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마츠는 그날 밤 악몽을 꿨다. 잠들기가 무서워 이치마츠는 TV도 크게 틀어보고 졸릴 때마다 찬물로 세수를 하고 담배를 피우는 등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지만 수마를 이겨낼 수는 없었다. 술이라도. 이치마츠는 술에 약한 편이었다. 술에 약한 만큼 조금이라도 마시면 금세 취해서 꿈도 꾸지 않고 잠들 수 있었을 텐데 방 안 곳곳을 다 뒤져보아도 술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부엌을 뒤져볼까 하기도 했지만 누가 살인자인지 모르는 지금 눈에 띄게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는 건 위험하다. 불현듯 카라마츠 생각이 났다. 카라마츠는 살아 돌아올 수 있을까. 카라마츠한테 시체 얘기를 해야 할까. 난방을 최대치로 올렸지만 이치마츠는 온몸이 오들오들 떨려왔다. 긴장한 탓인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치마츠는 진통제 두 알을 물도 없이 삼키고 소파 구석에 쪼그려 앉아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문 한 겹 너머에 있는 시체도, 지금 이 저택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살인자도 무서웠지만 그보다 악몽이 무서웠다. 이치마츠는 다시 도살장의 그 피 냄새가 코끝을 스치는 게 느껴졌다.

이치마츠!”

문을 쿵쿵 두드리는 소리에 이치마츠가 눈을 떴다. 그는 소파에서 굴러 떨어져 테이블 사이에 낀 채로 자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 카라마츠가 문고리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이치마츠를 불렀다. 이치마츠는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선물 사왔다! 이거 맛있다더라. 제일 비싼 거야.”

카라마츠가 금박 포장지가 요란한 과자 상자를 들이밀었다. 이치마츠는 울고 싶었지만, 밤새 눈물을 쏟아 온몸의 수분이 다 빨려나간 듯 했다.

무슨 일이야? 이치마츠? 무슨 일 있었어?”

카라마츠가 놀라 과자상자를 테이블 위에 던지듯 내려놓고 이치마츠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따뜻했다. 포근하고. 카라마츠는 평소랑 다르게 가죽 자켓도 해골벨트도 없이 하얀 셔츠에 짙은 색 가디건만 걸치고 있었다. 이치마츠는 잠깐 숨을 돌리고 카라마츠를 잡아 당겨 방안에 밀어 넣고 문을 잠갔다.

무슨 일이야.”

카라마츠가 이치마츠의 양 뺨을 잡고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가 반가우면서도 그가 이치마츠의 흉터에 손을 올리는 게 신경 쓰였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가 열이 나지는 않은지, 어디 다치진 않았는지 확인을 해보고 가디건 소매를 잡아당겨 이치마츠의 눈가를 꾹꾹 눌러 닦았다.

지금 자다가 일어난 거 같은데 악몽 꾼 거야? 형아 며칠 못 봤다고 울었어?”

카라마츠가 피식 웃고 이치마츠를 다시 끌어안아 등을 토닥였다. 카라마츠의 머리카락에서 차가운 바깥 냄새가 느껴졌다. 새삼 이치마츠는 자신이 이 지하에, 딱 하나 있는 방에 혼자 있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치마츠는 가만히 카라마츠의 품에 기대어 숨을 고르다 조심스럽게 카라마츠의 허리에 팔을 둘러 안았다. 카라마츠가 싫어하면 바로 내려야지. 하지만 카라마츠는 움찔하지도 않고 이치마츠를 가만히 안고 있다 그의 뒷머리를 쓸어내렸다.

꿈 얘기나 들어볼까. 과자도 먹고.”

이치마츠는 잠깐 멈칫 했다가 TV를 틀어 볼륨을 높였다. 카라마츠가 TV는 왜? 하고 물었지만 이치마츠는 대답하지 않고 카라마츠를 끌고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를 뚜껑내린 변기 위에 앉혀놓고 자긴 세면대 앞 벽에 기대어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하나 하고 생각했다. 이치마츠는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시체를 발견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이치마츠가 그 자리에서 쓰러질 것 같은 걸 간신히 버티면서 줄줄이 늘어선 냉장고를 확인해본 결과 총 네 구의 시체가 있었다. 젊은 여자와 남자, 장년의 남자 둘. 이치마츠는 최대한 냉장고를 건드린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자리를 정리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시체는 깔끔했다. 피 묻은 손으로 시체를 만져 자국이 남은 곳도 없었고, 칼에 찔려 죽은 것으로 보이는 시체들은 대부분 급소를 한 번에 찔려 죽은 것들이었다. 아마도 살인자는 한두 번 살인을 해본 사람도 아니고, 살인을 저지르고 태연하게 시체를 이곳으로 옮겨왔다. 왜 시체를 냉동실에 둬야 했을까. 이치마츠를 대체 왜 고용해 이곳에서 시체가 있는 창고를 관리하게 했을까. 죽은 사람들은 누구인가. 왜 죽은 걸까. 저 사람들이 마지막 피해자일까.

