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아침, 눈을 뜨니 눈앞에 연한 노란빛의 천장이 있었다. 천장이 노란색이라는 건 어머니에게 들어 알고 있었기에 그게 노란색임을 알았다. 언젠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회색이 아닌 다른 색의 천장을 보리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그게 오늘이어서는 안됐는데. 나는 멍하니 누워 천장을 하염없이 노려봤다. 계속 노려보고 있으면 그게 회색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천장은 그대로 노란색이었다. 아니, 누군가 천장을 회색에서 노란색으로 바꾼 게 아니다. 그저 내가 진실을 마주하게 되었을 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곁을 돌아보았다. 일 년 전인가, 우리 중에 가장 먼저 첫사랑을 하게 된 토도마츠가 꿈꾸는듯한 표정으로 형제들에게 방안에 있는 것들의 색깔을 하나하나 가르쳐주었다. 창문은 짙은 갈색이고, 희끄무레한 색의 창문을 열면 짙푸른 색의 나무들 사이로 불그스름한 태양이 천천히 떠오르고, 그 햇살이 잠기운에 어두컴컴한 방안을 비추면. 나는 고개를 돌렸다. 저 이불 끝자락에 네가 있었다. 너는 희지도 검지도 않았다. 어둔 푸른색이었다.

 

나는 거짓말을 하는데 서툴러 비밀을 오래 간직할 수가 없었다.

? 쵸로마츠가 2등이라고? 말도 안 돼!”

오소마츠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젓가락을 휘둘렀다. 다들 어이없다는, 그리고 질투난다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해 허겁지겁 밥을 씹어 삼켰다. 형제들 중 누군가가 대체 내 상대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나는 둘러댈 방법이 없었다. 아니, 오늘 새벽부터 한참동안 고민을 해봤지만 네 앞에서 다른 사람의 이름을 대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자리를 피할 생각만 하고 있었다. 멍청한 자존심, 가련한 고집.

그 행운의 주인공은 누구지, 쵸로마츠?”

아직 잠이 덜 깨 잠긴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나는 밥그릇에 든 것을 입으로 다 털어놓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오늘 주번이라서. 먼저 갈게.”

양치 안 해?”

학교 가서 할 거야.”

챙겨 입은 교복이 내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뒤로 형제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내 눈을 뜨게 해준 사람이 같은 반일거라고. 같이 주번을 할 여학생이라던가. 현관문을 닫았다. 눈앞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잠깐 걱정을 접어두고 세상 구경을 했다.

가로수에 매달린 나뭇잎은 손끝으로 톡 건드리면 쏟아질 것 같은 진한 녹색이었다. 도로 위를 따라 달리는 노란색, 빨간색의 자동차들, 보드라운 주황색의 고양이들. 그리고 머리 위로 끝도 없이 투명한 하늘이 솟아 있었다. 길옆으로 반짝이며 흐르는 저 시냇물을 수천 겹 쌓아올리면 저렇게 깊고 푸른 하늘빛이 되지 않을까. 순간 새벽에 봤던 네 얼굴이 떠올랐다.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파란색으로 그늘진 얼굴은 아무 근심걱정도 없다는 표정으로 잠들어있었지. 나는 길가에 서서 눈을 꼭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여전히 세상은 오색찬란한 빛깔로 반짝이고 있었다. 사랑을 눈으로 확인한다는 건 복잡한 기분이었다.

 

첫 음악수업이었다. 우린 다른 반이었지만 B반과 C반이라는 이유로 음악수업을 함께 들었다. 음악선생은 출석부에 마츠노가 둘인 것을 보고 우리가 전교에 소문이 자자한 쌍둥이들이라는 걸 알아챘고, 곧 환하게 웃으며 나와 카라마츠를 맨 앞자리에 나란히 앉혔다.

여섯 명이 다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정말 똑같이 생겼구나!”

구경거리가 되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나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수줍게 웃었다. 예체능 전공으로 대학을 갈 게 아니었기에 음악 성적이 그렇게까지 중요하지는 않았지만, 음악 선생은 다른 교사들에게 이런 저런 소문을 퍼뜨리기로 유명했다. 어차피 다른 형제들이 중학교에서 그랬던 것처럼 온갖 말썽을 피우며 점수를 깎아먹겠지만 나는 다른 형제들과는 다르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다른 형제들보다 더 공부를 잘하고,

두 마츠노 군 중에 하나가 노래를 잘 부른다고 들었는데.”

사회생활도 잘하고,

접니다.”

더 평범하고,

그럼 카라마츠 군이 한 곡 불러볼래?”

더 똑똑하고,

기타도 쳐도 될까요?”

더 정상적이라고.

 

네 노래를 들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 우린 쌍둥이고, 신체기관 하나하나가 완전히 똑같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텐데, 너는 왜 이렇게 나와 다를까. 네 목소리는 왜 이렇게 깊고, 맑고, 듣는 사람의 심장을 녹여내는지. 네가 1분 남짓 노래를 하는 동안 나는 맨 앞자리에서 네 숨소리를 들으며 냉정하게 생각해보려고 노력했어. 너는 작년부터 기타를 배우러 다녔고, 나는 도서관에서 늦게까지 공부를 하다가 오느라 네가 기타를 치는 걸 거의 보지 못했다고. 너는 운동도 열심히 해서 나보다 폐활량이 좋았을 거고, 그래서 노래를 잘하는 거라고.

아니, 나는 그렇게 앞뒤를 따져볼 수가 없었어. 네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기타를 내려놓고, 음악선생이 호들갑을 떨며 칭찬을 하고, 그리고 다시 내 옆으로 돌아와 앉았을 때 나는 내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걸 깨달았어. 네가 불렀던 싸구려 유행가가 귓가에서 맴돌았고, 자기 전에는 기타 줄을 튕기는 손가락이 눈앞에서 어른거렸지. 그때부터 걱정을 하기 시작했어. 너 말고 다른 사람은 눈 안에 들어오지 않는 이 때 내가 색을 보게 될까봐.

 

하루종일 형제들을 피해 다녔다. 이치마츠와 함께 듣는 미술수업엔 몸이 아프다고 빠지고 양호실 침대에 숨어있었고, 점심시간에는 그늘진 운동장 구석에서 형제들에게 둘러댈 수 있는 핑계거리를 생각해내느라 하루 종일 골머리를 썩였다. 사실 같은 반 여자애 이름을 아무거나 둘러대면 끝날 일인데 다른 사람 이름을 입에 올리려고 하면 얼굴 표정이 일그러져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라는 게 들통나버릴 것 같았다. 손발이 차갑게 식어있었다. 나는 얼음물에 한참 담갔던 것 같이 시린 손으로 열 오른 뺨을 식히다 문득 같은 반 애들 사이에서 퍼졌던 소문이 떠올랐다. 학교 정문에서 나와 두 블록정도를 가면 보이는 허름한 가게에선 다른 가게에선 구할 수 없는 것들을 판다고. 담배도, 술도, 그리고,

 

약을 먹어서 볼 수 있던 거야.”

나는 자켓 주머니에서 약봉투를 꺼내 형제들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그런 약을 진짜 팔아?”

, 들어본 적 있어. 진짜 사랑에 빠진 것처럼 들뜬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던데, 진짠가보네.”

형제들은 내 손에서 약봉투를 빼앗듯 가져가 바닥에 부었다. 약은 둥글고 납작한 하얀색이었다. 색을 보게 해주는 약이라고 하기엔 너무 평범하게 생긴 모양새였다. 가격도 터무니없이 비쌌고.

이거 불법 아냐?”

이치마츠가 의심스럽다는 듯 약봉투를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그렇겠지. 약사가 주는 게 아니었으니까.”

도대체 이런 약은 어떻게 만드는 걸까?”

쥬시마츠가 약을 한 알 집어 들어 혀끝으로 살짝 핥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

먹으면 기분이 좋아져서 애들이 사다가 먹나봐. 그리고 색을 계속 보려면 매일 먹어야 하고.”

나는 카라마츠의 시선을 피하며 토도마츠의 곁에 주저앉아 약을 한 알씩 주워 봉투에 담았다.

체리마츠가 진짜 사랑에 빠진 게 아니라니, 재미없어.”

약을 먹어서 색이 보이는 거면 2등도 아니지 않아?”

편법이지! 스테로이드다!”

역시 체리마츠, 난 또 진짜 연애하는 줄 알았다니까.”

그렇지만,”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카라마츠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쵸로마츠는 들뜬 표정이 아닌걸.”

나는 약봉투를 내려놓고 걸어가 방을 나섰다. 방문 너머로 형제들이 약을 먹어보자며 떠들썩하게 노는 소리가 들렸다.

들뜬 순간은 아주 잠깐이었어, 카라마츠. 흑백이 아닌 진짜 세상을 보게 되어서 기쁜 것보다 내가 이 감정을 변명해야 하고 거짓말을 해야 된다는 부담이 더 컸고, 또 그 거짓말을 이 서투른 감정이 식을 때까지 질질 끌고 가야 한다는 슬픔이 더 무거웠어. 나는 그랬어.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카라마츠가 색을 보게 되었다고 새벽부터 형제들을 깨워 자랑을 했다. 상대는 연극부 선배로 대단한 미인은 아니었지만 카라마츠는 선배가 버림받은 여자 연기를 하며 눈물을 흘리는 걸 보고 자신이 선배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그 눈물을 닦아주고, 그 사람은 선배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설득하고 싶었다고. 나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그날 학교 수업을 마치고 길을 한참 걷다보니 그 가게 앞이었다. 날은 어두워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지고 있었고, 나는 주머니를 더듬어 용돈이 얼마나 남았는지 생각해보았다. 약은 여전히 비쌌다. 나는 더도 덜도 말고 딱 열 알을 사서 책가방 깊숙한 곳에 쑤셔 넣었다

오늘 밤엔 사랑하는 꿈을 꾸고 싶었다

 

아얏!”

, 하고 통조림이 가득 든 나무상자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쵸로마츠는 색깔별로 쌓고 있던 통조림을 내려놓고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토도마츠가 오른손 검지를 왼손으로 꽉 붙들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쵸로마츠는 눈을 잔뜩 찌푸리고 토도마츠의 손가락에 무슨 상처라도 났는지 보려고 했지만 너무 멀어 보이지 않았다. 쵸로마츠의 곁에서 통조림을 나눠 쌓고 있던 쥬시마츠가 들고 있던 걸 모조리 바닥에 집어던지고 창고를 가로질러 달려갔다. 쥬시마츠의 다급한 발소리와 통조림이 쏟아지는 소리가 창고 안에 가득 울려 퍼졌고, 바닥에 깔린 먼지가 풀썩 일어났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토도마츠! 괜찮아?”

쥬시마츠가 순식간에 토도마츠의 곁에 달라붙어 토도마츠의 손가락을 들여다보았다. 피가 나는 건가? 붕대는 부엌 찬장에 있었다. 쵸로마츠는 손에 끼고 있던 면장갑을 벗어 그 자리에 내려놓고 옷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었다. 크게 다친 건 아닌 것 같으니 붕대만 가져오면 되겠지? 쵸로마츠는 다시 토도마츠를 흘끔 돌아보았다. 쥬시마츠가 한껏 진지한 표정을 하고 토도마츠의 손가락을 이리저리 들여다보고 있었고, 토도마츠가 좀 훌쩍거리는 것 같더니 바지에 손가락을 쓱쓱 문질러 닦았다.

붕대 가져올게.”

얼른 갔다 와!”

쥬시마츠가 손을 흔들었다. 오늘 오후 노동은 이 정도에서 마무리를 해도 될 것 같았다. 일해야 하는 시간을 다 채우지 못한 게 좀 찝찝했지만, 창고 정리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지금 세 명이나 자리를 비운 상태니까 나머지 세 명만 일하는 건 억울하지. 쵸로마츠는 뻣뻣한 목을 풀면서 창고 문을 나섰다.

많이 아파?”

못이 튀어나와있을 줄 몰랐어. 저거 망치로 튀어나온 부분 좀 눌러놔야겠다.”

오는 길에 망치도 들고 와야겠군.

 

카라마츠는 순식간에 미지근해진 물수건을 찬 물이 담긴 대야에 넣고 더운 기가 가시길 기다렸다. 물수건을 계속 빨았더니 대야에 담긴 물도 점점 미지근해져 물수건을 한 번 더 빨면 물을 새로 떠와야 할 것 같았다. 아까 카라마츠가 이치마츠를 업고 와 자리에 눕히자마자 해열제를 먹였는데도 열이 내리질 않았다. 카라마츠는 새빨갛게 열이 오른 얼굴을 한참 보다가 마른 수건에 손을 닦고 이치마츠의 이마에 살짝 손을 얹었다. 동그스름한 이마가 뜨끈뜨끈하게 끓고 있었다. 대야에 담구고 있던 손이 시원했는지 이치마츠의 표정이 조금 풀어져서, 카라마츠는 양 손으로 이치마츠의 얼굴을 살살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잠을 자고 있는 건지, 아파서 앓고 있는 건지. 카라마츠는 답답했지만 이치마츠를 흔들어 깨울 수는 없었다.

약을 한 번 더 먹여야 되나? 아니면 다른 약을 먹여야 되나? 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약은 종류도 얼마 되지 않았고, 빨아서 계속 쓸 수 있는 붕대와는 달리 소모품이었기에 다들 아껴서 먹고 있었다. 이치마츠는 몸이 약해 툭하면 앓아누웠다. 그럴 때마다 카라마츠는 해열제를 타다가 먹이려고 했지만 오소마츠는 툭하면 약을 내주지 않았다. 도대체 두 사람은 왜 사이가 안 좋아진 거지?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얼굴에서 손을 떼고 대야에서 한참 식힌 물수건을 꺼내 물기를 짰다.

어렸을 땐 여섯 명이 다 같이 몰려다녔다. 특히 쥬시마츠가 형제들이랑 떨어지면 죽기라도 할 것처럼 울어재꼈기 때문에 쥬시마츠를 그들 가운데에 끼우고, 여섯 쌍둥이가 방주의 수많은 방들을 탐험하고 강당에 가득 쌓여있는 간이 의자들로 성을 짓고 놀았다. 의자로 얼기설기 쌓은 그들만의 성 안에 들어가면 카라마츠는 방주가 곧 세상처럼 느껴졌고, 그 성이 곧 그들을 구원해줄 작은 방주 같았다. 그 안에 형제들과 함께 들어가 있으면 가만히 있기만 해도 행복했다. 쥬시마츠가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그들 중에 가장 먼저 글을 깨친 이치마츠가 도서관에서 읽은 책 이야기를 더듬더듬 들려주기도 했다. 이치마츠가 일곱 난쟁이와 공주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오소마츠가 카라마츠의 손을 꼭 붙잡으며 난쟁이 같은 게 방주 안으로 쳐들어오면 자기가 다 물리치겠다고 속삭이던 게 엊그제 같은데,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고 방주 안이 답답해지기 시작하면서 형제들은 꼭 모여서 활동을 해야 할 때가 아니면 각자의 구역으로 들어가 나오질 않았다.

카라마츠는 있는 힘껏 물기를 짠 손수건을 펼쳐 이치마츠의 이마 위에 얹었다. 왕자의 입맞춤으로 공주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하며 자기도 공주와 뽀뽀를 하겠다고 눈을 반짝이던 동생은 어느새 아버지보다 큰 어른이 되어서 카라마츠가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짓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서재에 대체 뭐가 있기에 오소마츠가 잘 때도 손에 꼭 쥐고 놓지 않는 열쇠를 빼돌려 들어가려고 했던 걸까?

