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로 오소마츠는 이치마츠를 견제하는 것 마냥 더 자주 전화를 걸고, 집에 돌아올때면 카라마츠에게 더 집요하게 달라붙어 관계를 요구했어요. 꼭 그게 카라마츠의 사랑을 증명하듯. 카라마츠는 아이가 신경 쓰였지만 오소마츠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게 싫지 않았죠. 목요일에 갑자기 카라마츠를 데리고 나가 근처 러브호텔에서 주말까지 머무르기도 했고, 본가에 있을 땐 하루 종일 카라마츠를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며 애무했어요. 카라마츠는 행복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날 버리지 않고, 가끔 기분이 오락가락하며 신경이 예민해져도 오소마츠는 그저 카라마츠가 좋다고, 사랑스럽다고 안아줬으니까요. 어느 순간 카라마츠가 밤늦게 혼자 영화를 보고 있어도 이치마츠가 나타나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랑 친해질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하고 아쉬워했죠. 하지만 카라마츠가 먼저 이치마츠의 방문을 두드리며 같이 영화를 보자고 할 수는 없었어요. 시어머니에게 물어보니 이치마츠는 글을 쓴다고 했습니다. 소설, , 희곡 이것저것 두루 쓰면서 책도 몇 권 냈다고. 하지만 그 말을 듣고 카라마츠가 한참 서재를 뒤졌지만 이치마츠의 책은 찾을 수가 없었어요. 잘 팔리기는 한데 가족들에겐 보여주지 않는다고 시어머니가 서운해 했죠. 그러던 어느 날, 오소마츠가 오랫동안 준비하던 연극을 무대에 올린다고 온 가족을 초대했어요. 그의 어머니, 이치마츠, 카라마츠까지. 배가 그렇게까지 불러오진 않았지만 카라마츠는 신경이 쓰여 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들어갈 때, 나올 때만 조심하면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을 거라고 카라마츠를 안심시켰어요. 그리고 연극 당일, 이치마츠와 카라마츠, 그리고 오소마츠의 어머니가 함께 극장을 찾았습니다. 규모가 꽤 컸어요. 카라마츠는 자리를 찾아 가면서 이러면 배우들 눈에도 띄지 않겠다고 안심했죠. 다른 생각을 해서 그런지, 카라마츠가 계단에서 옆으로 넘어가다 발을 헛디뎌 휘청거리자 이치마츠가 손목을 낚아채 카라마츠를 붙잡았습니다. 카라마츠가 어색하게 고맙다고 인사했지만 이치마츠는 아무 대답 없이 카라마츠를 그의 곁에 앉혔어요. 그리고 연극이 시작됐습니다. 훌륭했어요. 수많은 배우들 사이에서 오소마츠 혼자 반짝거리며 빛났죠. 카라마츠는 연극의 절정에서 그만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카라마츠가 조용히 훌쩍거리자 이치마츠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고 그걸 꼭 붙잡은 채로 연극의 마지막까지 눈을 돌리지 않았어요. 연극이 끝났습니다. 오소마츠의 어머니는 오소마츠와 그 동료들에게 인사를 하고 오겠다고 앞으로 나갔고, 카라마츠는 차마 극단 사람들을 볼 수가 없어 조용히 극장을 빠져나왔죠. 곧 이치마츠가 뒤따라 나와 차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카라마츠는 그제야 손에 꽉 쥐고 있던 손수건을 눈치 채고 미안하다고, 집에 가서 세탁해서 돌려주겠다고 사과했어요. 하지만 이치마츠는 고개를 젓고 손수건을 가져가 다시 바지 주머니에 넣었죠. 그리고 잠깐 있다가, 그 아이를 정말 낳을 거냐고. 이치마츠가 물었습니다. 예전에 그가 카라마츠를 비웃는 것과는 다른 목소리였어요. 카라마츠는 이치마츠가 그렇게 아이가 싫은 건가,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건가 싶어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고개를 끄덕이면서 사랑하는 오소마츠의 아이고, 한 번도 아이를 낳으리라곤 생각해본 적이 없었지만 이건 기적이라고 대답했어요. 자긴 포기하고 싶지 않은 기적이라고. 이치마츠가 깊은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리고 오소마츠의 어머니가 돌아와 세 사람은 집으로 돌아갔어요.”

카라마츠는 불임이었나요? 어린 나이라 아이를 가질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고 해도, 보통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같이 살면서 아이를 낳고 싶다고 생각했을 법 한데.”

쵸로마츠가 물었다.

어렸으니까요.”

남자가 짧게 대답하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라 쵸로마츠는 더 묻지 않기로 했다.

그 뒤로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에게 조금 더 다정하게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카라마츠와 함께 영화를 보기 시작했고, 책장에 꽂힌 비디오 중에 자긴 이 영화가 재미있었다고 추천해주기도 했어요. 알고 보니 두 사람의 영화 취향이 비슷해서 내일은 그 영화를 보자고 약속을 하고 만나기도 했습니다. 카라마츠가 집 주변을 산책하러 간다고 하면 말없이 따라와 같이 걷기도 했고, 카라마츠가 용기를 내 이치마츠가 쓴 글을 읽어보면 안 되겠냐고 묻자 부끄러워하면서 책을 내주기도 했어요. 나쁘지 않았죠. 어딘가 모르게 오소마츠 같은 느낌도 나서, 카라마츠는 두 사람이 정말 형제인가봐요, 하고 책을 돌려주었습니다. 그게 이치마츠를 불쾌하게 만들었는지 그 뒤로 이치마츠가 다시 책을 보여주는 일은 없었죠. 시어머니는 이치마츠의 책이 꽤 팔리는데, 베스트셀러까지 가지는 못했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재능이 있지만 천재가 아닌 수재의 수준이라고.”

이치마츠가 쓴 책을 가지고 계세요?”

저 쪽에 꽂혀있는데. 나중에 보여드릴게요.”

남자가 축음기 옆에 서있는 책장을 가리켰다. 이치마츠의 글이 궁금했다.

어느새 시간이 흘러 산달에 다다랐습니다. 카라마츠는 불안해했죠. 오소마츠는 휴가를 내고 본가에 머무르면서 카라마츠를 돌봤습니다. 가끔 자다가 카라마츠가 벌떡 일어나 너무 불안하고, 무섭고, 혹시나 잘못될까봐 걱정된다고 울면 오소마츠는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기가 카라마츠의 뒤를 따라갈 거라고 달랬습니다. 이 집은 이치마츠가 독차지 한다는 게 아쉽지만, 하면서 농담을 하기도 했죠. 카라마츠가 배에 손을 대고 있으면 태동이 느껴졌습니다. 이치마츠는 오소마츠가 집에 계속 머무르자 카라마츠와 거의 마주치지 않았지만 간혹 오소마츠가 자리를 비울 때 와 카라마츠가 잘 있는지 들여다보곤 했습니다. 카라마츠가 이치마츠에게 배를 만져보라고 하면, 이치마츠가 오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배를 만져보고, 카라마츠를 말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곤 했죠. 이치마츠가 감격한 건지, 아님 생리적인 불쾌함을 느끼는 건지 카라마츠는 한참 생각을 해봤지만 알 수가 없었어요.”

오소마츠는 꽤 괜찮은 남편이네요.”

남자가 빙그레 웃었다.

맞아요. 좋은 사람이었어요. 그러다 카라마츠가 아이를 낳는 날이 왔죠. 카라마츠는 병원에 가고 싶어했지만 오소마츠의 어머니가 한사코 의사를 부르겠다고 카라마츠를 말렸어요. 오소마츠는 카라마츠의 편을 들어주지 않고 그저 카라마츠의 손을 붙잡고 어쩔 줄 몰라 했고, 카라마츠가 고통에 까무러쳤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아이는 세상 밖으로 나온 뒤였습니다. 카라마츠의 배엔 긴 수술 자국이 남아있었죠. 의사는 이미 돌아갔다고 시어머니가 카라마츠에게 아기를 안겨주었습니다. 카라마츠가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사랑스럽고 예쁜 아기였어요. 오소마츠도 카라마츠의 곁에 매달려서 펑펑 울었고, 카라마츠는 한참 아기를 들여다보다가 잠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꿈을 꿨어요. 이번에는 아기가 없는 꿈이었습니다. 오소마츠를 닮은 남자가 카라마츠의 곁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늘 방안을 뛰어다니던 아이는 구석에 서서 방문을 쳐다보고 있었죠. 카라마츠는 한참을 떨다 꿈에서 깼습니다. 그렇지만 그건 그냥 꿈이었어요. 오소마츠가 곁에 있었고, 아기가 곁에 있었죠.”

, 쵸로마츠는 그제야 눈치 챘다. 아마도 이건 이치마츠가 쓴 소설의 내용일 것이다. 이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남자는 사실 이치마츠고, 오소마츠와 카라마츠, 그리고 자기가 등장하는 이야기를 한껏 지어놓고 쵸로마츠에게 꼭 실제로 있었던 일처럼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글 쓰는 사람의 오만인가. 이렇게 찻집을 하고 있는 걸 보면 글을 써서 버는 돈이 얼마 되지 않아 부업을 해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 남자가 잠깐 찻주전자 안을 들여다보는 동안 쵸로마츠는 여태 들은 이야기의 화자에 저 남자를 끼워보았다. 어린 카라마츠가 잘생긴 오소마츠와 연애를 하다 아이를 낳고, 그의 쌍둥이 동생인 이치마츠와 위험한 관계에 있으면서 눈치 채지를 못하다니. 좀 진부했다. 그렇지만 쵸로마츠는 쿠키를 집으면서 이 이야기를 소설로 읽는 다면 좀 재미가 덜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이야기를 하는데 재주가 있었다. 꼭 연극배우처럼.

아기가 태어나고, 오소마츠는 2주간 더 머무르다 어쩔 수 없이 극단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는 한참 아기를 손에서 놓지 못하고 힘들게 돌아서야 했죠. 카라마츠는 하루 종일 아기를 돌보면서 그에게 온 기적에게 감사하고 아기가 건강하게만 자라줬으면, 하고 기도했죠. 그의 시어머니가 아기를 돌봐주겠다고 나서느라 그렇게까지 육아가 힘들지는 않았어요. 카라마츠는 다시 무대에 오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건 카라마츠의 오랜 꿈이었고, 어쩌면 이 경험이 그가 연기를 하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오소마츠가 읽었던 것으로 보이는 연극과 연기에 관한 책들을 쌓아놓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오소마츠의 어머니가 병원에 데리고 간다며 집을 비운 날이었습니다. 카라마츠는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었죠. 그때 이치마츠가 서재 문을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카라마츠가 반가워하면서 책을 내려놓자, 이치마츠가 카라마츠가 앉은 소파에 조심스럽게 앉아선 카라마츠의 손을 잡았죠. 자기랑 도망가자고, 이 집은 아기에게 너무 위험하다고. 카라마츠는 깜짝 놀라 손을 빼면서 그게 무슨 소리냐고 재차 물었지만 이치마츠는 대답도 하지 않고 계속 아기를 이런 곳에서 키워서는 안 된다고, 아이에게 다른 기회를 줘야 된다고 하면서 카라마츠에게 매달렸습니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가 왜 자기가 평생 살아온 집에 대해 그렇게 얘기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또 사랑하는 사람의 동생인 이치마츠가 자기를 그런 식으로 대하는 게 불편했어요. 꼭 이치마츠가 카라마츠를 사랑하는 것처럼. 카라마츠는 혹시나 하고 드는 의문을 애써 무시하면서 서재를 도망치듯 빠져나와 방으로 돌아갔죠. 이치마츠가 쫓아와 문을 두드렸지만 카라마츠는 듣고 싶지 않으니까 가달라고, 못들은 걸로 하겠다고 소리쳤어요. 문을 잠그지도 않았는데, 이치마츠는 문을 열고 들어오지도 않고 문 앞만 맴돌다가 사라졌습니다. 카라마츠는 밤새 이 얘기를 오소마츠에게 해야 되나 하고 고민했지만 형제를, 그것도 쌍둥이 형제를 서로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고 또 카라마츠가 오해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잊어버리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뒤로 이치마츠와 단 둘이 남는 때를 피했고, 더 이상 밤늦게 영화를 보지도 않았죠.”

