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은 한참동안 멍하니 앉아있었다이치마츠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이불을 덮고 카라마츠 몰래 손바닥을 맵게 꼬집었다아팠다이치마츠는 손바닥이 얼얼해질 때까지 손톱 끝으로 살을 꼬집었다꿈이 아니란 게 실감나지 않았다카라마츠는 마른세수를 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이치마츠에게 손을 내밀었다.

밤새 지진 같은 게 일어나서 다들 대피한 걸 수도 있지 않을까일단 나가보자.”

그랬으면 우릴 남겨둘 리가 없지 않아그렇지만 이치마츠는 대답하지 않고 카라마츠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카라마츠의 손이 축축했다.

거리엔 아무도 없었다이치마츠는 카라마츠보다 한 발자국 앞서 걷다가 오싹한 기분이 들어 아무렇지 않은 척 카라마츠와 나란히 걸었다거리에선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인기척도 없었고이치마츠가 평소 먹이를 챙겨주던 고양이들도 보이지 않았다살아있는 것들은 다 없어져버린건가 싶다가도 거리에 나무들이 남아 있는걸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한참을 걸었다그들이 한 평생을 살아온 골목이었다이 집엔 누가 살고저 집엔 누가 살다가 이사를 갔고이 상가 건물에는 누가 살다가 이사를 갔고다른 사람에게 별 관심이 없는 이치마츠도 줄줄 읊을 수 있을 만큼 익숙한 골목이었다그러나 살아있는 것의 기척이 없는 거리는 너무도 낯설었다이치마츠는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무성영화를 보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말도 없이 걷다보니 저 앞에 상가 거리가 보였다저 골목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지면 편의점이니 슈퍼마켓이니 하는 것들이 모여 있었다이치마츠는 주머니에 뭘 사먹을 돈이 있는지 주머니를 만져보다 그들이 잠옷을 입고 나왔다는 걸 깨달았다카라마츠도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이치마츠처럼 주머니를 만져보고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이치마츠를 돌아보았다이치마츠는 괜히 오기를 부리고 싶었다.

아무도 없으면 그냥 가게를 털어버리지 뭐.”

가게를 털어? CCTV에 찍힐 텐데?”

그래도 보는 사람도 없는 걸게다가 그 정도 훔친다고 감옥 안가.”

카라마츠가 당황한 얼굴을 했다그걸 보니 이치마츠는 기분이 좀 좋아져서 빠르게 걸었다편의점에서 먹을 걸 좀 훔친다고 해도 고등학생이면 초범으로 끝날 거고나중에 부모님이 대신 계산을 해주러 오실 수도 있는 거니까편의점 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뭘 먹을까이치마츠는 달달한 군것질거리를 먹을지 아니면 식사대용으로 먹을 수 있는 걸 고를지 고민을 하며 문을 열었다.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뭔가 질척질척하게 미끄러지는 소리가 들렸고헉헉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사람이 있는 건가부상당해서이치마츠는 급히 편의점 안쪽으로 달려갔다.

두 사람이 있었다이치마츠는 그 중 하나와 눈을 마주치고 그 자리에 묶인 듯 굳어버렸다아니눈이 마주치긴 했나이치마츠는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여자의 엉덩이에 성기를 박고 있는 남자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이치마츠가 야한 책이나 야한 비디오 같은걸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건 아닌데지금 이치마츠의 눈앞에서 섹스를 하고 있는 남녀는 사람으로 보이질 않았다두 사람은 새된 비명소리를 지르기만 할 뿐 사람의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무엇보다 이치마츠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들을 보고 있어도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꼭 이치마츠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속이 메슥거렸다두 사람은 이치마츠가 동네에서 몇 번 마주쳤던 사람들이었고그 중에 하나는 이미 결혼을 한 사람이었다아이를 품에 안고 나와서 아이스크림을 사주는 걸 본거 같은데이치마츠는 뒷걸음질을 치다 실수로 매대에 전시되어 있는 통조림들을 떨어뜨렸다바닥에 통조림 대여섯 개가 떨어지며 우당탕하고 큰 소리가 났는데도 두 사람은 이치마츠를 돌아보지 않았다사람이 아니다이치마츠는 위액이 올라오려는 걸 꾹 참고 입을 막았다저들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안에 든 건 사람이 아니다만약 저 사람들이 이치마츠와 카라마츠를 제외하고 이 마을에 남아있는 유일한 인간이면 어떡하지이치마츠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치마츠다른 사람이 있어?”

카라마츠였다카라마츠가 어느새 이치마츠가 있는 편의점 안쪽까지 찾아와 이치마츠의 팔을 잡았다이치마츠는 꼭 마법이 풀린 것처럼 카라마츠의 팔을 잡고 자리에 주저앉았다카라마츠가 놀라 이치마츠를 붙잡고서 곁을 돌아보았다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손을 붙잡고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애썼다.

“...봤어?”

카라마츠가 그 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이치마츠는 고개를 끄덕였다카라마츠도 이치마츠와 똑같이 느낀 모양이었다카라마츠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그쪽에서 고개를 돌렸고이치마츠의 손을 단단히 잡고 편의점 밖으로 달려 나갔다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손에 잡혀 끌려 나가면서 편의점 바닥에 빵이나 케이크과일 같은 것들의 봉지가 마치 비닐 포장을 처음 본 사람이 마구잡이로 뜯어 간신히 안에 든 내용물을 먹은 것처럼 엉망이 되어 바닥에 널려있는 것을 보았다.

카라마츠는 편의점 문 밖으로 나와 이치마츠의 손을 놓고 숨을 골랐다카라마츠는 꼭 달리기를 한 사람처럼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상체를 수그리고 숨을 쉬다 카라마츠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사람들이 정신병자일지도 모르는데 그걸 멍하니 보고만 있어도망쳐야 될 거 아냐!”

카라마츠는 정말로 화가 나 있었다카라마츠가 진심으로 화내는 건 거의 이삼 년 만에 보는 것 같아 이치마츠는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카라마츠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 사람들이 공격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지금 부모님도 안계시고 근방 이웃들도 없는데!”

카라마츠의 눈에는 아직 그들이 사람으로 보였던 건가부모님은 가끔 집을 비우거나 하면 오소마츠와 카라마츠를 불러다 부모님이 없으면 형들이 동생들을 잘 챙겨야 한다고 당부하곤 했다장남과 차남을 따로 부르긴 했지만 동생들이 충분히 들을 수 있는 거리였다그러면 오소마츠와 카라마츠는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하지 마시라며 부모님을 배웅했고그런 날이면 이치마츠는 이상하게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동갑내기 쌍둥이들인데 몇 분 먼저 태어났다고 부모노릇을 대신 할 수 있어오소마츠는 부모님이 신신당부를 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 같았지만 카라마츠는 달랐다어설프게 저녁을 차려서 형제들과 나눠먹고아침엔 제일 먼저 일어나 다른 형제들을 깨웠지.

카라마츠는 지금도 자기가 엄마처럼 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이렇게 둘만 남았는데이치마츠는 놀란 것보다 카라마츠가 화난 표정으로 이치마츠가 잘못했다는 대답을 하길 기다리는 게 싫었다이치마츠는 카라마츠를 노려보다 앞서 걸었다골목의 가게들은 열려 있었다그러나 평소와는 다르게 누군가 엉망으로 어질러놓은 쓰레기가 가득했고군데군데 사람의 배설물로 보이는 것도 널려 있었다이치마츠는 과일가게 문 밖으로 사람의 발이 하나 튀어나와 있는 걸 보고 멈췄다카라마츠가 순식간에 따라와 이치마츠의 팔을 잡았다이치마츠는 카라마츠가 뭐라고 말을 하기 전에 그 발을 가리켰다손가락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카라마츠는 무의식적으로 이치마츠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발은 핏기가 하나도 없이 그냥 그 자리에 툭 튀어나와 있었다이치마츠는 작은 발톱동그란 발뒤꿈치복사뼈를 하나씩 훑어보다 너덜너덜하게 찢어진 발목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이치마츠의 팔을 잡은 카라마츠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누가 저 발의 주인을 해쳤을까이치마츠는 햇살이 눈부셔 눈을 찌푸리고 카라마츠를 돌아보았다카라마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이번엔 내 차례네이치마츠는 자신이 시체를 보는 것보다 짐승 같은 섹스를 보는 게 충격이 더 큰 건지아니면 처음 그런걸 보고 놀라 시체를 봐도 충격이 덜한 건지 고민하며 카라마츠의 손을 잡아끌었다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손에 끌려 나오면서도 안색이 돌아오질 않았다.

돌아갈까?”

이치마츠가 물었다하지만 카라마츠는 고개를 저었다.

멀쩡한 사람이 우릴 찾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집에서 멀리 떨어지지는 말고 돌아보자.”

아무도 없을 것 같은데그렇지만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손을 잡고 계속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시커먼 고등학생 둘이 손을 잡고 걷는다니 징그러워 보이겠지만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이 손을 놓아버리면 순식간에 혼자가 되어 버릴 것 같았다카라마츠도 이치마츠의 손을 아프도록 꼭 잡았다이치마츠는 손에 피가 통하질 않아 저릿하게 아파왔지만 손을 빼지 않았다.

한낮의 햇살이 푸석하게 메마른 거리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이치마츠는 자기 쪽의 상가들을 계속해서 훑어보았지만 산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간혹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면 텅 빈 눈을 한 사람이 반쯤 벗은 차림새로 아무렇게나 누워있었다그런 사람이 네다섯 명쯤이치마츠는 혹시 저렇게 되는 것이 정상이고자신과 카라마츠가 미쳐버린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봤지만 알 수가 없었다카라마츠도 계속해서 상가를 둘러보았지만 말을 걸만한 사람은 발견하지 못했다어느새 골목이 끝났다.이치마츠와 카라마츠는 자연스럽게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서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렸다그러나 차는 한 대도 오지 않았고신호등은 깜빡거리기만 할뿐 바뀔 생각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횡단보도를 건너 계속해서 걸었다.

몇 시간이나 걸었을까이치마츠는 발바닥이 아파 멈춰 섰다카라마츠는 이치마츠가 멈추자 이치마츠를 돌아보고 그 옆에 주저앉았다아버지의 회사가 있는 곳이었다아버지의 회사가 있고지하철역이 있고축제가 있는 밤이면 야시장이 열리는 넓은 마당그러나 아무도 보이질 않았다이치마츠는 배도 고팠고 발도 아파 짜증이 났다세상이 이상하게 변해버렸는데도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아서 그런가카라마츠가 옆자리를 툭툭 치더니 고갯짓을 했다이치마츠가 바닥에 주저앉자 카라마츠가 조금 움직여서 이치마츠의 발을 잡고 신발을 벗겼다이치마츠가 인상을 찌푸리며 발을 빼도 카라마츠는 발을 놓아주지 않았고이치마츠의 발바닥을 꾹꾹 눌렀다.

지금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지만 그래도 조금만 버텨보자.”

카라마츠가 이치마츠의 반대쪽 발을 잡아 신발을 벗겼다.

그 왜영화 같은 걸 봐도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는 사람이 살아남잖아?”

이치마츠는 대답하지 않았다현실도 그렇게 영화 같고 소설 같은 결말로 끝이 날까이치마츠는 문득 어젯밤 그가 잠들기 전에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만약 아무도 없다면 이치마츠는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할 일이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심장에 커다란 바위가 떨어진 것처럼 무겁게 아파왔다이치마츠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카라마츠를 바라보았다카라마츠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이치마츠는 자신이 단 한자도 쓰지 못할 것이란 걸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이치마츠는 손이 하얗게 질리도록 꽉 붙잡고 있던 샤프를 내려놓고 낡은 스탠드 전원을 껐다.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이치마츠는 그 어둠이 눈에 익을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스탠드 전원을 켰다누런 불빛이 텅 빈 원고지 위로 쏟아졌다빛이 바랜 원고지 첫 칸엔 샤프심 자국이 가득했다.

초등학생 때까지는 분명히 여섯이 다 똑같았는데언제 이렇게 달라져버린 걸까이치마츠는 쌍둥이들의 방에서 한참 달게 잠을 자고 있을 형제들을 떠올려보았다오소마츠는 지나치리만큼 뻔뻔하고카라마츠는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어도 전혀 상처받지 않고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한다그나마 쵸로마츠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고 또 남들이 하는 건 그대로 따라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갖고 있지만그 또한 하나의 마츠노이기에 한번 핀트가 나갔다 하면 오소마츠 못지않게 날뛰는 짐승이 된다쥬시마츠는 논외로 치고토도마츠는 자존심이 세고 또 자기가 형제들 중에선 제일 낫다는 자부심이 있다하지만 이 어두운 골방에서 혼자 원고지를 펼쳐놓고 있는 이 마츠노 이치마츠는세상에 자신이라는 존재를 붙들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글을 선택해놓고도 흔들리고 있었다아니수단이 아니다이치마츠는 두꺼운 원고지 뭉치를 한 장씩 떼어내 구겨 방구석으로 집어던졌다이치마츠는 글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다른 형제들은 자기 자신을 의지해 삶을 살아가지만 이치마츠는 보잘것없는 글재주를 내세워 이것이 그의 정체성이고 자존심이고 자부심이라고 여태껏 소리쳐왔다그러나 기생하는 것은 숙주가 죽어버리면 살수가 없다기생하고 있던 것이다이치마츠는 조그맣게 소리를 내어 기생하는 삶을하고 중얼거렸다만약에이치마츠가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모르고 홀로 살아왔더라면 이렇게 다른 사람이 흔드는 데로 흔들리지 않고 세상 어딘가를 단단히 붙잡아 인간 이치마츠로 자립할 수 있었을까?