카라마츠는 순간 그 좁은 틈새로 이치마츠가 속삭인 말이 다시 떠올랐다. 우린 속고 있다고. 이치마츠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우린 누구에게 속고 있는 건데? 우린 어떤 거짓을 진실이라 믿고 있는 거야? 카라마츠는 대야를 저 구석으로 밀어놓고 이치마츠의 이불 밑으로 기어들어가 이치마츠를 조심스럽게 끌어안고 이치마츠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이치마츠의 온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어렸을 때부터 이치마츠의 병간호는 늘 카라마츠 담당이었다. 이치마츠는 자기 밑으로 동생이 둘이라고 형아 노릇을 하면서도 단 둘이 있을 땐 카라마츠에게 어리광을 부리곤 했다. 카라마츠가 어설프게 물수건을 짜 이마에 얹고, 물을 떠먹여주며 병간호를 하고 있으면 이치마츠는 팅팅 부은 눈으로 카라마츠를 돌아보며 안아달라고 울먹였다. 카라마츠가 이불 밑으로 들어가 이치마츠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거리다 보면 따뜻한 체온에 둘 다 골아 떨어져서, 잠에서 깰 무렵이면 이치마츠는 말끔하게 나아있었다.

안 비좁아?”

카라마츠가 그때 그랬던 것처럼 눈을 감고 잠에 막 빠져들려는 순간, 문가에서 오소마츠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라마츠는 간신히 눈을 떠 문가로 고개를 돌렸다. 오소마츠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심통난 표정으로 카라마츠를 보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조금 민망해져 일어나 앉았다. 문밖에서 찬바람이 들어오는 게 느껴졌는지 이치마츠가 몸을 돌려 카라마츠의 다리에 팔을 둘러 안았다.

열이 내리질 않아서 안아주고 있었어.”

변명할 필요 없어. 그런 거 따지려고 하는 거 아니니까.”

오소마츠가 수면실 문을 닫고 들어와 카라마츠의 옆에 주저앉았다. 그리곤 바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이치마츠의 머리맡에 툭 던졌다. 해열제였다. 카라마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오소마츠와 이치마츠가 툭하면 으르렁거리고 싸우긴 해도 둘은 형제였고, 오소마츠도 동생을 아끼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나중에 이치마츠가 일어나면 오소마츠가 약을 챙겨주더라고 넌저시 말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면 이치마츠도 오소마츠에게 고마워할 거고, 그럼 삐죽삐죽하게 세웠던 가시도 조금 수그러들겠지.

오소마츠는 손이 시리다는 듯 양손바닥을 비비다 이불 밑으로 집어넣었다.

오후 노동은 빠진 거야?”

너랑 이치마츠가 걱정된다고 약 갖다 주고 오겠다고 하고 빠졌어. 쵸로마츠도 별수 없이 보내줬지 뭐.”

카라마츠는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오후 노동이 끝날 시간이었다.

 

오후노동은 그들이 열 살이 됐을 때부터 해왔던 오랜 일과였다. 방주 안에 어딘가를 보수하거나 그들의 생활 유지를 위해 특별히 해야 할 일이 없으면 그들은 창고 안에 모여 물건들을 옮겼다. 방주 꼭대기에서부터 네 번째 되는 층에 창고가 있었다. 창고는 강당보다도 넓었고 천장이 한참 높았다. 창고 안에는 그들이 이 곳에서 살아가며 쓸 모든 물건들이 들어있었다. 수십 년 동안 먹을 통조림, 그들 여섯 명을 위해 준비된 옷과 신발, 자질구레한 생활용품들과 방주를 적절하게 유지하기 위한 물건들이었다. 아버지는 형제들이 열 살이 되자 작은 면장갑을 양 손에 끼워주었다.

명령은 단순했다. 이 쪽에 있는 물건들을 저 쪽으로 날라라. 그리고 물건들을 전부 저 쪽으로 나르면 다시 이 쪽으로 날라라.

아마도 물건을 나르면서 남은 물자들의 수량을 파악하고 그들이 찾기 쉽게 정리를 하란 뜻이었을 것이다. 매일 형제들은 점심을 먹고 잠깐 쉬었다가 창고에 모여 세 시간동안 물건을 날랐다.

 

오소마츠는 한참동안 이불 밑에서 손을 녹였다. 걱정하고 있던 게 해결되고 나니 카라마츠는 마음이 편해지기도 했고, 또 아까 이치마츠를 업고 뛰느라 긴장했던 근육이 슬슬 풀려 피로가 몰려왔다. 그걸 눈치 채기라도 한 것처럼 오소마츠가 손을 뻗어 카라마츠의 어깨를 끌어당겨 그에게 기대게 했다. 카라마츠는 형의 넓은 어깨에 기대 온몸에 힘을 빼고 축 늘어졌다. 오소마츠도 이치마츠에게 싫은 소리 하는 거 힘들겠지. 카라마츠는 오소마츠에게 조금 더 가까이 붙어 오소마츠의 목을 끌어안았다. 오소마츠가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고, 곧 따뜻한 손이 카라마츠의 뺨을 어루만지다 감싸 안았다.

오소마츠.”

?”

오소마츠가 카라마츠의 이마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이치마츠랑 싸우지 마.”

오소마츠는 대답이 없었다. 카라마츠가 오소마츠의 대답을 기다리며 빤히 보고 있어도 오소마츠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 카라마츠의 코끝에 다시 입을 맞추고, 코끝에서 인중을 타고 내려와 카라마츠의 입술을 살짝 물었다. 부드러운 입술 새로 더운 숨이 느껴졌다. 카라마츠는 고개를 모로 조금 틀어 살며시 눈을 감았다. 따뜻한 손이 카라마츠의 후드 밑으로 슬금슬금 들어오고 있었다.

 

카라마츠가 저녁을 먹고 다시 수면실로 돌아오자 이치마츠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있었다.

이제 깼어? 몸은 좀 어때?”

목말라.”

이치마츠의 목소리가 버석버석하게 말라있었다. 카라마츠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부엌으로 가 물통에 물을 가득 채워왔다. 아직 얼굴이 빨갛긴 했지만 아까보다는 한결 나은 모습이었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곁에 앉아 컵에 물을 조금 따라 내밀었다. 이치마츠는 컵을 받아드는 것도 힘에 부치는지 간신히 컵을 들고 있다가 천천히 들어 입술에 댔다.

아까 오소마츠 형이 약 갖다 줬어.”

이치마츠가 들고 있던 컵을 내려놓고 옷소매로 입가를 닦았다.

더 마실래?”

됐어.”

물을 많이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하지만 이치마츠는 컵을 이불 옆으로 치워버렸다. 이치마츠는 아무 말이 없었다. 사실 카라마츠도 이치마츠가 오소마츠에게 고맙다는 얘기를 하리라고 믿지는 않았지만, 이치마츠는 기분이 확 상했다는 얼굴로 방구석을 노려보고 있었다. 천천히 화해하면 되겠지.

있다가 물 더 마시려면 마셔.”

.”

카라마츠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내가 했던 말 기억 안나?”

, 깜빡하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이불에서 조금 물러나 앉아 대답했다.

우리가 속고 있다고?”

이치마츠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두침침한 방 안에 작은 환풍기가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가 뭔가 설명을 해주리라고 기대했는데, 이치마츠는 말없이 카라마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라마츠가 먼저 질문을 해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누가 우리를 속이고 있는데?”

누굴 거 같아?”

글쎄, 여기엔 우리밖에 없으니까. 우리 중 누군가가…….”

이치마츠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곤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카라마츠에게 다가왔다.

이치마츠, 좀 더 누워있어. 한참 앓았다니까.”

그러나 이치마츠는 쓰러지듯 카라마츠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카라마츠의 멱살을 잡았다.

도서관으로 가자.”

도서관은 이치마츠의 구역이었다





















사실과 맞지 않는 설정오류 같아보이는게 있죠! 저도 알고 있습니다 뒤에가서 설명할게요!!

토도마츠는 수도꼭지를 돌려 물을 한 컵 받아 마시다가 고개를 들었다. 복도에서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어제 식사 당번은 쵸로마츠였다. 그러니 오늘은 이치마츠의 차례였는데, 이치마츠가 잠시 자리를 비웠으니 쥬시마츠에게 순서가 넘어갔겠지. 과연 부엌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고, 품에 통조림을 가득 안은 쥬시마츠가 뛰어 들어왔다.

토도마츠! 좋은 아침!”

쥬시마츠 형, 바구니 들고 가라니까? 봐봐 후드 주머니 다 늘어지잖아?”

토도마츠는 피식 웃으면서 쥬시마츠의 후드를 가리켰다. 쥬시마츠는 매번 창고에 통조림을 가지러 갈 때마다 바구니를 가져가는 걸 잊곤 했다. 쥬시마츠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들어와 식탁에 품에 안고 있던 통조림을 쏟아내고 후드 주머니 안에 든 통조림도 꺼내 쌓았다.

오다가 흘리진 않았고?”

안 흘렸을걸? 한번 세볼까!”

쥬시마츠가 식탁 의자에 앉아 통조림을 색깔별로 분리했다. 하얀색과 빨간색과 녹색. 토도마츠도 쥬시마츠를 마주보는 자리에 앉아 통조림의 개수를 셌다. 하얀색이 여섯 개, 빨간색이 여섯 개, 녹색이 여섯 개.

, 지금 이치마츠 형은 자리에 없잖아? 다섯 개씩 가져와야지.”

토도마츠가 통조림을 한 개씩 빼 한쪽 구석으로 밀어두었다. 쥬시마츠는 아, 하고 그제야 깨달았다는 것처럼 고개를 들어 토도마츠와 눈이 마주쳤다가 도로 고개를 숙였다. 토도마츠도 더 이상 말하지 않고 통조림을 하나씩 끌어당겨 뚜껑을 따기 시작했다. 쥬시마츠가 이치마츠의 몫으로 가져온 통조림을 계속 돌아보았다.

하얀색 통조림은 ’, 빨간색은 고기’, 초록색은 야채였다. 형제들이 먹을 수 있는 식재료라곤 이 통조림들과 소금뿐이다. 여섯 명은 이십 년 동안 통조림을 조금이라도 맛있게 먹는 방법을 궁리해보았지만 제한된 환경에선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통조림을 색깔별로 나누어 푹 끓이거나, 아니면 굽거나. 그러나 맛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토도마츠는 밍밍하게 아무 맛이 나지 않는 하얀색 통조림을 전부 따서 식탁 한쪽으로 밀어두고, 빨간색 통조림을 땄다. 빨간색 통조림은 퍽퍽하고 질겼다. 언젠가 토도마츠는 아버지에게 이건 어떤 동물의 살이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무서운 얼굴로 빨간 통조림 뚜껑을 따 토도마츠의 얼굴에 들이밀고 대답했다.

이건 죄 없는 짐승이란다. 우린 지금 죄를 짓고 있는 거야.’

토도마츠는 빨간색 통조림을 먹으러 수저를 들 때마다 그 생각이 났다. 우리는 다른 짐승의 살점을 먹어야 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성장해 핵전쟁이 끝나고 완전히 깨끗한 세상이 도래했을 때 나갈 수 있다. 통조림 세 개를 한 번에 끓여 죽으로 먹을 때는 상관이 없었지만, 가끔 누군가 오기를 부려 통조림을 색깔별로 모아 불에 구워 올 때면 토도마츠는 죄책감이 들었다. 그 짐승이 어떻게 생겼을 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형제들에게 보여주는 책에는 그림이 하나도 없었고, 오직 글자만 빽빽하게 들어차있었다. 형제들이 책에 나오는 사자며 호랑이, 너구리, 돼지, 소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다고 아버지에게 물어본 적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나중에 그들이 이 방주를 떠나 정결해진 세상으로 돌아가면 그것들은 이미 다 죽고 없을 것이고, 새로운 생명체들이 그들을 기다릴 거라고, 사자고 호랑이고 전부 세상에 남아있지 않을 거라고. 혹시 핵전쟁이 일어날 동안 다른 동물들을 돌봐줄 사람들이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이 방주의 여섯 명은 지구에서 인간들과 함께 공존해온 생명체들의 마지막 흔적을 먹고 있는 게 아닐까? 토도마츠는 고개를 젓고 초록색 통조림의 뚜껑을 땄다.

쥬시마츠 형, 오늘은 어떻게 해먹을 거야?”

역시 끓이는 게 제일 나으려나! 아침을 빨리 먹어야 이치마츠 형을 빨리 데려올 수 있잖아?”

쥬시마츠가 잽싸게 마지막 통조림 뚜껑을 따 옆으로 밀어두면서 웃었다. 쥬시마츠는 형제들이 떨어지는 것을 제일 싫어했다. 좀 집착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지만, 글쎄, 토도마츠가 다른 형제들을 본 적이 없어 보통 형제들이 이렇게 다른 형제들을 아끼는 건지, 아니면 쥬시마츠가 여섯 명중에 유난히 유대감을 느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쥬시마츠가 찬장으로 달려가 커다란 냄비를 꺼내 물을 받았다. 조금 거들어줄까 아니면 형제들을 깨우러 갈까? 토도마츠는 잠깐 쥬시마츠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부엌을 나섰다.

방주는 뒤집어진 원뿔 모양으로, 그들 여섯 명이 차지하기엔 지나치게 넓은 감이 없잖아 있었다. 원뿔 한가운데는 뻥 뚫려 벽을 따라 계단이 둥글게 나있었고, 맨 꼭대기 층에서 고개를 쑥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보면 맨 아래층이 까마득하게 보였다. 토도마츠는 부엌에서 나와 2층으로 올라가면서 불이 들어오지 않는 전구들이 보이면 뽑아 후드 주머니에 넣었다. 그들이 어렸을 때는 계단 벽을 따라 둥근 전구들이 일렬로 박혀있어 훤히 밝았는데, 날이 가면 갈수록 전구의 개수가 줄어들었다. 토도마츠는 전구가 있었던 자리를 손끝으로 더듬어보며 꼭 젖니가 빠진 자리 같다고 생각했다. 전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창고 한 구석에는 전구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이 계단을 예전처럼 환하게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도 있었지만 형제들은 최소한의 전구만을 켜놓고 남은 전구들을 아껴두기로 약속했다. 토도마츠는 수면실 문 앞에서 잠깐 멈춰 서서 계단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천장을 올려다봤다.

천장에는 거대한, 그들이 살아오면서 본 그 어느 것보다도 거대한 바위가 방주의 입구를 막고 있었다. 바위는 꼭 잠자는 괴물처럼 그들의 머리 꼭대기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저 바위를 파수꾼이라고 불렀다. 그는 일주일에 한 번씩 저 바위 앞에 형제들을 앉혀놓고 바위를 그의 일곱 번째 아들처럼 사랑이 가득 담긴 눈으로 쓰다듬었다. 방사능도, 폭탄도, 심지어 사람들의 고통마저도 저 바위를 넘지 못한다고, 그리고 그들이 나갈 수 있을 때가 되면 바위가 저절로 열릴 것이라며 우리는 바위에게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토도마츠는 바위를 볼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혔다. 어느 방에 숨어있더라도 저 바위가 토도마츠를 노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는 자연히 바위 앞에서 모이는 일이 없어졌다. 가끔 이치마츠나 쥬시마츠가 바위 바로 밑에 앉아 멍하니 바위를 올려다보는 걸 보긴 했지만, 토도마츠는 바위 가까이엔 가지 않았다. 바위는 어떻게 열릴까. 토도마츠는 마른 침을 삼키고 침실 문을 열었다.

