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기 시작했다이치마츠는 걷는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길을 따라 늘어서있는 가로등에는 하나 둘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지만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빌딩들은 꼭 커다란 기둥처럼 그저 어두운 침묵을 하고 있었다카라마츠는 그들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입을 열었다.

이제 돌아갈까?”

이치마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대로변에는 가로등이 켜져 있어 앞이 보이긴 하지만 여기서 조금이라도 옆으로 벗어나면 캄캄하게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이치마츠는 낮에 본 시체를 떠올렸다그들은 여전히 잠옷차림이었고애초에 평범한 고등학생은 무기를 쓸 줄 모르는 게 정상이었다카라마츠는 눈을 조금 찌푸리고 도로의 표지판을 읽었고이치마츠는 주변을 둘러보다 주먹만한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이걸 누군가에게 던질 수 있을까이치마츠도 남자애니만큼 형제들과 치고 박고 싸워본 적이 있었지만 자신을 해치려고 하는 상대방을 죽일 각오를 하고 덤벼본 적은 없었다카라마츠가 이치마츠를 돌아보며 손짓을 하자 이치마츠는 손에 든 돌멩이를 등 뒤로 숨기고 걸어갔다.

해가 지기 전에 들어가야 했었는데너무 늦어버렸네.”

카라마츠는 걱정스럽다는 얼굴을 하고 이치마츠의 손을 잡았다이치마츠는 얌전히 그 손을 잡고 걸었다풀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이치마츠는 이 풍경을 글로 써야 한다면 어떻게 묘사할지를 상상하며 걸었다가로등 너머로 불 꺼진 건물들은 꼭 거대한 장벽 같았고저 벽들의 핏줄 같은 골목 사이사이에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사람 아닌 것들이 숨어 이치마츠와 카라마츠를 노리고 있을지도 몰랐다텅 빈 사무실과 텅 빈 가게들텅 빈 집들카라마츠는 무슨 소리라도 나면 고개를 돌리고 혹시 사람이 있지는 않은지 한참을 노려보았다하지만 사람은 없었다.

아까 그미친 것 같은 사람들도 결국엔 사람이니까 낮에 돌아다니고 밤엔 잠을 자지 않을까?”

이치마츠가 물었다카라마츠는 잠깐 생각을 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그 사람들도 해가 지면 보이지 않을 거고그럼 힘들겠지.”

조금 안심이 됐다고 하면 너무 순진한 생각일까이치마츠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두 사람은 다시 한참을 걸었다아마도 이치마츠가 살아오면서 이렇게 긴 거리를 걸었던 적이 없었을 것이다사람이 자리를 비운 곳들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는 있었지만한참동안 긴장을 했던 터라 피곤하고 다리가 축축 처졌다카라마츠도 그런 것 같았다카라마츠는 잠이 오는 건지 눈을 비비다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있잖아어머니랑 아버지랑 다른 형제들이아까 우리가 봤던 그 사람들처럼 되어버렸으면..... 그럼 어떡하지?”

이치마츠는 입을 꾹 다물었다이치마츠가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던 생각이었다만약에정말로 만약에 어머니랑 아버지가 아까 그 짐승들같이 되어버렸으면그걸 어머니와 아버지라고 불러도 될까그리고 이치마츠와 똑같은 얼굴을 한 형제들이 다른 사람을 해치는 걸 보면 이치마츠는 그들을 경멸하지 않을 수 있을까?

카라마츠는 이치마츠가 대답하지 않아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을 한 모양이었다카라마츠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뭔가 북받쳐 오르는 듯 숨을 고르려다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이치마츠의 손을 놓지는 않았지만카라마츠는 잠옷 소매를 당겨 눈가를 문질렀다이치마츠도 덩달아 눈물이 날 것 같았다이렇게 하루 종일 텅 빈 도시를 걸었는데도 이치마츠와 카라마츠 단 둘만 남았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꼭 거대한 몰래카메라 방송에 말려든 것 같았다하지만 카라마츠가 가족들의 부재를 슬퍼하고 걱정하며 울기 시작하자 이치마츠는 그제야 그들을 보호하고 있던 거대한 방어막이 산산조각 났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이치마츠는 손에 들고 있던 돌멩이를 툭 떨어뜨리고 바지에 손을 슥 닦았다그리고 카라마츠와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카라마츠를 끌어안았다카라마츠는 놀랐는지 잠깐 굳었다가 이치마츠의 허리를 끌어안고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이치마츠도 눈앞이 부옇게 흐려지려고 하는 걸 눈을 깜빡거리면서 참았다어디선가 오소마츠가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그러면 이치마츠는 오소마츠의 멱살을 잡고 이 미친놈이 무슨 장난을 친 거냐고진짜 놀라서 죽어버릴 뻔 했다고 화를 낼 수 있을 텐데하지만 이치마츠가 아무리 어두운 골목을 노려보아도 오소마츠는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가는 쪽인 상가 골목에선 가로등이 전부 꺼져있었다이치마츠는 낮에 본 것들을 떠올리고 이를 악물었다가로등이 켜져 있는 쪽으로 돌아갈까 하고 둘러보았지만 그들의 집이 있는 블록 자체가 전부 어둠에 휩싸여있었다카라마츠도 목을 쭉 빼고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여기가 그들이 전깃불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구간이었다.