이치마츠는 간만에 깊은 잠을 잤다정신은 점점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지만 이치마츠는 눈을 뜨지 않고 이불의 온기를 즐겼다이치마츠는 문예부에 새로 들어온 신입생이 진짜 천재라는 걸 인정하고 일주일도 넘게 밤잠을 설쳤다이치마츠를 정말로 괴롭게 한 것은 신입생이 뽑아내는 소설과 시극본에세이 같은 것들이 아니었다이치마츠의 밤을 하얗게 지새운 것은 신입생의 칭찬이었다. ‘과연선배님은 선배님이시네요.’ 하는 칭찬이치마츠는 그 짧은 말 한마디에서 그가 생각하기에도 지나칠 정도로 많은 의미들을 만들어냈다신입생보다 오래 글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고등학생의 수준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한 실력을 비웃는다던가자신의 글이 훨씬 낫다는 걸 확인하고 가련한 이치마츠를 위로하려한다던가 하는이치마츠의 삶을 방해해온 피해의식이었다그러나 지금 이치마츠는 여섯 명이 맞춰놓은 여섯 개의 알람시계도당장 일어나지 않으면 지각을 할 거라는,

지각이다!”

이치마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오전 열시로이미 한참 늦은 시간이었다다 같은 학교를 다니면서 형제들은 왜 그를 깨우지 않은 거지이치마츠는 뒷골이 확 당겨오면서 인상을 쓰고 옆을 돌아보았다잠자리가 텅 비어있었다딱 하나그의 옆에 달라붙어 느긋하게 잠을 자고 있는 카라마츠를 빼고.형제들이 그를 놀리려고 한 건가이치마츠는 짜증을 내며 카라마츠의 어깨를 밀치려고 하다가 뭔가 위화감을 느끼고 형제들의 자리를 돌아보았다.

베개 네 개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꼭 아무도 잠들지 않았던 것처럼이불은 밤새 이치마츠와 카라마츠가 당겨 덮은 탓인지 흐트러져 있었지만 베개는 처음 잠자리를 정리하면서 곱게 내려놓은 모양 그대로 텅 빈 자리에 놓여있었다그의 형제들은 하나같이 이상한 잠버릇을 가지고 있었다아침에 일어나면 베개도이불도심지어 형제들까지 제자리에 있는 게 하나도 없었는데 이게 어떻게 된 거지이치마츠는 멍하니 옆을 돌아보다 고개를 돌렸다머리맡에 있는 행거에 교복 여섯 벌이 나란히 걸려있었다오늘 학교를 가지 않는 날인건가아니다오늘은 문예부의 모임이 있는 날로이치마츠는 어젯밤 오늘 내놓을 글을 쓰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단 한 자도 쓰지 못하고 잠자리에 누우면서 모임에 빠져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학교를 가는 목요일이었다어딘가 이상했다이치마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빠져나왔다.

집 안이 고요했다이 시간대가 되면 어머니는 거실에서 아침드라마를 보느라 정신이 없다그러나 이치마츠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거실은 텅 비어있었다.티비도 전원이 꺼져있었고소파에는 어머니가 앉았던 흔적도 없다이치마츠는 리모컨을 들어 티비를 켰다그러나 티비에서는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하얗고 까만 선들이 어지럽게 흔들리기만 할뿐 방송을 하고 있는 채널을 하나도 없었다이상했다어머니가 티비 수신을 끊어버릴 리도 없고티비 수신료를 내지 않았을 리도 없는데.이치마츠는 다시 티비를 끄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늘 밥솥에 밥을 가득 채워놓곤 했다사춘기의 아들 여섯은 밥을 먹고 돌아서면 배가 고팠고어머니는 밖에서 일일이 사먹느니 차라리 집에서 밥을 챙겨먹으라며 식사를 마치면 곧바로 새로 밥을 지었다그런데 밥솥은 밥을 해 먹었다는 흔적도 없이 차가웠고식기건조대에 가지런히 정리되어있는 그릇엔 물기가 하나도 없이 바짝 말라 있었다오늘 아침 이 집에서 식사를 한 사람이 없다는 건가이치마츠는 부엌문을 열고 나와 안방으로 향했다처음에는 걸었지만곧바로 달리기 시작했다이치마츠는 안방 문을 부서져라 열었다그러나 안방 또한 사람의 기척도 온기도 하나도 없이 차갑게 식어있었다이치마츠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벽장문을 열고 부모님의 서랍을 뒤졌다집문서도어머니의 결혼반지도 모두 제자리에 있었다부모님이 형제들을 버리고 도망친 것도 아니다이치마츠는 안심하고 벽장문을 닫았다바보 같은 생각이었지딱 고등학생 수준의 유치한 생각그러나 곧이어 이치마츠는 다시 겁이 나기 시작했다그러면 부모님과 형제들은 다 어디로 사라져버린 거지이치마츠는 안방을 나와 아직도 잠을 자고 있을 카라마츠를 깨울까 하다 포기하고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카라마츠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대체 가족들이 무슨 장난을 치는지는 모르겠지만카라마츠와 같이 세트로 남겨졌다는 것도 불쾌했고또 카라마츠가 멍청하게 구는 데에 같이 엮이기 싫었다이치마츠는 잠옷 바람인 게 좀 신경 쓰였지만 대충 신발을 구겨 신고 현관문을 나섰다.

골목이 고요했다옆 건물 카페에서 늘 흘러나오던 유행가도요란하게 벨을 울리는 자전거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이치마츠는 현관문을 붙잡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그러나 도시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차 엔진소리라던가사람들의 말소리 같은 게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이치마츠의 청력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닐 텐데이치마츠는 한참동안 귀를 기울이다 현관문을 닫고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오싹한 기분이 들었다이치마츠는 현관문을 잠그고 신발을 벗어 카라마츠가 잠들어 있는 방으로 달려갔다심장이 쿵쾅거렸다.

카라마츠는 팔다리를 대자로 뻗고 잠을 자고 있었다왜 나랑 카라마츠만 남은거지카라마츠가 내가 아는 그 카라마츠가 아닌 건가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코 밑에 손가락을 대보고 카라마츠가 숨을 쉬는 걸 확인했다뭐라고 얘기를 해야 하지세상 사람들이 우리만 남고 모두 사라진 것 같다고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손목을 붙들고 어떻게 하면 덜 멍청하고 덜 겁쟁이처럼 보일 수 있을지 고민했다그와 동시에 고민을 하다가 카라마츠가 투명해지면서 사라질까봐 겁이 났다혼자만 남는 건 죽기보다 싫었으니까.

이치마츠가 자기도 모르게 카라마츠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줬는지 카라마츠가 인상을 쓰다가 눈을 반쯤 뜨고 이치마츠를 돌아보았다.

이치마츠손목이 아픈 것 같다만....”

잠긴 목소리가 이치마츠의 이름을 불렀다지난 십여 년간 들어온 그 목소리가 맞았다안도감이 들었다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손목을 잡은 손을 놓고 카라마츠의 멱살을 잡아 한 번에 일으켰다카라마츠는 눈이 부어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버둥거리다 이치마츠의 손에 이끌려 일어나 앉았다.

지금 내가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는데

카라마츠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비볐다이치마츠는 마른침을 삼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가서 안방이랑 부엌이랑 둘러보고 집 밖으로 나가서 한번 둘러봐.”

그보다 우리 학교 가야되지 않아?”

카라마츠가 눈을 간신히 떠 시계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지금 학교가 중요한 게 아니야멍청아이치마츠는 거칠게 고개를 저으며 이불을 잡아당겼다이불을 빼앗기자 카라마츠는 잔뜩 움츠러들어서 이불안에 발을 집어넣으려고 달라붙었다그러나 이치마츠는 카라마츠를 발로 밀어내고 방문을 가리켰다.

지금 진짜 심각하니까 한번 돌아봐.”

카라마츠는 한숨을 푹 쉬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나섰다방문 너머로 카라마츠가 느리게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렸다그리고 그 발소리는 조금씩 빨라지다가한참 멈춰 있다가현관문 쪽으로 달려 나갔다현관문이 쾅소리가 나게 열렸다가 닫혔고다시 열렸다.

이치마츠다들 어디로 간 거야?”

이치마츠가 잘못 본 게 아니었다다행이네순식간에 미쳐버린 줄 알았는데카라마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들어와 방의 창문을 열었다그리곤 창밖으로 상체를 내밀어 한참을 보다가 다시 이치마츠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어.”

아무도.”

이치마츠가 대답했다하룻밤사이에 세상은아니 최소 마츠노 가가 있는 거리는 카라마츠와 이치마츠만을 남겨놓고 텅 비어버렸다사람들의 흔적이 남은 물건들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주인들은 없었다이치마츠와 카라마츠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떨리는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장마가 시작되는 계절이 왔다. 하늘에는 오래된 먼지 같은 먹구름이 가득 끼어 그 경계를 알아볼 수조차 없고, 습한 공기가 무겁게 깔렸다. 카라마츠의 기분이 끝도 없이 가라앉는 시간이었다. 이치마츠는 방구석에 앉아 카라마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카라마츠는 계속해서 뭔가를 중얼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카라마츠는 그저 커다란 창문을 활짝 열고 낡은 커튼이 조금씩 펄럭이기 시작하는 걸 내버려둔 채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아마 너는 말하는 연습을 하는 거겠지. 이치마츠는 속으로 생각했다. 한 방울이라도 비가 오기 시작하면 카라마츠는 목소리를 잃는다. 성대가 빗물에 녹아 사라지는 것처럼. 첫 번째 빗방울이 지붕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카라마츠도 분명히 들었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카라마츠의 말소리가 멈췄다. 곧이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마른 땅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사방에 울리고, 다른 소리들은 거기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사라진다. 빗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이치마츠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카라마츠와, 그 무기력한 뒷모습을 바라보는 이치마츠만 남았다.

목소리와 비는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이치마츠는 기억을 더듬었다. 어느 늦은 밤, 이치마츠는 조용히 방을 빠져나가 안방 문에 귀를 기울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열 시간이 넘도록 비행기를 타느라 죽는 줄 알았다고 하소연을 하고, 카라마츠의 목에는 이상이 없더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지친 목소리였다. 비가 온다는 이유만으로 카라마츠가 말을 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뭘까. 이치마츠는 쌍둥이들의 방문 앞에 주저앉아 빗소리를 들었다. 한참 빗소리를 듣다가, 이치마츠는 눈을 감고 빗물이 카라마츠의 폐안에 가득 차오르는 상상을 했다. 카라마츠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기쁘다던가, 슬프다던가, 혹은 아프다던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해도 그 빗물은 카라마츠의 목 끝까지 차올라 카라마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파도처럼 철썩이고 있었다. 하얀 물거품이 카라마츠의 치아에 부딪쳐 사라졌다.

카라마츠는 창 밖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치마츠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주먹을 꽉 쥐었다가 힘을 풀었다. 가까이서 말을 할 자신은 없었다.

카라마츠.”

카라마츠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응? 하고 대답을 할 것처럼 입을 벌렸다가, 자기가 말을 하지 못한다는 걸 깨닫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저 양 입 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을 뿐.

좋아해.”

카라마츠가 눈썹을 올리며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치마츠는 문 쪽으로 한발자국 걸어가 다시 카라마츠를 돌아보았다.

좋아하고 있어.”

빗소리가 점점 거세졌다. 카라마츠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걸 보고 이치마츠는 달려가 문을 붙잡았다.

더럽지. 미안. 이 비가 그치면 자살할게.”

마지막 말이 카라마츠에게 들렸을까. 이치마츠는 물을 열어젖히고 현관으로 달려 나갔다. 뒤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이치마츠는 아랑곳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신발을 꿰어 신고 현관문을 빠져나갔다. 비가 온몸을 적시고 있었다. 차가운 빗방울이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목덜미를 따라 가슴으로 흘러들었다.

 

사흘이 지나도록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치마츠는 바다로 난 절벽 위에 쪼그리고 앉아 시꺼멓게 요동치는 바다위로 번개가 번쩍거리며 내리꽂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바다는 하루 종일 그저 보고만 있어도 좋았다. 바다가 늘 새파랗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해가 떠오를 때는 꼭 저 지평선 너머에서 부글부글 끓는 용암이 물 밑을 따라 흐르는 것 같았고, 해가 진 뒤에는 밤하늘 한 쪽을 끌어다 저 물밑 깊은 곳에 카펫처럼 고르게 깔아놓은 것 같았다. 그리고 이렇게 장마의 끄트머리에선 바다가 거무죽죽한 빛으로 어두워져 화를 내고 있었다. 보고만 있어도 좋았어. 다른 사람들은 그저 파랗다고밖에 말하지 못하는 바다를 나는 그들보다 조금 더 가까이에서, 조금 더 오랜 시간 지켜보면서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너를 알 수 있어서 좋았어. 그렇게 보고 있으면 너랑 좀 더 가까워지는 것 같았고, 너는 내 안으로, 나는 네 안으로 들어가는 것 같아서.

빗소리 너머로 작은 돌멩이가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누군가가 미끄러운 돌 위에 지친 발을 내려놓는 소리도. 이치마츠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다가갔다. 맨 손이 바위를 오르고 있었다. 하얗게 힘이 들어간 손가락 끝에는 흙과 모래가, 젖은 이끼가, 물에 녹아 흐려진 핏방울이 묻어있었다. 너무 이르게 날 찾아왔어. 이치마츠는 차마 그 손을 잡아당기지 못하고 뒷걸음질 쳤다. 비가 아직 그치질 않았는데.

그리고 카라마츠가 절벽 위로 올라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사흘 만에 눈 밑이 퀭하게 들어갔고, 조금 마른 것 같았다. 카라마츠는 거친 숨을 고르다 고개를 들고 이치마츠를 향해 걸어왔다. 등 뒤로 천둥치는 소리가 들렸다. 카라마츠가 손을 내밀고 입을 벙긋거렸다. 그러나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가 만약 말을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빗소리에, 천둥소리에 묻혀서 들리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카라마츠의 손을 더운 물에 씻겨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이치마츠는 그 손을 잡지 못하고 다시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어떻게 날 찾았는지, 나를 찾아서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물어보고 싶었고, 동시에 대답을 듣고 싶지 않았다. 말을 하고 싶어.

여기서 보는 바다가, 나 혼자서 보는 바다가 너 같았어.”

카라마츠가 이치마츠에게 다가오다 멈춰서 이치마츠를 바라보았다. 내 목소리가 들릴까. 이렇게 비가 쏟아지고 천둥이 치고 파도가 잡아먹을 것처럼 비명을 지르는 날에.

여기서 보는 바다가 너 같았는데, 지금은 너무 어두워.”

