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마츠의 방문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카라마츠가 할 일이 없긴 하겠지. 여주인은 느즈막히 일어나 자기 방에서 아침 식사를 하곤 늘어져 있다가 주변 친목회 모임에 나가 놀다가 해가 다 진 뒤에나 들어오거나 혹은 한밤중에 돌아오던가 했다. 물론 식당 아줌마가 그에게 여주인의 근황에 대해 자주 늘어놨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카라마츠는 아침을 먹고 난 후엔 이치마츠의 방에 찾아와 그가 읽는 잡지를 뒤적거리거나 커다란 손잡이 거울을 꺼내 자기 얼굴 상태를 확인하고 아니면 이치마츠는 잘 틀지도 않는 TV를 틀어 시답잖은 쇼 프로그램을 보곤 했다. 그러면서 계속 이치마츠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 저 아이돌이 요새 인기라더라, 저 드라마가 유행이다, 하면서. 이치마츠를 끌고 나가는 일도 적지 않았다. 이치마츠는 그렇게 자기 영역을 침범당하고 끌려 다니는 게 딱 질색이었지만 카라마츠는 아무리 이치마츠가 거절하고 밀어내고 은근한 신경질을 부려도 포기하지 않고 이치마츠에게 매달렸다. 그러기를 거의 한 달. 이치마츠는 이제 카라마츠가 하는 말에 제법 딴지를 걸 수 있게 되었다. 이치마츠가 한 마디씩 툭툭 내뱉어도 카라마츠는 큭, 하고 충격 받은 척 하곤 곧 원상복귀 해 또 이런 저런 얘기를 늘어놓았다.

카라마츠는 한 달 동안 두 사람이 제법 말을 섞기 시작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치마츠의 마스크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걸 배려라고 생각하는 건가? 이치마츠의 머릿속에서 뒤틀린 생각이 꿈틀꿈틀 기어 나왔다. 카라마츠의 저 단순한 머릿속에선 자신이 이치마츠의 마스크에 대해 묻지 않는 걸 엄청난 배려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섬세하고, 배려심 있는 사람이라고 자만할지도 모른다. 이치마츠가 그의 배려에 감사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 그의 앞에서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도 기분이 나빴다. 이치마츠의 방에는 거울이 없다. 그의 방에 딸린 작은 화장실에도 거울도 하나 없이 그저 약통과 수건을 담는 서랍만 있을 뿐이었다. 카라마츠는 이미 이치마츠의 마스크 너머를 짐작했을 것이다. 그런 그 앞에서 거울을 들여다보며 자신이 얼마나 잘생겼는지를 꼼꼼히 뜯어보고 있는 건 이치마츠를 조롱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치마츠는 꾹꾹 눌러 참으며 애써 카라마츠에게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치마츠는 이 일자리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고 그러기 위해선 여주인의 비위를 맞춰야했다.

경비 아저씨가 포커 빌려주셨다!”

카라마츠가 아침부터 포커를 들고 와 신나게 이치마츠의 테이블을 치웠다. 이치마츠는 한참 책을 읽던 중이었다. 카라마츠가 올 것이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오늘따라 기분이 나빴다. 이치마츠는 말없이 테이블 옆에 앉아 카라마츠가 자켓을 벗어 걸어놓고 카드를 섞는 걸 보고 있었다.

간밤에 또 사고가 나던 날의 꿈을 꿨다. 한 달에 한두 번은 이런 꿈을 꿨다. 아마 이치마츠의 무의식이 그에게 잊지 말라고 계속 반쯤 아문 상처를 헤집어 쑤시는 게 아닌가 싶다. 어린 이치마츠가 마루에서 수박을 먹고 있다. 햇볕이 쨍쨍하고 마당에는 갓 세탁한 이불을 말리고 있어 상쾌한 세탁비누 냄새가 난다. 이치마츠는 느긋하게 수박을 먹으면서 수박씨를 마당에 뱉는다. 담장너머까지 수박씨를 뱉을 수 있을까? 툭하면 히스테리를 부리는 옆집 아줌마가 이치마츠를 잡으러 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저 멀리서 시뻘겋게 불타는 거대한 뭔가가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거실에 앉아 다정하게 대화를 하고 있는 엄마와 아빠를 미처 부를 틈도 없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이치마츠는 튕겨져 나간다. 고막이 찢어지는듯한 소리에 이치마츠가 울지도 못하고 벌벌 떨고 있는 동안 그것은 다시 콰쾅!!!! 하고 폭발한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크게 불꽃이 일어나면서 집은 산산조각이 나 사방으로 파편이 날아간다. 엄마 아빠는, 죽었겠지. 얼굴이 불타는 듯 뜨겁고 아프다. 불이 붙은 게 아닐까. 이치마츠가 엄마아빠의 죽음을 직감하는 순간 잠에서 깬다. 잠에서 깨면 이치마츠는 흉터가 남은 얼굴 한가득 눈물범벅이 돼서 한참 우울한 기분에 젖어든다.

포커를 시작하고 카라마츠가 다시 이런 저런 얘기를 시작하지만 이치마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무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 날이다. 하지만 이치마츠는 카라마츠가 여주인의 장난감이라는 이유로 참아야 하고, 버텨야 한다. 역겨워. 이치마츠는 친척집을 전전하고 결국 쫓겨나 거리를 헤매다 도살까지 흘러갔을 때도 몸을 팔지는 않았다. 상대가 여자든 남자든, 돈을 받고 섹스를 하는 건 더럽고 비윤리적인 일이다.

너도 얼굴이 반반했으면 저 새끼처럼 몸이나 팔면서 놀고먹지 않았겠어? 일하는 거 싫잖아? 이거 그냥 질투 아냐? 도덕심도 부족하고, 부모가 없어서 그런가? 더러워. 싫어. 저딴 새끼를 부러워하는 나도 싫어. 싫다.

이치마츠는 손에 든 카드를 집어 던지려고 마음먹었다. 저 잘난 얼굴을 상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테이블위에 집어던지면서 내가 여기서 놀고만 있는 줄 아냐?? 난 너같이 노인네랑 떡치는 남창새끼는 아냐 하고 비꼴 생각이었다. 소리를 질러도 위층까지 들리진 않겠지만 쓸데없이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진 않다. 그리고 이치마츠가 조곤조곤하게 상처 주는 말을 하면 상대들은 보통 더 큰 충격을 받는 듯 했다. 이치마츠가 입술을 비틀며 막 입을 열었을 때, 카라마츠가 자기 카드를 열심히 들여다보며 먼저 말을 걸었다.

이렇게 말하는 거 좀 민망하지만, 네가 쫓아내지 않아줘서 고마워.”

내가 너를 어떻게 쫓아내겠니. 네 심기를 거슬렀다간 여주인이 오갈 데 없는 날 쫓아내고 말텐데. 순진한 생각을 하고 있구나 너는. 이치마츠는 조금 마음이 풀려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얌전히 다음 카드를 냈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눈치를 잠깐 살피더니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왠지 모르겠지만 여기 사람들은 나를 싫어하는 거 같아서……. 좀 그래. 이치마츠는 그저 말수가 적을 뿐이지만 그래도 잘 어울려주는데 다른 사람들은 뭐랄까, 겉으로는 나한테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 같지만 그게 아니라는 게 느껴져. 가끔 꼬치꼬치 캐물을 때도 있고.”

카라마츠는 보기엔 멍청해 보이지만 제법 눈치가 있었다. 경비나 운전기사와 말을 섞을 일은 없어 몰랐지만 식당 아줌마는 계속해서 카라마츠의 흉을 보곤 했다. 아줌마랑 경비, 운전기사한테 계속해서 친근하게 말을 거는 게 불쾌하기 짝이 없으며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고. 이치마츠 군은 성실한 사람이니까 카라마츠 같은 애들하고 너무 어울려서 물들지 말라고. 이치마츠는 늘 하던 데로 흘려들었다.