길은 다 알고 있지?”

카라마츠가 쭈그리고 앉아 자기 신발 끈을 고쳐 매고이치마츠의 신발 끈을 다시 묶어주었다.

집까지 달려가자.”

무섭냐?”

엄청.”

카라마츠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이치마츠는 여기서 자기가 무섭다는 걸 인정해버리면 그게 겁쟁이일지 아닐지를 생각해봤지만 별 의미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상가 건물에 가려 꼭 영화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깔려있었다이번엔 이치마츠가 먼저 카라마츠에게 손을 내밀었다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손을 꽉 붙잡고이치마츠가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전에 먼저 그 어둠속으로 뛰어들었다이치마츠는 하마터면 넘어질 뻔 했고겨우 카라마츠의 뒤를 쫓아 달렸다카라마츠의 손이 축축해졌지만 이치마츠는 놓지 않았다달빛에 언뜻 가게들의 외관이 보일 듯 말 듯 하며 스쳐지나갔다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들렸다등골이 오싹해졌다다들 자고 있을까어디선가 가족들이 누군가를 해치고 있진 않을까아니면 가족들을 누군가가 해치고 있진 않을까짐승 같은 섹스는 잊어버리려고 이치마츠는 기억 속에서 장면을 밀어냈다카라마츠는 정말로 빨랐다이치마츠는 헉헉거리면서 카라마츠의 속도에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왼쪽으로 꺾는다!”

카라마츠가 소리를 지르며 코너를 돌았다이 골목에도 가로등은 꺼져있었다그렇지만 이 골목의 끝에는 집이 있다이치마츠는 옆구리가 욱신욱신 아파오고 종아리가 당기면서 발이 터질 것 같았지만 꾹 눌러 참고 달렸다누군가 이치마츠의 발목을 낚아챌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죽을 것 같았다카라마츠도 무섭겠지이치마츠는 고개를 들어 카라마츠의 뒤통수가 있을법한 곳을 바라보았다카라마츠도 무섭겠지만 이치마츠가 그저 달리기만 하면 되도록 이치마츠를 잡아 이끌어주고 있었다이치마츠는 눈을 감았다카라마츠가 급정거를 하고선 대문 안으로 이치마츠를 밀어 넣었다.

지옥 같은 레이스가 끝났다카라마츠는 현관문을 잠갔고이치마츠는 신발도 벗지 않고 드러누워 숨을 골랐다잠옷 윗도리가 흠뻑 젖어있었고얼굴에도 차게 식은땀이 흘렀다카라마츠가 잠옷 상의를 벗어 얼굴을 닦았다.

우리 문 열어놓고 나갔나?”

이치마츠가 헐떡이며 물었다순간 정적이 흘렀다문을 열어둔 사이에 누군가 집 안으로 들어왔었다면카라마츠가 다시 현관문을 확인하고 불을 켰다.

집 안은 조용했다이치마츠와 카라마츠는 말 한마디 없이 옆에 놓여있던 쥬시마츠의 야구배트를 집어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심장이 다시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현관에서 가장 가까운 방부터 문을 열고불을 켰다아무도 없었다부엌에도거실에도그들이 자는 방에도화장실에도골방에도안방에도아무도 없었다이치마츠와 카라마츠는 발코니까지 확인을 하고 난 다음에야 야구배트를 떨어뜨렸다그들이 집에서 나갔을 때와 똑같은 풍경이었다밝은 전등불을 켜놓고 있으니 살 것 같아서 이치마츠는 땀에 젖어 불쾌하게 달라붙는 잠옷을 벗어 방구석으로 내던졌다.

