쥬시마츠는 샛노란 트럭을 타고 나타났다. 어두컴컴한 거리에 옅은 가로등 불빛을 받아 트럭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바퀴 주변이나 트럭 뒤쪽에 흙먼지가 좀 묻어있긴 했지만 꽤 현실감이 없는 광경이었다. 쥬시마츠는 도로 한가운데에 트럭을 세우고 카라마츠에게 달려와 카라마츠를 번쩍 들어 카라마츠가 뭐라고 말리기도 전에 조수석에 태우고 안전벨트를 채워주었다.

왠지 닥터는 차 같은 거 타지 않고 날아다니실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한겨울 바깥에 있었던 탓인지 트럭 안이 얼어붙을 것처럼 차가웠다. 카라마츠는 몸을 바짝 웅크리고 덜덜 떨었다. 쥬시마츠는 버튼을 이것저것 눌러가며 히터를 틀고 환기를 시켰다.

저기, 카라마츠 씨에겐 말을 못했지만.”

쥬시마츠가 차 핸들을 붙잡고 머뭇거렸다. 카라마츠는 조금이라도 덜 차가운 부분을 찾아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다 고개를 돌렸다.

카라마츠 씨도 잘 모르고 저를 찾아오신 것 같더라고요.”

?”

쥬시마츠는 뭐라고 말할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핸들에 붙어 있는 해바라기를 꾹 눌렀다. 꼭 소리 나는 인형처럼 해바라기가 납작하게 눌렸다가 원래 모양으로 돌아오면서 뾰로롱 하고 새소리를 흘렸다.

벌써 세시 이십분이네요.”

쥬시마츠가 핸들을 단단히 붙잡고 엑셀을 밟았다. 차 엔진소리가 낮게 깔렸다. 어두운 트럭 안으로 가로등 불빛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차 속도가 점점 빨라져 카라마츠는 자기도 모르게 차 문 위쪽에 붙은 손잡이를 잡았다. 쥬시마츠는 카라마츠를 한번 돌아보고 내비게이션을 켰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건가요?”

여기서 동쪽으로 한 두어 시간 달리면 동생이 돌보는 작업장이 나와요. 햇살 농축액은 해가 하늘에 떠 있을 때면 언제든지 짜낼 수 있지만, , 잠시 만요.”

쥬시마츠가 말을 멈추고 다시 해바라기를 두 번 꾹꾹 눌렀다. 그러자 이번엔 야옹, 하고 고양이 울음소리가 났다.

다행이다. 오늘은 날이 맑다네요! 카라마츠 씨, 이제 병의 원인을 알았고 또 증상도 심각하니까 이제 한 번에 해치워버립시다!”

해치워요?”

사실 카라마츠 씨가 지금까지 맞아 왔던 농축액은 100퍼센트 농축액을 시냇물 소리로 희석시킨거에요. 맞을 때 뜨겁지 않았어요?”

그러긴 했는데 심하진 않았어요.”

쥬시마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햇살 원액은 그것보다 훨씬 뜨겁고,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하는거에요. 자칫하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방법은 그것뿐이에요. 저는 카라마츠 씨가 물건을 잃어버린 사람의 저주로 그렇게 얼어붙는 줄만 알았는데, 카라마츠 씨가 직접 빈 소원이라 풀 수 있는 방법이 얼마 없어요…….”

쥬시마츠가 말문을 흐렸다. 그렇구나……. 카라마츠는 도로 옆으로 휙휙 지나가는 소나무와 잣나무 숲을 멍하니 보았다. 카라마츠가 멍청한 짓을 한 걸까?

그렇지만 카라마츠 씨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런 소원이 실제로 이뤄지려면, 온 마음을 다해서 진심으로 바래야만 실현되는거에요. 카라마츠 씨는 착하고, 상냥하고, 다정하니까.”

닥터는 이제 마음도 읽을 수 있는 건가. 카라마츠가 고개를 돌리자 쥬시마츠는 핸들을 양손으로 꽉 붙잡고 정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온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닥터도 상냥해요.”

카라마츠가 씨익 웃었다. 쥬시마츠는 눈도 돌리지 않았으면서 카라마츠가 웃는 걸 봤는지 따라서 환하게 웃었다.

사실 말은 못했지만, 카라마츠 씨는 제 첫 손님이에요.”

병원이요?”

제가 치료사가 되고 처음으로 받은 손님이요!”

치료사요? 의사가 아니라요?”

, 둘 다 닥터지만 조금 달라요.”

쥬시마츠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시험에 통과하고 병원을 차리려고 했는데 사기를 당해서 그런 외진 건물 옥상에 병원을 짓게 되어버렸어요.”

경찰에 신고는 하셨어요?”

하긴 했는데, 벌써 바다 밑으로 들어가 버려서 잡을 수가 없더라고요.”

쥬시마츠가 한숨을 푹 쉬었다. 차는 어느새 낯선 들판 위를 달리고 있었다. 작고 낡은 집들이 한 채씩 드문드문 떨어져 있었고, 알록달록하게 빛나는 운하가 그들 곁에서 도로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

손님은 오지도 않고, 혼자 있으려니까 심심한데 나가서 놀았다가 그 새에 손님이 오면 어쩌나 싶어서 혼자 병원에서 야구만 하고 있었는데, 카라마츠 씨가 온 거에요.”

그 안에서 야구가 돼요? 유리병은요?”

쥬시마츠가 활짝 웃으며 카라마츠를 한번 돌아보았다.

카라마츠 씨가 첫 손님이라서 기뻤어요. 사실 치료사로서 모든 손님을 공평하게 소중하게 대해야 된다고 배웠지만, 나쁜 사람이 아니라 카라마츠 씨라서 더 열심히, 행복하게 치료를 할 수가 있었고요.”

쥬시마츠는 카라마츠의 대답도 듣지 않고 음악을 틀었다. 차 안에 은은한 노랫소리가 흘렀다. 가사는 없었고, 여자가 하프 소리에 맞춰 허밍을 하고 있었다.

조금만 자요.”

카라마츠는 눈을 감고 조수석 구석으로 파고들었다. 여자의 목소리가 좋다고 생각하다가 카라마츠는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카라마츠 씨, 도착 했어요!”

쥬시마츠가 카라마츠의 안전벨트를 풀고 조심스럽게 카라마츠를 흔들어 깨웠다. 어느 새 차는 멈춰있었고, 하늘이 연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쥬시마츠는 카라마츠의 양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카라마츠를 번쩍 들어 품에 안았다.

무거울 텐데 내려주세요. 걸어가겠습니다.”

카라마츠가 잠긴 목소리로 웅얼거렸지만 쥬시마츠는 아랑곳하지 않고 카라마츠를 안고 저벅저벅 걸어갔다.

저어기, 저 커다란 쟁반같은 거 보여요?”

카라마츠가 뻣뻣해진 고개를 조금 돌리자 은빛 바탕에 수박 무늬 같은 게 그려진 거대한 쟁반이 들판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게 보였다. 쥬시마츠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저 밑에서 첫 햇살을 짜낼거에요. 그리고 그걸 카라마츠 씨의 심장 위로 떨어뜨리는 거죠.”

그럼 이제 낫는 건가요?”

그럴거에요. 아쉽지만......”

왜 아쉬워요?”

쥬시마츠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카라마츠 씨가 다 나아버리면 이제 병원에도 오지 않을 거고, 그럼 또 저 혼자 남아야 하는 거니까요...... 아 물론, 카라마츠 씨가 더 이상 아프지 않는 건 좋아요!”

쥬시마츠가 말을 황급히 덧붙였다.

놀러갈게요.”

카라마츠가 쥬시마츠 쪽으로 몸을 조금 돌려 안기면서 말했다.

병원 문에 부재중 팻말 걸어놓고 나가서 야구도 하고, 우리 놀이공원에도 놀러오세요.”

그래도 돼요?”

그럼요. 직원할인 받아서 표도 싸게 살 수 있어요.”

쥬시마츠가 킥킥거리며 웃곤 카라마츠를 들어 어깨에 짊어졌다.

닥터?”

금방 도착할거에요!”

쥬시마츠는 카라마츠의 허리를 단단히 잡고 거의 나는 것처럼 달려가기 시작했다. 카라마츠는 쥬시마츠의 옷을 꽉 붙잡고 쥬시마츠의 트럭이 거의 샛노란 점처럼 멀어지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쥬시마츠랑 야구를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쥬시마츠가 공 던지는 걸 받으면 카라마츠의 손이 날아갈지도 모른다고, 카라마츠는 괜한 말을 했다 싶어 후회했다.

어느새 그 은쟁반 앞에 도착했다. 쥬시마츠는 멀미를 하느라 휘청거리는 카라마츠를 바닥에 앉혀놓고, 은쟁반 밑에 아주 조그만 입구로 다가가 입구 옆에 놓인 화분 밑을 뒤적거렸다. 화분 밑을 뒤졌다가, 창틀 구석구석으로 손으로 쓸어보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카라마츠가 앉아있는 쪽으로 다가와 거의 카라마츠만 한 바위를 번쩍 들어 그 밑에서 조그만 열쇠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열쇠로 문을 열었다.

가시죠!”

쥬시마츠가 자기 옷에 손을 슥슥 닦고 카라마츠에게 손을 내밀었다. 카라마츠는 그 손을 잡고, 어두컴컴한 실내로 들어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쥬시마츠는 길을 알고 있는 것 같아서, 카라마츠는 쥬시마츠에게 바짝 달라붙어 걸었다. 저 멀리에서 천장에 구멍이 뚫린 건지 빛이 내려오는 곳이 있었다.

멀어서 힘들지는 않아요?”

아뇨, 아까부터 계속 안아주셔서 괜찮아요.”

쥬시마츠가 카라마츠의 손을 꽉 붙잡았다.

“100퍼센트 원액을 담을 수 있는 병은 없어요. 그래서 아마 카라마츠 씨가 저 밑에 누워서 심장에 바로 햇살 원액을 맞아야 할 거에요. 제가 정말 조심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역시 쥬시마츠가 말하는 햇살 농축액이라는 건 선샤인이 맞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여태까지 받아온 쥬시마츠가 놔준 햇살 농축액이나 오일같은 건 다 효과가 있었으니까. 첫 환자라고 해도 쥬시마츠는 꽤 능력이 있었다.

걱정 안 해요.”

 

쥬시마츠는 구석에서 간이침대를 끌고 와 카라마츠를 눕혔다. 카라마츠는 윗옷을 벗어 얌전히 밑에 내려놓고 자리에 누웠다. 공기가 차가워 팔에 소름이 돋았다. 쥬시마츠는 꼭 치과에서 볼법한 작업대에 앉아 버튼을 이것저것 눌렀고, 그러자 위이이잉 하는 소리가 나더니 천장에 나 있던 구멍이 정말 바늘만 하게 줄어들었다. 쥬시마츠는 카라마츠가 누운 침대를 이리 저리 움직여 그 구멍이 정확히 카라마츠의 심장 위에 닿도록 맞췄다.

이제 움직이면 안돼요!”

쥬시마츠가 한껏 긴장된 표정을 짓고 있어서 카라마츠는 덩달아 겁이 났다.

혹시 치료를 받다가 죽을 수도 있나요?”

가능성이 없지는 않아요……. 원액을 맞고 또 한참을 요양해야 하구요.”

카라마츠는 바지 주머니를 뒤적여 지갑을 꺼냈다.

정말 만에 하나 제가 죽으면 부탁드릴게요. 나중에 치료비는 이 카드로 결제하면 되고요, 여기 신분증에 적힌 주소가 제 집입니다. 그리고 이건 오소마츠 형 전화번호니까 여기로 전화해서 제가 죽었다고 얘기해주세요.”

쥬시마츠가 지갑을 받아들고 두 손으로 꼭 쥐었다가 작업대 위에 올려놓고, 카라마츠의 손을 잡았다.

카라마츠 씨.”

?”

제가 카라마츠 씨를 좋아한다고 하면 어떨 거 같아요?”

카라마츠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면서 한참 고민했다. 쥬시마츠도 좋지만, 글쎄, 이렇게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인가? 두 사람은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또 만약 이게 고백이라면, 그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카라마츠가 신중하게 생각을 해보는 게 예의일 것이었다.

나중에 대답해도 될까요?”

쥬시마츠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쥬시마츠가 천장에 달린 길쭉한 레버를 당기자 천장이 쿵쿵 하고 울리기 시작했다.

이제 쟁반으로 햇빛을 모을 거에요. 쟁반이 꼭 우산을 접는 것처럼 점점 오므라들 거고, 그럼 안에서 햇살이 부글부글 끓으면서 툭툭 튀어오를거에요. 그걸 쟁반이 꾹꾹 눌러서 짜내면, 그게 햇살 농축액이 됩니다.”

천장에서 뭔가 톡톡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카라마츠는 배 위에 두 손을 곱게 모으고 천장에 뚫린 구멍을 올려다봤다. 쥬시마츠가 아차, 하더니 작업대 밑에서 웃기게 생긴 선글라스를 두 개 꺼내 하나를 카라마츠에게 씌워주고 남은 하나는 자기가 썼다.

꼭 쓰고 있어야 돼요! 안 그러면 눈이 타버려요!”

쥬시마츠는 초조하게 작업대 앞에 앉아 손을 꼼지락 거리다가 천장에 달린 레버를 조금씩 조금씩 더 뒤로 당기기 시작했다. 천장에서 꼭 콩이나 탁구공이 떨어지는 것처럼 톡톡거리던 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하면서, 꼭 팝콘을 튀기는 것처럼 펑펑 하고 터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천장에 난 틈 사이로 모래알 같은 게 스르륵 떨어졌다. 쥬시마츠가 카라마츠를 업고 옥상에서 떨어졌던 게 떠올랐다. 카라마츠는 화들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쥬시마츠를 소리쳐 불렀다.

닥터!”

?”

, 제가 당장 대답할 수는 없지만,”

뭐를요?”

제가 여기서 살아서 나간다면 데이트부터 시작해도 될까요?”

쥬시마츠가 레버를 놓고 카라마츠에게 다가와 카라마츠의 손을 꼭 잡았다.

데이트면, 같이 카라마츠 씨가 일하는 놀이공원으로 가는거에요?”

가서 동물원 구경도 하고, 솜사탕도 먹고, 놀이기구도 타는 건데, 닥터가 재밌어 할지는 모르겠어요.”

아뇨, 재밌을거에요.”

쥬시마츠가 활짝 웃으면서 카라마츠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리곤 잽싸게 손을 놓고 달려가 레버를 잡아당겼다. 천장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가 점점 더 커져 카라마츠는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햇살이라는 건 쉽게 짜낼 수 있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카라마츠는 눈을 꼭 감고 샛노란 옥수수 알갱이 같은 햇살이 점점 커지면서 우산처럼 오므라든 쟁반 안을 이리저리 튀어다는 것을 상상했다. 쥬시마츠가 낑낑거리면서 레버를 당기는 소리가 들렸다. 쥬시마츠는 제법 힘이 센 것 같은데 저렇게 힘들어할 정도라니. 카라마츠는 조금 겁이 났다. 펑펑 터지는 소리는 조금씩 줄어들고, 이젠 철썩 철썩 하고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햇살이 녹아 흐르고 있는 건가? 쥬시마츠가 놔주던 햇살 농축액은 황금빛이 정말 예뻤는데, 원액도 직접 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 카라마츠는 못내 아쉬웠다. 그때 쥬시마츠가 소리를 질렀다.