이치마츠는 한참을 벌벌 떨다 순간 식당 아줌마가 늘어놓던 소문이 생각났다. 이 집에서 실종된 박사와 아들, , 그리고 주치의. 네 명. 이치마츠는 최대한 마음을 가다듬고 자신이 서재에서 빌려온 책들을 옆구리에 낀 채 마스크를 쓰고 방 밖을 나가 문을 잠갔다. 마스크를 써서 다행이다. 꼭 다리에 납덩이가 매달린 것처럼 무거웠다. 한 걸음 한 걸음. 충격으로 쓰러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이치마츠는 강했다. 다행히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이치마츠는 2층에 올라가 복도에 혹시 누가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고 조심스럽게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긴장이 풀려 다리에 힘이 빠졌다. 이치마츠는 비틀거리다 테이블 위에 책들을 대충 올려놓고 박사가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책상을 뒤졌다. 오랫동안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는지 서랍이 뻑뻑해 잘 열리지 않았다. 손이 떨리고 시려 그저 서랍의 내용물만 확인하는데도 힘들었다. 서랍에는 온갖 물건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맨 마지막 칸에서, 이치마츠는 세 남자와 두 여자가 활짝 웃으면서 찍은 단체사진을 발견했다. 안타깝게도, 모두 이치마츠가 직접 얼굴을 확인했던 사람들이었다. 죽었구나. 다들.

사진 뒤편엔 볼펜으로 거의 30년 전의 날짜와 처남 생일에 온 가족이 모이다.’ 라고 쓰여 있었다. 다시 사진을 확인해보니 박사의 아내를 사이에 두고 서있는 남자의 양복상의 주머니에 청진기가 삐져나와있었다. 주치의는 박사의 처남이었던 것 같았다. 이치마츠가 식당 아줌마한테 듣기론 함께 실종된 사람이 이 집안사람들의 주치의라고 했는데, 아마 주치의가 실종된 다음에 이 집에서 일하게 된 게 아닐까 하고 추측했다.

이치마츠는 사진을 접어 바지 주머니에 꾹 쑤셔 넣고 테이블위에 올려놓았던 책을 책이 원래 꽂혀 있던 자리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 그가 빌리고 있던 아라비안나이트 시리즈의 다음 권을 꺼내들고 서재 문을 나섰다.

카라마츠는 입을 떡 벌렸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이치마츠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치마츠는 목이 타들어가 세면대에서 수돗물을 한 컵 받아 한 번에 마셨다.

이게 그 사진.”

이치마츠가 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내 내밀었다. 카라마츠는 몇 번이나 사진을 앞뒤로 넘겨가며 보다가 다시 이치마츠에게 돌려주었다.

그럼 저, 그니까, 창고에 시체가 있는 거네. 네 명이나.”

이치마츠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시체, 확인해보려면 봐.”

안 보는 게 좋지만……. 이치마츠가 말끝을 흐렸다. 카라마츠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네 말을 못 믿는 게 아냐. 그냥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는 거야.”

이치마츠도 동의하는 바였다. 그도 수없이 많은 시체를 보았지만 사람의 시체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눈을 감으면 간밤에 꾼 그 악몽이 눈앞에 선했다. 끼기긱, 하고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창고 문이 천천히 열리고, 얼어붙은 시체들은 줄줄이 기어 나와 그의 주변을 맴돈다. 바닥에 단단한 얼음이 끌리는 소리가 난다. 드드득, 드드득. 그리고 한 명씩 입에서 더운 김이 오르는 선지피를 쏟아낸다. 검은색에 가까울 정도로 시뻘건색의 피는 이치마츠가 매일 매일 잊으려고 노력했던 것들이었다.

이치마츠의 안색이 다시 나빠지자 카라마츠가 이치마츠의 손을 잡았다.

우리 도망쳐야겠네.”

“....”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머리털이 쭈뼛쭈뼛 서는데도 이치마츠는 카라마츠가 우리, 라고 말해준 게 고마웠다. 이치마츠가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을 처음 했을 때 그는 카라마츠를 떠올렸다. 좋아. 이런 상황에서도 함께 라고 해줘서 고마워. 이치마츠 자신은 어딜 가든 눈에 띄었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가 하는 얘기를 듣고 혼자 도망칠 수도 있었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에게 짐이 될 거고,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에게 먼저 함께 도망치자고 말할 수 없었다. 카라마츠가 딱 잘라 거절하지 않으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이치마츠가 고집을 부려 카라마츠에게 매달린다면 카라마츠는 애써 웃으면서 그래, 그러자 하고 이치마츠를 받아줬다가도 점점 그를 부담스럽고 귀찮은 존재로 느낄지도 몰랐다. 고마워. 같이 있을 수 있어서 좋아. 나중에 부담스러워져서 나를 버려도 좋아. 내가 네 친절에 너무 기대고 의존해서 미안해. 사실 우리 사이는 별 특별한 게 아니란 걸 내가 더 잘 아는데 이렇게 집착해서 미안해.

그런데 왜 너를 이 방에 살게 했을까.”

