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른 전력 60분으로 쓴 썰입니당 ㅇㅅㅇ)/ 카라른 최고








남자친구, 소개 안 시켜줘?”

난데없는 아웃팅이었다. 카라마츠는 입안에 머금고 있던 물을 모조리 흘려버리고 거칠게 기침을 했다. 언젠가 형제들에게 들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었지만, 이렇게 이를 줄이야. 카라마츠는 얼굴이 새빨갛게 되도록 콜록거리면서도 연신 고개를 돌려 혹시 다른 형제들이 들어오려고 하지는 않는지 기척을 살폈다. 다행히 이치마츠의 말을 들은 건 카라마츠뿐이었고, 다른 형제들은 빈 그릇을 나르고 후식으로 먹을 과일을 가져온다고 방을 비우고 없었다. 다행이다. 아니, 다행이 아닌가? 다른 형제들도 전부 알면서 시치미를 떼고 있는 게 아닐까? 카라마츠는 손이 벌벌 떨렸다. 입과 상의가 젖어 불쾌했다. 일단 이걸 다 닦고, 이치마츠가 잘못 알고 있는 거라고,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고 아무렇지 않게 둘러대야 하는데. 휴지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카라마츠는 자기도 모르게 옷소매를 당겨 입을 문질러 닦았다. 이치마츠는 턱을 괴고 카라마츠가 허둥지둥 하는걸 빤히 보고 있다 곁에 있던 티슈상자를 건네주었다.

진짠가 보네.”

이치마츠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 아니…….아닌아닌데…….”

글렀다. 순식간에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울고 싶지는 않았다. 동생에게 동성 애인을 들켜버린 주제에 울기까지 해버리면 카라마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비참해질 것 같았다. 왜 하필이면 이치마츠일까. 그제야 카라마츠는 그동안 이치마츠가 했던 호모포비아적 발언이 모두 카라마츠를 향하는 것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게 날 향한 칼이었다는 게, 상대가 형제라는 걸 알면서도 날카롭게 벼린 칼이라는 게 너무 아파서, 카라마츠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눈물이 눈꼬리를 따라 흘러 뚝, 떨어졌다. 카라마츠는 급히 티슈를 뽑아 대강 뭉친 다음에 양 눈을 아플 정도로 꾹 눌렀다.

 

호모새끼들은 다 죽여 버려야 돼.”

다 같이 모여 영화를 보던 와중에 이치마츠가 미간을 한껏 찌푸리며 내뱉듯 말했다. 카라마츠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 이치마츠가 알아버린 걸까? 카라마츠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고 노력하면서 음료수 컵을 들고 이치마츠의 눈치를 살폈다. 이치마츠는 이 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토도마츠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안 돼, 이치마츠 형. 사람들마다 사랑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라고? 나는 남자가 나만 좋아하지 않으면 되는데 말이지. 요샌 어디 가서 그런 말 했다간 욕먹어.”

그래. 다들 그렇게 생각하겠지. 카라마츠는 억지로 웃었다. 속이 쓰렸다.

카라마츠는 난생 처음 짝사랑 하던 상대와 이어져 새콤달콤한 첫사랑을 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형제들에게는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카라마츠가 사랑하는 그는 같은 반의 남학생이었기에. 다른 형제들이 서로에게 연애상담을 하고 좋아하는 여자애 얘기를 하며 신나하는 걸 카라마츠는 그저 부럽게 들을 수밖에 없었다. 나도 사랑을 하고 있어. 카라마츠는 몇 번이고 입을 열었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물었다.

사랑하는 그와는 영화 취향이 비슷해 주말이면 만나 영화를 보러 갔고, 학교가 끝나면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고 더위도 추위도 모를 정도로 딱 붙어 길을 걸었다. 그와는 정말 온갖 얘기를 나누었다. 학교생활, 언젠가 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 그리고 그의 소중한 형제들까지. 어느 인적 드문 골목에서 바들바들 떨면서 첫 키스를 하기도 했고. 학교를 졸업하면 같은 대학에 가고, 여느 룸메이트들처럼 자취방을 구해 함께 살자는 약속을 하기도 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밤에 눈을 감을 때까지 카라마츠는 꼭 하늘을 나는 것처럼 둥둥 떠 있었다. 늘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가서야 손을 잡았고, 또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아는 사람에게 들키진 않으리라고 생각했는데.

 

행복했던 순간이 물거품처럼 터지는 것 같았다. 카라마츠가 눈가에 대고 있던 티슈는 어느새 푹 젖었고, 카라마츠가 얼른 새 티슈를 뽑아 다시 눈을 가리려고 하는 순간 다른 형제들이 깎은 배를 한 접시 가득 담아 들고 들어왔다.

카라마츠 형! 왜 울어?”

이치마츠, 쟤 왜 저래?”

형제들은 접시를 던지듯 내려놓고 카라마츠에게 다가와 그의 얼굴을 살폈다.

물 마시다가 사레들려서 저래.”

목에 커다랗고 뜨끈한 덩어리가 걸린 것 같았다. 카라마츠는 숨을 고르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다른 형제들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네. 언제 이치마츠가 얘기를 할지 모르지만. 카라마츠는 웃으면서 젖은 티슈뭉치를 집어 들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이치마츠가 배를 하나 집어 들어 와작와작 씹어 먹고 있었다. 카라마츠가 우는 걸 봤으면서도 아무런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아마 카라마츠가 이렇게 반응할 줄 알고 있었겠지. 카라마츠는 올린 입꼬리에 힘을 줘 배로 시선을 돌렸다.

 

걔랑 헤어져.”

이치마츠는 형제들이 다 잠에 빠져들자 카라마츠의 멱살을 잡고 집 뒷마당으로 질질 끌고 나갔다. 카라마츠는 복잡한 머릿속을 한참 정리하다 간신히 잠에 빠져들었는데, 자다가 갑자기 일으켜져 헤어지라는 소리를 들으니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

이치마츠가 으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사귀고 있는 걔랑 헤어지라고.”

