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외로 여섯 살이라는 나이 차이는 꽤 컸던 모양이다. 카라마츠는 집 앞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의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카라마츠는 쥬시마츠와 함께 살기 전까진 자기 방에 불이 켜져있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어려서 아버지가 어머니와 이혼을 하고 아버지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을 모두 연구에 쏟아 붓는 동안 카라마츠는 혼자서 자랐다. 어두운 집으로 들어가서 불을 켜는 건 일상이었고, 슬프다거나 외롭다거나 할 때는 이미 지난 지 오래였다. 카라마츠는 한숨을 푹 쉬고 현관문을 잡았다. 누군가 집 안에서 달리는 소리가 들렸고, 문이 벌컥 열렸다. 카라마츠는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던 걸 단숨에 풀고 씨익 웃어보였다.

카라마츠 형!”

쥬시마츠가 달려들어 품에 안겼다. 쥬시마츠는 한참 성장기라 그런지 하루가 다르게 자랐고, 그들이 함께 살기 시작한지 반년이 다 되어가자 어느새 카라마츠의 키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자랐다. 그만큼 무거워지기도 했다. 카라마츠는 휘청거리다 겨우 쥬시마츠를 붙잡고 손에 들려있던 아이스크림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쥬시마츠는 카라마츠를 놓고 곧바로 카라마츠의 손을 확인하더니 아이스크림을 집어 들고 부엌으로 달려갔다. 카라마츠는 쥬시마츠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쥬시마츠가 소리를 질렀다.

! 아이스크림 지금 먹어도 돼?”

그래! 잠깐만, 옷만 갈아입고!”

카라마츠도 큰 소리로 대답을 하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소리가 나지 않게 조용히 문고리를 돌려 문을 잠갔다. 처음엔 그저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카라마츠는 혼자서 살던 버릇처럼 문을 열어놓고 지냈지만 언제부턴가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 그의 물건을 하나하나 만졌던 것 같았고, 그의 옷이, 심지어 속옷이 한두 벌씩 없어지곤 했다. 새어머니는 카라마츠를 어려워했다. 카라마츠를 부를 때도 문 앞에서 이야기를 마쳤고, 청소도 카라마츠가 직접 한다는 얘길 아버지에게 전해 들었는지 따로 건드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원래 카라마츠의 물건에 관심이 없었고.

남은 건 쥬시마츠뿐이다. 카라마츠는 실내복으로 갈아입다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문을 보았다. 카라마츠는 외동으로 이십여 년을 살다 갑작스럽게 동생이 생긴다는 얘기를 듣고 걱정하고 있었다. 그의 친구들은 고등학교 1학년이면 한창 사춘기일 때이고, 낯선 아저씨가 형노릇을 하겠다고 덤비면 자다가 칼을 맞을 거라고 겁을 줬다. 하지만 쥬시마츠는 처음부터 카라마츠의 손을 피하지 않았고, 카라마츠가 무슨 말을 하든 생긋생긋 웃으며 따랐다. 카라마츠도 그다지 말이 많은 편이 아니라 친해질 수 있을까 하고 걱정했는데, 쥬시마츠는 카라마츠가 돌아오면 그를 붙잡고 학교에서 있었던 얘기를 늘어놓았다. 카라마츠가 다녔던 고등학교를 다니는 만큼 제법 말도 통했고, 쥬시마츠는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르게 애교도 부렸고 카라마츠에게 애정 표현도 잘 했다. 동생이 생겨도 나쁘진 않구나. 카라마츠는 안심했다. 쥬시마츠가 카라마츠의 물건들에 관심을 갖는 건 그저 호기심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물건을 건드리지 말라고 얘기하면 사이가 어색해질 것 같아 그의 물건들을 나눠주면 쥬시마츠가 그의 의도를 알아차릴 거리고 믿었는데, 쥬시마츠는 멈추질 않았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 말자. 카라마츠는 아주 미묘하게 조금씩 위치가 바뀐 물건들을 바라보다 실내복을 마저 입고 벗은 옷을 들고 나왔다. 새어머니는 아직 오시지 않은 것 같았다. 카라마츠는 깜빡하고 잠금장치가 된 그대로 문을 열었다. , 하고 잠겼던 문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던 소리가 멈췄다가, 쥬시마츠가 고개를 불쑥 내밀고 카라마츠를 불렀다.

! 아이스크림에 초코 시럽 뿌려서 먹어볼까?”

