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당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이치마츠가 멀쩡한지 보러간 거겠지. 오소마츠는 강당 문을 닫았다. 강당 안에 쥐죽은 듯한 적막이 흘렀다. 오소마츠는 강당 무대 앞으로 걸어가 딱 하나 세워져 있는 간이 의자에 앉았다. 의자는 정면, 무대를 향해 세워져있었다. 카라마츠가 앉기 위해 세워둔 의자가 아니다. 오소마츠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고 텅 빈 무대를 노려보았다. 새빨간 벨벳 커튼으로 가려진 저 구석에서 카라마츠가 과장된 몸짓으로 걸어 나오길 바랐다. 오랜만에 그의 무대에 관객이 온 걸 보고 카라마츠가 뛸 듯이 기뻐하며 그가 좋아하는 대사 몇 마디를 읊조리길 바랐는데. 배우는 무대를 비웠고, 관객은 하염없이 연극이 시작하길 기다렸다. 강당은 카라마츠의 구역이었다.

수면실과 도서관은 같은 층이었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를 지나쳐 걸어가더니 도서실 문을 잡고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카라마츠를 돌아보았다. 이치마츠의 도서관에 들어가는 것도 오랜만이다. 이치마츠가 두꺼운 문을 잡아 열었고, 카라마츠에게 얼른 들어가라며 눈짓을 하곤 뒤를 돌아보았다. 아마도 오소마츠가 신경 쓰이는 거겠지.

거대한 도서관이었다. 예전엔 카라마츠도 연극대본을 찾겠다고 들락날락했었는데, 형제들의 구역이 하나 둘 정해지기 시작하면서 이 도서관이 잠정적으로 이치마츠의 구역이 되자 카라마츠는 자연히 발길을 끊었다. 이치마츠가 먼저 도서관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던 건 아니지만, 뭐랄까, 도서관은 이치마츠의 사적인 공간처럼 느껴졌다. 책들이 카라마츠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는 다르게 정리되어 있는 것 같았다. 카라마츠는 눈앞에 있는 책장으로 다가가 책등에 적힌 제목을 훑어보았다.

도서관에는 카라마츠의 키보다 한참 높은 책장들이 못해도 이삼백 개는 들어차있었다. 예전에 이치마츠와 카라마츠가 수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책장 개수를 세었던 것 같은데 하도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나질 않았다. 바닥에는 때가 탄 건지 아님 원래 그 색이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회갈색의 카펫이 깔려있었고, 벽은 짙은 보라색이었다. 카라마츠는 책을 한 권 꺼내 위에 쌓인 먼지를 후, 하고 불었다.

책 읽을 시간 없어.”

이치마츠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카라마츠는 깜짝 놀라 책을 책장에 내려놓았다. 바닥에 깔린 카펫 때문에 이치마츠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치마츠는 책장 그림자 안에 서서 카라마츠의 손목을 잡아 이끌었다. 이치마츠의 손이 차가웠다.

여기서 여태까지 읽었던 책들 기억나?”

이치마츠가 카라마츠의 손목을 잡고 책장 사이사이를 빠르게 걸었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가 걷는 속도에 맞춰 따라가느라 발이 꼬였고, 헛디뎌 책장에 어깨를 부딪쳤다. 그러면 이치마츠는 멈춰 카라마츠가 아픈 어깨를 매만지는 걸 잠깐 기다려주다가, 다시 카라마츠의 손목을, 아니 이젠 손을 꼭 잡고 책장 사이사이를 걸었다. 어느새 책이 차있는 책장의 숲은 끝났고 하얗게 먼지가 쌓여가는 빈 책장의 구역이 시작됐다. 종이가 누렇게 삭는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 많이 읽었었지.”

이치마츠는 점점 더 빠르게 걷기 시작해 거의 달리는 것에 가까웠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손을 잡고 따라 달리면서 간신히 대답했다. 카라마츠의 취미는 거의 이치마츠와 함께 시작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전등 하나를 켜 놓고 나란히 앉아 책 한권을 나누어 읽었다. 카라마츠가 빨간 모자가 되면 이치마츠는 늑대가 되었고, 카라마츠가 앨리스가 되면 이치마츠는 정신없이 시계를 보는 토끼가 되었다. 이치마츠는 늘 주인공 역할을 양보해주는 착한 동생이었다. 두 사람은 도서관 구석에 모여앉아 소곤소곤 그들이 알지 못하는 단어를 읽어 내려가곤 했다. 이치마츠도 그때 생각을 하고 있을까. 카라마츠는 이치마츠가 이어서 뭐라고 얘기를 해주길 바랐지만 이치마츠는 말없이 달리기만 했다. 어느새 도서관의 끝이 보였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를 한번 돌아보고 카라마츠의 손을 놓고 달려가 벽의 스위치를 눌렀다.