여사님도 말이지, 비서 일을 가르쳐주시겠다고 고용하신 건데 실질적인 업무 같은 건 하나도 얘기 안 해주시고 그냥 쇼핑하는데 따라가서 짐이나 들고 있게 하고, 뭐 그런다니까.”

카라마츠가 눈에 띄게 축 처져서 양손으로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호스트라던가, 뭐 그런 일 하던 거 아니었어?”

이치마츠 본인도 모르게 말이 먼저 튀어나갔다. 아차, 하고 후회했지만 이미 뱉은 말은 도로 담을 수가 없다. 카라마츠는 호스트?! 하고 놀라더니 곧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좀 멋있긴 하지. 설마 호스트라고 생각할 줄은 몰랐네. 나는 저 북쪽 촌동네에서 도시락 배달이나 하다가 왔는걸. 안개가 엄청 낀 날 실수로 여사님 차를 박아서 어떻게든 배상하겠다고 빌었더니 옆에서 일하면서 갚으라고 상냥하게 거둬주셨어. 정말 고맙게 생각해.”

카라마츠가 씩 웃으면서 다음 카드를 내며 사실 아는 것도 없고 하니까 일 시킬 수 있는 것도 없으신 거겠지, 하고 중얼거렸다. 이치마츠는 조금 충격을 받았다. 카라마츠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근 한 달간 봐온 카라마츠는 허세를 부리면서 안 어울리게 터프한 척을 하곤 했지만 저렇게 다른 사람 눈치를 보며 없는 사연을 만들어 내 변명을 할 인물은 아니었다. 이치마츠의 앞에서 그렇게까지 체면을 차리지도 않았고. 여주인은 새로운 놀이를 하고 싶은 건가? 상냥한 고용주가 되어 어리고 순수한 청년과 사랑에 빠지는 놀이?

그래도 다음에 부모님 뵈러 갈 때 일자리 생겼다고 말씀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야. 엄마랑 아빠 모두 나 노는 것만 좋아한다고 엄청 걱정했었거든.”

카라마츠가 카드를 잠깐 테이블에 엎어두고 TV위에서 물병을 집어 들어 마셨다. 이치마츠는 뭐라 대답하기가 어려워 그저 카라마츠의 뒷모습만 보고 있었다. 제법 단단해졌다고 생각한 이치마츠의 마음이 조금 아팠다. 이치마츠는 자기 자신을 가여워하기 바빠 다른 사람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일이 잘 없었다.

, 얘기한적 없나. 나 부모님 두 분 다 돌아가셔서, 나 혼자야.”

카라마츠가 다시 테이블 앞에 앉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엄마는 병 오래 앓다가 돌아가시고, 아빠는 교통사고로. 카라마츠가 남의 일처럼 고개를 저으며 다시 카드를 집어 들었다.

가끔 형제가 있었으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해.”

카라마츠가 중얼거렸다. 그 순간 이치마츠는 목에 뜨끈한 게 꽉 들어차는 기분이 들면서 가슴이 아팠다. 열 군데는 전전한 친척집, 길거리, 경찰서, 마지막으로 이치마츠가 터를 잡았던 도살장, 그 어느 곳에서도 이치마츠에게 타인 이상으로 가깝게 대해주던 사람은 없었다. 먼지 가득한 골방이든 은근한 피 냄새가 빠지질 않는 도살장 숙소에서든 이치마츠는 아침에 눈 뜨는 순간부터 잠들기 직전까지 사람이 그리웠다. 형제가 있었으면 했다. 나랑 닮은 얼굴을 한 형제가, 추운 잠자리를 함께 덥혀주고 외로워 미칠 때 곁에서 걱정해주고, 말을 걸어주고 달래줄 사람이 있었으면 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이치마츠도 포기하고 점점 단단해질 수 있었지만, 그러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을 혼자 슬퍼해야했다. 감정이 북받쳐 올라 이치마츠는 숨이 조금 거칠어졌다. 오랜만이었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차례를 기다리다 이치마츠가 약하게 어깨를 들썩거리며 고개를 숙이자 깜짝 놀라 카드를 내려놓고 이치마츠의 곁에 다가가 한쪽 팔로 어깨를 끌어안았다.

우는 거야? 내가 너무 우울한 얘기를 했나?”

이치마츠는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카라마츠는 잠깐 망설이다가 이치마츠를 제대로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이치마츠는 어색해 몸이 굳었지만 카라마츠는 괜찮아, 괜찮아, 하면서 이치마츠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부모님 돌아가신지 꽤 됐으니까 그렇게 불쌍해하지 않아도 돼. 티 안 났지? 아빠마저 돌아가셨을 땐 많이 힘들었는데 그래도 뭐……. 지금은 괜찮으니까.”

괜찮지 않잖아.”

이치마츠가 최대한 목소리를 가다듬고 대답했다. 괜찮을 리가 없다. 카라마츠처럼 관심 받고 싶어 하고 사람들하고 어울리고 싶어 하고 멍청하고 착하게 구는 놈이 혼자라는 게 괜찮을 리가 없다. 허세부리는거냐 너는. 카라마츠는 말없이 이치마츠가 진정할 때까지 이치마츠를 끌어안고 있었다.

이치마츠는 맨날 툴툴거려도 착하구나. 고마워.”

방금 전까지 너를 남창이라고 생각했는걸. 이치마츠는 마지막 말을 삼켰다.

카라마츠는 테이블을 정리하고 카드를 정리해 가죽 자켓 주머니에 찔러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치마츠는 소파에 기대어 말없이 카라마츠가 하는 걸 지켜보았다.

포커는 영 재미가 없네. 내일은 TV나 볼까?”

이치마츠는 어깨를 한번 으쓱 했다. 카라마츠는 씩 웃고, 그럼 내일 보자고! 하고 방 문을 열고 나갔다. 이치마츠는 문이 완전히 닫기는 소리가 나서야 마스크를 벗었다. 아까 흘린 눈물 때문에 마스크 안이 조금 찐득거리는 것 같아 불쾌하다. 그리고 문 너머에서 카라마츠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스크 많이 답답하면 벗어놔도 돼.”

이치마츠가 뭐라 대답할 겨를도 없이 카라마츠의 발소리가 멀어져갔다. 이치마츠는 마스크를 휴지로 잘 닦아서 문 앞에 걸어두고 고민했다. 그날 저녁 부엌으로 올라가 저녁식사를 받아오고, 자기 방에서 혼자 저녁을 먹고, 밤에 잠들 때까지 고민했다. 지금 쓰고 있는 마스크 이전엔 커다랗고 두꺼운 방한용 마스크였다. 그 전엔 싸구려 워머를 눈 바로 밑에까지 바짝 올려서 썼고, 병원에서는 눈만 내놓고 붕대를 둘둘 감고 있었다. 한번도 다른 사람에게 맨 얼굴을 보여줄 용기는 없었다. 간혹 호기심 많은 친척이나 경찰, 고용주들이 이치마츠에게 맨 얼굴을 보여달라고 요구할 때가 있었다. 그럼 이치마츠는 이를 악물고 마스크를 내렸고, 그들의 얼굴에 점점 번져나가는 혐오감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치마츠 자신도 자신의 맨 얼굴을 본지 꽤 되었다. 이치마츠는 잠자리에 누워 자신의 얼굴을 더듬어보았다. 왼 얼굴 이마에서부터 거의 턱까지 녹아내린 양초처럼 우툴두툴한 흉터가 남았다. 그날 그의 집에 불타는 헬기가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날 그 지역에서 하던 군사 훈련에서 사고가 나지 않았더라면, 그의 부모님이 다른 마을에, 최소한 옆집을 샀었더라면, 이치마츠는 조금 더 상냥한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이치마츠는 한참을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다음날에도 어김없이 카라마츠가 찾아왔다.