못 들은 건가? 카라마츠는 안심하고 벗은 옷을 세탁바구니에 넣고 부엌으로 들어왔다.

그러다 이 썩는다? 고등학생인데 충치 생기면 쪽팔릴 거야.”

카라마츠가 쥬시마츠의 머리를 헝클어뜨리자 쥬시마츠가 배시시 웃으며 아이스크림을 크게 한 스쿱 덜었다. 아주 잠깐, 카라마츠는 쥬시마츠가 욕실 쪽을 향해 시선을 돌린 것을 본 것 같았다.

야구부는 어때?”

카라마츠가 먼저 말을 꺼냈다. 쥬시마츠는 아이스크림을 입에 가득 넣고 녹여먹다 머리가 아픈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고 있었다.

급하게 먹지 말라니까. 매번 아이스크림 먹을 때마다 그러네.”

쥬시마츠는 울상을 지으며 한참 미간을 찌푸리다 간신히 표정을 풀고 아이스크림을 더 덜어 그릇에 담았다.

야구부 코치님도 좋고, 같이 하는 친구들도 다 좋아! 그리고 방학하자마자 합숙 간다는데, 많이 힘들까?”

카라마츠는 비록 야구부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의 친구들 중 하나는 붙어서 3년 내내 카라마츠를 약 올리며 열심히 부활동을 했었다. 그 친구가 합숙을 가긴 갔었던 것 같은데, 재밌다고 했었나, 아님 힘들었다고 했었나.......

다른 건 모르겠고, 친구가 엄청 까맣게 타서 왔었어.”

카라마츠가 웃으며 아이스크림을 한 스푼 떠서 입에 넣었다. 쥬시마츠는 카라마츠를 빤히 바라보다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까만 게 좋을까?”

, 요샌 일부러 태닝도 많이 하니까? 하얗기만 한 것 보다는 건강해보이겠지?”

좋아하는 여학생이라도 생긴 건가? 카라마츠는 자신의 고등학교 생활을 떠올려보고 피식 웃었다.

공학이었으면 예쁜 여학생이 매니저 해줬을 텐데, 아쉽겠네?”

아니, 안 그래.”

쥬시마츠가 딱 잘라서 대답하고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의외였다. 이미 좋아하는 상대가 있으니 매니저 같은 건 상관없다는 건가? 카라마츠는 곰곰이 주변에 있는 다른 학교들을 떠올려보았다. 여고도 하나 있었고, 공학도 하나 있었다. 꼭 학생이 아닐 수도 있지. 카라마츠는 잠깐 고민하다가 스푼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카라마츠는 방으로 돌아가 지갑을 꺼냈다. 새어머니나 아버지가 용돈을 챙겨주는 것 같았지만 카라마츠도 용돈을 좀 쥐어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돈 문제로 쩔쩔매는 건 영 보기 싫으니까. 지갑을 들고 돌아오니 쥬시마츠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재채기라도 했나? 카라마츠는 자리에 앉아 지갑을 열었다. 그리곤 지폐 몇 장을 꺼내 쥬시마츠에게 내밀었다.

청춘도 잠깐이야. 여자 친구 생기면 맛있는 것도 사주고 그래야 돼.”

여자 친구 없는데.......”

쥬시마츠가 말끝을 흐리다 고개를 들었다. 고백하기 전인가? 카라마츠는 쥬시마츠를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았다. 아직 귀여운 얼굴이긴 하지만 어린 티도 많이 벗었고, 면도도 하기 시작했다. 야구부 활동을 열심히 하더니 키도 크고 어깨도 더 넓어진 것 같았고. 카라마츠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혹시 모르는 거야. 일단 받아.”

쥬시마츠는 입을 꾹 다물고 카라마츠가 내민 돈을 빤히 바라보다 받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감사합니다.”

내가 괜한 짓을 했나? 생각해보면 사춘기 남자애고, 이렇게 돈 받는 게 자존심이 상한다던가... 하지만 쥬시마츠는 곧 웃으며 아이스크림을 마저 퍼서 먹었다. 슬쩍 보니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가장 큰 통으로 사온걸 벌써 반은 되게 먹은 것 같았다. 이렇게 먹고 또 쑥쑥 크겠지. 카라마츠는 쥬시마츠가 자기보다 커져버리면 자존심이 좀 상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더 안 먹어?”

이제 씻고 공부해야지. 다 먹고 나서 뚜껑 꼭 닫아서 냉동실에 넣어놔.”

