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어요. 전국의 수재란 수재들은 전부 모인 그 교실에서 처음 시험지를 넘기는 순간부터 알고 있었으니까요. 이 문제는, 이 대학은 날 위해 준비된 게 아니었구나. 평범하기 그지없는 나는 여기서 환영받지 못하는구나 하고. 어느 햇빛이 잘 들고 고요한 교실이었습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발을 들이고 싶어 하루에도 몇 번씩 심장이 쿵쾅거렸던 교실이었어요. 그 교실 한가운데에 다른 학생들의 다급한 연필소리와 지우개질 소리를 들으며 나는 가만히 시험지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날 어떻게 그 학교를 나와 집으로 돌아갔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며칠을 꼬박 끙끙 앓았던 건 기억나는데, 그렇게 앓는 동안 제가 무슨 헛소리를 했는지 아무도 얘기해주지 않았어요. 저는 그저 골방에 틀어박혀 합격 발표가 나는 날을 기다렸습니다. 아주 작은 욕심이 파리처럼 조그만 날개를 달고 귓가에서 윙윙거리며 날아다녔어요. 이름이랑 수험번호를 제대로 적어서 낸 게 확실하니까, 어쩌면 붙을지도 모른다고. 저는 그 헛된 욕심을 손가락 하나로 눌러 죽일 수 있었지만 차마 그러질 못하고 시간이 흐르는 것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저는 버스를 타고 돌아오다 어느 낯선 거리에 내렸습니다. 기쁘고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이 가득한 거리를 걸으며 저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습니다. 자기 이름을 확인하고 기뻐 비명을 지르던 학생들의 얼굴을 하나씩 하나씩 눈앞에서 지워가며,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불행을 상상했습니다. 저 남자와 손을 꼭 붙잡은 여자는 사실 양다리를 걸치고 있을지도 모르고, 저 명문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잘난 척하며 걷고 있는 아이는 사실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저는 제 안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분노를 죄 없는 사람들에게 저주를 하며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저한테 실망하셨을 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이건 솔직한 제 모습이고,

 

아니, 이 부분은 지워야지.

 

한참 길을 걷다 보니 목이 타들어갈 것처럼 말라왔습니다. 재밌었어요. 이렇게 내 인생은 나락으로 굴러 떨어졌는데 내 몸은 이렇게 물을 요구하고 음식을 요구하고 휴식을 요구하고 있으니, 나는 그저 동물이 아닐까, 내 이성과 정체성이라는 건 오랜 교육으로 길들여진 습관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뭐, 내가 동물이면 뭐 어때서. 저는 자문자답을 하며 편의점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저 앞에, 어느 상가 앞에서 조촐한 무대를 차려놓고 예쁘게 생긴 여자애가 짧은 치마를 팔랑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가발인지 염색인지 알 수 없는 분홍색 머리 위엔 고양이 귀 머리띠를 쓰고, 손에는 마이크를 잡는 것도 불편해 보이는 고양이 손 모양 장갑을 끼고 있었죠. 어떻게 고정을 시킨 건지도 알 수 없었지만 고양이 꼬리도 힘없이 그녀의 동작에 맞춰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팔짱을 끼고 꼭 면접을 보는 것처럼 엄한 표정으로 서있는 사람들 틈에 끼어 아주 잠깐, 당신을 훑어보았어요. 흔한 아이돌이었습니다. 일본에는 아이돌이 해변의 모래알처럼 차고 넘쳤고, 이를 모르는 건지 아님 알면서도 모른 체를 하는 건지 조금이라도 예쁜 여자애들은 모두 아이돌을 해 사람들 위에 군림하겠다고 나섰죠. 그 많은 아이돌 틈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든 눈에 띄어야겠죠. 실밥이 그대로 매달려 있는 싸구려 치마를 무대 앞에 따개비처럼 달라붙은 남자들에게 속옷을 보여줄 것처럼 살짝 살짝 흔들면서도 살아남아야겠죠. 나는 그런 당신을 보면서 만족스러웠어요. 나는 공부를 잘했고, 고등학교도 좋은 성적으로 졸업했고. 비록 대학에는 가지 못했지만 어떻게든 멋진 인생을 살 수 있지 않을까. 고마워요. 나는 냥냥거리면서 춤을 추는 당신을 뒤로 하고 등을 돌렸습니다. 아이돌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기 위한 사람들이죠. 나는 당신에게 위안을 받았습니다.

