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재의 젊은 느티나무를 모티브로 작성한 글입니다.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멋 부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인만큼 향수도 여러 개를 사다가 기분 내키는 대로 뿌리는 것 같지만 그의 곁에서 가만히 숨을 쉬다 보면 그 노랗고 파란 향수 냄새는 어딘가로 사라져버리고 은은한 비누 냄새만 남아 코끝을 간질인다그와 나는 같은 비누를 쓰는 게 분명한데어째서인지 그에게서 나는 비누 냄새는 더 청량하고 상큼하게 느껴진다아마도 그의 체향일지도 모른다고나는 멋대로 추측하고 있었다.

쥬시마츠시작한지 얼마나 됐다고 딴생각이야?”

바로 곁에 그의 동맥이 뛰고 있는 하얗고 긴 목이 있다그 말랑해 보이는 목에 코를 박고 한참 비누냄새를 맡는 상상을 하다 고개를 들었다그가 웃으면서 내 이마를 샤프로 쿡 찍고 옆에 있던 컵을 들어 물을 마셨다나는 이마가 아픈 척 웃으며 이마를 문지르면서도 그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데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내가 당신의 친동생이었다면나도 여섯 살을 더 먹으면 당신처럼 섹시해질 수 있을까요나는 입술만 뻐끔거리며 뾰족뾰족하고 자극적인 말을 입안에서 굴렸다달고시고씁쓰름한 불량식품 맛이 났다.

 

그를 처음 만난 곳은 어머니의 결혼식장이었다아저씨는 나와 처음 만난 날부터 그를 소개하지 못해 미안해했다.

미리 만나서 인사도 하고 친해지는 게 좋을 텐데 카라마츠가 아직 학기가 다 안 끝났다고 못 온다고 하네미안하다.”

나는 착한 아들의 표정을 짓고 고개를 저었다카라마츠가 오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어머니의 얼굴에 어둠이 옅게 깔렸다어머니는 카라마츠가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애써 칭찬을 하려고 했지만 카라마츠가 어머니를 만나는 걸 거부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가엾은 어머니나는 한번 만나보지도 않은 형이 미워졌다아무리 공부를 하고 있어도 어머니에게 전화라도 하는 게 예의 아닌가요즘 세상에 외국이라고 연락이 안 되는 것도 아니고그런 아들을 둔 아저씨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버지가 죽고 난 이후로 나는 지나치게 어머니를 보호하려고 하고 있었다그건 머리로는 이해를 하고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만 하려고 한다 해도 그만둘 수 있는 게 아니었다나는 난생처음 와인을 맛보고 인상을 찌푸렸다포도 쥬스 같은 색깔을 해놓고 떫은맛이 났다아저씨는 어머니에게 먹을 걸 이것저것 권해가며 나에게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얼마든지 더 시켜도 좋다고 어색하게 웃었다아저씨는 좋은 남편이 될 수 있을까나는 다시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떫은맛은 가시질 않았다.그렇지만 아저씨에게 와인도 마시지 못하는 어린애처럼 보이고 싶진 않았다.

어머니는 나에게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워주고 싶다고 했지만 나에겐 아버지는 공석도 남기지 못하고 그 자리를 완전히 잃어버렸다나에게 아버지란툭하면 집을 나가 며칠이고 떠돌다 거지꼴이 되어 돌아오는 남자였고술을 마시면 집안을 엉망으로 뒤집어놓는 남자였다없는 게 좋았고없는 게 익숙한 아버지의 자리그리고 초등학생이면 모를까고등학교 신입생으로 들어가는 소년에게 진짜 남자로서의 롤모델은 꼭 집안에서 찾아야 하는 게 아니니까나는 간신히 와인 한 잔을 다 비웠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이었다나는 몸에 딱 맞는 정장이 어색해 넥타이를 조금 풀었다어머니는 둘 다 재혼인 만큼 결혼식은 하지 않고 그저 혼인신고만 하겠다고 했지만 아저씨가 고집을 부려 간단한 결혼식을 하게 되었다나는 그 편이 좋았다어느 날 갑자기 입적을 했다고 주변사람에게 알리는 것보다 당당하게 결혼식을 하면서 알리는 게 좋았으니까세간의 암묵적인 룰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았다어머니가 예쁜 옷을 입고 가족들을-우리 쪽의 가족들은 얼마 없지만모아놓고 어머니가 이렇게 사랑받는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어머니가 신부 대기실에 앉아있는 동안 나는 친척들과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구석에 앉아있었다피아노 앞엔 아저씨의 친척인듯한 여자가 앉아 손을 풀고 있었고나는 어젯밤 본 야구 경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비누 냄새가 났다그리고 찬바람에 하얗게 마른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네가 쥬시마츠구나?”