그럴 줄 알았지. 쵸로마츠는 속으로 혀를 차며 차를 마셨다. 어느 새 차가 식어 쵸로마츠는 직접 찻주전자에 뜨거운 물을 따랐다. 뜨거운 물이 담겨있던 주전자도 가벼워져 남자가 물을 더 끓여오겠다고 주전자를 들고 부엌으로 돌아갔다. 쵸로마츠는 차를 홀짝이다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무도, 단 한명도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고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날 저녁은 오소마츠의 어머니가 성대하게 저녁식사를 차렸습니다. 카라마츠도, 시어머니라고 부를까요. 그게 헷갈리지 않고 좋을 것 같네요. 카라마츠도 시어머니를 도우려고 했지만 시어머니는 자기가 다 하겠다고 카라마츠를 부엌에서 내보내고 두 형제를 불러오라고 부탁했습니다. 부엌을 나왔지만, 저택은 하도 넓고 복도가 이리 저리 꺾여있던터라 카라마츠는 어디에 형제들이 있을지 알 수가 없었어요. 카라마츠는 일단 그가 시어머니와 이치마츠를 만났던 거실로 가서, 이치마츠가 사라진 복도 쪽으로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복도는 중간 중간에 불이 켜져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둡고, 꼭 옛날 드라큘라 영화에 나올법한 오래된 집이었어요. 벽에는 그림에 문외한인 카라마츠가 보기에도 대단한 작품들이 걸려있었고, 조각품이 전시되어있었죠. 카라마츠는 하나하나를 감상하면서 복도를 걷다가, 2층 복도 끝에서 누군가 말다툼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두 사람이구나 싶어 카라마츠는 다가가 문손잡이를 잡았죠. 그 순간 말다툼하는 소리가 딱 멈추고, 오소마츠가 문을 열었습니다. 오소마츠는 웃으며 카라마츠의 이마에 살짝 입 맞추고 문손잡이를 잡고 있는 카라마츠의 손을 떼어냈습니다. 동생이랑 잠깐만 얘기하다가 갈게. 하고. 문 너머에서 이치마츠가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카라마츠는 어쩔 수 없이 얼른 얘기를 끝내고 내려오라고 하고 부엌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마 이 남자는 자기가 영화에서 본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런 스토리의 영화가 뭐가 있을까. 쵸로마츠도 영화를 꽤 많이 봤다고 생각했는데 딱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카라마츠와 그의 시어머니가 한참을 기다리고 나서야 오소마츠와 이치마츠가 식당으로 내려왔습니다. 주먹다짐은 하지 않았는지 누가 다친 기색은 보이지 않았어요. 오소마츠는 늦어서 미안하다고 웃으며 카라마츠의 곁에 앉았고, 식사를 시작했습니다. 이치마츠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대충 끼적거리기만 하다가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카라마츠는 마음이 불편했어요. 앞으로도 계속 볼 사람인데 이치마츠는 카라마츠가 싫어 오소마츠와 다투기까지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죠. 식사를 마치고 오소마츠는 카라마츠를 자기 방으로 데려갔습니다. 오소마츠의 방은 3층 끝에 있어 저택을 둘러싼 숲이 훤히 보이는 곳이었어요. 카라마츠가 창밖을 내다보니 집 뒤편에 양봉장이 있었습니다. 오소마츠의 어머니가 취미로 양봉을 한다고, 오소마츠가 고개를 저었죠. 오소마츠는 카라마츠를 끌어안고 날 믿고 따라와줘서 고맙고, 앞으로도 행복하게 살자고. 카라마츠와 아기가 자기에게 와줘서 정말 기쁘다고 속삭였습니다. 카라마츠는 행복했죠. 결혼식은 꿈도 꾸지 못했지만, 어쩌면 둘이서 결혼식 비스무리한 걸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한창 나이의 연인답게 두 사람은 한참 사랑을 속삭이다 늦은 시간에 잠이 들었죠. 그리고 카라마츠는 다시 악몽을 꿨습니다. 이번에도 세 사람이 꿈에 나왔어요. 오소마츠를 닮은 아이가 뛰어다니고, 갓난아기가 울면서 엄마를 찾고, 문 앞에는 오소마츠를 닮은 남자가 서서 두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카라마츠가 자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신음소리를 내자 오소마츠가 카라마츠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악몽이라도 꾼 거냐고. 카라마츠는 오소마츠의 품에 안겨 꿈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소마츠는 가만히 카라마츠의 이야기를 듣다가 그건 전부 카라마츠가 아직 불안해서 그런 거라며 카라마츠를 다독였죠.”

결혼식은 왜 하지 못한다는 거지? 카라마츠의 나이가 어려서? 쵸로마츠는 차를 다시 한 모금 마셨다. 남자는 오래 이야기를 하면 지친다더니, 영 이야기를 멈출 생각이 없어보였다. 하지만 흥미로운 이야기다. 악몽에 나오는 사람들은 누굴까?

다음날 오소마츠는 다시 시내로 돌아갔습니다. 오소마츠는 주연을 맡았고, 그가 하는 일들이 많아 어쩔 수 없이 카라마츠와 떨어져야 했죠. 카라마츠는 집 대문 앞까지 나가 오소마츠를 배웅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오소마츠의 어머니는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와 친해져볼까 싶어 어제 이치마츠와 오소마츠가 싸우던 방으로 갔습니다. 카라마츠가 노크를 하자 잔뜩 화가 난 표정의 이치마츠가 문을 열었습니다. 우리 잠깐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하고 카라마츠가 물었지만, 이치마츠는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으며 너 같은 정신 나간 애랑은 할 얘기 없어, 하고 문을 쾅 닫았죠. 생각보다 이치마츠가 자길 노골적으로 싫어해 카라마츠는 상처받았고, 다시 문을 두드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다른 방을 하나하나 구경하기 시작했습니다. 집은 굉장히 넓었고, 쓰는 사람이 없어 손님방이라고 생각했던 방마다 그 방의 소유주였던 사람의 흔적이 가득 남아있었어요. 어느 방에는 한쪽 벽을 완전히 가릴 정도로 큰 책장에 가득 악보가 꽂혀있었고, 어느 방에는 카라마츠가 읽을 수 없는 언어로 쓰여진 상 같은 것이 액자에 담겨 다닥다닥 걸려있었죠. 이젤과 먼지가 쌓여가는 캔버스로 가득찬 방이 있었고, 옷을 만들 때 쓰는 마네킹 같은 것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방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오소마츠의 가족들은 끼가 많은 사람이었겠구나 싶어 카라마츠는 괜히 웃음이 나왔죠. 그가 사랑하는 오소마츠도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였고, 뭐든지 잘하는 남자였으니까요. 집 뒤편으로 나가자 오소마츠의 어머니가 막 양봉할 때 입는 옷을 벗으며 카라마츠를 향해 손을 흔들었습니다. 그녀의 손에는 갓 딴 꿀로 가득찬 유리병이 들려있었어요. 시어머니는 카라마츠에게 우리 손주를 건강하게만 낳아주렴, 하고 유리병을 건네주었죠. 갓 딴 꿀을 드셔본 적이 있으신가요?”

남자가 갑자기 쵸로마츠에게 물었다.

글쎄요, 슈퍼에서 파는 꿀밖에 못 먹어본 것 같은데. 맛있나요?”

남자가 고개를 저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건 정말이지, 그저 달콤하다고 수식하기엔 죄스러울 정도에요. 카라마츠가 꿀을 한입 맛보고 감탄하자 오소마츠의 어머니는 그에게 보여줄 것이 있다며 카라마츠의 손을 잡고 지하실로 내려갔습니다. 어두컴컴한 방 한 구석에 거대한, 거의 카라마츠의 키만한 높이의 꿀 항아리가 있었어요. 유리로 된 것이라 안에 황금빛 꿀이 가득 차 있는 게 보였죠. 카라마츠는 보고 깜짝 놀라서 이 많은 꿀들을 시어머니가 모으신 거냐고 물었고, 시어머니는 자랑스럽게 그렇다고 말했죠. 아마 자기가 죽은 뒤에 카라마츠의 아이가 평생을 먹어도 다 먹지 못할 양일 거라고 하면서.”

꿀이 상하지 않는다고 들은 적이 있긴 하지만, 조금씩 꿀을 모아서 그렇게 보관해도 되는 걸까?

오소마츠는 수요일, 그리고 금요일에 본가로 돌아와 카라마츠를 만났습니다. 일이 많을 때는 카라마츠에게 전화해 카라마츠가 잠들 때까지 가지 못해서 미안하고, 정말 사랑한다고 이야기했죠. 카라마츠는 좀 아쉬웠지만, 카라마츠는 그렇게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오소마츠가 더 멋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카라마츠가 오소마츠와 전화를 끊고 나면 무대에 대한 미련이 남아 밤잠을 설쳤죠. 카라마츠는 아직 어렸으니까요. 그렇다고 아이와 오소마츠를 원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어떻게 아이가 생긴 건지는 몰라도 카라마츠는 오소마츠만큼 아이를 사랑했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카라마츠는 밤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조용히 방문을 나와 큰 TV가 있는 방으로 갔습니다. 그 방에는 오소마츠가 좋아했다던 영화 비디오들이 많이 있었죠. 카라마츠가 그 중에 재밌어 보이는 걸 하나 골라 비디오 플레이어에 넣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한 삼십분쯤 봤을까, 누군가 조용히 방문을 열었죠. 이치마츠였습니다. 카라마츠는 놀라 혹시 소리가 시끄러웠으면 미안하다며 볼륨을 줄였습니다. 하지만 이치마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TV화면을 보다가, 카라마츠가 앉아 있는 소파 끝에 털썩 앉아 같이 영화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가 신경 쓰여 자리에서 일어날까 했지만 혹시 그게 이치마츠를 불쾌하게 하지는 않을까 싶어 계속 영화를 봤습니다. 좀 슬픈 영화였어요. 카라마츠는 어느새 영화에 빠져들어 눈가에 눈물이 고였고, 이치마츠는 카라마츠를 빤히 보다가 물었죠. 영화가 재밌었냐고. 카라마츠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치마츠는 그런가,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습니다. 그 후로 가끔 카라마츠가 밤늦게 그 방에서 영화를 보고 있으면 꼭 이치마츠가 중간에 나타나 영화를 같이 보곤 했습니다. 따로 약속을 하지도 않았는데, 또 영화는 전부 카라마츠가 고른 영화였는데 이치마츠는 중간에 나가지도 않고 끝까지 카라마츠와 함께 영화를 봤습니다.”

불륜느낌이 나는구만. 쵸로마츠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남자는 쵸로마츠의 표정을 보고 그의 찻주전자에 다시 뜨거운 물을 따라주었다.

지루하십니까?”

아니요, 재밌습니다.”

남자가 웃었다.

