그런 걸 먹으면 병 걸릴 텐데. 혼자 살려면 제일 중요한건 건강이야. 저 초짜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카라마츠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남자애에게 다가갔다. 그 아이는 발소리가 들리자 놀란 고양이처럼 휙 카라마츠를 돌아봤다. 눈에 경계심이 가득했다.

어디 가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

카라마츠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말했다. 남자애는 눈을 가늘게 뜨고 카라마츠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믿던가 말던가. 카라마츠는 몸을 돌려 근처 편의점으로 갔다. 걸을 때마다 골반이 아프고 다리도 쑤시고, 어깨도, 등도, 아니 전신이 다 아파왔다. 그렇지만 아까 그 아이처럼 바짝 마른 애는 쓰레기 같은걸 먹으면 바로 앓아누울게 분명해서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주머니의 동전을 다 털어 작은 컵라면을 샀다. 카라마츠는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 다시 아까 그 공원으로 돌아갔다. 있을까, 없을까. 남자애가 없으면 그냥 카라마츠가 먹어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남자애는 아까 카라마츠가 앉아 있던 벤치에 쪼그리고 앉아 카라마츠가 간 방향을 보고 있었다. 내 어딜 믿고 기다린 걸까. 믿는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건데. 카라마츠가 컵라면을 들고 있는 걸 보자 남자애가 눈을 크게 떴다.

뜨거우니까 천천히 먹어.”

카라마츠는 남자애에게 컵라면을 건네주고 곁에 털썩 앉았다. 남자애는 컵라면을 두 손으로 잡아 손을 녹이다가, 젓가락으로 면이 풀어진 걸 확인하고 허겁지겁 라면을 먹었다. 저러다 입천장 벗겨질 텐데. 하지만 카라마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 멍하니 눈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눈이 조금씩 쌓이고 있었다. 앙상하게 마른 나뭇가지에 눈이 쌓여 하얗게 빛났다.

남자애는 순식간에 컵라면을 비우고 바닥에 빈 용기를 내려놓았다. 카라마츠는 그새 또 깜빡 잠이 들었다가 남자애가 카라마츠를 잡아 흔드는 바람에 깼다.

아파?”

남자애가 머뭇거리며 말을 걸었다. 카라마츠는 말없이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다시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가 않았다. 어제도, 오늘도 행복했는데, 내일도 그러리라고 믿었는데. 카라마츠가 다시 잠에 빠져들려고 하자 남자애가 카라마츠의 양 겨드랑이에 손을 밀어 넣어 카라마츠를 일으켰다. 그냥 내버려두라고 하고 싶었는데, 말이 제대로 소리도 내지 못하고 흩어졌다. 남자애는 카라마츠를 질질 끌고 공원 안쪽에 있는 공중 화장실로 데려갔다. 중간에 몇 번씩이나 쉬었지만 남자애는 결국 카라마츠를 남자 화장실 안에 밀어 넣고 자기도 따라 들어와 문을 닫았다. 어두웠지만 창문도 닫혀 있었고 꽤 따뜻했다. 남자애는 카라마츠를 구석에 앉혀놓고 멀찍이 앉아 카라마츠를 지켜보았다. 시선이 따가워서 카라마츠는 눈을 감았다가 간신히 떴다.

병원 가야되는 거 아냐?”

병원 갈 돈 없어.”

부모님은?”

없어.”

남자애가 멈칫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카라마츠는 잠깐 그 집에서 아직도 자고 있을 형을 떠올렸다. 나를 찾으러 나올까? 자다가 내가 없어진 걸 알고 깜짝 놀라서 찾지 않을까? 하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이렇게 사라져버리면 형이 걱정할 테고, 또 카라마츠가 생활비를 벌어오지도 못하니까, 그 정도는해야 되지 않을까. 머리가 복잡했다. 그렇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은걸.

카라마츠가 자기도 모르게 마지막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는지, 남자애가 물었다.

왜 돌아가기 싫어?”

설명하기 힘들다. 카라마츠는 별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고 옆으로 누웠다. 바닥이 차가웠지만 카라마츠의 체온으로 곧 데워질 것이다. 뼛속까지 찬 기운이 올라왔지만 카라마츠는 애써 눈을 붙였다. 이렇게 있다 보면 잠이 오지 않을까. 자는 동안에는 아프지가 않다. 계속 잠만 자고 싶어.

그 때, 따뜻한 것이 카라마츠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들어 적당한 높이의 뭔가에 얹었다. 카라마츠가 간신히 눈을 떠보니 남자애의 다리였다.

, 바지에 닦았어.”

남자애가 변명하듯 손을 들어보였다.

그래……. 고마워.”

카라마츠는 웅얼거리고 남자애 쪽으로 몸을 틀어 웅크렸다. 남자애가 조심스럽게 어깨를 토닥이는 게 느껴졌다.

어딘지 모르겠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으면 나오는 게 좋아.”

어렴풋하게 남자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나오는 게 좋겠다. 카라마츠는 대답을 하려고 했지만 제대로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잠에서 깼을 땐 이미 해가 떠있었다. 남자애는 이미 떠난 뒤였다. 그 대신 남자애가 입었던 것 같은 크고 낡은 옷이 카라마츠의 위에 덮여있었다. 카라마츠는 기지개를 쭉 폈다. 허리가 좀 쑤시는 것 외엔 몸이 가뿐했다. 형도, 그 집도 잊어버렸다. 왠지 새로운 곳으로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카라마츠는 화장실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남자애는 보이지 않았다. 이름도 안 물어봤네. 그 애도 갈 곳이 없었으면 같이 가도 좋았을 텐데. 카라마츠는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었다. 언젠가 또 만날 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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