그 무대의 건너편, 조금 떨어진 곳에 편의점이 있었습니다. 저는 온장고에서 단 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는 블랙커피를 꺼내들고 계산을 해 캔을 땄습니다. 배가 고팠고, 달달한 것을 마시면 기분도 좋아지겠지만 나는 이제 어른이니까, 고등학교를 졸업할 어른이니까 하는 생각이 들어 블랙커피를 마셨습니다. 편의점 창가에 서 밖을 내다보니 당신은 공연을 마치고 한참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하고 있었어요. 사람들 몇 명이 박수를 치는 게 보였습니다. 나는 쓰디 쓴 커피를 한 모금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가 목구멍으로 넘겼습니다. 새카만 커피는 혀를 타고 식도로 넘어가 텅 빈 위장을 자극했죠. 속이 쓰렸어요. 당신이 무대에서 사라지고 나니 나는 다시 속이 끓기 시작했습니다. 화가 났어요. 다시 이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밑바닥의,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아 화가 났습니다. 아까 그 아이돌은 왜 저 무대에서 공연을 계속하지 않는 걸까. 나는 그럼 당신을 보면서 내 처지가 당신보다 낫다고 다시 나를 위로할 수 있을 텐데. 커피는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천천히 식고 있었죠.

나는 한참동안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꼭 꽃잎 같은 분홍색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것 같더니, 고양이 귀 머리띠와 고양이 손 장갑을 벗은 당신이 편의점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두꺼운 외투를 입고, 손에는 커다란 가방을 들고 있었죠. 당신이 직접 가방을 들고 있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아마 시중을 들어주고 스케줄을 관리해 줄 소속사가 없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나는 창가 구석으로 조금 물러나 커피를 마시며 당신을 지켜봤습니다. 당신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온장고 앞으로 다가가 커피를, 달콤한 커피를 꺼내 계산을 하고 내가 있는 창가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곤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죠. ,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어린 여자애가, 나이가 많아봤자 고등학생일 여자애가 들기엔 너무 무거운 가방이 아닐까. 나는 계속 가방과 당신을 힐끔힐끔 돌아보다 고개를 돌렸습니다. 당신은 손이 시렸는지 한참동안 캔을 양 손으로 감싸고 있었습니다. 장갑은 두꺼워보였는데, 보온에는 별 효과가 없던 걸까요. 날이 춥긴 했습니다. 나는 창밖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옷을 한번 보고 몇 걸음 뒤로 물러서 당신의 옷차림을 훑어보았습니다. 치마와 긴 부츠 사이에 드러난 맨살이 새빨갛게 부어있었고, 어깨는 잔뜩 움츠러들어있었습니다. 날이 그렇게까지 춥진 않았지만 확실히 이런 차림으로는 추울 만 했죠. 내 시선을 느꼈는지 당신이 고개를 돌렸습니다. 화장이 진했어요. 그리고 눈썹 옆으로, 부드러운 얼굴선을 따라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걸 뭐라고 부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눈꺼풀에 바르는 그것도 번져서 눈가가 온통 반짝이 투성이였어요. 당신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컬러렌즈를 낀 건지 동그란 초록색 눈동자가 반짝거렸어요.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바보같이 입을 조금 벌리고 그 눈동자를 한참 보다가,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내밀었습니다. 심장이 쿵쾅거렸고, 머릿속에 온갖 말들이 꼭 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뛰어다녔어요. 당신은 바로 그걸 받아들이지 않고 당황스럽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저기, 이마에 땀이…….

