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마츠는 지금 하고 있는 일에 꽤 만족하고 있었다. 그가 하는 일은 고기들이 보관된 냉동 창고를 지키는 일이었다. 꽁꽁 얼어붙은 돼지며 소며 하는 것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걸 관리할 필요도 없었고, 창고 앞에 마련된 조그만 방에서 먹고 자고 하다가 식당 아줌마가 고기를 가져오겠다고 하면 같이 들어가 나르는 걸 도와주는 것이 다였다. 마주치는 사람도 얼마 되지 않았고, 식당 아줌마가 한 번 고기를 가져가면 일주일은 고기를 썼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만 고기를 나르면 됐다. 게다가 봉급도 적지 않았다. 숙식을 제공해주는 덕에 이치마츠는 자신의 취미생활에 돈을 조금 쓰고도 남아 저축을 할 수 있었다. 강철 문 너머에 하얗게 얼어붙은 고기들이 새파란 조명 아래에서 매달려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지만, 그가 이전에 하던 일에 비하면 훨씬 쾌적하고 마음이 편했다. 오늘도 이치마츠는 그다지 할 일이 없었고 자기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다음 달이면 계약이 끝나 다시 재계약을 하게 된다. 이치마츠는 이번에 여주인의 눈치를 살펴보고 방에서 고양이를 키워도 되는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고양이를 좋아했고 늘 키우고 싶었지만 부모님과 함께 살 때는 이치마츠가 한 생명을 책임지기엔 너무 어리다고 거절당했고, 부모님도, 집도. 심지어 한 쪽 얼굴마저도 잃었을 땐 고양이를 키울 방이 없었다. 성인이 된 이치마츠가 새로운 직업을 얻었을 땐 매일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괴로워하다 잠이 들어 고양이를 키울 여유가 없었다. 이치마츠는 이제야 조금 숨을 돌릴 수 있었고, 조금씩 고양이를 데려올 때 필요한 것들을 사들이고 있었다. 고양이가 쓸 모래화장실이라던가, 고양이가 좋아할 쥐 인형이라던가. 어느 품종이 좋다고 딱 찍어둔 건 없었다. 이치마츠는 어느 날 그의 운명 같은 고양이를 만나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여기에도 방이 있었군!"

낮지만 요란한 목소리가 방문 앞에서 들리더니 이치마츠의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무슨 일이지? 이치마츠는 당황해 잠깐 굳었다가 문 앞에 걸어둔 마스크를 꺼내 뒤집어쓰고 문을 열었다. 깜짝이야! 낯선 남자는 이치마츠의 마스크를 보고 놀라 뒷걸음질 쳤다가 다시 미간에 힘을 주고 멋진 척 미소를 지어보였다. 남자는 눈썹이 짙고 어딘가 가벼워 보이면서도 몸이 탄탄하고 힘이 넘쳐흘렀다. 이치마츠는 본능적으로 이런 종류의 사람을 꺼리는 편이었다. 그는 오랜 시간 고아로 살아와야 했고, 사고의 후유증으로 불안증세도 있었으며 뭣보다 그의 얼굴에 남은 흉 때문에 주눅이 들어 눈을 직접 마주치는 것도 어려워했다. 이렇게 사랑받고 자란 티가 나면서 자신감이 넘치고 모두가 자신을 사랑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은 괜히 미웠다. 하지만 이치마츠는 그런 자신을 더 미워했다.

이 사람은 뭐지? 이치마츠는 아무 대답 없이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열심히 손질한 티가 역력한 머리카락, 새까만 가죽 자켓, 그리고 안 어울리는 해골벨트에 새까만 스키니진까지, 남자는 이 저택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남자도 이치마츠가 훑어보는 시선을 느끼고 씨익 웃었다.

"처음이죠, 우리? 혹시 마스크 써서 내가 못 알아보는 건가? 마츠노 카라마츠, 여사님의 비서로 왔습니다! 오늘은 여사님이 친목 모임에 나가시는 날이라 휴일!"

비서. 이치마츠는 바로 카라마츠의 정체를 눈치 채곤 피식 웃었다. 얼굴을 전부 가리는 마스크 덕에 카라마츠는 눈치 채지 못했고, 그는 대뜸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이치마츠는 손을 잡아야 되나 잠깐 고민하다 결국 살짝 카라마츠의 손가락 끄트머리를 잡고 잠깐 흔들곤 바로 손을 놓았다.