카라마츠는 간신히 잠이 깨 눈을 비볐다.

?”

이치마츠는 한참 카라마츠의 눈을 노려보다 마당에 침을 뱉었다.

나랑 똑같은 얼굴을 한 새끼가 다른 남자랑 떡치는 생각만 해도 더러워서 죽을 것 같으니까, 다른 애들한테 얘기하고 학교에 소문내기 전에 헤어져.”

카라마츠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에게 늘 상처 주는 말만 골라서 했지만 마음이 아팠다. 그렇지만 카라마츠는 쉽게 포기할 수가 없었다. 카라마츠가 오랫동안 짝사랑하던 사람이었고, 또 그는 카라마츠가 모든 걸 버리고 도망칠 수 있을 만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카라마츠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마루에 앉아 다리를 세우고 고개를 파묻었다. 이치마츠가 노려보고 있는지 정수리가 따끔거렸다. 카라마츠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말을 해야 했다. 이치마츠에게. 이 말을.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야."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고등학교 들어갈 때부터 좋아했고, 2년도 넘게 짝사랑만 하다가 포기하기 직전에 사귀게 됐어. 살면서 이렇게 다른 사람을 좋아해본 적이 없었고, 또 앞으로도 그럴 일이 없을 것 같아. 이치마츠, 그냥 못 본 척 해주면 안 될까? 이 사람하고 헤어지면 나는 죽을지도 몰라.”

, 이치마츠가 어이없다는 듯 바람 새는 소리를 내고 웃었다. 카라마츠는 옷소매를 씹었다. 이치마츠가 안 된다고 하면, 형제들에게 모두 말해버리면 어떡하지. 카라마츠는 이제 겨우 고등학생이었고, 곧 학교를 졸업한다고 해도 경제적인 능력이 없어 한동안 부모님 집에 붙어서 살아야 했다. 이치마츠가 부모님에게, 형제들에게 말을 해버리면 카라마츠는 갈 곳이 없었다. 카라마츠가 좋아하는 그 사람도 동갑의 고등학생이었고, 또 고등학교 졸업은 해야 하는데. 이치마츠는 대답이 없었다. 카라마츠는 꼭 벌레가 된 기분이었다. 제발 짓밟지만 말아달라고 이치마츠의 선처를 기다리는 벌레. 내가 흉측하고 더럽고 징그럽다는 건 알고 있어. 보이지 않는 곳에 조용히 숨소리도 내지 않고 숨어있을게. 제발 짓밟지만 말아줘.

네가 뭘 모르나본데, 걔를 아무리 사랑한대도 그건 잠깐이야. 대학만 가 봐도 만나는 사람은 얼마나 많고, 또 여자들은 얼마나 많은데. 너는 걔 하나만 믿고 가족을 다 버리겠다는 거야? 미쳤냐? 걔한테 빚졌어? 걔가 그렇게 씹질을 잘해? 너는 걔 없으면 욕구불만으로 죽어?”

이치마츠가 카라마츠의 바로 앞에 서서 조근조근 잔인한 말을 쏟아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카라마츠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 눈을 뜨면 카라마츠의 심장에서 김이 후끈후끈하게 오르는 피가 줄줄 흘러가는 게 보일 것 같았다.

그래도 안 돼…….”

카라마츠는 다시 목이 멨다.

안 돼……. 걔가 좋아서, 나는 안 돼…….”

그동안 형제들 틈에서 비밀을 지키느라 서럽고 외로웠던 것까지 한 번에 올라와 카라마츠는 속이 울렁거렸다. 태어날 때는 다들 똑같이 태어났는데, 왜 카라마츠만 이렇게 달라서 혼자 고통스러워야 하는 거지. 심장이 조이듯 아팠다.

이치마츠가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카라마츠의 곁을 지나치려다 멈추고 카라마츠의 곁에 쭈그리고 앉아 카라마츠의 귓가에 속삭였다.

졸업할 때까지만 만나. 그리고 졸업식 날 헤어져. 그 뒤로 너희 둘이 같이 있는 게 눈에 뜨이기라도 하면 다시는 이 집에 발도 못 들여놓을 줄 알아.”

 

기간이 정해진 사랑은 얼마나 애달픈지. 카라마츠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차마 사실대로 얘기하지도 못하고 이별을 고했다.

상처 줘서 미안해. 너한테는 아무 문제가 없어. 너랑 함께 해서 정말 행복했고,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어. 너랑 같이 걷던 거리, 그 골목, 그 가로등 밑만 걸어도 나는 죽을 때까지 네 생각을 할 거야. 고마워. 나랑 그렇게 사랑해줘서 고마워. 겁쟁이인 나에게 먼저 고백해줘서 고맙고, 나는 그저 너한테 고맙기만 해. 사랑해. 정말 좋아했어.

하지만 카라마츠는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이 모든 말을 한껏 움츠러든 그 사람의 등 뒤에 흘려보냈다. 졸업장이 든 통을 잔뜩 구겨질 정도로 부여잡고, 카라마츠는 소리 없이 울었다. 기념사진을 찍겠다며 어머니가 카라마츠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가야되는데,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가야 하는데. 카라마츠는 그 사람의 등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아진 뒤에야 자리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카라마츠의 첫사랑이 조각도 주워 담지 못할 정도로 박살나버린 날이었다. 내가 다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카라마츠는 어린애처럼 소리 내 울면서 자기 자신에게 물었다. 그렇게 다정하고, 상냥하고, 카라마츠에게 먼저 좋아한다고 말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카라마츠의 어깨에 차가운 손이 닿았다. 카라마츠가 엉망이 된 얼굴로 고개를 돌아보자 그 손이 카라마츠의 얼굴에 손수건을 던지고 돌아서 달려갔다.