만화책 가져왔어! 만화책 잘 안보지? 누가 놓고 간 건지는 몰라도 서재에 있어서 다 들고 왔어!”

카라마츠는 들뜬 목소리로 문을 두드렸다. 이치마츠는 문 앞에서 망설이다 결국 마스크를 내려놓고 문을 열었다. 끼이이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길었다. 다리가 약하게 떨렸다. 아예 다른 사람들에게 맨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것도 아닌데, 심장이 쿵쾅거렸다. 카라마츠가 이치마츠를 싫어하게 된다고 해도 뭐 달라질 일은 없겠지만, 그런 일이 자주 있었지. 그래도 괜찮아. 이치마츠는 이 일이 좋았고, 이 방도 제법 마음에 들었고, 이대로 계속 혼자 살아도 상관없고, 언젠간 카라마츠도 여주인에게 버려져서 집을 떠날 거고.

표정 안 좋네. 이거 본 적 있어? 식당 이모님도 모른다고 하고. 누가 갖다 둔 건지 모르겠네. 그래도 1권부터 있으니까 한번 보자!”

카라마츠가 이치마츠의 어깨를 툭툭 치고 들어가 테이블에 만화책을 올려놓고-정말 몇 다스는 되보이는 양이었다소파에 드러누워 만화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치마츠는 가만히 서 있다가 카라마츠의 발쪽에 앉아 소파에 기대 만화책의 1권을 찾아 집어 들었다. 싸구려 성인만화였다. 표지에 얼굴에 빨갛게 홍조가 오른 긴 생머리의 여자가 가슴과 엉덩이를 강조하면서 우- 하고 입을 내밀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두 사람 다 아무 말이 없었다. 작은 방 안에는 스륵하고 만화책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 울렸다.

어렸을 때 집에 사고가 났어.”

갑자기 집에 고장 난 헬기가 추락해서,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병원에 한참 있다가 이모 집으로 갔는데 키워주기 힘들다 그래서.”

삼촌집도 안 된다 그러고. 그렇게 몇 군데를 돌다가 그냥 집을 나갔어.”

귀엽지도 않는 어린애를 일부러 맡아 키우는 건 나도 싫을 거라고 생각해.”

어릴 때부터 귀염성이 없어서.”

물건도 훔치고, 쓰레기통도 뒤지고 그러다 경찰서에서 좀 있기도 하고.”

도살장에서 소를 잡았어.”

직업이긴 해도 좀불편해서.”

여기서 지내게 됐어. 이치마츠가 중얼거렸다.

나도 그래.”

카라마츠가 만화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이치마츠는 한 권을 다 읽고 다음 권을 집어 들었다

이치마츠는 지금 하고 있는 일에 꽤 만족하고 있었다. 그가 하는 일은 고기들이 보관된 냉동 창고를 지키는 일이었다. 꽁꽁 얼어붙은 돼지며 소며 하는 것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걸 관리할 필요도 없었고, 창고 앞에 마련된 조그만 방에서 먹고 자고 하다가 식당 아줌마가 고기를 가져오겠다고 하면 같이 들어가 나르는 걸 도와주는 것이 다였다. 마주치는 사람도 얼마 되지 않았고, 식당 아줌마가 한 번 고기를 가져가면 일주일은 고기를 썼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만 고기를 나르면 됐다. 게다가 봉급도 적지 않았다. 숙식을 제공해주는 덕에 이치마츠는 자신의 취미생활에 돈을 조금 쓰고도 남아 저축을 할 수 있었다. 강철 문 너머에 하얗게 얼어붙은 고기들이 새파란 조명 아래에서 매달려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지만, 그가 이전에 하던 일에 비하면 훨씬 쾌적하고 마음이 편했다. 오늘도 이치마츠는 그다지 할 일이 없었고 자기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다음 달이면 계약이 끝나 다시 재계약을 하게 된다. 이치마츠는 이번에 여주인의 눈치를 살펴보고 방에서 고양이를 키워도 되는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고양이를 좋아했고 늘 키우고 싶었지만 부모님과 함께 살 때는 이치마츠가 한 생명을 책임지기엔 너무 어리다고 거절당했고, 부모님도, 집도. 심지어 한 쪽 얼굴마저도 잃었을 땐 고양이를 키울 방이 없었다. 성인이 된 이치마츠가 새로운 직업을 얻었을 땐 매일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괴로워하다 잠이 들어 고양이를 키울 여유가 없었다. 이치마츠는 이제야 조금 숨을 돌릴 수 있었고, 조금씩 고양이를 데려올 때 필요한 것들을 사들이고 있었다. 고양이가 쓸 모래화장실이라던가, 고양이가 좋아할 쥐 인형이라던가. 어느 품종이 좋다고 딱 찍어둔 건 없었다. 이치마츠는 어느 날 그의 운명 같은 고양이를 만나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여기에도 방이 있었군!"

낮지만 요란한 목소리가 방문 앞에서 들리더니 이치마츠의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무슨 일이지? 이치마츠는 당황해 잠깐 굳었다가 문 앞에 걸어둔 마스크를 꺼내 뒤집어쓰고 문을 열었다. 깜짝이야! 낯선 남자는 이치마츠의 마스크를 보고 놀라 뒷걸음질 쳤다가 다시 미간에 힘을 주고 멋진 척 미소를 지어보였다. 남자는 눈썹이 짙고 어딘가 가벼워 보이면서도 몸이 탄탄하고 힘이 넘쳐흘렀다. 이치마츠는 본능적으로 이런 종류의 사람을 꺼리는 편이었다. 그는 오랜 시간 고아로 살아와야 했고, 사고의 후유증으로 불안증세도 있었으며 뭣보다 그의 얼굴에 남은 흉 때문에 주눅이 들어 눈을 직접 마주치는 것도 어려워했다. 이렇게 사랑받고 자란 티가 나면서 자신감이 넘치고 모두가 자신을 사랑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은 괜히 미웠다. 하지만 이치마츠는 그런 자신을 더 미워했다.

이 사람은 뭐지? 이치마츠는 아무 대답 없이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열심히 손질한 티가 역력한 머리카락, 새까만 가죽 자켓, 그리고 안 어울리는 해골벨트에 새까만 스키니진까지, 남자는 이 저택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남자도 이치마츠가 훑어보는 시선을 느끼고 씨익 웃었다.

"처음이죠, 우리? 혹시 마스크 써서 내가 못 알아보는 건가? 마츠노 카라마츠, 여사님의 비서로 왔습니다! 오늘은 여사님이 친목 모임에 나가시는 날이라 휴일!"

비서. 이치마츠는 바로 카라마츠의 정체를 눈치 채곤 피식 웃었다. 얼굴을 전부 가리는 마스크 덕에 카라마츠는 눈치 채지 못했고, 그는 대뜸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이치마츠는 손을 잡아야 되나 잠깐 고민하다 결국 살짝 카라마츠의 손가락 끄트머리를 잡고 잠깐 흔들곤 바로 손을 놓았다.

"이치마츠."

"그냥 이치마츠?"

이치마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 이치마츠 하고 몇 번 되뇌어보다 역시 내가 온 첫 날 소개받은 사람 중엔 없었던 것 같군. 하고 고개를 저었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와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이십대 초반? 카라마츠는 자기가 저택에서 만난 사람들과 어떻게 지냈는지 저택이 넓고 산책하기도 좋고 밥도 맛있고 하는 얘기를 늘어놓다 문을 가로막고 서있는 이치마츠 너머로 방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저기, 들어가봐도 될까?"

이치마츠는 곧 인상을 찌푸렸지만 뭐라 둘러댈 말이 떠오르지 않아 결국 문에서 조금 비켜 카라마츠가 들어올 수 있도록 했다.

"실례하겠습니다, , 고양이 좋아해?"