남자가 웃었다남자는 뛰어왔는지 머리가 바람에 흐트러져서 엉망이었고어깨에 아직도 눈이 조금 남아 있었다나는 얼떨결에 그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남자의 손이 차가웠다길쭉하고 가지런한 손가락이 손바닥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남자에게선 시원한 향수 냄새가 났다.

지금 돌아오느라 늦었어결혼 준비하는 거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제야 존재조차 까먹고 있었던 아저씨의 아들이 떠올랐다.

이제 고등학교 들어간다고 했나내가 형이었지?”

남자가 웃으면서 내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나는 그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가 머리를 만지는 대로 가만히 내버려두었다괜히 웃음이 나왔다.

 

어머니와 아저씨는 짧은 신혼여행을 떠났다나는 공항까지 따라가서 그들을 배웅했다어머니는 새 옷을 곱게 차려입고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형 말 잘 듣고 있어야 돼?”

나는 활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옆에서 그도 손을 흔들며 웃었다아저씨는 선물을 사오겠다고 하며 어머니의 손을 잡아끌었다어머니는 계속해서 나와 카라마츠를 돌아보았다어머니와 아저씨가 자동문 너머로 사라지고나는 이제 그와 단 둘이 남았다는 걸 깨달았다슬쩍 그를 돌아보니 그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다.

배고프지뭐 좀 먹을까뭐 좋아해?”

아무거나 잘 먹어요.”

나는 예의바르게 대답했다사실 아무거나 다 먹는다는 건 거짓말이었지만 음식을 가린다는 유치한 꼴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그는 잠깐 고민을 하다 근처 패스트푸드점으로 향했다.

일곱 살 때?”

그래서 그런지 어머니는 저를 장례식에도 데려가지 않고 옆집에 맡겨놨어요다 끝나고 홀가분해져서 데리러오겠다고 약속하고.”

나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틈 사이에서 그에게 아버지가 죽었을 때 얘기를 하고 있었다그와 이렇게 길게 얘기를 해본 건 처음이었고누군가에게 아버지의 무책임한 인생에 대해 애기하는 것도 처음이었다누군가 엿듣고 있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안심한 것도 있을 것이다우리가 앉은 테이블의 양 옆만 봐도 금발에 푸른 눈을 한 외국인들이 앉아있었으니까그는 두 번째 햄버거를 남김없이 먹어치우고 너겟을 먹기 시작했다나는 반쯤 먹은 햄버거를 들고 그가 또 뭔가를 물어봐주길 기대했다그와 얘기를 하겠다고 아버지를 팔아넘기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그가 동정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봐주는 게 좋았다그리고 아버지는 그 따뜻한 미소에 비교도 못할 정도로 값싼 인물이었고.

어머니께 섭섭하진 않았고?”

그의 낮은 목소리가 내 귀로 흘러들어왔다어머니가 아버지의 장례식에 나를 데려가지 않았다고 내가 섭섭했을 것이라고 해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나는 한참동안 얘기를 한다고 마른입에 콜라를 가득 머금었다가 꿀꺽 마셨다나는 혹시 내가 너무 어리광을 부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가만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진심인 것 같았다진심으로 일곱 살도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할 수 있고어머니를 위로하고 힘이 되어주고 싶어 한다는 걸 믿는 것 같아서나는 계속해서 콜라를 마셨다입이 자꾸 말랐다그의 짙고 까맣게 맑은 눈을 계속 보고 싶으면서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아닌 사람과 단 둘이 집에 남아 있다는 건 이상한 기분이었다그는 내가 어색해하는 걸 느꼈는지 아침에 같이 아침식사를 하고는 나갔다가 이른 저녁에 돌아왔다나는 현관에서 그를 배웅하고 나면 그의 방에 몰래 들어가 구경을 했다책장에는 남성 패션잡지가 한가득 꽂혀있었고어려워보이는 대학 교재들이 그보다 더 많이 꽂혀있었다세수를 하고 바르는 스킨로션도 있었고화려하고 조그만 향수들도 가지런히 놓여있었다나는 하나씩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았다그러나 그에게서 나는 비누냄새와 같은 향수는 없었다그런 비누냄새가 나는 향수가 있으면 하나 갖고 싶었는데나는 아쉬워하며 향수 뚜껑을 닫았다고등학생은 향수를 뿌리기엔 아직 어리다.그렇지만 나중에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스무 살이 되고아마도 그가 다니는 대학에 진학한다면 향수를 뿌려도 어색하지 않겠지나는 그가 나에게서 그와 같은 비누냄새를 맡는 걸 상상했다내가 그를 설레게 할 수 있을까나는 소리 나지 않게 옷장을 조심스럽게 열어 그의 옷 사이에 파묻혀 그의 냄새를 맡았다그가 나를 보면서 설렜으면 좋겠다고소원을 빌었다그의 검은 가죽 재킷과 트렌치코트와 후드에 나를 보고 나를 궁금해해달라고 속삭였다.

