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도마츠는 수도꼭지를 돌려 물을 한 컵 받아 마시다가 고개를 들었다. 복도에서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어제 식사 당번은 쵸로마츠였다. 그러니 오늘은 이치마츠의 차례였는데, 이치마츠가 잠시 자리를 비웠으니 쥬시마츠에게 순서가 넘어갔겠지. 과연 부엌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고, 품에 통조림을 가득 안은 쥬시마츠가 뛰어 들어왔다.

토도마츠! 좋은 아침!”

쥬시마츠 형, 바구니 들고 가라니까? 봐봐 후드 주머니 다 늘어지잖아?”

토도마츠는 피식 웃으면서 쥬시마츠의 후드를 가리켰다. 쥬시마츠는 매번 창고에 통조림을 가지러 갈 때마다 바구니를 가져가는 걸 잊곤 했다. 쥬시마츠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들어와 식탁에 품에 안고 있던 통조림을 쏟아내고 후드 주머니 안에 든 통조림도 꺼내 쌓았다.

오다가 흘리진 않았고?”

안 흘렸을걸? 한번 세볼까!”

쥬시마츠가 식탁 의자에 앉아 통조림을 색깔별로 분리했다. 하얀색과 빨간색과 녹색. 토도마츠도 쥬시마츠를 마주보는 자리에 앉아 통조림의 개수를 셌다. 하얀색이 여섯 개, 빨간색이 여섯 개, 녹색이 여섯 개.

, 지금 이치마츠 형은 자리에 없잖아? 다섯 개씩 가져와야지.”

토도마츠가 통조림을 한 개씩 빼 한쪽 구석으로 밀어두었다. 쥬시마츠는 아, 하고 그제야 깨달았다는 것처럼 고개를 들어 토도마츠와 눈이 마주쳤다가 도로 고개를 숙였다. 토도마츠도 더 이상 말하지 않고 통조림을 하나씩 끌어당겨 뚜껑을 따기 시작했다. 쥬시마츠가 이치마츠의 몫으로 가져온 통조림을 계속 돌아보았다.

하얀색 통조림은 ’, 빨간색은 고기’, 초록색은 야채였다. 형제들이 먹을 수 있는 식재료라곤 이 통조림들과 소금뿐이다. 여섯 명은 이십 년 동안 통조림을 조금이라도 맛있게 먹는 방법을 궁리해보았지만 제한된 환경에선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통조림을 색깔별로 나누어 푹 끓이거나, 아니면 굽거나. 그러나 맛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토도마츠는 밍밍하게 아무 맛이 나지 않는 하얀색 통조림을 전부 따서 식탁 한쪽으로 밀어두고, 빨간색 통조림을 땄다. 빨간색 통조림은 퍽퍽하고 질겼다. 언젠가 토도마츠는 아버지에게 이건 어떤 동물의 살이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무서운 얼굴로 빨간 통조림 뚜껑을 따 토도마츠의 얼굴에 들이밀고 대답했다.

이건 죄 없는 짐승이란다. 우린 지금 죄를 짓고 있는 거야.’

토도마츠는 빨간색 통조림을 먹으러 수저를 들 때마다 그 생각이 났다. 우리는 다른 짐승의 살점을 먹어야 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성장해 핵전쟁이 끝나고 완전히 깨끗한 세상이 도래했을 때 나갈 수 있다. 통조림 세 개를 한 번에 끓여 죽으로 먹을 때는 상관이 없었지만, 가끔 누군가 오기를 부려 통조림을 색깔별로 모아 불에 구워 올 때면 토도마츠는 죄책감이 들었다. 그 짐승이 어떻게 생겼을 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형제들에게 보여주는 책에는 그림이 하나도 없었고, 오직 글자만 빽빽하게 들어차있었다. 형제들이 책에 나오는 사자며 호랑이, 너구리, 돼지, 소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다고 아버지에게 물어본 적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나중에 그들이 이 방주를 떠나 정결해진 세상으로 돌아가면 그것들은 이미 다 죽고 없을 것이고, 새로운 생명체들이 그들을 기다릴 거라고, 사자고 호랑이고 전부 세상에 남아있지 않을 거라고. 혹시 핵전쟁이 일어날 동안 다른 동물들을 돌봐줄 사람들이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이 방주의 여섯 명은 지구에서 인간들과 함께 공존해온 생명체들의 마지막 흔적을 먹고 있는 게 아닐까? 토도마츠는 고개를 젓고 초록색 통조림의 뚜껑을 땄다.

쥬시마츠 형, 오늘은 어떻게 해먹을 거야?”

역시 끓이는 게 제일 나으려나! 아침을 빨리 먹어야 이치마츠 형을 빨리 데려올 수 있잖아?”

