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아침, 눈을 뜨니 눈앞에 연한 노란빛의 천장이 있었다. 천장이 노란색이라는 건 어머니에게 들어 알고 있었기에 그게 노란색임을 알았다. 언젠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회색이 아닌 다른 색의 천장을 보리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그게 오늘이어서는 안됐는데. 나는 멍하니 누워 천장을 하염없이 노려봤다. 계속 노려보고 있으면 그게 회색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천장은 그대로 노란색이었다. 아니, 누군가 천장을 회색에서 노란색으로 바꾼 게 아니다. 그저 내가 진실을 마주하게 되었을 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곁을 돌아보았다. 일 년 전인가, 우리 중에 가장 먼저 첫사랑을 하게 된 토도마츠가 꿈꾸는듯한 표정으로 형제들에게 방안에 있는 것들의 색깔을 하나하나 가르쳐주었다. 창문은 짙은 갈색이고, 희끄무레한 색의 창문을 열면 짙푸른 색의 나무들 사이로 불그스름한 태양이 천천히 떠오르고, 그 햇살이 잠기운에 어두컴컴한 방안을 비추면. 나는 고개를 돌렸다. 저 이불 끝자락에 네가 있었다. 너는 희지도 검지도 않았다. 어둔 푸른색이었다.

 

나는 거짓말을 하는데 서툴러 비밀을 오래 간직할 수가 없었다.

? 쵸로마츠가 2등이라고? 말도 안 돼!”

오소마츠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젓가락을 휘둘렀다. 다들 어이없다는, 그리고 질투난다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해 허겁지겁 밥을 씹어 삼켰다. 형제들 중 누군가가 대체 내 상대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나는 둘러댈 방법이 없었다. 아니, 오늘 새벽부터 한참동안 고민을 해봤지만 네 앞에서 다른 사람의 이름을 대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자리를 피할 생각만 하고 있었다. 멍청한 자존심, 가련한 고집.

그 행운의 주인공은 누구지, 쵸로마츠?”

아직 잠이 덜 깨 잠긴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나는 밥그릇에 든 것을 입으로 다 털어놓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오늘 주번이라서. 먼저 갈게.”

양치 안 해?”

학교 가서 할 거야.”

챙겨 입은 교복이 내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뒤로 형제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내 눈을 뜨게 해준 사람이 같은 반일거라고. 같이 주번을 할 여학생이라던가. 현관문을 닫았다. 눈앞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잠깐 걱정을 접어두고 세상 구경을 했다.

가로수에 매달린 나뭇잎은 손끝으로 톡 건드리면 쏟아질 것 같은 진한 녹색이었다. 도로 위를 따라 달리는 노란색, 빨간색의 자동차들, 보드라운 주황색의 고양이들. 그리고 머리 위로 끝도 없이 투명한 하늘이 솟아 있었다. 길옆으로 반짝이며 흐르는 저 시냇물을 수천 겹 쌓아올리면 저렇게 깊고 푸른 하늘빛이 되지 않을까. 순간 새벽에 봤던 네 얼굴이 떠올랐다.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파란색으로 그늘진 얼굴은 아무 근심걱정도 없다는 표정으로 잠들어있었지. 나는 길가에 서서 눈을 꼭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여전히 세상은 오색찬란한 빛깔로 반짝이고 있었다. 사랑을 눈으로 확인한다는 건 복잡한 기분이었다.

 

첫 음악수업이었다. 우린 다른 반이었지만 B반과 C반이라는 이유로 음악수업을 함께 들었다. 음악선생은 출석부에 마츠노가 둘인 것을 보고 우리가 전교에 소문이 자자한 쌍둥이들이라는 걸 알아챘고, 곧 환하게 웃으며 나와 카라마츠를 맨 앞자리에 나란히 앉혔다.

여섯 명이 다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정말 똑같이 생겼구나!”

구경거리가 되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나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수줍게 웃었다. 예체능 전공으로 대학을 갈 게 아니었기에 음악 성적이 그렇게까지 중요하지는 않았지만, 음악 선생은 다른 교사들에게 이런 저런 소문을 퍼뜨리기로 유명했다. 어차피 다른 형제들이 중학교에서 그랬던 것처럼 온갖 말썽을 피우며 점수를 깎아먹겠지만 나는 다른 형제들과는 다르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다른 형제들보다 더 공부를 잘하고,

두 마츠노 군 중에 하나가 노래를 잘 부른다고 들었는데.”