카라마츠가 이상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이치마츠도 계속 고민하고 있었지만 뚜렷한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치마츠는 그가 그닥 대단한 일을 하지도 않으면서 대졸자 초봉에 가까운 돈을 받고, 무료로 숙식을 제공받는다는 게 신경 쓰였지만 애써 알려고 하지 않았다. 이 저택에서 일을 하겠다고 나섰을 때엔 하루 24시간동안 계속 도살장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따지고 생각하고 할 것도 없었다. 시체를 숨긴 사람이 이치마츠를 이 방에서 살게 했다면 이치마츠가 시체를 확인할 거라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기사님.”

그 사람이 시체를 숨긴 게 아닐까, 카라마츠가 입을 열었다. 이치마츠는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가 시체를 숨겼을 것이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는 이 방에 이치마츠를 살게 하고 매달 내려와 혹시 이치마츠가 시체를 건드리진 않았는지 확인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겸사겸사 창고 점검을 했더라도, 점검을 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냉장고 안을 한 번도 들여다본 적이 없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네 전임자도 혹시 죽은 게 아닐까?”

카라마츠가 물었다. 이치마츠는 아, 하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이치마츠가 처음 이 저택에 왔을 때 식당 아줌마는 이치마츠가 머물게 될 방이 한동안 쓰지 않았던 것이며 원래 고기를 운전기사가 날라주었다고 했다.

이치마츠는 저택의 내부 구조를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빈 방은 많았다. 손님용 방을 하나 내줄 수도 있는 일이었고. 그렇지만 이치마츠를 굳이 이 지하에, 단 하나 있는 방에, 그것도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시체가 있는 방을 내 줄 이유는 무엇인가.

어쩌면, 이 방은 이치마츠를 가두기 위한 무덤일지도 모른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를 조금 더 편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카라마츠는 본인도 외동인 주제에 이치마츠를 동생 대하듯 돌보려 들었다. 아침엔 이치마츠가 일어나 미처 씻기도 전에 식당으로 가 두 사람분의 아침식사를 받아와선 이치마츠의 방에서 함께 먹었고, 거의 오십 권에 가까운 만화책을 다 본 뒤엔 창고를 뒤져 야구방망이와 글러브, 공을 찾아내 야구를 하겠다고 덤볐다. 하지만 이치마츠도 카라마츠도 제대로 야구를 해본 적이 없어 그저 글러브로 어설프게 공을 던졌다 받았다 하다 곧 시들해져 내려놓았다. 카라마츠는 식당 아줌마가 타고 다니는 자전거를 빌려 이치마츠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주겠다고 나섰다가 아줌마가 가꾸던 딸기밭을 망가뜨려 한참동안 딸기 모종을 새로 심느라 고생하기도 했다. 이치마츠는 여전히 방 밖에선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가 마스크를 쓰고 있으면 이치마츠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며 일일이 이치마츠에게 지금 무슨 기분인지, 좋은 건지 싫은 건지 물어보았다. 이치마츠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저으며 대답을 하려고 했지만 결국 입을 열곤 했다.

아니 나보다 몇 달이나 먼저 왔으면서 여태껏 저택을 다 돌아본 적도 없다는 게 말이 돼?”

카라마츠가 이치마츠를 끌고 저택 중앙 홀을 걸으며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내가 할 일은 창고 지키는 것뿐인데 일부러 나올 필요 없잖아.”

그래도 그렇지 자기가 사는 곳 어디에 뭐가 있는지 정도는 알아야 되지 않아?”

예예. 이치마츠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저택은 넓었다. 이치마츠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저택의 가운데엔 혼자 높이 솟은 시계탑이 있고, 중앙 홀의 높은 천장에는 거의 사람만한 크기의 샹들리에가 반짝거렸다.

여사님이 여기로 가끔 부르셔서 같이 저녁 먹고 했어.”

카라마츠가 중앙 홀의 인테리어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소파에 앉아 테이블을 손가락 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이치마츠는 왜 식당 아줌마가 여주인을 일러 천박한 출신이라고 하는지 이해가 갔다.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중앙 홀에는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동물상이나 이상한 그림, 장식품들이 놓여있었다. 이치마츠도 그런 쪽으론 눈이 밝지 않았으나 터무니없는 센스라는 게 짐작이 갔다.

“1층에서 저 정문에 제일 가까운 쪽에 기사님 방이 있어. 그리고 어디보자, 저 방은 손님용 방이더라.”

카라마츠는 열심히 저택을 뒤지고 다닌 모양인지 방문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설명했다.

“2층에서 여기, 계단에서 바로 옆방이 여사님 침실이야. 그 옆은 옷방이고, 반대편 저쪽이 서재고. 아니, 서재에 만화책은 더 없어. 그런데 대체 누가 보던 건지 모르겠더라고. 여사님 전 남편은 유명한 과학자라고 들었는데 만화책을 봤을려나? 뭐 남편이 보던 만화책이면 여사님도 알아보셨을 텐데.”

카라마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재에서 책 빌려가도 돼?”

나한테 물어볼 건 아니지만, 여사님이 뭐든 빌려가서 봐도 된다고 그러셨어. 이치마츠, 이제 야한 만화가 없으니까 야한 책을 찾아보겠다는 거야? 이 형은 이치마츠가 건강하니 더 바랄게 없다……

이치마츠는 대답 없이 카라마츠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찌르고 서재로 들어섰다. 이치마츠는 종류를 가리지 않고 책이라면 일단 읽고 본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도와줄 사람은 없고, 조금이라도 더 알고 있으면 나중 일을 대비할 수 있다. 이 집에 이렇게 큰 서재가 있으면 일찍 와서 읽어보는 건데.