천장에 매달린 전등들이 동시에 켜졌다. 그들이 책을 읽을 때는 입구에서 가까운 책상위에 놓인 스탠드를 켰고, 책이 있는 서가가 얼마 되지 않아 이렇게 도서관 전체를 밝힐 일이 거의 없었다. 카라마츠는 눈이 부셔 눈을 반쯤 감고 이치마츠를 돌아보았다. 이치마츠가 상기된 얼굴을 하고 카라마츠를 돌아보곤 책장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잘 봐, 카라마츠.”

카라마츠가 손바닥으로 전등 불빛을 가리고 책장을 돌아보았다. 텅 빈 책장들이 빽빽하게 들어차있었다.

너무 많은 책장들이 비어있다고 생각해본 적 없어?”

이치마츠가 카라마츠에게 다가와 카라마츠가 전등 불빛을 가린 손을 억지로 잡아 내렸다. 밝은 불빛에 카라마츠는 눈을 제대로 뜰 수조차 없었다. 이치마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누군가 책을 다 빼버린 거야.”

누가? ?”

아마도 아버지겠지. 책을 왜 빼버렸는지는 알 수가 없어. 그렇지만 어떤 책들이 있었는지는 대충 짐작이 돼.”

우리가 읽은 책들 말고? 그리고 불 좀 끄면 안 될까?”

이치마츠가 벽으로 돌아가 스위치를 눌러 껐다. 다시 도서관 안이 어두워졌다. 카라마츠는 눈물이 맺힌 눈을 깜빡이며 초점을 맞추려고 이리저리 눈을 돌렸다. 이치마츠가 다가와 카라마츠의 손목을 잡았다.

우리가 본 책들은 아주, 아주 한정된 것들이었어. 어릴 때 읽던 이야기책이나 소설, , 희곡. 그러니까 오로지 시간 때우기로 읽기 위해서 존재하는 책들이었다고.”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게 아닌 책들이 있어?”

이치마츠가 고개를 끄덕이고 이번엔 천천히 책장 사이를 걸어갔다.

읽었던 책을 다시 읽고, 또 읽고 하는 걸 반복하다 보니까 이상한 게 눈에 보이기 시작했어.”

이상한 거?”

책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필요에 따라 책을 읽는다는 묘사가 나오는 거야. 의사는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서 치료법이 쓰여 있는 책을 읽고, 변호사는 피고를 변호하기 위해 법이 쓰여 있는 책을 읽어. 그리고 과학자는 발명을 하기 위해 과학에 관한 내용이 쓰인 책을 찾아 읽고. 그런데 이 도서관에는 그런 책이 단 한권도 없었어.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이치마츠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그저 아버지가 문학 서적만을 위해 도서관을 짓고 책장을 가져다 두었다고 하기엔 빈 책장들이 너무도 많았고, 이치마츠의 말대로 그런 내용의 책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럼 그 책들은 다 어디에 있을까. . 카라마츠가 이치마츠를 돌아보았다. 이치마츠의 눈에 희미한 열기가 비쳤다.

그게 아버지 서재에 있다는 건가?”

아마도.”

아버지는 그걸 왜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으려고 하셨던 거지?”

내 생각엔,”

이치마츠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 책들을 읽게 되면 아버지의 말을 의심하게 되고, 아버지가 우리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것들을 깨닫게 될까봐 두려웠던 게 아닐까.”

카라마츠는 묘한 죄책감을 느꼈다. 아버지를 의심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카라마츠가 살아온 삶의 기반을 뒤흔드는 것과 같았다. 카라마츠와 형제들은 아버지의 밑에서 아버지의 말에 따라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이십년을 살았고, 지금도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와 별반 다를 바 없이 생활을 유지해오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머리에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에 뭔가가 스며들어오고 있었다.