사회생활도 잘하고,

접니다.”

더 평범하고,

그럼 카라마츠 군이 한 곡 불러볼래?”

더 똑똑하고,

기타도 쳐도 될까요?”

더 정상적이라고.

 

네 노래를 들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 우린 쌍둥이고, 신체기관 하나하나가 완전히 똑같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텐데, 너는 왜 이렇게 나와 다를까. 네 목소리는 왜 이렇게 깊고, 맑고, 듣는 사람의 심장을 녹여내는지. 네가 1분 남짓 노래를 하는 동안 나는 맨 앞자리에서 네 숨소리를 들으며 냉정하게 생각해보려고 노력했어. 너는 작년부터 기타를 배우러 다녔고, 나는 도서관에서 늦게까지 공부를 하다가 오느라 네가 기타를 치는 걸 거의 보지 못했다고. 너는 운동도 열심히 해서 나보다 폐활량이 좋았을 거고, 그래서 노래를 잘하는 거라고.

아니, 나는 그렇게 앞뒤를 따져볼 수가 없었어. 네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기타를 내려놓고, 음악선생이 호들갑을 떨며 칭찬을 하고, 그리고 다시 내 옆으로 돌아와 앉았을 때 나는 내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걸 깨달았어. 네가 불렀던 싸구려 유행가가 귓가에서 맴돌았고, 자기 전에는 기타 줄을 튕기는 손가락이 눈앞에서 어른거렸지. 그때부터 걱정을 하기 시작했어. 너 말고 다른 사람은 눈 안에 들어오지 않는 이 때 내가 색을 보게 될까봐.

 

하루종일 형제들을 피해 다녔다. 이치마츠와 함께 듣는 미술수업엔 몸이 아프다고 빠지고 양호실 침대에 숨어있었고, 점심시간에는 그늘진 운동장 구석에서 형제들에게 둘러댈 수 있는 핑계거리를 생각해내느라 하루 종일 골머리를 썩였다. 사실 같은 반 여자애 이름을 아무거나 둘러대면 끝날 일인데 다른 사람 이름을 입에 올리려고 하면 얼굴 표정이 일그러져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라는 게 들통나버릴 것 같았다. 손발이 차갑게 식어있었다. 나는 얼음물에 한참 담갔던 것 같이 시린 손으로 열 오른 뺨을 식히다 문득 같은 반 애들 사이에서 퍼졌던 소문이 떠올랐다. 학교 정문에서 나와 두 블록정도를 가면 보이는 허름한 가게에선 다른 가게에선 구할 수 없는 것들을 판다고. 담배도, 술도, 그리고,

 

약을 먹어서 볼 수 있던 거야.”

나는 자켓 주머니에서 약봉투를 꺼내 형제들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그런 약을 진짜 팔아?”

, 들어본 적 있어. 진짜 사랑에 빠진 것처럼 들뜬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던데, 진짠가보네.”

형제들은 내 손에서 약봉투를 빼앗듯 가져가 바닥에 부었다. 약은 둥글고 납작한 하얀색이었다. 색을 보게 해주는 약이라고 하기엔 너무 평범하게 생긴 모양새였다. 가격도 터무니없이 비쌌고.

이거 불법 아냐?”

이치마츠가 의심스럽다는 듯 약봉투를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그렇겠지. 약사가 주는 게 아니었으니까.”

도대체 이런 약은 어떻게 만드는 걸까?”

쥬시마츠가 약을 한 알 집어 들어 혀끝으로 살짝 핥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

먹으면 기분이 좋아져서 애들이 사다가 먹나봐. 그리고 색을 계속 보려면 매일 먹어야 하고.”

나는 카라마츠의 시선을 피하며 토도마츠의 곁에 주저앉아 약을 한 알씩 주워 봉투에 담았다.

체리마츠가 진짜 사랑에 빠진 게 아니라니, 재미없어.”

약을 먹어서 색이 보이는 거면 2등도 아니지 않아?”

편법이지! 스테로이드다!”

역시 체리마츠, 난 또 진짜 연애하는 줄 알았다니까.”

그렇지만,”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카라마츠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쵸로마츠는 들뜬 표정이 아닌걸.”

나는 약봉투를 내려놓고 걸어가 방을 나섰다. 방문 너머로 형제들이 약을 먹어보자며 떠들썩하게 노는 소리가 들렸다.

