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시작되는 계절이 왔다. 하늘에는 오래된 먼지 같은 먹구름이 가득 끼어 그 경계를 알아볼 수조차 없고, 습한 공기가 무겁게 깔렸다. 카라마츠의 기분이 끝도 없이 가라앉는 시간이었다. 이치마츠는 방구석에 앉아 카라마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카라마츠는 계속해서 뭔가를 중얼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카라마츠는 그저 커다란 창문을 활짝 열고 낡은 커튼이 조금씩 펄럭이기 시작하는 걸 내버려둔 채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아마 너는 말하는 연습을 하는 거겠지. 이치마츠는 속으로 생각했다. 한 방울이라도 비가 오기 시작하면 카라마츠는 목소리를 잃는다. 성대가 빗물에 녹아 사라지는 것처럼. 첫 번째 빗방울이 지붕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카라마츠도 분명히 들었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카라마츠의 말소리가 멈췄다. 곧이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마른 땅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사방에 울리고, 다른 소리들은 거기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사라진다. 빗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이치마츠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카라마츠와, 그 무기력한 뒷모습을 바라보는 이치마츠만 남았다.

목소리와 비는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이치마츠는 기억을 더듬었다. 어느 늦은 밤, 이치마츠는 조용히 방을 빠져나가 안방 문에 귀를 기울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열 시간이 넘도록 비행기를 타느라 죽는 줄 알았다고 하소연을 하고, 카라마츠의 목에는 이상이 없더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지친 목소리였다. 비가 온다는 이유만으로 카라마츠가 말을 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뭘까. 이치마츠는 쌍둥이들의 방문 앞에 주저앉아 빗소리를 들었다. 한참 빗소리를 듣다가, 이치마츠는 눈을 감고 빗물이 카라마츠의 폐안에 가득 차오르는 상상을 했다. 카라마츠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기쁘다던가, 슬프다던가, 혹은 아프다던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해도 그 빗물은 카라마츠의 목 끝까지 차올라 카라마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파도처럼 철썩이고 있었다. 하얀 물거품이 카라마츠의 치아에 부딪쳐 사라졌다.

카라마츠는 창 밖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치마츠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주먹을 꽉 쥐었다가 힘을 풀었다. 가까이서 말을 할 자신은 없었다.

카라마츠.”

카라마츠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응? 하고 대답을 할 것처럼 입을 벌렸다가, 자기가 말을 하지 못한다는 걸 깨닫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저 양 입 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을 뿐.

좋아해.”

카라마츠가 눈썹을 올리며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치마츠는 문 쪽으로 한발자국 걸어가 다시 카라마츠를 돌아보았다.

좋아하고 있어.”

빗소리가 점점 거세졌다. 카라마츠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걸 보고 이치마츠는 달려가 문을 붙잡았다.

더럽지. 미안. 이 비가 그치면 자살할게.”

마지막 말이 카라마츠에게 들렸을까. 이치마츠는 물을 열어젖히고 현관으로 달려 나갔다. 뒤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이치마츠는 아랑곳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신발을 꿰어 신고 현관문을 빠져나갔다. 비가 온몸을 적시고 있었다. 차가운 빗방울이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목덜미를 따라 가슴으로 흘러들었다.

 

사흘이 지나도록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치마츠는 바다로 난 절벽 위에 쪼그리고 앉아 시꺼멓게 요동치는 바다위로 번개가 번쩍거리며 내리꽂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바다는 하루 종일 그저 보고만 있어도 좋았다. 바다가 늘 새파랗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해가 떠오를 때는 꼭 저 지평선 너머에서 부글부글 끓는 용암이 물 밑을 따라 흐르는 것 같았고, 해가 진 뒤에는 밤하늘 한 쪽을 끌어다 저 물밑 깊은 곳에 카펫처럼 고르게 깔아놓은 것 같았다. 그리고 이렇게 장마의 끄트머리에선 바다가 거무죽죽한 빛으로 어두워져 화를 내고 있었다. 보고만 있어도 좋았어. 다른 사람들은 그저 파랗다고밖에 말하지 못하는 바다를 나는 그들보다 조금 더 가까이에서, 조금 더 오랜 시간 지켜보면서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너를 알 수 있어서 좋았어. 그렇게 보고 있으면 너랑 좀 더 가까워지는 것 같았고, 너는 내 안으로, 나는 네 안으로 들어가는 것 같아서.