그때 현관문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설마 가족들이 돌아온 건가이치마츠는 한걸음에 현관문으로 달려가 문을 잡았다그러나 카라마츠가 한 발 더 빨랐다카라마츠는 오만상을 쓰고 이치마츠를 뒤로 밀쳐내더니 현관문에 귀를 대고 소리를 들었다.

뭐야!”

덜컹거리면서 문을 열려고 하는 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그렇지만 사람의 말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카라마츠는 한참동안 현관문에 귀를 기울이다 옆에 있던 신발장을 밀어 문을 막았다.

이치마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카라마츠는 말없이 방을 돌며 불을 껐다다시 집이 어둠속에 잠겼다이치마츠가 자리에서 일어나 우물쭈물하며 서있자 어디선가 카라마츠가 나타나 이치마츠의 손을 잡아끌었다.

땀에 젖었으니까 씻자.”

지친 목소리였다이치마츠는 고개를 끄덕이며 카라마츠를 따라 걸었다현관문 너머도 다시 조용해졌다.

 

잠을 자고 일어나도 꿈은 끝나지 않았다이치마츠가 눈을 떴을 땐 카라마츠가 어제보다 더 달라붙어 잠을 자고 있었다어제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탓에 일어나서 뭔가를 먹고 싶었지만 이치마츠는 일어나지 않고 가만히 카라마츠가 자는 얼굴을 바라보았다살짝 흔들어보았지만 카라마츠는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이치마츠는 어제 카라마츠가 현관문에 귀를 기울이던 걸 떠올렸다목욕을 하고 나서 이치마츠는 새 잠옷으로 갈아입고 이불을 덮자마자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는데 카라마츠는 아마도 주변을 살피다 간신히 눈을 붙였을 것이다이치마츠는 이불을 끌어당겨 카라마츠의 목 끝까지 이불을 덮어주었다.

먼저 일어날 수가 없었다만약 카라마츠가 혼자 잠에서 깨어나면 죽을 만큼 무서울 것이다어제 이치마츠가 빈 도시를 걸었을 때처럼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붙어 다시 잠을 청했다.

 

이치마츠와 카라마츠는 아침에 잠에서 깨서 밤에 눈을 감을 때까지 하루 종일 붙어 다녔다어색하다고 느낄 틈도 없었다삼일 째 되는 날까지는 세상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눈을 떴지만지금은 눈을 떴을 때 다른 하나마저 사라지지 않았을까 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눈을 떴다이치마츠는 잠에서 깨면 곧바로 팔을 뻗어 카라마츠가 옆에 있는지 확인을 했다카라마츠도 마찬가지였다둘은 함께 식사를 하고함께 씻고함께 잠자리에 들었다일주일이 지난 다음부터는 밤마다 악몽을 꿨다고기를 뜯다 고개를 돌려보니 아버지의 다리였던 꿈을 꾸기도 했고괴물 같은 얼굴을 한 형제들이 그의 뒤를 쫓아와 밤새 달리는 꿈을 꾸기도 했다카라마츠가 사라져 텅 빈 방에서 깨어나는 꿈을 꾸는 날에는 눈물에 베개가 푹 젖어 잠에서 깼다말하는 법을 잊어버리진 않았을까 싶어 쉰 목소리를 억지로 내어 카라마츠를 불렀다그러면 카라마츠는 부스스 일어나 이불로 대충 이치마츠의 얼굴을 닦아주고 이치마츠를 끌어당겨 안았다이치마츠는 한쪽 팔로 카라마츠를 있는 힘껏 끌어안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이 온기를 잃는 게 무서웠다.

두 사람은 한참동안 멍하니 앉아있었다이치마츠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이불을 덮고 카라마츠 몰래 손바닥을 맵게 꼬집었다아팠다이치마츠는 손바닥이 얼얼해질 때까지 손톱 끝으로 살을 꼬집었다꿈이 아니란 게 실감나지 않았다카라마츠는 마른세수를 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이치마츠에게 손을 내밀었다.

밤새 지진 같은 게 일어나서 다들 대피한 걸 수도 있지 않을까일단 나가보자.”

그랬으면 우릴 남겨둘 리가 없지 않아그렇지만 이치마츠는 대답하지 않고 카라마츠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카라마츠의 손이 축축했다.