카라마츠가 내밀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파도치는 소리가 무섭고, 비가 바다 위로 떨어지는 소리가 무서워.”

뺨으로 뜨거운 게 흘러내렸다. 이치마츠는 손등으로 눈가에 고인 물을 닦았다. 아니, 그런 건 무섭지 않았다. 무서운 건 다른 거야. 지금 이 비가 그쳐버리고, 네 안을 가득 채운 빗물이 순식간에 말라 버릴까봐 무서워.

축축한 지면을 박차고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치마츠가 고개를 들자, 하얗게 질린 카라마츠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카라마츠의 숨소리가 들렸다. 카라마츠의 눈은 우는 것 같기도 했고, 또 겁에 질린 것 같기도 했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카라마츠는 잠깐 그런 눈으로 이치마츠의 얼굴을 바라보다 이치마츠의 손을 잡았다. 온기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시린 손이었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손을 들어 자신의 입을 가리켰다. 파랗게 핏기가 가신 입술이 열렸다. 카라마츠는 아주 천천히 입을 움직였다.

노력할게.

이치마츠는 멍하니 그 입술을 보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잠깐 이치마츠의 대답을 기다리다, 다시 입을 움직였다.

노력할 테니까. 사랑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

 

바다 밑바닥에는 뭐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바닷물을 한참 파헤치고 들어가도 그 무겁고 부드러운 물이 머리 위로 쏟아져서, 그 안에 잠겨있으면, 단념하게 된다. 그 시퍼렇고 깊은 곳에 뭐가 있는지, 내가 꿈꾸고 바라던 것이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저 이대로도 나쁘지 않겠구나, 하고

강당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이치마츠가 멀쩡한지 보러간 거겠지. 오소마츠는 강당 문을 닫았다. 강당 안에 쥐죽은 듯한 적막이 흘렀다. 오소마츠는 강당 무대 앞으로 걸어가 딱 하나 세워져 있는 간이 의자에 앉았다. 의자는 정면, 무대를 향해 세워져있었다. 카라마츠가 앉기 위해 세워둔 의자가 아니다. 오소마츠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고 텅 빈 무대를 노려보았다. 새빨간 벨벳 커튼으로 가려진 저 구석에서 카라마츠가 과장된 몸짓으로 걸어 나오길 바랐다. 오랜만에 그의 무대에 관객이 온 걸 보고 카라마츠가 뛸 듯이 기뻐하며 그가 좋아하는 대사 몇 마디를 읊조리길 바랐는데. 배우는 무대를 비웠고, 관객은 하염없이 연극이 시작하길 기다렸다. 강당은 카라마츠의 구역이었다.

수면실과 도서관은 같은 층이었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를 지나쳐 걸어가더니 도서실 문을 잡고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카라마츠를 돌아보았다. 이치마츠의 도서관에 들어가는 것도 오랜만이다. 이치마츠가 두꺼운 문을 잡아 열었고, 카라마츠에게 얼른 들어가라며 눈짓을 하곤 뒤를 돌아보았다. 아마도 오소마츠가 신경 쓰이는 거겠지.

거대한 도서관이었다. 예전엔 카라마츠도 연극대본을 찾겠다고 들락날락했었는데, 형제들의 구역이 하나 둘 정해지기 시작하면서 이 도서관이 잠정적으로 이치마츠의 구역이 되자 카라마츠는 자연히 발길을 끊었다. 이치마츠가 먼저 도서관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던 건 아니지만, 뭐랄까, 도서관은 이치마츠의 사적인 공간처럼 느껴졌다. 책들이 카라마츠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는 다르게 정리되어 있는 것 같았다. 카라마츠는 눈앞에 있는 책장으로 다가가 책등에 적힌 제목을 훑어보았다.

도서관에는 카라마츠의 키보다 한참 높은 책장들이 못해도 이삼백 개는 들어차있었다. 예전에 이치마츠와 카라마츠가 수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책장 개수를 세었던 것 같은데 하도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나질 않았다. 바닥에는 때가 탄 건지 아님 원래 그 색이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회갈색의 카펫이 깔려있었고, 벽은 짙은 보라색이었다. 카라마츠는 책을 한 권 꺼내 위에 쌓인 먼지를 후, 하고 불었다.

책 읽을 시간 없어.”

이치마츠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카라마츠는 깜짝 놀라 책을 책장에 내려놓았다. 바닥에 깔린 카펫 때문에 이치마츠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치마츠는 책장 그림자 안에 서서 카라마츠의 손목을 잡아 이끌었다. 이치마츠의 손이 차가웠다.

여기서 여태까지 읽었던 책들 기억나?”

이치마츠가 카라마츠의 손목을 잡고 책장 사이사이를 빠르게 걸었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가 걷는 속도에 맞춰 따라가느라 발이 꼬였고, 헛디뎌 책장에 어깨를 부딪쳤다. 그러면 이치마츠는 멈춰 카라마츠가 아픈 어깨를 매만지는 걸 잠깐 기다려주다가, 다시 카라마츠의 손목을, 아니 이젠 손을 꼭 잡고 책장 사이사이를 걸었다. 어느새 책이 차있는 책장의 숲은 끝났고 하얗게 먼지가 쌓여가는 빈 책장의 구역이 시작됐다. 종이가 누렇게 삭는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 많이 읽었었지.”

이치마츠는 점점 더 빠르게 걷기 시작해 거의 달리는 것에 가까웠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손을 잡고 따라 달리면서 간신히 대답했다. 카라마츠의 취미는 거의 이치마츠와 함께 시작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전등 하나를 켜 놓고 나란히 앉아 책 한권을 나누어 읽었다. 카라마츠가 빨간 모자가 되면 이치마츠는 늑대가 되었고, 카라마츠가 앨리스가 되면 이치마츠는 정신없이 시계를 보는 토끼가 되었다. 이치마츠는 늘 주인공 역할을 양보해주는 착한 동생이었다. 두 사람은 도서관 구석에 모여앉아 소곤소곤 그들이 알지 못하는 단어를 읽어 내려가곤 했다. 이치마츠도 그때 생각을 하고 있을까. 카라마츠는 이치마츠가 이어서 뭐라고 얘기를 해주길 바랐지만 이치마츠는 말없이 달리기만 했다. 어느새 도서관의 끝이 보였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를 한번 돌아보고 카라마츠의 손을 놓고 달려가 벽의 스위치를 눌렀다.

천장에 매달린 전등들이 동시에 켜졌다. 그들이 책을 읽을 때는 입구에서 가까운 책상위에 놓인 스탠드를 켰고, 책이 있는 서가가 얼마 되지 않아 이렇게 도서관 전체를 밝힐 일이 거의 없었다. 카라마츠는 눈이 부셔 눈을 반쯤 감고 이치마츠를 돌아보았다. 이치마츠가 상기된 얼굴을 하고 카라마츠를 돌아보곤 책장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잘 봐, 카라마츠.”

카라마츠가 손바닥으로 전등 불빛을 가리고 책장을 돌아보았다. 텅 빈 책장들이 빽빽하게 들어차있었다.

너무 많은 책장들이 비어있다고 생각해본 적 없어?”

이치마츠가 카라마츠에게 다가와 카라마츠가 전등 불빛을 가린 손을 억지로 잡아 내렸다. 밝은 불빛에 카라마츠는 눈을 제대로 뜰 수조차 없었다. 이치마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누군가 책을 다 빼버린 거야.”

누가? ?”

아마도 아버지겠지. 책을 왜 빼버렸는지는 알 수가 없어. 그렇지만 어떤 책들이 있었는지는 대충 짐작이 돼.”

우리가 읽은 책들 말고? 그리고 불 좀 끄면 안 될까?”

이치마츠가 벽으로 돌아가 스위치를 눌러 껐다. 다시 도서관 안이 어두워졌다. 카라마츠는 눈물이 맺힌 눈을 깜빡이며 초점을 맞추려고 이리저리 눈을 돌렸다. 이치마츠가 다가와 카라마츠의 손목을 잡았다.

우리가 본 책들은 아주, 아주 한정된 것들이었어. 어릴 때 읽던 이야기책이나 소설, , 희곡. 그러니까 오로지 시간 때우기로 읽기 위해서 존재하는 책들이었다고.”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게 아닌 책들이 있어?”

이치마츠가 고개를 끄덕이고 이번엔 천천히 책장 사이를 걸어갔다.

읽었던 책을 다시 읽고, 또 읽고 하는 걸 반복하다 보니까 이상한 게 눈에 보이기 시작했어.”

이상한 거?”

책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필요에 따라 책을 읽는다는 묘사가 나오는 거야. 의사는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서 치료법이 쓰여 있는 책을 읽고, 변호사는 피고를 변호하기 위해 법이 쓰여 있는 책을 읽어. 그리고 과학자는 발명을 하기 위해 과학에 관한 내용이 쓰인 책을 찾아 읽고. 그런데 이 도서관에는 그런 책이 단 한권도 없었어.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이치마츠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그저 아버지가 문학 서적만을 위해 도서관을 짓고 책장을 가져다 두었다고 하기엔 빈 책장들이 너무도 많았고, 이치마츠의 말대로 그런 내용의 책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럼 그 책들은 다 어디에 있을까. . 카라마츠가 이치마츠를 돌아보았다. 이치마츠의 눈에 희미한 열기가 비쳤다.

그게 아버지 서재에 있다는 건가?”

아마도.”

아버지는 그걸 왜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으려고 하셨던 거지?”

내 생각엔,”

이치마츠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 책들을 읽게 되면 아버지의 말을 의심하게 되고, 아버지가 우리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것들을 깨닫게 될까봐 두려웠던 게 아닐까.”

카라마츠는 묘한 죄책감을 느꼈다. 아버지를 의심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카라마츠가 살아온 삶의 기반을 뒤흔드는 것과 같았다. 카라마츠와 형제들은 아버지의 밑에서 아버지의 말에 따라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이십년을 살았고, 지금도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와 별반 다를 바 없이 생활을 유지해오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머리에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에 뭔가가 스며들어오고 있었다.

아버지 서재에 들어가 보자.”

안 돼.”

카라마츠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대답이 먼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버지의 서재에 들어가지 말라는 건 규칙이었다. 그리고 오소마츠는 거기에 그가 생각하는 벌 중에서 가장 엄한 벌인 독방행을 내걸고 있었다. 그러니 이건 매우 중요한 규칙이었고, 카라마츠는 이를 어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치마츠가 아랫입술을 깨물고 카라마츠를 노려보았다. 카라마츠는 순간 당황해 변명을 해야 되나 하고 생각했지만 카라마츠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일상에 작은 즐거움은 나쁘지 않다. 카라마츠가 오소마츠와 입을 맞추거나 가끔 그 이상을 하는 건 다른 형제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아니었고, 규칙을 어기는 것도 아니었으며 재밌는 일이었다. 그렇게 단 둘이서 시간을 보내고 나면 오소마츠는 카라마츠에게 더 다정하게 대했으며 카라마츠는 그런 오소마츠가 좋았다. 그러나 이치마츠가 지금 카라마츠에게 제안하는 것은 모두의 생활을 의심하고 규칙을 어기며 오소마츠의 신뢰를 저버리는 일이었다. 이야기책이 아닌 다른 책들의 존재라는 건 확실히 카라마츠의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카라마츠는 이 방주의 구성원으로서, 그리고 네 동생의 형으로서, 오소마츠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동생으로서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각자의 자리를 잘 지켜야 그들은 싸우지 않고 이십 년을 더 살아갈 수 있었다.

오소마츠 때문에 그래?”

이치마츠의 목소리에 날이 서있었다. 카라마츠는 지금 여기서 오소마츠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고 대답을 하면 안 그래도 나쁜 두 사람사이의 관계가 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갈라지지 않을까 싶어 망설였다. 그러나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침묵을 읽어낸 모양이었다.

왜 오소마츠한테만 그러는 거야?”

오소마츠한테만 뭘? 이치마츠가 책장에 기대 고개를 숙였다. 어깨가 힘없이 늘어져있었다.

너랑 가장 시간을 많이 보낸 건 나잖아.”

이치마츠의 어리광인가. 카라마츠는 다가가 이치마츠의 어깨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손을 잡아당기면서 카라마츠를 책장으로 밀쳤다. , 하는 소리가 도서관 안을 울렸다가 사라졌다.

다른 애들이 그림이니 음악이니 하는 거나 들여다보고 있을 때 우린 여기에 있었는데.”

이치마츠는 억울해하는 것 같았다. 카라마츠는 어린 이치마츠가 울먹이며 안아달라고 하던 것이 다시 떠올랐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가 잡지 않은 손을 들어 이치마츠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얹었다. 이치마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카라마츠가 연극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무대가 있는 강당에 자리를 잡자 이치마츠는 카라마츠가 멀어진 것처럼 느껴졌을 거고, 그게 좀 서운했던 모양이었다. 마주치는 시간이 줄어들고 또 함께 있는 시간엔 다른 형제들도 있었으니 솔직하게 얘기하기도 어려웠을 거고, 그러다보니 점점 얘기하기가 어려워지고. 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오소마츠가 책임을 맡게 되면서 카라마츠는 오소마츠를 도와 동생들을 돌보고 생활을 꾸려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오소마츠와 많은 시간을 보내곤했다. 그 이전엔 이치마츠의 말대로 카라마츠와 이치마츠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으니 그만큼 카라마츠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겠지.

이치마츠는 카라마츠가 어깨에 손을 얹자 뭔가 더 말할 것처럼 숨을 들이 쉬었다가 카라마츠의 손목을 놓고 그를 끌어안았다. 이치마츠의 손이 카라마츠의 등을 긁듯 더듬어 꽉 붙잡았다. 카라마츠는 숨이 막힐 것 같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이치마츠의 등을 토닥였다.

나랑 여기서 나가자.”

이치마츠가 속삭였다. 카라마츠는 단번에 이치마츠가 말하는 곳이 도서관이 아님을 알았다. 그리고 그가 이치마츠를 멈춰야 한다는 것도. 카라마츠는 아무 대답없이 이치마츠의 뒷머리를 쓰다듬다 이치마츠의 뺨에 짧게 입을 맞췄다. 