 

그는 집에 오면서 꼭 간식거리를 사들고 왔다나는 그의 방에서 한참을 놀다가 그가 올 시간이 되면 방을 정리해두고 거실에 나가 티비를 켜서 보고 있었던 척을 했다.그가 현관문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면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다이상한거야나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의 존재에 흔들리는 걸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쥬시마츠형 왔다!”

그는 평생 외동으로 자랐으면서 형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하고 있었다나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그의 존재를 알아챈 것처럼 웃으며 현관으로 달려가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셨어요?”

쥬시마츠말 놓으라니까?”

그가 웃으며 고개를 젓고는 손에 들려있던 케익 상자를 내밀었다유명한 체인점의 그것이 아니라 내가 들어본 적이 없는아마도 비쌀 게 분명한 제과점의 케익이었다.

저녁 먹고 디저트로 먹자!”

그는 겉옷을 벗으며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나는 케익을 식탁위에 올려놓고 발소리가 나지 않게 조용히 그의 방 문 앞으로 걸어갔다조금 열린 틈으로 그가 보였다그는 옷장을 열어 옷걸이를 꺼내 가디건을 옷장 문고리에 걸었다그리곤 내가 의미를 읽어낼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옷장 안을 한번 훑어보고그의 방을 쭉 돌아보았다나는 미친 듯이 뛰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꾹 누르며 숨을 참았다.

그러나 내가 그 짧은 찰나에 상상했던 최악의 경우와는 달리 그는 문을 등지고 돌아서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나는 몸을 돌려 부엌으로 돌아갔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나와 앞치마를 두르고 소매를 걷었다나는 착하게 웃으면서 그가 요리를 하는 걸 거들었다그는 그가 다녔던 외국대학 얘기를 해줬고,거기서 만났던 특이한 사람들 얘기를 했다나는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지만 그는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나는 조금 마음이 놓여 계란을 휘저으며 대학을 다닌다는 건그것도 외국에 있는 대학에 간다는 건 무슨 기분일지 상상했다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내가 모국어로 무슨 말을 하더라도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쥬시마츠는 전공으로 생각해둔 거 있어?”

그가 내 손에서 계란 그릇을 빼앗아가 팬에 부으며 말했다.

글쎄요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나는 사실 대학에 갈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어머니 혼자 일을 해서 나를 먹여 살리는데 어떻게 대학까지 보내달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그는 의외라는 눈빛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중에 결정하면 늦으니까 미리 진로를 생각해보는 게 좋아.”

“...형은 무슨 과에요?”

나는 경영학과.”

그럼 나도 경영학과로 가고 싶어요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와 저녁을 먹고설거지를 하고 케익을 잘라 접시에 담았다그는 씁쓸한 커피도 두 잔 내려 쟁반에 담았다.

쥬시마츠는 우유랑 설탕 넣어줄까?”

그냥도 괜찮아요.”

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그는 웃으면서 쟁반을 들고 그의 방으로 향했다나는 당연히 거실로 가서 먹거나 아니면 식탁에서 먹을 줄 알았는데혹시 나를 혼내려는 건가나는 쟁반을 대신 들 생각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그를 따라 들어갔다.

그는 책상위에 쟁반을 내려놓고 침대에 털썩 앉았다그리곤 향수를 쭉 훑다가 하나를 집어 들어 뚜껑을 열었다역시 내가 건드린 걸 안 건가나는 애써 웃으려고 했지만 입가가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게 제일 새 거니까 선물로 줄게향도 무겁지 않고 가벼우니까 몰래몰래 뿌리고 다녀.”