 

카라마츠의 예상은 옳았다. 그 사람 같은 남자는 다신 만나지 못했고, 카라마츠는 그의 흔적이 아주 조금이라도 남은 남자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일주일도 채 가지 못하는 짧은 만남이었다. 만난 남자의 수가 다섯을 넘어가기 시작하자 세상엔 카라마츠를 위해 태어난 특별한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운명처럼 그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는 꿈을 꾸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졸업을 하고 그 사람이 대학에 간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새 여자 친구를 사귀었다는 소식을 듣고 카라마츠는 모든 희망을 접었다. 이치마츠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카라마츠는 입이 썼다. 영원한 사랑이란 건 없는 모양이었다. 카라마츠에게만 그런 건지는 몰라도.

또 남자 만났냐.”

가로등 밑에 이치마츠가 담배꽁초를 산처럼 쌓아놓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고개를 돌려 현관문을 잡았다. 그러자 뒤에서 커다란 손이 카라마츠의 목덜미를 잡아 당겼다.

무슨 짓이야?”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손을 잡아떼려고 노력했지만 이치마츠는 아랑곳하지 않고 카라마츠를 끌고 집 옆 골목으로 들어갔다. 텅 빈 골목에 누런 가로등만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내가 보는 앞에서 남자를 만나?”

이치마츠는 기가 찬다는 표정이었다. 카라마츠는 멍하니 이치마츠의 얼굴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사귀는 거 아냐. 금방 헤어지니까.”

사랑해서 만나는 게 아니라?”

카라마츠는 피식 웃었다. 이치마츠의 입에서 사랑이란 단어가 나올 줄이야.

그럴 리가.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안심해.”

카라마츠가 몸을 돌리자 다시 이치마츠가 카라마츠의 어깨를 잡아 돌려 이치마츠를 보게 했다.

내가 걱정하는 일이 뭔데?”

남자를 사랑한다고 집을 엉망으로 만드는 일?”

이치마츠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곤 그때까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내던지고, 카라마츠의 턱을 단단히 잡았다.

틀렸어.”

그리곤 휘둥그레진 카라마츠의 눈을 피해서, 이치마츠가 잔뜩 튼 입술을 카라마츠의 입술에 부딪쳤다. 짙은 담배냄새가 났다. 차가운 밤의 냉기가, 가로등 불빛에 잔뜩 달아오른 온기가 그 입술에서 느껴졌다. 카라마츠는 순간적으로 굳었지만, 곧 눈을 감고 이치마츠의 입술을 적시기 시작했다.

이번엔 카라마츠의 차례였다.

 

사실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어요. 전국의 수재란 수재들은 전부 모인 그 교실에서 처음 시험지를 넘기는 순간부터 알고 있었으니까요. 이 문제는, 이 대학은 날 위해 준비된 게 아니었구나. 평범하기 그지없는 나는 여기서 환영받지 못하는구나 하고. 어느 햇빛이 잘 들고 고요한 교실이었습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발을 들이고 싶어 하루에도 몇 번씩 심장이 쿵쾅거렸던 교실이었어요. 그 교실 한가운데에 다른 학생들의 다급한 연필소리와 지우개질 소리를 들으며 나는 가만히 시험지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날 어떻게 그 학교를 나와 집으로 돌아갔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며칠을 꼬박 끙끙 앓았던 건 기억나는데, 그렇게 앓는 동안 제가 무슨 헛소리를 했는지 아무도 얘기해주지 않았어요. 저는 그저 골방에 틀어박혀 합격 발표가 나는 날을 기다렸습니다. 아주 작은 욕심이 파리처럼 조그만 날개를 달고 귓가에서 윙윙거리며 날아다녔어요. 이름이랑 수험번호를 제대로 적어서 낸 게 확실하니까, 어쩌면 붙을지도 모른다고. 저는 그 헛된 욕심을 손가락 하나로 눌러 죽일 수 있었지만 차마 그러질 못하고 시간이 흐르는 것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저는 버스를 타고 돌아오다 어느 낯선 거리에 내렸습니다. 기쁘고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이 가득한 거리를 걸으며 저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습니다. 자기 이름을 확인하고 기뻐 비명을 지르던 학생들의 얼굴을 하나씩 하나씩 눈앞에서 지워가며,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불행을 상상했습니다. 저 남자와 손을 꼭 붙잡은 여자는 사실 양다리를 걸치고 있을지도 모르고, 저 명문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잘난 척하며 걷고 있는 아이는 사실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저는 제 안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분노를 죄 없는 사람들에게 저주를 하며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저한테 실망하셨을 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이건 솔직한 제 모습이고,

 

아니, 이 부분은 지워야지.

 

한참 길을 걷다 보니 목이 타들어갈 것처럼 말라왔습니다. 재밌었어요. 이렇게 내 인생은 나락으로 굴러 떨어졌는데 내 몸은 이렇게 물을 요구하고 음식을 요구하고 휴식을 요구하고 있으니, 나는 그저 동물이 아닐까, 내 이성과 정체성이라는 건 오랜 교육으로 길들여진 습관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뭐, 내가 동물이면 뭐 어때서. 저는 자문자답을 하며 편의점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저 앞에, 어느 상가 앞에서 조촐한 무대를 차려놓고 예쁘게 생긴 여자애가 짧은 치마를 팔랑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가발인지 염색인지 알 수 없는 분홍색 머리 위엔 고양이 귀 머리띠를 쓰고, 손에는 마이크를 잡는 것도 불편해 보이는 고양이 손 모양 장갑을 끼고 있었죠. 어떻게 고정을 시킨 건지도 알 수 없었지만 고양이 꼬리도 힘없이 그녀의 동작에 맞춰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팔짱을 끼고 꼭 면접을 보는 것처럼 엄한 표정으로 서있는 사람들 틈에 끼어 아주 잠깐, 당신을 훑어보았어요. 흔한 아이돌이었습니다. 일본에는 아이돌이 해변의 모래알처럼 차고 넘쳤고, 이를 모르는 건지 아님 알면서도 모른 체를 하는 건지 조금이라도 예쁜 여자애들은 모두 아이돌을 해 사람들 위에 군림하겠다고 나섰죠. 그 많은 아이돌 틈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든 눈에 띄어야겠죠. 실밥이 그대로 매달려 있는 싸구려 치마를 무대 앞에 따개비처럼 달라붙은 남자들에게 속옷을 보여줄 것처럼 살짝 살짝 흔들면서도 살아남아야겠죠. 나는 그런 당신을 보면서 만족스러웠어요. 나는 공부를 잘했고, 고등학교도 좋은 성적으로 졸업했고. 비록 대학에는 가지 못했지만 어떻게든 멋진 인생을 살 수 있지 않을까. 고마워요. 나는 냥냥거리면서 춤을 추는 당신을 뒤로 하고 등을 돌렸습니다. 아이돌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기 위한 사람들이죠. 나는 당신에게 위안을 받았습니다.

