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외로 여섯 살이라는 나이 차이는 꽤 컸던 모양이다. 카라마츠는 집 앞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의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카라마츠는 쥬시마츠와 함께 살기 전까진 자기 방에 불이 켜져있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어려서 아버지가 어머니와 이혼을 하고 아버지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을 모두 연구에 쏟아 붓는 동안 카라마츠는 혼자서 자랐다. 어두운 집으로 들어가서 불을 켜는 건 일상이었고, 슬프다거나 외롭다거나 할 때는 이미 지난 지 오래였다. 카라마츠는 한숨을 푹 쉬고 현관문을 잡았다. 누군가 집 안에서 달리는 소리가 들렸고, 문이 벌컥 열렸다. 카라마츠는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던 걸 단숨에 풀고 씨익 웃어보였다.

카라마츠 형!”

쥬시마츠가 달려들어 품에 안겼다. 쥬시마츠는 한참 성장기라 그런지 하루가 다르게 자랐고, 그들이 함께 살기 시작한지 반년이 다 되어가자 어느새 카라마츠의 키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자랐다. 그만큼 무거워지기도 했다. 카라마츠는 휘청거리다 겨우 쥬시마츠를 붙잡고 손에 들려있던 아이스크림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쥬시마츠는 카라마츠를 놓고 곧바로 카라마츠의 손을 확인하더니 아이스크림을 집어 들고 부엌으로 달려갔다. 카라마츠는 쥬시마츠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쥬시마츠가 소리를 질렀다.

! 아이스크림 지금 먹어도 돼?”

그래! 잠깐만, 옷만 갈아입고!”

카라마츠도 큰 소리로 대답을 하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소리가 나지 않게 조용히 문고리를 돌려 문을 잠갔다. 처음엔 그저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카라마츠는 혼자서 살던 버릇처럼 문을 열어놓고 지냈지만 언제부턴가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 그의 물건을 하나하나 만졌던 것 같았고, 그의 옷이, 심지어 속옷이 한두 벌씩 없어지곤 했다. 새어머니는 카라마츠를 어려워했다. 카라마츠를 부를 때도 문 앞에서 이야기를 마쳤고, 청소도 카라마츠가 직접 한다는 얘길 아버지에게 전해 들었는지 따로 건드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원래 카라마츠의 물건에 관심이 없었고.

남은 건 쥬시마츠뿐이다. 카라마츠는 실내복으로 갈아입다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문을 보았다. 카라마츠는 외동으로 이십여 년을 살다 갑작스럽게 동생이 생긴다는 얘기를 듣고 걱정하고 있었다. 그의 친구들은 고등학교 1학년이면 한창 사춘기일 때이고, 낯선 아저씨가 형노릇을 하겠다고 덤비면 자다가 칼을 맞을 거라고 겁을 줬다. 하지만 쥬시마츠는 처음부터 카라마츠의 손을 피하지 않았고, 카라마츠가 무슨 말을 하든 생긋생긋 웃으며 따랐다. 카라마츠도 그다지 말이 많은 편이 아니라 친해질 수 있을까 하고 걱정했는데, 쥬시마츠는 카라마츠가 돌아오면 그를 붙잡고 학교에서 있었던 얘기를 늘어놓았다. 카라마츠가 다녔던 고등학교를 다니는 만큼 제법 말도 통했고, 쥬시마츠는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르게 애교도 부렸고 카라마츠에게 애정 표현도 잘 했다. 동생이 생겨도 나쁘진 않구나. 카라마츠는 안심했다. 쥬시마츠가 카라마츠의 물건들에 관심을 갖는 건 그저 호기심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물건을 건드리지 말라고 얘기하면 사이가 어색해질 것 같아 그의 물건들을 나눠주면 쥬시마츠가 그의 의도를 알아차릴 거리고 믿었는데, 쥬시마츠는 멈추질 않았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 말자. 카라마츠는 아주 미묘하게 조금씩 위치가 바뀐 물건들을 바라보다 실내복을 마저 입고 벗은 옷을 들고 나왔다. 새어머니는 아직 오시지 않은 것 같았다. 카라마츠는 깜빡하고 잠금장치가 된 그대로 문을 열었다. , 하고 잠겼던 문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던 소리가 멈췄다가, 쥬시마츠가 고개를 불쑥 내밀고 카라마츠를 불렀다.

! 아이스크림에 초코 시럽 뿌려서 먹어볼까?”

못 들은 건가? 카라마츠는 안심하고 벗은 옷을 세탁바구니에 넣고 부엌으로 들어왔다.

그러다 이 썩는다? 고등학생인데 충치 생기면 쪽팔릴 거야.”

카라마츠가 쥬시마츠의 머리를 헝클어뜨리자 쥬시마츠가 배시시 웃으며 아이스크림을 크게 한 스쿱 덜었다. 아주 잠깐, 카라마츠는 쥬시마츠가 욕실 쪽을 향해 시선을 돌린 것을 본 것 같았다.

야구부는 어때?”

카라마츠가 먼저 말을 꺼냈다. 쥬시마츠는 아이스크림을 입에 가득 넣고 녹여먹다 머리가 아픈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고 있었다.

급하게 먹지 말라니까. 매번 아이스크림 먹을 때마다 그러네.”

쥬시마츠는 울상을 지으며 한참 미간을 찌푸리다 간신히 표정을 풀고 아이스크림을 더 덜어 그릇에 담았다.

야구부 코치님도 좋고, 같이 하는 친구들도 다 좋아! 그리고 방학하자마자 합숙 간다는데, 많이 힘들까?”

카라마츠는 비록 야구부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의 친구들 중 하나는 붙어서 3년 내내 카라마츠를 약 올리며 열심히 부활동을 했었다. 그 친구가 합숙을 가긴 갔었던 것 같은데, 재밌다고 했었나, 아님 힘들었다고 했었나.......

다른 건 모르겠고, 친구가 엄청 까맣게 타서 왔었어.”