"이치마츠."

"그냥 이치마츠?"

이치마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 이치마츠 하고 몇 번 되뇌어보다 역시 내가 온 첫 날 소개받은 사람 중엔 없었던 것 같군. 하고 고개를 저었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와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이십대 초반? 카라마츠는 자기가 저택에서 만난 사람들과 어떻게 지냈는지 저택이 넓고 산책하기도 좋고 밥도 맛있고 하는 얘기를 늘어놓다 문을 가로막고 서있는 이치마츠 너머로 방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저기, 들어가봐도 될까?"

이치마츠는 곧 인상을 찌푸렸지만 뭐라 둘러댈 말이 떠오르지 않아 결국 문에서 조금 비켜 카라마츠가 들어올 수 있도록 했다.

"실례하겠습니다, , 고양이 좋아해?"

카라마츠는 방에 들어와 소파에 앉아 멋지게 다리를 꼬더니 테이블에 가득 쌓인 애완동물 잡지나 사진, 책을 보고 웃으며 이치마츠를 돌아보았다. 성인 남성이 고양이를 좋아한다고 놀리는 건가? 이치마츠는 괜히 기분이 상해 대답하지 않고 방 한편에 있는 작은 냉장고에서 캔 커피를 꺼내 카라마츠 앞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잘 마실게. 카라마츠는 눈치가 없는 건지 철면피인건지 아무렇지도 않게 캔을 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치마츠는 자신의 공간에 낯선 사람이 들어온 게 벌써부터 불편해지고, 신경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이치마츠는 최대한 카라마츠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아 카라마츠가 얼른 꺼져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신기한 듯 방을 이리저리 둘러보다 방에 어울리지 않게 강철로 된 문을 발견했다.

"저 문이 화장실문은 아니겠지? 화장실 문은 그 옆에 있는 나무문 같은데? 저긴 어디야?"

카라마츠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바로 말을 놓아버렸다.

"냉동 창고."

"특이하네. 방 안에 냉동 창고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니. 저택에 사람이 많지도 않은데 냉동 창고를 따로 두고 고기를 보관하는 거야? 몇 명이더라, 여사님, , 이치마츠, 식당 이모, 경비 아저씨, 기사 아저씨. 총 여섯 명 밖에 안 되는데. 여기서 파티 같은 거 자주 열어서 그런가?"

카라마츠는 혼자 질문을 하고 혼자 대답을 하고 있었다. 이치마츠는 말없이 앉아 무릎 위를 손가락으로 작게 톡톡 두드렸다. 이치마츠가 말이 없으니 카라마츠는 괜히 방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다 뭔가 생각난 듯 아, 하고 이치마츠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까 정원 호수 근처에서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혼자 떨어져 있는 걸 본 것 같은데, 혹시 본 적 있어?"

고양이? 이치마츠가 고개를 저었다. 이치마츠는 자기 방을 떠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가끔 시내에 나갈 때도 정원이 있는 정문 쪽이 아닌 그의 방에서 제일 가까운 쪽문으로 나가 버스를 타기 때문에 그가 여기서 일한지 거의 1년이 다 되어가지만 정원에 가본 일은 없었다. 호수가 있다는 것도 처음 듣는 얘기였다.

"어젯밤에 산책하는데 어디서 애기 우는 소리 같은 게 들리는 거야. 그래서 설마 귀신인가? 하고 가봤는데 정말 주먹만 한 애기 고양이가 혼자 앵앵거리고 울고 있더라고. 어미가 나르다가 떨어뜨린 것 같던데, 어미가 물어가지 않으면 그대로 죽을 것 같아서 오늘 아침에 확인해보려고 했다가 깜빡했어. 같이 가볼래?"

야생에서의 삶은 가혹하고, 카라마츠의 말대로 어미고양이가 새끼들을 데리고 집을 옮기다 한 마리를 깜빡했다면 새끼고양이는 거의 죽은 목숨이다. 요즘 날씨는 제법 풀렸다지만 밤에는 쌀쌀했고, 이치마츠는 얼어 죽은 고양이 시체를 볼 자신이 없었다. 이치마츠가 한참 고민을 하자 카라마츠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치마츠의 손을 잡아끌었다.

"지금 얼른 가지 않으면 한 생명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가자!"