카라마츠 씨!”

?”

이제 진짜 꼼짝하면 안돼요!”

원액을 떨어뜨리려고 하는 것 같았다. 카라마츠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배 위에 올린 손이 하얗게 되도록 꼭 잡았다. 그 때 바늘로 가슴을 콕 찌른 것처럼 따가움이 느껴졌다. 카라마츠는 놀라 눈을 번쩍 떴고, 눈앞에 꼭 유리로 만든 기다란 바늘 같은 게 카라마츠의 가슴 위로 떨어지는 것을 멍하니 봤다. 빛이 카라마츠의 심장 안으로 파고들고 있는 걸까? 카라마츠의 심장이 꼭 불에 타들어가는 것처럼 아파왔다. 카라마츠는 신음 소리를 참으려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참으면 돼요!”

쥬시마츠가 멀리서 소리쳤다. 카라마츠의 심장에서부터 발끝까지 뜨거운 빛이 흘러가고 있었다. 뜨겁고, 아프고, 따끔거리면서 카라마츠는 꼭 전신이 활활 타는 것만 같았다. 기절이라도 하면 좋을 텐데, 온 몸의 신경이 바짝 일어서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조금만!”

다른 생각을 하자. 다른 생각을. 카라마츠는 뇌까지 녹아서 찰박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무시하고 금붕어와 팬더, 기린 얘기를 하던 아이를 떠올렸다. 여기서 살아서 나간다면 아이를 찾아봐야겠다. 아이가 부모를 찾았을까. 부모는 아이를 찾으려고 했을까. 쥬시마츠가 놀이기구를 타면 재밌어 할까? 순간 펑, 하고 카라마츠의 심장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터졌다고 생각했다. 카라마츠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땐 이미 집이었다. 카라마츠는 멍하니 이불을 덮고 천장을 보다가 심장에 손을 올렸다. 더 이상 춥거나 떨리거나 하는 증상은 없었다. 심장도 멀쩡하게 잘 뛰고 있었고,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온몸이 개운했다. 꼭 햇살 농축액을 막 맞았을 때처럼. TV를 켜보니 월요일 아침이었다. 주말 내내 잠들어있던 걸까? 카라마츠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침대에서 카라마츠의 지갑이 툭 떨어졌다. 아마 쥬시마츠가 여기까지 카라마츠를 데려다 준 모양이었다. 카라마츠는 지갑을 주워들어 이러 저리 내용물을 살펴보고, 또 침대 주변이나 탁자 위 같이 눈에 뜨이는 곳을 전부 훑어보았지만 쥬시마츠가 남겼을법한 쪽지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아니, 하나 낯선 물건이 있었다. 카라마츠는 식탁 위에 놓여있는 해바라기를 들어 그 가운데를 꾹 눌렀다. 그러자 뾰롱, 하고 새 소리가 들렸다.

 

? 카라마츠, 병원은 길 동쪽이 아니라 서쪽이라고! 대체 겁도 없이 어떻게 그런 데를 간 거야?”

오소마츠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카라마츠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렇지만 다 나았는걸?”

햇살 농축액을 맞아서? 아니 그게 마약이라던가 아니면 불법 시술일수도 있는 거 아냐? 뭘 믿고 몸을 맡긴 거야? 병원이 수상하다 싶으면 다른 병원을 찾아가봐야지!”

카라마츠는 머쓱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카라마츠는 그닥 큰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오소마츠의 귀에는 영 터무니없는 얘기로 들리는 것 같았다. 오소마츠가 혹시 사기를 당한 게 아니냐며 카드 내역을 살펴보라고 했지만 쥬시마츠의 병원에서 긁은 기록은 남아있지 않았다.

돈이 안 나갔으면 뭐 다행이긴 한데……. 혹시 카라마츠 신장같은 거 뺏긴 거 아냐?”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러면 흉터가 남아있겠지?”

사실 흉터가 남긴 남았다. 카라마츠가 아침에 샤워를 하려고 옷을 벗자 아마 그 바늘이 닿았을 법한 자리에 황금색으로 작은 나무 가지 모양의 흉터가 남아있었다. 카라마츠는 흉터를 손으로 살살 문질러 보았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쥬시마츠에게 물어보면 설명해주지 않을까? 하지만 오소마츠는 극구 말렸다. 운 좋게도 그런 시술을 받고 몸이 나았다고 하더라도, 다시 찾아갈만한 곳은 아니며 의심도 좀 해보고 살아야 한다고. 카라마츠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쥬시마츠에게 데이트부터 시작하는 게 어떠냐고 했었는데, 그리고 쥬시마츠는 나쁜 사람같이 보이지도 않았고.

실례합니다!”

누군가 분실물센터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섰다. 손님인가? 카라마츠는 그날 발견된 분실물을 적어두는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카라마츠의 책상 위에 정말 거대한, 꼭 꽃집에서 파는 모든 꽃들을 있는 힘껏 묶어 놓은 것 같은 알록달록한 꽃다발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달고 새콤한 꽃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카라마츠 씨랑 동물원 구경하러 왔는데, 잠깐 괜찮을까요!”

오소마츠는 옆에서 꽃다발을 보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카라마츠의 어깨를 잡았다.

누구야?”

카라마츠는 웃음이 나오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의사 선생님!”

사실 별 중요한 얘기가 아닐지도 모르고, 이게 제 병이랑 연관된 게 맞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

쥬시마츠의 손이 날개뼈 밑을 꾹꾹 눌러왔다. 숨이 턱턱 막히면서도 시원했다.

주말이었어요. 날씨도 선선하고 공기도 맑은 날이라 손님들이 정말 많이 왔었습니다. 그만큼 물건을 잃어버린 사람도 많고, 찾겠다고 모여드는 사람들도 많아서 하루 종일 정신이 없었죠. 밥 먹으러 나갈 겨를도 없어서 오소마츠 형이랑 간신히 도시락을 사다가 먹었으니까.”

쥬시마츠는 아무 대답도 없이 카라마츠의 등에 기름을 바르는데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얘기를 해도 되는 걸까? 카라마츠는 가만히 장작 타는 소리를 들었다. 누군가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저희 사무실 옆엔 미아보호소가 있어요. 놀이공원이 워낙 넓어서 그런지 미아들이 제법 많이 옵니다. 그날도 엄마 손을 놓쳤다고 우는 애들이 한 여덟 명은 됐던 것 같은데, 그 중에서 한 아이가 좀 이상했어요. 다른 애들은 펑펑 울거나 아니면 잔뜩 겁먹어서 직원들한테 안겨있는데, 그 아이는 놀라지도 않고 그냥 다른 애들이 우는 걸 이상하단 눈으로 쳐다보고만 있는 거에요. 이상하지 않아요? 그 애가 한 대여섯 살쯤 되어 보였는데, 그땐 엄마랑 떨어지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느낄 나이잖아요. 그런데 그 아이는 직원이 이름과 집 주소, 전화번호, 부모님 성함 같은 걸 물어봐도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대답도 하질 않는 겁니다. 아이가 발달이 느린 아이였거나 그러진 않았어요. 다른 건 물어봐도 대답을 잘 했거든요. 제가 과자랑 음료수를 나눠주니까 고맙다고 인사도 꾸벅 하고, 혹시 놀라서 그런 건가 싶어 아이를 안고 여기 저기 주변을 걸어 다니면서 말을 거니까 자기는 기린이 좋고, 병아리는 귀엽고, 팬더는 조금 무섭다 하는 얘기를 조잘조잘 잘도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신상에 관한 얘기는 은근히 돌려서 물어보기만 하면 금세 알아차려서, 아무 말도 없이 풀죽은 표정만 짓고 있었어요.”

쥬시마츠가 카라마츠의 등에서 손을 떼고 오일병 뚜껑을 닫았다. 그리곤 카라마츠가 옆에 벗어두었던 윗옷을 조심스럽게 입혀주고 카라마츠의 어깨에 이불을 덮어주었다.

오일은 바를 만큼 발랐으니까, 이불 덮고 있어요.”

수고하셨어요.”

쥬시마츠는 활짝 웃고 자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카라마츠에게 물었다.

그 아이가 부모를 찾았나요?”

아니요. 아이는 정말 한마디도 하질 않아서 그날 하루 종일 다른 애들이 부모님 손을 잡고 떠나는 걸 멀뚱히 보기만 하다가 결국 경찰서로 갔어요. 그 뒤에 일은 알 수 없었어요. 아마 미아보호소 쪽에서 CCTV 화면 같은걸 확인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일하는 쪽이 아니니까.”

카라마츠 씨가 속상했겠네요.”

쥬시마츠의 목소리가 따뜻했다. 카라마츠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다음 말을 꺼내기 위해 숨을 골랐다.

그날 저녁에 마감을 하고 집에 돌아가는데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아이 생각이 났어요. 병아리는 조류고, 팬더는 포유류고, 금붕어는 어류라고 얘기할 만큼 똑똑한 아이가 왜 자기 이름도, 전화번호도, 집주소도 얘길 하지 않았는지. 그런데 그날 밤 혼자 저녁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아이 마음이 이해가 되는 거에요. 아이가 어쩌면 부모님을 찾고 싶지가 않았다던가, 아니면,”

아니면?”

부모님에게 버려질 거라고 미리 예상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사실 아이가 부모님에게 반항해서 손을 놓고 도망쳤다고 하면 부모님은 당연히 놀이공원 직원들이 아이를 미아보호소로 데려올 거라는 걸 아니까, 그 쪽으로 아이를 데리러 왔겠죠? 하지만 그 아이를 데리러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엄마도, 아빠도, 할머니 할아버지도. 그냥 동네 공원도 아니고 주거지역에서 한참 떨어져있는 놀이공원인데, 아이가 거기까지 혼자 왔을 리는 없잖아요.”

부모가 아이를 버리러 온 거네요.”

카라마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쥬시마츠는 의자를 침대가로 조금 더 가까이 붙여 앉았다.

그렇게 생각을 하니까 아이의 행동들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어요. 다른 사람이 자기 부모를 찾아낼 수 있을 법한 정보는 하나도 가르쳐주지 않고, 담담하게 버려짐을 받아들인 거에요. 속상했어요. 그렇게 조그맣고 귀엽고 똑똑한 아이가 왜 버려져야 하는지, 그리고 아이는 왜 거기에 분노하거나 부모를 원망하지도 않고 얌전히 버려지는지. 이건 좀 많이 나간 것 같지만, 부모가 아이에게 계속 암시를 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넌 필요 없는 아이고, 널 어딘가에 버리고 올 거라고 하면서.”

가슴이 차가워지는 게 느껴졌다. 쥬시마츠도 눈치를 챘는지 소매를 걷어 올리고 조심스럽게 카라마츠의 심장 부근을 만졌다.

많이 슬펐나봐요. 카라마츠 씨의 심장이 다시 얼어붙고 있어요.”

슬펐어요. 속상한 건가. 사실 그 아이가 제 자식도 조카도 아닌데, 그냥 그날 하루 미아보호소 쪽에 사람이 부족해서 아이를 돌봤을 뿐인데 그냥 그 어린 아이가 버려진다는 게 속상해서 마음이 안 좋았어요. 차라리 아이가 펑펑 울면서 부모를 찾았다면 더 나았을지도 몰라요.”

버려질 준비가 되어있는 아이라니까 더 속상해져서……. 카라마츠가 말을 흐렸다. 쥬시마츠는 침대 가에 바싹 붙어 카라마츠의 한쪽 뺨을 감싸고 카라마츠의 눈을 들여다봤다. 쥬시마츠의 눈이 맑고 깨끗해서, 카라마츠는 그 눈동자에 자기가 비춰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카라마츠 씨가 소원을 빌었군요.”

소원이요?”

소원이라는 게 늘 대단한 건 아니에요. 카라마츠 씨가 진심으로 뭔가를 바라게 되면, 그게 소원이죠.”

…….”

무슨 소원이었어요?”

저는 어른이니까, 아이가 받았을 상처를 제가 받았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쥬시마츠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카라마츠는 그냥 눈을 비비는 척만 하려고 눈가에 손을 가져다 댔는데, 마른 눈에서 아주 조그만, 모래알 같은 알갱이가 툭 떨어졌다. ? 카라마츠가 놀라 눈을 비비자 양쪽 눈에서 차가운 알갱이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선생님……, 이게 뭐죠?”

쥬시마츠가 한쪽 손을 카라마츠의 눈 밑에 가져다 댔다. 조금 따끔거렸다. 쥬시마츠는 몇 분 동안 가만히 손을 대고 있다가 손안에 든 것을 카라마츠에게 보여주었다. 투명한 얼음 알갱이가 한 스푼정도 담겨있었다.

카라마츠 씨의 눈물이에요. 안되겠다. 지금 일단 작업장까지 가고, 첫 햇살을 받아야겠어요.”

쥬시마츠의 손 안에 든 것은 체온에 순식간에 녹아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카라마츠는 멍하니 녹색 카펫에 얼룩이 생기는 것을 물끄러미 보았다. 눈에서 저런 게 나오다니. 진짜 죽는 건가? 쥬시마츠는 병원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커다란 가방 안에 물건을 마구 쑤셔 넣었다. 카라마츠는 눈물 얼룩이 증발해 점점 옅어지는 것을 보다가 침대에서 일어나 이불을 정리하고, 야구배트와 글러브 위에 겹겹이 쌓여있는 겉옷을 하나씩 주워 입었다. 카라마츠가 아이의 상처까지 떠안길 바랐기 때문에 카라마츠가 이렇게 얼어붙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아이가 받았을 상처는 얼마나 심했던 걸까. 그 작은 아이가 이렇게 춥고, 아프고, 외로웠을 거라고 생각하면 카라마츠는 다시 마음이 욱신거렸다. 후회가 되진 않았다. 카라마츠가 패딩까지 껴입자 뒤에서 쥬시마츠가 아주 길고 두꺼운 목도리를 카라마츠의 목에 칭칭 둘러 감았다.

카라마츠 씨는 정말 상냥한 사람 같아요.”

쥬시마츠가 목도리를 꼼꼼하게 매듭지으면서 말했다.

아뇨, 그렇지는 않아요. 그런데 이 목도리는 뭐로 만든 건가요?”

이거요? 산건데요?”

쥬시마츠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카라마츠가 정말 한참을 잤는지 눈이 소복하게 쌓인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고, 눈보라는 어느새 멈춰있었다. 찬 공기를 들이마시니 폐가 찌릿찌릿 아파서 카라마츠는 목도리를 끌어올려 코와 입을 막았다. 쥬시마츠는 커다란 배낭을 앞으로 돌려 매더니 카라마츠에게 등을 내밀었다.

업히세요!”

아까 올라올 때도 업고 올라오셨는데, 이번엔 제가 내려갈게요.”

쥬시마츠는 고개를 저으며 카라마츠의 양 팔을 잡아 자기 목에 두르고, 카라마츠를 억지로 업히게 해서 그의 양 허벅지를 단단히 잡았다.

눈 감아요.”

?”

좀 놀랄까봐.”