거리엔 아무도 없었다이치마츠는 카라마츠보다 한 발자국 앞서 걷다가 오싹한 기분이 들어 아무렇지 않은 척 카라마츠와 나란히 걸었다거리에선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인기척도 없었고이치마츠가 평소 먹이를 챙겨주던 고양이들도 보이지 않았다살아있는 것들은 다 없어져버린건가 싶다가도 거리에 나무들이 남아 있는걸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한참을 걸었다그들이 한 평생을 살아온 골목이었다이 집엔 누가 살고저 집엔 누가 살다가 이사를 갔고이 상가 건물에는 누가 살다가 이사를 갔고다른 사람에게 별 관심이 없는 이치마츠도 줄줄 읊을 수 있을 만큼 익숙한 골목이었다그러나 살아있는 것의 기척이 없는 거리는 너무도 낯설었다이치마츠는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무성영화를 보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말도 없이 걷다보니 저 앞에 상가 거리가 보였다저 골목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지면 편의점이니 슈퍼마켓이니 하는 것들이 모여 있었다이치마츠는 주머니에 뭘 사먹을 돈이 있는지 주머니를 만져보다 그들이 잠옷을 입고 나왔다는 걸 깨달았다카라마츠도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이치마츠처럼 주머니를 만져보고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이치마츠를 돌아보았다이치마츠는 괜히 오기를 부리고 싶었다.

아무도 없으면 그냥 가게를 털어버리지 뭐.”

가게를 털어? CCTV에 찍힐 텐데?”

그래도 보는 사람도 없는 걸게다가 그 정도 훔친다고 감옥 안가.”

카라마츠가 당황한 얼굴을 했다그걸 보니 이치마츠는 기분이 좀 좋아져서 빠르게 걸었다편의점에서 먹을 걸 좀 훔친다고 해도 고등학생이면 초범으로 끝날 거고나중에 부모님이 대신 계산을 해주러 오실 수도 있는 거니까편의점 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뭘 먹을까이치마츠는 달달한 군것질거리를 먹을지 아니면 식사대용으로 먹을 수 있는 걸 고를지 고민을 하며 문을 열었다.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뭔가 질척질척하게 미끄러지는 소리가 들렸고헉헉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사람이 있는 건가부상당해서이치마츠는 급히 편의점 안쪽으로 달려갔다.

두 사람이 있었다이치마츠는 그 중 하나와 눈을 마주치고 그 자리에 묶인 듯 굳어버렸다아니눈이 마주치긴 했나이치마츠는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여자의 엉덩이에 성기를 박고 있는 남자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이치마츠가 야한 책이나 야한 비디오 같은걸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건 아닌데지금 이치마츠의 눈앞에서 섹스를 하고 있는 남녀는 사람으로 보이질 않았다두 사람은 새된 비명소리를 지르기만 할 뿐 사람의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무엇보다 이치마츠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들을 보고 있어도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꼭 이치마츠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속이 메슥거렸다두 사람은 이치마츠가 동네에서 몇 번 마주쳤던 사람들이었고그 중에 하나는 이미 결혼을 한 사람이었다아이를 품에 안고 나와서 아이스크림을 사주는 걸 본거 같은데이치마츠는 뒷걸음질을 치다 실수로 매대에 전시되어 있는 통조림들을 떨어뜨렸다바닥에 통조림 대여섯 개가 떨어지며 우당탕하고 큰 소리가 났는데도 두 사람은 이치마츠를 돌아보지 않았다사람이 아니다이치마츠는 위액이 올라오려는 걸 꾹 참고 입을 막았다저들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안에 든 건 사람이 아니다만약 저 사람들이 이치마츠와 카라마츠를 제외하고 이 마을에 남아있는 유일한 인간이면 어떡하지이치마츠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치마츠다른 사람이 있어?”

카라마츠였다카라마츠가 어느새 이치마츠가 있는 편의점 안쪽까지 찾아와 이치마츠의 팔을 잡았다이치마츠는 꼭 마법이 풀린 것처럼 카라마츠의 팔을 잡고 자리에 주저앉았다카라마츠가 놀라 이치마츠를 붙잡고서 곁을 돌아보았다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손을 붙잡고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애썼다.

“...봤어?”