책장은 모두 짙은 갈색의 고급스러운 것이었다. 알 수 없는 언어로 된 것들도 빼곡히 꽂혀 있었고, 서재 한 면 가득히 실험기구 같은 것들이 진열된 장식장에 먼지가 보얗게 쌓여있었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 곁에서 책을 좀 뒤적거리다 곧 포기하고 창가에 놓인 테이블에 가 앉았다. 이치마츠는 한참을 뒤적이며 책을 몇 권 골랐다. 바닥에 깔린 녹색 양탄자까지 마음에 들었다. 카라마츠는 그새 따끈한 햇살을 받으며 졸고 있고, 이치마츠는 아라비안나이트 전집을 발견했다. 어릴 때, 대여섯살땐가, 집에 있던 책은 한 권짜리였는데 그게 이렇게 긴 이야기였구나. 이치마츠가 1권을 집어 들어 책 위에 쌓인 먼지를 후-하고 불고 첫 페이지를 넘겼다. 그때 누군가 서재 문을 노크도 없이 벌컥 열고 들어왔다.

운전기사였다. 이상하리만치 키가 작은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치마츠에게 다가왔다. 남자는 작은 몸에 비해 발소리가 커 조용한 서재 안이 쿵쿵 울렸다. , 오늘이 점검일 이었던 것을 잊고 있었다. 이치마츠는 남자에게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책을 옆구리에 끼고 서재를 뛰쳐나갔다.

이치마츠! 버리고 가기야?!”

오늘은 점검일이라!”

이치마츠가 관리하는-관리라고하기도 무색하지만- 창고는 한 달에 한 번씩 운전기사가 내려와 창고를 점검하고 가곤했다. 점검을 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지만, 저 기묘한 남자는 혼자서 창고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이삼십 분을 보내다 나오곤 했다. 이치마츠는 남자가 말을 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운전기사라면 여주인과도 자주 얘기를 할 텐데, 아마도 이치마츠와 말을 섞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모른다. 이치마츠도 운전기사도 그저 고용인일 뿐인데 왜 그리 무게를 잡는지 모르겠지만, 이치마츠는 일단 숙이고 들어갔다.

이치마츠가 남자에게 문을 열어주고 자기 방에서 서서 기다리는 동안 카라마츠가 헐레벌떡 뛰어와 이치마츠의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기사님이 왜?”

한 달에 한 번씩 아저씨가 창고 점검을 하시거든.”

이치마츠는 후드에 손을 넣고 소파 등받이에 기대 대답했다. 카라마츠는 아, 하고 이해하는 듯 하더니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저씨는 운전하시는 분인데 왜 창고 점검을 해? 그리고 저기 고기가 그렇게 많나?”

원래 그런 일 하시던 분인가 보지.”

이치마츠는 대충 대답했지만 그건 이치마츠도 의심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가끔 이치마츠가 식당 아줌마와 고기를 나르러 들어갈 때면 교실만한 냉동 창고의 앞쪽에 돼지며 소며 하는 것들이 네다섯 마리 정도 대롱대롱 매달려있을뿐 나머진 텅텅 비어있었다. 문에서 가장 먼 쪽에 커다란 업소용 냉장고가 여러 채 있긴 했지만 아줌마에게 저 안에 든 것이 뭔지도 묻지 않았고 아줌마도 관심이 없어 알 수가 없었다.

이상하네.”

그러게.”

카라마츠는 운전기사가 나오는 걸 기다리려고 했지만 곧 여주인의 콜을 받아 나갔다. 여주인의 연애 놀음은 점점 클라이맥스로 올라가려는지 오후의 외출에도 카라마츠를 데리고 나가고 시도 때도 없이 불러 잡다한 일을 시키곤 했다. 이치마츠가 먼저 물어보진 않았지만 카라마츠가 부름을 받고 나갔다 돌아오면 피곤한 얼굴로 여주인의 어깨를 주무르거나 옷 정리를 하거나 혹은 함께 영상실에서 영화를 봤다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카라마츠가 그 놀이를 즐거워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냥 이치마츠 방에서 뒹굴 거리고 싶다, 하면서 카라마츠가 소파에 늘어지면 이치마츠는 괜히 기분이 좋아져 카라마츠에게 먼저 산책을 하러 가자고 하거나 그날 입은 옷이 잘 어울린다고-거짓말이지만- 칭찬했다. 그럼 카라마츠도 금방 회복해서 또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다시 고기를 나르는 날이었다.

있지, 이치마츠 군. 요새 카라마츠 군이랑 자주 어울리는 것 같은데 아줌마는 걱정돼. 이치마츠 군은 성실하고, , 꼬박꼬박 저축도 하고 그런 젊은이인데 카라마츠 군이 속여먹으려고 들까봐 걱정이야.”

