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얏!”

, 하고 통조림이 가득 든 나무상자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쵸로마츠는 색깔별로 쌓고 있던 통조림을 내려놓고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토도마츠가 오른손 검지를 왼손으로 꽉 붙들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쵸로마츠는 눈을 잔뜩 찌푸리고 토도마츠의 손가락에 무슨 상처라도 났는지 보려고 했지만 너무 멀어 보이지 않았다. 쵸로마츠의 곁에서 통조림을 나눠 쌓고 있던 쥬시마츠가 들고 있던 걸 모조리 바닥에 집어던지고 창고를 가로질러 달려갔다. 쥬시마츠의 다급한 발소리와 통조림이 쏟아지는 소리가 창고 안에 가득 울려 퍼졌고, 바닥에 깔린 먼지가 풀썩 일어났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토도마츠! 괜찮아?”

쥬시마츠가 순식간에 토도마츠의 곁에 달라붙어 토도마츠의 손가락을 들여다보았다. 피가 나는 건가? 붕대는 부엌 찬장에 있었다. 쵸로마츠는 손에 끼고 있던 면장갑을 벗어 그 자리에 내려놓고 옷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었다. 크게 다친 건 아닌 것 같으니 붕대만 가져오면 되겠지? 쵸로마츠는 다시 토도마츠를 흘끔 돌아보았다. 쥬시마츠가 한껏 진지한 표정을 하고 토도마츠의 손가락을 이리저리 들여다보고 있었고, 토도마츠가 좀 훌쩍거리는 것 같더니 바지에 손가락을 쓱쓱 문질러 닦았다.

붕대 가져올게.”

얼른 갔다 와!”

쥬시마츠가 손을 흔들었다. 오늘 오후 노동은 이 정도에서 마무리를 해도 될 것 같았다. 일해야 하는 시간을 다 채우지 못한 게 좀 찝찝했지만, 창고 정리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지금 세 명이나 자리를 비운 상태니까 나머지 세 명만 일하는 건 억울하지. 쵸로마츠는 뻣뻣한 목을 풀면서 창고 문을 나섰다.

많이 아파?”

못이 튀어나와있을 줄 몰랐어. 저거 망치로 튀어나온 부분 좀 눌러놔야겠다.”

오는 길에 망치도 들고 와야겠군.

 

카라마츠는 순식간에 미지근해진 물수건을 찬 물이 담긴 대야에 넣고 더운 기가 가시길 기다렸다. 물수건을 계속 빨았더니 대야에 담긴 물도 점점 미지근해져 물수건을 한 번 더 빨면 물을 새로 떠와야 할 것 같았다. 아까 카라마츠가 이치마츠를 업고 와 자리에 눕히자마자 해열제를 먹였는데도 열이 내리질 않았다. 카라마츠는 새빨갛게 열이 오른 얼굴을 한참 보다가 마른 수건에 손을 닦고 이치마츠의 이마에 살짝 손을 얹었다. 동그스름한 이마가 뜨끈뜨끈하게 끓고 있었다. 대야에 담구고 있던 손이 시원했는지 이치마츠의 표정이 조금 풀어져서, 카라마츠는 양 손으로 이치마츠의 얼굴을 살살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잠을 자고 있는 건지, 아파서 앓고 있는 건지. 카라마츠는 답답했지만 이치마츠를 흔들어 깨울 수는 없었다.

약을 한 번 더 먹여야 되나? 아니면 다른 약을 먹여야 되나? 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약은 종류도 얼마 되지 않았고, 빨아서 계속 쓸 수 있는 붕대와는 달리 소모품이었기에 다들 아껴서 먹고 있었다. 이치마츠는 몸이 약해 툭하면 앓아누웠다. 그럴 때마다 카라마츠는 해열제를 타다가 먹이려고 했지만 오소마츠는 툭하면 약을 내주지 않았다. 도대체 두 사람은 왜 사이가 안 좋아진 거지?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얼굴에서 손을 떼고 대야에서 한참 식힌 물수건을 꺼내 물기를 짰다.