빗소리 너머로 작은 돌멩이가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누군가가 미끄러운 돌 위에 지친 발을 내려놓는 소리도. 이치마츠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다가갔다. 맨 손이 바위를 오르고 있었다. 하얗게 힘이 들어간 손가락 끝에는 흙과 모래가, 젖은 이끼가, 물에 녹아 흐려진 핏방울이 묻어있었다. 너무 이르게 날 찾아왔어. 이치마츠는 차마 그 손을 잡아당기지 못하고 뒷걸음질 쳤다. 비가 아직 그치질 않았는데.

그리고 카라마츠가 절벽 위로 올라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사흘 만에 눈 밑이 퀭하게 들어갔고, 조금 마른 것 같았다. 카라마츠는 거친 숨을 고르다 고개를 들고 이치마츠를 향해 걸어왔다. 등 뒤로 천둥치는 소리가 들렸다. 카라마츠가 손을 내밀고 입을 벙긋거렸다. 그러나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가 만약 말을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빗소리에, 천둥소리에 묻혀서 들리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카라마츠의 손을 더운 물에 씻겨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이치마츠는 그 손을 잡지 못하고 다시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어떻게 날 찾았는지, 나를 찾아서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물어보고 싶었고, 동시에 대답을 듣고 싶지 않았다. 말을 하고 싶어.

여기서 보는 바다가, 나 혼자서 보는 바다가 너 같았어.”

카라마츠가 이치마츠에게 다가오다 멈춰서 이치마츠를 바라보았다. 내 목소리가 들릴까. 이렇게 비가 쏟아지고 천둥이 치고 파도가 잡아먹을 것처럼 비명을 지르는 날에.

여기서 보는 바다가 너 같았는데, 지금은 너무 어두워.”

카라마츠가 내밀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파도치는 소리가 무섭고, 비가 바다 위로 떨어지는 소리가 무서워.”

뺨으로 뜨거운 게 흘러내렸다. 이치마츠는 손등으로 눈가에 고인 물을 닦았다. 아니, 그런 건 무섭지 않았다. 무서운 건 다른 거야. 지금 이 비가 그쳐버리고, 네 안을 가득 채운 빗물이 순식간에 말라 버릴까봐 무서워.

축축한 지면을 박차고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치마츠가 고개를 들자, 하얗게 질린 카라마츠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카라마츠의 숨소리가 들렸다. 카라마츠의 눈은 우는 것 같기도 했고, 또 겁에 질린 것 같기도 했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카라마츠는 잠깐 그런 눈으로 이치마츠의 얼굴을 바라보다 이치마츠의 손을 잡았다. 온기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시린 손이었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손을 들어 자신의 입을 가리켰다. 파랗게 핏기가 가신 입술이 열렸다. 카라마츠는 아주 천천히 입을 움직였다.

노력할게.

이치마츠는 멍하니 그 입술을 보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잠깐 이치마츠의 대답을 기다리다, 다시 입을 움직였다.

노력할 테니까. 사랑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

 

바다 밑바닥에는 뭐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바닷물을 한참 파헤치고 들어가도 그 무겁고 부드러운 물이 머리 위로 쏟아져서, 그 안에 잠겨있으면, 단념하게 된다. 그 시퍼렇고 깊은 곳에 뭐가 있는지, 내가 꿈꾸고 바라던 것이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저 이대로도 나쁘지 않겠구나, 하고

강당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이치마츠가 멀쩡한지 보러간 거겠지. 오소마츠는 강당 문을 닫았다. 강당 안에 쥐죽은 듯한 적막이 흘렀다. 오소마츠는 강당 무대 앞으로 걸어가 딱 하나 세워져 있는 간이 의자에 앉았다. 의자는 정면, 무대를 향해 세워져있었다. 카라마츠가 앉기 위해 세워둔 의자가 아니다. 오소마츠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고 텅 빈 무대를 노려보았다. 새빨간 벨벳 커튼으로 가려진 저 구석에서 카라마츠가 과장된 몸짓으로 걸어 나오길 바랐다. 오랜만에 그의 무대에 관객이 온 걸 보고 카라마츠가 뛸 듯이 기뻐하며 그가 좋아하는 대사 몇 마디를 읊조리길 바랐는데. 배우는 무대를 비웠고, 관객은 하염없이 연극이 시작하길 기다렸다. 강당은 카라마츠의 구역이었다.