식당 아줌마가 이치마츠의 방에 서서 창고 안을 들여다보며 험담을 시작했다. 이치마츠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맨 앞쪽에 있는 꽁꽁 언 돼지 반쪽을 갈고리에서 빼내어 수레에 실었다. 엄청나게 무겁다. 아줌마는 계속해서 카라마츠가 뭐라고 말을 걸었는데 그게 들으면서 얼마나 어이가 없고 얼마나 불쾌했는지 하지만 아줌마는 얼마나 교양 있게 대답했는지 하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조금 듣기 거슬렸다.

저기, 기사 아저씨는 창고 점검을 왜 하시는 건가요.”

아줌마는 글쎄, 하면서 잠깐 말을 멈추었다.

기사 아저씨는 사모님이 이 집에 시집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들어 왔을 거야 아마. 잡일꾼을 하다가 사모님 운전기사가 됐는데, 창고 점검도 직접 하시겠다고 그러시기에 그러시라고 했지. 그건 왜? 아저씨가 혹시 이치마츠 군이 뭘 잘못했대?”

이치마츠는 별로, 하고 고개를 저었다. 이치마츠는 그에게 이 일을 하게 해준 사람은 아마도 운전기사가 아닐까 하고 추측하고 있었다. 이치마츠가 도살장에 있을 무렵 우연히 고기를 이 저택으로 배달하러 왔다가 그와 마주쳤다. 이치마츠는 이 집 사람인줄 알고 고개를 한번 숙이고 부엌으로 고기를 날랐는데, 남자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 자리에 서서 이치마츠가 일 하는 것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이치마츠가 도살장으로 돌아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식당 아줌마가 전화로 그를 찾았고, 편한 일을 할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만약 식당 아줌마가 이치마츠를 이 자리에 추천한 것이라면 아줌마는 그걸로 한 1년은 생색을 내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줌마는 전혀 그런 말이 없었다. 이치마츠는 운전기사와 만나는 일이 생기면 긴장해서 밉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고기를 간신히 식당으로 나르고 이치마츠는 자기 방으로 돌아와 냉장고에서 물을 한 병 꺼내 한 번에 반쯤 마셨다. 카라마츠는 이틀째 아무 소식이 없다. 그가 아침식사를 가져오는 게 어느새 습관이 되어 이치마츠는 이틀 동안 그를 기다리다 올라가 식사를 가져와 혼자 먹었다. 식당 아줌마의 말로는 카라마츠가 여주인과 친구들이 가는 여행에 수행원으로 따라갔다고 했다. 드디어 따먹히는 건가.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에게 소문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미리 얘기를 해주는 게 좋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지만, 이치마츠가 먼저 너는 여기에 비서로 고용이 된 게 아니라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이치마츠가 그닥 상냥한 사람이 아니기도 했지만, 그런 말을 했다가 카라마츠가, 그를 싫어하게 되고, 이 저택을 떠나버리면, 이치마츠는 좀 쓸쓸해질 것 같았다. 아직도 이기적이네. 이기적인 게 나쁘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이치마츠는 묘한 죄책감이 들었다. 카라마츠가 도망가버리면 어떡하지. 이치마츠는 소파 한 구석에 몸을 쑤셔 넣고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이치마츠는 아라비안나이트 5권을 집어 들어 다시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글자는 그저 눈앞을 스쳐지나갈뿐, 머릿속으로 들어오지가 않았다. 이치마츠는 욕지거리를 몇 마디 하고 책을 도로 내려놓았다.

그 순간 창고 생각이 났다. 만약 카라마츠가 돌아와 이치마츠에게 또 찡찡거리기 시작하면 이치마츠는 그의 관심을 창고 쪽으로 돌리면 되는 것이다. 재밌어하겠지. 어린애처럼 호기심도 많고 그러니까. 무서운 얘기를 좀 지어내면 더 좋을 것이다. 이치마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벽에 걸린 창고열쇠를 가져다 문을 열었다. 어두컴컴한 창고 안쪽에서 찬 기운이 훅 끼쳐왔다. 냉동고나 파랗게 질린 고기들이 무섭거나 그러진 않다. 이치마츠는 두꺼운 방한화를 끼워 신고 조심스럽게 창고 안으로 들어섰다. 벽에 온통 성에가 끼어있었고 벽을 따라 새파란 전등이 켜져 있었다. 여기서 귀신이 나온다는 얘기를 하면 카라마츠가 믿을까? 이치마츠는 고기를 툭툭 건드려봤지만 젊은 여자의 원혼이 서려있을 것 같진 않았다. 이치마츠는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서, 벽면을 따라 쭉 늘어서있는 커다란 냉장고 앞에 다다랐다. 이치마츠는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려고 했다가,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런 냉동 창고 안에 왜 또 냉장고가 있는 거지? 순식간에 이치마츠의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싹 끼쳐왔다. 이치마츠는 창고 입구로 달려가 자기 방 방문이 제대로 잠겨 있는 것을 확인하고, 지하 복도에 누군가 어슬렁거리고 있지는 않은지 문에 귀를 바짝 대고 한참 소리를 듣다가 작업용 장갑을 꺼내 끼고 조심스럽게 다시 냉장고로 다가갔다. 냉장고는 너무 터무니없이 크고, 오래된 것이었다. 이치마츠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차고 묵은 공기가 이치마츠의 폐를 찔렀다. 이치마츠는 맨 오른쪽에 있는 냉장고의 손잡이를 단단히 잡고, 한 번에 확 당겨 열었다. 밀폐되어있던 냉장고 문이 쩍,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아무것도 없었다. 이치마츠는 다리에 긴장이 풀려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 했다. 괜히 쫄았네. 카라마츠가 없어서 다행이다. 카라마츠가 있었더라면 이치마츠가 별 이상한 상상을 다했다면서 어린애라고 놀렸을지도 모른다. 카라마츠는 몇 살이더라? 그러고 보니 나이를 물어본 적이 없다.