어렸을 땐 여섯 명이 다 같이 몰려다녔다. 특히 쥬시마츠가 형제들이랑 떨어지면 죽기라도 할 것처럼 울어재꼈기 때문에 쥬시마츠를 그들 가운데에 끼우고, 여섯 쌍둥이가 방주의 수많은 방들을 탐험하고 강당에 가득 쌓여있는 간이 의자들로 성을 짓고 놀았다. 의자로 얼기설기 쌓은 그들만의 성 안에 들어가면 카라마츠는 방주가 곧 세상처럼 느껴졌고, 그 성이 곧 그들을 구원해줄 작은 방주 같았다. 그 안에 형제들과 함께 들어가 있으면 가만히 있기만 해도 행복했다. 쥬시마츠가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그들 중에 가장 먼저 글을 깨친 이치마츠가 도서관에서 읽은 책 이야기를 더듬더듬 들려주기도 했다. 이치마츠가 일곱 난쟁이와 공주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오소마츠가 카라마츠의 손을 꼭 붙잡으며 난쟁이 같은 게 방주 안으로 쳐들어오면 자기가 다 물리치겠다고 속삭이던 게 엊그제 같은데,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고 방주 안이 답답해지기 시작하면서 형제들은 꼭 모여서 활동을 해야 할 때가 아니면 각자의 구역으로 들어가 나오질 않았다.

카라마츠는 있는 힘껏 물기를 짠 손수건을 펼쳐 이치마츠의 이마 위에 얹었다. 왕자의 입맞춤으로 공주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하며 자기도 공주와 뽀뽀를 하겠다고 눈을 반짝이던 동생은 어느새 아버지보다 큰 어른이 되어서 카라마츠가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짓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서재에 대체 뭐가 있기에 오소마츠가 잘 때도 손에 꼭 쥐고 놓지 않는 열쇠를 빼돌려 들어가려고 했던 걸까?

카라마츠는 순간 그 좁은 틈새로 이치마츠가 속삭인 말이 다시 떠올랐다. 우린 속고 있다고. 이치마츠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우린 누구에게 속고 있는 건데? 우린 어떤 거짓을 진실이라 믿고 있는 거야? 카라마츠는 대야를 저 구석으로 밀어놓고 이치마츠의 이불 밑으로 기어들어가 이치마츠를 조심스럽게 끌어안고 이치마츠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이치마츠의 온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어렸을 때부터 이치마츠의 병간호는 늘 카라마츠 담당이었다. 이치마츠는 자기 밑으로 동생이 둘이라고 형아 노릇을 하면서도 단 둘이 있을 땐 카라마츠에게 어리광을 부리곤 했다. 카라마츠가 어설프게 물수건을 짜 이마에 얹고, 물을 떠먹여주며 병간호를 하고 있으면 이치마츠는 팅팅 부은 눈으로 카라마츠를 돌아보며 안아달라고 울먹였다. 카라마츠가 이불 밑으로 들어가 이치마츠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거리다 보면 따뜻한 체온에 둘 다 골아 떨어져서, 잠에서 깰 무렵이면 이치마츠는 말끔하게 나아있었다.

안 비좁아?”

카라마츠가 그때 그랬던 것처럼 눈을 감고 잠에 막 빠져들려는 순간, 문가에서 오소마츠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라마츠는 간신히 눈을 떠 문가로 고개를 돌렸다. 오소마츠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심통난 표정으로 카라마츠를 보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조금 민망해져 일어나 앉았다. 문밖에서 찬바람이 들어오는 게 느껴졌는지 이치마츠가 몸을 돌려 카라마츠의 다리에 팔을 둘러 안았다.

열이 내리질 않아서 안아주고 있었어.”

변명할 필요 없어. 그런 거 따지려고 하는 거 아니니까.”

오소마츠가 수면실 문을 닫고 들어와 카라마츠의 옆에 주저앉았다. 그리곤 바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이치마츠의 머리맡에 툭 던졌다. 해열제였다. 카라마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오소마츠와 이치마츠가 툭하면 으르렁거리고 싸우긴 해도 둘은 형제였고, 오소마츠도 동생을 아끼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나중에 이치마츠가 일어나면 오소마츠가 약을 챙겨주더라고 넌저시 말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면 이치마츠도 오소마츠에게 고마워할 거고, 그럼 삐죽삐죽하게 세웠던 가시도 조금 수그러들겠지.

오소마츠는 손이 시리다는 듯 양손바닥을 비비다 이불 밑으로 집어넣었다.

오후 노동은 빠진 거야?”

너랑 이치마츠가 걱정된다고 약 갖다 주고 오겠다고 하고 빠졌어. 쵸로마츠도 별수 없이 보내줬지 뭐.”

카라마츠는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오후 노동이 끝날 시간이었다.

