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마츠는 자신이 단 한자도 쓰지 못할 것이란 걸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이치마츠는 손이 하얗게 질리도록 꽉 붙잡고 있던 샤프를 내려놓고 낡은 스탠드 전원을 껐다.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치마츠는 그 어둠이 눈에 익을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스탠드 전원을 켰다. 누런 불빛이 텅 빈 원고지 위로 쏟아졌다. 빛이 바랜 원고지 첫 칸엔 샤프심 자국이 가득했다.
초등학생 때까지는 분명히 여섯이 다 똑같았는데, 언제 이렇게 달라져버린 걸까. 이치마츠는 쌍둥이들의 방에서 한참 달게 잠을 자고 있을 형제들을 떠올려보았다. 오소마츠는 지나치리만큼 뻔뻔하고, 카라마츠는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어도 전혀 상처받지 않고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한다. 그나마 쵸로마츠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고 또 남들이 하는 건 그대로 따라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갖고 있지만, 그 또한 하나의 ‘마츠노’이기에 한번 핀트가 나갔다 하면 오소마츠 못지않게 날뛰는 짐승이 된다. 쥬시마츠는 논외로 치고, 토도마츠는 자존심이 세고 또 자기가 형제들 중에선 제일 낫다는 자부심이 있다. 하지만 이 어두운 골방에서 혼자 원고지를 펼쳐놓고 있는 이 마츠노 이치마츠는, 세상에 자신이라는 존재를 붙들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글을 선택해놓고도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 수단이 아니다. 이치마츠는 두꺼운 원고지 뭉치를 한 장씩 떼어내 구겨 방구석으로 집어던졌다. 이치마츠는 글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형제들은 자기 자신을 의지해 삶을 살아가지만 이치마츠는 보잘것없는 글재주를 내세워 이것이 그의 정체성이고 자존심이고 자부심이라고 여태껏 소리쳐왔다. 그러나 기생하는 것은 숙주가 죽어버리면 살수가 없다. 기생하고 있던 것이다. 이치마츠는 조그맣게 소리를 내어 기생하는 삶을, 하고 중얼거렸다. 만약에, 이치마츠가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모르고 홀로 살아왔더라면 이렇게 다른 사람이 흔드는 데로 흔들리지 않고 세상 어딘가를 단단히 붙잡아 인간 이치마츠로 자립할 수 있었을까?
이치마츠는 간만에 깊은 잠을 잤다. 정신은 점점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지만 이치마츠는 눈을 뜨지 않고 이불의 온기를 즐겼다. 이치마츠는 문예부에 새로 들어온 신입생이 진짜 천재라는 걸 인정하고 일주일도 넘게 밤잠을 설쳤다. 이치마츠를 정말로 괴롭게 한 것은 신입생이 뽑아내는 소설과 시, 극본, 에세이 같은 것들이 아니었다. 이치마츠의 밤을 하얗게 지새운 것은 신입생의 칭찬이었다. ‘과연, 선배님은 선배님이시네요.’ 하는 칭찬. 이치마츠는 그 짧은 말 한마디에서 그가 생각하기에도 지나칠 정도로 많은 의미들을 만들어냈다. 신입생보다 오래 글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고등학생의 수준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한 실력을 비웃는다던가, 자신의 글이 훨씬 낫다는 걸 확인하고 가련한 이치마츠를 위로하려한다던가 하는, 이치마츠의 삶을 방해해온 피해의식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치마츠는 여섯 명이 맞춰놓은 여섯 개의 알람시계도, 당장 일어나지 않으면 지각을 할 거라는,
“지각이다!”
이치마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오전 열시로, 이미 한참 늦은 시간이었다. 다 같은 학교를 다니면서 형제들은 왜 그를 깨우지 않은 거지? 이치마츠는 뒷골이 확 당겨오면서 인상을 쓰고 옆을 돌아보았다. 잠자리가 텅 비어있었다. 딱 하나, 그의 옆에 달라붙어 느긋하게 잠을 자고 있는 카라마츠를 빼고.형제들이 그를 놀리려고 한 건가? 이치마츠는 짜증을 내며 카라마츠의 어깨를 밀치려고 하다가 뭔가 위화감을 느끼고 형제들의 자리를 돌아보았다.
베개 네 개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꼭 아무도 잠들지 않았던 것처럼. 이불은 밤새 이치마츠와 카라마츠가 당겨 덮은 탓인지 흐트러져 있었지만 베개는 처음 잠자리를 정리하면서 곱게 내려놓은 모양 그대로 텅 빈 자리에 놓여있었다. 그의 형제들은 하나같이 이상한 잠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베개도, 이불도, 심지어 형제들까지 제자리에 있는 게 하나도 없었는데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이치마츠는 멍하니 옆을 돌아보다 고개를 돌렸다. 머리맡에 있는 행거에 교복 여섯 벌이 나란히 걸려있었다. 오늘 학교를 가지 않는 날인건가? 아니다. 오늘은 문예부의 모임이 있는 날로, 이치마츠는 어젯밤 오늘 내놓을 글을 쓰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단 한 자도 쓰지 못하고 잠자리에 누우면서 모임에 빠져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학교를 가는 목요일이었다. 어딘가 이상했다. 이치마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빠져나왔다.