어느 아침, 눈을 뜨니 눈앞에 연한 노란빛의 천장이 있었다. 천장이 노란색이라는 건 어머니에게 들어 알고 있었기에 그게 노란색임을 알았다. 언젠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회색이 아닌 다른 색의 천장을 보리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그게 오늘이어서는 안됐는데. 나는 멍하니 누워 천장을 하염없이 노려봤다. 계속 노려보고 있으면 그게 회색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천장은 그대로 노란색이었다. 아니, 누군가 천장을 회색에서 노란색으로 바꾼 게 아니다. 그저 내가 진실을 마주하게 되었을 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곁을 돌아보았다. 일 년 전인가, 우리 중에 가장 먼저 첫사랑을 하게 된 토도마츠가 꿈꾸는듯한 표정으로 형제들에게 방안에 있는 것들의 색깔을 하나하나 가르쳐주었다. 창문은 짙은 갈색이고, 희끄무레한 색의 창문을 열면 짙푸른 색의 나무들 사이로 불그스름한 태양이 천천히 떠오르고, 그 햇살이 잠기운에 어두컴컴한 방안을 비추면. 나는 고개를 돌렸다. 저 이불 끝자락에 네가 있었다. 너는 희지도 검지도 않았다. 어둔 푸른색이었다.

 

나는 거짓말을 하는데 서툴러 비밀을 오래 간직할 수가 없었다.

? 쵸로마츠가 2등이라고? 말도 안 돼!”

오소마츠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젓가락을 휘둘렀다. 다들 어이없다는, 그리고 질투난다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해 허겁지겁 밥을 씹어 삼켰다. 형제들 중 누군가가 대체 내 상대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나는 둘러댈 방법이 없었다. 아니, 오늘 새벽부터 한참동안 고민을 해봤지만 네 앞에서 다른 사람의 이름을 대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자리를 피할 생각만 하고 있었다. 멍청한 자존심, 가련한 고집.

그 행운의 주인공은 누구지, 쵸로마츠?”

아직 잠이 덜 깨 잠긴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나는 밥그릇에 든 것을 입으로 다 털어놓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오늘 주번이라서. 먼저 갈게.”

양치 안 해?”

학교 가서 할 거야.”

챙겨 입은 교복이 내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뒤로 형제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내 눈을 뜨게 해준 사람이 같은 반일거라고. 같이 주번을 할 여학생이라던가. 현관문을 닫았다. 눈앞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잠깐 걱정을 접어두고 세상 구경을 했다.

가로수에 매달린 나뭇잎은 손끝으로 톡 건드리면 쏟아질 것 같은 진한 녹색이었다. 도로 위를 따라 달리는 노란색, 빨간색의 자동차들, 보드라운 주황색의 고양이들. 그리고 머리 위로 끝도 없이 투명한 하늘이 솟아 있었다. 길옆으로 반짝이며 흐르는 저 시냇물을 수천 겹 쌓아올리면 저렇게 깊고 푸른 하늘빛이 되지 않을까. 순간 새벽에 봤던 네 얼굴이 떠올랐다.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파란색으로 그늘진 얼굴은 아무 근심걱정도 없다는 표정으로 잠들어있었지. 나는 길가에 서서 눈을 꼭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여전히 세상은 오색찬란한 빛깔로 반짝이고 있었다. 사랑을 눈으로 확인한다는 건 복잡한 기분이었다.

 

첫 음악수업이었다. 우린 다른 반이었지만 B반과 C반이라는 이유로 음악수업을 함께 들었다. 음악선생은 출석부에 마츠노가 둘인 것을 보고 우리가 전교에 소문이 자자한 쌍둥이들이라는 걸 알아챘고, 곧 환하게 웃으며 나와 카라마츠를 맨 앞자리에 나란히 앉혔다.

여섯 명이 다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정말 똑같이 생겼구나!”

구경거리가 되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나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수줍게 웃었다. 예체능 전공으로 대학을 갈 게 아니었기에 음악 성적이 그렇게까지 중요하지는 않았지만, 음악 선생은 다른 교사들에게 이런 저런 소문을 퍼뜨리기로 유명했다. 어차피 다른 형제들이 중학교에서 그랬던 것처럼 온갖 말썽을 피우며 점수를 깎아먹겠지만 나는 다른 형제들과는 다르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다른 형제들보다 더 공부를 잘하고,

두 마츠노 군 중에 하나가 노래를 잘 부른다고 들었는데.”

사회생활도 잘하고,

접니다.”

더 평범하고,

그럼 카라마츠 군이 한 곡 불러볼래?”

더 똑똑하고,

기타도 쳐도 될까요?”

더 정상적이라고.

 

네 노래를 들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 우린 쌍둥이고, 신체기관 하나하나가 완전히 똑같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텐데, 너는 왜 이렇게 나와 다를까. 네 목소리는 왜 이렇게 깊고, 맑고, 듣는 사람의 심장을 녹여내는지. 네가 1분 남짓 노래를 하는 동안 나는 맨 앞자리에서 네 숨소리를 들으며 냉정하게 생각해보려고 노력했어. 너는 작년부터 기타를 배우러 다녔고, 나는 도서관에서 늦게까지 공부를 하다가 오느라 네가 기타를 치는 걸 거의 보지 못했다고. 너는 운동도 열심히 해서 나보다 폐활량이 좋았을 거고, 그래서 노래를 잘하는 거라고.

아니, 나는 그렇게 앞뒤를 따져볼 수가 없었어. 네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기타를 내려놓고, 음악선생이 호들갑을 떨며 칭찬을 하고, 그리고 다시 내 옆으로 돌아와 앉았을 때 나는 내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걸 깨달았어. 네가 불렀던 싸구려 유행가가 귓가에서 맴돌았고, 자기 전에는 기타 줄을 튕기는 손가락이 눈앞에서 어른거렸지. 그때부터 걱정을 하기 시작했어. 너 말고 다른 사람은 눈 안에 들어오지 않는 이 때 내가 색을 보게 될까봐.

 

하루종일 형제들을 피해 다녔다. 이치마츠와 함께 듣는 미술수업엔 몸이 아프다고 빠지고 양호실 침대에 숨어있었고, 점심시간에는 그늘진 운동장 구석에서 형제들에게 둘러댈 수 있는 핑계거리를 생각해내느라 하루 종일 골머리를 썩였다. 사실 같은 반 여자애 이름을 아무거나 둘러대면 끝날 일인데 다른 사람 이름을 입에 올리려고 하면 얼굴 표정이 일그러져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라는 게 들통나버릴 것 같았다. 손발이 차갑게 식어있었다. 나는 얼음물에 한참 담갔던 것 같이 시린 손으로 열 오른 뺨을 식히다 문득 같은 반 애들 사이에서 퍼졌던 소문이 떠올랐다. 학교 정문에서 나와 두 블록정도를 가면 보이는 허름한 가게에선 다른 가게에선 구할 수 없는 것들을 판다고. 담배도, 술도, 그리고,

 

약을 먹어서 볼 수 있던 거야.”

나는 자켓 주머니에서 약봉투를 꺼내 형제들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그런 약을 진짜 팔아?”

, 들어본 적 있어. 진짜 사랑에 빠진 것처럼 들뜬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던데, 진짠가보네.”

형제들은 내 손에서 약봉투를 빼앗듯 가져가 바닥에 부었다. 약은 둥글고 납작한 하얀색이었다. 색을 보게 해주는 약이라고 하기엔 너무 평범하게 생긴 모양새였다. 가격도 터무니없이 비쌌고.

이거 불법 아냐?”

이치마츠가 의심스럽다는 듯 약봉투를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그렇겠지. 약사가 주는 게 아니었으니까.”

도대체 이런 약은 어떻게 만드는 걸까?”

쥬시마츠가 약을 한 알 집어 들어 혀끝으로 살짝 핥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

먹으면 기분이 좋아져서 애들이 사다가 먹나봐. 그리고 색을 계속 보려면 매일 먹어야 하고.”

나는 카라마츠의 시선을 피하며 토도마츠의 곁에 주저앉아 약을 한 알씩 주워 봉투에 담았다.

체리마츠가 진짜 사랑에 빠진 게 아니라니, 재미없어.”

약을 먹어서 색이 보이는 거면 2등도 아니지 않아?”

편법이지! 스테로이드다!”

역시 체리마츠, 난 또 진짜 연애하는 줄 알았다니까.”

그렇지만,”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카라마츠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쵸로마츠는 들뜬 표정이 아닌걸.”

나는 약봉투를 내려놓고 걸어가 방을 나섰다. 방문 너머로 형제들이 약을 먹어보자며 떠들썩하게 노는 소리가 들렸다.

들뜬 순간은 아주 잠깐이었어, 카라마츠. 흑백이 아닌 진짜 세상을 보게 되어서 기쁜 것보다 내가 이 감정을 변명해야 하고 거짓말을 해야 된다는 부담이 더 컸고, 또 그 거짓말을 이 서투른 감정이 식을 때까지 질질 끌고 가야 한다는 슬픔이 더 무거웠어. 나는 그랬어.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카라마츠가 색을 보게 되었다고 새벽부터 형제들을 깨워 자랑을 했다. 상대는 연극부 선배로 대단한 미인은 아니었지만 카라마츠는 선배가 버림받은 여자 연기를 하며 눈물을 흘리는 걸 보고 자신이 선배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그 눈물을 닦아주고, 그 사람은 선배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설득하고 싶었다고. 나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그날 학교 수업을 마치고 길을 한참 걷다보니 그 가게 앞이었다. 날은 어두워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지고 있었고, 나는 주머니를 더듬어 용돈이 얼마나 남았는지 생각해보았다. 약은 여전히 비쌌다. 나는 더도 덜도 말고 딱 열 알을 사서 책가방 깊숙한 곳에 쑤셔 넣었다

오늘 밤엔 사랑하는 꿈을 꾸고 싶었다

 

아얏!”

, 하고 통조림이 가득 든 나무상자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쵸로마츠는 색깔별로 쌓고 있던 통조림을 내려놓고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토도마츠가 오른손 검지를 왼손으로 꽉 붙들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쵸로마츠는 눈을 잔뜩 찌푸리고 토도마츠의 손가락에 무슨 상처라도 났는지 보려고 했지만 너무 멀어 보이지 않았다. 쵸로마츠의 곁에서 통조림을 나눠 쌓고 있던 쥬시마츠가 들고 있던 걸 모조리 바닥에 집어던지고 창고를 가로질러 달려갔다. 쥬시마츠의 다급한 발소리와 통조림이 쏟아지는 소리가 창고 안에 가득 울려 퍼졌고, 바닥에 깔린 먼지가 풀썩 일어났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토도마츠! 괜찮아?”

쥬시마츠가 순식간에 토도마츠의 곁에 달라붙어 토도마츠의 손가락을 들여다보았다. 피가 나는 건가? 붕대는 부엌 찬장에 있었다. 쵸로마츠는 손에 끼고 있던 면장갑을 벗어 그 자리에 내려놓고 옷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었다. 크게 다친 건 아닌 것 같으니 붕대만 가져오면 되겠지? 쵸로마츠는 다시 토도마츠를 흘끔 돌아보았다. 쥬시마츠가 한껏 진지한 표정을 하고 토도마츠의 손가락을 이리저리 들여다보고 있었고, 토도마츠가 좀 훌쩍거리는 것 같더니 바지에 손가락을 쓱쓱 문질러 닦았다.

붕대 가져올게.”

얼른 갔다 와!”

쥬시마츠가 손을 흔들었다. 오늘 오후 노동은 이 정도에서 마무리를 해도 될 것 같았다. 일해야 하는 시간을 다 채우지 못한 게 좀 찝찝했지만, 창고 정리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지금 세 명이나 자리를 비운 상태니까 나머지 세 명만 일하는 건 억울하지. 쵸로마츠는 뻣뻣한 목을 풀면서 창고 문을 나섰다.

많이 아파?”

못이 튀어나와있을 줄 몰랐어. 저거 망치로 튀어나온 부분 좀 눌러놔야겠다.”

오는 길에 망치도 들고 와야겠군.

 

카라마츠는 순식간에 미지근해진 물수건을 찬 물이 담긴 대야에 넣고 더운 기가 가시길 기다렸다. 물수건을 계속 빨았더니 대야에 담긴 물도 점점 미지근해져 물수건을 한 번 더 빨면 물을 새로 떠와야 할 것 같았다. 아까 카라마츠가 이치마츠를 업고 와 자리에 눕히자마자 해열제를 먹였는데도 열이 내리질 않았다. 카라마츠는 새빨갛게 열이 오른 얼굴을 한참 보다가 마른 수건에 손을 닦고 이치마츠의 이마에 살짝 손을 얹었다. 동그스름한 이마가 뜨끈뜨끈하게 끓고 있었다. 대야에 담구고 있던 손이 시원했는지 이치마츠의 표정이 조금 풀어져서, 카라마츠는 양 손으로 이치마츠의 얼굴을 살살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잠을 자고 있는 건지, 아파서 앓고 있는 건지. 카라마츠는 답답했지만 이치마츠를 흔들어 깨울 수는 없었다.

약을 한 번 더 먹여야 되나? 아니면 다른 약을 먹여야 되나? 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약은 종류도 얼마 되지 않았고, 빨아서 계속 쓸 수 있는 붕대와는 달리 소모품이었기에 다들 아껴서 먹고 있었다. 이치마츠는 몸이 약해 툭하면 앓아누웠다. 그럴 때마다 카라마츠는 해열제를 타다가 먹이려고 했지만 오소마츠는 툭하면 약을 내주지 않았다. 도대체 두 사람은 왜 사이가 안 좋아진 거지?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얼굴에서 손을 떼고 대야에서 한참 식힌 물수건을 꺼내 물기를 짰다.