그의 커다란 손이 내 손목을 붙잡고 소매를 조금 걷어 올렸다그리곤 향수를 한번 뿌리고반대쪽 손목을 들어 맞대고 문질렀다상큼한 향이 났다그가 내 손목을 잡아 코끝에 대고 향을 한번 맡고 웃었다그의 입이 시원하게 호선을 그리며 웃었고 나는 그제야 그를 따라서 웃을 수가 있었다나도 손목을 들어 향을 맡았다꽃향기같은 게 났다그에게는 너무 가벼운 향이었고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향이었다그렇지만 나는 한참동안 손목을 코끝에 대고 향을 맡았다이 향수 냄새 밑에 그의 체향이 티끌만큼이라도 남아있을 것 같았다.

그는 꼭 태어날 때부터 형 노릇을 했던 것처럼 나를 앉혀놓고 그의 소지품을 하나둘씩 꺼내서 보여주며 그 중에서 제일 좋고 제일 새것인 것을 하나씩 꺼내 품에 안겨주었다그는 좋아하는 스타일의 사진을 보면 스크랩해서 모아두고 있었다취미로는 기타를 쳤고학교를 다닐 땐 야구부에 들고 싶었지만 선발테스트에서 떨어졌다고 했다그는 외국에서 가져온 조그만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 주었고 가방도 외투도 꺼내주면서 얘기를 했다형은 이런 건가.

나는 밤 열두시가 다 되어가도록 그와 웃고 떠들고 보드게임을 하다 그가 준 물건들을 한아름 끌어안고 방으로 돌아갔다부엌에서 그가 달그락거리며 설거지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아저씨가 교수로 있는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외국에는 교환학생으로 다녀왔고대학을 마치면 그 곳의 대학원으로 진학하겠다고 했다나는 그가 다녔던 고등학교에 들어갔다학교는 시골학교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넓고 세련된 곳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입학식까지 부모가 따라올 필요는 없다고 두 사람을 뜯어말렸다어머니는 꽤 서운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이제 어머니로부터 독립을 해야 된다고 느꼈기에그리고 아저씨가 그의 아들이 입었던 교복을 입은 날 보며 그의 사랑스러운 막내아들이라고 감상 젖은 눈으로 바라보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가 오겠다고 하는 것까지 말릴 수는 없었다나는 입학식 연습을 해야 된다고 모인 강당에서 탈출해 학교 정문에 서서 그가 오는 걸 기다렸다정문에서 저 멀리 지하철역까지 길이 뻥 뚫려있었고그 길을 따라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입학식 하는 날에 이렇게 빠져버리면 담임에게 찍힐게 분명했지만 나는 그가 그 꽃길을 걸어 나에게 오는 걸 보고 싶었다입학식을 하는 날이라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나는 이리저리 치이면서도 고개를 쭉 내밀고 그를 찾았다입학식이 시작할 시간이 다 되어가고사람들이 점점 줄어들었지만 그는 올 기미가 없어보였다나는 어제 어머니가 빳빳하게 다려준 교복 상의의 끝을 잡고 손을 꿈지럭거렸다안에 들어가 있으면 그가 나를 찾으러 올까하지만 나는 그에게 몇 반인지 가르쳐주질 않았고핸드폰으로 전화를 한다고 해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 틈에서 나를 찾는 건 쉽지가 않을 것이다그래도 만나기만 하면 되지 않을까그리고 나중에라도 그에게 다시 학교로 와달라고 하면 이 길을 걸어올 테니까.

단념하고 돌아서려는 찰나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저만치 멀리서 들려오는 발소리였지만 나는 귀신같이 알아듣고 고개를 들었다.

쥬시마츠!”

그가 달려오고 있었다품에는 커다란 프리지아 꽃다발을 안고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꽃잎이 날리는 그 길에 그가 있었다나는 정문을 꽉 붙잡고 그가 나에게 다가오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길쭉하게 큰 키와 긴 다리가 먼저 눈에 들어왔고아슬아슬하게 재킷에 매달린 선글라스가한 손으로 단단히 붙잡은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이 시간까지 기다린 날 보며 그가 놀랍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그의 짙은 눈썹이 보였고날카로운 코가 보였고 웃는 입이그리고 맑고 깊은 눈이 보였다아니보였다고 할 수 없다나는 그가 던지듯 품에 안겨준 프리지아의 향기를 맡으면서 그의 눈이 내 마음 어딘가에 깊이 새겨졌다고 생각했다죽을 때까지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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