다행이네요. 이야기가 지루해지면 꼭 말씀해주세요. 주말이 되면 오소마츠는 카라마츠와 함께 교외로 드라이브를 나갔습니다. 사실 그 집도 도시 외곽에 간신히 걸쳐 있었지만, 오소마츠는 혹시 카라마츠가 우울해하지는 않는지, 가족들하고 문제가 있진 않은지 계속 신경을 썼고, 카라마츠는 그런 다정한 오소마츠가 좋았어요. 날씨가 좋을 땐 도시락을 싸서 소풍을 가기도 했습니다. 나무그늘에 돗자리를 깔아놓고 카라마츠는 오소마츠의 무릎을 베고서 낮잠을 자고, 오소마츠는 카라마츠의 머리를 쓰다듬거나 혹은 카라마츠가 눈을 뜰 때까지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췄어요. 연극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일할 때의 얘기를 하고, 카라마츠가 연극에 대한 미련 때문에 침울해하면 오소마츠는 혹시 카라마츠가 밤에 외롭지 않느냐며 농담을 했죠. 카라마츠를 집에 두고 나갈 때마다 오소마츠는 카라마츠가 자기를 버리고 도망가버릴까봐 잠을 잘 수가 없다고 하면서요. 카라마츠는 그제야 생각이 난 듯 이치마츠와 자주 영화를 본다고 얘기했습니다. 둘이 영화를 보기로 한 게 아닌데 이치마츠가 어떻게 알았는지 꼭 와서 영화를 같이 보게 된다고. 오소마츠는 순간적으로 표정을 굳혔지만 카라마츠는 그게 그저 카라마츠가 잠들지 못하는 것 때문에 걱정을 한 거라고 생각했어요. 곧 오소마츠는 혹시 그 음침한 놈이 나랑 똑같은 얼굴이라 대신보고 만족하는 거냐며 웃었죠. 그런가? 카라마츠도 웃으면서 생각을 하는 척 하다가, 아니, 이치마츠는 이치마츠대로 다른 분위기가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치마츠는 좀 슬프고, 음울하고, 신기하리만큼 오소마츠와 정반대라고. 두 사람이 어렸을 때 어땠냐고 카라마츠가 물었지만 오소마츠는 대답을 피하고, 카라마츠에게 키스했습니다. 평소와는 달리 잡아먹는 듯한 키스였어요. 이런 야외에서 하면 자극적이지 않겠냐고 오소마츠가 속삭이자 카라마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오소마츠를 밀쳐냈습니다.”

남자의 이야기가 만약 실화라면 아마도 남자는 오소마츠일 거라고 쵸로마츠는 생각했다. 자기 자신을 보고 순식간에 자신을 사랑하게 만드는 남자라고 묘사하다니. 나르시스트인가? 남자는 제법 잘생겼다. , 한번 보고 말 사람인데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으니까.

쿠키 좀 더 먹을 수 있을까요? 나중에 같이 계산하겠습니다.”

쵸로마츠가 머쓱해하며 빈 접시를 내밀자 남자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제가 같이 먹자고 한 건데요. 맛있으셨다니 다행이네요.”

남자가 빈 접시를 들고 다시 부엌으로 사라졌다. 이번에는 다른 종류의 쿠키가 접시에 담겨있었다. 남자가 직접 굽는 건가? 쵸로마츠는 사양하지 않고 하나를 집어먹었다. 남자는 뿌듯하다는 표정으로 쵸로마츠를 보곤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상 카라마츠에겐 첫사랑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오소마츠도 카라마츠를 사랑했죠. 두 사람은 거의 모든 일들을 함께 했어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서로에게 전화를 하고, 출근하기 전에 만나 같이 아침을 먹고, 같이 일을 하고, 같이 퇴근해서 저녁을 먹고. 곁에서 봤으면 눈꼴시다고 했을 법한 그런 연애를 했어요.”

남자가 살짝 웃었다. 카라마츠는 이 남자에게 어떤 사람일까. 쵸로마츠는 곰곰이 생각했다. 저렇게 자세하게 알 정도면 카라마츠는 남자의 여동생이거나, 혹은 누나거나 하지 않을까. 잠시 만요.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서 부엌으로 가더니 접시에 쿠키를 몇 개 담아와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렇게 길게 얘기를 한 게 오랜만이라 조금 지치네요. 같이 드시죠.”

내가 계산해야 되는 건가? 쵸로마츠는 긴가민가하면서도 사양하지 않고 쿠키를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달콤한 설탕 맛이 혀끝에서 녹아내렸다.

이야기에서 이렇게 행복한 부분은 쉽게 질려버립니다. 조금 뛰어넘어볼까요.”

남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카라마츠는 아이를 가지게 됩니다. 당연히 오소마츠의 아이였죠. 카라마츠는 사랑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카라마츠가 아이를 가지리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어 크게 놀랐습니다. 기적 같은 일이었죠. 카라마츠는 아직 어렸고, 아이를 갖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다가 오소마츠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오소마츠와 연락을 끊고 혼자 방에 틀어박혀 괴로워했습니다. 밤에는 이상한 꿈을 꾸었죠. 카라마츠가 울다 지쳐서 잠이 들면 오소마츠를 닮은 아이가 카라마츠의 머리맡에서 뛰어다니고, 오소마츠가 방문 앞에 서서 잠든 카라마츠를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기어 다니지도 못하는 어린 아기가 침대 밑에서 엄마를 찾으며 빽빽 우는 이상한 꿈이었어요. 그러면 카라마츠는 마치 가위에 눌린 것처럼 꼼짝도 하지 못하고 세 사람과 함께 밤을 지새웠죠.”

확실히 무서웠겠네요. 남자라서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카라마츠는 나이도 어리고.”

남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연락을 끊은 지 나흘이나 지났을까. 오소마츠가 새벽부터 카라마츠의 집 대문을 두들겼습니다. 사실 카라마츠는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기 때문에 오소마츠가 찾아오기 힘들었어요. 하지만 카라마츠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렇게 말도 없이 연락을 끊어버리자 오소마츠는 견디다 못해 카라마츠의 부모님과 한판 할 각오를 하고 카라마츠를 찾아온 겁니다. 부모님 마음에 들진 않았겠죠. 카라마츠는 아직 어렸고, 오소마츠는 직장 상사 같은 사람인데다가,”

남자가 잠깐 말을 멈췄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직장 상사 같은 사람인데다가, 배우라는 직업은 불안정하니까요. 딸을 가진 부모님에게 오소마츠의 연기력이라던가 카리스마를 설명하며 이 사람의 가능성을 믿어달라고 하는 건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카라마츠는 연애하는 것도 숨기고 있었는데, 오소마츠가 여기에 카라마츠가 있냐고 대문을 두드리니 집에선 난리가 났습니다. 부모님이 당황해 오소마츠를 집으로 들이자 오소마츠는 대뜸 허리를 깊게 숙이며 이 댁 따님과 교제를 하고 있는데 카라마츠와 연락이 되지 않아 찾아오게 되었다고 말했죠. 오소마츠가 대문을 두드리며 카라마츠를 찾는 소리를 듣고 카라마츠가 잠옷 차림으로 헐레벌떡 뛰어와 오소마츠를 맞닥뜨렸습니다. 오소마츠도 눈 밑이 퀭했고, 입술이 다 터서 카라마츠를 보고 달려가 끌어안았습니다. 부모님은 안중에도 없이. 왜 연락을 받지 않았으며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냐고,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거냐고 오소마츠가 반쯤 울먹거리자 카라마츠는 자기도 모르게 오소마츠에게 얘기해버렸죠. 임신했다고.”

그 뒤의 얘기는 다른 드라마들이랑 비슷하죠. 남자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부모는 도저히 딸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더러운 벌레를 보듯 저주를 하면서 카라마츠를 잠옷 바람으로 쫓아냈습니다. 오소마츠는 펑펑 울면서 자리에 주저앉는 카라마츠를 품에 안고 이젠 다 괜찮다고, 자기만 믿으면 된다고 하면서 자기 집으로 데려갔죠.”

오소마츠는 카라마츠가 임신한 걸 듣고도 놀라지 않았나요?”

쵸로마츠가 묻자 남자는 쵸로마츠의 주전자에 아직 식지 않은 뜨거운 물을 부어주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소마츠는 놀라지 않았어요. 놀라지 않은척한걸지도 모르죠.”

배우니까요.”

그렇죠. 배우니까요. 오소마츠의 집은 시내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굉장히 크고, 을씨년스러운 저택이었어요. 카라마츠가 깜짝 놀라 오소마츠를 돌아보자 오소마츠는 극단 일 때문에 시내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고, 여긴 본가라고 얘기했죠. 카라마츠는 부담스러워졌어요. 이런 집에 오소마츠가 혼자 살았을리도 없고, 오소마츠의 가족들이 과연 카라마츠를 받아줄 수 있을까. 카라마츠는 오소마츠에게 오소마츠가 살던 자취방에서 함께 살수는 없냐고 물었지만 오소마츠는 극단 동료들이 자주 오소마츠의 자취방을 찾아오기 때문에 카라마츠가 마음 놓고 있을 수가 없다고 거절했어요.”

카라마츠와 오소마츠가 사귀고 있는 걸 극단 사람들도 다 알지 않았나요?”

알고 있었죠.”

그런데 카라마츠가 임신한 걸 왜 극단 사람들이 알면 안 되는 거죠?”

남자는 한숨을 푹 쉬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건 저도 알 수가 없는 문제네요. 아마 둘만의 사정이 있었겠죠.”

남자는 정말 이유를 모르는 걸까? 쵸로마츠는 처음으로 남자의 말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오소마츠가 카라마츠를 데리고 저택으로 들어가니 그의 가족들이 나와서 카라마츠를 맞이했죠. 그의 어머니와, 오소마츠의 쌍둥이 동생. 오소마츠는 단 한 번도 카라마츠에게 동생이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없어 카라마츠는 깜짝 놀랐죠. 하지만 오소마츠의 동생은 오소마츠와 정말 닮았지만, 분위기는 정반대였어요. 어둡고, 조금은 음울한 분위기에 눈에 힘이 없었죠. 이 동생의 이름은, 이치마츠라고 할까요.”

쌍둥이 동생이 있다는 얘기를 안 하다니. 오소마츠와 이치마츠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쵸로마츠는 쿠키를 하나 더 집었다.

오소마츠의 어머니는 푸근하게 생긴 중년 부인이었습니다. 오소마츠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카라마츠는 자신의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오소마츠의 어머니와 이치마츠에게 욕을 먹고 저주받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오소마츠의 어머니는 카라마츠의 손을 부여잡고 고맙다고, 정말 잘 된 일이라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카라마츠는 예상외의 반응에 놀라 오소마츠를 돌아보았으나 오소마츠도 웃으며 카라마츠의 어깨에 손을 얹었죠. 하지만 이치마츠는 조금 달랐습니다. 이치마츠는 표정이 조금 굳었다가 그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불 꺼진 복도로 사라져버렸습니다. 아마도 이치마츠가 자길 탐탁치않게 여긴다고 생각한 카라마츠는 풀이 죽었지만, 오소마츠의 어머니가 카라마츠에게 얼마나 놀랐겠느냐, 힘들었겠느냐 하고 달래주는데 마음이 풀렸고, 이치마츠와도 잘 지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쵸로마츠는 남자가 그저 카라마츠와 그저 조금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야기의 묘사가 점점 자세해지고 있었다

룸메이트는 오늘도 외박을 했다. 쵸로마츠는 방에 혼자 남아 시계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기숙사 창문 너머로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어두운 방 벽에서 번쩍거렸다. 오늘은 혼자 있고 싶지 않아. 하지만 지금 기숙사에 남아있는 사람 중에 쵸로마츠가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는 편은 아닌데, 이렇게 늦은 시간에 사적으로 불러 대화를 할 만한 사람을 사귀지 못했다. 쵸로마츠는 한참 이불을 뒤집어쓰고 뒤척이다 결국 잠자기를 포기하고 외투를 입었다. 벌써 열한 시가 넘었으니 기숙사 문을 닫았을 시간이다. 하지만 오늘 밤 쵸로마츠는 조금 일탈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쵸로마츠는 기숙사 담을 뛰어 넘었다. 고등학교 때도 해보지 않은 짓을 이제야 해보다니. 쵸로마츠는 외투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한참 걸었다. 목적지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발 닿는 대로 반쯤 잠든 도시의 거리를 이리저리 헤집고 싶었다. 노란 가로등 불빛에 그림자가 길게 지는 골목을 따라 걸으며 쵸로마츠는 이 골목의 끝에 뭔가 새로운 것이, 쵸로마츠의 무료한 일상에 알록달록하게 색을 입혀줄 무언가가 있지는 않을까하고 기대했다.