어렸을 땐 여섯 명이 다 같이 몰려다녔다. 특히 쥬시마츠가 형제들이랑 떨어지면 죽기라도 할 것처럼 울어재꼈기 때문에 쥬시마츠를 그들 가운데에 끼우고, 여섯 쌍둥이가 방주의 수많은 방들을 탐험하고 강당에 가득 쌓여있는 간이 의자들로 성을 짓고 놀았다. 의자로 얼기설기 쌓은 그들만의 성 안에 들어가면 카라마츠는 방주가 곧 세상처럼 느껴졌고, 그 성이 곧 그들을 구원해줄 작은 방주 같았다. 그 안에 형제들과 함께 들어가 있으면 가만히 있기만 해도 행복했다. 쥬시마츠가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그들 중에 가장 먼저 글을 깨친 이치마츠가 도서관에서 읽은 책 이야기를 더듬더듬 들려주기도 했다. 이치마츠가 일곱 난쟁이와 공주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오소마츠가 카라마츠의 손을 꼭 붙잡으며 난쟁이 같은 게 방주 안으로 쳐들어오면 자기가 다 물리치겠다고 속삭이던 게 엊그제 같은데,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고 방주 안이 답답해지기 시작하면서 형제들은 꼭 모여서 활동을 해야 할 때가 아니면 각자의 구역으로 들어가 나오질 않았다.

카라마츠는 있는 힘껏 물기를 짠 손수건을 펼쳐 이치마츠의 이마 위에 얹었다. 왕자의 입맞춤으로 공주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하며 자기도 공주와 뽀뽀를 하겠다고 눈을 반짝이던 동생은 어느새 아버지보다 큰 어른이 되어서 카라마츠가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짓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서재에 대체 뭐가 있기에 오소마츠가 잘 때도 손에 꼭 쥐고 놓지 않는 열쇠를 빼돌려 들어가려고 했던 걸까?

카라마츠는 순간 그 좁은 틈새로 이치마츠가 속삭인 말이 다시 떠올랐다. 우린 속고 있다고. 이치마츠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우린 누구에게 속고 있는 건데? 우린 어떤 거짓을 진실이라 믿고 있는 거야? 카라마츠는 대야를 저 구석으로 밀어놓고 이치마츠의 이불 밑으로 기어들어가 이치마츠를 조심스럽게 끌어안고 이치마츠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이치마츠의 온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어렸을 때부터 이치마츠의 병간호는 늘 카라마츠 담당이었다. 이치마츠는 자기 밑으로 동생이 둘이라고 형아 노릇을 하면서도 단 둘이 있을 땐 카라마츠에게 어리광을 부리곤 했다. 카라마츠가 어설프게 물수건을 짜 이마에 얹고, 물을 떠먹여주며 병간호를 하고 있으면 이치마츠는 팅팅 부은 눈으로 카라마츠를 돌아보며 안아달라고 울먹였다. 카라마츠가 이불 밑으로 들어가 이치마츠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거리다 보면 따뜻한 체온에 둘 다 골아 떨어져서, 잠에서 깰 무렵이면 이치마츠는 말끔하게 나아있었다.

안 비좁아?”

카라마츠가 그때 그랬던 것처럼 눈을 감고 잠에 막 빠져들려는 순간, 문가에서 오소마츠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라마츠는 간신히 눈을 떠 문가로 고개를 돌렸다. 오소마츠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심통난 표정으로 카라마츠를 보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조금 민망해져 일어나 앉았다. 문밖에서 찬바람이 들어오는 게 느껴졌는지 이치마츠가 몸을 돌려 카라마츠의 다리에 팔을 둘러 안았다.

열이 내리질 않아서 안아주고 있었어.”

변명할 필요 없어. 그런 거 따지려고 하는 거 아니니까.”

오소마츠가 수면실 문을 닫고 들어와 카라마츠의 옆에 주저앉았다. 그리곤 바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이치마츠의 머리맡에 툭 던졌다. 해열제였다. 카라마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오소마츠와 이치마츠가 툭하면 으르렁거리고 싸우긴 해도 둘은 형제였고, 오소마츠도 동생을 아끼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나중에 이치마츠가 일어나면 오소마츠가 약을 챙겨주더라고 넌저시 말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면 이치마츠도 오소마츠에게 고마워할 거고, 그럼 삐죽삐죽하게 세웠던 가시도 조금 수그러들겠지.

오소마츠는 손이 시리다는 듯 양손바닥을 비비다 이불 밑으로 집어넣었다.

오후 노동은 빠진 거야?”

너랑 이치마츠가 걱정된다고 약 갖다 주고 오겠다고 하고 빠졌어. 쵸로마츠도 별수 없이 보내줬지 뭐.”

카라마츠는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오후 노동이 끝날 시간이었다.

 

오후노동은 그들이 열 살이 됐을 때부터 해왔던 오랜 일과였다. 방주 안에 어딘가를 보수하거나 그들의 생활 유지를 위해 특별히 해야 할 일이 없으면 그들은 창고 안에 모여 물건들을 옮겼다. 방주 꼭대기에서부터 네 번째 되는 층에 창고가 있었다. 창고는 강당보다도 넓었고 천장이 한참 높았다. 창고 안에는 그들이 이 곳에서 살아가며 쓸 모든 물건들이 들어있었다. 수십 년 동안 먹을 통조림, 그들 여섯 명을 위해 준비된 옷과 신발, 자질구레한 생활용품들과 방주를 적절하게 유지하기 위한 물건들이었다. 아버지는 형제들이 열 살이 되자 작은 면장갑을 양 손에 끼워주었다.

명령은 단순했다. 이 쪽에 있는 물건들을 저 쪽으로 날라라. 그리고 물건들을 전부 저 쪽으로 나르면 다시 이 쪽으로 날라라.

아마도 물건을 나르면서 남은 물자들의 수량을 파악하고 그들이 찾기 쉽게 정리를 하란 뜻이었을 것이다. 매일 형제들은 점심을 먹고 잠깐 쉬었다가 창고에 모여 세 시간동안 물건을 날랐다.

 

오소마츠는 한참동안 이불 밑에서 손을 녹였다. 걱정하고 있던 게 해결되고 나니 카라마츠는 마음이 편해지기도 했고, 또 아까 이치마츠를 업고 뛰느라 긴장했던 근육이 슬슬 풀려 피로가 몰려왔다. 그걸 눈치 채기라도 한 것처럼 오소마츠가 손을 뻗어 카라마츠의 어깨를 끌어당겨 그에게 기대게 했다. 카라마츠는 형의 넓은 어깨에 기대 온몸에 힘을 빼고 축 늘어졌다. 오소마츠도 이치마츠에게 싫은 소리 하는 거 힘들겠지. 카라마츠는 오소마츠에게 조금 더 가까이 붙어 오소마츠의 목을 끌어안았다. 오소마츠가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고, 곧 따뜻한 손이 카라마츠의 뺨을 어루만지다 감싸 안았다.

오소마츠.”

?”

오소마츠가 카라마츠의 이마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이치마츠랑 싸우지 마.”

오소마츠는 대답이 없었다. 카라마츠가 오소마츠의 대답을 기다리며 빤히 보고 있어도 오소마츠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 카라마츠의 코끝에 다시 입을 맞추고, 코끝에서 인중을 타고 내려와 카라마츠의 입술을 살짝 물었다. 부드러운 입술 새로 더운 숨이 느껴졌다. 카라마츠는 고개를 모로 조금 틀어 살며시 눈을 감았다. 따뜻한 손이 카라마츠의 후드 밑으로 슬금슬금 들어오고 있었다.

 

카라마츠가 저녁을 먹고 다시 수면실로 돌아오자 이치마츠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있었다.

이제 깼어? 몸은 좀 어때?”

목말라.”

이치마츠의 목소리가 버석버석하게 말라있었다. 카라마츠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부엌으로 가 물통에 물을 가득 채워왔다. 아직 얼굴이 빨갛긴 했지만 아까보다는 한결 나은 모습이었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곁에 앉아 컵에 물을 조금 따라 내밀었다. 이치마츠는 컵을 받아드는 것도 힘에 부치는지 간신히 컵을 들고 있다가 천천히 들어 입술에 댔다.

아까 오소마츠 형이 약 갖다 줬어.”

이치마츠가 들고 있던 컵을 내려놓고 옷소매로 입가를 닦았다.

더 마실래?”

됐어.”

물을 많이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하지만 이치마츠는 컵을 이불 옆으로 치워버렸다. 이치마츠는 아무 말이 없었다. 사실 카라마츠도 이치마츠가 오소마츠에게 고맙다는 얘기를 하리라고 믿지는 않았지만, 이치마츠는 기분이 확 상했다는 얼굴로 방구석을 노려보고 있었다. 천천히 화해하면 되겠지.

있다가 물 더 마시려면 마셔.”

.”

카라마츠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내가 했던 말 기억 안나?”

, 깜빡하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이불에서 조금 물러나 앉아 대답했다.

우리가 속고 있다고?”

이치마츠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두침침한 방 안에 작은 환풍기가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가 뭔가 설명을 해주리라고 기대했는데, 이치마츠는 말없이 카라마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라마츠가 먼저 질문을 해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누가 우리를 속이고 있는데?”

누굴 거 같아?”

글쎄, 여기엔 우리밖에 없으니까. 우리 중 누군가가…….”

이치마츠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곤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카라마츠에게 다가왔다.

이치마츠, 좀 더 누워있어. 한참 앓았다니까.”

그러나 이치마츠는 쓰러지듯 카라마츠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카라마츠의 멱살을 잡았다.

도서관으로 가자.”

도서관은 이치마츠의 구역이었다





















사실과 맞지 않는 설정오류 같아보이는게 있죠! 저도 알고 있습니다 뒤에가서 설명할게요!!

토도마츠는 수도꼭지를 돌려 물을 한 컵 받아 마시다가 고개를 들었다. 복도에서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어제 식사 당번은 쵸로마츠였다. 그러니 오늘은 이치마츠의 차례였는데, 이치마츠가 잠시 자리를 비웠으니 쥬시마츠에게 순서가 넘어갔겠지. 과연 부엌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고, 품에 통조림을 가득 안은 쥬시마츠가 뛰어 들어왔다.

토도마츠! 좋은 아침!”

쥬시마츠 형, 바구니 들고 가라니까? 봐봐 후드 주머니 다 늘어지잖아?”

토도마츠는 피식 웃으면서 쥬시마츠의 후드를 가리켰다. 쥬시마츠는 매번 창고에 통조림을 가지러 갈 때마다 바구니를 가져가는 걸 잊곤 했다. 쥬시마츠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들어와 식탁에 품에 안고 있던 통조림을 쏟아내고 후드 주머니 안에 든 통조림도 꺼내 쌓았다.

오다가 흘리진 않았고?”

안 흘렸을걸? 한번 세볼까!”

쥬시마츠가 식탁 의자에 앉아 통조림을 색깔별로 분리했다. 하얀색과 빨간색과 녹색. 토도마츠도 쥬시마츠를 마주보는 자리에 앉아 통조림의 개수를 셌다. 하얀색이 여섯 개, 빨간색이 여섯 개, 녹색이 여섯 개.

, 지금 이치마츠 형은 자리에 없잖아? 다섯 개씩 가져와야지.”

토도마츠가 통조림을 한 개씩 빼 한쪽 구석으로 밀어두었다. 쥬시마츠는 아, 하고 그제야 깨달았다는 것처럼 고개를 들어 토도마츠와 눈이 마주쳤다가 도로 고개를 숙였다. 토도마츠도 더 이상 말하지 않고 통조림을 하나씩 끌어당겨 뚜껑을 따기 시작했다. 쥬시마츠가 이치마츠의 몫으로 가져온 통조림을 계속 돌아보았다.

하얀색 통조림은 ’, 빨간색은 고기’, 초록색은 야채였다. 형제들이 먹을 수 있는 식재료라곤 이 통조림들과 소금뿐이다. 여섯 명은 이십 년 동안 통조림을 조금이라도 맛있게 먹는 방법을 궁리해보았지만 제한된 환경에선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통조림을 색깔별로 나누어 푹 끓이거나, 아니면 굽거나. 그러나 맛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토도마츠는 밍밍하게 아무 맛이 나지 않는 하얀색 통조림을 전부 따서 식탁 한쪽으로 밀어두고, 빨간색 통조림을 땄다. 빨간색 통조림은 퍽퍽하고 질겼다. 언젠가 토도마츠는 아버지에게 이건 어떤 동물의 살이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무서운 얼굴로 빨간 통조림 뚜껑을 따 토도마츠의 얼굴에 들이밀고 대답했다.

이건 죄 없는 짐승이란다. 우린 지금 죄를 짓고 있는 거야.’

토도마츠는 빨간색 통조림을 먹으러 수저를 들 때마다 그 생각이 났다. 우리는 다른 짐승의 살점을 먹어야 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성장해 핵전쟁이 끝나고 완전히 깨끗한 세상이 도래했을 때 나갈 수 있다. 통조림 세 개를 한 번에 끓여 죽으로 먹을 때는 상관이 없었지만, 가끔 누군가 오기를 부려 통조림을 색깔별로 모아 불에 구워 올 때면 토도마츠는 죄책감이 들었다. 그 짐승이 어떻게 생겼을 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형제들에게 보여주는 책에는 그림이 하나도 없었고, 오직 글자만 빽빽하게 들어차있었다. 형제들이 책에 나오는 사자며 호랑이, 너구리, 돼지, 소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다고 아버지에게 물어본 적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나중에 그들이 이 방주를 떠나 정결해진 세상으로 돌아가면 그것들은 이미 다 죽고 없을 것이고, 새로운 생명체들이 그들을 기다릴 거라고, 사자고 호랑이고 전부 세상에 남아있지 않을 거라고. 혹시 핵전쟁이 일어날 동안 다른 동물들을 돌봐줄 사람들이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이 방주의 여섯 명은 지구에서 인간들과 함께 공존해온 생명체들의 마지막 흔적을 먹고 있는 게 아닐까? 토도마츠는 고개를 젓고 초록색 통조림의 뚜껑을 땄다.

쥬시마츠 형, 오늘은 어떻게 해먹을 거야?”

역시 끓이는 게 제일 나으려나! 아침을 빨리 먹어야 이치마츠 형을 빨리 데려올 수 있잖아?”