이치마츠는 담배나 한 대 피고 올까 하다가 확인 차 바로 옆에 서있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냉장고 안에는, 양갈래 머리를 한 젊은 여자가 눈알까지 꽁꽁 얼어붙은 채 얼음사이에 파묻혀있었다.

카라마츠의 방문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카라마츠가 할 일이 없긴 하겠지. 여주인은 느즈막히 일어나 자기 방에서 아침 식사를 하곤 늘어져 있다가 주변 친목회 모임에 나가 놀다가 해가 다 진 뒤에나 들어오거나 혹은 한밤중에 돌아오던가 했다. 물론 식당 아줌마가 그에게 여주인의 근황에 대해 자주 늘어놨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카라마츠는 아침을 먹고 난 후엔 이치마츠의 방에 찾아와 그가 읽는 잡지를 뒤적거리거나 커다란 손잡이 거울을 꺼내 자기 얼굴 상태를 확인하고 아니면 이치마츠는 잘 틀지도 않는 TV를 틀어 시답잖은 쇼 프로그램을 보곤 했다. 그러면서 계속 이치마츠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 저 아이돌이 요새 인기라더라, 저 드라마가 유행이다, 하면서. 이치마츠를 끌고 나가는 일도 적지 않았다. 이치마츠는 그렇게 자기 영역을 침범당하고 끌려 다니는 게 딱 질색이었지만 카라마츠는 아무리 이치마츠가 거절하고 밀어내고 은근한 신경질을 부려도 포기하지 않고 이치마츠에게 매달렸다. 그러기를 거의 한 달. 이치마츠는 이제 카라마츠가 하는 말에 제법 딴지를 걸 수 있게 되었다. 이치마츠가 한 마디씩 툭툭 내뱉어도 카라마츠는 큭, 하고 충격 받은 척 하곤 곧 원상복귀 해 또 이런 저런 얘기를 늘어놓았다.

카라마츠는 한 달 동안 두 사람이 제법 말을 섞기 시작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치마츠의 마스크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걸 배려라고 생각하는 건가? 이치마츠의 머릿속에서 뒤틀린 생각이 꿈틀꿈틀 기어 나왔다. 카라마츠의 저 단순한 머릿속에선 자신이 이치마츠의 마스크에 대해 묻지 않는 걸 엄청난 배려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섬세하고, 배려심 있는 사람이라고 자만할지도 모른다. 이치마츠가 그의 배려에 감사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 그의 앞에서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도 기분이 나빴다. 이치마츠의 방에는 거울이 없다. 그의 방에 딸린 작은 화장실에도 거울도 하나 없이 그저 약통과 수건을 담는 서랍만 있을 뿐이었다. 카라마츠는 이미 이치마츠의 마스크 너머를 짐작했을 것이다. 그런 그 앞에서 거울을 들여다보며 자신이 얼마나 잘생겼는지를 꼼꼼히 뜯어보고 있는 건 이치마츠를 조롱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치마츠는 꾹꾹 눌러 참으며 애써 카라마츠에게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치마츠는 이 일자리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고 그러기 위해선 여주인의 비위를 맞춰야했다.

경비 아저씨가 포커 빌려주셨다!”

카라마츠가 아침부터 포커를 들고 와 신나게 이치마츠의 테이블을 치웠다. 이치마츠는 한참 책을 읽던 중이었다. 카라마츠가 올 것이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오늘따라 기분이 나빴다. 이치마츠는 말없이 테이블 옆에 앉아 카라마츠가 자켓을 벗어 걸어놓고 카드를 섞는 걸 보고 있었다.

간밤에 또 사고가 나던 날의 꿈을 꿨다. 한 달에 한두 번은 이런 꿈을 꿨다. 아마 이치마츠의 무의식이 그에게 잊지 말라고 계속 반쯤 아문 상처를 헤집어 쑤시는 게 아닌가 싶다. 어린 이치마츠가 마루에서 수박을 먹고 있다. 햇볕이 쨍쨍하고 마당에는 갓 세탁한 이불을 말리고 있어 상쾌한 세탁비누 냄새가 난다. 이치마츠는 느긋하게 수박을 먹으면서 수박씨를 마당에 뱉는다. 담장너머까지 수박씨를 뱉을 수 있을까? 툭하면 히스테리를 부리는 옆집 아줌마가 이치마츠를 잡으러 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저 멀리서 시뻘겋게 불타는 거대한 뭔가가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거실에 앉아 다정하게 대화를 하고 있는 엄마와 아빠를 미처 부를 틈도 없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이치마츠는 튕겨져 나간다. 고막이 찢어지는듯한 소리에 이치마츠가 울지도 못하고 벌벌 떨고 있는 동안 그것은 다시 콰쾅!!!! 하고 폭발한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크게 불꽃이 일어나면서 집은 산산조각이 나 사방으로 파편이 날아간다. 엄마 아빠는, 죽었겠지. 얼굴이 불타는 듯 뜨겁고 아프다. 불이 붙은 게 아닐까. 이치마츠가 엄마아빠의 죽음을 직감하는 순간 잠에서 깬다. 잠에서 깨면 이치마츠는 흉터가 남은 얼굴 한가득 눈물범벅이 돼서 한참 우울한 기분에 젖어든다.