카라마츠가 그 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이치마츠는 고개를 끄덕였다카라마츠도 이치마츠와 똑같이 느낀 모양이었다카라마츠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그쪽에서 고개를 돌렸고이치마츠의 손을 단단히 잡고 편의점 밖으로 달려 나갔다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손에 잡혀 끌려 나가면서 편의점 바닥에 빵이나 케이크과일 같은 것들의 봉지가 마치 비닐 포장을 처음 본 사람이 마구잡이로 뜯어 간신히 안에 든 내용물을 먹은 것처럼 엉망이 되어 바닥에 널려있는 것을 보았다.

카라마츠는 편의점 문 밖으로 나와 이치마츠의 손을 놓고 숨을 골랐다카라마츠는 꼭 달리기를 한 사람처럼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상체를 수그리고 숨을 쉬다 카라마츠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사람들이 정신병자일지도 모르는데 그걸 멍하니 보고만 있어도망쳐야 될 거 아냐!”

카라마츠는 정말로 화가 나 있었다카라마츠가 진심으로 화내는 건 거의 이삼 년 만에 보는 것 같아 이치마츠는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카라마츠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 사람들이 공격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지금 부모님도 안계시고 근방 이웃들도 없는데!”

카라마츠의 눈에는 아직 그들이 사람으로 보였던 건가부모님은 가끔 집을 비우거나 하면 오소마츠와 카라마츠를 불러다 부모님이 없으면 형들이 동생들을 잘 챙겨야 한다고 당부하곤 했다장남과 차남을 따로 부르긴 했지만 동생들이 충분히 들을 수 있는 거리였다그러면 오소마츠와 카라마츠는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하지 마시라며 부모님을 배웅했고그런 날이면 이치마츠는 이상하게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동갑내기 쌍둥이들인데 몇 분 먼저 태어났다고 부모노릇을 대신 할 수 있어오소마츠는 부모님이 신신당부를 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 같았지만 카라마츠는 달랐다어설프게 저녁을 차려서 형제들과 나눠먹고아침엔 제일 먼저 일어나 다른 형제들을 깨웠지.

카라마츠는 지금도 자기가 엄마처럼 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이렇게 둘만 남았는데이치마츠는 놀란 것보다 카라마츠가 화난 표정으로 이치마츠가 잘못했다는 대답을 하길 기다리는 게 싫었다이치마츠는 카라마츠를 노려보다 앞서 걸었다골목의 가게들은 열려 있었다그러나 평소와는 다르게 누군가 엉망으로 어질러놓은 쓰레기가 가득했고군데군데 사람의 배설물로 보이는 것도 널려 있었다이치마츠는 과일가게 문 밖으로 사람의 발이 하나 튀어나와 있는 걸 보고 멈췄다카라마츠가 순식간에 따라와 이치마츠의 팔을 잡았다이치마츠는 카라마츠가 뭐라고 말을 하기 전에 그 발을 가리켰다손가락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카라마츠는 무의식적으로 이치마츠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발은 핏기가 하나도 없이 그냥 그 자리에 툭 튀어나와 있었다이치마츠는 작은 발톱동그란 발뒤꿈치복사뼈를 하나씩 훑어보다 너덜너덜하게 찢어진 발목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이치마츠의 팔을 잡은 카라마츠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누가 저 발의 주인을 해쳤을까이치마츠는 햇살이 눈부셔 눈을 찌푸리고 카라마츠를 돌아보았다카라마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이번엔 내 차례네이치마츠는 자신이 시체를 보는 것보다 짐승 같은 섹스를 보는 게 충격이 더 큰 건지아니면 처음 그런걸 보고 놀라 시체를 봐도 충격이 덜한 건지 고민하며 카라마츠의 손을 잡아끌었다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손에 끌려 나오면서도 안색이 돌아오질 않았다.

돌아갈까?”

이치마츠가 물었다하지만 카라마츠는 고개를 저었다.

멀쩡한 사람이 우릴 찾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집에서 멀리 떨어지지는 말고 돌아보자.”

아무도 없을 것 같은데그렇지만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손을 잡고 계속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시커먼 고등학생 둘이 손을 잡고 걷는다니 징그러워 보이겠지만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이 손을 놓아버리면 순식간에 혼자가 되어 버릴 것 같았다카라마츠도 이치마츠의 손을 아프도록 꼭 잡았다이치마츠는 손에 피가 통하질 않아 저릿하게 아파왔지만 손을 빼지 않았다.