나는 여자애가 민망하지 않게 말을 돌려서하는 방법도 몰랐어요. 나는 바보처럼 말끝을 흐리며 휴지를 내민 손을 조금 뒤로 뺐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낯선 사람이죠. 나는 아차, 하고 말을 덧붙였습니다.

아까, 공연 잘 봤습니다.

하고. 당신을 보면서 한참 속으로 우월감을 느꼈던 주제에, 나는 공연을 잘 봤다고 인사했어요. 그제야 당신은 활짝 웃으면서 휴지를 받아들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새하얗고 조그만 손으로 내 손에서 휴지를 가져가 땀방울이 흐르는 부위를 톡톡 두드려 닦고는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에 올려놨어요. 당신의 공연을 본 감상을 얘기해줘야 할 것 같아서, 머리를 한참 굴렸습니다. 그렇지만 노래도 귀담아 듣지 않았고 또 춤을 제대로 감상하지도 않아 생각나는 말이 없어서, 나는 연신 커피만 들이켰죠. 목구멍이 따끔거렸습니다.

하시모토 냐에요, 냐쨩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냐.

당신은 그제야 생각난 듯 냐, 하고 고양이 울음소리 같은 말을 덧붙였습니다. 하시모토 냐쨩이라니. 나는 한참 머릿속으로 당신의 이름을 되새겨보다, 고개를 들었습니다. 말해주고 싶었어요. 당신은 정말 춤을 열심히 췄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나는 당신이 최선을 다했다는 걸 느꼈고. ……. 당신은 무척 귀여웠다고. 분홍색 머리카락이 나풀거리는 것도 싸구려 고양이 발 장갑도 귀여웠고, 지금 내 옆에서 어색하게 커피 캔을 따 마시는 당신에게서 무척 달콤한 꽃향기가 난다고. 비록 지금은 고양이 귀 머리띠도, 장갑도, 꼬리도 없었지만 당신은 누가 봐도 고양이처럼 귀엽고 사랑스럽다고.

내가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당신은 빈 커피 캔을 쓰레기통에 넣고 가방을 집어 들었습니다. 가방이 무거웠는지 살짝 인상을 썼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가방을 들고, 내가 건네준 휴지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어 외투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그걸 가져가려는 걸까요?

당신은 나를 보며 고개를 살짝 숙이고 다시 활짝 웃었습니다. 나는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들었고, 당신이 이 편의점에 들어왔을 때처럼 꽃잎 바람처럼 편의점 밖을 나서는 걸 보았습니다. 지하철을 타러 가는 걸까요. 나는 한참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커피 캔을 비웠습니다. 어느 새 커피 캔은 차가워졌죠.

 

당신의 팬클럽을 결성하고, 먹고 자는 시간만 빼면 당신의 뒤를 쫓아다니는 사람들과 하나둘 안면을 트기 시작하면서 나는 내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을 수가 있었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작은 무대를 하고 나면 고양이 귀와 장갑을 빼고 힘들지만 최선을 다하는 여자아이의 모습으로 근처 편의점에 들어가 별 생각 없이 창밖너머로 공연을 본 남자들에게 웃어주고 이름을 가르쳐줬죠. 당신은 그 남자들의 최초의 아이돌이었고 마지막 아이돌이었습니다. 혼자서만 간직해온 소중한 비밀이 사실 모두의 마음속에 하나씩 남겨져 있는 공산품 같은 것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의 기분을, 당신은 알고 있을까요? 알고 있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걸 그만두지 못할 거라는 것도 알고 있겠죠. 당신은 아이돌이니까.

 

하시모토 상.

어쩌면 저는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방법으로 사랑에 빠진 남자가 아닐까요.

우린 돈도, 명예도, 권력도 아닌 사랑 그 자체에 집중해

한 명은 사랑을 팔고

한 명은 사랑을 하고 있으니.

 

 

쵸로마츠는 쓰던 편지를 찢었다. 편지 같은 건 역시 쓰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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