카라마츠가 웃으며 아이스크림을 한 스푼 떠서 입에 넣었다. 쥬시마츠는 카라마츠를 빤히 바라보다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까만 게 좋을까?”

, 요샌 일부러 태닝도 많이 하니까? 하얗기만 한 것 보다는 건강해보이겠지?”

좋아하는 여학생이라도 생긴 건가? 카라마츠는 자신의 고등학교 생활을 떠올려보고 피식 웃었다.

공학이었으면 예쁜 여학생이 매니저 해줬을 텐데, 아쉽겠네?”

아니, 안 그래.”

쥬시마츠가 딱 잘라서 대답하고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의외였다. 이미 좋아하는 상대가 있으니 매니저 같은 건 상관없다는 건가? 카라마츠는 곰곰이 주변에 있는 다른 학교들을 떠올려보았다. 여고도 하나 있었고, 공학도 하나 있었다. 꼭 학생이 아닐 수도 있지. 카라마츠는 잠깐 고민하다가 스푼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카라마츠는 방으로 돌아가 지갑을 꺼냈다. 새어머니나 아버지가 용돈을 챙겨주는 것 같았지만 카라마츠도 용돈을 좀 쥐어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돈 문제로 쩔쩔매는 건 영 보기 싫으니까. 지갑을 들고 돌아오니 쥬시마츠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재채기라도 했나? 카라마츠는 자리에 앉아 지갑을 열었다. 그리곤 지폐 몇 장을 꺼내 쥬시마츠에게 내밀었다.

청춘도 잠깐이야. 여자 친구 생기면 맛있는 것도 사주고 그래야 돼.”

여자 친구 없는데.......”

쥬시마츠가 말끝을 흐리다 고개를 들었다. 고백하기 전인가? 카라마츠는 쥬시마츠를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았다. 아직 귀여운 얼굴이긴 하지만 어린 티도 많이 벗었고, 면도도 하기 시작했다. 야구부 활동을 열심히 하더니 키도 크고 어깨도 더 넓어진 것 같았고. 카라마츠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혹시 모르는 거야. 일단 받아.”

쥬시마츠는 입을 꾹 다물고 카라마츠가 내민 돈을 빤히 바라보다 받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감사합니다.”

내가 괜한 짓을 했나? 생각해보면 사춘기 남자애고, 이렇게 돈 받는 게 자존심이 상한다던가... 하지만 쥬시마츠는 곧 웃으며 아이스크림을 마저 퍼서 먹었다. 슬쩍 보니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가장 큰 통으로 사온걸 벌써 반은 되게 먹은 것 같았다. 이렇게 먹고 또 쑥쑥 크겠지. 카라마츠는 쥬시마츠가 자기보다 커져버리면 자존심이 좀 상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더 안 먹어?”

이제 씻고 공부해야지. 다 먹고 나서 뚜껑 꼭 닫아서 냉동실에 넣어놔.”

쥬시마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라마츠는 빈 그릇과 스푼을 싱크대에 가져다 놓고 욕실로 들어갔다. 카라마츠가 가려는 대학원엔 아버지와 친한 분들이 많았다. 특혜를 받을 수 있다면 받는 게 좋긴 하겠지만, 아버지의 체면을 생각하면 공부를 게을리 할 수가 없었다. 카라마츠는 뜨거운 물을 한참 맞고 있다가 쥬시마츠 생각을 했다. 쥬시마츠는 성적이 나쁜 편도 아니었고, 머리도 꽤 좋은 것 같았다. 저번에 얘기했을 땐 대학을 가면 좋겠다고 생각만 하고 있었지 집안 사정을 생각해서 포기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젠 사정이 다르다. 친 아들은 아니지만 쥬시마츠도 아버지의 아들이었고, 아버지는 웬만하면 쥬시마츠도 대학에 보내고 싶어 할 것이다. 카라마츠만큼 좋은 대학에 가진 못하더라도 어디 가서 부끄럽진 않을 정도로. 쥬시마츠가 3학년이 되어 본격적으로 수험을 준비할 때가 되면 카라마츠는 이미 출국해 이 집에 없을 것이다. 카라마츠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면서 그 전까지 쥬시마츠에게 공부를 가르쳐야겠다고 결심했다.

카라마츠는 목욕가운을 두르고 나왔다. 부엌에는 불이 꺼져있었다. 아마 쥬시마츠도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방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러다 배탈 날라. 카라마츠는 쥬시마츠의 방문을 슬쩍 돌아보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조용히 방문을 돌려 잠갔다. 카라마츠는 잠깐 거울을 보면서 보습제를 바르고 서랍에서 속옷을 꺼냈다.

그때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카라마츠는 깜짝 놀라 반쯤 푼 목욕가운 끈을 다시 고쳐 묶고 고개를 돌렸다. 카라마츠의 이불이 둥그렇게 위로 튀어나와 있었다. 그리곤 쥬시마츠가 얼굴을 빼꼼 내밀어 카라마츠를 보고 웃었다.

쥬시마츠, 안자고 뭐해?”

카라마츠는 무심결에 조금 날카로운 목소리로 묻고 후회했다. 쥬시마츠는 카라마츠의 손에 속옷이 들린걸 보고 앗! 하면서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얼른 입어!”

카라마츠는 주섬주섬 속옷을 입고 가운을 벗어 옆 옷장 문고리에 가운을 걸었다. 쥬시마츠가 다시 고개를 내밀고 카라마츠가 옷을 입는 걸 보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잠옷을 꺼내 바지부터 입었다. 쥬시마츠의 시선이 느껴졌다. 끈적끈적하다고 하기 보단 뜨겁고, 따끔거렸다. 카라마츠의 문 틈 사이로 느껴지던 그 시선. 카라마츠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상의 단추까지 다 잠그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쥬시마츠가 이불 밑에서 꼼지락거리다 카라마츠 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카라마츠를 올려다보았다. 자기 방으로 돌아가라고 해야지. 어떻게 말을 꺼내지? 하지만 쥬시마츠가 조금 더 빨랐다.

나 혼자서 공부하면 금방 졸리니까, 형 방에서 하면 안 될까? 조용히 할게.”

