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은 한참동안 멍하니 앉아있었다이치마츠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이불을 덮고 카라마츠 몰래 손바닥을 맵게 꼬집었다아팠다이치마츠는 손바닥이 얼얼해질 때까지 손톱 끝으로 살을 꼬집었다꿈이 아니란 게 실감나지 않았다카라마츠는 마른세수를 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이치마츠에게 손을 내밀었다.

밤새 지진 같은 게 일어나서 다들 대피한 걸 수도 있지 않을까일단 나가보자.”

그랬으면 우릴 남겨둘 리가 없지 않아그렇지만 이치마츠는 대답하지 않고 카라마츠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카라마츠의 손이 축축했다.

거리엔 아무도 없었다이치마츠는 카라마츠보다 한 발자국 앞서 걷다가 오싹한 기분이 들어 아무렇지 않은 척 카라마츠와 나란히 걸었다거리에선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인기척도 없었고이치마츠가 평소 먹이를 챙겨주던 고양이들도 보이지 않았다살아있는 것들은 다 없어져버린건가 싶다가도 거리에 나무들이 남아 있는걸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한참을 걸었다그들이 한 평생을 살아온 골목이었다이 집엔 누가 살고저 집엔 누가 살다가 이사를 갔고이 상가 건물에는 누가 살다가 이사를 갔고다른 사람에게 별 관심이 없는 이치마츠도 줄줄 읊을 수 있을 만큼 익숙한 골목이었다그러나 살아있는 것의 기척이 없는 거리는 너무도 낯설었다이치마츠는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무성영화를 보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말도 없이 걷다보니 저 앞에 상가 거리가 보였다저 골목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지면 편의점이니 슈퍼마켓이니 하는 것들이 모여 있었다이치마츠는 주머니에 뭘 사먹을 돈이 있는지 주머니를 만져보다 그들이 잠옷을 입고 나왔다는 걸 깨달았다카라마츠도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이치마츠처럼 주머니를 만져보고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이치마츠를 돌아보았다이치마츠는 괜히 오기를 부리고 싶었다.

아무도 없으면 그냥 가게를 털어버리지 뭐.”

가게를 털어? CCTV에 찍힐 텐데?”

그래도 보는 사람도 없는 걸게다가 그 정도 훔친다고 감옥 안가.”

카라마츠가 당황한 얼굴을 했다그걸 보니 이치마츠는 기분이 좀 좋아져서 빠르게 걸었다편의점에서 먹을 걸 좀 훔친다고 해도 고등학생이면 초범으로 끝날 거고나중에 부모님이 대신 계산을 해주러 오실 수도 있는 거니까편의점 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뭘 먹을까이치마츠는 달달한 군것질거리를 먹을지 아니면 식사대용으로 먹을 수 있는 걸 고를지 고민을 하며 문을 열었다.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뭔가 질척질척하게 미끄러지는 소리가 들렸고헉헉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사람이 있는 건가부상당해서이치마츠는 급히 편의점 안쪽으로 달려갔다.

두 사람이 있었다이치마츠는 그 중 하나와 눈을 마주치고 그 자리에 묶인 듯 굳어버렸다아니눈이 마주치긴 했나이치마츠는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여자의 엉덩이에 성기를 박고 있는 남자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이치마츠가 야한 책이나 야한 비디오 같은걸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건 아닌데지금 이치마츠의 눈앞에서 섹스를 하고 있는 남녀는 사람으로 보이질 않았다두 사람은 새된 비명소리를 지르기만 할 뿐 사람의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무엇보다 이치마츠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들을 보고 있어도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꼭 이치마츠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속이 메슥거렸다두 사람은 이치마츠가 동네에서 몇 번 마주쳤던 사람들이었고그 중에 하나는 이미 결혼을 한 사람이었다아이를 품에 안고 나와서 아이스크림을 사주는 걸 본거 같은데이치마츠는 뒷걸음질을 치다 실수로 매대에 전시되어 있는 통조림들을 떨어뜨렸다바닥에 통조림 대여섯 개가 떨어지며 우당탕하고 큰 소리가 났는데도 두 사람은 이치마츠를 돌아보지 않았다사람이 아니다이치마츠는 위액이 올라오려는 걸 꾹 참고 입을 막았다저들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안에 든 건 사람이 아니다만약 저 사람들이 이치마츠와 카라마츠를 제외하고 이 마을에 남아있는 유일한 인간이면 어떡하지이치마츠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치마츠다른 사람이 있어?”

