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기 시작했다. 이치마츠는 걷는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길을 따라 늘어서있는 가로등에는 하나 둘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지만,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빌딩들은 꼭 커다란 기둥처럼 그저 어두운 침묵을 하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그들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입을 열었다.
“이제 돌아갈까?”
이치마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로변에는 가로등이 켜져 있어 앞이 보이긴 하지만 여기서 조금이라도 옆으로 벗어나면 캄캄하게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치마츠는 낮에 본 시체를 떠올렸다. 그들은 여전히 잠옷차림이었고, 애초에 평범한 고등학생은 무기를 쓸 줄 모르는 게 정상이었다. 카라마츠는 눈을 조금 찌푸리고 도로의 표지판을 읽었고, 이치마츠는 주변을 둘러보다 주먹만한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이걸 누군가에게 던질 수 있을까? 이치마츠도 남자애니만큼 형제들과 치고 박고 싸워본 적이 있었지만 자신을 해치려고 하는 상대방을 죽일 각오를 하고 덤벼본 적은 없었다. 카라마츠가 이치마츠를 돌아보며 손짓을 하자 이치마츠는 손에 든 돌멩이를 등 뒤로 숨기고 걸어갔다.
“해가 지기 전에 들어가야 했었는데, 너무 늦어버렸네.”
카라마츠는 걱정스럽다는 얼굴을 하고 이치마츠의 손을 잡았다. 이치마츠는 얌전히 그 손을 잡고 걸었다. 풀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치마츠는 이 풍경을 글로 써야 한다면 어떻게 묘사할지를 상상하며 걸었다. 가로등 너머로 불 꺼진 건물들은 꼭 거대한 장벽 같았고, 저 벽들의 핏줄 같은 골목 사이사이에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사람 아닌 것들이 숨어 이치마츠와 카라마츠를 노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텅 빈 사무실과 텅 빈 가게들, 텅 빈 집들. 카라마츠는 무슨 소리라도 나면 고개를 돌리고 혹시 사람이 있지는 않은지 한참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사람은 없었다.
“아까 그, 미친 것 같은 사람들도 결국엔 사람이니까 낮에 돌아다니고 밤엔 잠을 자지 않을까?”
이치마츠가 물었다. 카라마츠는 잠깐 생각을 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그 사람들도 해가 지면 보이지 않을 거고, 그럼 힘들겠지.”
조금 안심이 됐다고 하면 너무 순진한 생각일까? 이치마츠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두 사람은 다시 한참을 걸었다. 아마도 이치마츠가 살아오면서 이렇게 긴 거리를 걸었던 적이 없었을 것이다. 사람이 자리를 비운 곳들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는 있었지만, 한참동안 긴장을 했던 터라 피곤하고 다리가 축축 처졌다. 카라마츠도 그런 것 같았다. 카라마츠는 잠이 오는 건지 눈을 비비다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있잖아, 어머니랑 아버지랑 다른 형제들이, 아까 우리가 봤던 그 사람들처럼 되어버렸으면..... 그럼 어떡하지?”
이치마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치마츠가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던 생각이었다.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어머니랑 아버지가 아까 그 짐승들같이 되어버렸으면, 그걸 어머니와 아버지라고 불러도 될까? 그리고 이치마츠와 똑같은 얼굴을 한 형제들이 다른 사람을 해치는 걸 보면 이치마츠는 그들을 경멸하지 않을 수 있을까?
카라마츠는 이치마츠가 대답하지 않아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을 한 모양이었다. 카라마츠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뭔가 북받쳐 오르는 듯 숨을 고르려다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치마츠의 손을 놓지는 않았지만, 카라마츠는 잠옷 소매를 당겨 눈가를 문질렀다. 이치마츠도 덩달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렇게 하루 종일 텅 빈 도시를 걸었는데도 이치마츠와 카라마츠 단 둘만 남았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꼭 거대한 몰래카메라 방송에 말려든 것 같았다. 하지만 카라마츠가 가족들의 부재를 슬퍼하고 걱정하며 울기 시작하자 이치마츠는 그제야 그들을 보호하고 있던 거대한 방어막이 산산조각 났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치마츠는 손에 들고 있던 돌멩이를 툭 떨어뜨리고 바지에 손을 슥 닦았다. 그리고 카라마츠와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카라마츠를 끌어안았다. 카라마츠는 놀랐는지 잠깐 굳었다가 이치마츠의 허리를 끌어안고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이치마츠도 눈앞이 부옇게 흐려지려고 하는 걸 눈을 깜빡거리면서 참았다. 어디선가 오소마츠가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치마츠는 오소마츠의 멱살을 잡고 이 미친놈이 무슨 장난을 친 거냐고, 진짜 놀라서 죽어버릴 뻔 했다고 화를 낼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이치마츠가 아무리 어두운 골목을 노려보아도 오소마츠는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가는 쪽인 상가 골목에선 가로등이 전부 꺼져있었다. 이치마츠는 낮에 본 것들을 떠올리고 이를 악물었다. 가로등이 켜져 있는 쪽으로 돌아갈까 하고 둘러보았지만 그들의 집이 있는 블록 자체가 전부 어둠에 휩싸여있었다. 카라마츠도 목을 쭉 빼고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여기가 그들이 전깃불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구간이었다.