아버지 서재에 들어가 보자.”

안 돼.”

카라마츠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대답이 먼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버지의 서재에 들어가지 말라는 건 규칙이었다. 그리고 오소마츠는 거기에 그가 생각하는 벌 중에서 가장 엄한 벌인 독방행을 내걸고 있었다. 그러니 이건 매우 중요한 규칙이었고, 카라마츠는 이를 어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치마츠가 아랫입술을 깨물고 카라마츠를 노려보았다. 카라마츠는 순간 당황해 변명을 해야 되나 하고 생각했지만 카라마츠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일상에 작은 즐거움은 나쁘지 않다. 카라마츠가 오소마츠와 입을 맞추거나 가끔 그 이상을 하는 건 다른 형제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아니었고, 규칙을 어기는 것도 아니었으며 재밌는 일이었다. 그렇게 단 둘이서 시간을 보내고 나면 오소마츠는 카라마츠에게 더 다정하게 대했으며 카라마츠는 그런 오소마츠가 좋았다. 그러나 이치마츠가 지금 카라마츠에게 제안하는 것은 모두의 생활을 의심하고 규칙을 어기며 오소마츠의 신뢰를 저버리는 일이었다. 이야기책이 아닌 다른 책들의 존재라는 건 확실히 카라마츠의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카라마츠는 이 방주의 구성원으로서, 그리고 네 동생의 형으로서, 오소마츠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동생으로서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각자의 자리를 잘 지켜야 그들은 싸우지 않고 이십 년을 더 살아갈 수 있었다.

오소마츠 때문에 그래?”

이치마츠의 목소리에 날이 서있었다. 카라마츠는 지금 여기서 오소마츠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고 대답을 하면 안 그래도 나쁜 두 사람사이의 관계가 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갈라지지 않을까 싶어 망설였다. 그러나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침묵을 읽어낸 모양이었다.

왜 오소마츠한테만 그러는 거야?”

오소마츠한테만 뭘? 이치마츠가 책장에 기대 고개를 숙였다. 어깨가 힘없이 늘어져있었다.

너랑 가장 시간을 많이 보낸 건 나잖아.”

이치마츠의 어리광인가. 카라마츠는 다가가 이치마츠의 어깨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손을 잡아당기면서 카라마츠를 책장으로 밀쳤다. , 하는 소리가 도서관 안을 울렸다가 사라졌다.

다른 애들이 그림이니 음악이니 하는 거나 들여다보고 있을 때 우린 여기에 있었는데.”

이치마츠는 억울해하는 것 같았다. 카라마츠는 어린 이치마츠가 울먹이며 안아달라고 하던 것이 다시 떠올랐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가 잡지 않은 손을 들어 이치마츠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얹었다. 이치마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카라마츠가 연극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무대가 있는 강당에 자리를 잡자 이치마츠는 카라마츠가 멀어진 것처럼 느껴졌을 거고, 그게 좀 서운했던 모양이었다. 마주치는 시간이 줄어들고 또 함께 있는 시간엔 다른 형제들도 있었으니 솔직하게 얘기하기도 어려웠을 거고, 그러다보니 점점 얘기하기가 어려워지고. 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오소마츠가 책임을 맡게 되면서 카라마츠는 오소마츠를 도와 동생들을 돌보고 생활을 꾸려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오소마츠와 많은 시간을 보내곤했다. 그 이전엔 이치마츠의 말대로 카라마츠와 이치마츠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으니 그만큼 카라마츠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겠지.

이치마츠는 카라마츠가 어깨에 손을 얹자 뭔가 더 말할 것처럼 숨을 들이 쉬었다가 카라마츠의 손목을 놓고 그를 끌어안았다. 이치마츠의 손이 카라마츠의 등을 긁듯 더듬어 꽉 붙잡았다. 카라마츠는 숨이 막힐 것 같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이치마츠의 등을 토닥였다.

나랑 여기서 나가자.”

이치마츠가 속삭였다. 카라마츠는 단번에 이치마츠가 말하는 곳이 도서관이 아님을 알았다. 그리고 그가 이치마츠를 멈춰야 한다는 것도. 카라마츠는 아무 대답없이 이치마츠의 뒷머리를 쓰다듬다 이치마츠의 뺨에 짧게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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