카라마츠의 손이 뜨끈뜨끈했다. 이치마츠는 얼떨결에 그 손을 잡고 일어나 방문 열쇠를 집어 들고 카라마츠를 따라 나섰다. 카라마츠는 영 손을 놓을 생각이 없어보였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에게 붙들려가며 카라마츠의 손을 잡고 있는 게 그닥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체온을 이렇게 오래 느끼고 있는 것은 꽤 오랜만이다. 지난달에 저택 앞에서 만난 고양이를 만졌을 때가 마지막인가. 두 사람은 냉동 창고가 있는 지하에서 한 층 위로 올라가 부엌을 지나가다 식당 아줌마와 마주쳤다.

"좋은 아침입니다, 마담! 아침 식사 기대하고 있습니다!"

"어머, 이치마츠 군이랑 카라마츠 군……."

아줌마는 말끝을 흐리며 이치마츠를 돌아보았지만 이치마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그 앞을 지나쳤다. 바로 어제 식당 아줌마가 고기를 가지러 내려와 이치마츠에게 여주인의 새 '장난감'에 대해 한참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이 집의 주인이자 대부호인 여주인은 사실 어느 요정에서 있던 '출신이 더러운' 여자였다. 그녀는 힘든 삶을 꾸려가던 중 우연히도 이 집의 원 주인인 '멍청한 박사'를 만났다. 그녀는 이것이 그녀에게 내려진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깨닫고 온 힘을 다해 달려들어 박사의 정실부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행복한 것도 잠시, 그녀가 이 집의 안주인이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몇 년마다 박사의 아들, , 주치의가 차례로 실종되어 이 근방의 마을까지 발칵 뒤집혔다. 하지만 그들은 이십 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발견되지 않았고-식당 아줌마는 당연히 그 세 사람 모두가 죽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결국 박사마저 실종되는 것으로 이 집은 여주인의 소유가 되었다. 여주인은 자신에게 내려진 시련에 괴로워하며 힘든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상처를 극복하고 젊고 잘생긴 남자들을 데려와 잠깐 가지고 놀다 쫓아내는 나쁜 버릇이 생겼다. 그리고 며칠 전 새로운 장난감이 저택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번 장난감은 그 전 남자들과는 어딘가 달랐다. 자신이 남창과 다를 게 없다는 데 부끄러움을 느끼지도 않고 저택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며 여주인이 있든 없든 간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열심히 치장을 하고 돌아다니는데 어딘가 어색함이 묻어났다. 부엌 아줌마는 그런 그의 스타일을 싸구려라고 잘라 말했다. 남의 말 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도 높은 도덕심을 요구하는 아줌마는 남자를 굴러먹을 대로 굴러먹은 남창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치마츠는 간만에 활기가 넘쳐 보이는 부엌 아줌마를 보며 이런 시골에서도 재밌을 만도 하지, 하고 흘려들었던 것이다.

저택은 무지막지하게 넓었다. 둘은 부엌문으로 나와 오솔길을 따라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정원은 주기적으로 전문 업체에서 나와 관리를 하고 있었다. 이치마츠는 간만에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반짝이는 햇살에 눈을 찌푸렸다. 카라마츠는 어느 새 썬글라스를 쓰고 고양이를 담아오겠다며 작은 종이박스까지 주워들어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고양이를 데려온다면 이치마츠가 키울 수 있을까? 카라마츠도 그닥 경험이 많아 보이지는 않은데. 이치마츠는 새삼 어색해져 카라마츠의 손을 놓았다. 카라마츠도 아차했는지 귀 끝을 붉혔다. 정원은 벚나무 몇 그루로 시작해 자작나무 숲을 지나 조그만 나무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호숫가로 이어졌다. 바람이 나뭇잎 사이를 훑고 지나가면서 쏴아아- 하는 소리가 났다. 돈도 많지. 이치마츠는 다음 계약 때 좀 떼를 써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이 쯤에 있었는데...”

카라마츠가 허리까지 오는 수풀 사이를 뒤지며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었다. 새끼고양이가 우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벌써 죽었겠구나. 이치마츠는 한 쪽에 서서 후드 주머니에 손을 넣고 호수 표면위에 비치는 구름을 한참 보고 있었다. 날씨가 좋았다. 새끼고양이는 어미가 물어간거면 좋을텐데, 이렇게 좋은 날에 죽는 건 슬프다.

, 찾았어.”