“길은 다 알고 있지?”
카라마츠가 쭈그리고 앉아 자기 신발 끈을 고쳐 매고, 이치마츠의 신발 끈을 다시 묶어주었다.
“집까지 달려가자.”
“무섭냐?”
“응. 엄청.”
카라마츠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치마츠는 여기서 자기가 무섭다는 걸 인정해버리면 그게 겁쟁이일지 아닐지를 생각해봤지만 별 의미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상가 건물에 가려 꼭 영화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깔려있었다. 이번엔 이치마츠가 먼저 카라마츠에게 손을 내밀었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손을 꽉 붙잡고, 이치마츠가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전에 먼저 그 어둠속으로 뛰어들었다. 이치마츠는 하마터면 넘어질 뻔 했고, 겨우 카라마츠의 뒤를 쫓아 달렸다. 카라마츠의 손이 축축해졌지만 이치마츠는 놓지 않았다. 달빛에 언뜻 가게들의 외관이 보일 듯 말 듯 하며 스쳐지나갔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다들 자고 있을까? 어디선가 가족들이 누군가를 해치고 있진 않을까? 아니면 가족들을 누군가가 해치고 있진 않을까? 짐승 같은 섹스는 잊어버리려고 이치마츠는 기억 속에서 장면을 밀어냈다. 카라마츠는 정말로 빨랐다. 이치마츠는 헉헉거리면서 카라마츠의 속도에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왼쪽으로 꺾는다!”
카라마츠가 소리를 지르며 코너를 돌았다. 이 골목에도 가로등은 꺼져있었다. 그렇지만 이 골목의 끝에는 집이 있다. 이치마츠는 옆구리가 욱신욱신 아파오고 종아리가 당기면서 발이 터질 것 같았지만 꾹 눌러 참고 달렸다. 누군가 이치마츠의 발목을 낚아챌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죽을 것 같았다. 카라마츠도 무섭겠지. 이치마츠는 고개를 들어 카라마츠의 뒤통수가 있을법한 곳을 바라보았다. 카라마츠도 무섭겠지만 이치마츠가 그저 달리기만 하면 되도록 이치마츠를 잡아 이끌어주고 있었다. 이치마츠는 눈을 감았다. 카라마츠가 급정거를 하고선 대문 안으로 이치마츠를 밀어 넣었다.
지옥 같은 레이스가 끝났다. 카라마츠는 현관문을 잠갔고, 이치마츠는 신발도 벗지 않고 드러누워 숨을 골랐다. 잠옷 윗도리가 흠뻑 젖어있었고, 얼굴에도 차게 식은땀이 흘렀다. 카라마츠가 잠옷 상의를 벗어 얼굴을 닦았다.
“우리 문 열어놓고 나갔나?”
이치마츠가 헐떡이며 물었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문을 열어둔 사이에 누군가 집 안으로 들어왔었다면? 카라마츠가 다시 현관문을 확인하고 불을 켰다.
집 안은 조용했다. 이치마츠와 카라마츠는 말 한마디 없이 옆에 놓여있던 쥬시마츠의 야구배트를 집어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심장이 다시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현관에서 가장 가까운 방부터 문을 열고, 불을 켰다. 아무도 없었다. 부엌에도, 거실에도, 그들이 자는 방에도, 화장실에도, 골방에도, 안방에도. 아무도 없었다. 이치마츠와 카라마츠는 발코니까지 확인을 하고 난 다음에야 야구배트를 떨어뜨렸다. 그들이 집에서 나갔을 때와 똑같은 풍경이었다. 밝은 전등불을 켜놓고 있으니 살 것 같아서 이치마츠는 땀에 젖어 불쾌하게 달라붙는 잠옷을 벗어 방구석으로 내던졌다.