 

오후노동은 그들이 열 살이 됐을 때부터 해왔던 오랜 일과였다. 방주 안에 어딘가를 보수하거나 그들의 생활 유지를 위해 특별히 해야 할 일이 없으면 그들은 창고 안에 모여 물건들을 옮겼다. 방주 꼭대기에서부터 네 번째 되는 층에 창고가 있었다. 창고는 강당보다도 넓었고 천장이 한참 높았다. 창고 안에는 그들이 이 곳에서 살아가며 쓸 모든 물건들이 들어있었다. 수십 년 동안 먹을 통조림, 그들 여섯 명을 위해 준비된 옷과 신발, 자질구레한 생활용품들과 방주를 적절하게 유지하기 위한 물건들이었다. 아버지는 형제들이 열 살이 되자 작은 면장갑을 양 손에 끼워주었다.

명령은 단순했다. 이 쪽에 있는 물건들을 저 쪽으로 날라라. 그리고 물건들을 전부 저 쪽으로 나르면 다시 이 쪽으로 날라라.

아마도 물건을 나르면서 남은 물자들의 수량을 파악하고 그들이 찾기 쉽게 정리를 하란 뜻이었을 것이다. 매일 형제들은 점심을 먹고 잠깐 쉬었다가 창고에 모여 세 시간동안 물건을 날랐다.

 

오소마츠는 한참동안 이불 밑에서 손을 녹였다. 걱정하고 있던 게 해결되고 나니 카라마츠는 마음이 편해지기도 했고, 또 아까 이치마츠를 업고 뛰느라 긴장했던 근육이 슬슬 풀려 피로가 몰려왔다. 그걸 눈치 채기라도 한 것처럼 오소마츠가 손을 뻗어 카라마츠의 어깨를 끌어당겨 그에게 기대게 했다. 카라마츠는 형의 넓은 어깨에 기대 온몸에 힘을 빼고 축 늘어졌다. 오소마츠도 이치마츠에게 싫은 소리 하는 거 힘들겠지. 카라마츠는 오소마츠에게 조금 더 가까이 붙어 오소마츠의 목을 끌어안았다. 오소마츠가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고, 곧 따뜻한 손이 카라마츠의 뺨을 어루만지다 감싸 안았다.

오소마츠.”

?”

오소마츠가 카라마츠의 이마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이치마츠랑 싸우지 마.”

오소마츠는 대답이 없었다. 카라마츠가 오소마츠의 대답을 기다리며 빤히 보고 있어도 오소마츠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 카라마츠의 코끝에 다시 입을 맞추고, 코끝에서 인중을 타고 내려와 카라마츠의 입술을 살짝 물었다. 부드러운 입술 새로 더운 숨이 느껴졌다. 카라마츠는 고개를 모로 조금 틀어 살며시 눈을 감았다. 따뜻한 손이 카라마츠의 후드 밑으로 슬금슬금 들어오고 있었다.

 

카라마츠가 저녁을 먹고 다시 수면실로 돌아오자 이치마츠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있었다.

이제 깼어? 몸은 좀 어때?”

목말라.”

이치마츠의 목소리가 버석버석하게 말라있었다. 카라마츠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부엌으로 가 물통에 물을 가득 채워왔다. 아직 얼굴이 빨갛긴 했지만 아까보다는 한결 나은 모습이었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곁에 앉아 컵에 물을 조금 따라 내밀었다. 이치마츠는 컵을 받아드는 것도 힘에 부치는지 간신히 컵을 들고 있다가 천천히 들어 입술에 댔다.

아까 오소마츠 형이 약 갖다 줬어.”

이치마츠가 들고 있던 컵을 내려놓고 옷소매로 입가를 닦았다.

더 마실래?”

됐어.”

물을 많이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하지만 이치마츠는 컵을 이불 옆으로 치워버렸다. 이치마츠는 아무 말이 없었다. 사실 카라마츠도 이치마츠가 오소마츠에게 고맙다는 얘기를 하리라고 믿지는 않았지만, 이치마츠는 기분이 확 상했다는 얼굴로 방구석을 노려보고 있었다. 천천히 화해하면 되겠지.

있다가 물 더 마시려면 마셔.”

.”

카라마츠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내가 했던 말 기억 안나?”

, 깜빡하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이불에서 조금 물러나 앉아 대답했다.

우리가 속고 있다고?”

이치마츠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두침침한 방 안에 작은 환풍기가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가 뭔가 설명을 해주리라고 기대했는데, 이치마츠는 말없이 카라마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라마츠가 먼저 질문을 해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누가 우리를 속이고 있는데?”

누굴 거 같아?”

글쎄, 여기엔 우리밖에 없으니까. 우리 중 누군가가…….”

이치마츠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곤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카라마츠에게 다가왔다.