과연 뭔가가 보였다. 고만고만한 크기의 주택가의 끝에 꼭 성냥갑 같은 작은 가게가 불을 밝히고 있었다. 쵸로마츠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열두시를 한참 넘긴 시간이었다. 혹시 아직 영업을 하고 있을까? 이 시간에만 문을 여는 곳일까? 뭘 파는 가게일까? 쵸로마츠는 가게에 가까이 다가가 창 너머로 가게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창가에 두꺼운 커튼을 반쯤 묶어놔 안이 잘 보이지 않았으나, 가게가 제법 넓었고, 테이블마다 사람들이 한 명씩 앉아 뭔가를 홀짝이고 있었다. 찻집인 모양이었다. 혹시 비싼 가게면 어쩌나 싶어 쵸로마츠는 창 너머로 아마도 계산대 위에 붙어있을 메뉴판을 찾았으나 그런 것은 보이지 않았다. 쵸로마츠는 잠깐 고민을 하다 문을 열고 가게에 들어섰다.

문에 붙은 작은 종이 울렸다. 하지만 가게 안에 앉아있는 사람들 중 단 한 명도 쵸로마츠를 돌아보지 않았다. 가게 안은 훈훈했고, 구석에 놓인 축음기에서 조용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기요.”

쵸로마츠가 계산대 앞에 서서 사람을 찾았다. 잠시 후에 아마도 부엌으로 보이는 곳에서 젊은 남자가 얇은 커튼을 헤치며 나타났다. 아마도 주인인 모양이었다. 남자의 외모는 꽤 매력적이었다. 자세가 곧았고 이목구비가 뚜렷했다. 남자가 미소 짓자 입이 시원하게 호선을 그리며 입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쵸로마츠는 남자가 여자들한테, 아니, 남자들한테도 제법 인기가 좋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지갑을 꺼내들었다.

커피 될까요?”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여기는 하루에 딱 한 가지 메뉴만 팔고 있습니다.”

쵸로마츠는 다른 손님들이 마시고 있는 것을 흘끗 돌아보았다. 다들 같은 음료를 마시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오늘은 뭘 마실 수 있나요?”

메뉴는 단 한가지뿐입니다. 오늘의 차를 팔고 있어요. 다만 차의 재료가 매일 매일 달라질 뿐.”

이상한 가게다. 쵸로마츠는 왠지 그 오늘의 차라는 것도 꺼림칙해 가게를 나가려고 했으나, 어느새 주인은 쵸로마츠의 팔꿈치를 잡고 빈 테이블로 안내하고 있었다.

앉아계세요. 곧 차를 내오겠습니다.”

쵸로마츠를 테이블에 앉히고 남자는 커튼 뒤로 사라졌다. 쵸로마츠는 좀 걱정이 되었으나 의자가 편해 곧 마음이 풀어졌다. 잠시 후에 남자가 투명한 유리 주전자와 찻잔을 내왔다.

유리 주전자 안에는 여러 색의 이파리 같은 것들이 떠다녔다. 짙은 선홍색인 것이 있었고, 투명하게 노란 것도, 새벽하늘을 한 자락 잘라놓은 것처럼 파란 것도 있었다. 남자는 쵸로마츠의 테이블 앞에 서서 차를 찻잔에 따랐다. 찻잎 색과는 다르게 찻물은 연한 녹색이었다.

잠깐만 기다렸다가 드세요. 많이 뜨겁거든요.”

남자는 쵸로마츠의 맞은편에 앉아 쵸로마츠에게 미소 지었다. 주인이 차를 따라주고 테이블에 앉아 접객을 하는 찻집이라니. 낭패다. 쵸로마츠는 얼른 차를 마시고 가게를 떠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벌써부터 찻값이 걱정되었다. 쵸로마츠는 찻잔을 들어 살짝 입술을 축였다. 차향이 독특했다. 한 모금 마셔보니 온몸에 온기가 퍼졌다. 나쁘지 않다. 물도 좋은 물을 쓴 것 같고, 찻잎도, 아니, 저게 보통 말하는 찻잎 같지는 않지만 꽤 향이 좋았다.

이 늦은 시간에 어딜 다녀오는 길이셨나요?”

남자가 물었다. 쵸로마츠는 차를 홀짝이다 찻잔을 내려놓았다.

다녀오는 길이 아니라 나오는 길이었습니다. 산책이죠.”

여기가 산책할만한 곳은 아닌데, 어딜 가려고 하셨는데요?”

목적지를 정해 두진 않았어요. 그냥 걷고 싶었거든요. 뭔가 재밌는 걸 찾고 싶기도 했고.”

, 남자가 테이블에 팔꿈치를 얹고 턱을 괴었다. 시선은 저 멀리 가게 전면창 너머를 향해있었다. 쵸로마츠도 남자의 시선을 따라 창을 돌아보았다. 지나가는 사람도 한 명 없이, 어두운 골목뿐이었다.

사실 우리 가게에는 눈에 확 띄게 재미있는 건 없어서, 안타깝네요.”

쵸로마츠는 속으로 생각했다. 고향 친구들한테 이런 가게에서 차를 마셨다고 하면 미쳤나고 할걸요. 남자는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쵸로마츠를 돌아보았다.

제가 아는 사람 얘기 중에 꽤 흥미로운 얘기가 있는데, 혹시 들어보실래요?”

나쁘지 않지. 쵸로마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자기 몫의 찻주전자와 찻잔, 그리고 뜨거운 물이 가득 든 주전자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 쵸로마츠의 유리주전자에 뜨거운 물을 더 부어주고, 자기 몫의 주전자에 물을 부었다. 남자의 찻주전자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보이지가 않았다.

제 친구 이름을 뭐라고 할까요. , 일단 카라마츠라고 불러봅시다.”

남자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상한 이름이네. 쵸로마츠는 다시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남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카라마츠라고 하니 남자이름 같지만 사실 여자에요. 하지만 이름은 바꾸지 않을게요.”

쵸로마츠가 피식 웃었다. 여자 이름이 카라마츠라니, 남자는 센스가 없었다.

카라마츠는 연극배우가 되고 싶어 성인이 되기도 전에 극단을 들어갔습니다. 학업에는 흥미가 없어 일찍이 학교를 그만두고 배우를 할 수 있는, 최대한 빨리 무대에 오를 수 있는 극단을 찾았죠.”

딱 사기당하기 좋은 먹잇감인데. 배우가 되겠다는 여고생이라니. 쵸로마츠는 벌써부터 카라마츠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카라마츠는 물어물어 어느 작은 극단을 찾았습니다. 비록 단원이 많지는 않았으나 제법 인지도가 높은 극단이었죠. 특히 엔터테인먼트 회사 관계자들이 자주 연극을 보러와 신인 연기자를 발탁해가기로 유명한 곳이었어요. 카라마츠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연극배우도 괜찮지만, TV에 나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하고 매달렸고, 운 좋게도 오디션을 통과해 극단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카라마츠가 연예인이 되는 이야기인가? 아님 연극배우로 대성한다던가? 쵸로마츠는 어느새 차를 한 잔 다 비우고 새로 차를 따랐다.

극단 생활은 나쁘지 않았어요. 카라마츠는 단원들과 두루두루 잘 어울렸고, 그러다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상대 남자의 이름은 뭐로 할까요. 여자 이름이 카라마츠니, 남자는 오소마츠라고 부를게요.”

쵸로마츠는 웃지 않으려고 애썼다. 남자가 잔잔하게 웃으면서 얘기하는 것으로 봐선 아마 남자가 그런 유머를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쵸로마츠도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변변찮은 남자였나봐요.”

남자가 씩 웃었다.

이름은 변변찮았지만, 오소마츠는 제법 연기를 잘 하는 배우였습니다. 동시에 극단에서 큰 영향력을 휘두르는 중요한 사람이었고, 카라마츠가 오소마츠에게 호감을 갖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몰라요. 오소마츠는 자기 개성이 강한 배우들 사이에서도 늘 중심에 서서 사람들을 이끌었고, 뻔뻔하리만치 자신감이 넘쳤죠. 아마 오소마츠를 좋아하는 사람도 꽤 있었을 텐데, 카라마츠가 오소마츠를 낚아채버렸죠.”

그럼 다른 여자들이 카라마츠를 질투했나요?”

아니요. 이상하지만 아무도 카라마츠를 질투하지 않았어요. 한명쯤은 시기했을 법도 한데 그렇지 않고 모두가 두 사람을 축복하고 응원해줬죠. 그런데 딱 한 명이 카라마츠를 따로 불러내 오소마츠를 조심하라고 귀띔해주었죠. 하지만 카라마츠는 사랑에 눈이 멀어 듣지도 보지도 않고 오소마츠에게 푹 빠져버렸습니다. 그만큼 오소마츠가 매력적이었어요. 어떨 때는 장난꾸러기 소년 같았고, 어떨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모든 걸 이해해주는 포용력 넓은 남자 같았고.”

남자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순식간에 자기를 사랑하게 만드는 사람.”

쵸로마츠는 기억을 되짚어 여태 만난 사람들을 떠올려보았지만 오소마츠 같은 사람은 없었다. 타고난 연예인 타입인가? 남자는 잠깐 이야기를 멈추고 찻주전자 뚜껑을 열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쵸로마츠는 찻잔의 온기를 느끼며 남자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길 기다렸다

전신이 욱신거렸다. 카라마츠는 온몸이 아프고 지쳐 반쯤 잠들었다가 불현듯 구역질이 올라와 그 집에서 뛰쳐나왔다. 고요한 밤, 온 거리에 크리스마스 장식이 가득한 날이었다. 크리스마스 이틀 전, 그리고 카라마츠가 첫 경험을 한 날이었다.

급하게 뛰쳐나오다 보니 외투도 제대로 걸치지 못했다. 카라마츠는 공원 벤치에 앉아 낡은 자켓을 힘겹게 여미며 몸을 옹송그렸다. 귀가 홧홧하게 달아오르고 입에서 단내가 났다. 아마 열이 좀 오른 모양이었다. 코끝이 차가워 고개를 들어보니 먼지 같은 눈이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나를 사랑한다고 했다. 카라마츠는 이를 악물었다. 형은 좋은 사람이었다. 길거리에서 노숙을 하던 카라마츠를 깨워 따뜻한 도시락을 사주고 자기 집으로 데려가 쉴 수 있게 해줬다. 바람이 들지 않는 방에서 자는 게 좋았다. 형이 아침 일찍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는 날이면 카라마츠는 그보다 더 일찍 일어나 밥을 짓고 국을 끓였고, 형을 배웅하고 나면 비록 작은 원룸이었지만 구석구석을 쓸고 닦았다. 진짜 가족 같았다. 죽은 듯이 누워있지도 않고, 일주일에 두세 번밖에 보지 못하면서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눈 적 없는 가족이 아니라, 매일 얼굴을 맞대고 그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초라하지만 따뜻한 밥을 나눠먹는 가족 같았다. 행복했다.

어제도 행복하고 오늘도 행복했어. 형은 크리스마스 내내 아르바이트를 해야 한다며 편의점 케이크와 달콤한 술을 사왔다. 카라마츠는 한 번도 크리스마스를 챙겨본 적이 없었다. 형이 조그만 케이크에 초를 켜고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분명히 캐롤로 시작했을 텐데 생일축하 노래로 끝나버린 이상한 노래였다. 어두운 방 안에서 케이크위에 꽂힌 초만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지만 꾹 참고, 형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게 걱정되어 발을 동동 굴렀다.

케이크 싫어해?”

형이 케이크를 잘라 주면서 걱정스럽게 물었다. 카라마츠는 고개를 젓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선물 준비를 못 했어…….”

형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코르크 마개를 따 카라마츠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단 냄새가 났다. 카라마츠는 잔을 들어 냄새를 맡아보고, 살짝 혀를 대보았다. 싸한 알콜 냄새와 단 맛이 어우러진 이상한 맛이었다.

건배하고 마셔야지.”