수면실과 도서관은 같은 층이었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를 지나쳐 걸어가더니 도서실 문을 잡고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카라마츠를 돌아보았다. 이치마츠의 도서관에 들어가는 것도 오랜만이다. 이치마츠가 두꺼운 문을 잡아 열었고, 카라마츠에게 얼른 들어가라며 눈짓을 하곤 뒤를 돌아보았다. 아마도 오소마츠가 신경 쓰이는 거겠지.

거대한 도서관이었다. 예전엔 카라마츠도 연극대본을 찾겠다고 들락날락했었는데, 형제들의 구역이 하나 둘 정해지기 시작하면서 이 도서관이 잠정적으로 이치마츠의 구역이 되자 카라마츠는 자연히 발길을 끊었다. 이치마츠가 먼저 도서관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던 건 아니지만, 뭐랄까, 도서관은 이치마츠의 사적인 공간처럼 느껴졌다. 책들이 카라마츠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는 다르게 정리되어 있는 것 같았다. 카라마츠는 눈앞에 있는 책장으로 다가가 책등에 적힌 제목을 훑어보았다.

도서관에는 카라마츠의 키보다 한참 높은 책장들이 못해도 이삼백 개는 들어차있었다. 예전에 이치마츠와 카라마츠가 수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책장 개수를 세었던 것 같은데 하도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나질 않았다. 바닥에는 때가 탄 건지 아님 원래 그 색이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회갈색의 카펫이 깔려있었고, 벽은 짙은 보라색이었다. 카라마츠는 책을 한 권 꺼내 위에 쌓인 먼지를 후, 하고 불었다.

책 읽을 시간 없어.”

이치마츠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카라마츠는 깜짝 놀라 책을 책장에 내려놓았다. 바닥에 깔린 카펫 때문에 이치마츠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치마츠는 책장 그림자 안에 서서 카라마츠의 손목을 잡아 이끌었다. 이치마츠의 손이 차가웠다.

여기서 여태까지 읽었던 책들 기억나?”

이치마츠가 카라마츠의 손목을 잡고 책장 사이사이를 빠르게 걸었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가 걷는 속도에 맞춰 따라가느라 발이 꼬였고, 헛디뎌 책장에 어깨를 부딪쳤다. 그러면 이치마츠는 멈춰 카라마츠가 아픈 어깨를 매만지는 걸 잠깐 기다려주다가, 다시 카라마츠의 손목을, 아니 이젠 손을 꼭 잡고 책장 사이사이를 걸었다. 어느새 책이 차있는 책장의 숲은 끝났고 하얗게 먼지가 쌓여가는 빈 책장의 구역이 시작됐다. 종이가 누렇게 삭는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 많이 읽었었지.”

이치마츠는 점점 더 빠르게 걷기 시작해 거의 달리는 것에 가까웠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손을 잡고 따라 달리면서 간신히 대답했다. 카라마츠의 취미는 거의 이치마츠와 함께 시작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전등 하나를 켜 놓고 나란히 앉아 책 한권을 나누어 읽었다. 카라마츠가 빨간 모자가 되면 이치마츠는 늑대가 되었고, 카라마츠가 앨리스가 되면 이치마츠는 정신없이 시계를 보는 토끼가 되었다. 이치마츠는 늘 주인공 역할을 양보해주는 착한 동생이었다. 두 사람은 도서관 구석에 모여앉아 소곤소곤 그들이 알지 못하는 단어를 읽어 내려가곤 했다. 이치마츠도 그때 생각을 하고 있을까. 카라마츠는 이치마츠가 이어서 뭐라고 얘기를 해주길 바랐지만 이치마츠는 말없이 달리기만 했다. 어느새 도서관의 끝이 보였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를 한번 돌아보고 카라마츠의 손을 놓고 달려가 벽의 스위치를 눌렀다.

천장에 매달린 전등들이 동시에 켜졌다. 그들이 책을 읽을 때는 입구에서 가까운 책상위에 놓인 스탠드를 켰고, 책이 있는 서가가 얼마 되지 않아 이렇게 도서관 전체를 밝힐 일이 거의 없었다. 카라마츠는 눈이 부셔 눈을 반쯤 감고 이치마츠를 돌아보았다. 이치마츠가 상기된 얼굴을 하고 카라마츠를 돌아보곤 책장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잘 봐, 카라마츠.”