쥬시마츠가 잽싸게 마지막 통조림 뚜껑을 따 옆으로 밀어두면서 웃었다. 쥬시마츠는 형제들이 떨어지는 것을 제일 싫어했다. 좀 집착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지만, 글쎄, 토도마츠가 다른 형제들을 본 적이 없어 보통 형제들이 이렇게 다른 형제들을 아끼는 건지, 아니면 쥬시마츠가 여섯 명중에 유난히 유대감을 느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쥬시마츠가 찬장으로 달려가 커다란 냄비를 꺼내 물을 받았다. 조금 거들어줄까 아니면 형제들을 깨우러 갈까? 토도마츠는 잠깐 쥬시마츠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부엌을 나섰다.

방주는 뒤집어진 원뿔 모양으로, 그들 여섯 명이 차지하기엔 지나치게 넓은 감이 없잖아 있었다. 원뿔 한가운데는 뻥 뚫려 벽을 따라 계단이 둥글게 나있었고, 맨 꼭대기 층에서 고개를 쑥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보면 맨 아래층이 까마득하게 보였다. 토도마츠는 부엌에서 나와 2층으로 올라가면서 불이 들어오지 않는 전구들이 보이면 뽑아 후드 주머니에 넣었다. 그들이 어렸을 때는 계단 벽을 따라 둥근 전구들이 일렬로 박혀있어 훤히 밝았는데, 날이 가면 갈수록 전구의 개수가 줄어들었다. 토도마츠는 전구가 있었던 자리를 손끝으로 더듬어보며 꼭 젖니가 빠진 자리 같다고 생각했다. 전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창고 한 구석에는 전구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이 계단을 예전처럼 환하게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도 있었지만 형제들은 최소한의 전구만을 켜놓고 남은 전구들을 아껴두기로 약속했다. 토도마츠는 수면실 문 앞에서 잠깐 멈춰 서서 계단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천장을 올려다봤다.

천장에는 거대한, 그들이 살아오면서 본 그 어느 것보다도 거대한 바위가 방주의 입구를 막고 있었다. 바위는 꼭 잠자는 괴물처럼 그들의 머리 꼭대기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저 바위를 파수꾼이라고 불렀다. 그는 일주일에 한 번씩 저 바위 앞에 형제들을 앉혀놓고 바위를 그의 일곱 번째 아들처럼 사랑이 가득 담긴 눈으로 쓰다듬었다. 방사능도, 폭탄도, 심지어 사람들의 고통마저도 저 바위를 넘지 못한다고, 그리고 그들이 나갈 수 있을 때가 되면 바위가 저절로 열릴 것이라며 우리는 바위에게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토도마츠는 바위를 볼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혔다. 어느 방에 숨어있더라도 저 바위가 토도마츠를 노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는 자연히 바위 앞에서 모이는 일이 없어졌다. 가끔 이치마츠나 쥬시마츠가 바위 바로 밑에 앉아 멍하니 바위를 올려다보는 걸 보긴 했지만, 토도마츠는 바위 가까이엔 가지 않았다. 바위는 어떻게 열릴까. 토도마츠는 마른 침을 삼키고 침실 문을 열었다.

 

쥬시마츠는 순식간에 밥그릇을 비우고 형제들이 식사를 마치기만을 기다렸다. 카라마츠는 기계적으로 음식을 씹어 삼켰다. 쥬시마츠가 물을 많이 넣고 끓인 탓에 씹을 것도 없었지만 음식을 한참 씹다보니 잠이 좀 깨는 듯 했다. 다행히 오소마츠는 카라마츠의 외출을 눈치 채지 못한 듯 했다. 카라마츠는 자리에서 일어나 컵에 찬 물을 받아 한 번에 들이켰다.

카라마츠. 다 먹어.”

쵸로마츠가 카라마츠의 그릇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 잠깐 물만 마시려던 거였다.”

카라마츠는 컵을 내려놓고 자리로 돌아가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냥 후루룩 마셔버려도 될 정도로 음식이 묽었는데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쵸로마츠가 미간을 찌푸리고 카라마츠를 노려보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젓가락으로 음식을 휘휘 젓다가 그릇을 들어 꿀꺽꿀꺽 마셨다. 카라마츠가 괜한 고집을 부렸다간 쵸로마츠에게 한참동안 잔소리를 들을게 분명했다. 그러면 이치마츠를 데리러 가는 시간도 늦어질 거고, 어쩔 수 없지. 카라마츠는 구역질이 날 것 같은걸 참으며 그릇을 비웠다. 이치마츠가 걱정됐다. 어젯밤 카라마츠가 찾아갔을 때는 간신히 대답도 했지만 지금은 어떨지 몰랐다. 찬 바닥에서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불편한 자세로 있었으니 아플 게 분명한데. 카라마츠는 빈 그릇을 만지작거리며 오소마츠를 돌아보았다. 오소마츠는 아예 한쪽 턱을 괴고 졸고 있었다. 이치마츠가 걱정되지 않는 건가? 카라마츠는 마음이 급해 토도마츠에게 눈짓을 했다. 토도마츠가 한숨을 푹 쉬고 오소마츠를 흔들었다.