집 안이 고요했다. 이 시간대가 되면 어머니는 거실에서 아침드라마를 보느라 정신이 없다. 그러나 이치마츠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거실은 텅 비어있었다.티비도 전원이 꺼져있었고, 소파에는 어머니가 앉았던 흔적도 없다. 이치마츠는 리모컨을 들어 티비를 켰다. 그러나 티비에서는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하얗고 까만 선들이 어지럽게 흔들리기만 할뿐 방송을 하고 있는 채널을 하나도 없었다. 이상했다. 어머니가 티비 수신을 끊어버릴 리도 없고, 티비 수신료를 내지 않았을 리도 없는데.이치마츠는 다시 티비를 끄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늘 밥솥에 밥을 가득 채워놓곤 했다. 사춘기의 아들 여섯은 밥을 먹고 돌아서면 배가 고팠고, 어머니는 밖에서 일일이 사먹느니 차라리 집에서 밥을 챙겨먹으라며 식사를 마치면 곧바로 새로 밥을 지었다. 그런데 밥솥은 밥을 해 먹었다는 흔적도 없이 차가웠고, 식기건조대에 가지런히 정리되어있는 그릇엔 물기가 하나도 없이 바짝 말라 있었다. 오늘 아침 이 집에서 식사를 한 사람이 없다는 건가? 이치마츠는 부엌문을 열고 나와 안방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걸었지만, 곧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치마츠는 안방 문을 부서져라 열었다. 그러나 안방 또한 사람의 기척도 온기도 하나도 없이 차갑게 식어있었다. 이치마츠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벽장문을 열고 부모님의 서랍을 뒤졌다. 집문서도, 어머니의 결혼반지도 모두 제자리에 있었다. 부모님이 형제들을 버리고 도망친 것도 아니다. 이치마츠는 안심하고 벽장문을 닫았다. 바보 같은 생각이었지. 딱 고등학생 수준의 유치한 생각. 그러나 곧이어 이치마츠는 다시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면 부모님과 형제들은 다 어디로 사라져버린 거지? 이치마츠는 안방을 나와 아직도 잠을 자고 있을 카라마츠를 깨울까 하다 포기하고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카라마츠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대체 가족들이 무슨 장난을 치는지는 모르겠지만, 카라마츠와 같이 세트로 남겨졌다는 것도 불쾌했고, 또 카라마츠가 멍청하게 구는 데에 같이 엮이기 싫었다. 이치마츠는 잠옷 바람인 게 좀 신경 쓰였지만 대충 신발을 구겨 신고 현관문을 나섰다.
골목이 고요했다. 옆 건물 카페에서 늘 흘러나오던 유행가도, 요란하게 벨을 울리는 자전거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치마츠는 현관문을 붙잡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그러나 도시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차 엔진소리라던가, 사람들의 말소리 같은 게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이치마츠의 청력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닐 텐데. 이치마츠는 한참동안 귀를 기울이다 현관문을 닫고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이치마츠는 현관문을 잠그고 신발을 벗어 카라마츠가 잠들어 있는 방으로 달려갔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카라마츠는 팔다리를 대자로 뻗고 잠을 자고 있었다. 왜 나랑 카라마츠만 남은거지? 카라마츠가 내가 아는 그 카라마츠가 아닌 건가?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코 밑에 손가락을 대보고 카라마츠가 숨을 쉬는 걸 확인했다. 뭐라고 얘기를 해야 하지? 세상 사람들이 우리만 남고 모두 사라진 것 같다고?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손목을 붙들고 어떻게 하면 덜 멍청하고 덜 겁쟁이처럼 보일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와 동시에 고민을 하다가 카라마츠가 투명해지면서 사라질까봐 겁이 났다. 혼자만 남는 건 죽기보다 싫었으니까.
이치마츠가 자기도 모르게 카라마츠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줬는지 카라마츠가 인상을 쓰다가 눈을 반쯤 뜨고 이치마츠를 돌아보았다.
“이치마츠? 손목이 아픈 것 같다만....”
잠긴 목소리가 이치마츠의 이름을 불렀다. 지난 십여 년간 들어온 그 목소리가 맞았다. 안도감이 들었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손목을 잡은 손을 놓고 카라마츠의 멱살을 잡아 한 번에 일으켰다. 카라마츠는 눈이 부어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버둥거리다 이치마츠의 손에 이끌려 일어나 앉았다.
“야. 지금 내가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는데”
카라마츠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비볐다. 이치마츠는 마른침을 삼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가서 안방이랑 부엌이랑 둘러보고 집 밖으로 나가서 한번 둘러봐.”
“왜? 그보다 우리 학교 가야되지 않아?”
카라마츠가 눈을 간신히 떠 시계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금 학교가 중요한 게 아니야, 멍청아. 이치마츠는 거칠게 고개를 저으며 이불을 잡아당겼다. 이불을 빼앗기자 카라마츠는 잔뜩 움츠러들어서 이불안에 발을 집어넣으려고 달라붙었다. 그러나 이치마츠는 카라마츠를 발로 밀어내고 방문을 가리켰다.
“지금 진짜 심각하니까 한번 돌아봐.”
카라마츠는 한숨을 푹 쉬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나섰다. 방문 너머로 카라마츠가 느리게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발소리는 조금씩 빨라지다가, 한참 멈춰 있다가, 현관문 쪽으로 달려 나갔다. 현관문이 쾅, 소리가 나게 열렸다가 닫혔고, 다시 열렸다.
“이치마츠! 다들 어디로 간 거야?”
이치마츠가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다행이네. 순식간에 미쳐버린 줄 알았는데. 카라마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들어와 방의 창문을 열었다. 그리곤 창밖으로 상체를 내밀어 한참을 보다가 다시 이치마츠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어.”
“아무도.”
이치마츠가 대답했다. 하룻밤사이에 세상은, 아니 최소 마츠노 가가 있는 거리는 카라마츠와 이치마츠만을 남겨놓고 텅 비어버렸다. 사람들의 흔적이 남은 물건들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주인들은 없었다. 이치마츠와 카라마츠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떨리는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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