카라마츠가 손바닥으로 전등 불빛을 가리고 책장을 돌아보았다. 텅 빈 책장들이 빽빽하게 들어차있었다.

너무 많은 책장들이 비어있다고 생각해본 적 없어?”

이치마츠가 카라마츠에게 다가와 카라마츠가 전등 불빛을 가린 손을 억지로 잡아 내렸다. 밝은 불빛에 카라마츠는 눈을 제대로 뜰 수조차 없었다. 이치마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누군가 책을 다 빼버린 거야.”

누가? ?”

아마도 아버지겠지. 책을 왜 빼버렸는지는 알 수가 없어. 그렇지만 어떤 책들이 있었는지는 대충 짐작이 돼.”

우리가 읽은 책들 말고? 그리고 불 좀 끄면 안 될까?”

이치마츠가 벽으로 돌아가 스위치를 눌러 껐다. 다시 도서관 안이 어두워졌다. 카라마츠는 눈물이 맺힌 눈을 깜빡이며 초점을 맞추려고 이리저리 눈을 돌렸다. 이치마츠가 다가와 카라마츠의 손목을 잡았다.

우리가 본 책들은 아주, 아주 한정된 것들이었어. 어릴 때 읽던 이야기책이나 소설, , 희곡. 그러니까 오로지 시간 때우기로 읽기 위해서 존재하는 책들이었다고.”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게 아닌 책들이 있어?”

이치마츠가 고개를 끄덕이고 이번엔 천천히 책장 사이를 걸어갔다.

읽었던 책을 다시 읽고, 또 읽고 하는 걸 반복하다 보니까 이상한 게 눈에 보이기 시작했어.”

이상한 거?”

책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필요에 따라 책을 읽는다는 묘사가 나오는 거야. 의사는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서 치료법이 쓰여 있는 책을 읽고, 변호사는 피고를 변호하기 위해 법이 쓰여 있는 책을 읽어. 그리고 과학자는 발명을 하기 위해 과학에 관한 내용이 쓰인 책을 찾아 읽고. 그런데 이 도서관에는 그런 책이 단 한권도 없었어.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이치마츠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그저 아버지가 문학 서적만을 위해 도서관을 짓고 책장을 가져다 두었다고 하기엔 빈 책장들이 너무도 많았고, 이치마츠의 말대로 그런 내용의 책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럼 그 책들은 다 어디에 있을까. . 카라마츠가 이치마츠를 돌아보았다. 이치마츠의 눈에 희미한 열기가 비쳤다.

그게 아버지 서재에 있다는 건가?”

아마도.”

아버지는 그걸 왜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으려고 하셨던 거지?”

내 생각엔,”

이치마츠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 책들을 읽게 되면 아버지의 말을 의심하게 되고, 아버지가 우리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것들을 깨닫게 될까봐 두려웠던 게 아닐까.”

카라마츠는 묘한 죄책감을 느꼈다. 아버지를 의심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카라마츠가 살아온 삶의 기반을 뒤흔드는 것과 같았다. 카라마츠와 형제들은 아버지의 밑에서 아버지의 말에 따라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이십년을 살았고, 지금도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와 별반 다를 바 없이 생활을 유지해오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머리에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에 뭔가가 스며들어오고 있었다.

아버지 서재에 들어가 보자.”

안 돼.”

카라마츠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대답이 먼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버지의 서재에 들어가지 말라는 건 규칙이었다. 그리고 오소마츠는 거기에 그가 생각하는 벌 중에서 가장 엄한 벌인 독방행을 내걸고 있었다. 그러니 이건 매우 중요한 규칙이었고, 카라마츠는 이를 어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치마츠가 아랫입술을 깨물고 카라마츠를 노려보았다. 카라마츠는 순간 당황해 변명을 해야 되나 하고 생각했지만 카라마츠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일상에 작은 즐거움은 나쁘지 않다. 카라마츠가 오소마츠와 입을 맞추거나 가끔 그 이상을 하는 건 다른 형제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아니었고, 규칙을 어기는 것도 아니었으며 재밌는 일이었다. 그렇게 단 둘이서 시간을 보내고 나면 오소마츠는 카라마츠에게 더 다정하게 대했으며 카라마츠는 그런 오소마츠가 좋았다. 그러나 이치마츠가 지금 카라마츠에게 제안하는 것은 모두의 생활을 의심하고 규칙을 어기며 오소마츠의 신뢰를 저버리는 일이었다. 이야기책이 아닌 다른 책들의 존재라는 건 확실히 카라마츠의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카라마츠는 이 방주의 구성원으로서, 그리고 네 동생의 형으로서, 오소마츠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동생으로서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각자의 자리를 잘 지켜야 그들은 싸우지 않고 이십 년을 더 살아갈 수 있었다.