그때 현관문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가족들이 돌아온 건가! 이치마츠는 한걸음에 현관문으로 달려가 문을 잡았다. 그러나 카라마츠가 한 발 더 빨랐다. 카라마츠는 오만상을 쓰고 이치마츠를 뒤로 밀쳐내더니 현관문에 귀를 대고 소리를 들었다.
“뭐야!”
덜컹거리면서 문을 열려고 하는 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그렇지만 사람의 말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카라마츠는 한참동안 현관문에 귀를 기울이다 옆에 있던 신발장을 밀어 문을 막았다.
이치마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카라마츠는 말없이 방을 돌며 불을 껐다. 다시 집이 어둠속에 잠겼다. 이치마츠가 자리에서 일어나 우물쭈물하며 서있자 어디선가 카라마츠가 나타나 이치마츠의 손을 잡아끌었다.
“땀에 젖었으니까 씻자.”
지친 목소리였다. 이치마츠는 고개를 끄덕이며 카라마츠를 따라 걸었다. 현관문 너머도 다시 조용해졌다.
잠을 자고 일어나도 꿈은 끝나지 않았다. 이치마츠가 눈을 떴을 땐 카라마츠가 어제보다 더 달라붙어 잠을 자고 있었다. 어제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탓에 일어나서 뭔가를 먹고 싶었지만 이치마츠는 일어나지 않고 가만히 카라마츠가 자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살짝 흔들어보았지만 카라마츠는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치마츠는 어제 카라마츠가 현관문에 귀를 기울이던 걸 떠올렸다. 목욕을 하고 나서 이치마츠는 새 잠옷으로 갈아입고 이불을 덮자마자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는데 카라마츠는 아마도 주변을 살피다 간신히 눈을 붙였을 것이다. 이치마츠는 이불을 끌어당겨 카라마츠의 목 끝까지 이불을 덮어주었다.
먼저 일어날 수가 없었다. 만약 카라마츠가 혼자 잠에서 깨어나면 죽을 만큼 무서울 것이다. 어제 이치마츠가 빈 도시를 걸었을 때처럼.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붙어 다시 잠을 청했다.
이치마츠와 카라마츠는 아침에 잠에서 깨서 밤에 눈을 감을 때까지 하루 종일 붙어 다녔다. 어색하다고 느낄 틈도 없었다. 삼일 째 되는 날까지는 세상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눈을 떴지만, 지금은 눈을 떴을 때 다른 하나마저 사라지지 않았을까 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눈을 떴다. 이치마츠는 잠에서 깨면 곧바로 팔을 뻗어 카라마츠가 옆에 있는지 확인을 했다. 카라마츠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함께 식사를 하고, 함께 씻고,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일주일이 지난 다음부터는 밤마다 악몽을 꿨다. 고기를 뜯다 고개를 돌려보니 아버지의 다리였던 꿈을 꾸기도 했고, 괴물 같은 얼굴을 한 형제들이 그의 뒤를 쫓아와 밤새 달리는 꿈을 꾸기도 했다. 카라마츠가 사라져 텅 빈 방에서 깨어나는 꿈을 꾸는 날에는 눈물에 베개가 푹 젖어 잠에서 깼다. 말하는 법을 잊어버리진 않았을까 싶어 쉰 목소리를 억지로 내어 카라마츠를 불렀다. 그러면 카라마츠는 부스스 일어나 이불로 대충 이치마츠의 얼굴을 닦아주고 이치마츠를 끌어당겨 안았다. 이치마츠는 한쪽 팔로 카라마츠를 있는 힘껏 끌어안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이 온기를 잃는 게 무서웠다.
'BL' 카테고리의 다른 글
[쥬시카라]젊은 느티나무 (1) | 2016.03.08 |
---|---|
[이치카라]증거라는 이름의 허울 4 (7) | 2016.03.08 |
[이치카라]증거라는 이름의 허울 2 (0) | 2016.03.08 |
[이치카라]증거라는 이름의 허울 (0) | 2016.03.08 |
[이치카라] 비 오는 날에는 말을 하지 못하는 카라마츠 (4) | 2016.0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