공부를 하겠다는데 어떻게 말리겠어. 카라마츠는 어쩔 수 없이 책상 한쪽을 치워주었다.

그럼 보조 의자 좀 가져올래? 여기 옆에 앉아서 해.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고.”

하지만 쥬시마츠는 이불 밑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머뭇거리다 이불 바깥으로 발 한쪽을 내밀어보였다. 카라마츠는 새삼 쥬시마츠의 발이 자기 발과 크기가 비슷하거나, 혹은 조금 더 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 한참 숨어있었더니 발이 저려. 형이 갖다 주면 안 될까? 보조의자가 어디있는지도 모르겠어.”

그러고 보니 쥬시마츠가 이 집으로 오고 보조의자를 쓴 적이 없었다.

그래. 저린 거 풀리면 가서 책도 가져오고.”

카라마츠는 방문을 열고 나가 부엌에 딸린 세탁실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뒤에서 타다닥, 하고 뛰는 소리가 나더니, 쥬시마츠가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발 저린 게 이렇게 금방 풀린다고? 카라마츠는 화장실을 한번 돌아보고 다시 부엌으로 들어갔다

*강신재의 젊은 느티나무를 모티브로 작성한 글입니다.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멋 부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인만큼 향수도 여러 개를 사다가 기분 내키는 대로 뿌리는 것 같지만 그의 곁에서 가만히 숨을 쉬다 보면 그 노랗고 파란 향수 냄새는 어딘가로 사라져버리고 은은한 비누 냄새만 남아 코끝을 간질인다그와 나는 같은 비누를 쓰는 게 분명한데어째서인지 그에게서 나는 비누 냄새는 더 청량하고 상큼하게 느껴진다아마도 그의 체향일지도 모른다고나는 멋대로 추측하고 있었다.

쥬시마츠시작한지 얼마나 됐다고 딴생각이야?”

바로 곁에 그의 동맥이 뛰고 있는 하얗고 긴 목이 있다그 말랑해 보이는 목에 코를 박고 한참 비누냄새를 맡는 상상을 하다 고개를 들었다그가 웃으면서 내 이마를 샤프로 쿡 찍고 옆에 있던 컵을 들어 물을 마셨다나는 이마가 아픈 척 웃으며 이마를 문지르면서도 그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데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내가 당신의 친동생이었다면나도 여섯 살을 더 먹으면 당신처럼 섹시해질 수 있을까요나는 입술만 뻐끔거리며 뾰족뾰족하고 자극적인 말을 입안에서 굴렸다달고시고씁쓰름한 불량식품 맛이 났다.

 

그를 처음 만난 곳은 어머니의 결혼식장이었다아저씨는 나와 처음 만난 날부터 그를 소개하지 못해 미안해했다.

미리 만나서 인사도 하고 친해지는 게 좋을 텐데 카라마츠가 아직 학기가 다 안 끝났다고 못 온다고 하네미안하다.”

나는 착한 아들의 표정을 짓고 고개를 저었다카라마츠가 오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어머니의 얼굴에 어둠이 옅게 깔렸다어머니는 카라마츠가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애써 칭찬을 하려고 했지만 카라마츠가 어머니를 만나는 걸 거부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가엾은 어머니나는 한번 만나보지도 않은 형이 미워졌다아무리 공부를 하고 있어도 어머니에게 전화라도 하는 게 예의 아닌가요즘 세상에 외국이라고 연락이 안 되는 것도 아니고그런 아들을 둔 아저씨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버지가 죽고 난 이후로 나는 지나치게 어머니를 보호하려고 하고 있었다그건 머리로는 이해를 하고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만 하려고 한다 해도 그만둘 수 있는 게 아니었다나는 난생처음 와인을 맛보고 인상을 찌푸렸다포도 쥬스 같은 색깔을 해놓고 떫은맛이 났다아저씨는 어머니에게 먹을 걸 이것저것 권해가며 나에게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얼마든지 더 시켜도 좋다고 어색하게 웃었다아저씨는 좋은 남편이 될 수 있을까나는 다시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떫은맛은 가시질 않았다.그렇지만 아저씨에게 와인도 마시지 못하는 어린애처럼 보이고 싶진 않았다.

어머니는 나에게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워주고 싶다고 했지만 나에겐 아버지는 공석도 남기지 못하고 그 자리를 완전히 잃어버렸다나에게 아버지란툭하면 집을 나가 며칠이고 떠돌다 거지꼴이 되어 돌아오는 남자였고술을 마시면 집안을 엉망으로 뒤집어놓는 남자였다없는 게 좋았고없는 게 익숙한 아버지의 자리그리고 초등학생이면 모를까고등학교 신입생으로 들어가는 소년에게 진짜 남자로서의 롤모델은 꼭 집안에서 찾아야 하는 게 아니니까나는 간신히 와인 한 잔을 다 비웠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이었다나는 몸에 딱 맞는 정장이 어색해 넥타이를 조금 풀었다어머니는 둘 다 재혼인 만큼 결혼식은 하지 않고 그저 혼인신고만 하겠다고 했지만 아저씨가 고집을 부려 간단한 결혼식을 하게 되었다나는 그 편이 좋았다어느 날 갑자기 입적을 했다고 주변사람에게 알리는 것보다 당당하게 결혼식을 하면서 알리는 게 좋았으니까세간의 암묵적인 룰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았다어머니가 예쁜 옷을 입고 가족들을-우리 쪽의 가족들은 얼마 없지만모아놓고 어머니가 이렇게 사랑받는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어머니가 신부 대기실에 앉아있는 동안 나는 친척들과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구석에 앉아있었다피아노 앞엔 아저씨의 친척인듯한 여자가 앉아 손을 풀고 있었고나는 어젯밤 본 야구 경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비누 냄새가 났다그리고 찬바람에 하얗게 마른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네가 쥬시마츠구나?”