카라마츠였다카라마츠가 어느새 이치마츠가 있는 편의점 안쪽까지 찾아와 이치마츠의 팔을 잡았다이치마츠는 꼭 마법이 풀린 것처럼 카라마츠의 팔을 잡고 자리에 주저앉았다카라마츠가 놀라 이치마츠를 붙잡고서 곁을 돌아보았다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손을 붙잡고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애썼다.

“...봤어?”

카라마츠가 그 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이치마츠는 고개를 끄덕였다카라마츠도 이치마츠와 똑같이 느낀 모양이었다카라마츠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그쪽에서 고개를 돌렸고이치마츠의 손을 단단히 잡고 편의점 밖으로 달려 나갔다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손에 잡혀 끌려 나가면서 편의점 바닥에 빵이나 케이크과일 같은 것들의 봉지가 마치 비닐 포장을 처음 본 사람이 마구잡이로 뜯어 간신히 안에 든 내용물을 먹은 것처럼 엉망이 되어 바닥에 널려있는 것을 보았다.

카라마츠는 편의점 문 밖으로 나와 이치마츠의 손을 놓고 숨을 골랐다카라마츠는 꼭 달리기를 한 사람처럼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상체를 수그리고 숨을 쉬다 카라마츠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사람들이 정신병자일지도 모르는데 그걸 멍하니 보고만 있어도망쳐야 될 거 아냐!”

카라마츠는 정말로 화가 나 있었다카라마츠가 진심으로 화내는 건 거의 이삼 년 만에 보는 것 같아 이치마츠는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카라마츠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 사람들이 공격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지금 부모님도 안계시고 근방 이웃들도 없는데!”

카라마츠의 눈에는 아직 그들이 사람으로 보였던 건가부모님은 가끔 집을 비우거나 하면 오소마츠와 카라마츠를 불러다 부모님이 없으면 형들이 동생들을 잘 챙겨야 한다고 당부하곤 했다장남과 차남을 따로 부르긴 했지만 동생들이 충분히 들을 수 있는 거리였다그러면 오소마츠와 카라마츠는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하지 마시라며 부모님을 배웅했고그런 날이면 이치마츠는 이상하게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동갑내기 쌍둥이들인데 몇 분 먼저 태어났다고 부모노릇을 대신 할 수 있어오소마츠는 부모님이 신신당부를 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 같았지만 카라마츠는 달랐다어설프게 저녁을 차려서 형제들과 나눠먹고아침엔 제일 먼저 일어나 다른 형제들을 깨웠지.