카라마츠는 방에 들어와 소파에 앉아 멋지게 다리를 꼬더니 테이블에 가득 쌓인 애완동물 잡지나 사진, 책을 보고 웃으며 이치마츠를 돌아보았다. 성인 남성이 고양이를 좋아한다고 놀리는 건가? 이치마츠는 괜히 기분이 상해 대답하지 않고 방 한편에 있는 작은 냉장고에서 캔 커피를 꺼내 카라마츠 앞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잘 마실게. 카라마츠는 눈치가 없는 건지 철면피인건지 아무렇지도 않게 캔을 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치마츠는 자신의 공간에 낯선 사람이 들어온 게 벌써부터 불편해지고, 신경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이치마츠는 최대한 카라마츠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아 카라마츠가 얼른 꺼져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신기한 듯 방을 이리저리 둘러보다 방에 어울리지 않게 강철로 된 문을 발견했다.

"저 문이 화장실문은 아니겠지? 화장실 문은 그 옆에 있는 나무문 같은데? 저긴 어디야?"

카라마츠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바로 말을 놓아버렸다.

"냉동 창고."

"특이하네. 방 안에 냉동 창고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니. 저택에 사람이 많지도 않은데 냉동 창고를 따로 두고 고기를 보관하는 거야? 몇 명이더라, 여사님, , 이치마츠, 식당 이모, 경비 아저씨, 기사 아저씨. 총 여섯 명 밖에 안 되는데. 여기서 파티 같은 거 자주 열어서 그런가?"

카라마츠는 혼자 질문을 하고 혼자 대답을 하고 있었다. 이치마츠는 말없이 앉아 무릎 위를 손가락으로 작게 톡톡 두드렸다. 이치마츠가 말이 없으니 카라마츠는 괜히 방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다 뭔가 생각난 듯 아, 하고 이치마츠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까 정원 호수 근처에서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혼자 떨어져 있는 걸 본 것 같은데, 혹시 본 적 있어?"

고양이? 이치마츠가 고개를 저었다. 이치마츠는 자기 방을 떠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가끔 시내에 나갈 때도 정원이 있는 정문 쪽이 아닌 그의 방에서 제일 가까운 쪽문으로 나가 버스를 타기 때문에 그가 여기서 일한지 거의 1년이 다 되어가지만 정원에 가본 일은 없었다. 호수가 있다는 것도 처음 듣는 얘기였다.

"어젯밤에 산책하는데 어디서 애기 우는 소리 같은 게 들리는 거야. 그래서 설마 귀신인가? 하고 가봤는데 정말 주먹만 한 애기 고양이가 혼자 앵앵거리고 울고 있더라고. 어미가 나르다가 떨어뜨린 것 같던데, 어미가 물어가지 않으면 그대로 죽을 것 같아서 오늘 아침에 확인해보려고 했다가 깜빡했어. 같이 가볼래?"

야생에서의 삶은 가혹하고, 카라마츠의 말대로 어미고양이가 새끼들을 데리고 집을 옮기다 한 마리를 깜빡했다면 새끼고양이는 거의 죽은 목숨이다. 요즘 날씨는 제법 풀렸다지만 밤에는 쌀쌀했고, 이치마츠는 얼어 죽은 고양이 시체를 볼 자신이 없었다. 이치마츠가 한참 고민을 하자 카라마츠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치마츠의 손을 잡아끌었다.

"지금 얼른 가지 않으면 한 생명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가자!"

카라마츠의 손이 뜨끈뜨끈했다. 이치마츠는 얼떨결에 그 손을 잡고 일어나 방문 열쇠를 집어 들고 카라마츠를 따라 나섰다. 카라마츠는 영 손을 놓을 생각이 없어보였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에게 붙들려가며 카라마츠의 손을 잡고 있는 게 그닥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체온을 이렇게 오래 느끼고 있는 것은 꽤 오랜만이다. 지난달에 저택 앞에서 만난 고양이를 만졌을 때가 마지막인가. 두 사람은 냉동 창고가 있는 지하에서 한 층 위로 올라가 부엌을 지나가다 식당 아줌마와 마주쳤다.

"좋은 아침입니다, 마담! 아침 식사 기대하고 있습니다!"

"어머, 이치마츠 군이랑 카라마츠 군……."

아줌마는 말끝을 흐리며 이치마츠를 돌아보았지만 이치마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그 앞을 지나쳤다. 바로 어제 식당 아줌마가 고기를 가지러 내려와 이치마츠에게 여주인의 새 '장난감'에 대해 한참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이 집의 주인이자 대부호인 여주인은 사실 어느 요정에서 있던 '출신이 더러운' 여자였다. 그녀는 힘든 삶을 꾸려가던 중 우연히도 이 집의 원 주인인 '멍청한 박사'를 만났다. 그녀는 이것이 그녀에게 내려진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깨닫고 온 힘을 다해 달려들어 박사의 정실부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행복한 것도 잠시, 그녀가 이 집의 안주인이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몇 년마다 박사의 아들, , 주치의가 차례로 실종되어 이 근방의 마을까지 발칵 뒤집혔다. 하지만 그들은 이십 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발견되지 않았고-식당 아줌마는 당연히 그 세 사람 모두가 죽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결국 박사마저 실종되는 것으로 이 집은 여주인의 소유가 되었다. 여주인은 자신에게 내려진 시련에 괴로워하며 힘든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상처를 극복하고 젊고 잘생긴 남자들을 데려와 잠깐 가지고 놀다 쫓아내는 나쁜 버릇이 생겼다. 그리고 며칠 전 새로운 장난감이 저택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번 장난감은 그 전 남자들과는 어딘가 달랐다. 자신이 남창과 다를 게 없다는 데 부끄러움을 느끼지도 않고 저택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며 여주인이 있든 없든 간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열심히 치장을 하고 돌아다니는데 어딘가 어색함이 묻어났다. 부엌 아줌마는 그런 그의 스타일을 싸구려라고 잘라 말했다. 남의 말 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도 높은 도덕심을 요구하는 아줌마는 남자를 굴러먹을 대로 굴러먹은 남창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치마츠는 간만에 활기가 넘쳐 보이는 부엌 아줌마를 보며 이런 시골에서도 재밌을 만도 하지, 하고 흘려들었던 것이다.

저택은 무지막지하게 넓었다. 둘은 부엌문으로 나와 오솔길을 따라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정원은 주기적으로 전문 업체에서 나와 관리를 하고 있었다. 이치마츠는 간만에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반짝이는 햇살에 눈을 찌푸렸다. 카라마츠는 어느 새 썬글라스를 쓰고 고양이를 담아오겠다며 작은 종이박스까지 주워들어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고양이를 데려온다면 이치마츠가 키울 수 있을까? 카라마츠도 그닥 경험이 많아 보이지는 않은데. 이치마츠는 새삼 어색해져 카라마츠의 손을 놓았다. 카라마츠도 아차했는지 귀 끝을 붉혔다. 정원은 벚나무 몇 그루로 시작해 자작나무 숲을 지나 조그만 나무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호숫가로 이어졌다. 바람이 나뭇잎 사이를 훑고 지나가면서 쏴아아- 하는 소리가 났다. 돈도 많지. 이치마츠는 다음 계약 때 좀 떼를 써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이 쯤에 있었는데...”

카라마츠가 허리까지 오는 수풀 사이를 뒤지며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었다. 새끼고양이가 우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벌써 죽었겠구나. 이치마츠는 한 쪽에 서서 후드 주머니에 손을 넣고 호수 표면위에 비치는 구름을 한참 보고 있었다. 날씨가 좋았다. 새끼고양이는 어미가 물어간거면 좋을텐데, 이렇게 좋은 날에 죽는 건 슬프다.

, 찾았어.”