오소마츠 때문에 그래?”

이치마츠의 목소리에 날이 서있었다. 카라마츠는 지금 여기서 오소마츠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고 대답을 하면 안 그래도 나쁜 두 사람사이의 관계가 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갈라지지 않을까 싶어 망설였다. 그러나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침묵을 읽어낸 모양이었다.

왜 오소마츠한테만 그러는 거야?”

오소마츠한테만 뭘? 이치마츠가 책장에 기대 고개를 숙였다. 어깨가 힘없이 늘어져있었다.

너랑 가장 시간을 많이 보낸 건 나잖아.”

이치마츠의 어리광인가. 카라마츠는 다가가 이치마츠의 어깨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손을 잡아당기면서 카라마츠를 책장으로 밀쳤다. , 하는 소리가 도서관 안을 울렸다가 사라졌다.

다른 애들이 그림이니 음악이니 하는 거나 들여다보고 있을 때 우린 여기에 있었는데.”

이치마츠는 억울해하는 것 같았다. 카라마츠는 어린 이치마츠가 울먹이며 안아달라고 하던 것이 다시 떠올랐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가 잡지 않은 손을 들어 이치마츠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얹었다. 이치마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카라마츠가 연극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무대가 있는 강당에 자리를 잡자 이치마츠는 카라마츠가 멀어진 것처럼 느껴졌을 거고, 그게 좀 서운했던 모양이었다. 마주치는 시간이 줄어들고 또 함께 있는 시간엔 다른 형제들도 있었으니 솔직하게 얘기하기도 어려웠을 거고, 그러다보니 점점 얘기하기가 어려워지고. 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오소마츠가 책임을 맡게 되면서 카라마츠는 오소마츠를 도와 동생들을 돌보고 생활을 꾸려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오소마츠와 많은 시간을 보내곤했다. 그 이전엔 이치마츠의 말대로 카라마츠와 이치마츠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으니 그만큼 카라마츠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겠지.

이치마츠는 카라마츠가 어깨에 손을 얹자 뭔가 더 말할 것처럼 숨을 들이 쉬었다가 카라마츠의 손목을 놓고 그를 끌어안았다. 이치마츠의 손이 카라마츠의 등을 긁듯 더듬어 꽉 붙잡았다. 카라마츠는 숨이 막힐 것 같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이치마츠의 등을 토닥였다.

나랑 여기서 나가자.”

이치마츠가 속삭였다. 카라마츠는 단번에 이치마츠가 말하는 곳이 도서관이 아님을 알았다. 그리고 그가 이치마츠를 멈춰야 한다는 것도. 카라마츠는 아무 대답없이 이치마츠의 뒷머리를 쓰다듬다 이치마츠의 뺨에 짧게 입을 맞췄다. 

어느 아침, 눈을 뜨니 눈앞에 연한 노란빛의 천장이 있었다. 천장이 노란색이라는 건 어머니에게 들어 알고 있었기에 그게 노란색임을 알았다. 언젠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회색이 아닌 다른 색의 천장을 보리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그게 오늘이어서는 안됐는데. 나는 멍하니 누워 천장을 하염없이 노려봤다. 계속 노려보고 있으면 그게 회색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천장은 그대로 노란색이었다. 아니, 누군가 천장을 회색에서 노란색으로 바꾼 게 아니다. 그저 내가 진실을 마주하게 되었을 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곁을 돌아보았다. 일 년 전인가, 우리 중에 가장 먼저 첫사랑을 하게 된 토도마츠가 꿈꾸는듯한 표정으로 형제들에게 방안에 있는 것들의 색깔을 하나하나 가르쳐주었다. 창문은 짙은 갈색이고, 희끄무레한 색의 창문을 열면 짙푸른 색의 나무들 사이로 불그스름한 태양이 천천히 떠오르고, 그 햇살이 잠기운에 어두컴컴한 방안을 비추면. 나는 고개를 돌렸다. 저 이불 끝자락에 네가 있었다. 너는 희지도 검지도 않았다. 어둔 푸른색이었다.