 

쥬시마츠는 순식간에 밥그릇을 비우고 형제들이 식사를 마치기만을 기다렸다. 카라마츠는 기계적으로 음식을 씹어 삼켰다. 쥬시마츠가 물을 많이 넣고 끓인 탓에 씹을 것도 없었지만 음식을 한참 씹다보니 잠이 좀 깨는 듯 했다. 다행히 오소마츠는 카라마츠의 외출을 눈치 채지 못한 듯 했다. 카라마츠는 자리에서 일어나 컵에 찬 물을 받아 한 번에 들이켰다.

카라마츠. 다 먹어.”

쵸로마츠가 카라마츠의 그릇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 잠깐 물만 마시려던 거였다.”

카라마츠는 컵을 내려놓고 자리로 돌아가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냥 후루룩 마셔버려도 될 정도로 음식이 묽었는데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쵸로마츠가 미간을 찌푸리고 카라마츠를 노려보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젓가락으로 음식을 휘휘 젓다가 그릇을 들어 꿀꺽꿀꺽 마셨다. 카라마츠가 괜한 고집을 부렸다간 쵸로마츠에게 한참동안 잔소리를 들을게 분명했다. 그러면 이치마츠를 데리러 가는 시간도 늦어질 거고, 어쩔 수 없지. 카라마츠는 구역질이 날 것 같은걸 참으며 그릇을 비웠다. 이치마츠가 걱정됐다. 어젯밤 카라마츠가 찾아갔을 때는 간신히 대답도 했지만 지금은 어떨지 몰랐다. 찬 바닥에서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불편한 자세로 있었으니 아플 게 분명한데. 카라마츠는 빈 그릇을 만지작거리며 오소마츠를 돌아보았다. 오소마츠는 아예 한쪽 턱을 괴고 졸고 있었다. 이치마츠가 걱정되지 않는 건가? 카라마츠는 마음이 급해 토도마츠에게 눈짓을 했다. 토도마츠가 한숨을 푹 쉬고 오소마츠를 흔들었다.

, 얼른 먹어. 다들 형 먹는 거 기다리고 있잖아?”

오소마츠가 멍한 눈빛으로 다른 사람들의 그릇을 돌아보고 자기 그릇을 들어 내용물을 마셨다. 쥬시마츠가 더 이상 버티질 못하고 다른 형제들의 그릇을 싹 걷어가 설거지를 시작했다. 오소마츠는 한참동안 그릇을 입에 대고 있다가 그릇이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자기 그릇을 내려놓았다. 조금 잠이 깬 눈빛이었다. 카라마츠는 고개를 살짝 돌려 오소마츠의 눈빛을 피했다.

오늘 조회는 누구지?”

!”

쥬시마츠가 손을 번쩍 들었다. 오소마츠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릇을 쥬시마츠에게 건네주고 벽에 기대 늘어져라 기지개를 폈다.

얼른 조회하고 넷째 데리러 가자. 더 늦어졌다간 카라마츠가 한 대 때릴 것 같아.”

쥬시마츠가 신나게 그릇을 헹궈 건조대에 올려놓았다. 쵸로마츠가 뭐라고 투덜거렸지만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방주의 맨 꼭대기 층에는 강당이 있었다. 형제들은 강당으로 올라가는 길에 침실에 들러 잠옷을 생활복으로 갈아입었다. 강당 문으로 들어서면 보이는 벽엔 한가득 빗금이 쳐있었다. 쥬시마츠가 손에 끌과 망치를 들고 달려와 벽 앞에 섰다. 그리곤 형제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오늘 하루도!”

오늘 하루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텅 빈 강당 안에 다섯 명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쥬시마츠는 어제 쵸로마츠가 친 빗금의 옆에 끌을 대고 망치로 끌 위를 툭 쳤다. 빗금이 깊었다. 형제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강당 문을 나섰다. 카라마츠는 쥬시마츠가 남긴 빗금 위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그들은 이제 스무 살이었다. 쥬시마츠의 빗금 옆으로는 벽이 반이나 텅 비어있었다. 저 벽을 가득 채워야 그들은 나갈 수 있었다. 카라마츠는 저 싸늘하니 새하얀 벽을 잠깐 응시하다가 형제들의 뒤를 따라 나섰다.

 

밑으로, 밑으로, 밑으로. 이치마츠의 기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카라마츠는 초조해 쥬시마츠의 팔을 붙잡고 오소마츠가 문을 여는 걸 지켜보았다.

카라마츠.”

오소마츠가 카라마츠를 돌아보고 말했다.

와서 네 동생 업어.”

. 카라마츠는 쥬시마츠의 손을 놓고 달려가 독방 문을 열어젖혔다. 그들이 문 여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을 텐데 이치마츠는 바닥에 모로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가쁜 숨소리가 들렸다. 쥬시마츠가 따라와 이치마츠의 손목을 묶은 끈을 풀겠다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쥬시마츠의 손이 덜덜 떨려 매듭이 풀리지 않았고, 지켜보던 쵸로마츠가 한숨을 푹 내쉬면서 다가와 밧줄을 풀었다. 카라마츠는 시퍼렇게 멍이 든 손목을 한참 주물렀다. 토도마츠가 오소마츠의 눈치를 보다가 다가와 이치마츠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펄펄 끓네.”

적당히 데려다 줘.”

토도마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소마츠가 말을 툭 내뱉고는 몸을 돌려 사라졌다. 카라마츠는 시퍼렇게 멍이 든 이치마츠의 손목을 한참 문지르다 손에 핏기가 돌자 이치마츠를 업고 독방을 뛰쳐나갔다. 이치마츠의 마른 몸이 힘없이 흔들렸다. 약을, 어떤 약을 써야 하지? 카라마츠는 이치마츠를 단단히 붙잡고 계단을 한 번에 두세 개씩 뛰어넘으며 달렸다. 귓가에 이치마츠의 뜨거운 숨이 스쳤다. 뒤에서 형제들이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치마츠, 이치마츠.”

카라마츠가 헉헉거리며 이치마츠의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이대로 이불을 덮어주고 자게 해도 되나? 아니면 뺨을 때려서라도 깨워야 돼?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버지처럼 이치마츠가 죽어버리면 어떡하지. 카라마츠는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버지가 죽자 오소마츠는 아버지보다 엄하게 형제들을 몰아세웠다.

우리는 쌍둥이고, 너희가 나를 아버지처럼 생각하진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어.”

오소마츠가 바위 밑에 형제들을 앉혀놓고 말했다. 이치마츠는 오소마츠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무릎을 세우고 앉아 오소마츠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우린 여기서 이십년을 더 살아야 되고, 모두 무사히 방주를 나가려면 규칙이 있어야 해.”

오소마츠의 허리춤에 매달린 열쇠뭉치가 쩔그렁거렸다.

 

오늘은 카라마츠가 당번이지?”

쵸로마츠가 교복에 묻은 먼지를 털면서 말했다. 이치마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쵸로마츠가 신발장 위에 놓여있던 열쇠를 휙 던져주었다. 이치마츠는 현관 옆 벽에 기대어 삐딱하게 쵸로마츠를 보고 있다 날아온 열쇠를 간신히 잡고 쵸로마츠를 째려보았다.

나 다리 부러진 거 안보여?”

야구하다가 부러뜨린 놈이 말이 많네.”

쵸로마츠가 피식 웃고 현관을 나섰다. 얄미운 놈. 이치마츠는 쵸로마츠의 뒤에 대고 가운데손가락을 내밀었다.

 

평소에 운동이라곤 간신히 학교에서 집 사이를 걸어 다니는 것 밖에 안하던 탓일까. 이치마츠는 깁스한 다리 위를 슬슬 만져보며 깁스를 풀면 꼭 운동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토도마츠가 하는 것처럼 조깅이라도 하면 도움이 될 텐데. 이치마츠는 현관 옆에 서서 엉겁결에 쵸로마츠, 토도마츠, 쥬시마츠, 오소마츠를 배웅했다. 처음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다 같이 학교를 다녔는데, 학년이 올라가자 각자 생활 패턴과 스케줄에 따라 움직이느라 여럿이서 학교를 가는 일이 드물었다. 이렇게 누구 하나가 다리 혹은 팔을 부러뜨려 자전거로 데려다 주는 게 아니라면.

, 이치마츠,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카라마츠가 한참 만에 방에서 나와 이치마츠의 가방을 받아들고 어깨에 멨다. 이치마츠는 아직도 빗질 자국이 남아있는 카라마츠의 뒤통수를 바라보다 손에 한참동안 쥐고 있던 열쇠를 집어던졌다. 열쇠는 카라마츠의 오른쪽 어깨에 맞고 툭 떨어졌다. 카라마츠는 놀라 뒤를 돌아보곤 바닥에 떨어진 열쇠를 집어 들어 교복 재킷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신발 신는 거 도와줄까?”

카라마츠가 현관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내밀었다. 괜히 싫은 생각이 들어 이치마츠는 신경질을 낼까 하다가 접고 순순히 바닥에 앉아 발을 내밀었다. 남자애 여섯이 사는 집의 신발장은 아무리 정리를 한다 하더라도 정신이 없다. 하지만 카라마츠는 그 신발 무더기에서 단번에 이치마츠의 신발을 골라내 조심스럽게 이치마츠의 발에 신발을 신겼다. 신발 뒤축을 정리한다고 카라마츠의 긴 손가락이 이치마츠의 발뒤꿈치를 스쳤다. 이치마츠는 잠깐 숨을 멈췄다가, 카라마츠가 손을 놓자 신발장을 붙잡고 일어나 현관으로 내려왔다.

그럼 가서 자전거 꺼내올게.”

카라마츠가 먼저 현관을 나섰다. 카라마츠가 문 밖으로 나가는 걸 보고 나서야 이치마츠는 참았던 숨을 휴, 하고 내쉬었다.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나랑 완전히 똑같을 저 손가락이, 저 등이, 저 어깨가 신경 쓰였다.

 

카라마츠가 자전거 경적을 울렸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자 찬바람이 훅 불어왔다. 이치마츠가 집 안과 밖의 온도 차이에 굳어있자 카라마츠가 자전거 바구니에 가방 두 개를 쑤셔 넣고 이치마츠에게 고갯짓을 했다.

지각하기 전에 얼른! 시간은 우릴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입만 다물면 참 좋을 텐데. 이치마츠는 절뚝거리며 자전거 뒷자리에 앉았다. 눈앞에 카라마츠의 넓은 등이 있었다.

이치마츠, 허리 붙잡아야지.”

카라마츠가 페달에 발을 올리고 말했다. 이치마츠는 천천히 양 팔을 내밀어 카라마츠의 허리를 감아 안고, 손에 깍지를 꼈다. 얇은 교복 셔츠와 재킷 너머로 납작한 카라마츠의 배가 만져졌다. 카라마츠가 숨을 쉴 때마다 배가 조금씩 움직였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만 손가락을 살짝 세워 손가락 끝으로 배를 덧그렸다.

꼭 잡았지? 그럼 간다!”

카라마츠가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아무리 카라마츠가 앞에 앉아 찬바람을 막아준다고 하더라도 둘은 키 차이가 나질 않아 팔 틈새로, 귀 너머로 바람이 휙휙 스치고 지나갔다. 이치마츠는 고개를 잔뜩 웅크리고 카라마츠의 등 뒤에 숨었다. 혼자면 모를까 이치마츠를 뒤에 매달고 있어서 그런지 카라마츠의 숨이 조금씩 빨라졌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등에 이마를 살짝 기댔다가 곧 한쪽 뺨을 갖다 댔다. 그 등이 따뜻해서, 이치마츠는 팔에 더 힘을 줘 카라마츠를 끌어안았다

저기 정문 보이네. 다 왔어, 이치마츠. 교실까지 가방 들어다줄까?”

학교 가는 길은 너무 짧았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등에 이마를 댄 채로 고개를 저었다.

정말? 그럼 있다가 수업 끝나고 데리러 갈까?”

나 죽을 병 걸린 거 아니거든. 그냥 신발장 앞에서 기다려.”

카라마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전거가 멈췄다. 자전거가 옆으로 조금 기울었고, 카라마츠가 한쪽 발을 땅에 딛고 자전거를 단단히 잡았다. 내려야겠지. 이치마츠는 손에 깍지를 풀었다. 팔 안에 가득 찼던 카라마츠를 놓는 게 아쉬웠다. 불편한 자세로 웅크리고 있어 뻣뻣하게 굳은 목을 풀고 자전거에서 내리자 카라마츠가 다시 자전거 페달에 발을 올리고 이치마츠를 향해 씩 웃어보였다. 카라마츠의 양 뺨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카라마츠는 바구니에서 이치마츠의 가방을 꺼내서 건네주었다.

그럼 있다가 학교 끝나고 보자!”

카라마츠가 손을 흔들고 자전거 핸들을 돌렸다. 이치마츠는 가방을 꼭 카라마츠의 허리처럼 품에 끌어안고 카라마츠가 다시 운동장을 가로질러 정문 경비실 옆에 있는 자전거 보관소로 가는 걸 바라보았다. 그들이 다니는 고등학교는 유달리 정문과 본관 사이의 거리가 멀었다.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아침 조회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카라마츠는 저기에 자전거를 묶어놓고 이 넓은 운동장을 뛰어 오겠지. 카라마츠가 경비 아저씨에게 인사를 하고 자전거에서 내리는 게 보였다. 카라마츠를 기다릴까. 지각이라고 소리치는 학생들이 이치마츠의 곁을 빠르게 스치고 달려갔다. 여기서 카라마츠를 기다린다고? 카라마츠가 왜 기다렸냐고 물어보면 무슨 핑계를 대려고? 카라마츠가 자전거를 묶어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치마츠는 황급히 몸을 돌려 신발장으로 걸어가 재빨리 신발을 실내화로 갈아 신고 계단을 올라갔다. 마음이 급해 다리가 불편한 줄도 몰랐다. 내가 왜 기다리려고 했지? 이치마츠는 교실 뒷문을 열면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답을 알 것 같기도 했고, 모르고 싶기도 했다

카라른 전력 60분으로 쓴 썰입니당 ㅇㅅㅇ)/ 카라른 최고








남자친구, 소개 안 시켜줘?”

난데없는 아웃팅이었다. 카라마츠는 입안에 머금고 있던 물을 모조리 흘려버리고 거칠게 기침을 했다. 언젠가 형제들에게 들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었지만, 이렇게 이를 줄이야. 카라마츠는 얼굴이 새빨갛게 되도록 콜록거리면서도 연신 고개를 돌려 혹시 다른 형제들이 들어오려고 하지는 않는지 기척을 살폈다. 다행히 이치마츠의 말을 들은 건 카라마츠뿐이었고, 다른 형제들은 빈 그릇을 나르고 후식으로 먹을 과일을 가져온다고 방을 비우고 없었다. 다행이다. 아니, 다행이 아닌가? 다른 형제들도 전부 알면서 시치미를 떼고 있는 게 아닐까? 카라마츠는 손이 벌벌 떨렸다. 입과 상의가 젖어 불쾌했다. 일단 이걸 다 닦고, 이치마츠가 잘못 알고 있는 거라고,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고 아무렇지 않게 둘러대야 하는데. 휴지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카라마츠는 자기도 모르게 옷소매를 당겨 입을 문질러 닦았다. 이치마츠는 턱을 괴고 카라마츠가 허둥지둥 하는걸 빤히 보고 있다 곁에 있던 티슈상자를 건네주었다.

진짠가 보네.”

이치마츠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 아니…….아닌아닌데…….”