들뜬 순간은 아주 잠깐이었어, 카라마츠. 흑백이 아닌 진짜 세상을 보게 되어서 기쁜 것보다 내가 이 감정을 변명해야 하고 거짓말을 해야 된다는 부담이 더 컸고, 또 그 거짓말을 이 서투른 감정이 식을 때까지 질질 끌고 가야 한다는 슬픔이 더 무거웠어. 나는 그랬어.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카라마츠가 색을 보게 되었다고 새벽부터 형제들을 깨워 자랑을 했다. 상대는 연극부 선배로 대단한 미인은 아니었지만 카라마츠는 선배가 버림받은 여자 연기를 하며 눈물을 흘리는 걸 보고 자신이 선배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그 눈물을 닦아주고, 그 사람은 선배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설득하고 싶었다고. 나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그날 학교 수업을 마치고 길을 한참 걷다보니 그 가게 앞이었다. 날은 어두워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지고 있었고, 나는 주머니를 더듬어 용돈이 얼마나 남았는지 생각해보았다. 약은 여전히 비쌌다. 나는 더도 덜도 말고 딱 열 알을 사서 책가방 깊숙한 곳에 쑤셔 넣었다

오늘 밤엔 사랑하는 꿈을 꾸고 싶었다

사실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어요. 전국의 수재란 수재들은 전부 모인 그 교실에서 처음 시험지를 넘기는 순간부터 알고 있었으니까요. 이 문제는, 이 대학은 날 위해 준비된 게 아니었구나. 평범하기 그지없는 나는 여기서 환영받지 못하는구나 하고. 어느 햇빛이 잘 들고 고요한 교실이었습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발을 들이고 싶어 하루에도 몇 번씩 심장이 쿵쾅거렸던 교실이었어요. 그 교실 한가운데에 다른 학생들의 다급한 연필소리와 지우개질 소리를 들으며 나는 가만히 시험지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날 어떻게 그 학교를 나와 집으로 돌아갔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며칠을 꼬박 끙끙 앓았던 건 기억나는데, 그렇게 앓는 동안 제가 무슨 헛소리를 했는지 아무도 얘기해주지 않았어요. 저는 그저 골방에 틀어박혀 합격 발표가 나는 날을 기다렸습니다. 아주 작은 욕심이 파리처럼 조그만 날개를 달고 귓가에서 윙윙거리며 날아다녔어요. 이름이랑 수험번호를 제대로 적어서 낸 게 확실하니까, 어쩌면 붙을지도 모른다고. 저는 그 헛된 욕심을 손가락 하나로 눌러 죽일 수 있었지만 차마 그러질 못하고 시간이 흐르는 것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저는 버스를 타고 돌아오다 어느 낯선 거리에 내렸습니다. 기쁘고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이 가득한 거리를 걸으며 저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습니다. 자기 이름을 확인하고 기뻐 비명을 지르던 학생들의 얼굴을 하나씩 하나씩 눈앞에서 지워가며,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불행을 상상했습니다. 저 남자와 손을 꼭 붙잡은 여자는 사실 양다리를 걸치고 있을지도 모르고, 저 명문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잘난 척하며 걷고 있는 아이는 사실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저는 제 안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분노를 죄 없는 사람들에게 저주를 하며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저한테 실망하셨을 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이건 솔직한 제 모습이고,

 

아니, 이 부분은 지워야지.

 