카라마츠의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이치마츠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입이 썼다. 만약 어제 저녁에 이치마츠가 난데없이 산책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여기까지 나왔더라면 고양이를 구할 수 있었을까. 카라마츠는 자리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아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조그만 고양이를 감쌌다. 고양이는 정말 작았다. 카라마츠가 얘기했던 것처럼 정말 주먹만 하지는 않았지만,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죽은 고양이라고 해서 보기 흉하지도 않았고 그저 차갑고 숨을 쉬지 않는 고양이일 뿐이었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가 손수건에 싼 고양이를 가져온 종이박스에 담는 것을 지켜보았다. 카라마츠는 풀이 죽어 말없이 서있다가 옆에 조심스럽게 종이박스를 내려놓고 어디선가 두꺼운 나무 막대를 찾아와 고양이가 발견된 수풀 한 쪽을 파내기 시작했다. 고양이를 묻어줄 생각인가. 이치마츠는 속으로 카라마츠를 비웃었다. 키우던 병아리가 죽어서 슬퍼하는 유치원생도 아니고, 성인 남자가 새끼 고양이가 죽었다고 무덤을 만들어주겠다며 맨 땅을 파고 있는 모양이라니. 유치하다면 유치했다. 착하게 보이고 싶은 건가? 나같은 사람한테 잘 보일 필요 없는데. 하지만 카라마츠는 말없이 계속 땅을 팠다. 삽도 아니고 나무 막대였지만 카라마츠는 제법 요령 있게 땅을 팔 줄 알았다. 도시 촌놈은 아니겠구만. 카라마츠는 어느 새 조그만 구덩이를 만들어 상자를 내려놓았다. 카라마츠는 의외로 이치마츠에게 함께 고양이의 죽음을 애도하자거나 혹은 무덤에 흙 뿌리는 것을 함께 하자고 하지는 않았다. 그저 혼자서 고양이 무덤을 만들고 몇 번 토닥거려준 뒤에 손을 털고 일어나 조금 기운 빠진 얼굴로 아침 먹으러 돌아가자며 앞서 걸었다. 이치마츠는 지금 자신이 카라마츠를 위로해줘야 되는 건가 싶었지만 이내 포기하고 카라마츠의 뒤를 따라 걸었다. 카라마츠는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부엌 문 앞까지 한 마디도 없이 걷다가,

괜히 따라 나오게 해서 미안.”

하고 사과했다. 이치마츠는 고개를 저으며 별 일 아니라며 묵언의 대답을 했다. 이치마츠는 오랜만에 부엌에서 다른 직원들과 아침식사를 했다. 카라마츠는 고양이가 죽어서 슬펐다던가 하는 얘기는 꺼내지 않고 직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몇 마디 맞장구를 치는 게 다였다. 마스크 밑으로 밥을 먹는 게 제법 힘들었다. 이치마츠는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안락하고 따뜻하고 아무도 없는 나만의 방. 이치마츠는 마스크를 벗어 문 앞에 걸어두고 소파에 주저앉는 순간 카라마츠가 그의 마스크에 대해 한 마디도 묻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굴을 온통 가리고 눈구멍이랑 숨구멍만 몇 개 난 밋밋한 가면을 보고도. 이상한 기분. 이치마츠는 곧 생각을 털어버리고 다시 아까 읽던 책을 집어 들어 접어둔 페이지를 펼쳤다.


오디션에 떨어졌다. 작은 극단에서 하는 조연이라 너무 쉽게 생각했던건가. 홈페이지의 공고를 암만 뒤져봐도 내 이름은 없다. 나도 학교에선 날리던 메소드 연기파 배우였는데, 학교를 졸업하고 나니 쉽지가 않다. 세상은 얼마나 넓고 나보다 잘난 사람은 얼마나 많은지. 아마 이 시간에 넷까페에서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 쓰레기들중에도 나보다 잘난 사람이 차고 넘칠 것이다. 사실, 나는 이제 더이상 멋진 사람은 아니다. 드넓은 강당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독백을 읊는 왕자가 아닌 것이다. 형제들과 함께 있을때는 실감하지 못하지만 이렇게 밖에 나와서, 마츠노네 여섯쌍둥이가 아닌 마츠노 카라마츠로 세상을 마주할때면 늘 이렇게 작아진다. 작고 작고 작아서 누군가가 꾹 밟아 찌그러뜨려 분리수거통에 넣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나는 한참동안 다른 극단들의 오디션공고를 스크랩하다 그만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불현듯 지금도 삼삼오오 뭉쳐서 뒹굴거리고 있을 형제들이 보고싶어진 것이다. 다들 저녁을 먹고 포커를 치고 있거나, 아님 쥬시마츠가 좋아하는 야구 보드게임을 하거나, 아님 토도마츠가 내일 알바갈 때 입고 나가려고 골라둔 옷을 망치거나 하고 있겠지. 너무 익숙해 눈앞에서 훤히 그려지는 풍경을 찬찬히 읽어보다 심장 한켠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우리의 방 한 구석엔, 그녀석이 못생긴 고양이를 한마리 끌어안고 있을 것이다. 힘이 하나도 없어보이는 흐릿한 눈으로 고양이를 품에 안고 뒹굴다가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뭘 끄적거리는 녀석이. 꼭 발에 납덩이를 매단것처럼 점점 발걸음이 느려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두렵다. 내가 품어온 감정이 두렵고, 녀석과의 그 거리감도 너무 멀어서 나는 무섭기 그지없다. 아무도 없는 이 어두컴컴한 골목길보다도 그 싸늘한 시선이 무서워 견딜수가 없다.

언제부터 한 배에서 동시에 태어난, 그리고 나랑 똑같은 얼굴을 한 형제를 마음에 두었냐고 물으면 나는 한참 고민을 하다, 내가 게이라는 걸 자각한 순간부터 녀석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부모님이 여행을 가신다고 집을 비우시고 오소마츠 형이 친구한테 빌려온 야한 비디오를 보던 밤이었다. 밝은데서 보기 부끄럽다고 쵸로마츠가 난리를 피우는 통에 거실 불을 끄고, 혹시나 이웃집에서 보이지 않을까 싶어 창이고 뭐고 다 커튼으로 가려 공기가 텁텁하고 더웠다. 비디오에선 어리게 생긴 여배우가 인터뷰를 잠깐 하다가 곧 옷을 벗고 하얗고 부드러워보이는 피부에 걸친 야한 속옷을 어쩔줄몰라하는 표정을 지으며 풀어내렸다. 오소마츠 형은 연신 오오, 이열, 하면서 추임새를 넣었고, 쵸로마츠와 토도마츠는 얌전히 무릎을 세우고 앉아 침을 꼴딱꼴딱 삼켰다. 쥬시마츠는 형제들에게 뭔가 물어볼게 있는 것 같았지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앉아 티비 화면만 응시할 뿐이었다. 나는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져 구석에 있던 담요를 두르고 거실 벽에 등을 붙이고 앉았다. 형제들과 이런 걸 보는게 어색하고 민망했다. 남자는 여자의 가슴이니 엉덩이니를 한참 주물렀고 좀 지루해질 때 쯤 얼굴에 모자이크가 된 남자가 여자의 안에 삽입하는데, 그 터지는듯한 신음소리에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나는 이정도는 야하지도 않고 여자가 섹시하니 어쩌니 하고 동생들 앞에서 오기를 부리고 싶었지만 할수가 없었다. 열 다섯살의 나이에, 나는 싸구려 AV에 출연한 남자의 단단한 등과 거친 손, 그리고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빠져들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내 옆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움츠러든 나와는 다르게 거실 벽에 늘어지듯 기대고 불규칙한 숨소리를 내며 발끝을 움찔거리는 이치마츠의 존재감이 확, 내게 밀려온 것이다. 이치마츠가 뜨거운 용암처럼 내 위로 우르르 쏟아지는 것 같았다. 입이 바싹바싹 말랐다. 옆에서 열이 오른 이치마츠가 너무 뜨거워서 나는 견디질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가 혼자서 자위를 했다. 거실에서 오소마츠 형이 조루니 동정이니 하면서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이치마츠가 무서워서 엉엉 울었다. 찬물로 한참 세수를 해도 얼굴에 오른 열이 내려가질 않았다. 