글렀다. 순식간에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울고 싶지는 않았다. 동생에게 동성 애인을 들켜버린 주제에 울기까지 해버리면 카라마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비참해질 것 같았다. 왜 하필이면 이치마츠일까. 그제야 카라마츠는 그동안 이치마츠가 했던 호모포비아적 발언이 모두 카라마츠를 향하는 것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게 날 향한 칼이었다는 게, 상대가 형제라는 걸 알면서도 날카롭게 벼린 칼이라는 게 너무 아파서, 카라마츠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눈물이 눈꼬리를 따라 흘러 뚝, 떨어졌다. 카라마츠는 급히 티슈를 뽑아 대강 뭉친 다음에 양 눈을 아플 정도로 꾹 눌렀다.

 

호모새끼들은 다 죽여 버려야 돼.”

다 같이 모여 영화를 보던 와중에 이치마츠가 미간을 한껏 찌푸리며 내뱉듯 말했다. 카라마츠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 이치마츠가 알아버린 걸까? 카라마츠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고 노력하면서 음료수 컵을 들고 이치마츠의 눈치를 살폈다. 이치마츠는 이 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토도마츠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안 돼, 이치마츠 형. 사람들마다 사랑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라고? 나는 남자가 나만 좋아하지 않으면 되는데 말이지. 요샌 어디 가서 그런 말 했다간 욕먹어.”

그래. 다들 그렇게 생각하겠지. 카라마츠는 억지로 웃었다. 속이 쓰렸다.

카라마츠는 난생 처음 짝사랑 하던 상대와 이어져 새콤달콤한 첫사랑을 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형제들에게는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카라마츠가 사랑하는 그는 같은 반의 남학생이었기에. 다른 형제들이 서로에게 연애상담을 하고 좋아하는 여자애 얘기를 하며 신나하는 걸 카라마츠는 그저 부럽게 들을 수밖에 없었다. 나도 사랑을 하고 있어. 카라마츠는 몇 번이고 입을 열었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물었다.

사랑하는 그와는 영화 취향이 비슷해 주말이면 만나 영화를 보러 갔고, 학교가 끝나면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고 더위도 추위도 모를 정도로 딱 붙어 길을 걸었다. 그와는 정말 온갖 얘기를 나누었다. 학교생활, 언젠가 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 그리고 그의 소중한 형제들까지. 어느 인적 드문 골목에서 바들바들 떨면서 첫 키스를 하기도 했고. 학교를 졸업하면 같은 대학에 가고, 여느 룸메이트들처럼 자취방을 구해 함께 살자는 약속을 하기도 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밤에 눈을 감을 때까지 카라마츠는 꼭 하늘을 나는 것처럼 둥둥 떠 있었다. 늘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가서야 손을 잡았고, 또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아는 사람에게 들키진 않으리라고 생각했는데.

 

행복했던 순간이 물거품처럼 터지는 것 같았다. 카라마츠가 눈가에 대고 있던 티슈는 어느새 푹 젖었고, 카라마츠가 얼른 새 티슈를 뽑아 다시 눈을 가리려고 하는 순간 다른 형제들이 깎은 배를 한 접시 가득 담아 들고 들어왔다.

카라마츠 형! 왜 울어?”

이치마츠, 쟤 왜 저래?”

형제들은 접시를 던지듯 내려놓고 카라마츠에게 다가와 그의 얼굴을 살폈다.

물 마시다가 사레들려서 저래.”

목에 커다랗고 뜨끈한 덩어리가 걸린 것 같았다. 카라마츠는 숨을 고르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다른 형제들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네. 언제 이치마츠가 얘기를 할지 모르지만. 카라마츠는 웃으면서 젖은 티슈뭉치를 집어 들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이치마츠가 배를 하나 집어 들어 와작와작 씹어 먹고 있었다. 카라마츠가 우는 걸 봤으면서도 아무런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아마 카라마츠가 이렇게 반응할 줄 알고 있었겠지. 카라마츠는 올린 입꼬리에 힘을 줘 배로 시선을 돌렸다.

 

걔랑 헤어져.”

이치마츠는 형제들이 다 잠에 빠져들자 카라마츠의 멱살을 잡고 집 뒷마당으로 질질 끌고 나갔다. 카라마츠는 복잡한 머릿속을 한참 정리하다 간신히 잠에 빠져들었는데, 자다가 갑자기 일으켜져 헤어지라는 소리를 들으니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

이치마츠가 으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사귀고 있는 걔랑 헤어지라고.”

카라마츠는 간신히 잠이 깨 눈을 비볐다.

?”

이치마츠는 한참 카라마츠의 눈을 노려보다 마당에 침을 뱉었다.

나랑 똑같은 얼굴을 한 새끼가 다른 남자랑 떡치는 생각만 해도 더러워서 죽을 것 같으니까, 다른 애들한테 얘기하고 학교에 소문내기 전에 헤어져.”

카라마츠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에게 늘 상처 주는 말만 골라서 했지만 마음이 아팠다. 그렇지만 카라마츠는 쉽게 포기할 수가 없었다. 카라마츠가 오랫동안 짝사랑하던 사람이었고, 또 그는 카라마츠가 모든 걸 버리고 도망칠 수 있을 만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카라마츠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마루에 앉아 다리를 세우고 고개를 파묻었다. 이치마츠가 노려보고 있는지 정수리가 따끔거렸다. 카라마츠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말을 해야 했다. 이치마츠에게. 이 말을.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야."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고등학교 들어갈 때부터 좋아했고, 2년도 넘게 짝사랑만 하다가 포기하기 직전에 사귀게 됐어. 살면서 이렇게 다른 사람을 좋아해본 적이 없었고, 또 앞으로도 그럴 일이 없을 것 같아. 이치마츠, 그냥 못 본 척 해주면 안 될까? 이 사람하고 헤어지면 나는 죽을지도 몰라.”

, 이치마츠가 어이없다는 듯 바람 새는 소리를 내고 웃었다. 카라마츠는 옷소매를 씹었다. 이치마츠가 안 된다고 하면, 형제들에게 모두 말해버리면 어떡하지. 카라마츠는 이제 겨우 고등학생이었고, 곧 학교를 졸업한다고 해도 경제적인 능력이 없어 한동안 부모님 집에 붙어서 살아야 했다. 이치마츠가 부모님에게, 형제들에게 말을 해버리면 카라마츠는 갈 곳이 없었다. 카라마츠가 좋아하는 그 사람도 동갑의 고등학생이었고, 또 고등학교 졸업은 해야 하는데. 이치마츠는 대답이 없었다. 카라마츠는 꼭 벌레가 된 기분이었다. 제발 짓밟지만 말아달라고 이치마츠의 선처를 기다리는 벌레. 내가 흉측하고 더럽고 징그럽다는 건 알고 있어. 보이지 않는 곳에 조용히 숨소리도 내지 않고 숨어있을게. 제발 짓밟지만 말아줘.

네가 뭘 모르나본데, 걔를 아무리 사랑한대도 그건 잠깐이야. 대학만 가 봐도 만나는 사람은 얼마나 많고, 또 여자들은 얼마나 많은데. 너는 걔 하나만 믿고 가족을 다 버리겠다는 거야? 미쳤냐? 걔한테 빚졌어? 걔가 그렇게 씹질을 잘해? 너는 걔 없으면 욕구불만으로 죽어?”

이치마츠가 카라마츠의 바로 앞에 서서 조근조근 잔인한 말을 쏟아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카라마츠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 눈을 뜨면 카라마츠의 심장에서 김이 후끈후끈하게 오르는 피가 줄줄 흘러가는 게 보일 것 같았다.

그래도 안 돼…….”

카라마츠는 다시 목이 멨다.

안 돼……. 걔가 좋아서, 나는 안 돼…….”

그동안 형제들 틈에서 비밀을 지키느라 서럽고 외로웠던 것까지 한 번에 올라와 카라마츠는 속이 울렁거렸다. 태어날 때는 다들 똑같이 태어났는데, 왜 카라마츠만 이렇게 달라서 혼자 고통스러워야 하는 거지. 심장이 조이듯 아팠다.

이치마츠가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카라마츠의 곁을 지나치려다 멈추고 카라마츠의 곁에 쭈그리고 앉아 카라마츠의 귓가에 속삭였다.

졸업할 때까지만 만나. 그리고 졸업식 날 헤어져. 그 뒤로 너희 둘이 같이 있는 게 눈에 뜨이기라도 하면 다시는 이 집에 발도 못 들여놓을 줄 알아.”

 

기간이 정해진 사랑은 얼마나 애달픈지. 카라마츠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차마 사실대로 얘기하지도 못하고 이별을 고했다.

상처 줘서 미안해. 너한테는 아무 문제가 없어. 너랑 함께 해서 정말 행복했고,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어. 너랑 같이 걷던 거리, 그 골목, 그 가로등 밑만 걸어도 나는 죽을 때까지 네 생각을 할 거야. 고마워. 나랑 그렇게 사랑해줘서 고마워. 겁쟁이인 나에게 먼저 고백해줘서 고맙고, 나는 그저 너한테 고맙기만 해. 사랑해. 정말 좋아했어.

하지만 카라마츠는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이 모든 말을 한껏 움츠러든 그 사람의 등 뒤에 흘려보냈다. 졸업장이 든 통을 잔뜩 구겨질 정도로 부여잡고, 카라마츠는 소리 없이 울었다. 기념사진을 찍겠다며 어머니가 카라마츠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가야되는데,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가야 하는데. 카라마츠는 그 사람의 등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아진 뒤에야 자리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카라마츠의 첫사랑이 조각도 주워 담지 못할 정도로 박살나버린 날이었다. 내가 다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카라마츠는 어린애처럼 소리 내 울면서 자기 자신에게 물었다. 그렇게 다정하고, 상냥하고, 카라마츠에게 먼저 좋아한다고 말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카라마츠의 어깨에 차가운 손이 닿았다. 카라마츠가 엉망이 된 얼굴로 고개를 돌아보자 그 손이 카라마츠의 얼굴에 손수건을 던지고 돌아서 달려갔다.

 

카라마츠의 예상은 옳았다. 그 사람 같은 남자는 다신 만나지 못했고, 카라마츠는 그의 흔적이 아주 조금이라도 남은 남자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일주일도 채 가지 못하는 짧은 만남이었다. 만난 남자의 수가 다섯을 넘어가기 시작하자 세상엔 카라마츠를 위해 태어난 특별한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운명처럼 그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는 꿈을 꾸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졸업을 하고 그 사람이 대학에 간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새 여자 친구를 사귀었다는 소식을 듣고 카라마츠는 모든 희망을 접었다. 이치마츠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카라마츠는 입이 썼다. 영원한 사랑이란 건 없는 모양이었다. 카라마츠에게만 그런 건지는 몰라도.

또 남자 만났냐.”

가로등 밑에 이치마츠가 담배꽁초를 산처럼 쌓아놓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고개를 돌려 현관문을 잡았다. 그러자 뒤에서 커다란 손이 카라마츠의 목덜미를 잡아 당겼다.

무슨 짓이야?”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손을 잡아떼려고 노력했지만 이치마츠는 아랑곳하지 않고 카라마츠를 끌고 집 옆 골목으로 들어갔다. 텅 빈 골목에 누런 가로등만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내가 보는 앞에서 남자를 만나?”

이치마츠는 기가 찬다는 표정이었다. 카라마츠는 멍하니 이치마츠의 얼굴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사귀는 거 아냐. 금방 헤어지니까.”

사랑해서 만나는 게 아니라?”

카라마츠는 피식 웃었다. 이치마츠의 입에서 사랑이란 단어가 나올 줄이야.

그럴 리가.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안심해.”

카라마츠가 몸을 돌리자 다시 이치마츠가 카라마츠의 어깨를 잡아 돌려 이치마츠를 보게 했다.

내가 걱정하는 일이 뭔데?”

남자를 사랑한다고 집을 엉망으로 만드는 일?”

이치마츠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곤 그때까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내던지고, 카라마츠의 턱을 단단히 잡았다.

틀렸어.”

그리곤 휘둥그레진 카라마츠의 눈을 피해서, 이치마츠가 잔뜩 튼 입술을 카라마츠의 입술에 부딪쳤다. 짙은 담배냄새가 났다. 차가운 밤의 냉기가, 가로등 불빛에 잔뜩 달아오른 온기가 그 입술에서 느껴졌다. 카라마츠는 순간적으로 굳었지만, 곧 눈을 감고 이치마츠의 입술을 적시기 시작했다.

이번엔 카라마츠의 차례였다.

 

쥬시마츠는 샛노란 트럭을 타고 나타났다. 어두컴컴한 거리에 옅은 가로등 불빛을 받아 트럭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바퀴 주변이나 트럭 뒤쪽에 흙먼지가 좀 묻어있긴 했지만 꽤 현실감이 없는 광경이었다. 쥬시마츠는 도로 한가운데에 트럭을 세우고 카라마츠에게 달려와 카라마츠를 번쩍 들어 카라마츠가 뭐라고 말리기도 전에 조수석에 태우고 안전벨트를 채워주었다.

왠지 닥터는 차 같은 거 타지 않고 날아다니실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한겨울 바깥에 있었던 탓인지 트럭 안이 얼어붙을 것처럼 차가웠다. 카라마츠는 몸을 바짝 웅크리고 덜덜 떨었다. 쥬시마츠는 버튼을 이것저것 눌러가며 히터를 틀고 환기를 시켰다.

저기, 카라마츠 씨에겐 말을 못했지만.”

쥬시마츠가 차 핸들을 붙잡고 머뭇거렸다. 카라마츠는 조금이라도 덜 차가운 부분을 찾아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다 고개를 돌렸다.

카라마츠 씨도 잘 모르고 저를 찾아오신 것 같더라고요.”

?”

쥬시마츠는 뭐라고 말할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핸들에 붙어 있는 해바라기를 꾹 눌렀다. 꼭 소리 나는 인형처럼 해바라기가 납작하게 눌렸다가 원래 모양으로 돌아오면서 뾰로롱 하고 새소리를 흘렸다.

벌써 세시 이십분이네요.”

쥬시마츠가 핸들을 단단히 붙잡고 엑셀을 밟았다. 차 엔진소리가 낮게 깔렸다. 어두운 트럭 안으로 가로등 불빛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차 속도가 점점 빨라져 카라마츠는 자기도 모르게 차 문 위쪽에 붙은 손잡이를 잡았다. 쥬시마츠는 카라마츠를 한번 돌아보고 내비게이션을 켰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건가요?”

여기서 동쪽으로 한 두어 시간 달리면 동생이 돌보는 작업장이 나와요. 햇살 농축액은 해가 하늘에 떠 있을 때면 언제든지 짜낼 수 있지만, , 잠시 만요.”

쥬시마츠가 말을 멈추고 다시 해바라기를 두 번 꾹꾹 눌렀다. 그러자 이번엔 야옹, 하고 고양이 울음소리가 났다.

다행이다. 오늘은 날이 맑다네요! 카라마츠 씨, 이제 병의 원인을 알았고 또 증상도 심각하니까 이제 한 번에 해치워버립시다!”

해치워요?”

사실 카라마츠 씨가 지금까지 맞아 왔던 농축액은 100퍼센트 농축액을 시냇물 소리로 희석시킨거에요. 맞을 때 뜨겁지 않았어요?”

그러긴 했는데 심하진 않았어요.”

쥬시마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햇살 원액은 그것보다 훨씬 뜨겁고,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하는거에요. 자칫하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방법은 그것뿐이에요. 저는 카라마츠 씨가 물건을 잃어버린 사람의 저주로 그렇게 얼어붙는 줄만 알았는데, 카라마츠 씨가 직접 빈 소원이라 풀 수 있는 방법이 얼마 없어요…….”