형이 자기 잔에도 술을 가득 따르고 잔을 들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카라마츠는 천천히 술을 마셨다. 목이 타들어갈 것 같았지만 카라마츠는 한 번에 잔을 비웠다. 역시 형이 좋아했다. 카라마츠는 나이는 어려도 어른이라니까. 형이 다시 잔을 채웠다. 케이크는 한 입쯤 먹었나. 카라마츠는 형이 따라주는 대로 단 술을 전부 마셨다. 나중에는 머리가 핑핑 돌고 속이 울렁거려 그만 마시고 싶었지만 형은 계속해서 술을 따랐다. 그러다 잠이 든 것 같기도 하고, 기절한 것 같기도 하고.

정신이 들었을 땐 몸이 반으로 접혀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다. 형이 한 번도 본적 없는 무서운 얼굴을 하고 카라마츠의 양 손목을 잡아 눌렀고, 카라마츠는 몸이 반으로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왔다. 아파. , 아파. 미처 아프다고 느끼기도 전에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 내렸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형이 짓누르는 무게가 무섭고, 꼼짝없이 그 밑에 깔려 힘없이 흔들린다는 무력감이 무서웠다. 한 번도 뭔가가 들어갈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곳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형은 카라마츠가 깬 걸 보고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카라마츠의 귓가에 속삭였다. 네가 예뻐서 그래. 네가 좋아서 그런 거야. 네가 널 사랑하게 만들어서 그러는 거야. 그 말을 듣고 카라마츠는 마음 놓고 엉엉 울었다. 형이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울어도 버리지 않겠지, 하는 마음에 카라마츠는 어린애처럼 울면서 형의 이름을 불렀다. 형은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몸짓이 빨라졌다.

추운데 앉아있어서 그런 건지 몸이 더 굳은 것 같았다. 형이 헉헉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다시 돌아가야 할까? 가고 싶지 않았지만, 카라마츠는 갈 곳이 없었다. 그때 저 앞에서 덜컹 하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들어보니 카라마츠 또래의 남자애가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었다. 그 아이도 카라마츠의 시선을 느꼈는지 이쪽을 바라보았다. 카라마츠처럼 집을 나온 건지 행색이 초라했다. 더벅머리에 커다란 마스크를 써 눈 한쪽밖에 보이지 않았고, 몸에 맞지 않게 큰 옷을 겹겹이 입어 우스꽝스러웠다. 카라마츠는 자기도 모르게 말을 걸었다.

거기서 뭐해.”

남자애는 잠깐 멈칫하다가 아무런 대답도 없이 다시 쓰레기통을 뒤졌다. 한참 깡통이 구르는 소리가 났다. 그러다 남자애가 누군가 먹다 버린 과자봉지 같은걸 찾아내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리 겨울이래도 그런 걸 먹으면 병 걸릴 텐데. 혼자 살려면 제일 중요한건 건강이야. 저 초짜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카라마츠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남자애에게 다가갔다. 그 아이는 발소리가 들리자 놀란 고양이처럼 휙 카라마츠를 돌아봤다. 눈에 경계심이 가득했다.

어디 가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

카라마츠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말했다. 남자애는 눈을 가늘게 뜨고 카라마츠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믿던가 말던가. 카라마츠는 몸을 돌려 근처 편의점으로 갔다. 걸을 때마다 골반이 아프고 다리도 쑤시고, 어깨도, 등도, 아니 전신이 다 아파왔다. 그렇지만 아까 그 아이처럼 바짝 마른 애는 쓰레기 같은걸 먹으면 바로 앓아누울게 분명해서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주머니의 동전을 다 털어 작은 컵라면을 샀다. 카라마츠는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 다시 아까 그 공원으로 돌아갔다. 있을까, 없을까. 남자애가 없으면 그냥 카라마츠가 먹어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남자애는 아까 카라마츠가 앉아 있던 벤치에 쪼그리고 앉아 카라마츠가 간 방향을 보고 있었다. 내 어딜 믿고 기다린 걸까. 믿는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건데. 카라마츠가 컵라면을 들고 있는 걸 보자 남자애가 눈을 크게 떴다.

뜨거우니까 천천히 먹어.”

카라마츠는 남자애에게 컵라면을 건네주고 곁에 털썩 앉았다. 남자애는 컵라면을 두 손으로 잡아 손을 녹이다가, 젓가락으로 면이 풀어진 걸 확인하고 허겁지겁 라면을 먹었다. 저러다 입천장 벗겨질 텐데. 하지만 카라마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 멍하니 눈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눈이 조금씩 쌓이고 있었다. 앙상하게 마른 나뭇가지에 눈이 쌓여 하얗게 빛났다.

남자애는 순식간에 컵라면을 비우고 바닥에 빈 용기를 내려놓았다. 카라마츠는 그새 또 깜빡 잠이 들었다가 남자애가 카라마츠를 잡아 흔드는 바람에 깼다.

아파?”

남자애가 머뭇거리며 말을 걸었다. 카라마츠는 말없이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다시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가 않았다. 어제도, 오늘도 행복했는데, 내일도 그러리라고 믿었는데. 카라마츠가 다시 잠에 빠져들려고 하자 남자애가 카라마츠의 양 겨드랑이에 손을 밀어 넣어 카라마츠를 일으켰다. 그냥 내버려두라고 하고 싶었는데, 말이 제대로 소리도 내지 못하고 흩어졌다. 남자애는 카라마츠를 질질 끌고 공원 안쪽에 있는 공중 화장실로 데려갔다. 중간에 몇 번씩이나 쉬었지만 남자애는 결국 카라마츠를 남자 화장실 안에 밀어 넣고 자기도 따라 들어와 문을 닫았다. 어두웠지만 창문도 닫혀 있었고 꽤 따뜻했다. 남자애는 카라마츠를 구석에 앉혀놓고 멀찍이 앉아 카라마츠를 지켜보았다. 시선이 따가워서 카라마츠는 눈을 감았다가 간신히 떴다.

병원 가야되는 거 아냐?”

병원 갈 돈 없어.”

부모님은?”

없어.”

남자애가 멈칫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카라마츠는 잠깐 그 집에서 아직도 자고 있을 형을 떠올렸다. 나를 찾으러 나올까? 자다가 내가 없어진 걸 알고 깜짝 놀라서 찾지 않을까? 하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이렇게 사라져버리면 형이 걱정할 테고, 또 카라마츠가 생활비를 벌어오지도 못하니까, 그 정도는해야 되지 않을까. 머리가 복잡했다. 그렇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은걸.

카라마츠가 자기도 모르게 마지막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는지, 남자애가 물었다.

왜 돌아가기 싫어?”

설명하기 힘들다. 카라마츠는 별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고 옆으로 누웠다. 바닥이 차가웠지만 카라마츠의 체온으로 곧 데워질 것이다. 뼛속까지 찬 기운이 올라왔지만 카라마츠는 애써 눈을 붙였다. 이렇게 있다 보면 잠이 오지 않을까. 자는 동안에는 아프지가 않다. 계속 잠만 자고 싶어.

그 때, 따뜻한 것이 카라마츠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들어 적당한 높이의 뭔가에 얹었다. 카라마츠가 간신히 눈을 떠보니 남자애의 다리였다.

, 바지에 닦았어.”

남자애가 변명하듯 손을 들어보였다.

그래……. 고마워.”

카라마츠는 웅얼거리고 남자애 쪽으로 몸을 틀어 웅크렸다. 남자애가 조심스럽게 어깨를 토닥이는 게 느껴졌다.

어딘지 모르겠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으면 나오는 게 좋아.”

어렴풋하게 남자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나오는 게 좋겠다. 카라마츠는 대답을 하려고 했지만 제대로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잠에서 깼을 땐 이미 해가 떠있었다. 남자애는 이미 떠난 뒤였다. 그 대신 남자애가 입었던 것 같은 크고 낡은 옷이 카라마츠의 위에 덮여있었다. 카라마츠는 기지개를 쭉 폈다. 허리가 좀 쑤시는 것 외엔 몸이 가뿐했다. 형도, 그 집도 잊어버렸다. 왠지 새로운 곳으로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카라마츠는 화장실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남자애는 보이지 않았다. 이름도 안 물어봤네. 그 애도 갈 곳이 없었으면 같이 가도 좋았을 텐데. 카라마츠는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었다. 언젠가 또 만날 날이 올까

오소마츠는 옆에 앉은 동생을 곁눈질로 흘끔 보았다. 평일 오전의 낚시터였다. 사람은 많았으나 아무도 없는 것처럼 고요하고, 간혹 아직 힘이 남아도는 물고기가 첨벙거리고 물 튀기는 소리만 들렸다. 수면에 부딪치는 햇살이 눈부시다. 내가 여태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건 사랑하는 동생을 곁에 둔 탓이 아니라, 하얗게 부서지는 햇살에 눈이 아린 탓일 것이다.

있지, 오소마츠.”

카라마츠가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동생들 앞에서는 늘 터프한 척 형님이라고 부르지만 나와 단 둘이 있을 때면 이름을 불렀다. 어릴 때는 형제 중에 누가 형이고 동생이고를 가리지 않고 이름을 불렀는데 어느 순간 카라마츠가 나를 형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형이 되고 동생이 되었다. 카라마츠는 그렇게 조금씩 멀어져갔다. 오소마츠가 형이 되고, 형님이 되고. 그렇게 카라마츠가 나에게서 독립해가는 게 가끔 섭섭해질 때면 이렇게, 다른 동생들을 따돌리고 단 둘이 집을 나왔다. 같은 이름이라도 네가 부르는 걸 듣는 게 좋아.

최근 고민거리가 좀 있는데.”

카라마츠의 목소리가 무거웠다. 아마 오늘 순순히 낚시터로 따라온 것은 이 얘기를 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괜히 웃음이 나왔다.

넌 고민 좀 하고 사는 게 좋은데? , 나도 그런가?”

사람들은 나보고 쓰라리다고 하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어. 내가 때린 것도 아닌데.”

카라마츠가 한숨을 푹 쉬었다. 쓰라리다니. 동생들이 가끔 그런 소리를 하곤 했다. 특히 막내가 사사건건 카라마츠의 옷이며 신발이며 하는 것들을 쓰라리다는 소리를 하며 지적하는데, 아마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머리가 굵어지고 오자키를 따라하며 터프한 남자처럼 굴었지만 사실 카라마츠는 그렇게 다른 사람의 말을 담아 놓고 두고두고 떠올리는 성격이었다. 어린애같다고 할수도 없고, 소심하다고 할 수도 없다. 카라마츠가 먼저 얘기를 꺼내기 전까지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그건 그냥 배려심이 많고 늘 다른 사람을, 특히 형제들을 생각하는 카라마츠의 천성이었다.

하지만 이 동생은 좀 모자란 구석이 있다. 물리적으로 때리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다분히 1차원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네가 다른 사람들에게 받는 상처는 뭐라고 생각해? 무시당하거나, 비웃음당하거나 하는 것들은 너에게 어떤 것으로 받아들여질까? 아프지 않아? 마음이 저릿저릿해지지 않아? 꼭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가 작아진 것처럼 눈 맞추고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어진 것 같은 기분, 느끼고 있지 않아?

그러나 카라마츠는 자기를 돌아보고 스스로를 감싸 안기는커녕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고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귀엽고, 멍청하고, 사랑스럽고. 자신의 상처에 둔감해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상처에도 둔감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된 일인지 네가 받을 상처는 알아보지도 못하고 네가 상처를 줬다는 사람들에게만 시선을 돌린다. 조금 안타깝다. 네가 상처를 받아 아파하고 있으면 내가 형이란 이름으로 은근히 끼어들어 네 편이 되어주고, 너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라고 속삭일 수 있을 텐데, 그럴 틈은 영 보이질 않는다.

나는 뭔가 내 속을 숨길 말을 떠올리며 낚싯대를 잡아 움직였다. 입질이 오지 않는다. 이래서야 연서 따위를 미끼로 내건 너와 별다를 바가 없어 부끄러운데 말이지. 나는 머리를 한참 굴리다 대답했다.

그게 너잖아? 다른 사람을 쓰라리게 하더라도 곧 적응하니까, 그냥 너는 그대로 있으면 돼.”