쥬시마츠가 잽싸게 마지막 통조림 뚜껑을 따 옆으로 밀어두면서 웃었다. 쥬시마츠는 형제들이 떨어지는 것을 제일 싫어했다. 좀 집착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지만, 글쎄, 토도마츠가 다른 형제들을 본 적이 없어 보통 형제들이 이렇게 다른 형제들을 아끼는 건지, 아니면 쥬시마츠가 여섯 명중에 유난히 유대감을 느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쥬시마츠가 찬장으로 달려가 커다란 냄비를 꺼내 물을 받았다. 조금 거들어줄까 아니면 형제들을 깨우러 갈까? 토도마츠는 잠깐 쥬시마츠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부엌을 나섰다.

방주는 뒤집어진 원뿔 모양으로, 그들 여섯 명이 차지하기엔 지나치게 넓은 감이 없잖아 있었다. 원뿔 한가운데는 뻥 뚫려 벽을 따라 계단이 둥글게 나있었고, 맨 꼭대기 층에서 고개를 쑥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보면 맨 아래층이 까마득하게 보였다. 토도마츠는 부엌에서 나와 2층으로 올라가면서 불이 들어오지 않는 전구들이 보이면 뽑아 후드 주머니에 넣었다. 그들이 어렸을 때는 계단 벽을 따라 둥근 전구들이 일렬로 박혀있어 훤히 밝았는데, 날이 가면 갈수록 전구의 개수가 줄어들었다. 토도마츠는 전구가 있었던 자리를 손끝으로 더듬어보며 꼭 젖니가 빠진 자리 같다고 생각했다. 전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창고 한 구석에는 전구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이 계단을 예전처럼 환하게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도 있었지만 형제들은 최소한의 전구만을 켜놓고 남은 전구들을 아껴두기로 약속했다. 토도마츠는 수면실 문 앞에서 잠깐 멈춰 서서 계단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천장을 올려다봤다.

천장에는 거대한, 그들이 살아오면서 본 그 어느 것보다도 거대한 바위가 방주의 입구를 막고 있었다. 바위는 꼭 잠자는 괴물처럼 그들의 머리 꼭대기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저 바위를 파수꾼이라고 불렀다. 그는 일주일에 한 번씩 저 바위 앞에 형제들을 앉혀놓고 바위를 그의 일곱 번째 아들처럼 사랑이 가득 담긴 눈으로 쓰다듬었다. 방사능도, 폭탄도, 심지어 사람들의 고통마저도 저 바위를 넘지 못한다고, 그리고 그들이 나갈 수 있을 때가 되면 바위가 저절로 열릴 것이라며 우리는 바위에게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토도마츠는 바위를 볼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혔다. 어느 방에 숨어있더라도 저 바위가 토도마츠를 노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는 자연히 바위 앞에서 모이는 일이 없어졌다. 가끔 이치마츠나 쥬시마츠가 바위 바로 밑에 앉아 멍하니 바위를 올려다보는 걸 보긴 했지만, 토도마츠는 바위 가까이엔 가지 않았다. 바위는 어떻게 열릴까. 토도마츠는 마른 침을 삼키고 침실 문을 열었다.

 

쥬시마츠는 순식간에 밥그릇을 비우고 형제들이 식사를 마치기만을 기다렸다. 카라마츠는 기계적으로 음식을 씹어 삼켰다. 쥬시마츠가 물을 많이 넣고 끓인 탓에 씹을 것도 없었지만 음식을 한참 씹다보니 잠이 좀 깨는 듯 했다. 다행히 오소마츠는 카라마츠의 외출을 눈치 채지 못한 듯 했다. 카라마츠는 자리에서 일어나 컵에 찬 물을 받아 한 번에 들이켰다.

카라마츠. 다 먹어.”

쵸로마츠가 카라마츠의 그릇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 잠깐 물만 마시려던 거였다.”

카라마츠는 컵을 내려놓고 자리로 돌아가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냥 후루룩 마셔버려도 될 정도로 음식이 묽었는데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쵸로마츠가 미간을 찌푸리고 카라마츠를 노려보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젓가락으로 음식을 휘휘 젓다가 그릇을 들어 꿀꺽꿀꺽 마셨다. 카라마츠가 괜한 고집을 부렸다간 쵸로마츠에게 한참동안 잔소리를 들을게 분명했다. 그러면 이치마츠를 데리러 가는 시간도 늦어질 거고, 어쩔 수 없지. 카라마츠는 구역질이 날 것 같은걸 참으며 그릇을 비웠다. 이치마츠가 걱정됐다. 어젯밤 카라마츠가 찾아갔을 때는 간신히 대답도 했지만 지금은 어떨지 몰랐다. 찬 바닥에서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불편한 자세로 있었으니 아플 게 분명한데. 카라마츠는 빈 그릇을 만지작거리며 오소마츠를 돌아보았다. 오소마츠는 아예 한쪽 턱을 괴고 졸고 있었다. 이치마츠가 걱정되지 않는 건가? 카라마츠는 마음이 급해 토도마츠에게 눈짓을 했다. 토도마츠가 한숨을 푹 쉬고 오소마츠를 흔들었다.

, 얼른 먹어. 다들 형 먹는 거 기다리고 있잖아?”

오소마츠가 멍한 눈빛으로 다른 사람들의 그릇을 돌아보고 자기 그릇을 들어 내용물을 마셨다. 쥬시마츠가 더 이상 버티질 못하고 다른 형제들의 그릇을 싹 걷어가 설거지를 시작했다. 오소마츠는 한참동안 그릇을 입에 대고 있다가 그릇이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자기 그릇을 내려놓았다. 조금 잠이 깬 눈빛이었다. 카라마츠는 고개를 살짝 돌려 오소마츠의 눈빛을 피했다.

오늘 조회는 누구지?”

!”

쥬시마츠가 손을 번쩍 들었다. 오소마츠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릇을 쥬시마츠에게 건네주고 벽에 기대 늘어져라 기지개를 폈다.

얼른 조회하고 넷째 데리러 가자. 더 늦어졌다간 카라마츠가 한 대 때릴 것 같아.”

쥬시마츠가 신나게 그릇을 헹궈 건조대에 올려놓았다. 쵸로마츠가 뭐라고 투덜거렸지만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방주의 맨 꼭대기 층에는 강당이 있었다. 형제들은 강당으로 올라가는 길에 침실에 들러 잠옷을 생활복으로 갈아입었다. 강당 문으로 들어서면 보이는 벽엔 한가득 빗금이 쳐있었다. 쥬시마츠가 손에 끌과 망치를 들고 달려와 벽 앞에 섰다. 그리곤 형제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오늘 하루도!”

오늘 하루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텅 빈 강당 안에 다섯 명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쥬시마츠는 어제 쵸로마츠가 친 빗금의 옆에 끌을 대고 망치로 끌 위를 툭 쳤다. 빗금이 깊었다. 형제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강당 문을 나섰다. 카라마츠는 쥬시마츠가 남긴 빗금 위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그들은 이제 스무 살이었다. 쥬시마츠의 빗금 옆으로는 벽이 반이나 텅 비어있었다. 저 벽을 가득 채워야 그들은 나갈 수 있었다. 카라마츠는 저 싸늘하니 새하얀 벽을 잠깐 응시하다가 형제들의 뒤를 따라 나섰다.

 

밑으로, 밑으로, 밑으로. 이치마츠의 기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카라마츠는 초조해 쥬시마츠의 팔을 붙잡고 오소마츠가 문을 여는 걸 지켜보았다.

카라마츠.”

오소마츠가 카라마츠를 돌아보고 말했다.

와서 네 동생 업어.”

. 카라마츠는 쥬시마츠의 손을 놓고 달려가 독방 문을 열어젖혔다. 그들이 문 여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을 텐데 이치마츠는 바닥에 모로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가쁜 숨소리가 들렸다. 쥬시마츠가 따라와 이치마츠의 손목을 묶은 끈을 풀겠다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쥬시마츠의 손이 덜덜 떨려 매듭이 풀리지 않았고, 지켜보던 쵸로마츠가 한숨을 푹 내쉬면서 다가와 밧줄을 풀었다. 카라마츠는 시퍼렇게 멍이 든 손목을 한참 주물렀다. 토도마츠가 오소마츠의 눈치를 보다가 다가와 이치마츠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펄펄 끓네.”

적당히 데려다 줘.”

토도마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소마츠가 말을 툭 내뱉고는 몸을 돌려 사라졌다. 카라마츠는 시퍼렇게 멍이 든 이치마츠의 손목을 한참 문지르다 손에 핏기가 돌자 이치마츠를 업고 독방을 뛰쳐나갔다. 이치마츠의 마른 몸이 힘없이 흔들렸다. 약을, 어떤 약을 써야 하지? 카라마츠는 이치마츠를 단단히 붙잡고 계단을 한 번에 두세 개씩 뛰어넘으며 달렸다. 귓가에 이치마츠의 뜨거운 숨이 스쳤다. 뒤에서 형제들이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치마츠, 이치마츠.”

카라마츠가 헉헉거리며 이치마츠의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이대로 이불을 덮어주고 자게 해도 되나? 아니면 뺨을 때려서라도 깨워야 돼?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버지처럼 이치마츠가 죽어버리면 어떡하지. 카라마츠는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버지가 죽자 오소마츠는 아버지보다 엄하게 형제들을 몰아세웠다.

우리는 쌍둥이고, 너희가 나를 아버지처럼 생각하진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어.”

오소마츠가 바위 밑에 형제들을 앉혀놓고 말했다. 이치마츠는 오소마츠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무릎을 세우고 앉아 오소마츠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우린 여기서 이십년을 더 살아야 되고, 모두 무사히 방주를 나가려면 규칙이 있어야 해.”

오소마츠의 허리춤에 매달린 열쇠뭉치가 쩔그렁거렸다.

 

오늘은 카라마츠가 당번이지?”

쵸로마츠가 교복에 묻은 먼지를 털면서 말했다. 이치마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쵸로마츠가 신발장 위에 놓여있던 열쇠를 휙 던져주었다. 이치마츠는 현관 옆 벽에 기대어 삐딱하게 쵸로마츠를 보고 있다 날아온 열쇠를 간신히 잡고 쵸로마츠를 째려보았다.

나 다리 부러진 거 안보여?”

야구하다가 부러뜨린 놈이 말이 많네.”

쵸로마츠가 피식 웃고 현관을 나섰다. 얄미운 놈. 이치마츠는 쵸로마츠의 뒤에 대고 가운데손가락을 내밀었다.

 

평소에 운동이라곤 간신히 학교에서 집 사이를 걸어 다니는 것 밖에 안하던 탓일까. 이치마츠는 깁스한 다리 위를 슬슬 만져보며 깁스를 풀면 꼭 운동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토도마츠가 하는 것처럼 조깅이라도 하면 도움이 될 텐데. 이치마츠는 현관 옆에 서서 엉겁결에 쵸로마츠, 토도마츠, 쥬시마츠, 오소마츠를 배웅했다. 처음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다 같이 학교를 다녔는데, 학년이 올라가자 각자 생활 패턴과 스케줄에 따라 움직이느라 여럿이서 학교를 가는 일이 드물었다. 이렇게 누구 하나가 다리 혹은 팔을 부러뜨려 자전거로 데려다 주는 게 아니라면.

, 이치마츠,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카라마츠가 한참 만에 방에서 나와 이치마츠의 가방을 받아들고 어깨에 멨다. 이치마츠는 아직도 빗질 자국이 남아있는 카라마츠의 뒤통수를 바라보다 손에 한참동안 쥐고 있던 열쇠를 집어던졌다. 열쇠는 카라마츠의 오른쪽 어깨에 맞고 툭 떨어졌다. 카라마츠는 놀라 뒤를 돌아보곤 바닥에 떨어진 열쇠를 집어 들어 교복 재킷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신발 신는 거 도와줄까?”

카라마츠가 현관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내밀었다. 괜히 싫은 생각이 들어 이치마츠는 신경질을 낼까 하다가 접고 순순히 바닥에 앉아 발을 내밀었다. 남자애 여섯이 사는 집의 신발장은 아무리 정리를 한다 하더라도 정신이 없다. 하지만 카라마츠는 그 신발 무더기에서 단번에 이치마츠의 신발을 골라내 조심스럽게 이치마츠의 발에 신발을 신겼다. 신발 뒤축을 정리한다고 카라마츠의 긴 손가락이 이치마츠의 발뒤꿈치를 스쳤다. 이치마츠는 잠깐 숨을 멈췄다가, 카라마츠가 손을 놓자 신발장을 붙잡고 일어나 현관으로 내려왔다.

그럼 가서 자전거 꺼내올게.”

카라마츠가 먼저 현관을 나섰다. 카라마츠가 문 밖으로 나가는 걸 보고 나서야 이치마츠는 참았던 숨을 휴, 하고 내쉬었다.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나랑 완전히 똑같을 저 손가락이, 저 등이, 저 어깨가 신경 쓰였다.

 

카라마츠가 자전거 경적을 울렸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자 찬바람이 훅 불어왔다. 이치마츠가 집 안과 밖의 온도 차이에 굳어있자 카라마츠가 자전거 바구니에 가방 두 개를 쑤셔 넣고 이치마츠에게 고갯짓을 했다.

지각하기 전에 얼른! 시간은 우릴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입만 다물면 참 좋을 텐데. 이치마츠는 절뚝거리며 자전거 뒷자리에 앉았다. 눈앞에 카라마츠의 넓은 등이 있었다.

이치마츠, 허리 붙잡아야지.”

카라마츠가 페달에 발을 올리고 말했다. 이치마츠는 천천히 양 팔을 내밀어 카라마츠의 허리를 감아 안고, 손에 깍지를 꼈다. 얇은 교복 셔츠와 재킷 너머로 납작한 카라마츠의 배가 만져졌다. 카라마츠가 숨을 쉴 때마다 배가 조금씩 움직였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만 손가락을 살짝 세워 손가락 끝으로 배를 덧그렸다.

꼭 잡았지? 그럼 간다!”