카라마츠의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이치마츠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입이 썼다. 만약 어제 저녁에 이치마츠가 난데없이 산책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여기까지 나왔더라면 고양이를 구할 수 있었을까. 카라마츠는 자리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아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조그만 고양이를 감쌌다. 고양이는 정말 작았다. 카라마츠가 얘기했던 것처럼 정말 주먹만 하지는 않았지만,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죽은 고양이라고 해서 보기 흉하지도 않았고 그저 차갑고 숨을 쉬지 않는 고양이일 뿐이었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가 손수건에 싼 고양이를 가져온 종이박스에 담는 것을 지켜보았다. 카라마츠는 풀이 죽어 말없이 서있다가 옆에 조심스럽게 종이박스를 내려놓고 어디선가 두꺼운 나무 막대를 찾아와 고양이가 발견된 수풀 한 쪽을 파내기 시작했다. 고양이를 묻어줄 생각인가. 이치마츠는 속으로 카라마츠를 비웃었다. 키우던 병아리가 죽어서 슬퍼하는 유치원생도 아니고, 성인 남자가 새끼 고양이가 죽었다고 무덤을 만들어주겠다며 맨 땅을 파고 있는 모양이라니. 유치하다면 유치했다. 착하게 보이고 싶은 건가? 나같은 사람한테 잘 보일 필요 없는데. 하지만 카라마츠는 말없이 계속 땅을 팠다. 삽도 아니고 나무 막대였지만 카라마츠는 제법 요령 있게 땅을 팔 줄 알았다. 도시 촌놈은 아니겠구만. 카라마츠는 어느 새 조그만 구덩이를 만들어 상자를 내려놓았다. 카라마츠는 의외로 이치마츠에게 함께 고양이의 죽음을 애도하자거나 혹은 무덤에 흙 뿌리는 것을 함께 하자고 하지는 않았다. 그저 혼자서 고양이 무덤을 만들고 몇 번 토닥거려준 뒤에 손을 털고 일어나 조금 기운 빠진 얼굴로 아침 먹으러 돌아가자며 앞서 걸었다. 이치마츠는 지금 자신이 카라마츠를 위로해줘야 되는 건가 싶었지만 이내 포기하고 카라마츠의 뒤를 따라 걸었다. 카라마츠는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부엌 문 앞까지 한 마디도 없이 걷다가,

괜히 따라 나오게 해서 미안.”

하고 사과했다. 이치마츠는 고개를 저으며 별 일 아니라며 묵언의 대답을 했다. 이치마츠는 오랜만에 부엌에서 다른 직원들과 아침식사를 했다. 카라마츠는 고양이가 죽어서 슬펐다던가 하는 얘기는 꺼내지 않고 직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몇 마디 맞장구를 치는 게 다였다. 마스크 밑으로 밥을 먹는 게 제법 힘들었다. 이치마츠는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안락하고 따뜻하고 아무도 없는 나만의 방. 이치마츠는 마스크를 벗어 문 앞에 걸어두고 소파에 주저앉는 순간 카라마츠가 그의 마스크에 대해 한 마디도 묻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굴을 온통 가리고 눈구멍이랑 숨구멍만 몇 개 난 밋밋한 가면을 보고도. 이상한 기분. 이치마츠는 곧 생각을 털어버리고 다시 아까 읽던 책을 집어 들어 접어둔 페이지를 펼쳤다.