쥬시마츠가 말문을 흐렸다. 그렇구나……. 카라마츠는 도로 옆으로 휙휙 지나가는 소나무와 잣나무 숲을 멍하니 보았다. 카라마츠가 멍청한 짓을 한 걸까?

그렇지만 카라마츠 씨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런 소원이 실제로 이뤄지려면, 온 마음을 다해서 진심으로 바래야만 실현되는거에요. 카라마츠 씨는 착하고, 상냥하고, 다정하니까.”

닥터는 이제 마음도 읽을 수 있는 건가. 카라마츠가 고개를 돌리자 쥬시마츠는 핸들을 양손으로 꽉 붙잡고 정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온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닥터도 상냥해요.”

카라마츠가 씨익 웃었다. 쥬시마츠는 눈도 돌리지 않았으면서 카라마츠가 웃는 걸 봤는지 따라서 환하게 웃었다.

사실 말은 못했지만, 카라마츠 씨는 제 첫 손님이에요.”

병원이요?”

제가 치료사가 되고 처음으로 받은 손님이요!”

치료사요? 의사가 아니라요?”

, 둘 다 닥터지만 조금 달라요.”

쥬시마츠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시험에 통과하고 병원을 차리려고 했는데 사기를 당해서 그런 외진 건물 옥상에 병원을 짓게 되어버렸어요.”

경찰에 신고는 하셨어요?”

하긴 했는데, 벌써 바다 밑으로 들어가 버려서 잡을 수가 없더라고요.”

쥬시마츠가 한숨을 푹 쉬었다. 차는 어느새 낯선 들판 위를 달리고 있었다. 작고 낡은 집들이 한 채씩 드문드문 떨어져 있었고, 알록달록하게 빛나는 운하가 그들 곁에서 도로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

손님은 오지도 않고, 혼자 있으려니까 심심한데 나가서 놀았다가 그 새에 손님이 오면 어쩌나 싶어서 혼자 병원에서 야구만 하고 있었는데, 카라마츠 씨가 온 거에요.”

그 안에서 야구가 돼요? 유리병은요?”

쥬시마츠가 활짝 웃으며 카라마츠를 한번 돌아보았다.

카라마츠 씨가 첫 손님이라서 기뻤어요. 사실 치료사로서 모든 손님을 공평하게 소중하게 대해야 된다고 배웠지만, 나쁜 사람이 아니라 카라마츠 씨라서 더 열심히, 행복하게 치료를 할 수가 있었고요.”

쥬시마츠는 카라마츠의 대답도 듣지 않고 음악을 틀었다. 차 안에 은은한 노랫소리가 흘렀다. 가사는 없었고, 여자가 하프 소리에 맞춰 허밍을 하고 있었다.

조금만 자요.”

카라마츠는 눈을 감고 조수석 구석으로 파고들었다. 여자의 목소리가 좋다고 생각하다가 카라마츠는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카라마츠 씨, 도착 했어요!”

쥬시마츠가 카라마츠의 안전벨트를 풀고 조심스럽게 카라마츠를 흔들어 깨웠다. 어느 새 차는 멈춰있었고, 하늘이 연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쥬시마츠는 카라마츠의 양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카라마츠를 번쩍 들어 품에 안았다.

무거울 텐데 내려주세요. 걸어가겠습니다.”

카라마츠가 잠긴 목소리로 웅얼거렸지만 쥬시마츠는 아랑곳하지 않고 카라마츠를 안고 저벅저벅 걸어갔다.

저어기, 저 커다란 쟁반같은 거 보여요?”

카라마츠가 뻣뻣해진 고개를 조금 돌리자 은빛 바탕에 수박 무늬 같은 게 그려진 거대한 쟁반이 들판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게 보였다. 쥬시마츠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저 밑에서 첫 햇살을 짜낼거에요. 그리고 그걸 카라마츠 씨의 심장 위로 떨어뜨리는 거죠.”

그럼 이제 낫는 건가요?”

그럴거에요. 아쉽지만......”

왜 아쉬워요?”

쥬시마츠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카라마츠 씨가 다 나아버리면 이제 병원에도 오지 않을 거고, 그럼 또 저 혼자 남아야 하는 거니까요...... 아 물론, 카라마츠 씨가 더 이상 아프지 않는 건 좋아요!”

쥬시마츠가 말을 황급히 덧붙였다.

놀러갈게요.”

카라마츠가 쥬시마츠 쪽으로 몸을 조금 돌려 안기면서 말했다.

병원 문에 부재중 팻말 걸어놓고 나가서 야구도 하고, 우리 놀이공원에도 놀러오세요.”

그래도 돼요?”

그럼요. 직원할인 받아서 표도 싸게 살 수 있어요.”

쥬시마츠가 킥킥거리며 웃곤 카라마츠를 들어 어깨에 짊어졌다.

닥터?”

금방 도착할거에요!”

쥬시마츠는 카라마츠의 허리를 단단히 잡고 거의 나는 것처럼 달려가기 시작했다. 카라마츠는 쥬시마츠의 옷을 꽉 붙잡고 쥬시마츠의 트럭이 거의 샛노란 점처럼 멀어지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쥬시마츠랑 야구를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쥬시마츠가 공 던지는 걸 받으면 카라마츠의 손이 날아갈지도 모른다고, 카라마츠는 괜한 말을 했다 싶어 후회했다.

어느새 그 은쟁반 앞에 도착했다. 쥬시마츠는 멀미를 하느라 휘청거리는 카라마츠를 바닥에 앉혀놓고, 은쟁반 밑에 아주 조그만 입구로 다가가 입구 옆에 놓인 화분 밑을 뒤적거렸다. 화분 밑을 뒤졌다가, 창틀 구석구석으로 손으로 쓸어보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카라마츠가 앉아있는 쪽으로 다가와 거의 카라마츠만 한 바위를 번쩍 들어 그 밑에서 조그만 열쇠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열쇠로 문을 열었다.

가시죠!”

쥬시마츠가 자기 옷에 손을 슥슥 닦고 카라마츠에게 손을 내밀었다. 카라마츠는 그 손을 잡고, 어두컴컴한 실내로 들어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쥬시마츠는 길을 알고 있는 것 같아서, 카라마츠는 쥬시마츠에게 바짝 달라붙어 걸었다. 저 멀리에서 천장에 구멍이 뚫린 건지 빛이 내려오는 곳이 있었다.

멀어서 힘들지는 않아요?”

아뇨, 아까부터 계속 안아주셔서 괜찮아요.”

쥬시마츠가 카라마츠의 손을 꽉 붙잡았다.

“100퍼센트 원액을 담을 수 있는 병은 없어요. 그래서 아마 카라마츠 씨가 저 밑에 누워서 심장에 바로 햇살 원액을 맞아야 할 거에요. 제가 정말 조심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역시 쥬시마츠가 말하는 햇살 농축액이라는 건 선샤인이 맞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여태까지 받아온 쥬시마츠가 놔준 햇살 농축액이나 오일같은 건 다 효과가 있었으니까. 첫 환자라고 해도 쥬시마츠는 꽤 능력이 있었다.

걱정 안 해요.”

 

쥬시마츠는 구석에서 간이침대를 끌고 와 카라마츠를 눕혔다. 카라마츠는 윗옷을 벗어 얌전히 밑에 내려놓고 자리에 누웠다. 공기가 차가워 팔에 소름이 돋았다. 쥬시마츠는 꼭 치과에서 볼법한 작업대에 앉아 버튼을 이것저것 눌렀고, 그러자 위이이잉 하는 소리가 나더니 천장에 나 있던 구멍이 정말 바늘만 하게 줄어들었다. 쥬시마츠는 카라마츠가 누운 침대를 이리 저리 움직여 그 구멍이 정확히 카라마츠의 심장 위에 닿도록 맞췄다.

이제 움직이면 안돼요!”

쥬시마츠가 한껏 긴장된 표정을 짓고 있어서 카라마츠는 덩달아 겁이 났다.

혹시 치료를 받다가 죽을 수도 있나요?”

가능성이 없지는 않아요……. 원액을 맞고 또 한참을 요양해야 하구요.”

카라마츠는 바지 주머니를 뒤적여 지갑을 꺼냈다.

정말 만에 하나 제가 죽으면 부탁드릴게요. 나중에 치료비는 이 카드로 결제하면 되고요, 여기 신분증에 적힌 주소가 제 집입니다. 그리고 이건 오소마츠 형 전화번호니까 여기로 전화해서 제가 죽었다고 얘기해주세요.”

쥬시마츠가 지갑을 받아들고 두 손으로 꼭 쥐었다가 작업대 위에 올려놓고, 카라마츠의 손을 잡았다.

카라마츠 씨.”

?”

제가 카라마츠 씨를 좋아한다고 하면 어떨 거 같아요?”

카라마츠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면서 한참 고민했다. 쥬시마츠도 좋지만, 글쎄, 이렇게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인가? 두 사람은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또 만약 이게 고백이라면, 그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카라마츠가 신중하게 생각을 해보는 게 예의일 것이었다.

나중에 대답해도 될까요?”

쥬시마츠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쥬시마츠가 천장에 달린 길쭉한 레버를 당기자 천장이 쿵쿵 하고 울리기 시작했다.

이제 쟁반으로 햇빛을 모을 거에요. 쟁반이 꼭 우산을 접는 것처럼 점점 오므라들 거고, 그럼 안에서 햇살이 부글부글 끓으면서 툭툭 튀어오를거에요. 그걸 쟁반이 꾹꾹 눌러서 짜내면, 그게 햇살 농축액이 됩니다.”

천장에서 뭔가 톡톡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카라마츠는 배 위에 두 손을 곱게 모으고 천장에 뚫린 구멍을 올려다봤다. 쥬시마츠가 아차, 하더니 작업대 밑에서 웃기게 생긴 선글라스를 두 개 꺼내 하나를 카라마츠에게 씌워주고 남은 하나는 자기가 썼다.

꼭 쓰고 있어야 돼요! 안 그러면 눈이 타버려요!”

쥬시마츠는 초조하게 작업대 앞에 앉아 손을 꼼지락 거리다가 천장에 달린 레버를 조금씩 조금씩 더 뒤로 당기기 시작했다. 천장에서 꼭 콩이나 탁구공이 떨어지는 것처럼 톡톡거리던 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하면서, 꼭 팝콘을 튀기는 것처럼 펑펑 하고 터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천장에 난 틈 사이로 모래알 같은 게 스르륵 떨어졌다. 쥬시마츠가 카라마츠를 업고 옥상에서 떨어졌던 게 떠올랐다. 카라마츠는 화들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쥬시마츠를 소리쳐 불렀다.

닥터!”

?”

, 제가 당장 대답할 수는 없지만,”

뭐를요?”

제가 여기서 살아서 나간다면 데이트부터 시작해도 될까요?”

쥬시마츠가 레버를 놓고 카라마츠에게 다가와 카라마츠의 손을 꼭 잡았다.

데이트면, 같이 카라마츠 씨가 일하는 놀이공원으로 가는거에요?”

가서 동물원 구경도 하고, 솜사탕도 먹고, 놀이기구도 타는 건데, 닥터가 재밌어 할지는 모르겠어요.”

아뇨, 재밌을거에요.”

쥬시마츠가 활짝 웃으면서 카라마츠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리곤 잽싸게 손을 놓고 달려가 레버를 잡아당겼다. 천장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가 점점 더 커져 카라마츠는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햇살이라는 건 쉽게 짜낼 수 있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카라마츠는 눈을 꼭 감고 샛노란 옥수수 알갱이 같은 햇살이 점점 커지면서 우산처럼 오므라든 쟁반 안을 이리저리 튀어다는 것을 상상했다. 쥬시마츠가 낑낑거리면서 레버를 당기는 소리가 들렸다. 쥬시마츠는 제법 힘이 센 것 같은데 저렇게 힘들어할 정도라니. 카라마츠는 조금 겁이 났다. 펑펑 터지는 소리는 조금씩 줄어들고, 이젠 철썩 철썩 하고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햇살이 녹아 흐르고 있는 건가? 쥬시마츠가 놔주던 햇살 농축액은 황금빛이 정말 예뻤는데, 원액도 직접 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 카라마츠는 못내 아쉬웠다. 그때 쥬시마츠가 소리를 질렀다.

카라마츠 씨!”

?”

이제 진짜 꼼짝하면 안돼요!”

원액을 떨어뜨리려고 하는 것 같았다. 카라마츠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배 위에 올린 손이 하얗게 되도록 꼭 잡았다. 그 때 바늘로 가슴을 콕 찌른 것처럼 따가움이 느껴졌다. 카라마츠는 놀라 눈을 번쩍 떴고, 눈앞에 꼭 유리로 만든 기다란 바늘 같은 게 카라마츠의 가슴 위로 떨어지는 것을 멍하니 봤다. 빛이 카라마츠의 심장 안으로 파고들고 있는 걸까? 카라마츠의 심장이 꼭 불에 타들어가는 것처럼 아파왔다. 카라마츠는 신음 소리를 참으려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참으면 돼요!”

쥬시마츠가 멀리서 소리쳤다. 카라마츠의 심장에서부터 발끝까지 뜨거운 빛이 흘러가고 있었다. 뜨겁고, 아프고, 따끔거리면서 카라마츠는 꼭 전신이 활활 타는 것만 같았다. 기절이라도 하면 좋을 텐데, 온 몸의 신경이 바짝 일어서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조금만!”

다른 생각을 하자. 다른 생각을. 카라마츠는 뇌까지 녹아서 찰박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무시하고 금붕어와 팬더, 기린 얘기를 하던 아이를 떠올렸다. 여기서 살아서 나간다면 아이를 찾아봐야겠다. 아이가 부모를 찾았을까. 부모는 아이를 찾으려고 했을까. 쥬시마츠가 놀이기구를 타면 재밌어 할까? 순간 펑, 하고 카라마츠의 심장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터졌다고 생각했다. 카라마츠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땐 이미 집이었다. 카라마츠는 멍하니 이불을 덮고 천장을 보다가 심장에 손을 올렸다. 더 이상 춥거나 떨리거나 하는 증상은 없었다. 심장도 멀쩡하게 잘 뛰고 있었고,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온몸이 개운했다. 꼭 햇살 농축액을 막 맞았을 때처럼. TV를 켜보니 월요일 아침이었다. 주말 내내 잠들어있던 걸까? 카라마츠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침대에서 카라마츠의 지갑이 툭 떨어졌다. 아마 쥬시마츠가 여기까지 카라마츠를 데려다 준 모양이었다. 카라마츠는 지갑을 주워들어 이러 저리 내용물을 살펴보고, 또 침대 주변이나 탁자 위 같이 눈에 뜨이는 곳을 전부 훑어보았지만 쥬시마츠가 남겼을법한 쪽지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아니, 하나 낯선 물건이 있었다. 카라마츠는 식탁 위에 놓여있는 해바라기를 들어 그 가운데를 꾹 눌렀다. 그러자 뾰롱, 하고 새 소리가 들렸다.

 

? 카라마츠, 병원은 길 동쪽이 아니라 서쪽이라고! 대체 겁도 없이 어떻게 그런 데를 간 거야?”

오소마츠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카라마츠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렇지만 다 나았는걸?”

햇살 농축액을 맞아서? 아니 그게 마약이라던가 아니면 불법 시술일수도 있는 거 아냐? 뭘 믿고 몸을 맡긴 거야? 병원이 수상하다 싶으면 다른 병원을 찾아가봐야지!”