카라마츠는 미심쩍은 듯 곰곰이 생각을 하다 곧 고개를 끄덕였다. 도통 저 머릿속에서 어떻게 생각이 굴러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내 말이 맞는 거라고 믿고 더 이상 고민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겠지. 나는 너에게 그런 사람이다. 웬만해선 믿고 따를만한 형. 오묘한 기분이 든다. 너에게 과분한 영향력을 휘두르고 있다는데서 오는 우월감과, 그 영향력이 네 안으로 깊게 파고들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없다는데서 오는 무력함. 어느 하나를 떼어낼 수 없는 동전의 양면 같은 감정이었다.

물고기는 잡히지 않는다. 카라마츠의 낚싯대에도 소식이 없다. 내 낚싯대의 미끼로는 뭘 걸어놓았더라

이른 새벽 택시에는 이야깃거리가 많다. 지금 뒷좌석에 탄 두 남자도 그렇다. 백미러로 슥 훑어보니 아무리 봐도 얼굴이 똑같이 생긴 게 쌍둥이 같은데, 아까 택시를 탈 때도 그렇고 어딘가 모르게 초상집 분위기가 난다.

남자 둘이다. 한 명은 마스크를 써서 얼굴을 가렸었는데, 히터를 틀고 하니까 턱까지 마스크를 내렸다. 머리가 새집같이 부스스하고, 좀 구부정하고. 눈에 힘이 없다. 아까 보니까 트렁크에 커다란 짐가방을 하나 실었던데. 독립하는 걸까? 아님 여행?

다른 하나는 눈썹이 짙다. 생긴 건 옆에 탄 형제랑 똑같이 생겼는데, 이쪽은 자세도 바르고 허리가 꼿꼿하다. 그냥 얼굴만 봐선 멋쟁이일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잠옷 같은걸 입고 위에 어중간한 가죽자켓을 입었다. 역시 친인척이 급사해서 헐레벌떡 뛰어나온 건가. 그러면 짐가방은? 둘 중에 누가 형이고 누가 동생일까?

입이 근질근질하지만 먼저 말을 걸 수는 없다. 분위기가, 영 누가 말을 걸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가죽자켓을 입은 쪽은 눈가가 시뻘겋게 부어서 누가 옆에서 툭 치기라도 하면 울어버릴 것 같다. 마스크를 탄 쪽도 자기 형제를 힐끔힐끔 돌아보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사이가 안 좋은가? 아니지, 형제끼리면 달래주고 하는 걸 좀 어색하게 느낄 수도 있다.

아저씨. 잠깐만 멈춰주세요.”

마스크를 쓴 쪽이 입을 열었다. 가죽자켓을 입은 쪽이 의아하단 표정으로 돌아봤다. 딱히 급하지도 않고.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니 멈춰서 기다려줄 정은 있다. 나는 갓길에 차를 세우고 내려서 담배를 한 개비 입에 물었다.

형제도 내렸다. 마스크를 쓴 쪽이 내 눈치를 좀 보더니 도로 저 아래쪽으로 가죽자켓을 입은 쪽을 끌고 갔다. 나는 모른 척 고개를 돌렸지만,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새벽에, 차도 없는 도로에서. 일부러 엿들으려 한 건 아니지만 들리는 걸.

가죽자켓을 입은 쪽이 형제의 어깨를 붙잡고 고개를 처박더니 곧 무너졌다. 반쯤 매달리다시피 하면서 엉엉 울기 시작하는데 역시 부모님 상을 치르러 가는 모양이다. 마스크를 쓴 쪽은 달래주려고 하지도 않고, 가만히 서서 형제를 내려다보았다. 이쪽은 울지 않는다.

어떡하지. 이제 어떡하지.”

가죽자켓을 입은 쪽이 울면서도 간신히 입을 열었다.

뭘 어떡해. 운다고 해결될 일도 아냐.”

마스크의 목소리가 냉랭했다. 가죽자켓은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산채로 잡혀 먹히는 듯한 울음소리였다. 나도 괜스레 눈시울이 붉어졌다. 마스크 쪽이 형이겠지. 동생을 달래주고 싶은걸 거야.

마스크는 한참 그대로 서 있다가 가죽자켓의 머리를 쓸어내리다, 가죽자켓의 멱살을 잡고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우는 소리가 좀 줄었다.

누가누가 알았을까. 우리 너무 오래 있었어. 들킬 수밖에 없는 건데, 왜 몰랐지.”

가죽자켓이 목이 매여 간신히 말했다. 오래 있어? 들키다니? 부모님이 돌아가신 게 아닌가?

그럼 안 들킬 거라고 생각했어?”

마스크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그냥 나랑 장난질 좀 치다가 그만두면 된다고 생각했냐? 그냥 잠깐 재미만 보고 말고?”

형제끼리의 대화라고 치기엔 뭔가 이상했다. 이걸 더 들어도 될까? 하지만 묘한 호기심이 들어 아주 조금, 두 사람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가까이 다가갔다. 가죽자켓이 엉엉 울면서 뭐라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카라마츠. 똑바로 얘기해.”

마스크가 카라마츠라고 부른 형제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자세가 달라서 그런가. 카라마츠가 마스크보다 조금 더 커 보이는데 카라마츠는 맥없이 멱살을 잡혔다.

“흡, 이치마츠, 우린우린 방금 가족을 버린 거야.”

카라마츠가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공중에서 민들레 홀씨가 흩날리는 것처럼 놓아버린 목소리였다. 이치마츠가 작게 욕을 몇 마디 했다.

엄마도, 아빠도, 형제들도. 우리가 방금 버렸어. , 문고리를 잡은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이제 다 알거야.”

카라마츠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야반도주를 했구나. 둘이. 세상에. 쌍둥이끼리 야반도주를 해? 그것도 남자 쌍둥이가? 어디 가서 얘기라도 했다간 거짓말이라고 욕먹기 딱인 얘기였다. 이치마츠가 씨발, 하고 카라마츠를 밀쳤다.

그러면 처음부터 얘길 했어야지! 시발, 나 갖고 놀다가, 놀다가 적당히 때 되면 버리고 돌아 갈 거라고 얘길 했어야 될 거 아냐! 넌 그러고도 나랑 다시 보통 형제들처럼 될 거라고 생각했어? 병신아 너는 이제 나 보면 꼴린다고! 그게 정상이야? 너는 원래부터 정상 같은 거 아니었어. 너도 나도, 우린 존나 병신새끼들이라고!!!!”

이치마츠가 소리 질렀다. 텅 빈 도로에 이치마츠의 비명 같은 고함소리가 가득 찼다가 훅 하고 꺼졌다. 카라마츠는 놀라 우는 것도 멈추고 이치마츠를 올려다봤다. 어쩌다 그랬을꼬. 쌍둥이에, 보니까 다른 형제들도 있고. 간혹 따로 자란 남매들이 커서 만났다가 자기들이 한 핏줄인줄도 모르고 사랑에 빠진다는 얘기는 본거 같은데, 한 배에서 동시에 태어나서 같이 자란 형제가 눈이 맞았다니. 좀 소름이 돋기도 하고 기분이 나빴다. 담배 한 개비를 다 태웠지만 두 사람은 아직 차를 탈 생각이 없어 보인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카라마츠는 바닥에 주저앉아서 멍하니 이치마츠의 바지자락을 붙잡고 있었다. 추울 텐데. 이치마츠는 고개를 눈가를 연신 닦아냈다.

내가 미안해. 내가 말렸어야 했는데.”

카라마츠가 중얼거렸다. 울음기는 거의 가신 목소리였다.

내가 형인데, 내가 그래도 이러면 안 되는 거라고 말렸어야 했어.”

지랄하지 마. 우린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어. 너도, 나도 언젠간 달려들었을 거라고.”

우리 죽을까?”

죽으면 끝날 줄 알아?”

온 세상 사람들이 우리 형제인거, 쌍둥이인거 한눈에 알아볼 거 아냐. 그냥 게이도 아니고 쌍둥이 근친이라고.”

얼굴 갈아버리면 돼. 다 뜯어고치지 뭐.”

넌 얼굴에 손댈 생각 하지 마. 내가 할 거니까. 이치마츠가 마스크를 뒤집어쓰고 카라마츠를 일으켜 세웠다.

꼬라지 봐라.”

이치마츠가 퉁명스럽게 얘기하면서도 카라마츠 바지에 묻은 흙을 털어주었다. 카라마츠는 다시 훌쩍거리다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우리 돈도 없는데 어쩌지.”

아까 통장에 있는 거 헐어서 일단 잘 곳부터 구하고, 그다음에 막노동이라도 뛰지 뭐.”

진짜 죽어도 안 끝나는 걸까?”

죽는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지. 나는 속으로 대답했다. 두 사람이 어디로 도망을 가든 간에, 이치마츠가 어떻게 얼굴을 고치든 간에 세상 사람들의 이목이 그들에게 집중될 것이다. 보니까 가족들에게 들킨 모양인데 가족들이 그들을 그저 내버려둘까? 부모는 아들 둘이 붙어먹었다고 그냥 알아서 살아라 하고 놓아줄까? 내 자식들을 떠올려보니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절대 안 된다. 어떻게든 두 사람을 갈라놓고 제대로 살도록 말릴 것이다. 저 형제는 아직 어려서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세상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건 녹록치 않다. 동성애자라는 것도, 형제라는 것도. 언젠가 사랑이 식으면 두 사람도 지쳐 나가떨어지고 말 것이다. 두 사람이 이제 정리가 된 모양인지 차 쪽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해가 뜨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얼른 담배를 끄고 차에 타 시동을 걸었다. 그 사이에 차가 식어 시트가 오싹했다. 택시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태웠다. 연예인도, 야쿠자도, 정치인도, 범죄자도. 불륜 커플을 태운 적도 적지 않았다.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라고 눈물겹게 서로를 어루만지던 커플이었다. 하지만 저 둘은 달랐다. 나는 저 두 사람을 내 차에 태우면서 정말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가 있을까.

형제가 차에 탔다. 아까보다 좀 가까이에 붙어 앉아서, 이치마츠가 카라마츠의 손을 잡고 있었다. 카라마츠가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았지만 이치마츠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이제 가죠, 하고 말했다. 나는 백미러를 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차에 시동을 걸었다.

뒷좌석에서 간혹 카라마츠가 숨을 고르려고 심호흡을 하는 소리가 났지만 별 다른 대화는 없었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어린 커플이었다. 순진하고, 사랑이면 모든 게 해결 되리라고 믿는 젊은이들. , 누구더라. 로미오와 줄리엣의 결혼식을 올려주고 줄리엣에게 죽은 듯 잠드는 약을 주었던 성직자가 떠올랐다. 나는 그저 두 사람을 태우고 운전을 할 뿐이었지만 그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다. 생각보다 징그럽다던가, 더럽다던가 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이 육욕을 쫓고 배덕감을 즐기려고 그런 관계가 된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사랑에 빠진 운명의 희생자 같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한껏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지만 별 다른 대화가 오고가지는 않았다. 둘 중 한 사람의 휴대폰이 진동했지만 곧 멈췄다. 전원을 끈 모양이었다. 나는 두 사람을 기차역까지 태워다주고, 돈을 받았다. 가방은 작았다. 저 안에 뭐가 들어있을까. 야반도주를 하면서 챙겨 나올게 뭐가 있을까. ? 통장? 옷가지? 자식뻘인 나이였다. 한 끼 밥을 거르고 하루 밤을 새우는 게 무섭지 않은 젊은이들이었다. 곧이어 다른 손님이 택시를 불렀다.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해도 될까? 쌍둥이로 태어나서 사랑에 빠진 형제가 야반도주 하는 걸 태웠다고? 아니. 다른 건 몰라도, 잘못 없는 사람의 불행한 이야기는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나는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두 사람이 행복하기만을 빌어줄 수는 없었다. 비윤리적이고 부도덕한 사랑이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이 불행하지 않기를 바랄 수는 있다. 불행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해서든.