포커를 시작하고 카라마츠가 다시 이런 저런 얘기를 시작하지만 이치마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무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 날이다. 하지만 이치마츠는 카라마츠가 여주인의 장난감이라는 이유로 참아야 하고, 버텨야 한다. 역겨워. 이치마츠는 친척집을 전전하고 결국 쫓겨나 거리를 헤매다 도살까지 흘러갔을 때도 몸을 팔지는 않았다. 상대가 여자든 남자든, 돈을 받고 섹스를 하는 건 더럽고 비윤리적인 일이다.

너도 얼굴이 반반했으면 저 새끼처럼 몸이나 팔면서 놀고먹지 않았겠어? 일하는 거 싫잖아? 이거 그냥 질투 아냐? 도덕심도 부족하고, 부모가 없어서 그런가? 더러워. 싫어. 저딴 새끼를 부러워하는 나도 싫어. 싫다.

이치마츠는 손에 든 카드를 집어 던지려고 마음먹었다. 저 잘난 얼굴을 상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테이블위에 집어던지면서 내가 여기서 놀고만 있는 줄 아냐?? 난 너같이 노인네랑 떡치는 남창새끼는 아냐 하고 비꼴 생각이었다. 소리를 질러도 위층까지 들리진 않겠지만 쓸데없이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진 않다. 그리고 이치마츠가 조곤조곤하게 상처 주는 말을 하면 상대들은 보통 더 큰 충격을 받는 듯 했다. 이치마츠가 입술을 비틀며 막 입을 열었을 때, 카라마츠가 자기 카드를 열심히 들여다보며 먼저 말을 걸었다.

이렇게 말하는 거 좀 민망하지만, 네가 쫓아내지 않아줘서 고마워.”

내가 너를 어떻게 쫓아내겠니. 네 심기를 거슬렀다간 여주인이 오갈 데 없는 날 쫓아내고 말텐데. 순진한 생각을 하고 있구나 너는. 이치마츠는 조금 마음이 풀려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얌전히 다음 카드를 냈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눈치를 잠깐 살피더니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왠지 모르겠지만 여기 사람들은 나를 싫어하는 거 같아서……. 좀 그래. 이치마츠는 그저 말수가 적을 뿐이지만 그래도 잘 어울려주는데 다른 사람들은 뭐랄까, 겉으로는 나한테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 같지만 그게 아니라는 게 느껴져. 가끔 꼬치꼬치 캐물을 때도 있고.”

카라마츠는 보기엔 멍청해 보이지만 제법 눈치가 있었다. 경비나 운전기사와 말을 섞을 일은 없어 몰랐지만 식당 아줌마는 계속해서 카라마츠의 흉을 보곤 했다. 아줌마랑 경비, 운전기사한테 계속해서 친근하게 말을 거는 게 불쾌하기 짝이 없으며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고. 이치마츠 군은 성실한 사람이니까 카라마츠 같은 애들하고 너무 어울려서 물들지 말라고. 이치마츠는 늘 하던 데로 흘려들었다.

여사님도 말이지, 비서 일을 가르쳐주시겠다고 고용하신 건데 실질적인 업무 같은 건 하나도 얘기 안 해주시고 그냥 쇼핑하는데 따라가서 짐이나 들고 있게 하고, 뭐 그런다니까.”

카라마츠가 눈에 띄게 축 처져서 양손으로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호스트라던가, 뭐 그런 일 하던 거 아니었어?”

이치마츠 본인도 모르게 말이 먼저 튀어나갔다. 아차, 하고 후회했지만 이미 뱉은 말은 도로 담을 수가 없다. 카라마츠는 호스트?! 하고 놀라더니 곧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좀 멋있긴 하지. 설마 호스트라고 생각할 줄은 몰랐네. 나는 저 북쪽 촌동네에서 도시락 배달이나 하다가 왔는걸. 안개가 엄청 낀 날 실수로 여사님 차를 박아서 어떻게든 배상하겠다고 빌었더니 옆에서 일하면서 갚으라고 상냥하게 거둬주셨어. 정말 고맙게 생각해.”

카라마츠가 씩 웃으면서 다음 카드를 내며 사실 아는 것도 없고 하니까 일 시킬 수 있는 것도 없으신 거겠지, 하고 중얼거렸다. 이치마츠는 조금 충격을 받았다. 카라마츠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근 한 달간 봐온 카라마츠는 허세를 부리면서 안 어울리게 터프한 척을 하곤 했지만 저렇게 다른 사람 눈치를 보며 없는 사연을 만들어 내 변명을 할 인물은 아니었다. 이치마츠의 앞에서 그렇게까지 체면을 차리지도 않았고. 여주인은 새로운 놀이를 하고 싶은 건가? 상냥한 고용주가 되어 어리고 순수한 청년과 사랑에 빠지는 놀이?