한낮의 햇살이 푸석하게 메마른 거리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이치마츠는 자기 쪽의 상가들을 계속해서 훑어보았지만 산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간혹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면 텅 빈 눈을 한 사람이 반쯤 벗은 차림새로 아무렇게나 누워있었다그런 사람이 네다섯 명쯤이치마츠는 혹시 저렇게 되는 것이 정상이고자신과 카라마츠가 미쳐버린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봤지만 알 수가 없었다카라마츠도 계속해서 상가를 둘러보았지만 말을 걸만한 사람은 발견하지 못했다어느새 골목이 끝났다.이치마츠와 카라마츠는 자연스럽게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서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렸다그러나 차는 한 대도 오지 않았고신호등은 깜빡거리기만 할뿐 바뀔 생각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횡단보도를 건너 계속해서 걸었다.

몇 시간이나 걸었을까이치마츠는 발바닥이 아파 멈춰 섰다카라마츠는 이치마츠가 멈추자 이치마츠를 돌아보고 그 옆에 주저앉았다아버지의 회사가 있는 곳이었다아버지의 회사가 있고지하철역이 있고축제가 있는 밤이면 야시장이 열리는 넓은 마당그러나 아무도 보이질 않았다이치마츠는 배도 고팠고 발도 아파 짜증이 났다세상이 이상하게 변해버렸는데도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아서 그런가카라마츠가 옆자리를 툭툭 치더니 고갯짓을 했다이치마츠가 바닥에 주저앉자 카라마츠가 조금 움직여서 이치마츠의 발을 잡고 신발을 벗겼다이치마츠가 인상을 찌푸리며 발을 빼도 카라마츠는 발을 놓아주지 않았고이치마츠의 발바닥을 꾹꾹 눌렀다.

지금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지만 그래도 조금만 버텨보자.”

카라마츠가 이치마츠의 반대쪽 발을 잡아 신발을 벗겼다.

그 왜영화 같은 걸 봐도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는 사람이 살아남잖아?”

이치마츠는 대답하지 않았다현실도 그렇게 영화 같고 소설 같은 결말로 끝이 날까이치마츠는 문득 어젯밤 그가 잠들기 전에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만약 아무도 없다면 이치마츠는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할 일이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심장에 커다란 바위가 떨어진 것처럼 무겁게 아파왔다이치마츠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카라마츠를 바라보았다카라마츠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이치마츠는 자신이 단 한자도 쓰지 못할 것이란 걸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이치마츠는 손이 하얗게 질리도록 꽉 붙잡고 있던 샤프를 내려놓고 낡은 스탠드 전원을 껐다.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이치마츠는 그 어둠이 눈에 익을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스탠드 전원을 켰다누런 불빛이 텅 빈 원고지 위로 쏟아졌다빛이 바랜 원고지 첫 칸엔 샤프심 자국이 가득했다.

초등학생 때까지는 분명히 여섯이 다 똑같았는데언제 이렇게 달라져버린 걸까이치마츠는 쌍둥이들의 방에서 한참 달게 잠을 자고 있을 형제들을 떠올려보았다오소마츠는 지나치리만큼 뻔뻔하고카라마츠는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어도 전혀 상처받지 않고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한다그나마 쵸로마츠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고 또 남들이 하는 건 그대로 따라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갖고 있지만그 또한 하나의 마츠노이기에 한번 핀트가 나갔다 하면 오소마츠 못지않게 날뛰는 짐승이 된다쥬시마츠는 논외로 치고토도마츠는 자존심이 세고 또 자기가 형제들 중에선 제일 낫다는 자부심이 있다하지만 이 어두운 골방에서 혼자 원고지를 펼쳐놓고 있는 이 마츠노 이치마츠는세상에 자신이라는 존재를 붙들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글을 선택해놓고도 흔들리고 있었다아니수단이 아니다이치마츠는 두꺼운 원고지 뭉치를 한 장씩 떼어내 구겨 방구석으로 집어던졌다이치마츠는 글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다른 형제들은 자기 자신을 의지해 삶을 살아가지만 이치마츠는 보잘것없는 글재주를 내세워 이것이 그의 정체성이고 자존심이고 자부심이라고 여태껏 소리쳐왔다그러나 기생하는 것은 숙주가 죽어버리면 살수가 없다기생하고 있던 것이다이치마츠는 조그맣게 소리를 내어 기생하는 삶을하고 중얼거렸다만약에이치마츠가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모르고 홀로 살아왔더라면 이렇게 다른 사람이 흔드는 데로 흔들리지 않고 세상 어딘가를 단단히 붙잡아 인간 이치마츠로 자립할 수 있었을까?