나같은 사람을 게이라고 하는 건 고등학교에 가서나 알게 됐다. 나는 내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티를 내기가 싫어 일부러 여자애들을 쫓아다니고 터프한 남자 배우들을 따라했다. 따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런 모방은 연극부 활동을 하는데도 도움이 많이 됐다. 여자애들은 내 적극적인 공세에 살짝 흔들리다가도 어딘가 이상하다며 돌아서곤 했다. 그러면 나는 오히려 안심이 되어 형제들 앞에서 마음껏 슬퍼할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치마츠는 점점 내게 싫은 내색을 해서, 결국엔 일상적인 대화도 세 마디 이내로 끝내는 어색한 사이가 되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대화를 오래 하면 할수록 그 무심하고 낮은 목소리와 거친 몸짓에서 시선을 돌리기가 힘들었다. 어딜가든 이치마츠의 존재감은 내 주위를 맴돌곤 했다. 화장실에서 혼자 거울을 보면서 대체 나와 똑같이 생긴 그 녀석이 왜 좋은건지 이해하려고 해본 적도 없진 않았다. 하지만 오소마츠 형도, 쵸로마츠도, 쥬시마츠도, 토도마츠로도 채울 수 없는 그 특별한 무언가가 이치마츠에게 있었다. 거울을 보면서 이치마츠가 늘상 짓는 표정을 지어보려고 해도 되지가 않았다. 나는 이치마츠처럼 먼지냄새가 나는 책을 읽지도 않고, 늘 좋고 싫은게 분명하지도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늘 누군가에게 시선을 끄는 것도 하지 못한다. 내가 연기를 할 수 있는 것은 내 자신을 버리고 완전히 그 배역이 될 수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나는 이치마츠를 내 안에서 완전히 버릴수가 없어 이치마츠가 되지 못했다. 

나는 내 자신이 무섭고 두려워질수록 더욱 더 형제들에게서 달아나 형제들과 다른 나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더 멋있고 섹시한 남자 배우를 따라했고, 형제들은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 연극이니 배우니 하는 것들로 도망쳤다. 아무런 성과도 없었지만-남자 몇 명과 짧은 만남을 가지긴 했다-, 언젠간 나는 완전히 내 안에서 이치마츠를 버리고 나를 버려서 아무렇지않게 이치마츠가 데려올 여자에게 똑같은 얼굴이 여섯이나 되는데 잘못된 선택을 하셨다고 웃어줄 수 있는 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생각에 잠겨 한참을 걷다보니 어느새 집 앞이었다. 집 열쇠를 찾느라 주머니를 뒤적거리는데 뒤에서 불쑥 열쇠를 쥔 손이 나와 문을 열었다. 이치마츠였다. 나는 다시 등줄기에 오싹하고 소름이 돋았다. 말없이 문을 열고 나를 앞질러 들어가는 이치마츠의 뒤로 알싸한 체향이 남았다. 나는 아랫입술을 한번 깨물고 바닥만 보다가 흡, 하고 기합을 넣고 웃으며 이치마츠의 뒤를 따랐다.

"고양이 먹이 주고 온거야?"

"빠칭코."

의외로 이치마츠가 바로 대답을 했다. 보니까 이치마츠의 후드 주머니가 무거웠다. 제대로 땄구만. 나는 괜히 웃음이 나와 이치마츠의 뒤를 따랐다. 

형제들이 깨지 않게 조용히 겉옷을 벗어 걸어두고 간단히 씻은 뒤 방으로 돌아와 잠옷으로 갈아입으려는데 자리에 먼저 누워있던 이치마츠가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깼어? 미안, 얼른 갈아입을게. 도로 자."

내가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여도 이치마츠는 계속 해서 내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치마츠의 시선이 따가웠다. 나는 민망해져 등을 돌리고 서서 재빠르게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이 방엔 분명 여섯 명이 있는데, 꼭 나와 이치마츠 단 둘만 남은 것 같았다. 이치마츠는 내가 누울 자리 바로 옆에서 앉아 내가 옷을 갈아입는 걸 지켜보고, 나는 그 따가운 시선을 느끼면서 긴장하는 것이다.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방이 어두워 이치마츠에게 보이지 않겠다 싶어 안심했다. 동생 앞에서 고작 옷갈아 입는 정도로 손을 떠는 형은 실격이다. 물론 동생을 보면서 발정하는 형도 합격은 아니지만.

이치마츠는 가만히 앉아 내가 잠옷을 갈아입고 로봇처럼 척척 걸어와 잽싸게 자리에 눕는걸 지켜보았다.

"자장가 불러줄까?"

나는 괜한 오기로 이치마츠에게 씩 웃어보였다. 그럼 늘상 그렇듯 이치마츠가 비웃거나, 아님 경멸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돌아누울 것이다. 그러나 이치마츠는 그러질 않고 얌전히 자리에 누워 부스럭거리며 나에게 기대 눈을 감았다. 낯설었다. 그새 샤워도 했는지 이치마츠의 부드러운 머리칼에서 샴푸냄새가 났다. 나는 지금 침을 삼키면 꼴깍 하는 소리가 이치마츠에게 들릴까 들리지 않을까 하고 한참 고민하다 천천히 조금씩 침을 삼켰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던건가. 고양이들한테 밥을 주다가 히키코모리라고 욕을 먹었다던가, 아님 아끼던 고양이가 죽었다던가, 형제들이 툭툭 던지는 장난에 상처를 받았다던가. 다른 형제들 앞에선 티도 내지 못하고, 바로 옆에 눕는 나에게 간신히 기대 위로를 받는 것일테다. 나는 아직까지도 예민하게 곤두선 전신의 감각을 최대한 가라앉히고 아무렇지 않은 척 카라마츠에게 한쪽 팔을 두르고 살짝 끌어안아 토닥였다. 이치마츠는 잠깐 내뺄지 말지 고민하는 것 같더니 곧 얌전히 안겨있다 잠이 들었다. 내 역할은 이거다. 오소마츠 형이 하지 못하는 부류의 형 노릇을 대신 하는 둘째형으로, 동생들이 어렵게 느끼지도 않으면서 가끔 이렇게 기댈 수 있는 형. 나도 눈을 감아 숨을 골랐다. 이미 셀 수 없이 많은 포기를 했고 오늘도 아마 수 백 번째 포기를 했다. 앞으로 수 천 번 쯤 더 반복하면 아예 잊을 수 있을까. 

가장 견디기 힘든 시간은 잠자리에 들기 직전이다. 불을 끈지 한참 지났지만 나는 잠에 들지 못하고 벽 쪽으로 몸을 돌려 한참 눈을 감고 있었다. 등 뒤에는 그가 있다. 베개에 머리만 닿으면 순식간에 잠들어버리는 카라마츠가, 미동도 없이 조그맣게 색색 거리는 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다. 다른 형제들도 자고 있을 테지. 나는 혼자 벽을 바라보며 다른 생각을 하려고 노력한다. 


내가 다른 형제들의 눈이 무서워 관심이 있는, 표현이 이상하다. 마음에 있는, 이것도 이상하고. 좀 '다르게 느껴지는' 형제를 마음껏 만지지 못해서 괴롭다는 류의 견디기 힘듬이 아니다. 나는 이불 끝자락을 둘둘 말아 끌어안고 코를 파묻었다. 


연인과 데이트를 하다 헤어짐이 아쉽다는 사람들의 노랫소리가 귓가에서 맴돌았다. 바래다 주는 길엔 발걸음이 느려지고, 떠나기 아쉬워 집 앞 가로등 밑에서 한참을 이야기를 하고 입을 맞춘다는 사람들의 사랑 타령. 나는 오히려 그렇게 헤어짐을 아쉬워 하길 바랬다.