카라마츠는 자리에 똑바로 누워 눈을 감고 형제들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형제들은 모두 잠든 것 같았다. 좀 더 기다려야 하나. 카라마츠가 괜히 긴장되어 몸을 뒤척이려고 한 순간, 조금 거칠고 차가운 손가락 끝이 카라마츠의 손바닥을 천천히 긁었다. 물에 새빨간 잉크 한 방울을 떨어뜨린 것처럼 그 손가락이 닿은 곳부터 가슴께까지 찌르르 저려 왔다.

이치마츠는 일주일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다른 형제들에게 물어보면 카라마츠가 집을 비웠을 때나 혹은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돌아와 해가 뜨기 전에 나갔다고 했다. 후회하고 있을 테지. 이치마츠도. 차라리 이치마츠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해주길 바랬다. 그랬으면 카라마츠는 그 무거운 실수를 한 순간의 추억으로 남겨놓고 모른 척 다시 평소처럼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치마츠의 방황은 카라마츠에게 후회와, 슬픔과, 부정한 기대감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먼저 나서서 이치마츠를 찾아보려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만약 카라마츠가 이치마츠를 맞닥뜨렸을 때 카라마츠와 똑같이 생긴 얼굴 위로 미처 숨기지 못한 혐오감이 스친다면, 카라마츠는 와르르 무너져버릴게 분명했다. 지금 이 순간을 최대한 만끽하고 싶었다. 고양이가 들어있는 상자 같은 거야. 그 안을 들여다보기 전까진 고양이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할 수 있는 거지. 언제까지 뚜껑을 닫아둘 수 있을지 모르지만.

불도 켜지 않고, 커튼도 젖히지 않았다. 카라마츠 자신의 손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방. 라면박스들과 철지난 옷가지들, 낡은 책장, 경첩이 망가진 옷장, 손댄지 한 십년은 족히 된 장난감 박스가 좁은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설핏 잠에 들었다가, 갑자기 지금 눈을 뜨면 이치마츠가 곁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잠에서 깼다. 하지만 카라마츠의 곁은 처음 잠자리에 들었을 때처럼 차갑게 비어있었다. 카라마츠는 다시 잠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척이다 창고로 올라갔다. 이치마츠의 글이 읽고 싶었다. 사실 여러 번 읽은 만큼 머릿속에 내용이 남아있긴 했지만, 활자로 남은 글을 읽고 싶었다. 어딘가에 습작이라도 남아있지 않을까. 책장 구석에 반쯤 쓰다 만 노트들이 가득 꽂혀있으니까 그중에 하나쯤은 이치마츠가 쓰던 노트일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창고 문고리를 돌려 여는 순간 카라마츠는 자신이 아무것도 읽을 수 없을 것이란 걸 깨달았다. 창고 안에는 온통 이치마츠의 숨소리와, 카라마츠의 목을 감싸던 손, 주저하던 입술의 기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카라마츠는 잠깐 가쁜 숨을 쉬다가, 비틀거리며 걸어가 벽에 기대앉았다. 카라마츠는 뭔가 오해를 하고 있었다. 직접 죽은 고양이를 얼굴에 들이밀기 전까지는 고양이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고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 이치마츠가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만약에, 자신을 고등학생 때부터, 혹은 그 전부터 좋아해왔다고 하더라도 카라마츠는 이치마츠를 말렸어야 했다. 아님 그 자리에서 바로 이치마츠에게 장난이 심했다고 주먹질이라도 했어야 했다. 아예 없던 일로 돌아간다는 선택지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 지금 울어야할 것 같은데. 카라마츠는 멍하니 문을 바라봤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포기했던 감정이라 눈물이 차있을 자리도 남아있지 않은 건가.

그때, 1층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카라마츠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질질 끄는 듯한 발소리가 천천히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양 손으로 입을 막았다. 비명을 지를 것만 같았다. 발소리가 계단을 올랐다. 점점 가까워졌다. 발소리는 창고 문 앞으로 다가오면서 조금씩 느려지다가, 창고 앞에 멈췄다. 상자가 이제 열리려고 하고 있었다.

문이 열렸다. 카라마츠는 이를 악물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치마츠의 등 뒤로 집안이 새벽 푸른빛으로 은은하게 물들어있었으나 이치마츠는 어두워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카라마츠는 입을 열고 뭔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치마츠는 한참 카라마츠를 응시하다가,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방안에 적막이 흘렀다.

이치마츠가 천천히 방을 가로질러 카라마츠 쪽으로 다가왔다. 이치마츠에게도 카라마츠의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전신의 신경이 바짝 곤두서서 이치마츠를 향해있었다.

이치마츠.”

카라마츠가 바싹 마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답은 없었다. 이치마츠는 조용히 카라마츠의 곁에 주저앉아 그의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댔다. 이치마츠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카라마츠의 뺨을 간지럽혔다. 새벽 공기냄새가 났다.

 

두 사람은 시간 간격을 두고 방을 빠져나왔다. 꼭 약속한 것처럼 불은 켜지 않았다. 카라마츠가 여러 번 뒤를 돌아보며 창고로 올라가면 이치마츠가 간신히 형체만 구별될 정도로 어두운 방안에서 조용히 카라마츠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다 할 대화는 없었다. 두 사람은 그저 서로에게 기대앉아 가만히 체온을 느끼거나, 아니면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밤을 새우고 해가 뜨기 전에 잠자리로 돌아가면 한참 늦게까지 잠을 잤다. 낮밤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아침에 억지로 일어나 아침밥을 먹고 생활을 하더라도 반쯤 잠에 취해있었다. 밤이 낮이고 낮이 밤인 것 같았다. 창고에서 이치마츠를 만나는 순간이 정신이 또렷한 낮이었다. 카라마츠는 두 사람이 창고에서 불을 켜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창고에서 이치마츠의 얼굴을 보게 되면, 해가 떠 있을 때 이치마츠를 평소처럼 대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이렇게 촉각만으로 이치마츠를 느끼는 게 좋았다.

하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문 밑으로 은은한 불빛이 비쳤다. 카라마츠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치마츠가 작은 스탠드를 켜놓고 카라마츠를 기다리고 있었다. 은은한 백열등 불빛에 이치마츠의 얼굴이 반쯤 뚜렷하게 보였다. 카라마츠와 너무도 닮은 얼굴. 자라오면서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누가 봐도 자신의 얼굴임을 부정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카라마츠가 문을 닫고 들어와서도 계속 주저하며 서 있으니까 이치마츠가 말없이 고갯짓으로 옆자리를 가리켰다. 카라마츠가 머뭇거리다 이치마츠의 앞으로 다가오자 이치마츠가 카라마츠의 손목을 잡고 잡아당겨 그의 다리 위에 카라마츠를 앉혔다. 카라마츠가 뭐라고 물을 겨를도 없이,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보이는 게 좋아.”

이치마츠가 웅얼거렸다. 카라마츠는 잠깐 멈칫했다가, 어리광부리는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무서운 이야기나 해볼까.”

안 돼. 그럼 또 토도마츠가 화장실 갈 때 두 명 깨운단 말이야. 나 내일 면접도 있고.”

그래도 오늘은 왠지 무서운 이야기를 해야 될 분위기잖아? 비도 오고, 달도 없고.”

할 얘기 있어?”

사실 오늘 낮에 이상한 걸 봤는데, 적당한 분위기가 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지.”

와 오소마츠 형 진짜 성격나쁘다니까.”

시끄러. 우리 초등학교 다닐 때 같은 반이었던 노비타 기억나? 그 왜, 안경 쓰고 작은 애. 오늘 그 공사하다가 망한 상가 앞쪽을 지나가는데, 걔가 어딜 가는 진 몰라도 엄청 급하게 뛰어 가는 거야.”

노비타가 아직도 우리 동네 살고 있었어? 못 본 지 꽤 된 것 같은데?”

그러게? 나는 걔 이사간걸로 알고 있었는데. 걔 중학교도 우리랑 다른 데로 갔잖아.”

어느 중학교?”

모르겠는데……. 이 동네 애들은 다 우리 다녔던 학교로 갔던 것 같은데 중학교에서 한 번도 못 봤으니까 막연하게 다른 학교로 갔겠구나 하고 있었지.”

근데 내가 걔를 어떻게 알아봤는지 궁금하지 않아?”

노비타처럼 생겨서?”

아니, 초등학생 때 그대로더라고.”

그때 그 모습 그대로. 키도 하나도 안 크고 늙지도 않고 하여간 그대로.”

? 그게 말이 돼?”

영원한 소년이라는 건가……. 그것이 젊음…….”

카라마츠, 오소마츠 형이 말할 때는 좀 의심도 해보고 그래.”

카미카쿠시? 노비타 납치당했던 거야?”

그런 걸지도?”

오소마츠 형, 적당히 좀 해. 카미카쿠시라니?”

그치만 진짠걸. 내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이젠 뽕도 빠냐? 아님 눈뜨고 걸어 다니면서 잤어?!”

진짜 싫다.”

그런데 중요한건, 걔가 어딘가를 급하게 뛰어가고 있더라는 거지. 붙잡을 겨를도 없었어.”

노비타네 친척 아니야?”

아냐. 딱 보기만 해도 그냥 노비타였어. 게다가 노비타 같이 생긴 애가 지구상에 둘이나 있으면 좀 불쌍하지 않아?”

우린 여섯 명인데!”

쥬시마츠 형, 저건 욕하는 거야.”

아 진짜 헛소리였다. 난 잠이나 잘래.”

있지, 나도 오늘 무서운 얘기 들었는데.”

.

.

.

.

자 다음! 무서운 얘기 안 한사람?”

나 화장실 가고 싶으니까 빨리 하고 끝내…….”

그냥 화장실 갔다 와.”

무서워서 안 돼.”

쥬시마츠랑 갔다 오지?”

쥬시마츠 형은 문 앞에서 안기다려주고 막 복도 뛰어다닌단 말이야. 그럼 더 무서워.”

하긴 그건 그래.”

그럼 이치마츠 차례?”

솔직히 이치마츠가 사람 팬 얘기만 해도 무서울걸?”

맞아. 아님 우리 몰래 파묻은 시체얘기.”

아냐, 난 이치마츠를 믿어.”

닥쳐. 쿠소마츠.”

이치마츠, 생각나는 거 있어?”

생각나는 얘기라기 보단.”

“?”

지금 우리 방에서 나는 노크소리, 무섭지 않아?”

“.....”

“.....”

“.....”

“.....”

“.....”

, 역시 나만 듣고 있던 게 아니구나.”

뭐야. 다들 듣고 있었어?”

나만 헛소리 듣고 있는 거 아니라 니네 다 듣고 있던 거야?”

이치마츠가 장난치고 있던 거 아니고?”

그럴 리가. 천장에서 나는 소린데.”

, 역시 천장이었구나. 어쩐지.”

오소마츠 형이 바닥 두드리는 소리 아니었어?”

형은 자기도 확인하려고 무서운 얘기 시작한 거잖아. 우리 다섯 명중에 누구라도 먼저 얘기해줬으면 해서.”

형 나 무서워.......”

,

똑똑,

드르륵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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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집게손가락이 따끔거려 보니 얄팍하게 베인 상처가 있었다. 아마 문집을 읽다가 종이에 베었는데 알아채지 못했던 모양이다. 카라마츠는 핏방울이 살짝 맺힌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 핥았다. 바짝 말라붙은 혀끝에 선득한 피 맛이 스쳤다.

겨우 세 권이었지만 카라마츠는 문예부의 문집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원래 책을 찾아서 읽을 만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가끔 다른 일을 하고 있다가도 문득 이치마츠가 쓴 글을 읽고 싶어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카라마츠는 하던 일을 내려놓고 이치마츠가 어디 있는지, 혹시 이치마츠가 티도 내지 않고 카라마츠가 하는 걸 지켜보고 있지는 않는지 확인한 뒤 2층 창고에 올라가 먼지 가득한 책장 사이에 꽂아둔 문집을 찾았다. 시 두 편, 단편 소설 한편, 그리고 유행하던 소설에 대한 비평. 여러 번 읽어 이미 다 아는 내용이었지만 가끔 카라마츠의 입안에서 맴도는 글귀가 있었다.