그 무대의 건너편, 조금 떨어진 곳에 편의점이 있었습니다. 저는 온장고에서 단 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는 블랙커피를 꺼내들고 계산을 해 캔을 땄습니다. 배가 고팠고, 달달한 것을 마시면 기분도 좋아지겠지만 나는 이제 어른이니까, 고등학교를 졸업할 어른이니까 하는 생각이 들어 블랙커피를 마셨습니다. 편의점 창가에 서 밖을 내다보니 당신은 공연을 마치고 한참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하고 있었어요. 사람들 몇 명이 박수를 치는 게 보였습니다. 나는 쓰디 쓴 커피를 한 모금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가 목구멍으로 넘겼습니다. 새카만 커피는 혀를 타고 식도로 넘어가 텅 빈 위장을 자극했죠. 속이 쓰렸어요. 당신이 무대에서 사라지고 나니 나는 다시 속이 끓기 시작했습니다. 화가 났어요. 다시 이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밑바닥의,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아 화가 났습니다. 아까 그 아이돌은 왜 저 무대에서 공연을 계속하지 않는 걸까. 나는 그럼 당신을 보면서 내 처지가 당신보다 낫다고 다시 나를 위로할 수 있을 텐데. 커피는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천천히 식고 있었죠.

나는 한참동안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꼭 꽃잎 같은 분홍색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것 같더니, 고양이 귀 머리띠와 고양이 손 장갑을 벗은 당신이 편의점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두꺼운 외투를 입고, 손에는 커다란 가방을 들고 있었죠. 당신이 직접 가방을 들고 있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아마 시중을 들어주고 스케줄을 관리해 줄 소속사가 없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나는 창가 구석으로 조금 물러나 커피를 마시며 당신을 지켜봤습니다. 당신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온장고 앞으로 다가가 커피를, 달콤한 커피를 꺼내 계산을 하고 내가 있는 창가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곤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죠. ,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어린 여자애가, 나이가 많아봤자 고등학생일 여자애가 들기엔 너무 무거운 가방이 아닐까. 나는 계속 가방과 당신을 힐끔힐끔 돌아보다 고개를 돌렸습니다. 당신은 손이 시렸는지 한참동안 캔을 양 손으로 감싸고 있었습니다. 장갑은 두꺼워보였는데, 보온에는 별 효과가 없던 걸까요. 날이 춥긴 했습니다. 나는 창밖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옷을 한번 보고 몇 걸음 뒤로 물러서 당신의 옷차림을 훑어보았습니다. 치마와 긴 부츠 사이에 드러난 맨살이 새빨갛게 부어있었고, 어깨는 잔뜩 움츠러들어있었습니다. 날이 그렇게까지 춥진 않았지만 확실히 이런 차림으로는 추울 만 했죠. 내 시선을 느꼈는지 당신이 고개를 돌렸습니다. 화장이 진했어요. 그리고 눈썹 옆으로, 부드러운 얼굴선을 따라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걸 뭐라고 부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눈꺼풀에 바르는 그것도 번져서 눈가가 온통 반짝이 투성이였어요. 당신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컬러렌즈를 낀 건지 동그란 초록색 눈동자가 반짝거렸어요.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바보같이 입을 조금 벌리고 그 눈동자를 한참 보다가,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내밀었습니다. 심장이 쿵쾅거렸고, 머릿속에 온갖 말들이 꼭 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뛰어다녔어요. 당신은 바로 그걸 받아들이지 않고 당황스럽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저기, 이마에 땀이…….

나는 여자애가 민망하지 않게 말을 돌려서하는 방법도 몰랐어요. 나는 바보처럼 말끝을 흐리며 휴지를 내민 손을 조금 뒤로 뺐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낯선 사람이죠. 나는 아차, 하고 말을 덧붙였습니다.

아까, 공연 잘 봤습니다.

하고. 당신을 보면서 한참 속으로 우월감을 느꼈던 주제에, 나는 공연을 잘 봤다고 인사했어요. 그제야 당신은 활짝 웃으면서 휴지를 받아들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새하얗고 조그만 손으로 내 손에서 휴지를 가져가 땀방울이 흐르는 부위를 톡톡 두드려 닦고는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에 올려놨어요. 당신의 공연을 본 감상을 얘기해줘야 할 것 같아서, 머리를 한참 굴렸습니다. 그렇지만 노래도 귀담아 듣지 않았고 또 춤을 제대로 감상하지도 않아 생각나는 말이 없어서, 나는 연신 커피만 들이켰죠. 목구멍이 따끔거렸습니다.

하시모토 냐에요, 냐쨩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냐.