카라마츠가 눈을 감자, 쥬시마츠가 순식간에 옥상을 박차고 달려 나가 그대로 뛰어내렸다. 휘이이이잉 하고 귓가로 거센 바람이 스쳤다. 카라마츠가 쥬시마츠의 목을 있는 힘껏 끌어안고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쥬시마츠가 사뿐히 땅 위에 착지해 카라마츠를 내려주었다. 쿵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꼭 깃털이 내려앉듯 가뿐했다.

지금 저기서 뛰어내린거에요?!!”

카라마츠는 비틀거리며 건물 벽을 붙잡고 미친 듯이 요동치는 가슴을 꽉 부여잡았다. 만약 카라마츠의 심장이 얼어붙었다 해도 지금 이렇게 뛰는 걸 보면 다시 살아난 게 분명했다.

눈 감고 있으면 모를 줄 알았는데…….”

쥬시마츠가 머쓱해하며 카라마츠의 어깨를 몇 번 토닥였다.

차 가지고 올게요. 저기 큰 길로 나가있어요.”

쥬시마츠가 의사 가운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 의사 용하지 않아?”

오소마츠가 카라마츠에게 커피를 건네주면서 물었다. 카라마츠는 커피를 받으면서 고개를 한번 꾸벅 하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심장까지 얼어붙는다는 게 진짜인건지 손가락이 꽁꽁 얼어붙어 뜨거운 커피 잔에 닿은 부분이 따끔거렸다. 커피가 목구멍을 타고 흘러가는 게 느껴졌고, 카라마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용하긴 용한데, 병이 나을 생각을 안해.”

그래? 주사같은 거 놔주지 않든?”

며칠째 맞고 있는데 저녁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언제 맞았냐는 것처럼 원래대로 돌아가 버려. 게다가 갈수록 좀 심해지는 것 같고.”

카라마츠가 한숨을 푹 쉬었다. 사무실엔 카라마츠와 오소마츠 둘밖에 없었고 워낙 사람들이 자주 오지 않는 곳이라 오소마츠가 카라마츠를 위해 난방을 최대한으로 올려주었다. 오소마츠는 더워 긴팔 후드 한 겹만 입고 있는데 카라마츠는 내의에 양모 스웨터, 가디건, 얇은 잠바, 그리고 오리털 패딩까지 껴입고 있어도 추워 입김이 나왔다. 오소마츠가 손을 주물러 주고 꽁꽁 얼어 꼭 떨어져나갈 것 같은 귀를 잡고 녹여주려고 해도 영 녹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안되겠다. 점심시간 아직 안됐어도 얼른 가서 주사 맞고 와.”

오소마츠가 카라마츠를 질질 끌고 사무실 밖으로 내던졌다.

의사 말만 들으면 돼!”

며칠 전에 햇살 농축액이 얼마 안 남았다는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으려나. 지금이라도 큰 병원에 가봐야 하는 건 아닐까? 카라마츠는 무거운 몸을 질질 끌고 쥬시마츠의 병원으로 향했다. 아침부터 꼭 밀가루처럼 날리던 눈이 어느새 눈보라가 되어 카라마츠의 온 몸을 훑고 지나갔다. 계단은 오를 수 있으려나. 귓가에 윙윙거리는 바람소리 때문에 한참 머리가 울렸다. 카라마츠는 시야를 가리는 눈보라를 한쪽 팔로 막으면서 건물 뒤로 들어섰다.

카라마츠 씨!”

밝은 목소리가 카라마츠를 불렀다. 닥터 쥬시마츠가 이 추운 날씨에 긴팔 후드 한 장만 입고선 계단 앞에 서있었다.

닥터 쥬시마츠? 여기서 뭐하세요? 오늘은 병원 문 닫는 날인가요?”

쥬시마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쥬시마츠는 실내화를 신은 발로 소복이 쌓인 눈 위를 척척 걸어와 카라마츠를 와락 끌어안았다.

잠깐만요,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마중 나왔어요.”

점심시간이 되려면 한참 남았는데, 벌써부터? 카라마츠는 조금 놀랐지만 쥬시마츠에게서 느껴지는 온기가 좋아 가만히 안겨 숨을 골랐다. 사실 그 차갑고 얼어붙은 계단을 올라가기가 막막했었는데 닥터 쥬시마츠가 마중을 나왔다니. 쥬시마츠는 카라마츠를 한참 끌어안고 있다가 대뜸 카라마츠를 번쩍 들어 업었다.

닥터!”

금방 도착할거니까 꽉 붙잡아요!”

그리곤 닥터 쥬시마츠가 순식간에 눈 위를 달려 계단에 매달렸다. 아니, 카라마츠 같은 건장한 성인 남자를 업고 저 계단을 오른다고? 올라가다가 떨어지면 어떡하지? 카라마츠는 있는 힘껏 쥬시마츠의 목을 붙잡고 매달렸다. 쥬시마츠의 목을 조르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쥬시마츠는 아랑곳하지 않고 꼭 날아가는 것처럼 계단을 올랐다.

다 왔습니다! 조금만 참아요!”

쥬시마츠가 카라마츠를 업은 그대로 달려가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갔다. 병원 안은 여느 때처럼 훈훈하고 따뜻한데다 저 멀리에 못 보던 벽난로까지 생겨 얼어붙은 몸이 조금 녹는 것 같았다. ……. 카라마츠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쥬시마츠는 카라마츠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어딘가에서 간이침대를 질질 끌고 나왔다.

지금 상태가 많이 심각하니까, 일단 주사부터 맞고 마사지를 해야겠어요! 햇살 농축액이 남은 게 한 병뿐인데 이대로 내버려두면 카라마츠 씨가 얼어버릴 거에요!”

마사지요? 카라마츠가 책상에 엎드려 뭐라고 대답을 하려고 했지만 얼었던 몸이 녹자 수마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카라마츠는 연신 하품을 하다 결국 책상 가장자리를 붙잡고 무거운 눈꺼풀을 살며시 감았다. 쥬시마츠가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뭔가를 떨어뜨리고 깨뜨리고 하는 소리가 조금씩 멀어졌다. 손목에 따끔, 하고 쥬시마츠가 주사를 놓는 느낌이 들었고, 늘 그랬던 것처럼 주사를 맞은 곳에서부터 은은하게 따뜻한 기운이 퍼져나갔다. 쥬시마츠의 단단하고 따뜻한 손이 카라마츠의 이마에 닿았다가, 양 뺨을 감싸 안았다. 이런데서 이렇게 잠들어버리면 예의가 아닌데, 카라마츠는 잠에서 깨야지, 깨야지 하다가 결국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얼마나 잤을까? 꼭 영화에 나올법한 그림 같은 풍경 속에서 꽃과 나비와 대화를 한참 하는 꿈을 꾼 것 같은데. 분명히 처음 잠들었을 때는 책상 위였는데, 눈을 떠보니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고 있었다. 으으, 카라마츠가 기지개를 펴자 책상 앞에 앉아 안경을 쓰고 두꺼운 책을 들여다보던 쥬시마츠가 고개를 돌렸다.

마사지를 해야 되는데, 자는 사람 옷을…….”

쥬시마츠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가 또 순식간에 멀쩡해졌다.

, 죄송합니다. 제가 좀 피곤했었나봐요.”

카라마츠는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풀었다. 쥬시마츠가 자리에서 일어나 머뭇거리며 입고 있던 의사 가운을 만지작거리다 입을 열었다.

카라마츠 씨, 제가 잘못 알고 있었어요. 아까 맞은 주사가 마지막 햇살 농축액이라 내일 햇살을 짜내러 가야 됩니다. 혹시, 내일 안 바쁘면,”

쥬시마츠가 두 손을 모으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같이 가서 도와주실 순 없습니까? 원래는 동생이 도와주는데, 동생이 산을 타러 가버리고 없어서 혼자서는 힘들 것 같습니다…….”

제가 맞을 약인데 제가 가서 도와야죠.”

카라마츠는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러자 쥬시마츠가 달려와 카라마츠를 번쩍 들어 도로 침대위에 눕혔다.

안됩니다! 햇살을 짜낼 때까지 버티려면 몸을 쉬어야 해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어디 가면 안 됩니다!”

쥬시마츠가 카라마츠의 손을 붙잡고 단단히 당부를 한 뒤 책장에 줄지어 늘어서 있는 유리병 사이를 뒤졌다. 달그락 달그락 하는 소리가 벽난로에서 장작 타는 소리와 어우러져 묘하게 듣기 좋았다. 이불도 푹신푹신하고, 눈앞에 거대한 샹들리에가 아주 조용히 끼익 끼익 하고 흔들리고 있었다.

찾았습니다!”

쥬시마츠가 커다란 유리병을 들고 달려왔다. 유리병은 카라마츠가 사먹는 1리터짜리 생수병만한 크기였는데, 안에 연한 녹색이 도는 기름같은 게 가득 차있었다.

봄바람 오일이에요! 봄바람 오일이랑, 개구리 하품이랑 벚꽃 눈이 들어 있어서 햇살 농축액만큼은 못해도 오늘 하루정도는 버틸 수 있을 거에요. 카라마츠 씨, 그럼, 위에 옷 좀…….”

쥬시마츠가 눈을 내리깔았다.

개구리 하품이요?”

유통기한은 안 지났으니까 걱정 안하셔도 돼요!”

쥬시마츠가 고개를 끄덕이며 소매를 걷었다. 카라마츠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쥬시마츠가 하라는 대로 윗옷을 주섬주섬 벗었다.

개구리가 하품을 해요?”

, 개구리 하품은 신선도 유지를 위해서 넣는 거에요. 동면에서 갓 깨어난 개구리들은 하품을 엄청 하거든요.”

쥬시마츠가 진지한 얼굴로 카라마츠의 눈앞에서 유리병을 흔들어 보였다. 카라마츠는 도시 출신이라 개구리가 동면에서 깨어나는 걸 본적이 없었다. 사실 개구리도 본 일이 거의 없지만. 카라마츠가 윗옷을 벗자 쥬시마츠가 침대 앞으로 의자를 질질 끌고 와서 자리에 앉아 손바닥에 오일을 조금 덜어내 손바닥을 문질러 오일이 따끈하게 데워지도록 했다. 그리곤 카라마츠의 목에서부터 시작해 천천히 등에 오일을 바르기 시작했다. 봄바람 오일이라고 해서 그런지 풋풋한 봄냄새가 났다. 쥬시마츠의 손이 닿는 감각이 익숙하진 않았지만 카라마츠는 얌전히 쥬시마츠에게 몸을 내맡겼다. 쥬시마츠는 한참 오일을 바르다가 카라마츠에게 말을 걸었다. 진지한 목소리였다.

카라마츠 씨는 무슨 일을 하십니까?”

저는 놀이공원 분실물센터에서……. 아차! 사무실에 돌아가야 하는데!”

카라마츠가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쥬시마츠가 카라마츠의 어깨를 붙잡고 눌렀다.

이미 늦었어요! 벌써 한밤중이니까 놀이공원도 문 닫았을거에요. 내일은 주말이니까 월요일에 출근하면 됩니다!”

쥬시마츠의 병원에는 창문도 시계도 없어 시간을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카라마츠는 한참 주변을 둘러보며 시계를 찾다가 곧 포기하고 다시 쥬시마츠에게 등을 내밀었다. 쥬시마츠가 다시 오일을 바르기 시작하자 카라마츠가 말을 이었다.

놀이공원 분실물 센터에서 사람들이 잃어버린 물건을 받아주고, 또 찾아주고 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잃어버린 물건들을 주인들이 찾아가지 않으면 폐기처분도 하구요.”

놀이공원에 분실물이 많아요?”

엄청 많아요. 어떻게 이런 걸 잃어버릴 수가 있지? 하는 물건들도 많아서 오소마츠 형이랑, 그러고 보니까 오소마츠 형이 여기를 추천해줘서 온 거에요.”

오소마츠? 오소마츠가 누구지…….”

그 왜, 얼굴에 장난꾸러기라고 쓰여 있는 형인데. 여긴 예전에 왔었다고 했는데 그래서 기억을 못하시는 걸 수도 있어요.”

쥬시마츠는 대답이 없었다. 등 뒤에서 손바닥에 오일을 조금 따라내는 소리가 들렸고, 카라마츠는 잠깐 고민하다가 다시 분실물 센터에 대한 얘기를 시작했다.

아까 그 분실물센터 얘기 말인데, 이런 저런 물건들이 많이 들어와요. 지갑같은 건 정말 흔한 얘기고, 거의 한권을 꽉 채워 쓴 다이어리나 아님 손때 탄 인형, 교과서가 가득한 책가방, 낡고 헤진 가족사진까지 정말 사람이 쓰는 물건이란 물건들은 다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걸 도로 찾아가는 사람들은 정말 많지가 않아서 사무실 안에는 온통 주인 잃은 물건들뿐이에요.”

쓸쓸하겠네요.”

쥬시마츠가 대답했다. 쓸쓸한가? 카라마츠는 가만히 사무실에 앉아있을 때의 느낌을 떠올려봤다. 놀이공원 안의 사무실인데다가 가끔 손님들이 올 때가 있어서 그런지 알록달록하게 장식이 많은 놀이공원 분위기였고, 창문 너머로 놀이공원 테마곡 같은 게 늘 들려왔지만, 맞아. 분실물 센터 안은 쓸쓸해. 일을 하면서 틈틈이 오소마츠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곤 하지만 카라마츠는 분명히 쓸쓸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게요. 쓸쓸해요.”

혹시 병의 원인이 거기에 있는 건 아닐까요?”

원인이요? 그렇지만 오소마츠 형은 이런 증상 같은 건 하나도 보이질 않는데요?”

그래도 잘 떠올려보세요. 카라마츠 씨 한테만 영향을 주는 게 있을지도 몰라요.”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며칠 전에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가 센터로 왔었어요.”

여기가 맞는데……. 카라마츠는 눈앞의 비상계단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지도 앱에는 분명히 이 건물의 5층이라고 나와 있는데, 막상 건물까지 와보고 나니 4층까지밖에 없었다. 건물 안의 계단도 4층까지만 이어져있고, 카라마츠는 건물 주변을 빙글빙글 돌면서 한참 올라갈 방법을 찾다 그늘진 건물 뒤편에 건물 옥상까지 가는 계단을 발견했다. 보통 대부분의 건물의 옆면에 붙어 있는 것처럼 지그재그로 걸어 올라가는 계단이 아니라 사다리를 타고 오르듯 건물의 벽면을 따라 나있는 계단이라, 여길 올라가면 진짜 병원이 있는 건지, 아니면 지도앱에서 뭔가 착오가 있었던 건지 카라마츠는 짐작이 가질 않았다. 어떻게 하지? 그냥 이대로 돌아갈까? 하지만 카라마츠의 몸은 점점 더 거세게 떨려왔고, 제법 따뜻해진 날씨에도 불구하고 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여기까지 와봤으니 일단 가볼까. 카라마츠는 손을 뻗어 계단 손잡이를 잡았다.