이치마츠는 간만에 깊은 잠을 잤다정신은 점점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지만 이치마츠는 눈을 뜨지 않고 이불의 온기를 즐겼다이치마츠는 문예부에 새로 들어온 신입생이 진짜 천재라는 걸 인정하고 일주일도 넘게 밤잠을 설쳤다이치마츠를 정말로 괴롭게 한 것은 신입생이 뽑아내는 소설과 시극본에세이 같은 것들이 아니었다이치마츠의 밤을 하얗게 지새운 것은 신입생의 칭찬이었다. ‘과연선배님은 선배님이시네요.’ 하는 칭찬이치마츠는 그 짧은 말 한마디에서 그가 생각하기에도 지나칠 정도로 많은 의미들을 만들어냈다신입생보다 오래 글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고등학생의 수준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한 실력을 비웃는다던가자신의 글이 훨씬 낫다는 걸 확인하고 가련한 이치마츠를 위로하려한다던가 하는이치마츠의 삶을 방해해온 피해의식이었다그러나 지금 이치마츠는 여섯 명이 맞춰놓은 여섯 개의 알람시계도당장 일어나지 않으면 지각을 할 거라는,

지각이다!”

이치마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오전 열시로이미 한참 늦은 시간이었다다 같은 학교를 다니면서 형제들은 왜 그를 깨우지 않은 거지이치마츠는 뒷골이 확 당겨오면서 인상을 쓰고 옆을 돌아보았다잠자리가 텅 비어있었다딱 하나그의 옆에 달라붙어 느긋하게 잠을 자고 있는 카라마츠를 빼고.형제들이 그를 놀리려고 한 건가이치마츠는 짜증을 내며 카라마츠의 어깨를 밀치려고 하다가 뭔가 위화감을 느끼고 형제들의 자리를 돌아보았다.

베개 네 개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꼭 아무도 잠들지 않았던 것처럼이불은 밤새 이치마츠와 카라마츠가 당겨 덮은 탓인지 흐트러져 있었지만 베개는 처음 잠자리를 정리하면서 곱게 내려놓은 모양 그대로 텅 빈 자리에 놓여있었다그의 형제들은 하나같이 이상한 잠버릇을 가지고 있었다아침에 일어나면 베개도이불도심지어 형제들까지 제자리에 있는 게 하나도 없었는데 이게 어떻게 된 거지이치마츠는 멍하니 옆을 돌아보다 고개를 돌렸다머리맡에 있는 행거에 교복 여섯 벌이 나란히 걸려있었다오늘 학교를 가지 않는 날인건가아니다오늘은 문예부의 모임이 있는 날로이치마츠는 어젯밤 오늘 내놓을 글을 쓰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단 한 자도 쓰지 못하고 잠자리에 누우면서 모임에 빠져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학교를 가는 목요일이었다어딘가 이상했다이치마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빠져나왔다.

집 안이 고요했다이 시간대가 되면 어머니는 거실에서 아침드라마를 보느라 정신이 없다그러나 이치마츠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거실은 텅 비어있었다.티비도 전원이 꺼져있었고소파에는 어머니가 앉았던 흔적도 없다이치마츠는 리모컨을 들어 티비를 켰다그러나 티비에서는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하얗고 까만 선들이 어지럽게 흔들리기만 할뿐 방송을 하고 있는 채널을 하나도 없었다이상했다어머니가 티비 수신을 끊어버릴 리도 없고티비 수신료를 내지 않았을 리도 없는데.이치마츠는 다시 티비를 끄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늘 밥솥에 밥을 가득 채워놓곤 했다사춘기의 아들 여섯은 밥을 먹고 돌아서면 배가 고팠고어머니는 밖에서 일일이 사먹느니 차라리 집에서 밥을 챙겨먹으라며 식사를 마치면 곧바로 새로 밥을 지었다그런데 밥솥은 밥을 해 먹었다는 흔적도 없이 차가웠고식기건조대에 가지런히 정리되어있는 그릇엔 물기가 하나도 없이 바짝 말라 있었다오늘 아침 이 집에서 식사를 한 사람이 없다는 건가이치마츠는 부엌문을 열고 나와 안방으로 향했다처음에는 걸었지만곧바로 달리기 시작했다이치마츠는 안방 문을 부서져라 열었다그러나 안방 또한 사람의 기척도 온기도 하나도 없이 차갑게 식어있었다이치마츠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벽장문을 열고 부모님의 서랍을 뒤졌다집문서도어머니의 결혼반지도 모두 제자리에 있었다부모님이 형제들을 버리고 도망친 것도 아니다이치마츠는 안심하고 벽장문을 닫았다바보 같은 생각이었지딱 고등학생 수준의 유치한 생각그러나 곧이어 이치마츠는 다시 겁이 나기 시작했다그러면 부모님과 형제들은 다 어디로 사라져버린 거지이치마츠는 안방을 나와 아직도 잠을 자고 있을 카라마츠를 깨울까 하다 포기하고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카라마츠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대체 가족들이 무슨 장난을 치는지는 모르겠지만카라마츠와 같이 세트로 남겨졌다는 것도 불쾌했고또 카라마츠가 멍청하게 구는 데에 같이 엮이기 싫었다이치마츠는 잠옷 바람인 게 좀 신경 쓰였지만 대충 신발을 구겨 신고 현관문을 나섰다.