당신은 그제야 생각난 듯 냐, 하고 고양이 울음소리 같은 말을 덧붙였습니다. 하시모토 냐쨩이라니. 나는 한참 머릿속으로 당신의 이름을 되새겨보다, 고개를 들었습니다. 말해주고 싶었어요. 당신은 정말 춤을 열심히 췄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나는 당신이 최선을 다했다는 걸 느꼈고. ……. 당신은 무척 귀여웠다고. 분홍색 머리카락이 나풀거리는 것도 싸구려 고양이 발 장갑도 귀여웠고, 지금 내 옆에서 어색하게 커피 캔을 따 마시는 당신에게서 무척 달콤한 꽃향기가 난다고. 비록 지금은 고양이 귀 머리띠도, 장갑도, 꼬리도 없었지만 당신은 누가 봐도 고양이처럼 귀엽고 사랑스럽다고.

내가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당신은 빈 커피 캔을 쓰레기통에 넣고 가방을 집어 들었습니다. 가방이 무거웠는지 살짝 인상을 썼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가방을 들고, 내가 건네준 휴지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어 외투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그걸 가져가려는 걸까요?

당신은 나를 보며 고개를 살짝 숙이고 다시 활짝 웃었습니다. 나는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들었고, 당신이 이 편의점에 들어왔을 때처럼 꽃잎 바람처럼 편의점 밖을 나서는 걸 보았습니다. 지하철을 타러 가는 걸까요. 나는 한참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커피 캔을 비웠습니다. 어느 새 커피 캔은 차가워졌죠.

 

당신의 팬클럽을 결성하고, 먹고 자는 시간만 빼면 당신의 뒤를 쫓아다니는 사람들과 하나둘 안면을 트기 시작하면서 나는 내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을 수가 있었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작은 무대를 하고 나면 고양이 귀와 장갑을 빼고 힘들지만 최선을 다하는 여자아이의 모습으로 근처 편의점에 들어가 별 생각 없이 창밖너머로 공연을 본 남자들에게 웃어주고 이름을 가르쳐줬죠. 당신은 그 남자들의 최초의 아이돌이었고 마지막 아이돌이었습니다. 혼자서만 간직해온 소중한 비밀이 사실 모두의 마음속에 하나씩 남겨져 있는 공산품 같은 것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의 기분을, 당신은 알고 있을까요? 알고 있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걸 그만두지 못할 거라는 것도 알고 있겠죠. 당신은 아이돌이니까.

 

하시모토 상.

어쩌면 저는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방법으로 사랑에 빠진 남자가 아닐까요.

우린 돈도, 명예도, 권력도 아닌 사랑 그 자체에 집중해

한 명은 사랑을 팔고

한 명은 사랑을 하고 있으니.

 

 

쵸로마츠는 쓰던 편지를 찢었다. 편지 같은 건 역시 쓰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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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시마츠는 샛노란 트럭을 타고 나타났다. 어두컴컴한 거리에 옅은 가로등 불빛을 받아 트럭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바퀴 주변이나 트럭 뒤쪽에 흙먼지가 좀 묻어있긴 했지만 꽤 현실감이 없는 광경이었다. 쥬시마츠는 도로 한가운데에 트럭을 세우고 카라마츠에게 달려와 카라마츠를 번쩍 들어 카라마츠가 뭐라고 말리기도 전에 조수석에 태우고 안전벨트를 채워주었다.

왠지 닥터는 차 같은 거 타지 않고 날아다니실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한겨울 바깥에 있었던 탓인지 트럭 안이 얼어붙을 것처럼 차가웠다. 카라마츠는 몸을 바짝 웅크리고 덜덜 떨었다. 쥬시마츠는 버튼을 이것저것 눌러가며 히터를 틀고 환기를 시켰다.

저기, 카라마츠 씨에겐 말을 못했지만.”

쥬시마츠가 차 핸들을 붙잡고 머뭇거렸다. 카라마츠는 조금이라도 덜 차가운 부분을 찾아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다 고개를 돌렸다.

카라마츠 씨도 잘 모르고 저를 찾아오신 것 같더라고요.”

?”

쥬시마츠는 뭐라고 말할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핸들에 붙어 있는 해바라기를 꾹 눌렀다. 꼭 소리 나는 인형처럼 해바라기가 납작하게 눌렸다가 원래 모양으로 돌아오면서 뾰로롱 하고 새소리를 흘렸다.

벌써 세시 이십분이네요.”

쥬시마츠가 핸들을 단단히 붙잡고 엑셀을 밟았다. 차 엔진소리가 낮게 깔렸다. 어두운 트럭 안으로 가로등 불빛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차 속도가 점점 빨라져 카라마츠는 자기도 모르게 차 문 위쪽에 붙은 손잡이를 잡았다. 쥬시마츠는 카라마츠를 한번 돌아보고 내비게이션을 켰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건가요?”

여기서 동쪽으로 한 두어 시간 달리면 동생이 돌보는 작업장이 나와요. 햇살 농축액은 해가 하늘에 떠 있을 때면 언제든지 짜낼 수 있지만, , 잠시 만요.”

쥬시마츠가 말을 멈추고 다시 해바라기를 두 번 꾹꾹 눌렀다. 그러자 이번엔 야옹, 하고 고양이 울음소리가 났다.

다행이다. 오늘은 날이 맑다네요! 카라마츠 씨, 이제 병의 원인을 알았고 또 증상도 심각하니까 이제 한 번에 해치워버립시다!”

해치워요?”

사실 카라마츠 씨가 지금까지 맞아 왔던 농축액은 100퍼센트 농축액을 시냇물 소리로 희석시킨거에요. 맞을 때 뜨겁지 않았어요?”

그러긴 했는데 심하진 않았어요.”

쥬시마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햇살 원액은 그것보다 훨씬 뜨겁고,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하는거에요. 자칫하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방법은 그것뿐이에요. 저는 카라마츠 씨가 물건을 잃어버린 사람의 저주로 그렇게 얼어붙는 줄만 알았는데, 카라마츠 씨가 직접 빈 소원이라 풀 수 있는 방법이 얼마 없어요…….”