아픈 몸으로 4층까지 올라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카라마츠는 기본 체력이 있었기 때문에 중간에 한번 쉬지도 않고 끝까지 계단을 올라갔다. 찬바람에 꽁꽁 얼어붙은 손을 외투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들어보니, 꼭 거대한 대나무를 한 마디 잘라 옆으로 뉘인 것처럼 길쭉한 원통 모양의 조그만 집 같은 게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니 나무로 짓고 초록색을 칠한 것이었다. 꼭 동화에 나올법한 것이라 카라마츠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어 벽을 만졌다. 벽이 따뜻했다. 그 온기를 느끼는 순간 카라마츠는 마음이 놓였다, 여기 그 어디에도 병원이라는 표시를 찾아볼 수가 없지만, 왠지 이 안으로 들어가도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카라마츠는 벽에 손을 대고 옆으로 걷다 작은 문을 찾았다. 손잡이가 황금색이었다. 카라마츠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문손잡이를 돌려 열었다.

계십니까?”

훈훈한 공기가 카라마츠를 감싸 안았다. 이 조그만 건물? ? 의 안은 전혀 병원 같아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는 꼭 잔디 같은 녹색 카펫이 깔려 있었고, 천장에는 진짜 촛불이 켜져있는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었다. 이 안이 꽤 좁은 데도 불구하고 저런 커다란 샹들리에라니. 방 한가운데엔 뭔가 이것저것 잡다한 물건들이 가득 쌓여있는 책상과 의자가 덩그러니 놓여있었고, 저 한 구석에 야구배트와 글러브, , 야구모자 같은 게 대충 걸려있는 보조의자가 있었다. 아니, 야구 모자 밑에 깔린 게 하얀 가운인 걸 봐선 의사가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문이 있는 곳을 제외한 온 벽면이 크고 작은 유리병으로 채워진 책장으로 가득 차 옅은 노란색의 벽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저 유리병 안에 든 것들을 도대체 뭘까. 카라마츠는 바로 옆에 있는 책장에 가까이 다가가 유리병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넘실거리는 보랏빛 액체 안에 은빛 가루들이 소용돌이치는 것이 있었고, 혼자서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조용히 끓고 있는 분홍색 액체도 있었다. 그 옆에는 유리병 안쪽에 물방울이 가득 맺힌 초록색 나뭇잎이 있었고, 은색에서 회색, 흰색, 그리고 다시 은색으로 계속 색깔이 변하는 액체가 담긴 것도 있었다. 카라마츠는 정신없이 유리병을 들여다보다가, 뭔가 깨지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샛노란 개나리색 점프슈트를 입은 남자가 입을 쩍 벌리고 카라마츠를 보고 있었다.
, 죄송합니다. 진료 받으러 왔는데요.”

카라마츠는 머쓱해하며 남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남자는 멍하니 카라마츠를 바라보다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면서 잔뜩 구겨져 있던 가운을 허겁지겁 입었다.

여기 앉으시죠!”
남자가 자기 책상 옆으로 작은 보조의자를 질질 끌고 와 탕탕 소리가 나게 의자를 쳤다. 사람들이 잘 안오는덴가? 아니, 그닥 병원같이 보이지는 않는데. 카라마츠는 잠깐 고민을 하다 남자에게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남자는 카라마츠가 보조의자에 앉자 다시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가 잡동사니로 엉망진창이 된 책상 구석을 뒤져 조그만 스케치북과 노란 색연필을 꺼냈다.

저는 쥬시마츠입니다! 닥터 쥬시마츠에요! 저는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 카라마츠입니다. 마츠노 카라마츠.”

쥬시마츠가 스케치북에 열심히 카라마츠의 이름을 적었다. 하얀 종이에 노란 색연필로 쓰는 게 잘 보이나? 하지만 닥터 쥬시마츠는 아랑곳 하지 않고 카라마츠의 이름을 스케치북 맨 위에 쓰더니 카라마츠를 힐끔힐끔 돌아보면서 뭔가를 계속 써내려갔다.

저기, 제가 몸살에 걸린 것 같아서요.”

몸살이요?”

닥터가 미간을 찌푸렸다. 몸살이 아닐 텐데, 하고 작게 얘기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카라마츠가 미처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기도 전에 닥터가 카라마츠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체온계를 쓰지 않고? 하지만 닥터의 크고 따뜻한 손이 닿자 카라마츠는 기분이 좋아져 따로 물어보지 않았다. 아마 닥터 쥬시마츠는 나이는 어려 보여도 제법 연륜이 있어 체온계 같은 건 신임하지 않는가보다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닥터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닥터는 카라마츠의 눈을 들여다보며 이마에 손을 얹고 있다가, 다른 쪽 손마저 들어 카라마츠의 양 귀를 조심스럽게 감쌌다. 닥터의 손은 거칠었다. 의사들은 공부만 하는 줄 알았는데 커다란 손이 굳은살투성이라 카라마츠는 조금 놀랐다. 닥터가 눈을 감더니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낯선 사람과 이렇게 가깝게 붙어있으니 낯설어 카라마츠가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위급하네요!”

닥터가 눈을 번쩍 뜨고 소리쳤다.

? 그냥 몸살이 아니에요?”

감기몸살하고는 다른 거에요, 어서 약을 맞아야!”

쥬시마츠는 책상을 순식간에 뛰어넘어 벽에 가득찬 유리병 사이를 뒤졌다. 쨍그랑 쨍그랑 하고 유리병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카라마츠도 가까이 가 신기한 유리병들을 구경하고 싶었지만 위급하다는 말을 들으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니, 대체 문제가 뭐지? 좀 춥고 그럴 뿐인데? 잠시 후 쥬시마츠는 아주 조그만, 자기 손가락 한마디만한 유리병을 찾아내 들고 왔다. 유리병 안에는 황금빛 액체가 부드럽게 일렁이고 있었는데, 안에 든 것이 뜨거운지 쥬시마츠가 양손으로 번갈아 들며 뛰어와 급히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카라마츠는 허리를 숙여 유리병 안에 든 것을 들여다보았다. 안에 조그만 알갱이같은 게 보이는 것 같기도 했고, 뭔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주사 안 무섭죠? 다 큰 어른이니까 괜찮을 거에요!”

쥬시마츠가 서랍에서 주사기를 꺼냈다. 카라마츠가 뭐라 대답을 할 틈도 주지 않고, 닥터는 유리병 안에 주사기를 꽂아 내용물을 쭉 빨아들여서 손가락으로 바늘 끝을 톡톡 튕겼다.

, 이걸 맞으면 다 낫는 겁니까?”

글쎄요, 일단 응급처치 정도는 될 텐데....”

쥬시마츠가 고개를 저었다. 카라마츠가 망설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통 이런 주사는 엉덩이에 맞던데, 카라마츠가 엎드릴만한 침대는 보이지 않았다.

저기, 닥터, 어딜 잡고 엎드리면 되는 건가요?”

다시 쥬시마츠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쥬시마츠는 옆에 조심스럽게 주사기를 내려놓고 목이 보일만큼 내렸던 점프슈트의 지퍼를 목 끝까지 올렸다.

아니, 엉덩이가 아니라 팔에 맞아도 되는 주사입니다! 괜찮아요! 이쪽 팔에 맞을까요?”

다행이다. 하마터면 책상에 엎드릴 뻔 했네. 카라마츠는 안심하고 왼쪽 팔을 걷었다. 쥬시마츠가 다시 주사기를 집어 들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카라마츠의 손목을 잡았다. 손마디가 도드라져서, 카라마츠는 의사 선생님이 저런 손이라니, 신기하네, 하면서 쥬시마츠가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쥬시마츠는 뚫어져라 카라마츠의 손목을 들여다보다가, 아무렇게나 주사 바늘을 푹 찔러 순식간에 안에 든 내용물을 밀어 넣었다. 주사 바늘이 뾰족해 카라마츠가 눈가를 확 찌푸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안에 든 내용물은 뜨겁고, 주사를 맞은 부분부터 발끝까지 순식간에 몸이 따뜻해졌다. 그와 동시에 기분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고, 머리가 개운했다. 온 몸이 훈훈하게 달아올랐다.

, 벌써 다 나은 것 같아요!”

아니에요, 중요한 건 병의 원인입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몸이 안 좋아지셨나요?”

쥬시마츠가 주사기를 내려놓고 카라마츠의 이마에 다시 손을 얹었다.

글쎄요,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보세요.”

카라마츠는 쥬시마츠의 손에 기대어 한참 기억을 더듬어보았지만 딱히 이렇다 할 계기는 없었다. 평소처럼 먹고, 평소처럼 자고, 요즘이 좀 춥긴 했어도 카라마츠는 원래 감기 같은 건 걸리질 않는 튼튼한 체질이었다. 쥬시마츠는 카라마츠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카라마츠는 우물쭈물하며 명확한 대답을 하지 못했고, 가운을 벗어 옆에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일 또 오셔야지 안 그러면 다시 병이 도질 거에요! 내일 이 시간에 꼭 다시 오세요!!”

카라마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시간에 밥도 먹지 못하고 이렇게 외진 병원에 오는 게 달갑지는 않았지만 쥬시마츠가 놔준 약의 효과가 제법 괜찮았기에 일단 쥬시마츠가 시키는 대로 다시 오기로 마음먹었다.

, 진료비는 얼마나?”

카드 결제도 됩니다!”

쥬시마츠가 책상 밑에서 카드 결제기를 꺼내 내밀었다.

 

다음날도 카라마츠는 다시 병원을 찾았다. 분명히 어제 주사를 맞고 돌아갔을 때는 잠을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몸이 개운했는데 오후 근무를 마치고 돌아가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몸이 다시 으슬으슬 추워지면서 오한이 들었다. 슬픈 생각도 나고, 울적해지고, 차가운 물에 푹 젖어 그대로 흐물흐물 해지는 것 같았다. 이게 대체 며칠째인지. 쥬시마츠가 병의 원인을 다시 생각해보라고 했는데, 글쎄, 카라마츠는 계속 생각해봐도 짐작 가는 것이 없었다. 카라마츠는 어쩔수 없이 두꺼운 외투를 최대한 껴입고 오전 근무를 하고,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다시 쥬시마츠의 병원을 찾았다.

저 또 왔습니다.”

카라마츠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병원 안이 어제완 달리 말끔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책상 위에 가득 차있던 이런저런 물건들은 어디다 다 쑤셔넣은건지 갖다버린건지 책상이 반들반들 윤이나고, 쥬시마츠도 먼지 한톨 보이지 않는 새하얀 가운을 입고 싱글벙글 웃으면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오늘은 주사부터 맞을까요?”

쥬시마츠는 카라마츠의 손을 잡고 끌고 와 보조의자에 앉히곤 가운 주머니에서 예의 그 황금색 유리병을 꺼내 주사기로 빨아들였다. 주사를 맞자, 어제처럼 다시 맞은 자리에서부터 따뜻한 느낌이 흘러들어왔고, 기분이 가벼워졌다.

어제 주사를 맞고 가니까 괜찮았는데 밤에 자고 일어났더니 다시 안좋아지더라구요. 저건 대체 무슨 약인가요?”

이거요?”

쥬시마츠가 빈병을 눈앞에서 흔들어보였다.

햇살 농축액입니다!”

햇살이요?”

, 이런 겨울에는 구하기 힘든거에요! 지난 여름에 혹시나 싶어서 몇병 뽑아다 놨는데, 이제 여분이 얼마 없어서 큰일이네요.”

쥬시마츠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저었다. 햇살 농축액? 선샤인? 선샤인을 농축했다고? 아냐, 카라마츠는 머릿속으로 드는 의심을 애써 지웠다. 아마 햇살하고 비슷한 약재 이름을 잘못 알아들은거겠지. 뭐든간에 약은 효과가 있었고, 카라마츠는 쥬시마츠와 마주앉아 대체 몸이 아픈 이유에 대해 열심히 토론했지만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곤란하네요.”

쥬시마츠가 책상 위를 손가락 끝으로 톡톡 두드리면서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이랬다간 카라마츠 씨의 심장까지 얼어붙을거에요. 매일매일 햇살 농축액을 맞는 걸로는 한계가 있거든요.”

심장이 얼어붙어요? 저희 집에 심장병 내력은 없는데?”

말이 그렇다는 거죠, 얼어붙는 거랑 비슷한거에요.”

, 카라마츠도 이게 심상치 않은 증상이란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게 들으니 정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까 햇살 농축액을 맞아 조금 나아졌지만 가슴팍을 더듬어보니 좀 심장 부근이 차가운 것 같기도 해서 덜컥 겁이 났다.

일단 오늘은 돌아가시고, 제가 좀 더 생각해볼게요.”

쥬시마츠가 카라마츠의 어깨를 끌어안고 번쩍 일으켜 옷을 털어주었다.

 

 

내기에 져서 반코님 리퀘를 받아 쓴 조각글입니다 ㅇ0ㅇ

 

, 하는 소리가 났다. 수학시간이었다. 나는 하염없이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간밤에 비가 온지라 하늘이 새파랗게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었다. 나는 아침을 걸러 배가 고팠고 수학은 영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 멍하니 운동장을 뛰는 애들의 머릿수를 세고 있었다. 하나, , . 오늘 밤엔 네 손에 깍지를 한번 껴보겠다고, 지저분한 상상을 하고 있었다.

자동차 경보음이 요란하게 학교 주차장을 울렸다. 곧이어 하나 둘 나처럼 딴 짓을 하던 애들이 뛰쳐나가 창문을 부서지듯 열어젖혔고, 비명을 질렀다. 머리가 아팠다. 여자애들이 목청이 찢어져라 비명을 지르는데, 나는 그때까지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한때는 나와 하나였던 네가 그 동그란 뒤통수가, 한 번도 움츠러든 적이 없었던 그 어깨가, 단단한 나무처럼 곧았던 그 다리가 모두 산산조각이 나버렸는데, 나는 아무런 감각도, 예측도, 텔레파시도 하지 못했다. 끝까지 너는 네 작은 머리통 속에 든 걸 나에게 전해보겠다는 발버둥조차 치지 않았다. 나는 배신감에 치가 떨려 눈물이 나왔다.

누구야?”

마츠노다!”

몇 번째 마츠노?”

그 왜, 남자한테 몸 판다는 걔.”

계단이 너무 멀었다. 나는 걷다가 몇 번 주저앉고, 나를 붙잡겠다는 건지 이 건물 밖으로 떠밀어버리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는 팔들을 몇 개 뿌리쳤다. 계단이 너무 멀고, 내가 있는 이 4층은 1층 주차장까지 너무 멀어서, 나는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입안에서 중얼거린 말을 듣고 누군가 달려가 창문을 잠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계단을 한 칸 한 칸 내려갔다. 계단이 너무 높았다. 발을 딛을 때마다 발목이 꺾이고 뒤로 자빠질 것만 같아 손잡이에 온 몸을 지탱하고 걸었다. 어디선가 형제들이 달려가고 있을 터였다. 누가, 누가 나보다 먼저 가서, 내가 슬프지 않게 그 고운 얼굴에 피를 닦아줘. 나는 아랫입술을 으득 깨물었다.

 

네가 초대권을 내밀었다. 이번에도 주연을 맡지 못했다. 토도마츠가 라이벌의 대본에 장난질을 좀 쳐보라고 조언 같지 않은 조언을 해봤지만 너는 하지 못했고, 간신히 멋진 대사를 몇 마디하고는 죽어버리는 조연이 되고 말았다. 나는 초대권을 아무렇게나 가방에 쑤셔 넣고 도서관으로 가 대본의 원작을 빌렸다. 너무 작은 역할이었다. 아니, 너무 큰 역할이었다. 네가 그 넓은 무대를 독차지하고 이런 대사를 읊는다는 건 상상이 잘 가지 않아. 손톱을 잘근 잘근 씹었다. 피맛이 났다. 네 안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은밀한 곳곳을 흐르고 있을 피와 같은 피였다.