카라마츠는 지금도 자기가 엄마처럼 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이렇게 둘만 남았는데이치마츠는 놀란 것보다 카라마츠가 화난 표정으로 이치마츠가 잘못했다는 대답을 하길 기다리는 게 싫었다이치마츠는 카라마츠를 노려보다 앞서 걸었다골목의 가게들은 열려 있었다그러나 평소와는 다르게 누군가 엉망으로 어질러놓은 쓰레기가 가득했고군데군데 사람의 배설물로 보이는 것도 널려 있었다이치마츠는 과일가게 문 밖으로 사람의 발이 하나 튀어나와 있는 걸 보고 멈췄다카라마츠가 순식간에 따라와 이치마츠의 팔을 잡았다이치마츠는 카라마츠가 뭐라고 말을 하기 전에 그 발을 가리켰다손가락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카라마츠는 무의식적으로 이치마츠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발은 핏기가 하나도 없이 그냥 그 자리에 툭 튀어나와 있었다이치마츠는 작은 발톱동그란 발뒤꿈치복사뼈를 하나씩 훑어보다 너덜너덜하게 찢어진 발목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이치마츠의 팔을 잡은 카라마츠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누가 저 발의 주인을 해쳤을까이치마츠는 햇살이 눈부셔 눈을 찌푸리고 카라마츠를 돌아보았다카라마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이번엔 내 차례네이치마츠는 자신이 시체를 보는 것보다 짐승 같은 섹스를 보는 게 충격이 더 큰 건지아니면 처음 그런걸 보고 놀라 시체를 봐도 충격이 덜한 건지 고민하며 카라마츠의 손을 잡아끌었다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손에 끌려 나오면서도 안색이 돌아오질 않았다.

돌아갈까?”

이치마츠가 물었다하지만 카라마츠는 고개를 저었다.

멀쩡한 사람이 우릴 찾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집에서 멀리 떨어지지는 말고 돌아보자.”

아무도 없을 것 같은데그렇지만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손을 잡고 계속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시커먼 고등학생 둘이 손을 잡고 걷는다니 징그러워 보이겠지만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이 손을 놓아버리면 순식간에 혼자가 되어 버릴 것 같았다카라마츠도 이치마츠의 손을 아프도록 꼭 잡았다이치마츠는 손에 피가 통하질 않아 저릿하게 아파왔지만 손을 빼지 않았다.

한낮의 햇살이 푸석하게 메마른 거리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이치마츠는 자기 쪽의 상가들을 계속해서 훑어보았지만 산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간혹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면 텅 빈 눈을 한 사람이 반쯤 벗은 차림새로 아무렇게나 누워있었다그런 사람이 네다섯 명쯤이치마츠는 혹시 저렇게 되는 것이 정상이고자신과 카라마츠가 미쳐버린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봤지만 알 수가 없었다카라마츠도 계속해서 상가를 둘러보았지만 말을 걸만한 사람은 발견하지 못했다어느새 골목이 끝났다.이치마츠와 카라마츠는 자연스럽게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서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렸다그러나 차는 한 대도 오지 않았고신호등은 깜빡거리기만 할뿐 바뀔 생각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횡단보도를 건너 계속해서 걸었다.

몇 시간이나 걸었을까이치마츠는 발바닥이 아파 멈춰 섰다카라마츠는 이치마츠가 멈추자 이치마츠를 돌아보고 그 옆에 주저앉았다아버지의 회사가 있는 곳이었다아버지의 회사가 있고지하철역이 있고축제가 있는 밤이면 야시장이 열리는 넓은 마당그러나 아무도 보이질 않았다이치마츠는 배도 고팠고 발도 아파 짜증이 났다세상이 이상하게 변해버렸는데도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아서 그런가카라마츠가 옆자리를 툭툭 치더니 고갯짓을 했다이치마츠가 바닥에 주저앉자 카라마츠가 조금 움직여서 이치마츠의 발을 잡고 신발을 벗겼다이치마츠가 인상을 찌푸리며 발을 빼도 카라마츠는 발을 놓아주지 않았고이치마츠의 발바닥을 꾹꾹 눌렀다.

지금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지만 그래도 조금만 버텨보자.”

카라마츠가 이치마츠의 반대쪽 발을 잡아 신발을 벗겼다.

그 왜영화 같은 걸 봐도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는 사람이 살아남잖아?”

이치마츠는 대답하지 않았다현실도 그렇게 영화 같고 소설 같은 결말로 끝이 날까이치마츠는 문득 어젯밤 그가 잠들기 전에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만약 아무도 없다면 이치마츠는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할 일이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심장에 커다란 바위가 떨어진 것처럼 무겁게 아파왔다이치마츠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카라마츠를 바라보았다카라마츠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