남자가 웃었다남자는 뛰어왔는지 머리가 바람에 흐트러져서 엉망이었고어깨에 아직도 눈이 조금 남아 있었다나는 얼떨결에 그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남자의 손이 차가웠다길쭉하고 가지런한 손가락이 손바닥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남자에게선 시원한 향수 냄새가 났다.

지금 돌아오느라 늦었어결혼 준비하는 거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제야 존재조차 까먹고 있었던 아저씨의 아들이 떠올랐다.

이제 고등학교 들어간다고 했나내가 형이었지?”

남자가 웃으면서 내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나는 그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가 머리를 만지는 대로 가만히 내버려두었다괜히 웃음이 나왔다.

 

어머니와 아저씨는 짧은 신혼여행을 떠났다나는 공항까지 따라가서 그들을 배웅했다어머니는 새 옷을 곱게 차려입고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형 말 잘 듣고 있어야 돼?”

나는 활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옆에서 그도 손을 흔들며 웃었다아저씨는 선물을 사오겠다고 하며 어머니의 손을 잡아끌었다어머니는 계속해서 나와 카라마츠를 돌아보았다어머니와 아저씨가 자동문 너머로 사라지고나는 이제 그와 단 둘이 남았다는 걸 깨달았다슬쩍 그를 돌아보니 그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다.

배고프지뭐 좀 먹을까뭐 좋아해?”

아무거나 잘 먹어요.”

나는 예의바르게 대답했다사실 아무거나 다 먹는다는 건 거짓말이었지만 음식을 가린다는 유치한 꼴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그는 잠깐 고민을 하다 근처 패스트푸드점으로 향했다.

일곱 살 때?”

그래서 그런지 어머니는 저를 장례식에도 데려가지 않고 옆집에 맡겨놨어요다 끝나고 홀가분해져서 데리러오겠다고 약속하고.”

나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틈 사이에서 그에게 아버지가 죽었을 때 얘기를 하고 있었다그와 이렇게 길게 얘기를 해본 건 처음이었고누군가에게 아버지의 무책임한 인생에 대해 애기하는 것도 처음이었다누군가 엿듣고 있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안심한 것도 있을 것이다우리가 앉은 테이블의 양 옆만 봐도 금발에 푸른 눈을 한 외국인들이 앉아있었으니까그는 두 번째 햄버거를 남김없이 먹어치우고 너겟을 먹기 시작했다나는 반쯤 먹은 햄버거를 들고 그가 또 뭔가를 물어봐주길 기대했다그와 얘기를 하겠다고 아버지를 팔아넘기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그가 동정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봐주는 게 좋았다그리고 아버지는 그 따뜻한 미소에 비교도 못할 정도로 값싼 인물이었고.

어머니께 섭섭하진 않았고?”

그의 낮은 목소리가 내 귀로 흘러들어왔다어머니가 아버지의 장례식에 나를 데려가지 않았다고 내가 섭섭했을 것이라고 해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나는 한참동안 얘기를 한다고 마른입에 콜라를 가득 머금었다가 꿀꺽 마셨다나는 혹시 내가 너무 어리광을 부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가만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진심인 것 같았다진심으로 일곱 살도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할 수 있고어머니를 위로하고 힘이 되어주고 싶어 한다는 걸 믿는 것 같아서나는 계속해서 콜라를 마셨다입이 자꾸 말랐다그의 짙고 까맣게 맑은 눈을 계속 보고 싶으면서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아닌 사람과 단 둘이 집에 남아 있다는 건 이상한 기분이었다그는 내가 어색해하는 걸 느꼈는지 아침에 같이 아침식사를 하고는 나갔다가 이른 저녁에 돌아왔다나는 현관에서 그를 배웅하고 나면 그의 방에 몰래 들어가 구경을 했다책장에는 남성 패션잡지가 한가득 꽂혀있었고어려워보이는 대학 교재들이 그보다 더 많이 꽂혀있었다세수를 하고 바르는 스킨로션도 있었고화려하고 조그만 향수들도 가지런히 놓여있었다나는 하나씩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았다그러나 그에게서 나는 비누냄새와 같은 향수는 없었다그런 비누냄새가 나는 향수가 있으면 하나 갖고 싶었는데나는 아쉬워하며 향수 뚜껑을 닫았다고등학생은 향수를 뿌리기엔 아직 어리다.그렇지만 나중에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스무 살이 되고아마도 그가 다니는 대학에 진학한다면 향수를 뿌려도 어색하지 않겠지나는 그가 나에게서 그와 같은 비누냄새를 맡는 걸 상상했다내가 그를 설레게 할 수 있을까나는 소리 나지 않게 옷장을 조심스럽게 열어 그의 옷 사이에 파묻혀 그의 냄새를 맡았다그가 나를 보면서 설렜으면 좋겠다고소원을 빌었다그의 검은 가죽 재킷과 트렌치코트와 후드에 나를 보고 나를 궁금해해달라고 속삭였다.

 

그는 집에 오면서 꼭 간식거리를 사들고 왔다나는 그의 방에서 한참을 놀다가 그가 올 시간이 되면 방을 정리해두고 거실에 나가 티비를 켜서 보고 있었던 척을 했다.그가 현관문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면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다이상한거야나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의 존재에 흔들리는 걸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쥬시마츠형 왔다!”

그는 평생 외동으로 자랐으면서 형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하고 있었다나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그의 존재를 알아챈 것처럼 웃으며 현관으로 달려가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셨어요?”

쥬시마츠말 놓으라니까?”

그가 웃으며 고개를 젓고는 손에 들려있던 케익 상자를 내밀었다유명한 체인점의 그것이 아니라 내가 들어본 적이 없는아마도 비쌀 게 분명한 제과점의 케익이었다.

저녁 먹고 디저트로 먹자!”

그는 겉옷을 벗으며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나는 케익을 식탁위에 올려놓고 발소리가 나지 않게 조용히 그의 방 문 앞으로 걸어갔다조금 열린 틈으로 그가 보였다그는 옷장을 열어 옷걸이를 꺼내 가디건을 옷장 문고리에 걸었다그리곤 내가 의미를 읽어낼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옷장 안을 한번 훑어보고그의 방을 쭉 돌아보았다나는 미친 듯이 뛰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꾹 누르며 숨을 참았다.