카라마츠는 머쓱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카라마츠는 그닥 큰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오소마츠의 귀에는 영 터무니없는 얘기로 들리는 것 같았다. 오소마츠가 혹시 사기를 당한 게 아니냐며 카드 내역을 살펴보라고 했지만 쥬시마츠의 병원에서 긁은 기록은 남아있지 않았다.

돈이 안 나갔으면 뭐 다행이긴 한데……. 혹시 카라마츠 신장같은 거 뺏긴 거 아냐?”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러면 흉터가 남아있겠지?”

사실 흉터가 남긴 남았다. 카라마츠가 아침에 샤워를 하려고 옷을 벗자 아마 그 바늘이 닿았을 법한 자리에 황금색으로 작은 나무 가지 모양의 흉터가 남아있었다. 카라마츠는 흉터를 손으로 살살 문질러 보았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쥬시마츠에게 물어보면 설명해주지 않을까? 하지만 오소마츠는 극구 말렸다. 운 좋게도 그런 시술을 받고 몸이 나았다고 하더라도, 다시 찾아갈만한 곳은 아니며 의심도 좀 해보고 살아야 한다고. 카라마츠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쥬시마츠에게 데이트부터 시작하는 게 어떠냐고 했었는데, 그리고 쥬시마츠는 나쁜 사람같이 보이지도 않았고.

실례합니다!”

누군가 분실물센터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섰다. 손님인가? 카라마츠는 그날 발견된 분실물을 적어두는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카라마츠의 책상 위에 정말 거대한, 꼭 꽃집에서 파는 모든 꽃들을 있는 힘껏 묶어 놓은 것 같은 알록달록한 꽃다발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달고 새콤한 꽃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카라마츠 씨랑 동물원 구경하러 왔는데, 잠깐 괜찮을까요!”

오소마츠는 옆에서 꽃다발을 보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카라마츠의 어깨를 잡았다.

누구야?”

카라마츠는 웃음이 나오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의사 선생님!”

사실 별 중요한 얘기가 아닐지도 모르고, 이게 제 병이랑 연관된 게 맞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

쥬시마츠의 손이 날개뼈 밑을 꾹꾹 눌러왔다. 숨이 턱턱 막히면서도 시원했다.

주말이었어요. 날씨도 선선하고 공기도 맑은 날이라 손님들이 정말 많이 왔었습니다. 그만큼 물건을 잃어버린 사람도 많고, 찾겠다고 모여드는 사람들도 많아서 하루 종일 정신이 없었죠. 밥 먹으러 나갈 겨를도 없어서 오소마츠 형이랑 간신히 도시락을 사다가 먹었으니까.”

쥬시마츠는 아무 대답도 없이 카라마츠의 등에 기름을 바르는데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얘기를 해도 되는 걸까? 카라마츠는 가만히 장작 타는 소리를 들었다. 누군가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저희 사무실 옆엔 미아보호소가 있어요. 놀이공원이 워낙 넓어서 그런지 미아들이 제법 많이 옵니다. 그날도 엄마 손을 놓쳤다고 우는 애들이 한 여덟 명은 됐던 것 같은데, 그 중에서 한 아이가 좀 이상했어요. 다른 애들은 펑펑 울거나 아니면 잔뜩 겁먹어서 직원들한테 안겨있는데, 그 아이는 놀라지도 않고 그냥 다른 애들이 우는 걸 이상하단 눈으로 쳐다보고만 있는 거에요. 이상하지 않아요? 그 애가 한 대여섯 살쯤 되어 보였는데, 그땐 엄마랑 떨어지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느낄 나이잖아요. 그런데 그 아이는 직원이 이름과 집 주소, 전화번호, 부모님 성함 같은 걸 물어봐도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대답도 하질 않는 겁니다. 아이가 발달이 느린 아이였거나 그러진 않았어요. 다른 건 물어봐도 대답을 잘 했거든요. 제가 과자랑 음료수를 나눠주니까 고맙다고 인사도 꾸벅 하고, 혹시 놀라서 그런 건가 싶어 아이를 안고 여기 저기 주변을 걸어 다니면서 말을 거니까 자기는 기린이 좋고, 병아리는 귀엽고, 팬더는 조금 무섭다 하는 얘기를 조잘조잘 잘도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신상에 관한 얘기는 은근히 돌려서 물어보기만 하면 금세 알아차려서, 아무 말도 없이 풀죽은 표정만 짓고 있었어요.”

쥬시마츠가 카라마츠의 등에서 손을 떼고 오일병 뚜껑을 닫았다. 그리곤 카라마츠가 옆에 벗어두었던 윗옷을 조심스럽게 입혀주고 카라마츠의 어깨에 이불을 덮어주었다.

오일은 바를 만큼 발랐으니까, 이불 덮고 있어요.”

수고하셨어요.”

쥬시마츠는 활짝 웃고 자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카라마츠에게 물었다.

그 아이가 부모를 찾았나요?”

아니요. 아이는 정말 한마디도 하질 않아서 그날 하루 종일 다른 애들이 부모님 손을 잡고 떠나는 걸 멀뚱히 보기만 하다가 결국 경찰서로 갔어요. 그 뒤에 일은 알 수 없었어요. 아마 미아보호소 쪽에서 CCTV 화면 같은걸 확인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일하는 쪽이 아니니까.”

카라마츠 씨가 속상했겠네요.”

쥬시마츠의 목소리가 따뜻했다. 카라마츠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다음 말을 꺼내기 위해 숨을 골랐다.

그날 저녁에 마감을 하고 집에 돌아가는데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아이 생각이 났어요. 병아리는 조류고, 팬더는 포유류고, 금붕어는 어류라고 얘기할 만큼 똑똑한 아이가 왜 자기 이름도, 전화번호도, 집주소도 얘길 하지 않았는지. 그런데 그날 밤 혼자 저녁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아이 마음이 이해가 되는 거에요. 아이가 어쩌면 부모님을 찾고 싶지가 않았다던가, 아니면,”

아니면?”

부모님에게 버려질 거라고 미리 예상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사실 아이가 부모님에게 반항해서 손을 놓고 도망쳤다고 하면 부모님은 당연히 놀이공원 직원들이 아이를 미아보호소로 데려올 거라는 걸 아니까, 그 쪽으로 아이를 데리러 왔겠죠? 하지만 그 아이를 데리러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엄마도, 아빠도, 할머니 할아버지도. 그냥 동네 공원도 아니고 주거지역에서 한참 떨어져있는 놀이공원인데, 아이가 거기까지 혼자 왔을 리는 없잖아요.”

부모가 아이를 버리러 온 거네요.”

카라마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쥬시마츠는 의자를 침대가로 조금 더 가까이 붙여 앉았다.

그렇게 생각을 하니까 아이의 행동들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어요. 다른 사람이 자기 부모를 찾아낼 수 있을 법한 정보는 하나도 가르쳐주지 않고, 담담하게 버려짐을 받아들인 거에요. 속상했어요. 그렇게 조그맣고 귀엽고 똑똑한 아이가 왜 버려져야 하는지, 그리고 아이는 왜 거기에 분노하거나 부모를 원망하지도 않고 얌전히 버려지는지. 이건 좀 많이 나간 것 같지만, 부모가 아이에게 계속 암시를 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넌 필요 없는 아이고, 널 어딘가에 버리고 올 거라고 하면서.”

가슴이 차가워지는 게 느껴졌다. 쥬시마츠도 눈치를 챘는지 소매를 걷어 올리고 조심스럽게 카라마츠의 심장 부근을 만졌다.

많이 슬펐나봐요. 카라마츠 씨의 심장이 다시 얼어붙고 있어요.”

슬펐어요. 속상한 건가. 사실 그 아이가 제 자식도 조카도 아닌데, 그냥 그날 하루 미아보호소 쪽에 사람이 부족해서 아이를 돌봤을 뿐인데 그냥 그 어린 아이가 버려진다는 게 속상해서 마음이 안 좋았어요. 차라리 아이가 펑펑 울면서 부모를 찾았다면 더 나았을지도 몰라요.”

버려질 준비가 되어있는 아이라니까 더 속상해져서……. 카라마츠가 말을 흐렸다. 쥬시마츠는 침대 가에 바싹 붙어 카라마츠의 한쪽 뺨을 감싸고 카라마츠의 눈을 들여다봤다. 쥬시마츠의 눈이 맑고 깨끗해서, 카라마츠는 그 눈동자에 자기가 비춰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카라마츠 씨가 소원을 빌었군요.”

소원이요?”

소원이라는 게 늘 대단한 건 아니에요. 카라마츠 씨가 진심으로 뭔가를 바라게 되면, 그게 소원이죠.”

…….”

무슨 소원이었어요?”

저는 어른이니까, 아이가 받았을 상처를 제가 받았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쥬시마츠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카라마츠는 그냥 눈을 비비는 척만 하려고 눈가에 손을 가져다 댔는데, 마른 눈에서 아주 조그만, 모래알 같은 알갱이가 툭 떨어졌다. ? 카라마츠가 놀라 눈을 비비자 양쪽 눈에서 차가운 알갱이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선생님……, 이게 뭐죠?”

쥬시마츠가 한쪽 손을 카라마츠의 눈 밑에 가져다 댔다. 조금 따끔거렸다. 쥬시마츠는 몇 분 동안 가만히 손을 대고 있다가 손안에 든 것을 카라마츠에게 보여주었다. 투명한 얼음 알갱이가 한 스푼정도 담겨있었다.

카라마츠 씨의 눈물이에요. 안되겠다. 지금 일단 작업장까지 가고, 첫 햇살을 받아야겠어요.”

쥬시마츠의 손 안에 든 것은 체온에 순식간에 녹아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카라마츠는 멍하니 녹색 카펫에 얼룩이 생기는 것을 물끄러미 보았다. 눈에서 저런 게 나오다니. 진짜 죽는 건가? 쥬시마츠는 병원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커다란 가방 안에 물건을 마구 쑤셔 넣었다. 카라마츠는 눈물 얼룩이 증발해 점점 옅어지는 것을 보다가 침대에서 일어나 이불을 정리하고, 야구배트와 글러브 위에 겹겹이 쌓여있는 겉옷을 하나씩 주워 입었다. 카라마츠가 아이의 상처까지 떠안길 바랐기 때문에 카라마츠가 이렇게 얼어붙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아이가 받았을 상처는 얼마나 심했던 걸까. 그 작은 아이가 이렇게 춥고, 아프고, 외로웠을 거라고 생각하면 카라마츠는 다시 마음이 욱신거렸다. 후회가 되진 않았다. 카라마츠가 패딩까지 껴입자 뒤에서 쥬시마츠가 아주 길고 두꺼운 목도리를 카라마츠의 목에 칭칭 둘러 감았다.

카라마츠 씨는 정말 상냥한 사람 같아요.”

쥬시마츠가 목도리를 꼼꼼하게 매듭지으면서 말했다.

아뇨, 그렇지는 않아요. 그런데 이 목도리는 뭐로 만든 건가요?”

이거요? 산건데요?”

쥬시마츠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카라마츠가 정말 한참을 잤는지 눈이 소복하게 쌓인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고, 눈보라는 어느새 멈춰있었다. 찬 공기를 들이마시니 폐가 찌릿찌릿 아파서 카라마츠는 목도리를 끌어올려 코와 입을 막았다. 쥬시마츠는 커다란 배낭을 앞으로 돌려 매더니 카라마츠에게 등을 내밀었다.

업히세요!”

아까 올라올 때도 업고 올라오셨는데, 이번엔 제가 내려갈게요.”

쥬시마츠는 고개를 저으며 카라마츠의 양 팔을 잡아 자기 목에 두르고, 카라마츠를 억지로 업히게 해서 그의 양 허벅지를 단단히 잡았다.

눈 감아요.”

?”

좀 놀랄까봐.”

카라마츠가 눈을 감자, 쥬시마츠가 순식간에 옥상을 박차고 달려 나가 그대로 뛰어내렸다. 휘이이이잉 하고 귓가로 거센 바람이 스쳤다. 카라마츠가 쥬시마츠의 목을 있는 힘껏 끌어안고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쥬시마츠가 사뿐히 땅 위에 착지해 카라마츠를 내려주었다. 쿵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꼭 깃털이 내려앉듯 가뿐했다.

지금 저기서 뛰어내린거에요?!!”

카라마츠는 비틀거리며 건물 벽을 붙잡고 미친 듯이 요동치는 가슴을 꽉 부여잡았다. 만약 카라마츠의 심장이 얼어붙었다 해도 지금 이렇게 뛰는 걸 보면 다시 살아난 게 분명했다.

눈 감고 있으면 모를 줄 알았는데…….”

쥬시마츠가 머쓱해하며 카라마츠의 어깨를 몇 번 토닥였다.

차 가지고 올게요. 저기 큰 길로 나가있어요.”

쥬시마츠가 의사 가운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 의사 용하지 않아?”

오소마츠가 카라마츠에게 커피를 건네주면서 물었다. 카라마츠는 커피를 받으면서 고개를 한번 꾸벅 하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심장까지 얼어붙는다는 게 진짜인건지 손가락이 꽁꽁 얼어붙어 뜨거운 커피 잔에 닿은 부분이 따끔거렸다. 커피가 목구멍을 타고 흘러가는 게 느껴졌고, 카라마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용하긴 용한데, 병이 나을 생각을 안해.”

그래? 주사같은 거 놔주지 않든?”

며칠째 맞고 있는데 저녁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언제 맞았냐는 것처럼 원래대로 돌아가 버려. 게다가 갈수록 좀 심해지는 것 같고.”

카라마츠가 한숨을 푹 쉬었다. 사무실엔 카라마츠와 오소마츠 둘밖에 없었고 워낙 사람들이 자주 오지 않는 곳이라 오소마츠가 카라마츠를 위해 난방을 최대한으로 올려주었다. 오소마츠는 더워 긴팔 후드 한 겹만 입고 있는데 카라마츠는 내의에 양모 스웨터, 가디건, 얇은 잠바, 그리고 오리털 패딩까지 껴입고 있어도 추워 입김이 나왔다. 오소마츠가 손을 주물러 주고 꽁꽁 얼어 꼭 떨어져나갈 것 같은 귀를 잡고 녹여주려고 해도 영 녹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안되겠다. 점심시간 아직 안됐어도 얼른 가서 주사 맞고 와.”

오소마츠가 카라마츠를 질질 끌고 사무실 밖으로 내던졌다.

의사 말만 들으면 돼!”

며칠 전에 햇살 농축액이 얼마 안 남았다는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으려나. 지금이라도 큰 병원에 가봐야 하는 건 아닐까? 카라마츠는 무거운 몸을 질질 끌고 쥬시마츠의 병원으로 향했다. 아침부터 꼭 밀가루처럼 날리던 눈이 어느새 눈보라가 되어 카라마츠의 온 몸을 훑고 지나갔다. 계단은 오를 수 있으려나. 귓가에 윙윙거리는 바람소리 때문에 한참 머리가 울렸다. 카라마츠는 시야를 가리는 눈보라를 한쪽 팔로 막으면서 건물 뒤로 들어섰다.

카라마츠 씨!”

밝은 목소리가 카라마츠를 불렀다. 닥터 쥬시마츠가 이 추운 날씨에 긴팔 후드 한 장만 입고선 계단 앞에 서있었다.

닥터 쥬시마츠? 여기서 뭐하세요? 오늘은 병원 문 닫는 날인가요?”

쥬시마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쥬시마츠는 실내화를 신은 발로 소복이 쌓인 눈 위를 척척 걸어와 카라마츠를 와락 끌어안았다.

잠깐만요,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마중 나왔어요.”