골목이 고요했다옆 건물 카페에서 늘 흘러나오던 유행가도요란하게 벨을 울리는 자전거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이치마츠는 현관문을 붙잡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그러나 도시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차 엔진소리라던가사람들의 말소리 같은 게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이치마츠의 청력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닐 텐데이치마츠는 한참동안 귀를 기울이다 현관문을 닫고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오싹한 기분이 들었다이치마츠는 현관문을 잠그고 신발을 벗어 카라마츠가 잠들어 있는 방으로 달려갔다심장이 쿵쾅거렸다.

카라마츠는 팔다리를 대자로 뻗고 잠을 자고 있었다왜 나랑 카라마츠만 남은거지카라마츠가 내가 아는 그 카라마츠가 아닌 건가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코 밑에 손가락을 대보고 카라마츠가 숨을 쉬는 걸 확인했다뭐라고 얘기를 해야 하지세상 사람들이 우리만 남고 모두 사라진 것 같다고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손목을 붙들고 어떻게 하면 덜 멍청하고 덜 겁쟁이처럼 보일 수 있을지 고민했다그와 동시에 고민을 하다가 카라마츠가 투명해지면서 사라질까봐 겁이 났다혼자만 남는 건 죽기보다 싫었으니까.

이치마츠가 자기도 모르게 카라마츠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줬는지 카라마츠가 인상을 쓰다가 눈을 반쯤 뜨고 이치마츠를 돌아보았다.

이치마츠손목이 아픈 것 같다만....”

잠긴 목소리가 이치마츠의 이름을 불렀다지난 십여 년간 들어온 그 목소리가 맞았다안도감이 들었다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손목을 잡은 손을 놓고 카라마츠의 멱살을 잡아 한 번에 일으켰다카라마츠는 눈이 부어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버둥거리다 이치마츠의 손에 이끌려 일어나 앉았다.

지금 내가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는데

카라마츠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비볐다이치마츠는 마른침을 삼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가서 안방이랑 부엌이랑 둘러보고 집 밖으로 나가서 한번 둘러봐.”

그보다 우리 학교 가야되지 않아?”

카라마츠가 눈을 간신히 떠 시계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지금 학교가 중요한 게 아니야멍청아이치마츠는 거칠게 고개를 저으며 이불을 잡아당겼다이불을 빼앗기자 카라마츠는 잔뜩 움츠러들어서 이불안에 발을 집어넣으려고 달라붙었다그러나 이치마츠는 카라마츠를 발로 밀어내고 방문을 가리켰다.

지금 진짜 심각하니까 한번 돌아봐.”

카라마츠는 한숨을 푹 쉬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나섰다방문 너머로 카라마츠가 느리게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렸다그리고 그 발소리는 조금씩 빨라지다가한참 멈춰 있다가현관문 쪽으로 달려 나갔다현관문이 쾅소리가 나게 열렸다가 닫혔고다시 열렸다.

이치마츠다들 어디로 간 거야?”

이치마츠가 잘못 본 게 아니었다다행이네순식간에 미쳐버린 줄 알았는데카라마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들어와 방의 창문을 열었다그리곤 창밖으로 상체를 내밀어 한참을 보다가 다시 이치마츠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어.”

아무도.”

이치마츠가 대답했다하룻밤사이에 세상은아니 최소 마츠노 가가 있는 거리는 카라마츠와 이치마츠만을 남겨놓고 텅 비어버렸다사람들의 흔적이 남은 물건들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주인들은 없었다이치마츠와 카라마츠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떨리는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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