그러나 내가 그 짧은 찰나에 상상했던 최악의 경우와는 달리 그는 문을 등지고 돌아서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나는 몸을 돌려 부엌으로 돌아갔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나와 앞치마를 두르고 소매를 걷었다나는 착하게 웃으면서 그가 요리를 하는 걸 거들었다그는 그가 다녔던 외국대학 얘기를 해줬고,거기서 만났던 특이한 사람들 얘기를 했다나는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지만 그는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나는 조금 마음이 놓여 계란을 휘저으며 대학을 다닌다는 건그것도 외국에 있는 대학에 간다는 건 무슨 기분일지 상상했다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내가 모국어로 무슨 말을 하더라도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쥬시마츠는 전공으로 생각해둔 거 있어?”

그가 내 손에서 계란 그릇을 빼앗아가 팬에 부으며 말했다.

글쎄요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나는 사실 대학에 갈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어머니 혼자 일을 해서 나를 먹여 살리는데 어떻게 대학까지 보내달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그는 의외라는 눈빛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중에 결정하면 늦으니까 미리 진로를 생각해보는 게 좋아.”

“...형은 무슨 과에요?”

나는 경영학과.”

그럼 나도 경영학과로 가고 싶어요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와 저녁을 먹고설거지를 하고 케익을 잘라 접시에 담았다그는 씁쓸한 커피도 두 잔 내려 쟁반에 담았다.

쥬시마츠는 우유랑 설탕 넣어줄까?”

그냥도 괜찮아요.”

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그는 웃으면서 쟁반을 들고 그의 방으로 향했다나는 당연히 거실로 가서 먹거나 아니면 식탁에서 먹을 줄 알았는데혹시 나를 혼내려는 건가나는 쟁반을 대신 들 생각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그를 따라 들어갔다.

그는 책상위에 쟁반을 내려놓고 침대에 털썩 앉았다그리곤 향수를 쭉 훑다가 하나를 집어 들어 뚜껑을 열었다역시 내가 건드린 걸 안 건가나는 애써 웃으려고 했지만 입가가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게 제일 새 거니까 선물로 줄게향도 무겁지 않고 가벼우니까 몰래몰래 뿌리고 다녀.”

그의 커다란 손이 내 손목을 붙잡고 소매를 조금 걷어 올렸다그리곤 향수를 한번 뿌리고반대쪽 손목을 들어 맞대고 문질렀다상큼한 향이 났다그가 내 손목을 잡아 코끝에 대고 향을 한번 맡고 웃었다그의 입이 시원하게 호선을 그리며 웃었고 나는 그제야 그를 따라서 웃을 수가 있었다나도 손목을 들어 향을 맡았다꽃향기같은 게 났다그에게는 너무 가벼운 향이었고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향이었다그렇지만 나는 한참동안 손목을 코끝에 대고 향을 맡았다이 향수 냄새 밑에 그의 체향이 티끌만큼이라도 남아있을 것 같았다.

그는 꼭 태어날 때부터 형 노릇을 했던 것처럼 나를 앉혀놓고 그의 소지품을 하나둘씩 꺼내서 보여주며 그 중에서 제일 좋고 제일 새것인 것을 하나씩 꺼내 품에 안겨주었다그는 좋아하는 스타일의 사진을 보면 스크랩해서 모아두고 있었다취미로는 기타를 쳤고학교를 다닐 땐 야구부에 들고 싶었지만 선발테스트에서 떨어졌다고 했다그는 외국에서 가져온 조그만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 주었고 가방도 외투도 꺼내주면서 얘기를 했다형은 이런 건가.

나는 밤 열두시가 다 되어가도록 그와 웃고 떠들고 보드게임을 하다 그가 준 물건들을 한아름 끌어안고 방으로 돌아갔다부엌에서 그가 달그락거리며 설거지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아저씨가 교수로 있는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외국에는 교환학생으로 다녀왔고대학을 마치면 그 곳의 대학원으로 진학하겠다고 했다나는 그가 다녔던 고등학교에 들어갔다학교는 시골학교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넓고 세련된 곳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입학식까지 부모가 따라올 필요는 없다고 두 사람을 뜯어말렸다어머니는 꽤 서운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이제 어머니로부터 독립을 해야 된다고 느꼈기에그리고 아저씨가 그의 아들이 입었던 교복을 입은 날 보며 그의 사랑스러운 막내아들이라고 감상 젖은 눈으로 바라보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가 오겠다고 하는 것까지 말릴 수는 없었다나는 입학식 연습을 해야 된다고 모인 강당에서 탈출해 학교 정문에 서서 그가 오는 걸 기다렸다정문에서 저 멀리 지하철역까지 길이 뻥 뚫려있었고그 길을 따라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입학식 하는 날에 이렇게 빠져버리면 담임에게 찍힐게 분명했지만 나는 그가 그 꽃길을 걸어 나에게 오는 걸 보고 싶었다입학식을 하는 날이라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나는 이리저리 치이면서도 고개를 쭉 내밀고 그를 찾았다입학식이 시작할 시간이 다 되어가고사람들이 점점 줄어들었지만 그는 올 기미가 없어보였다나는 어제 어머니가 빳빳하게 다려준 교복 상의의 끝을 잡고 손을 꿈지럭거렸다안에 들어가 있으면 그가 나를 찾으러 올까하지만 나는 그에게 몇 반인지 가르쳐주질 않았고핸드폰으로 전화를 한다고 해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 틈에서 나를 찾는 건 쉽지가 않을 것이다그래도 만나기만 하면 되지 않을까그리고 나중에라도 그에게 다시 학교로 와달라고 하면 이 길을 걸어올 테니까.

단념하고 돌아서려는 찰나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저만치 멀리서 들려오는 발소리였지만 나는 귀신같이 알아듣고 고개를 들었다.

쥬시마츠!”