오디션에 떨어졌다. 작은 극단에서 하는 조연이라 너무 쉽게 생각했던건가. 홈페이지의 공고를 암만 뒤져봐도 내 이름은 없다. 나도 학교에선 날리던 메소드 연기파 배우였는데, 학교를 졸업하고 나니 쉽지가 않다. 세상은 얼마나 넓고 나보다 잘난 사람은 얼마나 많은지. 아마 이 시간에 넷까페에서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 쓰레기들중에도 나보다 잘난 사람이 차고 넘칠 것이다. 사실, 나는 이제 더이상 멋진 사람은 아니다. 드넓은 강당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독백을 읊는 왕자가 아닌 것이다. 형제들과 함께 있을때는 실감하지 못하지만 이렇게 밖에 나와서, 마츠노네 여섯쌍둥이가 아닌 마츠노 카라마츠로 세상을 마주할때면 늘 이렇게 작아진다. 작고 작고 작아서 누군가가 꾹 밟아 찌그러뜨려 분리수거통에 넣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나는 한참동안 다른 극단들의 오디션공고를 스크랩하다 그만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불현듯 지금도 삼삼오오 뭉쳐서 뒹굴거리고 있을 형제들이 보고싶어진 것이다. 다들 저녁을 먹고 포커를 치고 있거나, 아님 쥬시마츠가 좋아하는 야구 보드게임을 하거나, 아님 토도마츠가 내일 알바갈 때 입고 나가려고 골라둔 옷을 망치거나 하고 있겠지. 너무 익숙해 눈앞에서 훤히 그려지는 풍경을 찬찬히 읽어보다 심장 한켠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우리의 방 한 구석엔, 그녀석이 못생긴 고양이를 한마리 끌어안고 있을 것이다. 힘이 하나도 없어보이는 흐릿한 눈으로 고양이를 품에 안고 뒹굴다가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뭘 끄적거리는 녀석이. 꼭 발에 납덩이를 매단것처럼 점점 발걸음이 느려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두렵다. 내가 품어온 감정이 두렵고, 녀석과의 그 거리감도 너무 멀어서 나는 무섭기 그지없다. 아무도 없는 이 어두컴컴한 골목길보다도 그 싸늘한 시선이 무서워 견딜수가 없다.

언제부터 한 배에서 동시에 태어난, 그리고 나랑 똑같은 얼굴을 한 형제를 마음에 두었냐고 물으면 나는 한참 고민을 하다, 내가 게이라는 걸 자각한 순간부터 녀석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부모님이 여행을 가신다고 집을 비우시고 오소마츠 형이 친구한테 빌려온 야한 비디오를 보던 밤이었다. 밝은데서 보기 부끄럽다고 쵸로마츠가 난리를 피우는 통에 거실 불을 끄고, 혹시나 이웃집에서 보이지 않을까 싶어 창이고 뭐고 다 커튼으로 가려 공기가 텁텁하고 더웠다. 비디오에선 어리게 생긴 여배우가 인터뷰를 잠깐 하다가 곧 옷을 벗고 하얗고 부드러워보이는 피부에 걸친 야한 속옷을 어쩔줄몰라하는 표정을 지으며 풀어내렸다. 오소마츠 형은 연신 오오, 이열, 하면서 추임새를 넣었고, 쵸로마츠와 토도마츠는 얌전히 무릎을 세우고 앉아 침을 꼴딱꼴딱 삼켰다. 쥬시마츠는 형제들에게 뭔가 물어볼게 있는 것 같았지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앉아 티비 화면만 응시할 뿐이었다. 나는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져 구석에 있던 담요를 두르고 거실 벽에 등을 붙이고 앉았다. 형제들과 이런 걸 보는게 어색하고 민망했다. 남자는 여자의 가슴이니 엉덩이니를 한참 주물렀고 좀 지루해질 때 쯤 얼굴에 모자이크가 된 남자가 여자의 안에 삽입하는데, 그 터지는듯한 신음소리에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나는 이정도는 야하지도 않고 여자가 섹시하니 어쩌니 하고 동생들 앞에서 오기를 부리고 싶었지만 할수가 없었다. 열 다섯살의 나이에, 나는 싸구려 AV에 출연한 남자의 단단한 등과 거친 손, 그리고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빠져들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내 옆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움츠러든 나와는 다르게 거실 벽에 늘어지듯 기대고 불규칙한 숨소리를 내며 발끝을 움찔거리는 이치마츠의 존재감이 확, 내게 밀려온 것이다. 이치마츠가 뜨거운 용암처럼 내 위로 우르르 쏟아지는 것 같았다. 입이 바싹바싹 말랐다. 옆에서 열이 오른 이치마츠가 너무 뜨거워서 나는 견디질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가 혼자서 자위를 했다. 거실에서 오소마츠 형이 조루니 동정이니 하면서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이치마츠가 무서워서 엉엉 울었다. 찬물로 한참 세수를 해도 얼굴에 오른 열이 내려가질 않았다. 