아침 일찍 만나 밤 늦게까지 데이트를 하고도 모잘라 바래다 주고 오는 길엔 외로워 마음이 서늘하고, 밤 늦게까지 보고 싶은 이가 눈 앞에 어른거려 잠들지 못하길 바랬다. 사랑하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고 감동받게 해주고 싶어 해 뜨는 줄도 모르게 낯간지러운 시를 써내려가고 싶었다. 그리고 아침엔 밤 사이에 연락이 오지 않았을까 두근거리며 반쯤 깨자마자 휴대폰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바로 옆에 누워, 한평생 들어온 그 숨소리를 들으며 온갖 상념에 빠져 괴로워 하고 있는 것이다. 손 한 번도 제대로 잡지 못하고, 혹시나 몸이 닿았다간 실수라도 해버릴까 최대한 멀찍이 누워서는 있을 수 없는 상상을 하며 잠이 들기를 기다린다. 


한때는 낯선 곳에서 낯선 너를 만나길 바랬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역시 아무도 모르는 너를 만나 운명처럼 마음을 빼앗기고 싶었다. 네가 너를 만나기 이전까지의 나는 하나도 모른 채로, 나를 그 순간 그 대로 사랑해주길 바랬다. 서로에게 필요한 건 그 마음뿐인 채로 만남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싶었다. 둘이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아마 전혀 낯선 얼굴의 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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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도마츠의 조언으로 카라마츠는 주연을 꿰어찼다. 조언이라기보단 토도마츠가 농담으로 던진 소릴 카라마츠가 그대로 실행해 운좋게도 성공한 것이지만 카라마츠는 이번 문화제의 주연자리에 설 수 있게 되었다. 카라마츠는 연극 대본을 대학 합격증처럼 흔들면서 집으로 달려와 엄마아빠에게 한참 자랑을 하고 형제들에게 로미오와 줄리엣의 스토리를 설명해주곤-안타깝게도, 우리 형제들 중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알고 있는건 나뿐이었다- 줄리엣 역할을 맡은 여자애가 얼마나 귀엽고 수줍으며 자길 보면 양 뺨을 발갛게 물들이면서도 당찬 여배우라고 한참 자랑을 늘어놓았다. 누가 보면 니 딸인줄 알겠다. 오소마츠가 농담을 던져도 카라마츠는 고개를 거칠게 젓고 눈을 반짝이며 바닥에 드러누운 형제들을 다분히 연극적인 몸짓으로 돌아보곤,

"연극 연습할 때 놀러와. 연습할 때조차 완벽하다니까." 하고 대답했다.

 지까짓게 로미오에 가당찮기는 한가. 그렇지만 나는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을 만큼의 교양과 예절은 있었다. 

 카라마츠는 넓은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주목받고 싶다고 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연극부의 문을 두드렸다. 처음부터 배우를 시켜주진 않았다. 연극부실의 청소를 하고, 무대 의상을 만들고, 소품을 만들며 선배들의 자질구레한 시중을 들기도 했다. 가끔 학교 복도를 목적없이 마냥 걷다 보면 연극부실 앞에서 카라마츠가 혼나는 소리가 들렸다. 쪼그만 여선배는 빽빽거리며 카라마츠가 얼마나 연극 연습에 방해가 되는지, 만든 소품이-이를테면 왕자가 휘두를 칼이나 주인공이 타고 달려갈 자동차 모형같은걸- 아무 짝에도 쓸수 없을 만큼 형편없게 만들었는지를 따져물었다. 그럼 놈은 한참 손바닥을 비벼대다가 자기가 밤새 만든 쓰레기를 제 자리에 버리러 부실 문을 나섰다. 늦가을 진한 색 해가 저 너머로 지려는 오후에 나는 창가에 팔꿈치를 짚고 나와 똑같은 얼굴을 한, 그러나 다른 뒷모습을 한 놈이 연극 주인공의 대사같은 것을 흥얼거리며 걷는 것을 한참 보았다. 

 밤새 대사를 외우려고 했지만 형제들이 쫓아내는 바람에 카라마츠는 백열등이 어두침침한 부엌에 담요를 질질 끌고 가 대사를 외웠다. 나는 옆자리가 허전하고 왠지 조금 서늘한 것 같아 뒤척이다 일어나 조용히 부엌 뒷문으로 걸어갔다. 불은 켜지 않았다. 문 너머로 희미하게 카라마츠가 웅크린 그림자가 비쳤다. 오늘 한참동안 쥬시마츠의 야구배트로 칼싸움 하는 연습을 하겠다고 뛰었던 탓인지 이제 더이상 팔짝 뛰고, 과장된 몸짓으로 빙그르르 돌고 할 힘은 남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서서 한참 귀를 기울이다 조심히 앉아 문에 귀를 바짝 갖다대고 인기척이 들리는지, 아님 그저 조용히 카라마츠의 숨소리가 들리는지 들었다. 오늘 밤을 새우겠다더니 예상대로 잠든듯했다. 엄마아빠도 일찍이 잠자리에 들 시간이고 형제들도 조용하다. 남자애들이 6명이 있는 집은 조용하기가 쉽지 않다. 아무리 나이를 들어도 혼자서 조용히 사색에 잠길 틈도 찾기 힘들다.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을비가 조용히 지붕을 두드리고, 물방울이 풀잎에 떨어지며 산산조각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내 등 뒤에, 얇고 낡은 담요를 둘둘 말고 웅크리고 앉아 얄팍한 대본에 침을 질질 흘리며 깊이 잠들어있을 카라마츠가 있다. 잠시만, 아주 조금만 더 가까이 앉으면 어릴때부터 유난히 후끈후끈하던 그의 체온이 느껴질지도 모른다. 맨발이 조금 시려왔다.

 쌍둥이는 어디까지 닮은걸까? 어디까지 같은거고? 나는 종종 나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형제들에게 물을 수도 없다. 너와 내가 이렇게 다른 타인인데 너와 내가 어디가 다른가를 묻는 건 어딘가 우스꽝스럽고, 괜히 젠체 하는 프랑스 영화에서나 볼법한 대사다. 그리고 읽는 것이라곤 연극대본밖에 없는 카라마츠나 할법한 대사다. 우리는 하나에서 시작해 우연히도 갈라져 타인이 되었다. 미스터리 쇼 같은데서 종종 쌍둥이끼린 텔레파시가 통한다고 하지 않는가. 보이지 않는 무언가로 우린 여전히 연결되어 있고, 그러니까 다른 일반적인 형제들과는 다르고, 계속 하나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건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카라마츠는 다른 형제들과는 달랐다. 계속해서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이 되려고 하고, 주목받고 싶어하고, 자기 자리를 확인하고 싶어하고, 별 시덥잖은 농담을 던져가며 형제들의 이목을 돌리려고 한다. 나는 카라마츠가 그렇게 행동할때마다, 꼭 그가 다른 형제들과 자신을 분리하고 싶어하는게 아닌가 하는 굉장히 당연한 생각이 들어 불쾌해졌다. 카라마츠가 연극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도 불쾌하다. 카라마츠는 그렇게 아예 다른 사람이,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집도 가족도 뭐도 다 버리겠다는 새파란 로미오가 되어 줄리엣에게 마지막 키스를 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최대한 카라마츠의 눈에 뜨이지 않는 구석에서 놈의 연기에 흠을 잡을 것이다. 그리고 카라마츠가 나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실감하겠지. 