이치마츠, 좀 더 누워있어. 한참 앓았다니까.”

그러나 이치마츠는 쓰러지듯 카라마츠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카라마츠의 멱살을 잡았다.

도서관으로 가자.”

도서관은 이치마츠의 구역이었다





















사실과 맞지 않는 설정오류 같아보이는게 있죠! 저도 알고 있습니다 뒤에가서 설명할게요!!

토도마츠는 수도꼭지를 돌려 물을 한 컵 받아 마시다가 고개를 들었다. 복도에서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어제 식사 당번은 쵸로마츠였다. 그러니 오늘은 이치마츠의 차례였는데, 이치마츠가 잠시 자리를 비웠으니 쥬시마츠에게 순서가 넘어갔겠지. 과연 부엌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고, 품에 통조림을 가득 안은 쥬시마츠가 뛰어 들어왔다.

토도마츠! 좋은 아침!”

쥬시마츠 형, 바구니 들고 가라니까? 봐봐 후드 주머니 다 늘어지잖아?”

토도마츠는 피식 웃으면서 쥬시마츠의 후드를 가리켰다. 쥬시마츠는 매번 창고에 통조림을 가지러 갈 때마다 바구니를 가져가는 걸 잊곤 했다. 쥬시마츠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들어와 식탁에 품에 안고 있던 통조림을 쏟아내고 후드 주머니 안에 든 통조림도 꺼내 쌓았다.

오다가 흘리진 않았고?”

안 흘렸을걸? 한번 세볼까!”

쥬시마츠가 식탁 의자에 앉아 통조림을 색깔별로 분리했다. 하얀색과 빨간색과 녹색. 토도마츠도 쥬시마츠를 마주보는 자리에 앉아 통조림의 개수를 셌다. 하얀색이 여섯 개, 빨간색이 여섯 개, 녹색이 여섯 개.

, 지금 이치마츠 형은 자리에 없잖아? 다섯 개씩 가져와야지.”

토도마츠가 통조림을 한 개씩 빼 한쪽 구석으로 밀어두었다. 쥬시마츠는 아, 하고 그제야 깨달았다는 것처럼 고개를 들어 토도마츠와 눈이 마주쳤다가 도로 고개를 숙였다. 토도마츠도 더 이상 말하지 않고 통조림을 하나씩 끌어당겨 뚜껑을 따기 시작했다. 쥬시마츠가 이치마츠의 몫으로 가져온 통조림을 계속 돌아보았다.

하얀색 통조림은 ’, 빨간색은 고기’, 초록색은 야채였다. 형제들이 먹을 수 있는 식재료라곤 이 통조림들과 소금뿐이다. 여섯 명은 이십 년 동안 통조림을 조금이라도 맛있게 먹는 방법을 궁리해보았지만 제한된 환경에선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통조림을 색깔별로 나누어 푹 끓이거나, 아니면 굽거나. 그러나 맛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토도마츠는 밍밍하게 아무 맛이 나지 않는 하얀색 통조림을 전부 따서 식탁 한쪽으로 밀어두고, 빨간색 통조림을 땄다. 빨간색 통조림은 퍽퍽하고 질겼다. 언젠가 토도마츠는 아버지에게 이건 어떤 동물의 살이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무서운 얼굴로 빨간 통조림 뚜껑을 따 토도마츠의 얼굴에 들이밀고 대답했다.

이건 죄 없는 짐승이란다. 우린 지금 죄를 짓고 있는 거야.’

토도마츠는 빨간색 통조림을 먹으러 수저를 들 때마다 그 생각이 났다. 우리는 다른 짐승의 살점을 먹어야 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성장해 핵전쟁이 끝나고 완전히 깨끗한 세상이 도래했을 때 나갈 수 있다. 통조림 세 개를 한 번에 끓여 죽으로 먹을 때는 상관이 없었지만, 가끔 누군가 오기를 부려 통조림을 색깔별로 모아 불에 구워 올 때면 토도마츠는 죄책감이 들었다. 그 짐승이 어떻게 생겼을 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형제들에게 보여주는 책에는 그림이 하나도 없었고, 오직 글자만 빽빽하게 들어차있었다. 형제들이 책에 나오는 사자며 호랑이, 너구리, 돼지, 소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다고 아버지에게 물어본 적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나중에 그들이 이 방주를 떠나 정결해진 세상으로 돌아가면 그것들은 이미 다 죽고 없을 것이고, 새로운 생명체들이 그들을 기다릴 거라고, 사자고 호랑이고 전부 세상에 남아있지 않을 거라고. 혹시 핵전쟁이 일어날 동안 다른 동물들을 돌봐줄 사람들이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이 방주의 여섯 명은 지구에서 인간들과 함께 공존해온 생명체들의 마지막 흔적을 먹고 있는 게 아닐까? 토도마츠는 고개를 젓고 초록색 통조림의 뚜껑을 땄다.