, 얼른 먹어. 다들 형 먹는 거 기다리고 있잖아?”

오소마츠가 멍한 눈빛으로 다른 사람들의 그릇을 돌아보고 자기 그릇을 들어 내용물을 마셨다. 쥬시마츠가 더 이상 버티질 못하고 다른 형제들의 그릇을 싹 걷어가 설거지를 시작했다. 오소마츠는 한참동안 그릇을 입에 대고 있다가 그릇이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자기 그릇을 내려놓았다. 조금 잠이 깬 눈빛이었다. 카라마츠는 고개를 살짝 돌려 오소마츠의 눈빛을 피했다.

오늘 조회는 누구지?”

!”

쥬시마츠가 손을 번쩍 들었다. 오소마츠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릇을 쥬시마츠에게 건네주고 벽에 기대 늘어져라 기지개를 폈다.

얼른 조회하고 넷째 데리러 가자. 더 늦어졌다간 카라마츠가 한 대 때릴 것 같아.”

쥬시마츠가 신나게 그릇을 헹궈 건조대에 올려놓았다. 쵸로마츠가 뭐라고 투덜거렸지만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방주의 맨 꼭대기 층에는 강당이 있었다. 형제들은 강당으로 올라가는 길에 침실에 들러 잠옷을 생활복으로 갈아입었다. 강당 문으로 들어서면 보이는 벽엔 한가득 빗금이 쳐있었다. 쥬시마츠가 손에 끌과 망치를 들고 달려와 벽 앞에 섰다. 그리곤 형제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오늘 하루도!”

오늘 하루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텅 빈 강당 안에 다섯 명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쥬시마츠는 어제 쵸로마츠가 친 빗금의 옆에 끌을 대고 망치로 끌 위를 툭 쳤다. 빗금이 깊었다. 형제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강당 문을 나섰다. 카라마츠는 쥬시마츠가 남긴 빗금 위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그들은 이제 스무 살이었다. 쥬시마츠의 빗금 옆으로는 벽이 반이나 텅 비어있었다. 저 벽을 가득 채워야 그들은 나갈 수 있었다. 카라마츠는 저 싸늘하니 새하얀 벽을 잠깐 응시하다가 형제들의 뒤를 따라 나섰다.

 

밑으로, 밑으로, 밑으로. 이치마츠의 기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카라마츠는 초조해 쥬시마츠의 팔을 붙잡고 오소마츠가 문을 여는 걸 지켜보았다.

카라마츠.”

오소마츠가 카라마츠를 돌아보고 말했다.

와서 네 동생 업어.”

. 카라마츠는 쥬시마츠의 손을 놓고 달려가 독방 문을 열어젖혔다. 그들이 문 여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을 텐데 이치마츠는 바닥에 모로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가쁜 숨소리가 들렸다. 쥬시마츠가 따라와 이치마츠의 손목을 묶은 끈을 풀겠다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쥬시마츠의 손이 덜덜 떨려 매듭이 풀리지 않았고, 지켜보던 쵸로마츠가 한숨을 푹 내쉬면서 다가와 밧줄을 풀었다. 카라마츠는 시퍼렇게 멍이 든 손목을 한참 주물렀다. 토도마츠가 오소마츠의 눈치를 보다가 다가와 이치마츠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펄펄 끓네.”

적당히 데려다 줘.”

토도마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소마츠가 말을 툭 내뱉고는 몸을 돌려 사라졌다. 카라마츠는 시퍼렇게 멍이 든 이치마츠의 손목을 한참 문지르다 손에 핏기가 돌자 이치마츠를 업고 독방을 뛰쳐나갔다. 이치마츠의 마른 몸이 힘없이 흔들렸다. 약을, 어떤 약을 써야 하지? 카라마츠는 이치마츠를 단단히 붙잡고 계단을 한 번에 두세 개씩 뛰어넘으며 달렸다. 귓가에 이치마츠의 뜨거운 숨이 스쳤다. 뒤에서 형제들이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치마츠, 이치마츠.”

카라마츠가 헉헉거리며 이치마츠의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이대로 이불을 덮어주고 자게 해도 되나? 아니면 뺨을 때려서라도 깨워야 돼?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버지처럼 이치마츠가 죽어버리면 어떡하지. 카라마츠는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버지가 죽자 오소마츠는 아버지보다 엄하게 형제들을 몰아세웠다.

우리는 쌍둥이고, 너희가 나를 아버지처럼 생각하진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어.”

오소마츠가 바위 밑에 형제들을 앉혀놓고 말했다. 이치마츠는 오소마츠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무릎을 세우고 앉아 오소마츠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우린 여기서 이십년을 더 살아야 되고, 모두 무사히 방주를 나가려면 규칙이 있어야 해.”

오소마츠의 허리춤에 매달린 열쇠뭉치가 쩔그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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