 

나는 거짓말을 하는데 서툴러 비밀을 오래 간직할 수가 없었다.

? 쵸로마츠가 2등이라고? 말도 안 돼!”

오소마츠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젓가락을 휘둘렀다. 다들 어이없다는, 그리고 질투난다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해 허겁지겁 밥을 씹어 삼켰다. 형제들 중 누군가가 대체 내 상대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나는 둘러댈 방법이 없었다. 아니, 오늘 새벽부터 한참동안 고민을 해봤지만 네 앞에서 다른 사람의 이름을 대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자리를 피할 생각만 하고 있었다. 멍청한 자존심, 가련한 고집.

그 행운의 주인공은 누구지, 쵸로마츠?”

아직 잠이 덜 깨 잠긴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나는 밥그릇에 든 것을 입으로 다 털어놓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오늘 주번이라서. 먼저 갈게.”

양치 안 해?”

학교 가서 할 거야.”

챙겨 입은 교복이 내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뒤로 형제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내 눈을 뜨게 해준 사람이 같은 반일거라고. 같이 주번을 할 여학생이라던가. 현관문을 닫았다. 눈앞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잠깐 걱정을 접어두고 세상 구경을 했다.

가로수에 매달린 나뭇잎은 손끝으로 톡 건드리면 쏟아질 것 같은 진한 녹색이었다. 도로 위를 따라 달리는 노란색, 빨간색의 자동차들, 보드라운 주황색의 고양이들. 그리고 머리 위로 끝도 없이 투명한 하늘이 솟아 있었다. 길옆으로 반짝이며 흐르는 저 시냇물을 수천 겹 쌓아올리면 저렇게 깊고 푸른 하늘빛이 되지 않을까. 순간 새벽에 봤던 네 얼굴이 떠올랐다.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파란색으로 그늘진 얼굴은 아무 근심걱정도 없다는 표정으로 잠들어있었지. 나는 길가에 서서 눈을 꼭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여전히 세상은 오색찬란한 빛깔로 반짝이고 있었다. 사랑을 눈으로 확인한다는 건 복잡한 기분이었다.

 

첫 음악수업이었다. 우린 다른 반이었지만 B반과 C반이라는 이유로 음악수업을 함께 들었다. 음악선생은 출석부에 마츠노가 둘인 것을 보고 우리가 전교에 소문이 자자한 쌍둥이들이라는 걸 알아챘고, 곧 환하게 웃으며 나와 카라마츠를 맨 앞자리에 나란히 앉혔다.

여섯 명이 다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정말 똑같이 생겼구나!”

구경거리가 되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나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수줍게 웃었다. 예체능 전공으로 대학을 갈 게 아니었기에 음악 성적이 그렇게까지 중요하지는 않았지만, 음악 선생은 다른 교사들에게 이런 저런 소문을 퍼뜨리기로 유명했다. 어차피 다른 형제들이 중학교에서 그랬던 것처럼 온갖 말썽을 피우며 점수를 깎아먹겠지만 나는 다른 형제들과는 다르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다른 형제들보다 더 공부를 잘하고,

두 마츠노 군 중에 하나가 노래를 잘 부른다고 들었는데.”

사회생활도 잘하고,

접니다.”

더 평범하고,

그럼 카라마츠 군이 한 곡 불러볼래?”

더 똑똑하고,

기타도 쳐도 될까요?”

더 정상적이라고.

 

네 노래를 들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 우린 쌍둥이고, 신체기관 하나하나가 완전히 똑같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텐데, 너는 왜 이렇게 나와 다를까. 네 목소리는 왜 이렇게 깊고, 맑고, 듣는 사람의 심장을 녹여내는지. 네가 1분 남짓 노래를 하는 동안 나는 맨 앞자리에서 네 숨소리를 들으며 냉정하게 생각해보려고 노력했어. 너는 작년부터 기타를 배우러 다녔고, 나는 도서관에서 늦게까지 공부를 하다가 오느라 네가 기타를 치는 걸 거의 보지 못했다고. 너는 운동도 열심히 해서 나보다 폐활량이 좋았을 거고, 그래서 노래를 잘하는 거라고.