그가 달려오고 있었다품에는 커다란 프리지아 꽃다발을 안고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꽃잎이 날리는 그 길에 그가 있었다나는 정문을 꽉 붙잡고 그가 나에게 다가오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길쭉하게 큰 키와 긴 다리가 먼저 눈에 들어왔고아슬아슬하게 재킷에 매달린 선글라스가한 손으로 단단히 붙잡은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이 시간까지 기다린 날 보며 그가 놀랍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그의 짙은 눈썹이 보였고날카로운 코가 보였고 웃는 입이그리고 맑고 깊은 눈이 보였다아니보였다고 할 수 없다나는 그가 던지듯 품에 안겨준 프리지아의 향기를 맡으면서 그의 눈이 내 마음 어딘가에 깊이 새겨졌다고 생각했다죽을 때까지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거라고.

 

물은 삼일 만에 끊겼고전기는 사일을 버티다 끊겼다이치마츠와 카라마츠는 집밖으로 나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집안에 남은 음식들로 연명했다통조림이나 오래 먹을 수 있는 음식들보다 상하기 쉬운 것들을 먼저 먹었다물이 끊기고 나서는 생수를 목욕탕에 부어놓고 씻었지만 물은 금세 동났다지진이 난 것도 아니고 전쟁이 난 것도 아닌 조용한 도시에서 생존을 걱정하기 시작한다는 건 오묘한 기분이었다이치마츠와 카라마츠는 마지막 생수통을 탁탁 털어 마지막 물 한 방울까지 마시곤 햇볕에 잘 널었다비가 오면 빗물을 받아 수돗물 대신 쓸 수 있을 것이다이치마츠와 카라마츠는 이제 집 밖으로 나가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카라마츠는 쌍안경을 들고 발코니로 나가 한참 골목을 돌아보았다아무도 없었다이치마츠는 편한 옷을 챙겨 입고 커다란 배낭을 찾아 멨다카라마츠도 배낭을 찾아 메고 손수레를 집어 들었다가 아차하고 이치마츠에게 넘겨주었다.

?”

이치마츠가 운동화 끈을 단단히 조여 묶다가 물었다.

혹시 공격받을지도 모르니까?”

카라마츠는 쥬시마츠의 알루미늄 야구배트를 챙겼다그리고 잠깐 고민하는 것 같더니 부엌으로 가 식칼을 들고 현관으로 걸어왔다칼날이 번뜩거리는 걸 보고 이치마츠는 고개를 돌렸다카라마츠는 식칼을 허리춤에 어떻게 고정을 시키곤 이치마츠의 옆에 걸터앉아 신발을 신었다.

거리는 그들이 마지막으로 나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했다이치마츠는 배낭을 꽉 붙잡고 서서 카라마츠가 나오길 기다렸다가 카라마츠의 손을 잡았다집밖에서 다시 손을 잡고 있으려니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그들을 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카라마츠도 이치마츠의 손을 꼭 잡았다고양이도 없고참새도 없고심지어 쥐도 한 마리 보이지 않는 조용한 골목이었다.

둘은 슈퍼마켓을 향해 걸었다마시고 몸을 씻을 때 쓸 물을 좀 가져오고라면이니 통조림이니 하는 것들이 아닌 좀 신선한 것을 먹고 싶었다이치마츠는 아삭한 배의 식감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배가 있을까카라마츠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카라마츠도 먹는 걸 좋아했고마음이 급했겠지그러나 상가 골목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뭔가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둘은 나는 듯 빠르게 걸어가다 상가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기 전에 벽에 몸을 숨기고 조용히 골목을 내다보았다.

저번에 봤던 것보다 사람껍질을 한 것들의 수가 줄어있었다그리고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고이치마츠는 헛구역질이 나려는 것을 참고 입을 막았다저번에 보았을 때는 그 사람들이 느긋하게 드러누워 있거나 햇볕을 피해 숨어있었는데지금은 엉거주춤하게 골목을 배회하며 뭔가를 찾는 듯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뭘 찾는 거?”

카라마츠가 작게 속삭였다이치마츠는 고개를 더 내밀고 안쪽을 들여다보았다가게에 쌓여있던 과일이며 야채들의 찌꺼기가 길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다아마도 이 골목에 머무르는 무리들은 먹을 수 있는 것들을 모조리 먹어치우고 새 먹이를 찾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새 먹이는 뭘까이치마츠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사람이 사람의 생살을 뜯어먹을 수 있을까?”

이치마츠가 물었다카라마츠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 줄을 놓아버리면 못할 건 없지 않을까?”

다른 집을 털어볼까물이나 비상식량 같은 건 쌓아두고 있잖아보통.”

좁고 격리된 공간에서 공격당하는 것 보단 밖이 낫지.”

카라마츠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맞는 말이었다.

아니면 저 뒤쪽에 작은 슈퍼 쪽으로 가볼까?”

아냐발코니에서 봤을 때 거긴 셔터를 다 내려뒀더라고못 들어갈 거야.”

방법이 없었다이치마츠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구름 한  이 맑은 날이었다이 도시 어딘가에 이치마츠와 카라마츠 같은 조난자들이 남아 있을까?만약 혼자 남아있다면 이미 죽어버렸을까무섭고 외로워서 산체로 뜯어 먹히는 걸 선택했을까아니면 조용히 목을 맸을까카라마츠가 허리춤에서 식칼을 꺼내 이치마츠에게 건네주었다.

여차하면 눈 꼭 감고 찔러버려.”

이치마츠가 마른 침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카라마츠는 소매를 걷어 올리고 야구배트를 고쳐 쥐었카라마츠가 앞장서서 천천히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손수레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조용한 골목 안을 울렸다그 순간골목 안에 있던 것들이 전부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이치마츠는 놀라 헉하고 숨을 들이마셨다다들 이상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옷을 반쯤 벗은 사람도 있었고오물에 뒤덮인 것 같은 꼴을 한 사람도 있었다손 하나가 떨어져나가 허전한 팔을 휘두르며 어기적거리고 걷던 사람이 고개를 돌려 이치마츠와 카라마츠에게 한발자국 다가왔다.