카라마츠가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아무리 카라마츠가 앞에 앉아 찬바람을 막아준다고 하더라도 둘은 키 차이가 나질 않아 팔 틈새로, 귀 너머로 바람이 휙휙 스치고 지나갔다. 이치마츠는 고개를 잔뜩 웅크리고 카라마츠의 등 뒤에 숨었다. 혼자면 모를까 이치마츠를 뒤에 매달고 있어서 그런지 카라마츠의 숨이 조금씩 빨라졌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등에 이마를 살짝 기댔다가 곧 한쪽 뺨을 갖다 댔다. 그 등이 따뜻해서, 이치마츠는 팔에 더 힘을 줘 카라마츠를 끌어안았다

저기 정문 보이네. 다 왔어, 이치마츠. 교실까지 가방 들어다줄까?”

학교 가는 길은 너무 짧았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등에 이마를 댄 채로 고개를 저었다.

정말? 그럼 있다가 수업 끝나고 데리러 갈까?”

나 죽을 병 걸린 거 아니거든. 그냥 신발장 앞에서 기다려.”

카라마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전거가 멈췄다. 자전거가 옆으로 조금 기울었고, 카라마츠가 한쪽 발을 땅에 딛고 자전거를 단단히 잡았다. 내려야겠지. 이치마츠는 손에 깍지를 풀었다. 팔 안에 가득 찼던 카라마츠를 놓는 게 아쉬웠다. 불편한 자세로 웅크리고 있어 뻣뻣하게 굳은 목을 풀고 자전거에서 내리자 카라마츠가 다시 자전거 페달에 발을 올리고 이치마츠를 향해 씩 웃어보였다. 카라마츠의 양 뺨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카라마츠는 바구니에서 이치마츠의 가방을 꺼내서 건네주었다.

그럼 있다가 학교 끝나고 보자!”

카라마츠가 손을 흔들고 자전거 핸들을 돌렸다. 이치마츠는 가방을 꼭 카라마츠의 허리처럼 품에 끌어안고 카라마츠가 다시 운동장을 가로질러 정문 경비실 옆에 있는 자전거 보관소로 가는 걸 바라보았다. 그들이 다니는 고등학교는 유달리 정문과 본관 사이의 거리가 멀었다.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아침 조회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카라마츠는 저기에 자전거를 묶어놓고 이 넓은 운동장을 뛰어 오겠지. 카라마츠가 경비 아저씨에게 인사를 하고 자전거에서 내리는 게 보였다. 카라마츠를 기다릴까. 지각이라고 소리치는 학생들이 이치마츠의 곁을 빠르게 스치고 달려갔다. 여기서 카라마츠를 기다린다고? 카라마츠가 왜 기다렸냐고 물어보면 무슨 핑계를 대려고? 카라마츠가 자전거를 묶어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치마츠는 황급히 몸을 돌려 신발장으로 걸어가 재빨리 신발을 실내화로 갈아 신고 계단을 올라갔다. 마음이 급해 다리가 불편한 줄도 몰랐다. 내가 왜 기다리려고 했지? 이치마츠는 교실 뒷문을 열면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답을 알 것 같기도 했고, 모르고 싶기도 했다

카라른 전력 60분으로 쓴 썰입니당 ㅇㅅㅇ)/ 카라른 최고








남자친구, 소개 안 시켜줘?”

난데없는 아웃팅이었다. 카라마츠는 입안에 머금고 있던 물을 모조리 흘려버리고 거칠게 기침을 했다. 언젠가 형제들에게 들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었지만, 이렇게 이를 줄이야. 카라마츠는 얼굴이 새빨갛게 되도록 콜록거리면서도 연신 고개를 돌려 혹시 다른 형제들이 들어오려고 하지는 않는지 기척을 살폈다. 다행히 이치마츠의 말을 들은 건 카라마츠뿐이었고, 다른 형제들은 빈 그릇을 나르고 후식으로 먹을 과일을 가져온다고 방을 비우고 없었다. 다행이다. 아니, 다행이 아닌가? 다른 형제들도 전부 알면서 시치미를 떼고 있는 게 아닐까? 카라마츠는 손이 벌벌 떨렸다. 입과 상의가 젖어 불쾌했다. 일단 이걸 다 닦고, 이치마츠가 잘못 알고 있는 거라고,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고 아무렇지 않게 둘러대야 하는데. 휴지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카라마츠는 자기도 모르게 옷소매를 당겨 입을 문질러 닦았다. 이치마츠는 턱을 괴고 카라마츠가 허둥지둥 하는걸 빤히 보고 있다 곁에 있던 티슈상자를 건네주었다.

진짠가 보네.”

이치마츠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 아니…….아닌아닌데…….”

글렀다. 순식간에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울고 싶지는 않았다. 동생에게 동성 애인을 들켜버린 주제에 울기까지 해버리면 카라마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비참해질 것 같았다. 왜 하필이면 이치마츠일까. 그제야 카라마츠는 그동안 이치마츠가 했던 호모포비아적 발언이 모두 카라마츠를 향하는 것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게 날 향한 칼이었다는 게, 상대가 형제라는 걸 알면서도 날카롭게 벼린 칼이라는 게 너무 아파서, 카라마츠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눈물이 눈꼬리를 따라 흘러 뚝, 떨어졌다. 카라마츠는 급히 티슈를 뽑아 대강 뭉친 다음에 양 눈을 아플 정도로 꾹 눌렀다.

 

호모새끼들은 다 죽여 버려야 돼.”

다 같이 모여 영화를 보던 와중에 이치마츠가 미간을 한껏 찌푸리며 내뱉듯 말했다. 카라마츠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 이치마츠가 알아버린 걸까? 카라마츠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고 노력하면서 음료수 컵을 들고 이치마츠의 눈치를 살폈다. 이치마츠는 이 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토도마츠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안 돼, 이치마츠 형. 사람들마다 사랑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라고? 나는 남자가 나만 좋아하지 않으면 되는데 말이지. 요샌 어디 가서 그런 말 했다간 욕먹어.”

그래. 다들 그렇게 생각하겠지. 카라마츠는 억지로 웃었다. 속이 쓰렸다.

카라마츠는 난생 처음 짝사랑 하던 상대와 이어져 새콤달콤한 첫사랑을 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형제들에게는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카라마츠가 사랑하는 그는 같은 반의 남학생이었기에. 다른 형제들이 서로에게 연애상담을 하고 좋아하는 여자애 얘기를 하며 신나하는 걸 카라마츠는 그저 부럽게 들을 수밖에 없었다. 나도 사랑을 하고 있어. 카라마츠는 몇 번이고 입을 열었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물었다.

사랑하는 그와는 영화 취향이 비슷해 주말이면 만나 영화를 보러 갔고, 학교가 끝나면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고 더위도 추위도 모를 정도로 딱 붙어 길을 걸었다. 그와는 정말 온갖 얘기를 나누었다. 학교생활, 언젠가 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 그리고 그의 소중한 형제들까지. 어느 인적 드문 골목에서 바들바들 떨면서 첫 키스를 하기도 했고. 학교를 졸업하면 같은 대학에 가고, 여느 룸메이트들처럼 자취방을 구해 함께 살자는 약속을 하기도 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밤에 눈을 감을 때까지 카라마츠는 꼭 하늘을 나는 것처럼 둥둥 떠 있었다. 늘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가서야 손을 잡았고, 또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아는 사람에게 들키진 않으리라고 생각했는데.

 

행복했던 순간이 물거품처럼 터지는 것 같았다. 카라마츠가 눈가에 대고 있던 티슈는 어느새 푹 젖었고, 카라마츠가 얼른 새 티슈를 뽑아 다시 눈을 가리려고 하는 순간 다른 형제들이 깎은 배를 한 접시 가득 담아 들고 들어왔다.

카라마츠 형! 왜 울어?”

이치마츠, 쟤 왜 저래?”

형제들은 접시를 던지듯 내려놓고 카라마츠에게 다가와 그의 얼굴을 살폈다.

물 마시다가 사레들려서 저래.”

목에 커다랗고 뜨끈한 덩어리가 걸린 것 같았다. 카라마츠는 숨을 고르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다른 형제들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네. 언제 이치마츠가 얘기를 할지 모르지만. 카라마츠는 웃으면서 젖은 티슈뭉치를 집어 들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이치마츠가 배를 하나 집어 들어 와작와작 씹어 먹고 있었다. 카라마츠가 우는 걸 봤으면서도 아무런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아마 카라마츠가 이렇게 반응할 줄 알고 있었겠지. 카라마츠는 올린 입꼬리에 힘을 줘 배로 시선을 돌렸다.

 

걔랑 헤어져.”

이치마츠는 형제들이 다 잠에 빠져들자 카라마츠의 멱살을 잡고 집 뒷마당으로 질질 끌고 나갔다. 카라마츠는 복잡한 머릿속을 한참 정리하다 간신히 잠에 빠져들었는데, 자다가 갑자기 일으켜져 헤어지라는 소리를 들으니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

이치마츠가 으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사귀고 있는 걔랑 헤어지라고.”

카라마츠는 간신히 잠이 깨 눈을 비볐다.

?”

이치마츠는 한참 카라마츠의 눈을 노려보다 마당에 침을 뱉었다.

나랑 똑같은 얼굴을 한 새끼가 다른 남자랑 떡치는 생각만 해도 더러워서 죽을 것 같으니까, 다른 애들한테 얘기하고 학교에 소문내기 전에 헤어져.”

카라마츠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에게 늘 상처 주는 말만 골라서 했지만 마음이 아팠다. 그렇지만 카라마츠는 쉽게 포기할 수가 없었다. 카라마츠가 오랫동안 짝사랑하던 사람이었고, 또 그는 카라마츠가 모든 걸 버리고 도망칠 수 있을 만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카라마츠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마루에 앉아 다리를 세우고 고개를 파묻었다. 이치마츠가 노려보고 있는지 정수리가 따끔거렸다. 카라마츠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말을 해야 했다. 이치마츠에게. 이 말을.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야."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고등학교 들어갈 때부터 좋아했고, 2년도 넘게 짝사랑만 하다가 포기하기 직전에 사귀게 됐어. 살면서 이렇게 다른 사람을 좋아해본 적이 없었고, 또 앞으로도 그럴 일이 없을 것 같아. 이치마츠, 그냥 못 본 척 해주면 안 될까? 이 사람하고 헤어지면 나는 죽을지도 몰라.”

, 이치마츠가 어이없다는 듯 바람 새는 소리를 내고 웃었다. 카라마츠는 옷소매를 씹었다. 이치마츠가 안 된다고 하면, 형제들에게 모두 말해버리면 어떡하지. 카라마츠는 이제 겨우 고등학생이었고, 곧 학교를 졸업한다고 해도 경제적인 능력이 없어 한동안 부모님 집에 붙어서 살아야 했다. 이치마츠가 부모님에게, 형제들에게 말을 해버리면 카라마츠는 갈 곳이 없었다. 카라마츠가 좋아하는 그 사람도 동갑의 고등학생이었고, 또 고등학교 졸업은 해야 하는데. 이치마츠는 대답이 없었다. 카라마츠는 꼭 벌레가 된 기분이었다. 제발 짓밟지만 말아달라고 이치마츠의 선처를 기다리는 벌레. 내가 흉측하고 더럽고 징그럽다는 건 알고 있어. 보이지 않는 곳에 조용히 숨소리도 내지 않고 숨어있을게. 제발 짓밟지만 말아줘.

네가 뭘 모르나본데, 걔를 아무리 사랑한대도 그건 잠깐이야. 대학만 가 봐도 만나는 사람은 얼마나 많고, 또 여자들은 얼마나 많은데. 너는 걔 하나만 믿고 가족을 다 버리겠다는 거야? 미쳤냐? 걔한테 빚졌어? 걔가 그렇게 씹질을 잘해? 너는 걔 없으면 욕구불만으로 죽어?”

이치마츠가 카라마츠의 바로 앞에 서서 조근조근 잔인한 말을 쏟아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카라마츠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 눈을 뜨면 카라마츠의 심장에서 김이 후끈후끈하게 오르는 피가 줄줄 흘러가는 게 보일 것 같았다.

그래도 안 돼…….”

카라마츠는 다시 목이 멨다.

안 돼……. 걔가 좋아서, 나는 안 돼…….”

그동안 형제들 틈에서 비밀을 지키느라 서럽고 외로웠던 것까지 한 번에 올라와 카라마츠는 속이 울렁거렸다. 태어날 때는 다들 똑같이 태어났는데, 왜 카라마츠만 이렇게 달라서 혼자 고통스러워야 하는 거지. 심장이 조이듯 아팠다.

이치마츠가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카라마츠의 곁을 지나치려다 멈추고 카라마츠의 곁에 쭈그리고 앉아 카라마츠의 귓가에 속삭였다.

졸업할 때까지만 만나. 그리고 졸업식 날 헤어져. 그 뒤로 너희 둘이 같이 있는 게 눈에 뜨이기라도 하면 다시는 이 집에 발도 못 들여놓을 줄 알아.”

 

기간이 정해진 사랑은 얼마나 애달픈지. 카라마츠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차마 사실대로 얘기하지도 못하고 이별을 고했다.

상처 줘서 미안해. 너한테는 아무 문제가 없어. 너랑 함께 해서 정말 행복했고,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어. 너랑 같이 걷던 거리, 그 골목, 그 가로등 밑만 걸어도 나는 죽을 때까지 네 생각을 할 거야. 고마워. 나랑 그렇게 사랑해줘서 고마워. 겁쟁이인 나에게 먼저 고백해줘서 고맙고, 나는 그저 너한테 고맙기만 해. 사랑해. 정말 좋아했어.

하지만 카라마츠는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이 모든 말을 한껏 움츠러든 그 사람의 등 뒤에 흘려보냈다. 졸업장이 든 통을 잔뜩 구겨질 정도로 부여잡고, 카라마츠는 소리 없이 울었다. 기념사진을 찍겠다며 어머니가 카라마츠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가야되는데,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가야 하는데. 카라마츠는 그 사람의 등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아진 뒤에야 자리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카라마츠의 첫사랑이 조각도 주워 담지 못할 정도로 박살나버린 날이었다. 내가 다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카라마츠는 어린애처럼 소리 내 울면서 자기 자신에게 물었다. 그렇게 다정하고, 상냥하고, 카라마츠에게 먼저 좋아한다고 말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카라마츠의 어깨에 차가운 손이 닿았다. 카라마츠가 엉망이 된 얼굴로 고개를 돌아보자 그 손이 카라마츠의 얼굴에 손수건을 던지고 돌아서 달려갔다.