아니, 나는 그렇게 앞뒤를 따져볼 수가 없었어. 네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기타를 내려놓고, 음악선생이 호들갑을 떨며 칭찬을 하고, 그리고 다시 내 옆으로 돌아와 앉았을 때 나는 내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걸 깨달았어. 네가 불렀던 싸구려 유행가가 귓가에서 맴돌았고, 자기 전에는 기타 줄을 튕기는 손가락이 눈앞에서 어른거렸지. 그때부터 걱정을 하기 시작했어. 너 말고 다른 사람은 눈 안에 들어오지 않는 이 때 내가 색을 보게 될까봐.

 

하루종일 형제들을 피해 다녔다. 이치마츠와 함께 듣는 미술수업엔 몸이 아프다고 빠지고 양호실 침대에 숨어있었고, 점심시간에는 그늘진 운동장 구석에서 형제들에게 둘러댈 수 있는 핑계거리를 생각해내느라 하루 종일 골머리를 썩였다. 사실 같은 반 여자애 이름을 아무거나 둘러대면 끝날 일인데 다른 사람 이름을 입에 올리려고 하면 얼굴 표정이 일그러져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라는 게 들통나버릴 것 같았다. 손발이 차갑게 식어있었다. 나는 얼음물에 한참 담갔던 것 같이 시린 손으로 열 오른 뺨을 식히다 문득 같은 반 애들 사이에서 퍼졌던 소문이 떠올랐다. 학교 정문에서 나와 두 블록정도를 가면 보이는 허름한 가게에선 다른 가게에선 구할 수 없는 것들을 판다고. 담배도, 술도, 그리고,

 

약을 먹어서 볼 수 있던 거야.”

나는 자켓 주머니에서 약봉투를 꺼내 형제들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그런 약을 진짜 팔아?”

, 들어본 적 있어. 진짜 사랑에 빠진 것처럼 들뜬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던데, 진짠가보네.”

형제들은 내 손에서 약봉투를 빼앗듯 가져가 바닥에 부었다. 약은 둥글고 납작한 하얀색이었다. 색을 보게 해주는 약이라고 하기엔 너무 평범하게 생긴 모양새였다. 가격도 터무니없이 비쌌고.

이거 불법 아냐?”

이치마츠가 의심스럽다는 듯 약봉투를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그렇겠지. 약사가 주는 게 아니었으니까.”

도대체 이런 약은 어떻게 만드는 걸까?”

쥬시마츠가 약을 한 알 집어 들어 혀끝으로 살짝 핥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

먹으면 기분이 좋아져서 애들이 사다가 먹나봐. 그리고 색을 계속 보려면 매일 먹어야 하고.”

나는 카라마츠의 시선을 피하며 토도마츠의 곁에 주저앉아 약을 한 알씩 주워 봉투에 담았다.

체리마츠가 진짜 사랑에 빠진 게 아니라니, 재미없어.”

약을 먹어서 색이 보이는 거면 2등도 아니지 않아?”

편법이지! 스테로이드다!”

역시 체리마츠, 난 또 진짜 연애하는 줄 알았다니까.”

그렇지만,”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카라마츠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쵸로마츠는 들뜬 표정이 아닌걸.”

나는 약봉투를 내려놓고 걸어가 방을 나섰다. 방문 너머로 형제들이 약을 먹어보자며 떠들썩하게 노는 소리가 들렸다.

들뜬 순간은 아주 잠깐이었어, 카라마츠. 흑백이 아닌 진짜 세상을 보게 되어서 기쁜 것보다 내가 이 감정을 변명해야 하고 거짓말을 해야 된다는 부담이 더 컸고, 또 그 거짓말을 이 서투른 감정이 식을 때까지 질질 끌고 가야 한다는 슬픔이 더 무거웠어. 나는 그랬어.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카라마츠가 색을 보게 되었다고 새벽부터 형제들을 깨워 자랑을 했다. 상대는 연극부 선배로 대단한 미인은 아니었지만 카라마츠는 선배가 버림받은 여자 연기를 하며 눈물을 흘리는 걸 보고 자신이 선배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그 눈물을 닦아주고, 그 사람은 선배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설득하고 싶었다고. 나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그날 학교 수업을 마치고 길을 한참 걷다보니 그 가게 앞이었다. 날은 어두워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지고 있었고, 나는 주머니를 더듬어 용돈이 얼마나 남았는지 생각해보았다. 약은 여전히 비쌌다. 나는 더도 덜도 말고 딱 열 알을 사서 책가방 깊숙한 곳에 쑤셔 넣었다

오늘 밤엔 사랑하는 꿈을 꾸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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