그리고 카라마츠가 야구배트를 있는 힘껏 휘둘러 전봇대를 후려쳤다쇳덩이가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귀를 찔렀다손 엄청 아프겠는데소리에 놀랐는지 사람들이 뒷걸음질 치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카라마츠는 전봇대를 시작으로 마트 앞에 도착할 때까지 배트로 계속해서 큰 소리를 냈다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뒤에 바짝 달라붙어 그를 따라갔다.

마트 입구엔 쓰레기가 산처럼 쌓여있었다아마도 이치마츠는 저번에 편의점 안에서 봤던 사람들의 흔적을 떠올렸다봉투를 뜯는 법은 모르고 무작정 힘으로 봉투를 뜯어 안에 든 것들을 먹어치웠었지카라마츠는 먼저 마트 입구에 서서 숨을 가다듬더니 문 옆을 배트로 후려치며 요란하게 소리를 냈다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놀란 표정을 한 사람 몇이 마트 바깥으로 튀어나왔다그들이 이치마츠의 코앞을 스쳐지나가서 이치마츠는 놀라 뒷걸음질 치다 넘어졌다카라마츠도 뒤로 물러나 이치마츠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이렇게 가까이에서 그들을 본 건 처음이었다그들의 뒤로 퀴퀴한 냄새가 남았고팔에 소름이 돋았다.

칼 계속 들고 있어야 돼안 나온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

카라마츠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안으로 들어갔다이치마츠는 그들을 사람이라고 지칭하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마트 안에서 썩는 냄새가 났다이치마츠는 입으로 숨을 쉬려고 안간힘을 썼다그들과 비슷한 때에 전기가 끊겼다면 끊긴지 제법 오래되었을 거그러면 고기나 야채두부 같은 것들도 모조리 썩어버렸을 것이다카라마츠는 일단 라이터를 한 움큼 들어 주머니에 쑤셔 넣고 안으로 들어갔다예상대로 야채와 과일들은 썩어 문드러져있었다이치마츠는 상자채로 썩어버린 배 앞을 지나치지 못하다 카라마츠가 소매를 잡아끌어 겨우 발걸음을 옮겼다야채와 과일생선 코너는 황급히 지나쳤고그들은 라면과 국수레토르트 식품과 통조림을 배낭에 담았다손수레에는 물을 가득 실었다뭔가 다른 걸 먹고 싶었는데 선택의 폭이 너무 좁았다이치마츠는 낑낑거리며 손수레를 끌고 가다 마트 안쪽엔 창고가 있다는 게 떠올랐다.

마트 안쪽에 창고가 있어.”

창고?”

카라마츠가 독한 술을 집어 들면서 물었다.

거기에 다른 물건이 있을지도 몰라.”

카라마츠는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이미 그들의 배낭과 수레는 무거웠고들고 가기 힘들 정도로 물건을 많이 가지고 나가면 갑자기 공격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반격하기 힘들 것이다그렇지만 이치마츠는 창고 안쪽을 확인해보고 싶었다예전에 어머니를 따라 장을 보러 왔을 때 안에서 직원이 물건을 들고 나오는 걸 본적이 있었다아득하리만치 오래된 것처럼 느껴졌다창고는 손잡이를 아래로 내려 여는 문이었다저 사람은아니 짐승들은하여간에 저것들은 들어가지 못했을 것 같았다이치마츠는 손수레를 놓고 카라마츠를 향해 손짓했다카라마츠는 고개를 끄덕이고 맥주병 하나를 옆 기둥에 부딪쳐 깨뜨렸다파삭하는 소리가 나고 맥주가 줄줄 흘러나왔다.

터프하네.”

이치마츠가 자기도 모르게 웃으며 말했다카라마츠도 씩 웃으며 바닥이 깨져 뾰족하게 위협적인 무기가 된 맥주병을 칼처럼 휘둘러 보였다웃는 것도 간만이었다.

이치마츠는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내려 문을 열었다안에는 빛도 하나 없이 어두웠고카라마츠는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켰다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불꽃이 켜졌다.

그 순간캬아아악!!! 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고이치마츠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카라마츠가 먼저 손을 뻗었다라이터는 바닥에 떨어져 잠깐 타오르다 꺼졌다누가 새된 소리로 작게 신음소리를 흘렸고바닥으로 쓰러졌다.

카라마츠!”

이치마츠가 놀라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손으로 바닥을 더듬었다축축한 액체가 만져졌다설마설마 카라마츠가어둠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고이치마츠는 혹시 가까이서 보면 조금이라도 보일까 싶어 손을 앞으로 뻗었다그때이치마츠의 어깨에 무거운 손 하나가 얹어졌다.

가자.”

카라마츠의 목소리였다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카라마츠였다이치마츠는 왈칵 눈물이 날 것만 같아 카라마츠의 손을 붙잡았다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손을 잡아 창고 바깥으로 빠져나갔다카라마츠는 창고 문을 열고 이치마츠를 먼저 내보냈다이치마츠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다시 어둠속에 잠기는 창고 안쪽을 흘깃 보았다.작은 손이 보였다가창고 문 너머로 사라졌다.

카라마츠는 창고 바깥으로 나와 문을 닫고선 문에 기대 스르륵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카라마츠의 손에 피가 엉망으로 묻어있었다이치마츠는 자기도 모르게 카라마츠의 손을 붙잡았다카라마츠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이치마츠는 옷 상의로 카라마츠의 손에 묻은 피를 문질러 닦았다카라마츠의 피가 아니었다이치마츠는 배낭을 내려놓고 윗옷을 벗어 카라마츠의 얼굴과 목손에 튄 검붉은 핏방울을 닦아냈다손이 떨려 자꾸 옷을 놓쳤다카라마츠의 눈동자가 힘없이 이치마츠의 손을 따라 움직이다 이치마츠가 결국 옷을 떨어뜨리자 이치마츠의 손을 잡아 당겨 안았다카라마츠는 떨고 있었다이치마츠의 맨 목과 가슴에 카라마츠의 마른 숨이 닿았다울지는 않았지만 울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내가 창고에서 뭘 보고 싶어 했던 거지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어깨를 끌어안고 토닥거렸다창고 안에 뭐가 있을 거라고 기대한 거야?쓰레기새끼카라마츠의 옷 뒤쪽에 누군가 피 묻은 손으로 움켜잡은 흔적이 남아있었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윗옷을 벗겨 손에 둘둘 말았다그리고 카라마츠에게 손수레를 맡기고카라마츠가 했던 것처럼 야구배트로 전봇대 같은 곳을 후려치며 큰 소리를 냈다야구배트가 부딪칠 때마다 이치마츠의 팔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왔다카라마츠는 말없이 손수레를 끌고 따라왔다이치마츠는 차마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그저 손수레 바퀴가 구르는 소리를 듣고 카라마츠가 따라오고 있음을 짐작했을 뿐.