한참 길을 걷다 보니 목이 타들어갈 것처럼 말라왔습니다. 재밌었어요. 이렇게 내 인생은 나락으로 굴러 떨어졌는데 내 몸은 이렇게 물을 요구하고 음식을 요구하고 휴식을 요구하고 있으니, 나는 그저 동물이 아닐까, 내 이성과 정체성이라는 건 오랜 교육으로 길들여진 습관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뭐, 내가 동물이면 뭐 어때서. 저는 자문자답을 하며 편의점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저 앞에, 어느 상가 앞에서 조촐한 무대를 차려놓고 예쁘게 생긴 여자애가 짧은 치마를 팔랑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가발인지 염색인지 알 수 없는 분홍색 머리 위엔 고양이 귀 머리띠를 쓰고, 손에는 마이크를 잡는 것도 불편해 보이는 고양이 손 모양 장갑을 끼고 있었죠. 어떻게 고정을 시킨 건지도 알 수 없었지만 고양이 꼬리도 힘없이 그녀의 동작에 맞춰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팔짱을 끼고 꼭 면접을 보는 것처럼 엄한 표정으로 서있는 사람들 틈에 끼어 아주 잠깐, 당신을 훑어보았어요. 흔한 아이돌이었습니다. 일본에는 아이돌이 해변의 모래알처럼 차고 넘쳤고, 이를 모르는 건지 아님 알면서도 모른 체를 하는 건지 조금이라도 예쁜 여자애들은 모두 아이돌을 해 사람들 위에 군림하겠다고 나섰죠. 그 많은 아이돌 틈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든 눈에 띄어야겠죠. 실밥이 그대로 매달려 있는 싸구려 치마를 무대 앞에 따개비처럼 달라붙은 남자들에게 속옷을 보여줄 것처럼 살짝 살짝 흔들면서도 살아남아야겠죠. 나는 그런 당신을 보면서 만족스러웠어요. 나는 공부를 잘했고, 고등학교도 좋은 성적으로 졸업했고. 비록 대학에는 가지 못했지만 어떻게든 멋진 인생을 살 수 있지 않을까. 고마워요. 나는 냥냥거리면서 춤을 추는 당신을 뒤로 하고 등을 돌렸습니다. 아이돌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기 위한 사람들이죠. 나는 당신에게 위안을 받았습니다.

그 무대의 건너편, 조금 떨어진 곳에 편의점이 있었습니다. 저는 온장고에서 단 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는 블랙커피를 꺼내들고 계산을 해 캔을 땄습니다. 배가 고팠고, 달달한 것을 마시면 기분도 좋아지겠지만 나는 이제 어른이니까, 고등학교를 졸업할 어른이니까 하는 생각이 들어 블랙커피를 마셨습니다. 편의점 창가에 서 밖을 내다보니 당신은 공연을 마치고 한참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하고 있었어요. 사람들 몇 명이 박수를 치는 게 보였습니다. 나는 쓰디 쓴 커피를 한 모금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가 목구멍으로 넘겼습니다. 새카만 커피는 혀를 타고 식도로 넘어가 텅 빈 위장을 자극했죠. 속이 쓰렸어요. 당신이 무대에서 사라지고 나니 나는 다시 속이 끓기 시작했습니다. 화가 났어요. 다시 이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밑바닥의,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아 화가 났습니다. 아까 그 아이돌은 왜 저 무대에서 공연을 계속하지 않는 걸까. 나는 그럼 당신을 보면서 내 처지가 당신보다 낫다고 다시 나를 위로할 수 있을 텐데. 커피는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천천히 식고 있었죠.

나는 한참동안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꼭 꽃잎 같은 분홍색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것 같더니, 고양이 귀 머리띠와 고양이 손 장갑을 벗은 당신이 편의점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두꺼운 외투를 입고, 손에는 커다란 가방을 들고 있었죠. 당신이 직접 가방을 들고 있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아마 시중을 들어주고 스케줄을 관리해 줄 소속사가 없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나는 창가 구석으로 조금 물러나 커피를 마시며 당신을 지켜봤습니다. 당신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온장고 앞으로 다가가 커피를, 달콤한 커피를 꺼내 계산을 하고 내가 있는 창가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곤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죠. ,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어린 여자애가, 나이가 많아봤자 고등학생일 여자애가 들기엔 너무 무거운 가방이 아닐까. 나는 계속 가방과 당신을 힐끔힐끔 돌아보다 고개를 돌렸습니다. 당신은 손이 시렸는지 한참동안 캔을 양 손으로 감싸고 있었습니다. 장갑은 두꺼워보였는데, 보온에는 별 효과가 없던 걸까요. 날이 춥긴 했습니다. 나는 창밖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옷을 한번 보고 몇 걸음 뒤로 물러서 당신의 옷차림을 훑어보았습니다. 치마와 긴 부츠 사이에 드러난 맨살이 새빨갛게 부어있었고, 어깨는 잔뜩 움츠러들어있었습니다. 날이 그렇게까지 춥진 않았지만 확실히 이런 차림으로는 추울 만 했죠. 내 시선을 느꼈는지 당신이 고개를 돌렸습니다. 화장이 진했어요. 그리고 눈썹 옆으로, 부드러운 얼굴선을 따라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걸 뭐라고 부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눈꺼풀에 바르는 그것도 번져서 눈가가 온통 반짝이 투성이였어요. 당신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컬러렌즈를 낀 건지 동그란 초록색 눈동자가 반짝거렸어요.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바보같이 입을 조금 벌리고 그 눈동자를 한참 보다가,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내밀었습니다. 심장이 쿵쾅거렸고, 머릿속에 온갖 말들이 꼭 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뛰어다녔어요. 당신은 바로 그걸 받아들이지 않고 당황스럽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저기, 이마에 땀이…….