점심시간이 되려면 한참 남았는데, 벌써부터? 카라마츠는 조금 놀랐지만 쥬시마츠에게서 느껴지는 온기가 좋아 가만히 안겨 숨을 골랐다. 사실 그 차갑고 얼어붙은 계단을 올라가기가 막막했었는데 닥터 쥬시마츠가 마중을 나왔다니. 쥬시마츠는 카라마츠를 한참 끌어안고 있다가 대뜸 카라마츠를 번쩍 들어 업었다.

닥터!”

금방 도착할거니까 꽉 붙잡아요!”

그리곤 닥터 쥬시마츠가 순식간에 눈 위를 달려 계단에 매달렸다. 아니, 카라마츠 같은 건장한 성인 남자를 업고 저 계단을 오른다고? 올라가다가 떨어지면 어떡하지? 카라마츠는 있는 힘껏 쥬시마츠의 목을 붙잡고 매달렸다. 쥬시마츠의 목을 조르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쥬시마츠는 아랑곳하지 않고 꼭 날아가는 것처럼 계단을 올랐다.

다 왔습니다! 조금만 참아요!”

쥬시마츠가 카라마츠를 업은 그대로 달려가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갔다. 병원 안은 여느 때처럼 훈훈하고 따뜻한데다 저 멀리에 못 보던 벽난로까지 생겨 얼어붙은 몸이 조금 녹는 것 같았다. ……. 카라마츠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쥬시마츠는 카라마츠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어딘가에서 간이침대를 질질 끌고 나왔다.

지금 상태가 많이 심각하니까, 일단 주사부터 맞고 마사지를 해야겠어요! 햇살 농축액이 남은 게 한 병뿐인데 이대로 내버려두면 카라마츠 씨가 얼어버릴 거에요!”

마사지요? 카라마츠가 책상에 엎드려 뭐라고 대답을 하려고 했지만 얼었던 몸이 녹자 수마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카라마츠는 연신 하품을 하다 결국 책상 가장자리를 붙잡고 무거운 눈꺼풀을 살며시 감았다. 쥬시마츠가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뭔가를 떨어뜨리고 깨뜨리고 하는 소리가 조금씩 멀어졌다. 손목에 따끔, 하고 쥬시마츠가 주사를 놓는 느낌이 들었고, 늘 그랬던 것처럼 주사를 맞은 곳에서부터 은은하게 따뜻한 기운이 퍼져나갔다. 쥬시마츠의 단단하고 따뜻한 손이 카라마츠의 이마에 닿았다가, 양 뺨을 감싸 안았다. 이런데서 이렇게 잠들어버리면 예의가 아닌데, 카라마츠는 잠에서 깨야지, 깨야지 하다가 결국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얼마나 잤을까? 꼭 영화에 나올법한 그림 같은 풍경 속에서 꽃과 나비와 대화를 한참 하는 꿈을 꾼 것 같은데. 분명히 처음 잠들었을 때는 책상 위였는데, 눈을 떠보니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고 있었다. 으으, 카라마츠가 기지개를 펴자 책상 앞에 앉아 안경을 쓰고 두꺼운 책을 들여다보던 쥬시마츠가 고개를 돌렸다.

마사지를 해야 되는데, 자는 사람 옷을…….”

쥬시마츠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가 또 순식간에 멀쩡해졌다.

, 죄송합니다. 제가 좀 피곤했었나봐요.”

카라마츠는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풀었다. 쥬시마츠가 자리에서 일어나 머뭇거리며 입고 있던 의사 가운을 만지작거리다 입을 열었다.

카라마츠 씨, 제가 잘못 알고 있었어요. 아까 맞은 주사가 마지막 햇살 농축액이라 내일 햇살을 짜내러 가야 됩니다. 혹시, 내일 안 바쁘면,”

쥬시마츠가 두 손을 모으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같이 가서 도와주실 순 없습니까? 원래는 동생이 도와주는데, 동생이 산을 타러 가버리고 없어서 혼자서는 힘들 것 같습니다…….”

제가 맞을 약인데 제가 가서 도와야죠.”

카라마츠는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러자 쥬시마츠가 달려와 카라마츠를 번쩍 들어 도로 침대위에 눕혔다.

안됩니다! 햇살을 짜낼 때까지 버티려면 몸을 쉬어야 해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어디 가면 안 됩니다!”

쥬시마츠가 카라마츠의 손을 붙잡고 단단히 당부를 한 뒤 책장에 줄지어 늘어서 있는 유리병 사이를 뒤졌다. 달그락 달그락 하는 소리가 벽난로에서 장작 타는 소리와 어우러져 묘하게 듣기 좋았다. 이불도 푹신푹신하고, 눈앞에 거대한 샹들리에가 아주 조용히 끼익 끼익 하고 흔들리고 있었다.

찾았습니다!”

쥬시마츠가 커다란 유리병을 들고 달려왔다. 유리병은 카라마츠가 사먹는 1리터짜리 생수병만한 크기였는데, 안에 연한 녹색이 도는 기름같은 게 가득 차있었다.

봄바람 오일이에요! 봄바람 오일이랑, 개구리 하품이랑 벚꽃 눈이 들어 있어서 햇살 농축액만큼은 못해도 오늘 하루정도는 버틸 수 있을 거에요. 카라마츠 씨, 그럼, 위에 옷 좀…….”

쥬시마츠가 눈을 내리깔았다.

개구리 하품이요?”

유통기한은 안 지났으니까 걱정 안하셔도 돼요!”

쥬시마츠가 고개를 끄덕이며 소매를 걷었다. 카라마츠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쥬시마츠가 하라는 대로 윗옷을 주섬주섬 벗었다.

개구리가 하품을 해요?”

, 개구리 하품은 신선도 유지를 위해서 넣는 거에요. 동면에서 갓 깨어난 개구리들은 하품을 엄청 하거든요.”

쥬시마츠가 진지한 얼굴로 카라마츠의 눈앞에서 유리병을 흔들어 보였다. 카라마츠는 도시 출신이라 개구리가 동면에서 깨어나는 걸 본적이 없었다. 사실 개구리도 본 일이 거의 없지만. 카라마츠가 윗옷을 벗자 쥬시마츠가 침대 앞으로 의자를 질질 끌고 와서 자리에 앉아 손바닥에 오일을 조금 덜어내 손바닥을 문질러 오일이 따끈하게 데워지도록 했다. 그리곤 카라마츠의 목에서부터 시작해 천천히 등에 오일을 바르기 시작했다. 봄바람 오일이라고 해서 그런지 풋풋한 봄냄새가 났다. 쥬시마츠의 손이 닿는 감각이 익숙하진 않았지만 카라마츠는 얌전히 쥬시마츠에게 몸을 내맡겼다. 쥬시마츠는 한참 오일을 바르다가 카라마츠에게 말을 걸었다. 진지한 목소리였다.

카라마츠 씨는 무슨 일을 하십니까?”

저는 놀이공원 분실물센터에서……. 아차! 사무실에 돌아가야 하는데!”

카라마츠가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쥬시마츠가 카라마츠의 어깨를 붙잡고 눌렀다.

이미 늦었어요! 벌써 한밤중이니까 놀이공원도 문 닫았을거에요. 내일은 주말이니까 월요일에 출근하면 됩니다!”

쥬시마츠의 병원에는 창문도 시계도 없어 시간을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카라마츠는 한참 주변을 둘러보며 시계를 찾다가 곧 포기하고 다시 쥬시마츠에게 등을 내밀었다. 쥬시마츠가 다시 오일을 바르기 시작하자 카라마츠가 말을 이었다.

놀이공원 분실물 센터에서 사람들이 잃어버린 물건을 받아주고, 또 찾아주고 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잃어버린 물건들을 주인들이 찾아가지 않으면 폐기처분도 하구요.”

놀이공원에 분실물이 많아요?”

엄청 많아요. 어떻게 이런 걸 잃어버릴 수가 있지? 하는 물건들도 많아서 오소마츠 형이랑, 그러고 보니까 오소마츠 형이 여기를 추천해줘서 온 거에요.”

오소마츠? 오소마츠가 누구지…….”

그 왜, 얼굴에 장난꾸러기라고 쓰여 있는 형인데. 여긴 예전에 왔었다고 했는데 그래서 기억을 못하시는 걸 수도 있어요.”

쥬시마츠는 대답이 없었다. 등 뒤에서 손바닥에 오일을 조금 따라내는 소리가 들렸고, 카라마츠는 잠깐 고민하다가 다시 분실물 센터에 대한 얘기를 시작했다.

아까 그 분실물센터 얘기 말인데, 이런 저런 물건들이 많이 들어와요. 지갑같은 건 정말 흔한 얘기고, 거의 한권을 꽉 채워 쓴 다이어리나 아님 손때 탄 인형, 교과서가 가득한 책가방, 낡고 헤진 가족사진까지 정말 사람이 쓰는 물건이란 물건들은 다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걸 도로 찾아가는 사람들은 정말 많지가 않아서 사무실 안에는 온통 주인 잃은 물건들뿐이에요.”

쓸쓸하겠네요.”

쥬시마츠가 대답했다. 쓸쓸한가? 카라마츠는 가만히 사무실에 앉아있을 때의 느낌을 떠올려봤다. 놀이공원 안의 사무실인데다가 가끔 손님들이 올 때가 있어서 그런지 알록달록하게 장식이 많은 놀이공원 분위기였고, 창문 너머로 놀이공원 테마곡 같은 게 늘 들려왔지만, 맞아. 분실물 센터 안은 쓸쓸해. 일을 하면서 틈틈이 오소마츠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곤 하지만 카라마츠는 분명히 쓸쓸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게요. 쓸쓸해요.”

혹시 병의 원인이 거기에 있는 건 아닐까요?”

원인이요? 그렇지만 오소마츠 형은 이런 증상 같은 건 하나도 보이질 않는데요?”

그래도 잘 떠올려보세요. 카라마츠 씨 한테만 영향을 주는 게 있을지도 몰라요.”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며칠 전에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가 센터로 왔었어요.”

여기가 맞는데……. 카라마츠는 눈앞의 비상계단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지도 앱에는 분명히 이 건물의 5층이라고 나와 있는데, 막상 건물까지 와보고 나니 4층까지밖에 없었다. 건물 안의 계단도 4층까지만 이어져있고, 카라마츠는 건물 주변을 빙글빙글 돌면서 한참 올라갈 방법을 찾다 그늘진 건물 뒤편에 건물 옥상까지 가는 계단을 발견했다. 보통 대부분의 건물의 옆면에 붙어 있는 것처럼 지그재그로 걸어 올라가는 계단이 아니라 사다리를 타고 오르듯 건물의 벽면을 따라 나있는 계단이라, 여길 올라가면 진짜 병원이 있는 건지, 아니면 지도앱에서 뭔가 착오가 있었던 건지 카라마츠는 짐작이 가질 않았다. 어떻게 하지? 그냥 이대로 돌아갈까? 하지만 카라마츠의 몸은 점점 더 거세게 떨려왔고, 제법 따뜻해진 날씨에도 불구하고 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여기까지 와봤으니 일단 가볼까. 카라마츠는 손을 뻗어 계단 손잡이를 잡았다.

아픈 몸으로 4층까지 올라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카라마츠는 기본 체력이 있었기 때문에 중간에 한번 쉬지도 않고 끝까지 계단을 올라갔다. 찬바람에 꽁꽁 얼어붙은 손을 외투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들어보니, 꼭 거대한 대나무를 한 마디 잘라 옆으로 뉘인 것처럼 길쭉한 원통 모양의 조그만 집 같은 게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니 나무로 짓고 초록색을 칠한 것이었다. 꼭 동화에 나올법한 것이라 카라마츠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어 벽을 만졌다. 벽이 따뜻했다. 그 온기를 느끼는 순간 카라마츠는 마음이 놓였다, 여기 그 어디에도 병원이라는 표시를 찾아볼 수가 없지만, 왠지 이 안으로 들어가도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카라마츠는 벽에 손을 대고 옆으로 걷다 작은 문을 찾았다. 손잡이가 황금색이었다. 카라마츠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문손잡이를 돌려 열었다.

계십니까?”

훈훈한 공기가 카라마츠를 감싸 안았다. 이 조그만 건물? ? 의 안은 전혀 병원 같아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는 꼭 잔디 같은 녹색 카펫이 깔려 있었고, 천장에는 진짜 촛불이 켜져있는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었다. 이 안이 꽤 좁은 데도 불구하고 저런 커다란 샹들리에라니. 방 한가운데엔 뭔가 이것저것 잡다한 물건들이 가득 쌓여있는 책상과 의자가 덩그러니 놓여있었고, 저 한 구석에 야구배트와 글러브, , 야구모자 같은 게 대충 걸려있는 보조의자가 있었다. 아니, 야구 모자 밑에 깔린 게 하얀 가운인 걸 봐선 의사가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문이 있는 곳을 제외한 온 벽면이 크고 작은 유리병으로 채워진 책장으로 가득 차 옅은 노란색의 벽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저 유리병 안에 든 것들을 도대체 뭘까. 카라마츠는 바로 옆에 있는 책장에 가까이 다가가 유리병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넘실거리는 보랏빛 액체 안에 은빛 가루들이 소용돌이치는 것이 있었고, 혼자서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조용히 끓고 있는 분홍색 액체도 있었다. 그 옆에는 유리병 안쪽에 물방울이 가득 맺힌 초록색 나뭇잎이 있었고, 은색에서 회색, 흰색, 그리고 다시 은색으로 계속 색깔이 변하는 액체가 담긴 것도 있었다. 카라마츠는 정신없이 유리병을 들여다보다가, 뭔가 깨지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샛노란 개나리색 점프슈트를 입은 남자가 입을 쩍 벌리고 카라마츠를 보고 있었다.
, 죄송합니다. 진료 받으러 왔는데요.”

카라마츠는 머쓱해하며 남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남자는 멍하니 카라마츠를 바라보다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면서 잔뜩 구겨져 있던 가운을 허겁지겁 입었다.

여기 앉으시죠!”
남자가 자기 책상 옆으로 작은 보조의자를 질질 끌고 와 탕탕 소리가 나게 의자를 쳤다. 사람들이 잘 안오는덴가? 아니, 그닥 병원같이 보이지는 않는데. 카라마츠는 잠깐 고민을 하다 남자에게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남자는 카라마츠가 보조의자에 앉자 다시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가 잡동사니로 엉망진창이 된 책상 구석을 뒤져 조그만 스케치북과 노란 색연필을 꺼냈다.

저는 쥬시마츠입니다! 닥터 쥬시마츠에요! 저는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 카라마츠입니다. 마츠노 카라마츠.”

쥬시마츠가 스케치북에 열심히 카라마츠의 이름을 적었다. 하얀 종이에 노란 색연필로 쓰는 게 잘 보이나? 하지만 닥터 쥬시마츠는 아랑곳 하지 않고 카라마츠의 이름을 스케치북 맨 위에 쓰더니 카라마츠를 힐끔힐끔 돌아보면서 뭔가를 계속 써내려갔다.

저기, 제가 몸살에 걸린 것 같아서요.”

몸살이요?”

닥터가 미간을 찌푸렸다. 몸살이 아닐 텐데, 하고 작게 얘기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카라마츠가 미처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기도 전에 닥터가 카라마츠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체온계를 쓰지 않고? 하지만 닥터의 크고 따뜻한 손이 닿자 카라마츠는 기분이 좋아져 따로 물어보지 않았다. 아마 닥터 쥬시마츠는 나이는 어려 보여도 제법 연륜이 있어 체온계 같은 건 신임하지 않는가보다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닥터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닥터는 카라마츠의 눈을 들여다보며 이마에 손을 얹고 있다가, 다른 쪽 손마저 들어 카라마츠의 양 귀를 조심스럽게 감쌌다. 닥터의 손은 거칠었다. 의사들은 공부만 하는 줄 알았는데 커다란 손이 굳은살투성이라 카라마츠는 조금 놀랐다. 닥터가 눈을 감더니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낯선 사람과 이렇게 가깝게 붙어있으니 낯설어 카라마츠가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위급하네요!”