쥬시마츠 형, 오늘은 어떻게 해먹을 거야?”

역시 끓이는 게 제일 나으려나! 아침을 빨리 먹어야 이치마츠 형을 빨리 데려올 수 있잖아?”

쥬시마츠가 잽싸게 마지막 통조림 뚜껑을 따 옆으로 밀어두면서 웃었다. 쥬시마츠는 형제들이 떨어지는 것을 제일 싫어했다. 좀 집착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지만, 글쎄, 토도마츠가 다른 형제들을 본 적이 없어 보통 형제들이 이렇게 다른 형제들을 아끼는 건지, 아니면 쥬시마츠가 여섯 명중에 유난히 유대감을 느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쥬시마츠가 찬장으로 달려가 커다란 냄비를 꺼내 물을 받았다. 조금 거들어줄까 아니면 형제들을 깨우러 갈까? 토도마츠는 잠깐 쥬시마츠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부엌을 나섰다.

방주는 뒤집어진 원뿔 모양으로, 그들 여섯 명이 차지하기엔 지나치게 넓은 감이 없잖아 있었다. 원뿔 한가운데는 뻥 뚫려 벽을 따라 계단이 둥글게 나있었고, 맨 꼭대기 층에서 고개를 쑥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보면 맨 아래층이 까마득하게 보였다. 토도마츠는 부엌에서 나와 2층으로 올라가면서 불이 들어오지 않는 전구들이 보이면 뽑아 후드 주머니에 넣었다. 그들이 어렸을 때는 계단 벽을 따라 둥근 전구들이 일렬로 박혀있어 훤히 밝았는데, 날이 가면 갈수록 전구의 개수가 줄어들었다. 토도마츠는 전구가 있었던 자리를 손끝으로 더듬어보며 꼭 젖니가 빠진 자리 같다고 생각했다. 전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창고 한 구석에는 전구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이 계단을 예전처럼 환하게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도 있었지만 형제들은 최소한의 전구만을 켜놓고 남은 전구들을 아껴두기로 약속했다. 토도마츠는 수면실 문 앞에서 잠깐 멈춰 서서 계단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천장을 올려다봤다.

천장에는 거대한, 그들이 살아오면서 본 그 어느 것보다도 거대한 바위가 방주의 입구를 막고 있었다. 바위는 꼭 잠자는 괴물처럼 그들의 머리 꼭대기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저 바위를 파수꾼이라고 불렀다. 그는 일주일에 한 번씩 저 바위 앞에 형제들을 앉혀놓고 바위를 그의 일곱 번째 아들처럼 사랑이 가득 담긴 눈으로 쓰다듬었다. 방사능도, 폭탄도, 심지어 사람들의 고통마저도 저 바위를 넘지 못한다고, 그리고 그들이 나갈 수 있을 때가 되면 바위가 저절로 열릴 것이라며 우리는 바위에게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토도마츠는 바위를 볼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혔다. 어느 방에 숨어있더라도 저 바위가 토도마츠를 노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는 자연히 바위 앞에서 모이는 일이 없어졌다. 가끔 이치마츠나 쥬시마츠가 바위 바로 밑에 앉아 멍하니 바위를 올려다보는 걸 보긴 했지만, 토도마츠는 바위 가까이엔 가지 않았다. 바위는 어떻게 열릴까. 토도마츠는 마른 침을 삼키고 침실 문을 열었다.

 

쥬시마츠는 순식간에 밥그릇을 비우고 형제들이 식사를 마치기만을 기다렸다. 카라마츠는 기계적으로 음식을 씹어 삼켰다. 쥬시마츠가 물을 많이 넣고 끓인 탓에 씹을 것도 없었지만 음식을 한참 씹다보니 잠이 좀 깨는 듯 했다. 다행히 오소마츠는 카라마츠의 외출을 눈치 채지 못한 듯 했다. 카라마츠는 자리에서 일어나 컵에 찬 물을 받아 한 번에 들이켰다.

카라마츠. 다 먹어.”

쵸로마츠가 카라마츠의 그릇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 잠깐 물만 마시려던 거였다.”