 

네가 죽었다. 나는 어쩌다 보니 형제들 틈새에 껴 맨 앞자리에 앉았다. 한참을 앉아있느라 지루하고 좀이 쑤셨다. 덜컹거리는 간이 의자에 앉아있으려니 허리가 뻐근해왔다. 네가 나왔다. 왕자가 공주를 괴물의 손에서 구해주고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려고 하니 나타나 자신이 그 공주의 약혼자라며 공주를 내놓으라 칼을 들이미는 패배자였다. 아니, 원작하고 조금 달랐다. 나는 넋 놓고 네 목소리와 네 눈빛과 네 손짓에 빠져들다 깨달았다. 네 손끝에서 패배자는, 겁쟁이는 사랑하는 사람을 눈앞에서 보낼 수가 없어 마지막 용기를 짜낸 남자가 되었다. 네가 죽고, 나온 지 얼마나 됐는지도 모르게 칼에 맞아 죽고, 이 연극을 완성시켰다. 나는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너를 사랑하게 되어 버린 사람이 있을까봐 두려웠다. 모두가 널 지켜보고 있었다. 저 사람들도 원작을 봤을까? 네가 원작의 그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조연을 이렇게 사랑하게 만들어버렸다는 걸 알아차렸을까? 연극은 끝났다. 네가 죽고 나서 몇 십 분을 연극이 계속 이어졌겠지만 나는 연극이 끝난 것을 알았다. 나는 딱딱한 의자들로 가득찬 강당을 빠져나와 하염없이 달렸다. 네 이름을 소리쳐 부르고 싶었다. 끔찍해라. 네 이름은 너무 끔찍했어. 정신을 차려보니 학교에서 가까운 시내였다. 거리엔 한숨처럼 어둠이 깔렸고, 내 손에는 바람에 엉망이 된 꽃다발이 들려있었다. 나는 멍하니 꽃을 한 송이씩 뽑아내다 곧 꽃다발을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역 근처 어두운 골목을 기웃거리는 남자들이 있었다. 나는 짓궂은 생각이 들었다.

 

널 흉내 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학교에 소문이 퍼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 사근사근하고 상냥하고 착하고 친절하고 다정하고 매너 좋은 카라마츠가 남창새끼가 되는 건 순간이었다. 학교에 몇 명 원조교제를 한다고 은근히 소문난 여자애들이 없지는 않았는데, 그걸 그 카라마츠가 해버리자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형제들의 귀에도 알음알음 소문이 퍼졌고, 오소마츠는 카라마츠가 없는 자리에서 대체 누가 이딴 소문을 만들어내는 거냐며 분통을 터트렸다. 모날 모시에 형제들이 역 근처에 숨어있다 카라마츠인척 하는 놈을 잡아내자며 계획을 짰다. 카라마츠는 나타나지 않았다. 오소마츠와 형제들의 눈을 피해 남창새끼는 계속 같은 학교 애들의 눈에 띄었다.

 

연극부를 그만두지는 않았다. 다만 대본을 받지 못할 뿐.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을 하고 있었다. 형제들도 먼저 묻지 않았다. 나는 어느 새벽 잠결에 네가 작게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곧 내가 네 얘기를 들을 때가 오리라고 생각했다. 늘 날 앞서 걸으며 모든 선망과 우러름과 사랑을 받았던 네가, 내 사랑을 받은 네가 나에게 무너지듯 매달려 괴롭다고 울음을 터트리면 나는 널 꼭 끌어안고 우리 둘이서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도망치자고 속삭일 계획이었다. 달콤한 계획이었다. 나는 네 눈물 맛을 상상하며 다시 잠을 청했다.

 

너는 가만히 누워있었다. 혹시나 하는 걱정과는 달리 잠자듯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주변으로 검붉은 피와 하얀 뇌수와 이것저것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 범벅이 돼서도 너는 꼭 거대한 푸딩위에 누워 그걸 한입 맛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지막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너는 내가 네 뼈를 한번 만져볼 틈도 주지 않고 내 후회처럼 뜨거운 불길에 뼈까지 타버려 한줌 재가 되어있었다.

 

내가 네게 집착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널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어버렸다면. 아니 널 만나지도 못하고 널 보지도 못하고 널 알지도 못하고 아예 나라는 존재 자체가 없었더라면. 그랬었다면

거의 한 평생을 어둠 속에서 살아왔건만 카라마츠는 이 지하의 분위기가 싫었다. 카라마츠는 형제들의 맨 뒤를 따라가면서 몰래 한숨을 쉬었다. 지하로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추워졌고, 희미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전등들도 줄어들었다. 다른 형제들도 비슷하게 느낀 건지, 아니면 화가 단단히 난 오소마츠의 눈치를 보고 있는 건지 아무도 말이 없었다. 카라마츠는 토도마츠의 어깨 너머로 이치마츠의 손목을 흘끗 보았다. 하얗게 마른 손목이 밧줄에 단단히 묶여 검붉은 멍이 들어있었다. 쵸로마츠는 규칙에 관한 일엔 유달리 엄격했다. 저렇게 하면 손이 한참 저릴 텐데, 오늘 밤 내내 아플 텐데. 이치마츠의 희멀건 손이 더 하얗게 질려있었다.

콘크리트 벽에 맺힌 물방울이 조용히 굴러 떨어져 곳곳에 작은 물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이치마츠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서 기관지도 약하고, 한번 병을 앓으면 한참을 앓았다. 외부와 단절된 이 곳에선 병에 걸리면 방법이 없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아버지가 어떻게든 해결해주셨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 만약 이치마츠가 심한 병을 앓으면 다른 형제들은 그저 곁에서 발만 동동 굴러야 했다. 카라마츠는 걱정이 되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오소마츠를 묵묵히 지켜보았다. 오소마츠는 허리춤에 매달고 있던 열쇠뭉치 중 가장 작고, 가장 볼품없는 열쇠를 꺼내들어 문을 열었다.

오랜만이지? 다음에 올 때는 여기에 이치마츠 방이라고 문패라도 걸어놔야겠어?”

오소마츠가 입 꼬리만 올리며 비아냥거렸다. 이치마츠는 아무런 표정도 대답도 없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창문도, 전등도, 가구도 아무것도 없는 콘크리트 방이었다. 아니, 이건 상자다. 사람이 들어가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다.

형님, 오늘은 추운데 담요라도…….”

카라마츠가 머뭇거리며 오소마츠에게 다가가 손에 한참을 쥐고 있던 담요를 내밀었다. 오소마츠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카라마츠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주고 담요를 빼앗았다.

카라마츠, 이치마츠는 지금 벌을 받는 거야. 우리 여섯 명이 정한 규칙이었고, 우리 여섯 명이 정한 벌칙이야. 거기엔 분명히 이치마츠도 껴있었다고. 그런데 이치마츠가 규칙을 어겼으니까 우린 우리의 벌칙을 따라 이치마츠에게 벌을 줘야 해.”

오소마츠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뭔가 이치마츠에게 말을 하고 싶어서 한참 오소마츠의 눈치를 보고 있던 쥬시마츠도 풀이 죽어 토도마츠의 뒤에 숨었다. 등 뒤에서 이치마츠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 소리가 났다. 카라마츠가 재빨리 몸을 돌렸지만, 오소마츠는 순식간에 문을 닫아버렸고, 이 넓고, 좁은 지하 복도에 쾅, 하고 문 닫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섯 명중에 한명이 자리를 비웠지만 다섯 명은 아무렇지 않은 척 저녁 일과를 수행했다. 오늘 식사당번이었던 쵸로마츠가 고기야채를 끓였고, 다섯 명은 여섯 명의 식탁에 둘러 앉아 각자 먹어야 할 양을 꼭꼭 씹어 삼켰다. 젓가락과 밥그릇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카라마츠는 깨작깨작 식사를 하며 다른 형제들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 속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만약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오소마츠의 이런 벌칙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실 수 있었을까?

아버지는 과학자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아버지는 아들들의 머리맡에서 자장가처럼 바깥세상과 핵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사람들의 탐욕이 결국 인류가 이룬 모든 것들을 날려버리는 핵전쟁으로 이어졌고, 아버지는 이를 미리 예측하고 그가 목숨처럼 사랑하는 아들들을 위해 이 지하 방주를 지었으며 언젠가 시간이 오염된 세상을 완전히 씻겨낸 후에야 아들들이 나갈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두셨다고. 산채로 몸이 끓어오르다 죽는 사람들과 핵의 영향으로 태어난다는 기형아들에 대한 얘기를 듣고 나면 꼭 악몽을 꿨다.

카라마츠는 잠자리에 누워서 한참 이치마츠와 핵전쟁, 그리고 그들이 앞으로 이 답답한 방주에서 더 견뎌내야 할 이십년에 대해 생각하다가 설핏 잠이 들었다.

눈앞에서 꼭 전구가 터지듯 펑, 하고 새하얀 불빛들이 가득 찼다. 하얗고, 카라마츠가 여태 살아오면서 본 그 어느 것보다 희고, 노랗고, 어쩌면 투명한 불빛들이 카라마츠의 위로 무너져 내렸다. 뇌가 절절 끓는다. 이렇게 밝은 빛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카라마츠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고 귓가에서 삐이이 하는 이명이 울리는 것 같았다. 괴로워, 괴로워, 괴로워.

카라마츠는 한참 고개를 젓다 눈가에서 흐르는 뜨거운 눈물을 느끼고 잠에서 깼다. 제 손조차 보이지 않는 익숙한 어둠. 한참을 울었는지 귀까지 눈물이 흘러 축축했다. 카라마츠는 눈물을 대충 훔치고 곁을 더듬었다. 고른 숨소리를 내며 깊은 잠에 들어있는 토도마츠가 만져졌다. 카라마츠는 조심스럽게 토도마츠의 얼굴까지 만져보고 나서야 숨을 돌렸다. 이상한 꿈이었다. 이치마츠가 누워있어야 할 옆자리는 차갑게 식어있었다. 이치마츠는 잘 버티고 있을까.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뼈까지 시려올 냉기를 견뎌내고 있을까.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베개를 찾아 끌어안고 한참 이치마츠의 살 냄새를 맡았다. 이치마츠가 보고 싶다. 아주 잠깐, 오소마츠가 눈치 채기 전에 잠깐만 다녀오면 되지 않을까. 카라마츠는 숨을 멈추고 가만히 형제들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이 몇 시나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다들 깊은 잠에 빠져있는 것 같았다. 카라마츠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신발을 집어 들었다.

텅 빈 복도에 카라마츠의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카라마츠는 둥근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서 저 벽에 매달린 전구들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앞으로 이십년이나 남았는데, 아버지의 창고에 남아있는 전구들은 그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을까. 만약 그 시간을 버티지 못한다면 이치마츠는 어둠을 틈타 이 방주 어딘가로 숨어버릴지도 모른다. 카라마츠는 눈을 감고 계단손잡이에 의지해 밑으로 밑으로 내려갔다. 꿈결 같은 어둠이었다.

계단이 끝났다. 카라마츠는 눈을 뜨고 저 멀리 보이는 독방을 향해 걸어갔다. 이치마츠는 자고 있으려나. 카라마츠는 손에 쥔 보온병을 품에 안았다. 이치마츠가 싫어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어쩔 수가 없어. 카라마츠는 손에 든 것을 내려놓고 바닥에 난 조그만 틈새로 귀를 기울였다. 폭이 얼마나 좁은지 안이 보이지는 않는다. 작은 기침소리가 들렸다.

이치마츠.”

카라마츠가 작게 속삭였다. 기침소리가 잠깐 멎더니, 잔뜩 갈라진 이치마츠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너도 들어오고 싶냐.”

, 카라마츠의 생각보단 나았다. 카라마츠는 가져온 접시에 뜨거운 물을 조금 부어 틈사이로 밀어 넣었다. 마음 같아선 보온병을 통째로 주면서 이치마츠에게 마시라고 하고 싶었지만 틈이 너무 좁아 약간 오목한 접시정도밖에 들어가지 않는데다가 손을 뒤로 묶어 제대로 마실 수가 없을 것이다. 이치마츠가 바닥을 기어 접시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뜨겁지는 않아?”

적당해.”

이치마츠의 목소리가 조금 나아졌다.

다 마시면 접시 이쪽으로 밀어. 더 부어줄게.”

물이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카라마츠는 문에 기대앉아 엎드려 힘겹게 물을 마시고 있을 이치마츠를 상상했다.

서재에 뭐가 있길래 그렇게 들어가고 싶은 거야?”

매번 이렇게 고생하면서. 카라마츠가 조용히 물었다. 물소리가 멈췄다. 카라마츠는 혹시 어딘가에서 오소마츠나 다른 형제들이 그를 지켜보고 있지는 않은지 멀리까지 내다보고 다시 문에 귀를 기울였다. 문가로 이치마츠가 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카라마츠는 바닥에 바짝 엎드려 문 틈사이로 귀를 들이밀었다.

우린 속고 있는 거야.”

이치마츠가 속삭였다.

눈을 뜨니 낯선 방이었다. 꼭 영화에서나 봤을 법한 하얀 천장과 하얀 벽, 하얀 바닥으로 이루어진 비현실적인 공간이었다. 천장에는 조명도 붙어있지 않은데 은은하게 빛이 나 창문도 하나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딱딱한 바닥에 오래 누워있던 탓인지 몸이 뻣뻣했다. 묘한 쇠 비린내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카라마츠는 대체 여기가 어딘지 알아보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바로 뒤에, 낯선 쇳덩이를 이리저리 들여다보고 있는 동생을 발견했다. 그가 사랑하는 동생이었다.
이치마츠? 혹시 지금 장난치는 거냐?”

이치마츠가 미간을 찌푸리며 총을 바로 잡았다. 철컥, 하고 총알이 장전되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장난으로 보여?”

총은 작았다. 저걸 무슨 총이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화에서 보던 것과 거의 흡사해 꼭 장난감 같았다. 그리고 그 반짝거리는 총구는 카라마츠를 향해 있었다.

그거 진짜 총이야?”

안에 총알도 제대로 들어있어. 딱 한 발.”

이치마츠가 카라마츠의 눈앞에서 총을 흔들어보이곤 카라마츠의 이마에 총구를 꾹 눌렀다가 땠다. 묵직했다. 사람을 죽이는 게 맞구나. 카라마츠는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걸 네가 왜 들고 있는 건데?”

이치마츠는 말없이 총으로 바닥에 놓인 종이를 가리켰다. 흔한 복사용지에 매직으로 대충 찍찍 쓴 문구가 적혀있었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쏘지 않으면 지구는 멸망한다.’ 하고. 카라마츠는 종이를 주워들어 읽어보고, 뒤집어서 다른 글이 쓰여 있지는 않은지, 혹시 종이에 이게 장난임을 알려주는 조그만 멘트라도 남아있진 않은지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중2병 환자의 일기장에나 쓰여 있을법한 저 글귀가 다라서, 카라마츠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도대체 누구 짓이지? 오소마츠 형? 형은 이런 공간을 빌릴만한 돈이 없을 텐데……. 컨셉 러브호텔 같은 덴가?”