 시계 초침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카라마츠의 숨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고, 나는 잠깐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미닫이 문을 열었다. 반들거리는 새카만 머리통이 담요에 파묻혀 색색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 동그란 머리통에 가만히 손을 올려보고, 손이 조금 녹자 천천히 그의 목 뒤로 미끄러뜨렸다. 피부가 차갑고 부드러웠다. 나는 그목이 조금 녹을때까지 손을 대고 있다가 더 천천히 보이지 않는 곳에까지 손을 밀어넣었다. 어깨는 더 넓어진 것 같고, 조금 마른 등에 척추뼈가 도드라졌다. 한참을 잤는지 몸이 서늘했다. 내가 계속 싫은 티를 내서인지 카라마츠는 목욕을 하러 갔을때도 나에게 등을 맡기지 않았다. 직접 몸이 닿은 일도 잘 없고, 이렇게 맨 살을 만지는 건 제법 오랜만일것이다. 부드러운 등은 곧 따뜻하게 온기가 돌았고, 나는 넣을때와 마찬가지로 조심스럽게 손을 빼 머뭇거리다 조그만 귀를 살짝 건드렸다. 카라마츠가 지난 방학에 피어싱을 하겠다고 귓볼에 뚫었던 구멍은 이미 막힌지 오래라 깨알만한 흉터만 남아있었다. 나에게는 없는 것이다. 나는 그 흉터를 손 끝으로 살살 덧그려보다 그의 곁에 가까이 다가가 입을 맞췄다. 

 나는 이게 시작임을 알고 있다. 비웃음거리가 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카라마츠는 계속 다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 것이고, 나는 생각지도 않은 옷을 입고 부끄러운 대사를 읊을 것이다. 그럼 나는 점점 그가 나에게서 멀어지는 걸 느끼고, 부정하다가, 반쯤 포기하곤 내가 잘못된 것을 원한다는 결론에 이르를것이다. 여섯 명 중에서 내가 계속해서 하나로 남아있고 싶어 하는 사람이 카라마츠뿐이라는 걸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올 것이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까슬하게 말라붙은 입술에 보드라운 귓볼이 닿았던가, 아님 착각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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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이 죽었다. 


- 죽지 않았다. 


- 캐스는 리퍼를 찾았다. 리퍼들은 대답할 수 없다며 자리를 피했고, 샘은 막 손톱을 깎은지 반년이 넘었다는 걸 깨달았다. 머리를 잘라도 손톱을 깎아도 팔을 잘라도 하룻밤이면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 샘이 사람을 구하겠다고 닭모이 다지는 기계에 뛰어들었다. 죽지 않았다. 죽는게 나을뻔 했다. 


- 캐스가 자살시도를 했다. 목에 엔젤 소드를 꽂고 이건 잘못된 일이야, 나는 이러면 안돼, 하면서 난도질을 했다. 이번에도 죽지 않았다. 


- 내가 죽지 않으니 사람을 살리는 일에 둔감해졌다. 다섯명을 구하기 위해 한사람을 희생시켰다. 샘이 벙커를 나갔다. 


- 캐스는 혼자 내버려두면 자해를 한다. 몸은 재생이 되어도 피는 없어지지 않아 치우는게 힘들다. 


- 캐스를 유혹해 잤다. 천사는 천사가 아니게 되고 사람도 아니게 된 뒤에야 섹스에 맛을 들였다. 


- 샘이 1년만에 돌아왔다. 죽지 않는 사람에 대한 전설을 모조리 조사했다고 했다. 여태까지 남은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 샘이 이번엔 뱀파이어 소굴에 뛰어들어 열명을 구해냈다. 뜯겨난 팔다리가 꿈틀꿈틀 자라나고 잇몸에서 뱀파이어 이빨이 우수수 뽑혀나왔다. 샘이 침을 뱉을때마다 피가 덩어리째 튀어나왔다. 


- 캐스의 집착이 점점 심해진다. 결국 샘에게 들키고 말았다. 


- 샘이 자살했다. 반쯤 날아간 뒤통수를 붕대로 칭칭 감고 으르렁거리는걸 무시했다. 


- 샘과 캐스가 크게 다퉜다. 캐스가 샘을 한번 죽였지만 죽지않았다. 나는 벙커에 틀어박혀 옛날 기록이나 읽기 시작했다. 샘같은 짓이다. 


- 샘에게 멱살을 잡혀 키스당했다. 한건 아니고, 머리채를 쥐어 뜯기며 입을 강제로 열었다. 샘한테는 악마도 죽이는 칼조차 무의미했다. 샘은 피냄새를 맡더니 더 흥분해서 옷을 찢어버렸다. 동생에게 칼질을 하는게 점점 더 익숙해진다. 샘이 칼을 맞고 죽었던게 한참 옛날일같다. 옛날일이 맞지만. 


- 캐스가 사온 신문의 날짜가 2070년이다. 살아있는 사람중에 우리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구한 사람들도, 우리를 구했던 사람들도, 우리가 반쯤 죽였던 사람들도. 


-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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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인자의 아들로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비록 그 남자가 내 친아버지도 아니였고 또 내 아버지였던 시간이 채 3년도 되지 않았다해도 사람들에게 이리 저리 씹히기엔 충분하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는 그가 실종된 지 1년도 안 되어 새 남자친구를 구했다.  


정말 점잖고 범죄랑은 관련없는 착한 사람이야. 


개를 별로 안좋아해서 그렇지. 어머니가 투덜거렸다. 그때 남자의 손을 탔던 개들은 전부 보호소로 보냈다. 어머니는 개들에게 정이 들어 계속 키우고 싶어했지만 그 남자가 개밥으로 무슨 고기를 줬을지 어떻게 아냐고 나서자 결국 포기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다시 습관처럼 길거리에 버려진 개를 한 마리씩 데려와 키웠고 어느 새 그때처럼 개가 우글거리기 시작했다.  


보상금은 얼마 나오지 않았다. 그 남자가 계획적으로 살인마를 탈옥시켜 둘이 도망쳤다는 설이 유력했고 어머니는 어떻게든 남자의 명예를 회복시켜보려 애썼지만 어머니보다 그와 가까웠던 이들이 그는 그럴만한 사람이라고 반박해 굴복하고 말았다. 어머니가 직접 얘기해주진 않았지만 온갖 신문과 잡지와 가쉽거리와 사람들의 눈빛에서 읽어낼 수 있었다. 어머니에게 열기가 더 식기전에 비싼값에 인터뷰를 하라는 벌레같은 기자들의 전화도 하루에 두세 번씩 걸려왔지만 어머니는 대답도 없이 끊었다. 그가 우릴 버렸으니 우리도 한 번쯤 그를 팔아도 괜찮을텐데.  


어머니의 연애는 순탄치않다. 길어야 반년. 반년이면 내 새아버지가 되겠다고 웃으면서 들어왔던 남자들이 짐을 싸 욕을 하며 나갔다. 어머니는 집에 남자가 없으면 내가 그를 떠올릴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이사를 하고 남자들이 집을 들락거려도 그의 존재감은 옅어지지 않는다. 나는 반쯤 미친것처럼 온갖 싸구려 잡지들의 기사들을 스크랩했다. 동유럽 어드메에서 살인마를 찾았다는 제보가 들어왔다는 기사도 있었고 그의 수법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방식으로 살해됐다는 살인사건 기사도 있었다. 침대밑에 숨겨둔 신문기사는 어느새 한 박스가 되어 처음부터 끝까지 찬찬히 읽으려면 세네 시간은 족히 걸릴 지경이 되었다. 


강박적으로 신문기사를 읽고 남자의 흔적을 쫓는다. 베개밑엔 총을 숨겨놓고, 집을 나설땐 벨트 안쪽으로 칼을 숨긴다. 

나의 연약하고 깊은 의식 어딘가에 언젠가 그가 다시 그의 남자와 함께 우릴 사냥하러 올거라는 예감이 매일 닦는 거울처럼 또렷해져간다. 


남자는 언젠가 다시 우리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내 아버지와 내 아버지의 남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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