카라마츠는 컵을 내려놓고 자리로 돌아가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냥 후루룩 마셔버려도 될 정도로 음식이 묽었는데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쵸로마츠가 미간을 찌푸리고 카라마츠를 노려보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젓가락으로 음식을 휘휘 젓다가 그릇을 들어 꿀꺽꿀꺽 마셨다. 카라마츠가 괜한 고집을 부렸다간 쵸로마츠에게 한참동안 잔소리를 들을게 분명했다. 그러면 이치마츠를 데리러 가는 시간도 늦어질 거고, 어쩔 수 없지. 카라마츠는 구역질이 날 것 같은걸 참으며 그릇을 비웠다. 이치마츠가 걱정됐다. 어젯밤 카라마츠가 찾아갔을 때는 간신히 대답도 했지만 지금은 어떨지 몰랐다. 찬 바닥에서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불편한 자세로 있었으니 아플 게 분명한데. 카라마츠는 빈 그릇을 만지작거리며 오소마츠를 돌아보았다. 오소마츠는 아예 한쪽 턱을 괴고 졸고 있었다. 이치마츠가 걱정되지 않는 건가? 카라마츠는 마음이 급해 토도마츠에게 눈짓을 했다. 토도마츠가 한숨을 푹 쉬고 오소마츠를 흔들었다.

, 얼른 먹어. 다들 형 먹는 거 기다리고 있잖아?”

오소마츠가 멍한 눈빛으로 다른 사람들의 그릇을 돌아보고 자기 그릇을 들어 내용물을 마셨다. 쥬시마츠가 더 이상 버티질 못하고 다른 형제들의 그릇을 싹 걷어가 설거지를 시작했다. 오소마츠는 한참동안 그릇을 입에 대고 있다가 그릇이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자기 그릇을 내려놓았다. 조금 잠이 깬 눈빛이었다. 카라마츠는 고개를 살짝 돌려 오소마츠의 눈빛을 피했다.

오늘 조회는 누구지?”

!”

쥬시마츠가 손을 번쩍 들었다. 오소마츠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릇을 쥬시마츠에게 건네주고 벽에 기대 늘어져라 기지개를 폈다.

얼른 조회하고 넷째 데리러 가자. 더 늦어졌다간 카라마츠가 한 대 때릴 것 같아.”

쥬시마츠가 신나게 그릇을 헹궈 건조대에 올려놓았다. 쵸로마츠가 뭐라고 투덜거렸지만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방주의 맨 꼭대기 층에는 강당이 있었다. 형제들은 강당으로 올라가는 길에 침실에 들러 잠옷을 생활복으로 갈아입었다. 강당 문으로 들어서면 보이는 벽엔 한가득 빗금이 쳐있었다. 쥬시마츠가 손에 끌과 망치를 들고 달려와 벽 앞에 섰다. 그리곤 형제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오늘 하루도!”

오늘 하루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텅 빈 강당 안에 다섯 명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쥬시마츠는 어제 쵸로마츠가 친 빗금의 옆에 끌을 대고 망치로 끌 위를 툭 쳤다. 빗금이 깊었다. 형제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강당 문을 나섰다. 카라마츠는 쥬시마츠가 남긴 빗금 위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그들은 이제 스무 살이었다. 쥬시마츠의 빗금 옆으로는 벽이 반이나 텅 비어있었다. 저 벽을 가득 채워야 그들은 나갈 수 있었다. 카라마츠는 저 싸늘하니 새하얀 벽을 잠깐 응시하다가 형제들의 뒤를 따라 나섰다.

 

밑으로, 밑으로, 밑으로. 이치마츠의 기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카라마츠는 초조해 쥬시마츠의 팔을 붙잡고 오소마츠가 문을 여는 걸 지켜보았다.

카라마츠.”

오소마츠가 카라마츠를 돌아보고 말했다.

와서 네 동생 업어.”

. 카라마츠는 쥬시마츠의 손을 놓고 달려가 독방 문을 열어젖혔다. 그들이 문 여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을 텐데 이치마츠는 바닥에 모로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가쁜 숨소리가 들렸다. 쥬시마츠가 따라와 이치마츠의 손목을 묶은 끈을 풀겠다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쥬시마츠의 손이 덜덜 떨려 매듭이 풀리지 않았고, 지켜보던 쵸로마츠가 한숨을 푹 내쉬면서 다가와 밧줄을 풀었다. 카라마츠는 시퍼렇게 멍이 든 손목을 한참 주물렀다. 토도마츠가 오소마츠의 눈치를 보다가 다가와 이치마츠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펄펄 끓네.”

적당히 데려다 줘.”