이치마츠의 마스크 너머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웃음소리가 들리자 괜히 기분이 좋아져 입가에 미소가 띄려는 걸 억누르며 벽에 손을 짚고 한 바퀴 쭉 걸었다. 카라마츠와 이치마츠가 이 방에 들어온 이상 어딘가에 입구가 있을 테고,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카라마츠가 영화에서나 본 두드리면 열리는 비밀 문같은 걸 찾아 한참 방을 빙빙 돌았지만 그들을 둘러싼 벽은 그저 평범한 벽에 불과했다. 조금 매끈한 느낌의 벽. 카라마츠는 다시 이치마츠에게로 돌아와 이치마츠와 마주보고 앉았다.

문이 없는 것 같아.”

이치마츠는 아무 대답 없이 총을 만지작거렸다. 방이 꽉 막혀있어서 그런지 조금 답답했다. 온통 하얀 방에 갇혀있으니 혹시 꿈이 아닌가 싶어 손등을 꼬집어봤지만 분명한 현실이었다.

날 쏠 수 있겠어?”

이치마츠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널 쏘다니. 카라마츠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어떻게 널 쏴. 만에 하나 이게 진짜라면, 네가 날 쏴야 돼.”

이치마츠가 다시 웃었다. 그 순간 한 쪽 벽에 한가득 영상이 떠올랐다. 카메라는 빨간색의 동그란 스위치 같은 것을 찍고 있었다. 그리고 화면이 둘로 갈라지면서 다른 한 쪽에선 실시간 뉴스를 방송하고 있었다. 화면 위에 찍힌 날짜를 보니 오늘이었다.

대체 저게 뭐야?”

꼭 카라마츠의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스위치 위에 조그만 타이머가 생겨났다. 5. 그리고 동시에 타이머가 작동되기 시작했다.

진짜야? 이게 말이 돼?”

카라마츠가 이치마츠의 팔을 붙잡고 그를 돌아보았다. 이치마츠는 아무런 표정변화도 없이 총을 꼭 쥐고 놓지 않았다. 뉴스에선 사람이 바글바글한 어느 놀이동산을 비추고 있었다. 간만에 나들이를 나온 가족들이 행복한 표정으로 놀이기구를 타러 가거나 간식을 샀다.

저 타이머가 그건 아니겠지?”

이치마츠는 대답이 없었다. 그는 그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화면을 노려봤다. 꼭 노려보면 타이머가 멈출 거라고 믿는 것처럼. 카라마츠는 화면과 이치마츠를 번갈아 보다가 시간이 4분으로 줄어들자 이치마츠의 팔을 꽉 붙잡았다.

난 널 못 쏘겠으니까, 네가 쏴. 아니면 내가 자살할거야.”

이치마츠가 인상을 쓰면서 마스크를 내렸다.

쓰렉마츠, 저걸 믿어? 그냥 너 혼자 개죽음하고 끝나면 어쩔 건데.”

그래도 만약 내가 죽지 않았다가 온 인류가 다 죽어버릴지도 모르는 거잖아. 나 하나로 해결 될 문제면 내가 죽는 게 맞아.”

멍청한 새끼. 그리고 자살은 룰 위반이야. 잘 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죽여야 된다잖아.”

이치마츠가 총을 등 뒤로 숨겼다.

죽을 생각하지 마. 네가 무슨 히어로야? 지구를 위해 희생하게?”

시간은 소리 없이 흐르고 있었다. 뉴스는 이제 사람들이 들뜬 얼굴로 이리저리 걷고 있는 번화가를 비췄다.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으면 괜찮았을 텐데, 카라마츠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선택으로 죽는다고 생각하니 죄책감이 들었다. 안 돼.

어차피 살면서 한 번 죽을 거, 지금 죽고 영웅이 되면 돼.”

카라마츠는 애써 웃으며 이치마츠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치마츠가 흠칫 떨었다.

내가 여기서 죽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네가 여길 나가서 내가 영웅이란 걸 사람들에게 알려. 아마 그 날은 전 인류적 기념일이 되어 온 지구의 카라마츠 걸이 내 이름을 목 놓아 부르지 않겠어?”

지랄하네.”

이치마츠가 카라마츠의 팔을 거칠게 떼어내고 뒤로 조금씩 물러났다. 이치마츠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네가 여기서 개죽음을 하든 뭘 하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누가 믿을 거 같아? 그냥 누가 장난하는 걸 멍청하게 믿은 새끼라고 까일 거라고. 넌 진짜 머리에 든 게 있냐.”

3. 카라마츠는 마음이 조급해져 이치마츠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이치마츠의 멱살을 잡았다.

정말 모두가 나 때문에 죽어버리면 난 정말 큰 죄를 짓는 거야. 만약 이게 장난이었다 그래도 내가 여기서 나가고 집으로 가는 길에 뺑소니로 죽을지도 모르는 거잖아. 날 쏴, 이치마츠.”

이치마츠가 아랫입술을 깨물고 카라마츠의 이마에 총구를 겨눴다가 다시 내리고, 안에 장전된 총알을 꺼냈다. 누런 총알은 꼭 때 묻은 감정 같았다. 매일 닦고 닦아도 세월에 빛이 바래버린 감정. 카라마츠는 총알을 뺏으려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치마츠가 잽싸게 몸을 돌려 총으로 카라마츠의 어깨를 내리쳤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카라마츠는 어깨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끝까지 멍청한 새끼. 네가 죽는다고 진짜 지구가 멸망하지 않을 거란 보장 있어? 대뜸 사람을 가둬놓고 살인을 하라는 새끼가 약속을 지킬 것 같냐고. 그걸 어떻게 믿고 죽겠다고 지랄이야? 네가 그렇게 대단해? 네 목숨 하나가 지구랑 똑같은 줄 알아?”

아냐, 이치마츠. 이건 내 문제야.”

어깨가 욱신거렸다. 카라마츠는 간신히 일어나 이치마츠에게 달려가 총알을 뺏으려고 손을 뻗었다. 2. 마음이 조급해진다. 카라마츠가 이치마츠의 무릎을 걷어차 이치마츠를 넘어뜨리고 올라타 총을 뺏고, 총알마저 뺏으려고 몸을 돌렸다. 그러나 이치마츠가 빨랐다. 이치마츠는 꼭 입이라도 맞출 것처럼 카라마츠의 멱살을 잡아당기곤, 자기 입에 총알을 던져 넣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총알이 제대로 넘어가지 않는지 이치마츠가 오만상을 찌푸렸지만 카라마츠의 멱살을 잡은 손은 놓지 않았다. 카라마츠는 바로 눈앞에서 이치마츠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걸 멍하니 지켜봤다. , 이치마츠는 힘겹게 총알을 넘기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이치마츠, 우린 지금 엄청난 잘못을 한 거야.”

이치마츠가 고개를 돌려 시간을 확인하곤 카라마츠의 멱살을 놓았다. 이젠 화면에서 소리도 들리기 시작했다. 어느 다정한 커플이 팔짱을 꼭 끼고서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마침내 봄이 와서 너무 좋다고, 그리고 꽃이 만발할 즈음에 결혼을 할 거라고. 카라마츠는 온몸에 힘이 풀려 이치마츠의 위로 엎어졌다. 이치마츠가 카라마츠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입을 열었다.

어차피 여기서 네가 죽고 내가 살아서 나갔대도 내가 다 죽여 버렸을 거야. 우릴 가둔 놈부터 시작해서 저기 나온 사람들도 다 찾아서 죽여 버리고 엄마도 아빠도 형제들도 안 가리고 눈에 띄는 인간들은 다 죽이고 나도 죽었을 거야.”

?”

왜긴 뭐가 왜야. 너도 알고 있잖아.”

이치마츠가 일어나 앉아 다시 타이머를 돌아보았다. 1.

떡치기엔 시간이 모자라겠네.”

이치마츠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카라마츠의 양 뺨을 붙잡고 거칠게 입을 맞췄다. 카라마츠는 멍하니 이치마츠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다가 이치마츠가 입술을 깨물자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처음이자 마지막일 동생과의 키스를 느꼈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키스였다. 달칵, 하고 스위치가 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거의 동시에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리고, , , 하고 뭔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화면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바닥이 꼭 지진이 난 것처럼 진동했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이치마츠는 잠깐 입술을 뗐다가, 눈이 반쯤 풀린 카라마츠를 보고 뭔가 말을 할 것처럼 입을 달싹거리다 다시 입을 맞췄다. 말을 하기엔 너무 아까운 시간이었다. 순간 벽이 사방으로 펑, 하고 날아가면서 고막이 터질 것처럼 큰 소리로 바닥이 폭발했다

글자가 완전히 말을 표현할 수 있게 된 후로 간혹 몸에 사람 이름을 단 아이들이 태어났다. 그건 남자 이름일 때도 있었고, 여자 이름일 때도 있었고, 아이가 태어난 곳에선 쓰지 않는 언어로 된 글자일 때도 있었다. 사람들은 그 이름의 의미가 무엇일지 한참 고민을 하다 이는 신이 아이에게 내려주신 이름이라 생각하고 아이에게 그 이름을 지어주었다. 오랜 전통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런 이름에 얽매이는 걸 촌스럽게 여기기 시작했고 다른 이름을 붙여주는 부모들이 늘어났다. 사실 몸에 보이는 곳에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건 여러모로 불편한 경우가 많았으니까.

그리고 마츠요가 여섯 쌍둥이를 낳았다. 그런데 여섯 명이 일란성 쌍둥이임에도 불구하고 단 두 명만 몸에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발바닥에, 하나는 손바닥에. 이상하네. 왜 그 두 명만 이름이 새겨져 있는 걸까. 마츠요는 남편과 상의한 끝에 두 사람이 좀 더 특별한 운명으로 태어난 것이라 믿고 한평생 서로를 의지하는 좋은 형제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름을 바꾸어 지어주었다.

 

토도마츠, 몸에 이름 새겨져 있는 거 없지?”

토도마츠가 갤러리를 정리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 그게 왜?”

요새 도는 소문인데, 자기 몸에 새겨진 이름이 사실 운명의 상대라나 봐. 그런 사람들을 찾아주는 사이트도 생겼어. 토도마츠는 이름이 없다니 아쉽네.”

글쎄. 토도마츠는 피식 웃고 다시 핸드폰 액정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형들은 서로의 이름을 몸에 새기고 있었지만 그다지 잘 맞는 구석도 없었고, 친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일방적으로 싫어하는 것에 가까웠다. 사실 이름이라는 게 절대적인 것도 아니고 바꿔버리면 그만인 것을. 그 둘이 운명의 상대라면 좀 이상하지 않아?

 

아들 여섯을 키우는 일은 쉽지 않다. 초등학교 때까지야 어머니가 아들들을 통제해보겠다고 나섰지만 머리가 굵어질 대로 굵어진 후엔 제발 범죄만 저지르지 말고 고등학교까진 졸업해달라며 방목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담배는 집 밖에서. 이건 어머니의 마지막 보루였고, 이치마츠는 어쩔 수 없이 집 옆 골목에서 담배를 태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늦은 밤이었다. 집에 남아있는 형제들과 부모님은 이미 잠이 들었을 때였다.

그런데 부엌에 불이 켜져 있었다. 이 시간에? 혹시 형제들이 야식이라도 만드는 걸까? 이치마츠는 잠깐 고민하다 조용히 부엌으로 다가가 안을 들여다보았다. 뜻밖에도 카라마츠가 잠옷차림으로 가스레인지 앞에 서 철사를 달구고 있었다. 저걸로 뭘 하려고? 이치마츠는 인기척을 내지 않고 조금 뒤로 물러나 어둠속에 몸을 숨겼다. 카라마츠는 나무젓가락으로 철사를 집어 불에 한참 달구다 부엌 바닥에 앉아 왼쪽 발을 오른쪽 허벅지 위에 올렸다. . 이치마츠가 속으로 웃었다. 카라마츠는 손을 벌벌 떨면서 빨갛게 달군 철사를 조심스럽게 발바닥 위로 가져다 댔다가, , 하고 철사를 떨어뜨렸다. 그 정도 각오로 뭘 하겠다고. 이치마츠가 부엌창문을 열었다.

이치마츠!”

카라마츠가 당황해 아직 뜨거워 보이는 철사와 나무젓가락을 급히 주워 등 뒤로 숨겼다.

봤어.”

이치마츠는 부엌 불을 끄고, 카라마츠의 앞으로 다가가 쭈그리고 앉아 카라마츠와 눈을 마주쳤다. 카라마츠의 눈이 있는 힘껏 커다랗게 뜨여서 벌벌 떨고 있었다.

그걸로 될 것 같아?”

아니, 이치마츠, 형이 설명할 수 있어.”

소문 들었구나.”

카라마츠가 이를 악물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고 해도 얼굴 표정이 일그러져서, 꼭 이치마츠가 괴롭히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사람 눈에 띄지도 않는 발바닥인데, 그걸 왜 이 한밤중에 남모르게 지우려고 하겠어. 그치?”

이치마츠가 웃으며 마스크를 내렸다. 카라마츠가 계속 고개를 저으며 변명을 하려고 했으나 이치마츠는 기분이 좋아 카라마츠의 조잡한 변명 따윈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지우고 싶은 사람은 나지. 나는 손바닥에 이름이 있으니까 사람들이 툭하면 그걸 내 이름으로 오해한다고. 기분 나쁜 쪽은 오히려 나잖아.”

기분이 나쁘다는 말에 카라마츠가 고개를 젓는 것도 멈추고 멍하니 이치마츠의 눈을 바라봤다. 상처받은 척 하지 마. 네가 잘못한 거잖아.

네가 날 좋아하는 게 이름 탓일 것 같아?”

아냐……. 그런 거 아냐…….”

카라마츠는 이치마츠를 피해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옷자락을 잡아 당겨 도로 자리에 앉혔다.

좋은 핑계야. 그저 내 이름이 네 몸에 있다는 것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겠지.”

카라마츠가 이치마츠의 어깨를 퍽 밀치고 뛰쳐나갔다. 카라마츠가 부엌에서 거실을 가로질러 형제들이 있는 방문을 잡았을 때, 이치마츠가 카라마츠의 머리채를 잡았다.

날 위해서 해줘. 카라마츠.”

이치마츠가 카라마츠의 머리채를 힘껏 휘어잡고 카라마츠의 귓가에 속삭였다. 카라마츠가 움찔거리며 이치마츠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손에 힘이 제대로 실리지가 않았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머리채를 놓고, 카라마츠의 잠옷 소매를 잡아 다시 부엌으로 끌고 갔다. 카라마츠가 뒤에서 따라오고 있어 표정을 보지는 못했지만, 이치마츠는 카라마츠가 지을 표정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힘이 센 카라마츠가 그가 이끄는 데로 힘없이 끌려온다는 게 즐거웠다.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고 있고, 내가 마음껏 휘두를 수 있다는데서 오는 감미로운 만족감. 늘 짐작을 하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확인받는다는 건 더 짜릿했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를 부엌 바닥으로 밀치고 주머니를 뒤적여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몇 글자 안 되니까, 이정도면 되지 않을까?”