나같은 사람을 게이라고 하는 건 고등학교에 가서나 알게 됐다. 나는 내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티를 내기가 싫어 일부러 여자애들을 쫓아다니고 터프한 남자 배우들을 따라했다. 따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런 모방은 연극부 활동을 하는데도 도움이 많이 됐다. 여자애들은 내 적극적인 공세에 살짝 흔들리다가도 어딘가 이상하다며 돌아서곤 했다. 그러면 나는 오히려 안심이 되어 형제들 앞에서 마음껏 슬퍼할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치마츠는 점점 내게 싫은 내색을 해서, 결국엔 일상적인 대화도 세 마디 이내로 끝내는 어색한 사이가 되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대화를 오래 하면 할수록 그 무심하고 낮은 목소리와 거친 몸짓에서 시선을 돌리기가 힘들었다. 어딜가든 이치마츠의 존재감은 내 주위를 맴돌곤 했다. 화장실에서 혼자 거울을 보면서 대체 나와 똑같이 생긴 그 녀석이 왜 좋은건지 이해하려고 해본 적도 없진 않았다. 하지만 오소마츠 형도, 쵸로마츠도, 쥬시마츠도, 토도마츠로도 채울 수 없는 그 특별한 무언가가 이치마츠에게 있었다. 거울을 보면서 이치마츠가 늘상 짓는 표정을 지어보려고 해도 되지가 않았다. 나는 이치마츠처럼 먼지냄새가 나는 책을 읽지도 않고, 늘 좋고 싫은게 분명하지도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늘 누군가에게 시선을 끄는 것도 하지 못한다. 내가 연기를 할 수 있는 것은 내 자신을 버리고 완전히 그 배역이 될 수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나는 이치마츠를 내 안에서 완전히 버릴수가 없어 이치마츠가 되지 못했다. 

나는 내 자신이 무섭고 두려워질수록 더욱 더 형제들에게서 달아나 형제들과 다른 나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더 멋있고 섹시한 남자 배우를 따라했고, 형제들은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 연극이니 배우니 하는 것들로 도망쳤다. 아무런 성과도 없었지만-남자 몇 명과 짧은 만남을 가지긴 했다-, 언젠간 나는 완전히 내 안에서 이치마츠를 버리고 나를 버려서 아무렇지않게 이치마츠가 데려올 여자에게 똑같은 얼굴이 여섯이나 되는데 잘못된 선택을 하셨다고 웃어줄 수 있는 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생각에 잠겨 한참을 걷다보니 어느새 집 앞이었다. 집 열쇠를 찾느라 주머니를 뒤적거리는데 뒤에서 불쑥 열쇠를 쥔 손이 나와 문을 열었다. 이치마츠였다. 나는 다시 등줄기에 오싹하고 소름이 돋았다. 말없이 문을 열고 나를 앞질러 들어가는 이치마츠의 뒤로 알싸한 체향이 남았다. 나는 아랫입술을 한번 깨물고 바닥만 보다가 흡, 하고 기합을 넣고 웃으며 이치마츠의 뒤를 따랐다.

"고양이 먹이 주고 온거야?"

"빠칭코."

의외로 이치마츠가 바로 대답을 했다. 보니까 이치마츠의 후드 주머니가 무거웠다. 제대로 땄구만. 나는 괜히 웃음이 나와 이치마츠의 뒤를 따랐다. 

형제들이 깨지 않게 조용히 겉옷을 벗어 걸어두고 간단히 씻은 뒤 방으로 돌아와 잠옷으로 갈아입으려는데 자리에 먼저 누워있던 이치마츠가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깼어? 미안, 얼른 갈아입을게. 도로 자."

내가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여도 이치마츠는 계속 해서 내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치마츠의 시선이 따가웠다. 나는 민망해져 등을 돌리고 서서 재빠르게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이 방엔 분명 여섯 명이 있는데, 꼭 나와 이치마츠 단 둘만 남은 것 같았다. 이치마츠는 내가 누울 자리 바로 옆에서 앉아 내가 옷을 갈아입는 걸 지켜보고, 나는 그 따가운 시선을 느끼면서 긴장하는 것이다.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방이 어두워 이치마츠에게 보이지 않겠다 싶어 안심했다. 동생 앞에서 고작 옷갈아 입는 정도로 손을 떠는 형은 실격이다. 물론 동생을 보면서 발정하는 형도 합격은 아니지만.

이치마츠는 가만히 앉아 내가 잠옷을 갈아입고 로봇처럼 척척 걸어와 잽싸게 자리에 눕는걸 지켜보았다.

"자장가 불러줄까?"