나는 여자애가 민망하지 않게 말을 돌려서하는 방법도 몰랐어요. 나는 바보처럼 말끝을 흐리며 휴지를 내민 손을 조금 뒤로 뺐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낯선 사람이죠. 나는 아차, 하고 말을 덧붙였습니다.

아까, 공연 잘 봤습니다.

하고. 당신을 보면서 한참 속으로 우월감을 느꼈던 주제에, 나는 공연을 잘 봤다고 인사했어요. 그제야 당신은 활짝 웃으면서 휴지를 받아들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새하얗고 조그만 손으로 내 손에서 휴지를 가져가 땀방울이 흐르는 부위를 톡톡 두드려 닦고는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에 올려놨어요. 당신의 공연을 본 감상을 얘기해줘야 할 것 같아서, 머리를 한참 굴렸습니다. 그렇지만 노래도 귀담아 듣지 않았고 또 춤을 제대로 감상하지도 않아 생각나는 말이 없어서, 나는 연신 커피만 들이켰죠. 목구멍이 따끔거렸습니다.

하시모토 냐에요, 냐쨩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냐.

당신은 그제야 생각난 듯 냐, 하고 고양이 울음소리 같은 말을 덧붙였습니다. 하시모토 냐쨩이라니. 나는 한참 머릿속으로 당신의 이름을 되새겨보다, 고개를 들었습니다. 말해주고 싶었어요. 당신은 정말 춤을 열심히 췄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나는 당신이 최선을 다했다는 걸 느꼈고. ……. 당신은 무척 귀여웠다고. 분홍색 머리카락이 나풀거리는 것도 싸구려 고양이 발 장갑도 귀여웠고, 지금 내 옆에서 어색하게 커피 캔을 따 마시는 당신에게서 무척 달콤한 꽃향기가 난다고. 비록 지금은 고양이 귀 머리띠도, 장갑도, 꼬리도 없었지만 당신은 누가 봐도 고양이처럼 귀엽고 사랑스럽다고.

내가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당신은 빈 커피 캔을 쓰레기통에 넣고 가방을 집어 들었습니다. 가방이 무거웠는지 살짝 인상을 썼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가방을 들고, 내가 건네준 휴지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어 외투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그걸 가져가려는 걸까요?

당신은 나를 보며 고개를 살짝 숙이고 다시 활짝 웃었습니다. 나는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들었고, 당신이 이 편의점에 들어왔을 때처럼 꽃잎 바람처럼 편의점 밖을 나서는 걸 보았습니다. 지하철을 타러 가는 걸까요. 나는 한참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커피 캔을 비웠습니다. 어느 새 커피 캔은 차가워졌죠.

 

당신의 팬클럽을 결성하고, 먹고 자는 시간만 빼면 당신의 뒤를 쫓아다니는 사람들과 하나둘 안면을 트기 시작하면서 나는 내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을 수가 있었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작은 무대를 하고 나면 고양이 귀와 장갑을 빼고 힘들지만 최선을 다하는 여자아이의 모습으로 근처 편의점에 들어가 별 생각 없이 창밖너머로 공연을 본 남자들에게 웃어주고 이름을 가르쳐줬죠. 당신은 그 남자들의 최초의 아이돌이었고 마지막 아이돌이었습니다. 혼자서만 간직해온 소중한 비밀이 사실 모두의 마음속에 하나씩 남겨져 있는 공산품 같은 것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의 기분을, 당신은 알고 있을까요? 알고 있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걸 그만두지 못할 거라는 것도 알고 있겠죠. 당신은 아이돌이니까.

 

하시모토 상.

어쩌면 저는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방법으로 사랑에 빠진 남자가 아닐까요.

우린 돈도, 명예도, 권력도 아닌 사랑 그 자체에 집중해

한 명은 사랑을 팔고

한 명은 사랑을 하고 있으니.

 

 

쵸로마츠는 쓰던 편지를 찢었다. 편지 같은 건 역시 쓰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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