이치마츠는 담배를 한 개비 입에 물고 끝에 불을 붙였다. 어두운 부엌 한가운데서 담뱃불이 새빨갛게 빛났다. 부엌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에 카라마츠의 얼굴이 반만 드러났다. 이치마츠와 똑같이 생긴 얼굴이었고, 보기 좋은 표정이었다. 이치마츠는 담배 연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카라마츠의 얼굴을 감상했다.

모를 줄 알았어? 나 의식하는 거 정말 기분 더러웠는데. 옷 갈아입을 때나 목욕탕 갈 때 눈도 못 마주치지. 잘 때는 토도마츠한테 바짝 붙어서 자고. 내가 없으면 내 물건들 뒤적거리고 나중에 내가 좋아하는 거 아는 척 하면서 말 붙이고. 티 나게 이것저것 챙겨주려고 하는 거. 내가 네 형제라는 자각은 있어? 다른 형제들이 학교에서 소문 다 들었을 텐데 왜 얘기를 안했겠어? 네가 그렇게 티 나게 구니까 다들 말도 못 꺼낸 거 아냐.”

카라마츠가 입술을 깨물더니 고개를 숙였다. 이정도로 울면 안 되잖아. 나는 아직 할 말이 더 남았는데.

나보고 발정하지? 내가 따먹어줬으면 좋겠어? , 아님 네가 박는 쪽이야? 내생각하면서 자위하지? 내가 너한테 사랑한다고 예쁘다고 하면서 키스라도 해줬으면 좋겠어? 씨발, 더러워.”

이치마츠가 담뱃재를 싱크대에 툭툭 털고 카라마츠에게 다가갔다. 카라마츠는 고개를 숙인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가족들 깨우지 않게 적당히 해.”

이치마츠가 카라마츠의 왼쪽 발목을 잡아 달빛 아래로 이끌었다. 발바닥 한 구석에 희미하게, 이치마츠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한때는 이 이름이 우릴 특별하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했어. 그걸 네가 망친거야.”

이치마츠가 망설임도 없이 카라마츠의 발바닥을 담뱃불로 지졌다. 살이 타들어가는 냄새가 나고, 카라마츠가 다리에 경련을 일으키면서도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입을 막았다. 한순간이었다. 이치마츠는 담배를 싱크대 바닥으로 던졌다. 고여 있던 물기에 칙, 하고 담배가 꺼졌다.

 

그 후로 카라마츠는 조금 달라졌다. 텅 빈 것 같기도 했고, 속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더 이상 이치마츠를 다른 형제들과 다르게 대하지도 않았고, 학교에 좋아하는 여자애가 생겼다고 형제들에게 수줍게 고백을 하기도 했다. 너 게이잖아. 이치마츠는 목 끝까지 말이 올라왔지만 참았다. 카라마츠가 게이인걸 이치마츠가 어떻게 알았냐고 형제들이 묻는다면 이치마츠는 대답할 수가 없었기에, 이치마츠는 멀리서 카라마츠가 평범하게 생긴 여자애와 등하교를 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좋아서 맨 살을 태울 각오도 했으면서 이렇게 쉽게 포기할 수가 있나. 아니, 나를 정말 좋아하긴 했던 건가. 더 이상 카라마츠가 거북하지 않아 이치마츠는 속이 시원하면서도 어딘가 허전했다. 뭔가, 태어날 때부터 존재를 의심한 적이 없는 팔다리가 하나 잘려나간 기분.

그리고 한참 후에, 이치마츠는 스스로 손바닥에 새겨진 이름을 태웠다. 하지만 그걸로 해결 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고, 이름은 그저 이름일뿐이라는 걸 시간이 더 지나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흑임자 전병입니다............

이 썰 좀 또라이 같았죠........................

저도 고어나 잔인한거 식인소재 잘 못보는데 얼마 전에 꾼 꿈이 인상이 강렬해 한번 써보고 싶었습니다 ㅇㅅㅇ)/

자세한건 기억이 안나고 꿀 항아리에 거꾸로 빠져 죽은 아기를 누군가가 벌벌 떨면서 잡아먹는 꿈이었는데

아마 그리스 신화 중에서 미궁속에 꿀 항아리에 빠져죽은 왕자 얘기랑 제 아이를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그림이 합쳐진게 아니었을까요

그게 강렬해서 왜 아기를 벌벌 떨면서 잡아먹어야 했을까 아기를 먹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고 생각하다 보니

이런 또라이같은게 나왔습니다............................................


참 그리고 저는 찻집 남자가 카라마츠라는걸 처음부터 다들 눈치채시고 카라마츠가 남 얘기인척 천연덕스럽게 얘기하는거라고 다들 아실줄 알았는데

남자의 정체가 뭔지 긴가민가 하셨다는 분들이 계셔서 놀랐어요

아마 제가 모자란 탓이겠죠...........ㅎㅎ....................빠가새끼...................................................

카라마츠는 쵸로마츠에게 자기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카라마츠가 임신하는 부분이 나왔기 때문에 여자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카라마츠는 본인이 원하지 않았지만 이치마츠를 사랑하게 되고

오소마츠는 그렇게 된 게 자신의 죄 탓이라고 생각해서 떠돌게 되어요

오소카라도 이치카라도 다 정말 좋아하는데

제가 캐릭터를 셋이나 굴리려고 하니까 한계가 있더라구요.... 삼각관계는 보기는 좋은데 쓰는건 힘든거같아요.....

파카카라 존잘님들 대다내...........................................................

참 세번째 쌍둥이는 쥬시마츠였어요

;ㅁ; 톳티는 어디 있을까요 엉엉 톳티 미안해


사실 별 내용이 없어서 후기를 안써도 되겠다 싶었는데

읽어주시는 분들이 저를 그냥 또라이로 아실까봐 살포시 달아봅니다............................


잔인한 묘사가 있습니다 

취향타는 소재 주의





남자가 다시 주전자에 뜨거운 물을 가득 담고 돌아왔다.

피곤하지는 않으세요?”

쵸로마츠는 잠깐 졸리진 않는지, 눈이 뻑뻑하진 않은지 느껴봤지만 아무 문제가 없었다. 아마 차에 각성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아니요. 아마 차를 마셔서 그런 건지 아직 쌩쌩하네요.”

다행이네요. 이야기가 곧 끝날거라서요.”

남자가 웃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남자는 긴 이야기를 오래 하면서도 차로 그저 입술만 축일뿐 많이 마시지 않았다. 이상하네. 차를 이만큼 마셨으면 화장실에 가고 싶어질만도 한데.

어디까지 했더라, , 카라마츠가 이치마츠를 피하기 시작했죠. 하지만 이치마츠는 포기하지 않고 카라마츠의 주변을 맴돌았습니다. 아니, 같은 집에 사니까 맴돌았다기보단 늘 곁에 있었다고 해야 할까요. 오소마츠가 집을 비우는 날엔 카라마츠의 방 문 앞에서 밤을 지새우다 새벽녘이 되서야 자리를 떴고, 카라마츠가 혼자 있을 때엔 멀리서 카라마츠를 지켜보다가 카라마츠와 눈이 마주치면 스윽 사라지곤 했습니다. 카라마츠도 이치마츠가 싫은 건 아니었어요. 물론 카라마츠가 이치마츠에게 그런 가족 이상의 호감을 느꼈다는 것은 아닙니다.”

남자가 잠깐 말을 멈췄다가 쵸로마츠를 응시했다.

아니, 그럴 수도 있었겠네요. 이치마츠는 조용히 상대방에게 스며드는 사람이었어요. 카라마츠가 만약 이치마츠를 정말 싫어했다면 그의 주변에서 이치마츠가 맴도는 걸 견디지 못하고 오소마츠에게 도망가버렸을지도 몰라요. 오소마츠는 아기가 눈에 어른거린다고 말도 없이 찾아와 카라마츠와 아기를 꼭 끌어안고 쪽잠을 잔 뒤 돌아가기도 했고, 아기가 바깥바람을 쐴 수 있을 때가 되자 이 집을 나가 극단에선 좀 떨어져 있지만 셋이서 알콩달콩하게 살 수 있는 집을 찾자고 카라마츠에게 속삭였습니다. 카라마츠는 행복했어요. 아기는 날이 갈수록 살이 통통하게 오르고 귀여워졌습니다. 아기가 방긋방긋 웃을 때면 오소마츠가 보이기도 했고, 카라마츠가 보이기도 했습니다. 아주 가끔은, 이치마츠가 보이기도 했죠. 오소마츠와 떨어지지 않고 매일매일 그를 볼 수 있다면, 그리고 오소마츠도 아기가 커 가는 것을 카라마츠와 함께 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하지만 카라마츠는 망설였습니다. 오소마츠의 어머니가 아기를 너무 아끼고 사랑해 혹시 그들이 분가하면서 아기를 데리고 가버리면 상심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죠. 카라마츠는 시어머니를 정말 자신의 어머니처럼 사랑했고,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오소마츠는 달랐습니다. 그는 매물로 나온 집을 하나 둘 찾아 카라마츠에게 보여줬고, 아기가 뛰어놀 마당이 있고, 안전하고, 교육환경이 좋은 곳으로 이사를 가자고 계획을 뚜렷하게 짜기 시작했어요. 카라마츠는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좋았고, 아기가 빡빡한 도시와는 달리 자연 속에서 성장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소마츠가 골라온 집들이 눈에 차지 않았죠. 카라마츠가 계속해서 퇴짜를 놓았지만 오소마츠는 포기하지 않고 점점 더 많은 집들을 찾아왔습니다. 꼭 오소마츠가 조급해하는 것 같아 카라마츠는 오소마츠에게 혹시 신경 쓰이는 것이 있냐고, 아기는 아직 어리니 천천히 생각해도 된다고 부드럽게 얘기했지만 오소마츠는 아무 대답 없이 그저 카라마츠를 끌어안았죠. 오소마츠가 내색은 하지 않지만 혼자 사는 게 많이 외로웠구나, 카라마츠는 이렇게 가족들이랑 함께 있지만 오소마츠는 아침에 눈뜰 때부터 밤에 잠들 때까지 혼자였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카라마츠는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카라마츠는 눈치가 없는 거야 아님 멍청한 거야? 쵸로마츠가 미간을 찌푸렸다.

카라마츠와 오소마츠가 밤늦게까지 집들을 둘러보고 오던 날이었습니다. 오소마츠의 어머니는 이미 잠자리에 든 후였고, 오소마츠를 먼저 욕실로 보내고 카라마츠는 아이를 찾아 아기 방으로 갔습니다. 아기방이라고 해서 특별할 것은 없었고, 아기용 장난감이랑 침대, 그림책 같은걸 갖다 둔 방이었어요. 방문이 조금 열려있었습니다. 불도 켜져있었구요. 카라마츠는 아마도 시어머니가 깜빡하고 주무시러 간 모양이구나, 하고 조용히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말소리가 들렸어요. 아주 조그만 목소리가, 아빠야. 아빠라고 불러. 아빠. 하고. 이치마츠였습니다. 이치마츠가 엉거주춤하게 아기를 안고 아기의 이마에 뺨을 부비며 아빠라고 부르라고 속삭이고 있었죠. 카라마츠는 찬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놀랐습니다. 그리고 이치마츠가 그에게 보이는 비정상적인 관심과 집착을 카라마츠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어요. 카라마츠가 문을 열고 들어서려는 순간 뒤에서 오소마츠가 나타나 카라마츠의 어깨를 잡았죠. 카라마츠가 해명을 하기도 전에 오소마츠는 카라마츠를 부드럽게, 하지만 힘을 줘 뒤로 밀었고,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습니다. 잠시 후에 새근새근 잠이 든 아기를 안고 나타나 카라마츠에게 안겨주고 방으로 돌아가 있으라고 말했죠. 카라마츠는 아기를 안고 어쩔 줄 몰라 하며 문 앞을 서성였습니다. 곧 두 사람이 말다툼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뭔가를 집어 던지는 소리도 들렸고, 부서지는 소리도 들렸죠. 이러다 아기가 깨겠다 싶어 카라마츠는 빠른 걸음으로 카라마츠의 방에 아기를 안고 가 아기 침대에 눕히고, 다시 아기방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치마츠가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는 게 들렸습니다. 형이 무슨 낯짝으로 그럴 수가 있냐고, 형이 먼저 약속을 어기지 않았냐고, 왜 자기한테 딱 한번만 양보할 수는 없는 거냐고. 카라마츠는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습니다. 두 사람이 이제 치고 박고 싸우는 건지 둔탁한 소리가 들렸고, 카라마츠는 말려야겠다 싶어 문고리를 잡았지만 문은 안에서 잠겨있었어요. 오소마츠는 단 한 번도 문을 잠근 적이 없었는데. 카라마츠는 저러다 누구 하나가 심하게 다치기라도 할까봐 겁이 나 집 안을 한참 뒤져 마스터키를 찾았습니다. 차마 오소마츠의 어머니를 깨울 순 없었어요. 아들 둘이 저렇게 싸우는 걸 본다면 시어머니가 마음이 아플 게 분명했으니까요.”

형제간에 치정싸움이라니. 시어머니가 마음아파야 할 부분은 그 부분 아닌가? 쵸로마츠는 손이 조금 시려와 찻주전자를 손으로 감싸 안았다.

그러다 카라마츠는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발견했습니다. 오소마츠와 이치마츠, 그리고 그들과 똑같이 생긴, 또 하나의 쌍둥이. 세 명이 저택의 거실을 배경으로 나란히 앉아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분명히 다들 똑같이 생겼는데 카라마츠는 왠지 오소마츠와 이치마츠를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어요. 어느 부분이 다르고, 어느 부분을 보니 오소마츠고 이치마츠다 하고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카라마츠는 분간할 수가 있었죠. 그리고 카라마츠가 처음 본 세 번째 쌍둥이는 다른 형제들보다 표정이 훨씬 밝고, 더 어린애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오소마츠는 왜 이 세 번째 형제에 대해 말하지 않았던 걸까? 카라마츠는 싸움을 말리러 가는 것도 잊은 채 사진을 들고 한참동안 서있었습니다. 오소마츠와 이치마츠는 예전부터 사이가 좋아 보이지 않았으니 그려려니 해도, 왜 그들이 세 쌍둥이었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 세 번째 형제는 어디로 갔을까. 병이나 사고로 일찍 세상을 뜬 걸까? 카라마츠는 사진과 마스터키를 들고 다시 아기방으로 돌아갔습니다. 방문은 활짝 열려있었고, 불이 꺼져있었습니다. 카라마츠는 설마 하는 생각이 들어 불을 켰죠. 방 안은 난장판이었습니다. 어느 하나 성한 것 없이 모조리 박살이 나있었고, 누가 흘린 건지 알 수 없는 피가 곳곳에 튀어있었죠. 큰일 났구나. 카라마츠는 구급차를 부르려고 전화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전화기 앞엔 오소마츠가 먼저 와있었죠. 카라마츠의 발소리가 들리자 오소마츠가 고개를 돌렸습니다. 얼굴 여기저기에 멍이 들었고 손에는 피가 묻어있었어요. 카라마츠는 손에 힘이 풀려 사진과 열쇠를 떨어뜨리고 벌벌 떨면서 오소마츠의 손을 잡았습니다. 카라마츠가 혹시, 혹시, 하면서 말을 잇지 못하자 오소마츠는 씩 웃으면서 카라마츠를 끌어안았어요. 설마 내가 하나뿐인 동생을 죽이겠어? 그냥 의견차이로 다퉜을 뿐이야, 하고 카라마츠를 달랬죠. 오소마츠의 목소리엔 사람을 설득하는 힘이 있었어요. 카라마츠는 마음을 놓았고, 오소마츠의 품에 안겨 그의 멍든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그 세 번째 쌍둥이가 생각나 사진을 다시 주워들었습니다. 오소마츠는 카라마츠가 내미는 걸 보고 뭔데? 하고 고개를 숙였다가 사진을 알아보자 그걸 빼앗듯 가져가 구겨 바지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카라마츠가 이상하단 표정으로 그를 보자 오소마츠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막내동생이 어려서 사고로 죽었다고, 그의 어머니가 보면 마음이 찢어질 거라며 사진을 치워야 한다고 했죠. 오소마츠는 카라마츠와 함께 욕실로 들어가 대충 씻고 약을 발랐습니다. 카라마츠는 계속 이치마츠가 걱정되었지만 오소마츠의 앞에서 이치마츠를 찾아봐야겠다고 할 수가 없었어요. 오소마츠가 어련히 힘조절을 했겠지 싶었고, 이제 정말 이 집을 나가야겠다고 결심했죠. 이치마츠가 외로웠고, 그저 가까이 있는 사람이 카라마츠였기 때문에 그에게 품어서는 안 될 감정을 품은 거라고 생각했어요.”