닥터가 눈을 번쩍 뜨고 소리쳤다.

? 그냥 몸살이 아니에요?”

감기몸살하고는 다른 거에요, 어서 약을 맞아야!”

쥬시마츠는 책상을 순식간에 뛰어넘어 벽에 가득찬 유리병 사이를 뒤졌다. 쨍그랑 쨍그랑 하고 유리병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카라마츠도 가까이 가 신기한 유리병들을 구경하고 싶었지만 위급하다는 말을 들으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니, 대체 문제가 뭐지? 좀 춥고 그럴 뿐인데? 잠시 후 쥬시마츠는 아주 조그만, 자기 손가락 한마디만한 유리병을 찾아내 들고 왔다. 유리병 안에는 황금빛 액체가 부드럽게 일렁이고 있었는데, 안에 든 것이 뜨거운지 쥬시마츠가 양손으로 번갈아 들며 뛰어와 급히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카라마츠는 허리를 숙여 유리병 안에 든 것을 들여다보았다. 안에 조그만 알갱이같은 게 보이는 것 같기도 했고, 뭔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주사 안 무섭죠? 다 큰 어른이니까 괜찮을 거에요!”

쥬시마츠가 서랍에서 주사기를 꺼냈다. 카라마츠가 뭐라 대답을 할 틈도 주지 않고, 닥터는 유리병 안에 주사기를 꽂아 내용물을 쭉 빨아들여서 손가락으로 바늘 끝을 톡톡 튕겼다.

, 이걸 맞으면 다 낫는 겁니까?”

글쎄요, 일단 응급처치 정도는 될 텐데....”

쥬시마츠가 고개를 저었다. 카라마츠가 망설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통 이런 주사는 엉덩이에 맞던데, 카라마츠가 엎드릴만한 침대는 보이지 않았다.

저기, 닥터, 어딜 잡고 엎드리면 되는 건가요?”

다시 쥬시마츠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쥬시마츠는 옆에 조심스럽게 주사기를 내려놓고 목이 보일만큼 내렸던 점프슈트의 지퍼를 목 끝까지 올렸다.

아니, 엉덩이가 아니라 팔에 맞아도 되는 주사입니다! 괜찮아요! 이쪽 팔에 맞을까요?”

다행이다. 하마터면 책상에 엎드릴 뻔 했네. 카라마츠는 안심하고 왼쪽 팔을 걷었다. 쥬시마츠가 다시 주사기를 집어 들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카라마츠의 손목을 잡았다. 손마디가 도드라져서, 카라마츠는 의사 선생님이 저런 손이라니, 신기하네, 하면서 쥬시마츠가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쥬시마츠는 뚫어져라 카라마츠의 손목을 들여다보다가, 아무렇게나 주사 바늘을 푹 찔러 순식간에 안에 든 내용물을 밀어 넣었다. 주사 바늘이 뾰족해 카라마츠가 눈가를 확 찌푸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안에 든 내용물은 뜨겁고, 주사를 맞은 부분부터 발끝까지 순식간에 몸이 따뜻해졌다. 그와 동시에 기분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고, 머리가 개운했다. 온 몸이 훈훈하게 달아올랐다.

, 벌써 다 나은 것 같아요!”

아니에요, 중요한 건 병의 원인입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몸이 안 좋아지셨나요?”

쥬시마츠가 주사기를 내려놓고 카라마츠의 이마에 다시 손을 얹었다.

글쎄요,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보세요.”

카라마츠는 쥬시마츠의 손에 기대어 한참 기억을 더듬어보았지만 딱히 이렇다 할 계기는 없었다. 평소처럼 먹고, 평소처럼 자고, 요즘이 좀 춥긴 했어도 카라마츠는 원래 감기 같은 건 걸리질 않는 튼튼한 체질이었다. 쥬시마츠는 카라마츠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카라마츠는 우물쭈물하며 명확한 대답을 하지 못했고, 가운을 벗어 옆에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일 또 오셔야지 안 그러면 다시 병이 도질 거에요! 내일 이 시간에 꼭 다시 오세요!!”

카라마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시간에 밥도 먹지 못하고 이렇게 외진 병원에 오는 게 달갑지는 않았지만 쥬시마츠가 놔준 약의 효과가 제법 괜찮았기에 일단 쥬시마츠가 시키는 대로 다시 오기로 마음먹었다.

, 진료비는 얼마나?”

카드 결제도 됩니다!”

쥬시마츠가 책상 밑에서 카드 결제기를 꺼내 내밀었다.

 

다음날도 카라마츠는 다시 병원을 찾았다. 분명히 어제 주사를 맞고 돌아갔을 때는 잠을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몸이 개운했는데 오후 근무를 마치고 돌아가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몸이 다시 으슬으슬 추워지면서 오한이 들었다. 슬픈 생각도 나고, 울적해지고, 차가운 물에 푹 젖어 그대로 흐물흐물 해지는 것 같았다. 이게 대체 며칠째인지. 쥬시마츠가 병의 원인을 다시 생각해보라고 했는데, 글쎄, 카라마츠는 계속 생각해봐도 짐작 가는 것이 없었다. 카라마츠는 어쩔수 없이 두꺼운 외투를 최대한 껴입고 오전 근무를 하고,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다시 쥬시마츠의 병원을 찾았다.

저 또 왔습니다.”

카라마츠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병원 안이 어제완 달리 말끔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책상 위에 가득 차있던 이런저런 물건들은 어디다 다 쑤셔넣은건지 갖다버린건지 책상이 반들반들 윤이나고, 쥬시마츠도 먼지 한톨 보이지 않는 새하얀 가운을 입고 싱글벙글 웃으면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오늘은 주사부터 맞을까요?”

쥬시마츠는 카라마츠의 손을 잡고 끌고 와 보조의자에 앉히곤 가운 주머니에서 예의 그 황금색 유리병을 꺼내 주사기로 빨아들였다. 주사를 맞자, 어제처럼 다시 맞은 자리에서부터 따뜻한 느낌이 흘러들어왔고, 기분이 가벼워졌다.

어제 주사를 맞고 가니까 괜찮았는데 밤에 자고 일어났더니 다시 안좋아지더라구요. 저건 대체 무슨 약인가요?”

이거요?”

쥬시마츠가 빈병을 눈앞에서 흔들어보였다.

햇살 농축액입니다!”

햇살이요?”

, 이런 겨울에는 구하기 힘든거에요! 지난 여름에 혹시나 싶어서 몇병 뽑아다 놨는데, 이제 여분이 얼마 없어서 큰일이네요.”

쥬시마츠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저었다. 햇살 농축액? 선샤인? 선샤인을 농축했다고? 아냐, 카라마츠는 머릿속으로 드는 의심을 애써 지웠다. 아마 햇살하고 비슷한 약재 이름을 잘못 알아들은거겠지. 뭐든간에 약은 효과가 있었고, 카라마츠는 쥬시마츠와 마주앉아 대체 몸이 아픈 이유에 대해 열심히 토론했지만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곤란하네요.”

쥬시마츠가 책상 위를 손가락 끝으로 톡톡 두드리면서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이랬다간 카라마츠 씨의 심장까지 얼어붙을거에요. 매일매일 햇살 농축액을 맞는 걸로는 한계가 있거든요.”

심장이 얼어붙어요? 저희 집에 심장병 내력은 없는데?”

말이 그렇다는 거죠, 얼어붙는 거랑 비슷한거에요.”

, 카라마츠도 이게 심상치 않은 증상이란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게 들으니 정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까 햇살 농축액을 맞아 조금 나아졌지만 가슴팍을 더듬어보니 좀 심장 부근이 차가운 것 같기도 해서 덜컥 겁이 났다.

일단 오늘은 돌아가시고, 제가 좀 더 생각해볼게요.”

쥬시마츠가 카라마츠의 어깨를 끌어안고 번쩍 일으켜 옷을 털어주었다.

 

 

내기에 져서 반코님 리퀘를 받아 쓴 조각글입니다 ㅇ0ㅇ

 

, 하는 소리가 났다. 수학시간이었다. 나는 하염없이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간밤에 비가 온지라 하늘이 새파랗게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었다. 나는 아침을 걸러 배가 고팠고 수학은 영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 멍하니 운동장을 뛰는 애들의 머릿수를 세고 있었다. 하나, , . 오늘 밤엔 네 손에 깍지를 한번 껴보겠다고, 지저분한 상상을 하고 있었다.

자동차 경보음이 요란하게 학교 주차장을 울렸다. 곧이어 하나 둘 나처럼 딴 짓을 하던 애들이 뛰쳐나가 창문을 부서지듯 열어젖혔고, 비명을 질렀다. 머리가 아팠다. 여자애들이 목청이 찢어져라 비명을 지르는데, 나는 그때까지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한때는 나와 하나였던 네가 그 동그란 뒤통수가, 한 번도 움츠러든 적이 없었던 그 어깨가, 단단한 나무처럼 곧았던 그 다리가 모두 산산조각이 나버렸는데, 나는 아무런 감각도, 예측도, 텔레파시도 하지 못했다. 끝까지 너는 네 작은 머리통 속에 든 걸 나에게 전해보겠다는 발버둥조차 치지 않았다. 나는 배신감에 치가 떨려 눈물이 나왔다.

누구야?”

마츠노다!”

몇 번째 마츠노?”

그 왜, 남자한테 몸 판다는 걔.”

계단이 너무 멀었다. 나는 걷다가 몇 번 주저앉고, 나를 붙잡겠다는 건지 이 건물 밖으로 떠밀어버리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는 팔들을 몇 개 뿌리쳤다. 계단이 너무 멀고, 내가 있는 이 4층은 1층 주차장까지 너무 멀어서, 나는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입안에서 중얼거린 말을 듣고 누군가 달려가 창문을 잠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계단을 한 칸 한 칸 내려갔다. 계단이 너무 높았다. 발을 딛을 때마다 발목이 꺾이고 뒤로 자빠질 것만 같아 손잡이에 온 몸을 지탱하고 걸었다. 어디선가 형제들이 달려가고 있을 터였다. 누가, 누가 나보다 먼저 가서, 내가 슬프지 않게 그 고운 얼굴에 피를 닦아줘. 나는 아랫입술을 으득 깨물었다.

 

네가 초대권을 내밀었다. 이번에도 주연을 맡지 못했다. 토도마츠가 라이벌의 대본에 장난질을 좀 쳐보라고 조언 같지 않은 조언을 해봤지만 너는 하지 못했고, 간신히 멋진 대사를 몇 마디하고는 죽어버리는 조연이 되고 말았다. 나는 초대권을 아무렇게나 가방에 쑤셔 넣고 도서관으로 가 대본의 원작을 빌렸다. 너무 작은 역할이었다. 아니, 너무 큰 역할이었다. 네가 그 넓은 무대를 독차지하고 이런 대사를 읊는다는 건 상상이 잘 가지 않아. 손톱을 잘근 잘근 씹었다. 피맛이 났다. 네 안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은밀한 곳곳을 흐르고 있을 피와 같은 피였다.

 

네가 죽었다. 나는 어쩌다 보니 형제들 틈새에 껴 맨 앞자리에 앉았다. 한참을 앉아있느라 지루하고 좀이 쑤셨다. 덜컹거리는 간이 의자에 앉아있으려니 허리가 뻐근해왔다. 네가 나왔다. 왕자가 공주를 괴물의 손에서 구해주고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려고 하니 나타나 자신이 그 공주의 약혼자라며 공주를 내놓으라 칼을 들이미는 패배자였다. 아니, 원작하고 조금 달랐다. 나는 넋 놓고 네 목소리와 네 눈빛과 네 손짓에 빠져들다 깨달았다. 네 손끝에서 패배자는, 겁쟁이는 사랑하는 사람을 눈앞에서 보낼 수가 없어 마지막 용기를 짜낸 남자가 되었다. 네가 죽고, 나온 지 얼마나 됐는지도 모르게 칼에 맞아 죽고, 이 연극을 완성시켰다. 나는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너를 사랑하게 되어 버린 사람이 있을까봐 두려웠다. 모두가 널 지켜보고 있었다. 저 사람들도 원작을 봤을까? 네가 원작의 그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조연을 이렇게 사랑하게 만들어버렸다는 걸 알아차렸을까? 연극은 끝났다. 네가 죽고 나서 몇 십 분을 연극이 계속 이어졌겠지만 나는 연극이 끝난 것을 알았다. 나는 딱딱한 의자들로 가득찬 강당을 빠져나와 하염없이 달렸다. 네 이름을 소리쳐 부르고 싶었다. 끔찍해라. 네 이름은 너무 끔찍했어. 정신을 차려보니 학교에서 가까운 시내였다. 거리엔 한숨처럼 어둠이 깔렸고, 내 손에는 바람에 엉망이 된 꽃다발이 들려있었다. 나는 멍하니 꽃을 한 송이씩 뽑아내다 곧 꽃다발을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역 근처 어두운 골목을 기웃거리는 남자들이 있었다. 나는 짓궂은 생각이 들었다.

 

널 흉내 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학교에 소문이 퍼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 사근사근하고 상냥하고 착하고 친절하고 다정하고 매너 좋은 카라마츠가 남창새끼가 되는 건 순간이었다. 학교에 몇 명 원조교제를 한다고 은근히 소문난 여자애들이 없지는 않았는데, 그걸 그 카라마츠가 해버리자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형제들의 귀에도 알음알음 소문이 퍼졌고, 오소마츠는 카라마츠가 없는 자리에서 대체 누가 이딴 소문을 만들어내는 거냐며 분통을 터트렸다. 모날 모시에 형제들이 역 근처에 숨어있다 카라마츠인척 하는 놈을 잡아내자며 계획을 짰다. 카라마츠는 나타나지 않았다. 오소마츠와 형제들의 눈을 피해 남창새끼는 계속 같은 학교 애들의 눈에 띄었다.

 

연극부를 그만두지는 않았다. 다만 대본을 받지 못할 뿐.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을 하고 있었다. 형제들도 먼저 묻지 않았다. 나는 어느 새벽 잠결에 네가 작게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곧 내가 네 얘기를 들을 때가 오리라고 생각했다. 늘 날 앞서 걸으며 모든 선망과 우러름과 사랑을 받았던 네가, 내 사랑을 받은 네가 나에게 무너지듯 매달려 괴롭다고 울음을 터트리면 나는 널 꼭 끌어안고 우리 둘이서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도망치자고 속삭일 계획이었다. 달콤한 계획이었다. 나는 네 눈물 맛을 상상하며 다시 잠을 청했다.

 

너는 가만히 누워있었다. 혹시나 하는 걱정과는 달리 잠자듯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주변으로 검붉은 피와 하얀 뇌수와 이것저것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 범벅이 돼서도 너는 꼭 거대한 푸딩위에 누워 그걸 한입 맛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지막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너는 내가 네 뼈를 한번 만져볼 틈도 주지 않고 내 후회처럼 뜨거운 불길에 뼈까지 타버려 한줌 재가 되어있었다.

 

내가 네게 집착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널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어버렸다면. 아니 널 만나지도 못하고 널 보지도 못하고 널 알지도 못하고 아예 나라는 존재 자체가 없었더라면. 그랬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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