쥬시마츠가 말문을 흐렸다. 그렇구나……. 카라마츠는 도로 옆으로 휙휙 지나가는 소나무와 잣나무 숲을 멍하니 보았다. 카라마츠가 멍청한 짓을 한 걸까?

그렇지만 카라마츠 씨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런 소원이 실제로 이뤄지려면, 온 마음을 다해서 진심으로 바래야만 실현되는거에요. 카라마츠 씨는 착하고, 상냥하고, 다정하니까.”

닥터는 이제 마음도 읽을 수 있는 건가. 카라마츠가 고개를 돌리자 쥬시마츠는 핸들을 양손으로 꽉 붙잡고 정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온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닥터도 상냥해요.”

카라마츠가 씨익 웃었다. 쥬시마츠는 눈도 돌리지 않았으면서 카라마츠가 웃는 걸 봤는지 따라서 환하게 웃었다.

사실 말은 못했지만, 카라마츠 씨는 제 첫 손님이에요.”

병원이요?”

제가 치료사가 되고 처음으로 받은 손님이요!”

치료사요? 의사가 아니라요?”

, 둘 다 닥터지만 조금 달라요.”

쥬시마츠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시험에 통과하고 병원을 차리려고 했는데 사기를 당해서 그런 외진 건물 옥상에 병원을 짓게 되어버렸어요.”

경찰에 신고는 하셨어요?”

하긴 했는데, 벌써 바다 밑으로 들어가 버려서 잡을 수가 없더라고요.”

쥬시마츠가 한숨을 푹 쉬었다. 차는 어느새 낯선 들판 위를 달리고 있었다. 작고 낡은 집들이 한 채씩 드문드문 떨어져 있었고, 알록달록하게 빛나는 운하가 그들 곁에서 도로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

손님은 오지도 않고, 혼자 있으려니까 심심한데 나가서 놀았다가 그 새에 손님이 오면 어쩌나 싶어서 혼자 병원에서 야구만 하고 있었는데, 카라마츠 씨가 온 거에요.”

그 안에서 야구가 돼요? 유리병은요?”

쥬시마츠가 활짝 웃으며 카라마츠를 한번 돌아보았다.

카라마츠 씨가 첫 손님이라서 기뻤어요. 사실 치료사로서 모든 손님을 공평하게 소중하게 대해야 된다고 배웠지만, 나쁜 사람이 아니라 카라마츠 씨라서 더 열심히, 행복하게 치료를 할 수가 있었고요.”

쥬시마츠는 카라마츠의 대답도 듣지 않고 음악을 틀었다. 차 안에 은은한 노랫소리가 흘렀다. 가사는 없었고, 여자가 하프 소리에 맞춰 허밍을 하고 있었다.

조금만 자요.”

카라마츠는 눈을 감고 조수석 구석으로 파고들었다. 여자의 목소리가 좋다고 생각하다가 카라마츠는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카라마츠 씨, 도착 했어요!”

쥬시마츠가 카라마츠의 안전벨트를 풀고 조심스럽게 카라마츠를 흔들어 깨웠다. 어느 새 차는 멈춰있었고, 하늘이 연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쥬시마츠는 카라마츠의 양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카라마츠를 번쩍 들어 품에 안았다.

무거울 텐데 내려주세요. 걸어가겠습니다.”

카라마츠가 잠긴 목소리로 웅얼거렸지만 쥬시마츠는 아랑곳하지 않고 카라마츠를 안고 저벅저벅 걸어갔다.

저어기, 저 커다란 쟁반같은 거 보여요?”

카라마츠가 뻣뻣해진 고개를 조금 돌리자 은빛 바탕에 수박 무늬 같은 게 그려진 거대한 쟁반이 들판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게 보였다. 쥬시마츠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저 밑에서 첫 햇살을 짜낼거에요. 그리고 그걸 카라마츠 씨의 심장 위로 떨어뜨리는 거죠.”

그럼 이제 낫는 건가요?”

그럴거에요. 아쉽지만......”

왜 아쉬워요?”

쥬시마츠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카라마츠 씨가 다 나아버리면 이제 병원에도 오지 않을 거고, 그럼 또 저 혼자 남아야 하는 거니까요...... 아 물론, 카라마츠 씨가 더 이상 아프지 않는 건 좋아요!”

쥬시마츠가 말을 황급히 덧붙였다.

놀러갈게요.”

카라마츠가 쥬시마츠 쪽으로 몸을 조금 돌려 안기면서 말했다.

병원 문에 부재중 팻말 걸어놓고 나가서 야구도 하고, 우리 놀이공원에도 놀러오세요.”

그래도 돼요?”

그럼요. 직원할인 받아서 표도 싸게 살 수 있어요.”

쥬시마츠가 킥킥거리며 웃곤 카라마츠를 들어 어깨에 짊어졌다.

닥터?”

금방 도착할거에요!”

쥬시마츠는 카라마츠의 허리를 단단히 잡고 거의 나는 것처럼 달려가기 시작했다. 카라마츠는 쥬시마츠의 옷을 꽉 붙잡고 쥬시마츠의 트럭이 거의 샛노란 점처럼 멀어지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쥬시마츠랑 야구를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쥬시마츠가 공 던지는 걸 받으면 카라마츠의 손이 날아갈지도 모른다고, 카라마츠는 괜한 말을 했다 싶어 후회했다.

어느새 그 은쟁반 앞에 도착했다. 쥬시마츠는 멀미를 하느라 휘청거리는 카라마츠를 바닥에 앉혀놓고, 은쟁반 밑에 아주 조그만 입구로 다가가 입구 옆에 놓인 화분 밑을 뒤적거렸다. 화분 밑을 뒤졌다가, 창틀 구석구석으로 손으로 쓸어보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카라마츠가 앉아있는 쪽으로 다가와 거의 카라마츠만 한 바위를 번쩍 들어 그 밑에서 조그만 열쇠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열쇠로 문을 열었다.