토도마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소마츠가 말을 툭 내뱉고는 몸을 돌려 사라졌다. 카라마츠는 시퍼렇게 멍이 든 이치마츠의 손목을 한참 문지르다 손에 핏기가 돌자 이치마츠를 업고 독방을 뛰쳐나갔다. 이치마츠의 마른 몸이 힘없이 흔들렸다. 약을, 어떤 약을 써야 하지? 카라마츠는 이치마츠를 단단히 붙잡고 계단을 한 번에 두세 개씩 뛰어넘으며 달렸다. 귓가에 이치마츠의 뜨거운 숨이 스쳤다. 뒤에서 형제들이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치마츠, 이치마츠.”

카라마츠가 헉헉거리며 이치마츠의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이대로 이불을 덮어주고 자게 해도 되나? 아니면 뺨을 때려서라도 깨워야 돼?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버지처럼 이치마츠가 죽어버리면 어떡하지. 카라마츠는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버지가 죽자 오소마츠는 아버지보다 엄하게 형제들을 몰아세웠다.

우리는 쌍둥이고, 너희가 나를 아버지처럼 생각하진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어.”

오소마츠가 바위 밑에 형제들을 앉혀놓고 말했다. 이치마츠는 오소마츠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무릎을 세우고 앉아 오소마츠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우린 여기서 이십년을 더 살아야 되고, 모두 무사히 방주를 나가려면 규칙이 있어야 해.”

오소마츠의 허리춤에 매달린 열쇠뭉치가 쩔그렁거렸다.

 

오늘은 카라마츠가 당번이지?”

쵸로마츠가 교복에 묻은 먼지를 털면서 말했다. 이치마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쵸로마츠가 신발장 위에 놓여있던 열쇠를 휙 던져주었다. 이치마츠는 현관 옆 벽에 기대어 삐딱하게 쵸로마츠를 보고 있다 날아온 열쇠를 간신히 잡고 쵸로마츠를 째려보았다.

나 다리 부러진 거 안보여?”

야구하다가 부러뜨린 놈이 말이 많네.”

쵸로마츠가 피식 웃고 현관을 나섰다. 얄미운 놈. 이치마츠는 쵸로마츠의 뒤에 대고 가운데손가락을 내밀었다.

 

평소에 운동이라곤 간신히 학교에서 집 사이를 걸어 다니는 것 밖에 안하던 탓일까. 이치마츠는 깁스한 다리 위를 슬슬 만져보며 깁스를 풀면 꼭 운동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토도마츠가 하는 것처럼 조깅이라도 하면 도움이 될 텐데. 이치마츠는 현관 옆에 서서 엉겁결에 쵸로마츠, 토도마츠, 쥬시마츠, 오소마츠를 배웅했다. 처음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다 같이 학교를 다녔는데, 학년이 올라가자 각자 생활 패턴과 스케줄에 따라 움직이느라 여럿이서 학교를 가는 일이 드물었다. 이렇게 누구 하나가 다리 혹은 팔을 부러뜨려 자전거로 데려다 주는 게 아니라면.

, 이치마츠,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카라마츠가 한참 만에 방에서 나와 이치마츠의 가방을 받아들고 어깨에 멨다. 이치마츠는 아직도 빗질 자국이 남아있는 카라마츠의 뒤통수를 바라보다 손에 한참동안 쥐고 있던 열쇠를 집어던졌다. 열쇠는 카라마츠의 오른쪽 어깨에 맞고 툭 떨어졌다. 카라마츠는 놀라 뒤를 돌아보곤 바닥에 떨어진 열쇠를 집어 들어 교복 재킷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신발 신는 거 도와줄까?”

카라마츠가 현관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내밀었다. 괜히 싫은 생각이 들어 이치마츠는 신경질을 낼까 하다가 접고 순순히 바닥에 앉아 발을 내밀었다. 남자애 여섯이 사는 집의 신발장은 아무리 정리를 한다 하더라도 정신이 없다. 하지만 카라마츠는 그 신발 무더기에서 단번에 이치마츠의 신발을 골라내 조심스럽게 이치마츠의 발에 신발을 신겼다. 신발 뒤축을 정리한다고 카라마츠의 긴 손가락이 이치마츠의 발뒤꿈치를 스쳤다. 이치마츠는 잠깐 숨을 멈췄다가, 카라마츠가 손을 놓자 신발장을 붙잡고 일어나 현관으로 내려왔다.

그럼 가서 자전거 꺼내올게.”