카라마츠가 좋게만 생각하려고 하는 것도 카라마츠가 어려서였을까요?”

쵸로마츠는 자기도 모르게 삐딱하게 물었다. 남자는 음, 하고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건 아마도 카라마츠의 천성이었을거에요. 뭐든지 좋게, 긍정적으로만 보려고 하는 성격.”

좀 답답하네요.”

남자가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남자는 쿠키를 하나 집어 조금 베어 물곤 차를 마셨다.

새벽녘에 카라마츠는 뭔가 타는 냄새를 맡고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이 새벽에 탄내라니, 혹시 집에 불이난건가? 하고 놀라 문을 열고 나갔지만 집 안은 조용했어요. 카라마츠가 다시 방 안으로 돌아와 창밖을 내다보니 이치마츠가 담배를 입에 물고 드럼통에서 뭔가를 태우고 있었습니다. 아마 이치마츠가 쓴 걸로 보이는 종이가 가득 든 박스가 있었고, 이치마츠는 그걸 몇 장씩 꺼내 불길이 넘실거리는 드럼통 안에 던져 넣었어요. 카라마츠는 혹시 이치마츠가 많이 다쳤을까 걱정이 되어 한참 이치마츠를 훑어보았고,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습니다. 이치마츠의 표정은 어떤 감정이 담겨있다고 뚜렷하게 읽어낼 수 있는 게 아니었어요. 이치마츠가 곧 카라마츠의 눈길을 피했고, 카라마츠는 오소마츠가 뒤척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죠.”

이제 카라마츠랑 이치마츠가 도망치는 건가? 쵸로마츠는 흥미진진하게 귀를 기울였다.

그날 아침, 오소마츠의 어머니는 아들들의 얼굴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카라마츠는 여차하면 자기가 나서서 둘러대려고 변명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오소마츠의 어머니가 아무것도 묻지 않아서 좀 의아하게 생각했죠. 네 사람이 거의 식사를 마칠 무렵 오소마츠가 말했습니다. 카라마츠와 아이와 함께 이 집을 떠나 극단에서 좀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겠다고. 오소마츠의 어머니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고개를 끄덕였어요. 이치마츠는 꼭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죠. 카라마츠는 이제 아이를 데리고 오소마츠와 함께 집을 보러 다녔어요. 하지만 마음에 쏙 드는 집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창이 넓었으면, 조금 더 조용했으면, 하고 한참을 돌아다녔지만 늘 허탕을 쳤죠. 아기도 매일 차를 오래 타고 다니다 보니 힘이 들었는지 보챘고, 나중엔 감기를 앓기 시작해 카라마츠는 어쩔 수 없이 시어머니에게 아기를 맡기고 오소마츠와 함께 집을 보러 갔습니다. 완벽한 집이었어요. 남쪽으로 난 창에는 햇빛이 환하게 들어왔고, 어디 바람이 새는 곳도 없었고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깨끗하고 아늑했죠. 카라마츠는 여기다 싶어 그 자리에서 계약을 하고 오소마츠와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늦은 저녁식사를 하며 세 사람의 독립을 축하했죠.”

남자가 이야기를 멈추고, 자기 찻주전자 뚜껑을 열어 안을 들여다봤다. 그리곤 잠시 만요, 하고 찻주전자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들어갔다가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아까와 표정이 좀 달랐다. 열심히 이야기를 하던 때와는 달리, 좀 더 삭막한 느낌이었다. 쵸로마츠는 기분탓이려니, 하고 남자기 이야기를 시작하길 기다렸다. 클라이막스였다.

늦은 시간이었죠. 집 안은 조용했어요. 꼭 사람이 한동안 살지 않았던 것처럼 고요했습니다.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게 처음은 아니었는데, 카라마츠는 현관에 발을 들이는 순간 불안함을 느꼈죠. 뭔가 잘못됐다고. 그리고 바로 카라마츠와 오소마츠의 방으로 뛰어가 문을 열었습니다. 아기 침대는 비어있었어요. 아기방이 어떻게 손도 대지 못할 만큼 망가졌으니 시어머니가 거기에 아기를 둘리는 없고, 카라마츠는 다시 내려가 시어머니의 방문을 두들겼죠. 아기는 없었어요. 시어머니가 막 잠에서 깼는지 눈을 비비며 나와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카라마츠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방문을 하나하나 열어 재끼면서 아기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이치마츠를 불렀죠.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어요. 오소마츠도 다른 층에서 아기를 찾으며 방문을 열었지만 아기도, 이치마츠도 없었어요. 카라마츠는 점점 겁에 질려 미친 듯이 방문을 열다 갑자기 총에 맞은 것처럼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습니다. 한 군데가 남아있었죠. 지하실. 카라마츠는 천천히 지하실 문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습니다. 뭔가 찌덕거리는 소리가 났어요. 카라마츠는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며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손잡이를 잡고 계단을 하나씩, 하나씩 내려갔죠. 저 멀리, 시어머니의 꿀 항아리의 뚜껑이 열려있었어요. 그리고 그 앞에, 이치마츠가. 이치마츠가 꿀범벅이 된 아기를 붙잡고 살을 뜯어먹고 있었습니다. 카라마츠는 정신을 잃기 직전에 이치마츠와 눈이 마주쳤어요. 이치마츠의 눈에는 슬픔과 절망, 고통, 그리고 공포가 어려 있었죠.”

남자의 목소리가 점점 빨라지다가 꼭 단칼에 끊은 것처럼 멈췄다. 뭐야. 쵸로마츠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남자는 쵸로마츠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카라마츠는 한참을 앓았습니다. 얼마나 누워있었는지 카라마츠가 어질어질한 머리를 붙잡고 다시 깨어났을 땐 그의 곁에 오소마츠의 어머니가 앉아있었습니다. 카라마츠는 한숨을 쉬고, 이상한 꿈을 꿨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오소마츠의 어머니는 고개를 젓고 카라마츠의 손을 부여잡았습니다. 카라마츠가 사흘 밤낮을 앓았다고. 시어머니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카라마츠는 오소마츠를 찾았습니다. 젖 먹던 힘까지 짜내 오소마츠를 찾았지만 오소마츠는 나타나지 않았어요. 카라마츠가 허우적거리며 침대에서 나오려고 몸을 비틀자 오소마츠의 어머니가 카라마츠를 붙잡고 다시 자리에 눕혔습니다. 그리고 이상한 이야기를 시작했죠. 아주 이상하고, 오래된 이야기를.”

곧 끝납니다. 남자가 말했다.

오소마츠네 집안사람들은 재주가 많았습니다. 다들 한 가지씩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어 이름을 널리 떨쳤죠. 베토벤의 환생이 아니냐는 소리를 들은 음악 천재도 있었고, 세계 왕족들의 결혼 예복을 지은 디자이너도 있었고, 우주의 비밀을 조금이지만 밝혀낸 과학자도 있었습니다. 각 분야에서 거의 정상에 오른 사람이 하나도 아니고 여럿이라니. 이 집안에 대한 얘기를 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들을 부러워했죠. 그러나 이 집안사람들에게 있는 것은 사실 재능이 아니라 욕망이었습니다. 그들은 대대로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었어요. 그들에게 주어진 재능의 한계를 뛰어넘어 세상 사람들을 내려다보고자 하는 욕망이었죠. 채울 수 없는 욕망은 정신을 좀먹었고, 그 욕망으로 눈이 하얗게 뒤집어지면 사람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렀습니다. 바로 피붙이를 잡아먹는 것이었죠.”

그럼……. 그 세 번째 쌍둥이는…….”

그들은 유달리 혈육에 대한 집착이 강했습니다. 서로를 잡아먹는 집안이 대를 잇고자 하는 발악이었을까요. 오소마츠의 아버지는 화가였어요. 그는 집안 대대로 내려온 광기를 무시하고 그에게 주어진 재능만으로 성공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거기엔 한계가 있었고, 그는 점점 미쳐가다 결국 그의 동생을 잡아먹었습니다. 그리고 그걸 오소마츠와 두 동생이 지켜보고 있었죠. 아버지의 눈에 띄지 않게 숨어서, 아버지가 숙부를 뼈까지 씹어 먹는걸 벌벌 떨면서 보고 있었어요. 그리고 세 사람은 약속을 했습니다. 우린 절대 서로를 잡아먹지 말자고.”

설마…….”

하지만 약속은 깨지기 마련이죠. 제일 먼저 욕망이 차오르기 시작한 건 오소마츠였어요. 그는 늘 사람들의 중심에 서고 싶었고, 늘 특별하고 대단한 존재로 인정받고 싶어 했어요. 그는 한동안 집을 떠나 여기저기를 떠돌며 욕망을 억누르려고 애썼지만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집에 돌아온 어느 날 오소마츠는 식욕이 돌았고 동생들을 사랑하는 마음 위에 그의 욕망이 넘실거려 결국 막내 동생을 삼켜버렸죠.”

괴상한 이야기다. 남자가 꼭 실제로 있었던 일 마냥 생생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오소마츠는 원하던 것을 쟁취했습니다. 그는 순식간에 그가 원하던 사람이 되어 모두의 이목을 사로잡았어요. 어딜 가든 그는 눈에 띄었고, 자연스럽게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곤 했습니다. 이치마츠는 형의 행동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오소마츠의 어머니는 그들을 너무도 사랑했기 때문에 자식을 잡아먹은 자식마저 감싸 안았어요. 이치마츠는 그가 알고 있던 모든 게 뒤집어진 것처럼 느껴졌고, 점점 안으로 파고들었습니다. 그들의 어머니는 이치마츠가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했고, 감싸주기만 할 뿐이었어요. 그는 답답해 죽을 것 같을 때 글을 썼습니다. 시도, 소설도, 희곡도, 가리지 않고 글을 썼죠. 이치마츠는 글에 재주가 있었기에 그는 부업처럼 글을 팔아 돈을 벌었습니다. 그리고 카라마츠가 왔고,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와 오소마츠의 아이를 잡아먹었죠.”

쵸로마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입을 떡 벌리고 남자를 응시했다. 남자는 다시 말을 이었다.

오소마츠의 어머니는 카라마츠에게 정말 많은 돈을 줬어요. 차 트렁크에 현금을 가득 실어주고, 그의 이름으로 된 통장을 건네주었죠. 그리고 아기의 뼈가 들어있는 조그만 단지도 주었습니다. 카라마츠는 그 집을 떠나 한참을 헤맸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생각을 했죠. 오소마츠와 이치마츠와 그의 아기. 살이 뽀얗게 올라서 카라마츠가 이름을 부르면 팔다리를 귀엽게 버둥거렸던 아기. 늘 카라마츠에게 웃어주고 사랑한다고 속삭였던 오소마츠. 그리고 겁에 질린 눈으로 여린 살점을 뜯어먹던 이치마츠. 가끔 오소마츠로 보이는 사람이 그의 주변을 맴돌았지만 카라마츠는 멀리서 그가 보이면 바로 주거지를 옮겼습니다. 아무도 만날 수가 없었어요.”

이치마츠는 자기가 대단한 작가가 되면 카라마츠가 돌아봐줄거라고 생각한건가요?”

카라마츠는 어느 골방에서 아기의 뼈가 담긴 단지를 끌어안고 반쯤 죽어가다가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한적한 땅을 찾았죠. 어느 조용한 주택가에 주인이 방치한 공터였어요. 카라마츠는 그 곳에 작은 가게를 짓기로 했습니다. 전문 업체가 땅을 고르고 기반을 다졌어요. 그리고 바닥 공사가 거의 마무리 됐을 때 카라마츠는 한밤중에 가게로 찾아와 바닥에 아기의 뼈 단지를 묻고, 아무도 모르게 흙을 덮어 가렸습니다. 그리고 가게를 찻집으로 꾸몄죠.”

쵸로마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의 뒤를 돌아보았다. 가게 안을 가득 채운 테이블에는 아무도 없었다. 설마. 설마. 쵸로마츠는 설마, 하는 마음에 다시 남자를 돌아보았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욕망이 뭐였는지 깨달았어요. 아무도 카라마츠에게 얘기해주지 않았지만 카라마츠는 알 수 있었습니다. 깨달음과 함께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와 분노가 치밀어 올랐죠. 내 아기를, 내 행복하던 삶을 망가뜨렸는데. 나는 어떻게 이치마츠를 사랑할 수가 있지.”

그 때 가게 출입문에 매달린 종이 울렸다. 마스크를 쓰고 눈에 힘이 없는 남자가 들어오고 있었다.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걸어가 축음기를 껐다. 그와 동시에 가게 안에 있던 불이 모조리 꺼졌다. 쵸로마츠는 황급히 테이블 사이로 달리며 출입문을 향해 달렸다. 카라마츠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분노는 도저히 이치마츠를 향할 수가 없었어요.”

이치마츠의 앞을 지나치며 쵸로마츠는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지만 이치마츠는 쵸로마츠를 붙잡지 않았다. 쵸로마츠는 문을 열어젖히고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한참을 달렸다. 그는 어느 새 기숙사 뒷문에 도착해있었다. 한참동안 이야기를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한밤중이었고, 쵸로마츠가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손목시계의 시간을 확인해보니 막 열두시를 지난 때였다. 말도 안 돼. 쵸로마츠는 철문틈 사이에 손을 밀어 넣어 문을 뛰어넘으려고 했다. 하지만 쵸로마츠가 철문을 잡는 순간 문이 부글부글 끓으며 천천히 녹아내려 쵸로마츠는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그의 눈앞에 연보라 빛으로 반짝거리는 너울이 날아다녔다. 넘어지면서 머리를 박은 걸까. 쵸로마츠는 정신이 아찔해 머리가 빙빙 돌았고, 눈앞에서 낮과 밤이 쉴 새 없이 바뀌는 것을 멍하니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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