쥬시마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라마츠는 빈 그릇과 스푼을 싱크대에 가져다 놓고 욕실로 들어갔다. 카라마츠가 가려는 대학원엔 아버지와 친한 분들이 많았다. 특혜를 받을 수 있다면 받는 게 좋긴 하겠지만, 아버지의 체면을 생각하면 공부를 게을리 할 수가 없었다. 카라마츠는 뜨거운 물을 한참 맞고 있다가 쥬시마츠 생각을 했다. 쥬시마츠는 성적이 나쁜 편도 아니었고, 머리도 꽤 좋은 것 같았다. 저번에 얘기했을 땐 대학을 가면 좋겠다고 생각만 하고 있었지 집안 사정을 생각해서 포기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젠 사정이 다르다. 친 아들은 아니지만 쥬시마츠도 아버지의 아들이었고, 아버지는 웬만하면 쥬시마츠도 대학에 보내고 싶어 할 것이다. 카라마츠만큼 좋은 대학에 가진 못하더라도 어디 가서 부끄럽진 않을 정도로. 쥬시마츠가 3학년이 되어 본격적으로 수험을 준비할 때가 되면 카라마츠는 이미 출국해 이 집에 없을 것이다. 카라마츠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면서 그 전까지 쥬시마츠에게 공부를 가르쳐야겠다고 결심했다.

카라마츠는 목욕가운을 두르고 나왔다. 부엌에는 불이 꺼져있었다. 아마 쥬시마츠도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방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러다 배탈 날라. 카라마츠는 쥬시마츠의 방문을 슬쩍 돌아보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조용히 방문을 돌려 잠갔다. 카라마츠는 잠깐 거울을 보면서 보습제를 바르고 서랍에서 속옷을 꺼냈다.

그때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카라마츠는 깜짝 놀라 반쯤 푼 목욕가운 끈을 다시 고쳐 묶고 고개를 돌렸다. 카라마츠의 이불이 둥그렇게 위로 튀어나와 있었다. 그리곤 쥬시마츠가 얼굴을 빼꼼 내밀어 카라마츠를 보고 웃었다.

쥬시마츠, 안자고 뭐해?”

카라마츠는 무심결에 조금 날카로운 목소리로 묻고 후회했다. 쥬시마츠는 카라마츠의 손에 속옷이 들린걸 보고 앗! 하면서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얼른 입어!”

카라마츠는 주섬주섬 속옷을 입고 가운을 벗어 옆 옷장 문고리에 가운을 걸었다. 쥬시마츠가 다시 고개를 내밀고 카라마츠가 옷을 입는 걸 보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잠옷을 꺼내 바지부터 입었다. 쥬시마츠의 시선이 느껴졌다. 끈적끈적하다고 하기 보단 뜨겁고, 따끔거렸다. 카라마츠의 문 틈 사이로 느껴지던 그 시선. 카라마츠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상의 단추까지 다 잠그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쥬시마츠가 이불 밑에서 꼼지락거리다 카라마츠 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카라마츠를 올려다보았다. 자기 방으로 돌아가라고 해야지. 어떻게 말을 꺼내지? 하지만 쥬시마츠가 조금 더 빨랐다.

나 혼자서 공부하면 금방 졸리니까, 형 방에서 하면 안 될까? 조용히 할게.”

공부를 하겠다는데 어떻게 말리겠어. 카라마츠는 어쩔 수 없이 책상 한쪽을 치워주었다.

그럼 보조 의자 좀 가져올래? 여기 옆에 앉아서 해.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고.”

하지만 쥬시마츠는 이불 밑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머뭇거리다 이불 바깥으로 발 한쪽을 내밀어보였다. 카라마츠는 새삼 쥬시마츠의 발이 자기 발과 크기가 비슷하거나, 혹은 조금 더 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 한참 숨어있었더니 발이 저려. 형이 갖다 주면 안 될까? 보조의자가 어디있는지도 모르겠어.”

그러고 보니 쥬시마츠가 이 집으로 오고 보조의자를 쓴 적이 없었다.

그래. 저린 거 풀리면 가서 책도 가져오고.”

카라마츠는 방문을 열고 나가 부엌에 딸린 세탁실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뒤에서 타다닥, 하고 뛰는 소리가 나더니, 쥬시마츠가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발 저린 게 이렇게 금방 풀린다고? 카라마츠는 화장실을 한번 돌아보고 다시 부엌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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