나는 괜한 오기로 이치마츠에게 씩 웃어보였다. 그럼 늘상 그렇듯 이치마츠가 비웃거나, 아님 경멸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돌아누울 것이다. 그러나 이치마츠는 그러질 않고 얌전히 자리에 누워 부스럭거리며 나에게 기대 눈을 감았다. 낯설었다. 그새 샤워도 했는지 이치마츠의 부드러운 머리칼에서 샴푸냄새가 났다. 나는 지금 침을 삼키면 꼴깍 하는 소리가 이치마츠에게 들릴까 들리지 않을까 하고 한참 고민하다 천천히 조금씩 침을 삼켰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던건가. 고양이들한테 밥을 주다가 히키코모리라고 욕을 먹었다던가, 아님 아끼던 고양이가 죽었다던가, 형제들이 툭툭 던지는 장난에 상처를 받았다던가. 다른 형제들 앞에선 티도 내지 못하고, 바로 옆에 눕는 나에게 간신히 기대 위로를 받는 것일테다. 나는 아직까지도 예민하게 곤두선 전신의 감각을 최대한 가라앉히고 아무렇지 않은 척 카라마츠에게 한쪽 팔을 두르고 살짝 끌어안아 토닥였다. 이치마츠는 잠깐 내뺄지 말지 고민하는 것 같더니 곧 얌전히 안겨있다 잠이 들었다. 내 역할은 이거다. 오소마츠 형이 하지 못하는 부류의 형 노릇을 대신 하는 둘째형으로, 동생들이 어렵게 느끼지도 않으면서 가끔 이렇게 기댈 수 있는 형. 나도 눈을 감아 숨을 골랐다. 이미 셀 수 없이 많은 포기를 했고 오늘도 아마 수 백 번째 포기를 했다. 앞으로 수 천 번 쯤 더 반복하면 아예 잊을 수 있을까. 

가장 견디기 힘든 시간은 잠자리에 들기 직전이다. 불을 끈지 한참 지났지만 나는 잠에 들지 못하고 벽 쪽으로 몸을 돌려 한참 눈을 감고 있었다. 등 뒤에는 그가 있다. 베개에 머리만 닿으면 순식간에 잠들어버리는 카라마츠가, 미동도 없이 조그맣게 색색 거리는 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다. 다른 형제들도 자고 있을 테지. 나는 혼자 벽을 바라보며 다른 생각을 하려고 노력한다. 


내가 다른 형제들의 눈이 무서워 관심이 있는, 표현이 이상하다. 마음에 있는, 이것도 이상하고. 좀 '다르게 느껴지는' 형제를 마음껏 만지지 못해서 괴롭다는 류의 견디기 힘듬이 아니다. 나는 이불 끝자락을 둘둘 말아 끌어안고 코를 파묻었다. 


연인과 데이트를 하다 헤어짐이 아쉽다는 사람들의 노랫소리가 귓가에서 맴돌았다. 바래다 주는 길엔 발걸음이 느려지고, 떠나기 아쉬워 집 앞 가로등 밑에서 한참을 이야기를 하고 입을 맞춘다는 사람들의 사랑 타령. 나는 오히려 그렇게 헤어짐을 아쉬워 하길 바랬다.


아침 일찍 만나 밤 늦게까지 데이트를 하고도 모잘라 바래다 주고 오는 길엔 외로워 마음이 서늘하고, 밤 늦게까지 보고 싶은 이가 눈 앞에 어른거려 잠들지 못하길 바랬다. 사랑하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고 감동받게 해주고 싶어 해 뜨는 줄도 모르게 낯간지러운 시를 써내려가고 싶었다. 그리고 아침엔 밤 사이에 연락이 오지 않았을까 두근거리며 반쯤 깨자마자 휴대폰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바로 옆에 누워, 한평생 들어온 그 숨소리를 들으며 온갖 상념에 빠져 괴로워 하고 있는 것이다. 손 한 번도 제대로 잡지 못하고, 혹시나 몸이 닿았다간 실수라도 해버릴까 최대한 멀찍이 누워서는 있을 수 없는 상상을 하며 잠이 들기를 기다린다. 


한때는 낯선 곳에서 낯선 너를 만나길 바랬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역시 아무도 모르는 너를 만나 운명처럼 마음을 빼앗기고 싶었다. 네가 너를 만나기 이전까지의 나는 하나도 모른 채로, 나를 그 순간 그 대로 사랑해주길 바랬다. 서로에게 필요한 건 그 마음뿐인 채로 만남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싶었다. 둘이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아마 전혀 낯선 얼굴의 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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