가시죠!”

쥬시마츠가 자기 옷에 손을 슥슥 닦고 카라마츠에게 손을 내밀었다. 카라마츠는 그 손을 잡고, 어두컴컴한 실내로 들어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쥬시마츠는 길을 알고 있는 것 같아서, 카라마츠는 쥬시마츠에게 바짝 달라붙어 걸었다. 저 멀리에서 천장에 구멍이 뚫린 건지 빛이 내려오는 곳이 있었다.

멀어서 힘들지는 않아요?”

아뇨, 아까부터 계속 안아주셔서 괜찮아요.”

쥬시마츠가 카라마츠의 손을 꽉 붙잡았다.

“100퍼센트 원액을 담을 수 있는 병은 없어요. 그래서 아마 카라마츠 씨가 저 밑에 누워서 심장에 바로 햇살 원액을 맞아야 할 거에요. 제가 정말 조심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역시 쥬시마츠가 말하는 햇살 농축액이라는 건 선샤인이 맞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여태까지 받아온 쥬시마츠가 놔준 햇살 농축액이나 오일같은 건 다 효과가 있었으니까. 첫 환자라고 해도 쥬시마츠는 꽤 능력이 있었다.

걱정 안 해요.”

 

쥬시마츠는 구석에서 간이침대를 끌고 와 카라마츠를 눕혔다. 카라마츠는 윗옷을 벗어 얌전히 밑에 내려놓고 자리에 누웠다. 공기가 차가워 팔에 소름이 돋았다. 쥬시마츠는 꼭 치과에서 볼법한 작업대에 앉아 버튼을 이것저것 눌렀고, 그러자 위이이잉 하는 소리가 나더니 천장에 나 있던 구멍이 정말 바늘만 하게 줄어들었다. 쥬시마츠는 카라마츠가 누운 침대를 이리 저리 움직여 그 구멍이 정확히 카라마츠의 심장 위에 닿도록 맞췄다.

이제 움직이면 안돼요!”

쥬시마츠가 한껏 긴장된 표정을 짓고 있어서 카라마츠는 덩달아 겁이 났다.

혹시 치료를 받다가 죽을 수도 있나요?”

가능성이 없지는 않아요……. 원액을 맞고 또 한참을 요양해야 하구요.”

카라마츠는 바지 주머니를 뒤적여 지갑을 꺼냈다.

정말 만에 하나 제가 죽으면 부탁드릴게요. 나중에 치료비는 이 카드로 결제하면 되고요, 여기 신분증에 적힌 주소가 제 집입니다. 그리고 이건 오소마츠 형 전화번호니까 여기로 전화해서 제가 죽었다고 얘기해주세요.”

쥬시마츠가 지갑을 받아들고 두 손으로 꼭 쥐었다가 작업대 위에 올려놓고, 카라마츠의 손을 잡았다.

카라마츠 씨.”

?”

제가 카라마츠 씨를 좋아한다고 하면 어떨 거 같아요?”

카라마츠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면서 한참 고민했다. 쥬시마츠도 좋지만, 글쎄, 이렇게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인가? 두 사람은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또 만약 이게 고백이라면, 그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카라마츠가 신중하게 생각을 해보는 게 예의일 것이었다.

나중에 대답해도 될까요?”

쥬시마츠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쥬시마츠가 천장에 달린 길쭉한 레버를 당기자 천장이 쿵쿵 하고 울리기 시작했다.

이제 쟁반으로 햇빛을 모을 거에요. 쟁반이 꼭 우산을 접는 것처럼 점점 오므라들 거고, 그럼 안에서 햇살이 부글부글 끓으면서 툭툭 튀어오를거에요. 그걸 쟁반이 꾹꾹 눌러서 짜내면, 그게 햇살 농축액이 됩니다.”

천장에서 뭔가 톡톡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카라마츠는 배 위에 두 손을 곱게 모으고 천장에 뚫린 구멍을 올려다봤다. 쥬시마츠가 아차, 하더니 작업대 밑에서 웃기게 생긴 선글라스를 두 개 꺼내 하나를 카라마츠에게 씌워주고 남은 하나는 자기가 썼다.

꼭 쓰고 있어야 돼요! 안 그러면 눈이 타버려요!”

쥬시마츠는 초조하게 작업대 앞에 앉아 손을 꼼지락 거리다가 천장에 달린 레버를 조금씩 조금씩 더 뒤로 당기기 시작했다. 천장에서 꼭 콩이나 탁구공이 떨어지는 것처럼 톡톡거리던 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하면서, 꼭 팝콘을 튀기는 것처럼 펑펑 하고 터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천장에 난 틈 사이로 모래알 같은 게 스르륵 떨어졌다. 쥬시마츠가 카라마츠를 업고 옥상에서 떨어졌던 게 떠올랐다. 카라마츠는 화들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쥬시마츠를 소리쳐 불렀다.

닥터!”

?”

, 제가 당장 대답할 수는 없지만,”

뭐를요?”

제가 여기서 살아서 나간다면 데이트부터 시작해도 될까요?”

쥬시마츠가 레버를 놓고 카라마츠에게 다가와 카라마츠의 손을 꼭 잡았다.

데이트면, 같이 카라마츠 씨가 일하는 놀이공원으로 가는거에요?”

가서 동물원 구경도 하고, 솜사탕도 먹고, 놀이기구도 타는 건데, 닥터가 재밌어 할지는 모르겠어요.”

아뇨, 재밌을거에요.”