이치마츠는 좀처럼 형제들에게 자신이 쓴 글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했다. 밤새 글을 써놓고 형제들이 보여 달라고 하면 벌써 버렸다던가 아님 학교 사물함에 두고 왔다던가 하면서 피하곤 했다. 야한 거라도 쓰나보지? 오소마츠가 키득거렸지만 이치마츠는 그저 미간을 찌푸릴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마감을 맞춰야한다고 이치마츠는 사흘 밤을 새워가며 글을 썼다. 창고 문 밖으로 은은하게 새어 나오는 불빛을 보면서 카라마츠는 이번에 꼭 문예부의 문집을 사겠다고 마음먹었다. 이치마츠가 싫어할지도 모르지만, 카라마츠는 형으로서 이치마츠를 응원해주고 싶었고 한편으론 이치마츠가 보여주고 싶지 않은 자신의 한 부분을 살짝 들여다보고 싶었다. 네가 형제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부분은 뭘까. 태어난 이래로 늘 함께 해온 형제들에겐 보여주고 싶지 않지만 아예 낯선 타인들에겐 보여줄 수 있는 너의 어쩌면 연약하고, 새빨갛게 날것인 부분.

카라마츠는 일찍이 연극 홍보지를 돌리고 문예부실에 들렀다. 문예부원 둘이 나란히 앉아 문집을 팔고 있었다. 몇 권 팔리지 않은 건지, 아니면 애초에 많이 뽑은 건지 문집은 한참 쌓여있었다. 카라마츠는 부원들에게 이치마츠에겐 비밀로 해달라고 신신당부하고 돌아섰다. 카라마츠는 문예부실의 문을 닫고 나오며 문집의 차례를 뒤져 이치마츠의 글을 찾았다.

 

한 번도 의심을 해본 적이 없는 남자가 있었다.

이치마츠의 숨소리가 느껴졌다. 카라마츠는 단편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읽고, 한 글자 한 글자를 꼭꼭 씹었다. 네가 바라보는 세상은 이렇구나, 이치마츠. 상처받은 날의 햇빛은 고운 모래알갱이가 쏟아지듯 내리쬐어 살갗에 닿을 때마다 쓰라리고, 장대비가 쏟아지는 밤엔 세상에 빗물이 차올라 그대로 어두운 심해 밑바닥에 가라앉는 꿈을 꾸는구나.

이치마츠가 없을 때 은근히 다른 형제들에게 물어봤지만 문예부 문집을 샀다는 사람은 없었다. 카라마츠는 왠지 다른 형제들은 모르는 이치마츠를 혼자만 알게 된 것 같아 한편으론 뿌듯하고, 한편으론 부끄러웠다. 보통의 형제들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축제 때마다 문집이 나왔다. 3학년 땐 대학 입시를 준비한다고 이치마츠가 바빴기 때문에 문예부 활동도 제대로 하지 않는 것 같았는데 혹시나 하고 산 문집엔 이치마츠가 쓴 시가 실려 있었다. 이게 마지막이겠지. 카라마츠는 아쉬워하며 문집을 책장 구석에 꽂았다.

 

이치마츠는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이치마츠는 문예부 활동을 할 때처럼 밤늦게까지 글을 쓰지도, 책을 읽지도 않았다. 카라마츠는 늘 이치마츠가 뭔가 대단한 일을 해낼 것이라고 믿었다. 공부를 따로 하지 않아도 문학성적은 거의 만점이었고, 비록 문집에 실린 것밖에 보지 못했지만 이치마츠는 제법 글을 잘 썼다. 카라마츠가 전문적인 문학 비평가는 아니지만 이렇게 많이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생각난다는 건 이치마츠가 글을 잘 썼다는 뜻이 아닐까. 이치마츠는 작가도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사실 대학에 가지 않는다고 작가가 될 수 없는 것은 아닐텐데. 카라마츠는 못내 아쉬웠다. 

 

덜컹, 카라마츠의 등 뒤에서 방문이 열렸다. 깜빡하고 문을 잠그지 않았던 모양이다. 카라마츠는 깜짝 놀라 읽고 있던 문집을 던지듯 내려놓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치마츠였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를 보고 마찬가지로 놀란 것 같더니, 곧 카라마츠가 손에 들고 있던 얇은 책을 알아보았다. 고등학생 때부터 거의 6년을 숨겼는데 이렇게 들킬 줄이야. 카라마츠는 속이 쓰라렸다.

니가 그걸 왜 보고 있어.”

이치마츠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그는 척척 다가와 문집을 집어 들고 단숨에 반으로 찢어버렸다. , 카라마츠가 탄식했다. 카라마츠가 이치마츠의 글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 실린 문집이었다.

이거 하나밖에 없어?”

카라마츠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 찾아서 나오면 진짜 죽여 버릴 거야.”

진심이다. 카라마츠는 다시 고개를 끄덕일 엄두도 내지 못하고 구석에 숨겨놓았던 이치마츠의 문집 두 권을 더 찾아 내밀었다. 씨발, 이치마츠는 문집을 건네받자마자 쫙쫙 찢어 걸레짝으로 만들었다. 그리곤 더러운 걸 만졌다는 듯 손을 바지에 문질러 닦고 다가와 카라마츠의 멱살을 잡았다.

이치마츠! 너 지금 형한테!”

재밌었냐? 이렇게 숨겨놓고 보면서 재밌었어? 혼자 비웃으니까 재밌었어?”

이거 놓고 말해!”

이치마츠는 놓기는커녕 카라마츠의 멱살을 잡은 채로 바닥에 넘어뜨렸다. , 하고 찧은 허리가 아팠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위에 올라타 후드 안에 두 손을 밀어 넣고 목을 움켜쥐었다. 이치마츠의 차가운 손에 카라마츠의 동맥이 펄떡거리고 뛰는 게 느껴질 것이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손목을 부여잡고 떼어내려고 했지만 이치마츠는 단단히 힘을 줘 카라마츠의 목을 내리 눌렀다. 천천히 목이 졸렸다. 이치마츠의 무게까지 더해져 카라마츠는 있는 힘껏 발버둥을 쳤지만 이치마츠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카라마츠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자, 이치마츠가 그제서야 손에 준 힘을 풀었다. 카라마츠는 한참 헉헉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완력은 카라마츠가 훨씬 우위에 있을 텐데, 지금 놀란 탓인지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사실, 카라마츠는 동생들을 상대론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이치마츠는 이상한 표정으로 카라마츠를 한참 내려다보았다. 뭔가 물을게 많은 것 같아 보이기도 했고, 원망스러운 것 같기도 했고, 아님 화가 잔뜩 난 것 같기도 했다. 카라마츠는 숨을 고르고, 이치마츠의 밑에서 빠져나오려고 몸을 돌렸지만 이치마츠가 놓아주지 않았다.

어땠어?”

이치마츠가 갑작스럽게 물었다. ? 카라마츠는 놀라 고개를 돌렸지만 이치마츠는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로 카라마츠를 그저 응시할 뿐이었다.

어땠냐고, . 저거 다 봤을거아냐.”

카라마츠는 말문이 막혔다. 그가 느낀 걸 그대로 읊을 수는 없었다. 그건 카라마츠가 글에 대해 느낀 것도 있지만, 그가 동생에게 갖는 은밀한 욕망이 뒤범벅되어 칼로 무 자르듯 분리하여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카라마츠가 망설이자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내가, 이런 걸 뭐라고 평가를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카라마츠가 운을 떼자 이치마츠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소설이 제일 좋았어.”

뭔가 소설을 읽으면서 드는 감상이 있었는데 아무것도 생각나지가 않았다. 떠오르는 감각이 있었지만 말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색깔이라던가, 소설의 배경이 되는 비오는 풍경이라던가, 아니면 운동장 같은걸 표현할 수는 있겠지만 입안에서 맴돌기만 하지 밖으로 나오지가 않았다. 이치마츠는 얌전히 카라마츠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뭔가 대답을 해야 될 텐데.

좋았어?”

이치마츠가 입을 열었다. 카라마츠는 생각할 것도 없이 응, 하고 대답했다. 이치마츠가 묘한 표정을 하고 카라마츠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너 말고 본 사람 있어?”

아니, 아마 없을걸. 회지 산 것도 나밖에 없었고…….”

다른 형제들에게 얘기하지 않겠다고 하면 이치마츠가 놔주지 않을라나. 카라마츠는 지금 얘기를 해도 되는 건지 아닌지 이치마츠의 눈치를 살폈다. 사실 이치마츠가 목에서 손을 놓고 카라마츠의 위에 올라타 있는 지금 카라마츠는 간지러운 기분이 들어 가만히 바닥에 누워있을수가 없었다. 안그런척 하려고 애썼지만, 이렇게 밀폐된 좁은 공간에서, 낯설지만 오래된 감정을 가진 대상과 함께 붙어있는다는건 카라마츠에게 이상한 기대감을 가지게 했다. 이치마츠가 얼른 비켜줬으면, 그럼 카라마츠는 단숨에 화장실로 돌아가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고 혹시 이치마츠에게 이상한 내색을 하지 않았는지 확인해볼수 있을 텐데. 이치마츠는 카라마츠가 빠져 나오려고 계속 몸을 들썩여도 놓아주지 않았다.

이치마츠는 대뜸 한 손을 들어 카라마츠의 눈 위를 덮었다. 이치마츠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도망가고 싶으면 도망가.”

잠긴 목소리가 들렸다. 카라마츠는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리고 바짝 말라 카라마츠가 계속 혀로 축이던 입술에 천천히 부드러운 것이 내려앉았다. 부드럽고, 살짝 젖어서, 독한 담배냄새가 은근하게 나는. 카라마츠는 자기도 모르게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멈춰야 될 것 같은데. 이치마츠가, 무슨 장난을 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이렇게 누워있으면 안될 것 같은데. 하지만 입 밖으론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이치마츠의 입술이 느리게 카라마츠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스치다, 카라마츠가 헉, 하고 숨을 들이마시자 매끈한 혀가 천천히 미끄러지듯 카라마츠의 입술을 가르고 들어와 혀를 건드렸다. 살짝, 마치 무섭다는 듯. 등줄기를 타고 전기가 흐르는듯 팔다리가 움찔거렸다. 이치마츠는 잠시 기다리다 카라마츠의 혀를 휘감으며 부드럽게 쓸고, 입 안에 여린 점막을 훑다가 혀를 세워 입천장의 예민한 살갗을 건드렸다. , 하고 신음소리가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카라마츠는 점점 숨이 가빴다. 지금 이치마츠의 목에 팔을 둘러도 될까? 카라마츠가 망설이다 천천히 팔을 드는 순간, 이치마츠가 순식간에 떨어져나갔다. 카라마츠는 온몸에 힘이 풀려 일어날 수가 없었다. 어느새 해가 져 방안은 어두컴컴해졌다. 이치마츠는 마른세수를 하다 바닥에 엉망으로 흩뿌려진 종잇조각을 긁어모았다. 묻고 싶은 말이 많은데, 이치마츠는 아무 것도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혹시 지금 한 게 키스가 아닌가? 아님 이치마츠가 그저 동정의 호기심에 키스가 해보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이치마츠가 지금 쓰고 있는 글에 키스장면을 넣고 싶은데 마지막으로 해본 게 너무 오래되어 제대로 기억이 안 난다던가? 아니면, 나랑 키스해서 좋았어? 나는좋았는데. 하지만 입 밖으론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방안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이치마츠가 한때 카라마츠가 아끼던 문집이었던 종잇조각들을 후드 주머니에 쑤셔 넣고 몸을 돌려 방문 손잡이를 잡았다.

혹시, 그 소설 주인공, 나였어?”

카라마츠는 자기도 모르게 묻고 당황해 얼굴을 가렸다. 뭐라는 거야. 지금 쌍둥이 동생이랑 키스하고 할 말이 그거밖에 없어?

.”

이치마츠의 잠긴 목소리가 아주 조용히, 꼭 한숨소리처럼 대답하고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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