 

이치마츠는 뒷마당 한 구석을 파 안에 말라죽은 나뭇가지를 좀 뜯어 넣고 불을 붙였다불이 적당히 타기 시작하자 냄비에 쌀과 물을 넣어 구덩이 위에 얹었다.

카라마츠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물을 한 병 들고 욕실로 들어가더니 나올 생각을 하질 않았다이치마츠는 욕실 문 앞에 앉아 카라마츠가 나오길 기다리다 가져온 물건들을 정리해 부엌 한 구석에 쌓았다그리고 카라마츠가 벗어서 밖에 내놓은 옷에 핏자국이 있는지 꼼꼼히 살펴보고핏자국을 발견하면 칼로 긁어냈다까맣게 말라붙은 핏자국을 긁어내면서이치마츠는 지금 그가 칼로 긁고 있는 것이 자신의 목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이치마츠와 카라마츠만 세상에 남은 이후로 처음 느끼는 자기혐오였다.

쌀은 밥보다는 미음 같은 것이 되었다이치마츠는 그래도 그걸 그릇에 덜고구덩이의 잔열로 레토르트 카레를 데웠다뜨뜻미지근한 온도에서 더 데워지질 않아 포기하고 그릇에 담았다카라마츠는 여전히 욕실에서 나오지 않았다이치마츠는 커다란 타월과 카라마츠의 속옷그리고 얇은 옷을 가지고 나와 문을 두드렸다.

카라마츠.”

“....”

카라마츠도 문 앞에 기대있었는지 바로 앞에서 대답이 들렸다.

밥 먹자.”

.”

문이 천천히 열렸다카라마츠는 욕실 창문의 블라인드도 다 내리고 어두컴컴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있었던 것 같았다몸이 차게 식어있었다이치마츠는 타월을 펼쳐 카라마츠를 감싸고대충 얼굴과 머리의 물기를 닦아내고 속옷을 내밀었다카라마츠는 얌전히 이치마츠가 시키는 대로 옷을 입었다.

 

꾸역꾸역 밥을 먹고 카라마츠는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둘만 남게 된 이후로 처음으로 카라마츠가 먼저 떨어져 있으려고 하는 것이었다이치마츠는 거실에 앉아 습관처럼 티비를 켜려고 리모컨을 들었다그러나 티비는 켜지지 않았고거실 베란다에 조금 열린 틈으로 작게 바람이 불어와 이치마츠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평소와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오후였다이치마츠는 어서 밤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카라마츠가 얼른 잠에 빠져들어 모든 걸 잊어버릴 수 있다면 좋을 거야이치마츠는 고개를 돌려 베란다 바깥을 보았다해가 조금 진 것 같았다.

아니카라마츠는 잠들지 못했다이치마츠는 카라마츠가 헛구역질 하는 소리에 잠이 깨 방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카라마츠는 어두운 화장실에서 변기통을 붙잡고 나오지도 않는 것을 토해내느라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었다.

카라마츠.”

카라마츠가 옆에 있던 생수병으로 입을 씻었다가다시 구역질을 시작했다이치마츠는 화가 났다자기 자신에게 나는 화였다이치마츠는 현관으로 걸어갔다신발장 위엔 말끔한 식칼이 얌전히 놓여있었다이치마츠는 식칼을 집어 들어 단단히 쥐고 문 바깥으로 나갔다.

 

오래 걸리지 않아서 다행이었다이치마츠는 손에 든 것을 다시 고쳐 잡고 집을 향해 걸어갔다카라마츠가 문 앞에서 쩔쩔매면서 이치마츠를 찾고 있었다그러다 이치마츠를 발견하고달려와 이치마츠의 멱살을 잡았다.

이치마츠그렇게 나가버리면 걱정하잖아!”

사냥을 했어.”

?”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손을 잡아끌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손에 들린 것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이치마츠는 손에 든 것을 질질 끌면서 뒷마당으로 나갔다카라마츠가 보기 힘들어할 머리나발 같은 건 다 잘라서 내버리고 왔으니 좀 덜할 것이다.

카라마츠가 이치마츠의 멱살을 잡았다.

누가 너보고 이런 짓 하래이러면 내가 죄책감이 덜해질 것 같아?”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손을 뿌리치고 칼로 사냥감의 목에서 배까지를 길게 잘랐다도살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그렇지만 대충 이렇게 하지 않을까하고 이치마츠는 뼈를 따라 고기를 잘라냈다.

이건 고기야.”

이치마츠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짐승을 잡았고.”

내장이 바깥으로 우르르 쏟아졌다.

나는 사냥을 했어.”

카라마츠가 이치마츠의 등 뒤에 주저앉아 이치마츠의 허리를 끌어안았다그리곤 곧 엉엉 소리 내며 울기 시작했다이치마츠의 등이 뜨끈하게 젖어왔다이치마츠는 달빛을 받으며 고기를 썰어냈다내장은 금방 썩을 테니까 내일 해가 뜨면 바깥에 버리고 오고고기는 훈제를 하든 뭘 하든 먹을 만한 것으로 보이게 만들자비릿한 피냄새가 났다이치마츠는 아까 뱃속에 든 것을 모조리 토해버리고 와서 그런지 신물이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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