쥬시마츠가 활짝 웃으면서 카라마츠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리곤 잽싸게 손을 놓고 달려가 레버를 잡아당겼다. 천장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가 점점 더 커져 카라마츠는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햇살이라는 건 쉽게 짜낼 수 있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카라마츠는 눈을 꼭 감고 샛노란 옥수수 알갱이 같은 햇살이 점점 커지면서 우산처럼 오므라든 쟁반 안을 이리저리 튀어다는 것을 상상했다. 쥬시마츠가 낑낑거리면서 레버를 당기는 소리가 들렸다. 쥬시마츠는 제법 힘이 센 것 같은데 저렇게 힘들어할 정도라니. 카라마츠는 조금 겁이 났다. 펑펑 터지는 소리는 조금씩 줄어들고, 이젠 철썩 철썩 하고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햇살이 녹아 흐르고 있는 건가? 쥬시마츠가 놔주던 햇살 농축액은 황금빛이 정말 예뻤는데, 원액도 직접 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 카라마츠는 못내 아쉬웠다. 그때 쥬시마츠가 소리를 질렀다.

카라마츠 씨!”

?”

이제 진짜 꼼짝하면 안돼요!”

원액을 떨어뜨리려고 하는 것 같았다. 카라마츠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배 위에 올린 손이 하얗게 되도록 꼭 잡았다. 그 때 바늘로 가슴을 콕 찌른 것처럼 따가움이 느껴졌다. 카라마츠는 놀라 눈을 번쩍 떴고, 눈앞에 꼭 유리로 만든 기다란 바늘 같은 게 카라마츠의 가슴 위로 떨어지는 것을 멍하니 봤다. 빛이 카라마츠의 심장 안으로 파고들고 있는 걸까? 카라마츠의 심장이 꼭 불에 타들어가는 것처럼 아파왔다. 카라마츠는 신음 소리를 참으려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참으면 돼요!”

쥬시마츠가 멀리서 소리쳤다. 카라마츠의 심장에서부터 발끝까지 뜨거운 빛이 흘러가고 있었다. 뜨겁고, 아프고, 따끔거리면서 카라마츠는 꼭 전신이 활활 타는 것만 같았다. 기절이라도 하면 좋을 텐데, 온 몸의 신경이 바짝 일어서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조금만!”

다른 생각을 하자. 다른 생각을. 카라마츠는 뇌까지 녹아서 찰박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무시하고 금붕어와 팬더, 기린 얘기를 하던 아이를 떠올렸다. 여기서 살아서 나간다면 아이를 찾아봐야겠다. 아이가 부모를 찾았을까. 부모는 아이를 찾으려고 했을까. 쥬시마츠가 놀이기구를 타면 재밌어 할까? 순간 펑, 하고 카라마츠의 심장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터졌다고 생각했다. 카라마츠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땐 이미 집이었다. 카라마츠는 멍하니 이불을 덮고 천장을 보다가 심장에 손을 올렸다. 더 이상 춥거나 떨리거나 하는 증상은 없었다. 심장도 멀쩡하게 잘 뛰고 있었고,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온몸이 개운했다. 꼭 햇살 농축액을 막 맞았을 때처럼. TV를 켜보니 월요일 아침이었다. 주말 내내 잠들어있던 걸까? 카라마츠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침대에서 카라마츠의 지갑이 툭 떨어졌다. 아마 쥬시마츠가 여기까지 카라마츠를 데려다 준 모양이었다. 카라마츠는 지갑을 주워들어 이러 저리 내용물을 살펴보고, 또 침대 주변이나 탁자 위 같이 눈에 뜨이는 곳을 전부 훑어보았지만 쥬시마츠가 남겼을법한 쪽지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아니, 하나 낯선 물건이 있었다. 카라마츠는 식탁 위에 놓여있는 해바라기를 들어 그 가운데를 꾹 눌렀다. 그러자 뾰롱, 하고 새 소리가 들렸다.

 

? 카라마츠, 병원은 길 동쪽이 아니라 서쪽이라고! 대체 겁도 없이 어떻게 그런 데를 간 거야?”

오소마츠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카라마츠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렇지만 다 나았는걸?”

햇살 농축액을 맞아서? 아니 그게 마약이라던가 아니면 불법 시술일수도 있는 거 아냐? 뭘 믿고 몸을 맡긴 거야? 병원이 수상하다 싶으면 다른 병원을 찾아가봐야지!”

카라마츠는 머쓱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카라마츠는 그닥 큰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오소마츠의 귀에는 영 터무니없는 얘기로 들리는 것 같았다. 오소마츠가 혹시 사기를 당한 게 아니냐며 카드 내역을 살펴보라고 했지만 쥬시마츠의 병원에서 긁은 기록은 남아있지 않았다.

돈이 안 나갔으면 뭐 다행이긴 한데……. 혹시 카라마츠 신장같은 거 뺏긴 거 아냐?”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러면 흉터가 남아있겠지?”

사실 흉터가 남긴 남았다. 카라마츠가 아침에 샤워를 하려고 옷을 벗자 아마 그 바늘이 닿았을 법한 자리에 황금색으로 작은 나무 가지 모양의 흉터가 남아있었다. 카라마츠는 흉터를 손으로 살살 문질러 보았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쥬시마츠에게 물어보면 설명해주지 않을까? 하지만 오소마츠는 극구 말렸다. 운 좋게도 그런 시술을 받고 몸이 나았다고 하더라도, 다시 찾아갈만한 곳은 아니며 의심도 좀 해보고 살아야 한다고. 카라마츠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쥬시마츠에게 데이트부터 시작하는 게 어떠냐고 했었는데, 그리고 쥬시마츠는 나쁜 사람같이 보이지도 않았고.

실례합니다!”

누군가 분실물센터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섰다. 손님인가? 카라마츠는 그날 발견된 분실물을 적어두는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카라마츠의 책상 위에 정말 거대한, 꼭 꽃집에서 파는 모든 꽃들을 있는 힘껏 묶어 놓은 것 같은 알록달록한 꽃다발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달고 새콤한 꽃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카라마츠 씨랑 동물원 구경하러 왔는데, 잠깐 괜찮을까요!”

오소마츠는 옆에서 꽃다발을 보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카라마츠의 어깨를 잡았다.

누구야?”

카라마츠는 웃음이 나오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의사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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