 

카라마츠의 예상은 옳았다. 그 사람 같은 남자는 다신 만나지 못했고, 카라마츠는 그의 흔적이 아주 조금이라도 남은 남자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일주일도 채 가지 못하는 짧은 만남이었다. 만난 남자의 수가 다섯을 넘어가기 시작하자 세상엔 카라마츠를 위해 태어난 특별한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운명처럼 그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는 꿈을 꾸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졸업을 하고 그 사람이 대학에 간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새 여자 친구를 사귀었다는 소식을 듣고 카라마츠는 모든 희망을 접었다. 이치마츠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카라마츠는 입이 썼다. 영원한 사랑이란 건 없는 모양이었다. 카라마츠에게만 그런 건지는 몰라도.

또 남자 만났냐.”

가로등 밑에 이치마츠가 담배꽁초를 산처럼 쌓아놓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고개를 돌려 현관문을 잡았다. 그러자 뒤에서 커다란 손이 카라마츠의 목덜미를 잡아 당겼다.

무슨 짓이야?”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손을 잡아떼려고 노력했지만 이치마츠는 아랑곳하지 않고 카라마츠를 끌고 집 옆 골목으로 들어갔다. 텅 빈 골목에 누런 가로등만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내가 보는 앞에서 남자를 만나?”

이치마츠는 기가 찬다는 표정이었다. 카라마츠는 멍하니 이치마츠의 얼굴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사귀는 거 아냐. 금방 헤어지니까.”

사랑해서 만나는 게 아니라?”

카라마츠는 피식 웃었다. 이치마츠의 입에서 사랑이란 단어가 나올 줄이야.

그럴 리가.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안심해.”

카라마츠가 몸을 돌리자 다시 이치마츠가 카라마츠의 어깨를 잡아 돌려 이치마츠를 보게 했다.

내가 걱정하는 일이 뭔데?”

남자를 사랑한다고 집을 엉망으로 만드는 일?”

이치마츠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곤 그때까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내던지고, 카라마츠의 턱을 단단히 잡았다.

틀렸어.”

그리곤 휘둥그레진 카라마츠의 눈을 피해서, 이치마츠가 잔뜩 튼 입술을 카라마츠의 입술에 부딪쳤다. 짙은 담배냄새가 났다. 차가운 밤의 냉기가, 가로등 불빛에 잔뜩 달아오른 온기가 그 입술에서 느껴졌다. 카라마츠는 순간적으로 굳었지만, 곧 눈을 감고 이치마츠의 입술을 적시기 시작했다.

이번엔 카라마츠의 차례였다.

 

사실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어요. 전국의 수재란 수재들은 전부 모인 그 교실에서 처음 시험지를 넘기는 순간부터 알고 있었으니까요. 이 문제는, 이 대학은 날 위해 준비된 게 아니었구나. 평범하기 그지없는 나는 여기서 환영받지 못하는구나 하고. 어느 햇빛이 잘 들고 고요한 교실이었습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발을 들이고 싶어 하루에도 몇 번씩 심장이 쿵쾅거렸던 교실이었어요. 그 교실 한가운데에 다른 학생들의 다급한 연필소리와 지우개질 소리를 들으며 나는 가만히 시험지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날 어떻게 그 학교를 나와 집으로 돌아갔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며칠을 꼬박 끙끙 앓았던 건 기억나는데, 그렇게 앓는 동안 제가 무슨 헛소리를 했는지 아무도 얘기해주지 않았어요. 저는 그저 골방에 틀어박혀 합격 발표가 나는 날을 기다렸습니다. 아주 작은 욕심이 파리처럼 조그만 날개를 달고 귓가에서 윙윙거리며 날아다녔어요. 이름이랑 수험번호를 제대로 적어서 낸 게 확실하니까, 어쩌면 붙을지도 모른다고. 저는 그 헛된 욕심을 손가락 하나로 눌러 죽일 수 있었지만 차마 그러질 못하고 시간이 흐르는 것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저는 버스를 타고 돌아오다 어느 낯선 거리에 내렸습니다. 기쁘고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이 가득한 거리를 걸으며 저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습니다. 자기 이름을 확인하고 기뻐 비명을 지르던 학생들의 얼굴을 하나씩 하나씩 눈앞에서 지워가며,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불행을 상상했습니다. 저 남자와 손을 꼭 붙잡은 여자는 사실 양다리를 걸치고 있을지도 모르고, 저 명문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잘난 척하며 걷고 있는 아이는 사실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저는 제 안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분노를 죄 없는 사람들에게 저주를 하며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저한테 실망하셨을 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이건 솔직한 제 모습이고,

 

아니, 이 부분은 지워야지.

 

한참 길을 걷다 보니 목이 타들어갈 것처럼 말라왔습니다. 재밌었어요. 이렇게 내 인생은 나락으로 굴러 떨어졌는데 내 몸은 이렇게 물을 요구하고 음식을 요구하고 휴식을 요구하고 있으니, 나는 그저 동물이 아닐까, 내 이성과 정체성이라는 건 오랜 교육으로 길들여진 습관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뭐, 내가 동물이면 뭐 어때서. 저는 자문자답을 하며 편의점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저 앞에, 어느 상가 앞에서 조촐한 무대를 차려놓고 예쁘게 생긴 여자애가 짧은 치마를 팔랑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가발인지 염색인지 알 수 없는 분홍색 머리 위엔 고양이 귀 머리띠를 쓰고, 손에는 마이크를 잡는 것도 불편해 보이는 고양이 손 모양 장갑을 끼고 있었죠. 어떻게 고정을 시킨 건지도 알 수 없었지만 고양이 꼬리도 힘없이 그녀의 동작에 맞춰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팔짱을 끼고 꼭 면접을 보는 것처럼 엄한 표정으로 서있는 사람들 틈에 끼어 아주 잠깐, 당신을 훑어보았어요. 흔한 아이돌이었습니다. 일본에는 아이돌이 해변의 모래알처럼 차고 넘쳤고, 이를 모르는 건지 아님 알면서도 모른 체를 하는 건지 조금이라도 예쁜 여자애들은 모두 아이돌을 해 사람들 위에 군림하겠다고 나섰죠. 그 많은 아이돌 틈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든 눈에 띄어야겠죠. 실밥이 그대로 매달려 있는 싸구려 치마를 무대 앞에 따개비처럼 달라붙은 남자들에게 속옷을 보여줄 것처럼 살짝 살짝 흔들면서도 살아남아야겠죠. 나는 그런 당신을 보면서 만족스러웠어요. 나는 공부를 잘했고, 고등학교도 좋은 성적으로 졸업했고. 비록 대학에는 가지 못했지만 어떻게든 멋진 인생을 살 수 있지 않을까. 고마워요. 나는 냥냥거리면서 춤을 추는 당신을 뒤로 하고 등을 돌렸습니다. 아이돌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기 위한 사람들이죠. 나는 당신에게 위안을 받았습니다.

그 무대의 건너편, 조금 떨어진 곳에 편의점이 있었습니다. 저는 온장고에서 단 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는 블랙커피를 꺼내들고 계산을 해 캔을 땄습니다. 배가 고팠고, 달달한 것을 마시면 기분도 좋아지겠지만 나는 이제 어른이니까, 고등학교를 졸업할 어른이니까 하는 생각이 들어 블랙커피를 마셨습니다. 편의점 창가에 서 밖을 내다보니 당신은 공연을 마치고 한참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하고 있었어요. 사람들 몇 명이 박수를 치는 게 보였습니다. 나는 쓰디 쓴 커피를 한 모금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가 목구멍으로 넘겼습니다. 새카만 커피는 혀를 타고 식도로 넘어가 텅 빈 위장을 자극했죠. 속이 쓰렸어요. 당신이 무대에서 사라지고 나니 나는 다시 속이 끓기 시작했습니다. 화가 났어요. 다시 이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밑바닥의,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아 화가 났습니다. 아까 그 아이돌은 왜 저 무대에서 공연을 계속하지 않는 걸까. 나는 그럼 당신을 보면서 내 처지가 당신보다 낫다고 다시 나를 위로할 수 있을 텐데. 커피는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천천히 식고 있었죠.

나는 한참동안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꼭 꽃잎 같은 분홍색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것 같더니, 고양이 귀 머리띠와 고양이 손 장갑을 벗은 당신이 편의점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두꺼운 외투를 입고, 손에는 커다란 가방을 들고 있었죠. 당신이 직접 가방을 들고 있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아마 시중을 들어주고 스케줄을 관리해 줄 소속사가 없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나는 창가 구석으로 조금 물러나 커피를 마시며 당신을 지켜봤습니다. 당신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온장고 앞으로 다가가 커피를, 달콤한 커피를 꺼내 계산을 하고 내가 있는 창가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곤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죠. ,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어린 여자애가, 나이가 많아봤자 고등학생일 여자애가 들기엔 너무 무거운 가방이 아닐까. 나는 계속 가방과 당신을 힐끔힐끔 돌아보다 고개를 돌렸습니다. 당신은 손이 시렸는지 한참동안 캔을 양 손으로 감싸고 있었습니다. 장갑은 두꺼워보였는데, 보온에는 별 효과가 없던 걸까요. 날이 춥긴 했습니다. 나는 창밖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옷을 한번 보고 몇 걸음 뒤로 물러서 당신의 옷차림을 훑어보았습니다. 치마와 긴 부츠 사이에 드러난 맨살이 새빨갛게 부어있었고, 어깨는 잔뜩 움츠러들어있었습니다. 날이 그렇게까지 춥진 않았지만 확실히 이런 차림으로는 추울 만 했죠. 내 시선을 느꼈는지 당신이 고개를 돌렸습니다. 화장이 진했어요. 그리고 눈썹 옆으로, 부드러운 얼굴선을 따라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걸 뭐라고 부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눈꺼풀에 바르는 그것도 번져서 눈가가 온통 반짝이 투성이였어요. 당신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컬러렌즈를 낀 건지 동그란 초록색 눈동자가 반짝거렸어요.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바보같이 입을 조금 벌리고 그 눈동자를 한참 보다가,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내밀었습니다. 심장이 쿵쾅거렸고, 머릿속에 온갖 말들이 꼭 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뛰어다녔어요. 당신은 바로 그걸 받아들이지 않고 당황스럽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저기, 이마에 땀이…….

나는 여자애가 민망하지 않게 말을 돌려서하는 방법도 몰랐어요. 나는 바보처럼 말끝을 흐리며 휴지를 내민 손을 조금 뒤로 뺐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낯선 사람이죠. 나는 아차, 하고 말을 덧붙였습니다.

아까, 공연 잘 봤습니다.

하고. 당신을 보면서 한참 속으로 우월감을 느꼈던 주제에, 나는 공연을 잘 봤다고 인사했어요. 그제야 당신은 활짝 웃으면서 휴지를 받아들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새하얗고 조그만 손으로 내 손에서 휴지를 가져가 땀방울이 흐르는 부위를 톡톡 두드려 닦고는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에 올려놨어요. 당신의 공연을 본 감상을 얘기해줘야 할 것 같아서, 머리를 한참 굴렸습니다. 그렇지만 노래도 귀담아 듣지 않았고 또 춤을 제대로 감상하지도 않아 생각나는 말이 없어서, 나는 연신 커피만 들이켰죠. 목구멍이 따끔거렸습니다.

하시모토 냐에요, 냐쨩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냐.

당신은 그제야 생각난 듯 냐, 하고 고양이 울음소리 같은 말을 덧붙였습니다. 하시모토 냐쨩이라니. 나는 한참 머릿속으로 당신의 이름을 되새겨보다, 고개를 들었습니다. 말해주고 싶었어요. 당신은 정말 춤을 열심히 췄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나는 당신이 최선을 다했다는 걸 느꼈고. ……. 당신은 무척 귀여웠다고. 분홍색 머리카락이 나풀거리는 것도 싸구려 고양이 발 장갑도 귀여웠고, 지금 내 옆에서 어색하게 커피 캔을 따 마시는 당신에게서 무척 달콤한 꽃향기가 난다고. 비록 지금은 고양이 귀 머리띠도, 장갑도, 꼬리도 없었지만 당신은 누가 봐도 고양이처럼 귀엽고 사랑스럽다고.

내가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당신은 빈 커피 캔을 쓰레기통에 넣고 가방을 집어 들었습니다. 가방이 무거웠는지 살짝 인상을 썼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가방을 들고, 내가 건네준 휴지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어 외투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그걸 가져가려는 걸까요?

당신은 나를 보며 고개를 살짝 숙이고 다시 활짝 웃었습니다. 나는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들었고, 당신이 이 편의점에 들어왔을 때처럼 꽃잎 바람처럼 편의점 밖을 나서는 걸 보았습니다. 지하철을 타러 가는 걸까요. 나는 한참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커피 캔을 비웠습니다. 어느 새 커피 캔은 차가워졌죠.

 

당신의 팬클럽을 결성하고, 먹고 자는 시간만 빼면 당신의 뒤를 쫓아다니는 사람들과 하나둘 안면을 트기 시작하면서 나는 내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을 수가 있었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작은 무대를 하고 나면 고양이 귀와 장갑을 빼고 힘들지만 최선을 다하는 여자아이의 모습으로 근처 편의점에 들어가 별 생각 없이 창밖너머로 공연을 본 남자들에게 웃어주고 이름을 가르쳐줬죠. 당신은 그 남자들의 최초의 아이돌이었고 마지막 아이돌이었습니다. 혼자서만 간직해온 소중한 비밀이 사실 모두의 마음속에 하나씩 남겨져 있는 공산품 같은 것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의 기분을, 당신은 알고 있을까요? 알고 있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걸 그만두지 못할 거라는 것도 알고 있겠죠. 당신은 아이돌이니까.

 

하시모토 상.

어쩌면 저는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방법으로 사랑에 빠진 남자가 아닐까요.

우린 돈도, 명예도, 권력도 아닌 사랑 그 자체에 집중해

한 명은 사랑을 팔고

한 명은 사랑을 하고 있으니.

 

 

쵸로마츠는 쓰던 편지를 찢었다. 편지 같은 건 역시 쓰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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