카라마츠가 먼저 현관을 나섰다. 카라마츠가 문 밖으로 나가는 걸 보고 나서야 이치마츠는 참았던 숨을 휴, 하고 내쉬었다.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나랑 완전히 똑같을 저 손가락이, 저 등이, 저 어깨가 신경 쓰였다.

 

카라마츠가 자전거 경적을 울렸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자 찬바람이 훅 불어왔다. 이치마츠가 집 안과 밖의 온도 차이에 굳어있자 카라마츠가 자전거 바구니에 가방 두 개를 쑤셔 넣고 이치마츠에게 고갯짓을 했다.

지각하기 전에 얼른! 시간은 우릴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입만 다물면 참 좋을 텐데. 이치마츠는 절뚝거리며 자전거 뒷자리에 앉았다. 눈앞에 카라마츠의 넓은 등이 있었다.

이치마츠, 허리 붙잡아야지.”

카라마츠가 페달에 발을 올리고 말했다. 이치마츠는 천천히 양 팔을 내밀어 카라마츠의 허리를 감아 안고, 손에 깍지를 꼈다. 얇은 교복 셔츠와 재킷 너머로 납작한 카라마츠의 배가 만져졌다. 카라마츠가 숨을 쉴 때마다 배가 조금씩 움직였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만 손가락을 살짝 세워 손가락 끝으로 배를 덧그렸다.

꼭 잡았지? 그럼 간다!”

카라마츠가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아무리 카라마츠가 앞에 앉아 찬바람을 막아준다고 하더라도 둘은 키 차이가 나질 않아 팔 틈새로, 귀 너머로 바람이 휙휙 스치고 지나갔다. 이치마츠는 고개를 잔뜩 웅크리고 카라마츠의 등 뒤에 숨었다. 혼자면 모를까 이치마츠를 뒤에 매달고 있어서 그런지 카라마츠의 숨이 조금씩 빨라졌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등에 이마를 살짝 기댔다가 곧 한쪽 뺨을 갖다 댔다. 그 등이 따뜻해서, 이치마츠는 팔에 더 힘을 줘 카라마츠를 끌어안았다

저기 정문 보이네. 다 왔어, 이치마츠. 교실까지 가방 들어다줄까?”

학교 가는 길은 너무 짧았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등에 이마를 댄 채로 고개를 저었다.

정말? 그럼 있다가 수업 끝나고 데리러 갈까?”

나 죽을 병 걸린 거 아니거든. 그냥 신발장 앞에서 기다려.”

카라마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전거가 멈췄다. 자전거가 옆으로 조금 기울었고, 카라마츠가 한쪽 발을 땅에 딛고 자전거를 단단히 잡았다. 내려야겠지. 이치마츠는 손에 깍지를 풀었다. 팔 안에 가득 찼던 카라마츠를 놓는 게 아쉬웠다. 불편한 자세로 웅크리고 있어 뻣뻣하게 굳은 목을 풀고 자전거에서 내리자 카라마츠가 다시 자전거 페달에 발을 올리고 이치마츠를 향해 씩 웃어보였다. 카라마츠의 양 뺨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카라마츠는 바구니에서 이치마츠의 가방을 꺼내서 건네주었다.

그럼 있다가 학교 끝나고 보자!”

카라마츠가 손을 흔들고 자전거 핸들을 돌렸다. 이치마츠는 가방을 꼭 카라마츠의 허리처럼 품에 끌어안고 카라마츠가 다시 운동장을 가로질러 정문 경비실 옆에 있는 자전거 보관소로 가는 걸 바라보았다. 그들이 다니는 고등학교는 유달리 정문과 본관 사이의 거리가 멀었다.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아침 조회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카라마츠는 저기에 자전거를 묶어놓고 이 넓은 운동장을 뛰어 오겠지. 카라마츠가 경비 아저씨에게 인사를 하고 자전거에서 내리는 게 보였다. 카라마츠를 기다릴까. 지각이라고 소리치는 학생들이 이치마츠의 곁을 빠르게 스치고 달려갔다. 여기서 카라마츠를 기다린다고? 카라마츠가 왜 기다렸냐고 물어보면 무슨 핑계를 대려고? 카라마츠가 자전거를 묶어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치마츠는 황급히 몸을 돌려 신발장으로 걸어가 재빨리 신발을 실내화로 갈아 신고 계단을 올라갔다. 마음이 급해 다리가 불편한 줄도 몰랐다. 내가 왜 기다리려고 했지? 이치마츠는 교실 뒷문을 열면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답을 알 것 같기도 했고, 모르고 싶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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