그래도 다음에 부모님 뵈러 갈 때 일자리 생겼다고 말씀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야. 엄마랑 아빠 모두 나 노는 것만 좋아한다고 엄청 걱정했었거든.”

카라마츠가 카드를 잠깐 테이블에 엎어두고 TV위에서 물병을 집어 들어 마셨다. 이치마츠는 뭐라 대답하기가 어려워 그저 카라마츠의 뒷모습만 보고 있었다. 제법 단단해졌다고 생각한 이치마츠의 마음이 조금 아팠다. 이치마츠는 자기 자신을 가여워하기 바빠 다른 사람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일이 잘 없었다.

, 얘기한적 없나. 나 부모님 두 분 다 돌아가셔서, 나 혼자야.”

카라마츠가 다시 테이블 앞에 앉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엄마는 병 오래 앓다가 돌아가시고, 아빠는 교통사고로. 카라마츠가 남의 일처럼 고개를 저으며 다시 카드를 집어 들었다.

가끔 형제가 있었으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해.”

카라마츠가 중얼거렸다. 그 순간 이치마츠는 목에 뜨끈한 게 꽉 들어차는 기분이 들면서 가슴이 아팠다. 열 군데는 전전한 친척집, 길거리, 경찰서, 마지막으로 이치마츠가 터를 잡았던 도살장, 그 어느 곳에서도 이치마츠에게 타인 이상으로 가깝게 대해주던 사람은 없었다. 먼지 가득한 골방이든 은근한 피 냄새가 빠지질 않는 도살장 숙소에서든 이치마츠는 아침에 눈 뜨는 순간부터 잠들기 직전까지 사람이 그리웠다. 형제가 있었으면 했다. 나랑 닮은 얼굴을 한 형제가, 추운 잠자리를 함께 덥혀주고 외로워 미칠 때 곁에서 걱정해주고, 말을 걸어주고 달래줄 사람이 있었으면 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이치마츠도 포기하고 점점 단단해질 수 있었지만, 그러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을 혼자 슬퍼해야했다. 감정이 북받쳐 올라 이치마츠는 숨이 조금 거칠어졌다. 오랜만이었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차례를 기다리다 이치마츠가 약하게 어깨를 들썩거리며 고개를 숙이자 깜짝 놀라 카드를 내려놓고 이치마츠의 곁에 다가가 한쪽 팔로 어깨를 끌어안았다.

우는 거야? 내가 너무 우울한 얘기를 했나?”

이치마츠는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카라마츠는 잠깐 망설이다가 이치마츠를 제대로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이치마츠는 어색해 몸이 굳었지만 카라마츠는 괜찮아, 괜찮아, 하면서 이치마츠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부모님 돌아가신지 꽤 됐으니까 그렇게 불쌍해하지 않아도 돼. 티 안 났지? 아빠마저 돌아가셨을 땐 많이 힘들었는데 그래도 뭐……. 지금은 괜찮으니까.”

괜찮지 않잖아.”

이치마츠가 최대한 목소리를 가다듬고 대답했다. 괜찮을 리가 없다. 카라마츠처럼 관심 받고 싶어 하고 사람들하고 어울리고 싶어 하고 멍청하고 착하게 구는 놈이 혼자라는 게 괜찮을 리가 없다. 허세부리는거냐 너는. 카라마츠는 말없이 이치마츠가 진정할 때까지 이치마츠를 끌어안고 있었다.

이치마츠는 맨날 툴툴거려도 착하구나. 고마워.”

방금 전까지 너를 남창이라고 생각했는걸. 이치마츠는 마지막 말을 삼켰다.

카라마츠는 테이블을 정리하고 카드를 정리해 가죽 자켓 주머니에 찔러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치마츠는 소파에 기대어 말없이 카라마츠가 하는 걸 지켜보았다.

포커는 영 재미가 없네. 내일은 TV나 볼까?”

이치마츠는 어깨를 한번 으쓱 했다. 카라마츠는 씩 웃고, 그럼 내일 보자고! 하고 방 문을 열고 나갔다. 이치마츠는 문이 완전히 닫기는 소리가 나서야 마스크를 벗었다. 아까 흘린 눈물 때문에 마스크 안이 조금 찐득거리는 것 같아 불쾌하다. 그리고 문 너머에서 카라마츠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스크 많이 답답하면 벗어놔도 돼.”

이치마츠가 뭐라 대답할 겨를도 없이 카라마츠의 발소리가 멀어져갔다. 이치마츠는 마스크를 휴지로 잘 닦아서 문 앞에 걸어두고 고민했다. 그날 저녁 부엌으로 올라가 저녁식사를 받아오고, 자기 방에서 혼자 저녁을 먹고, 밤에 잠들 때까지 고민했다. 지금 쓰고 있는 마스크 이전엔 커다랗고 두꺼운 방한용 마스크였다. 그 전엔 싸구려 워머를 눈 바로 밑에까지 바짝 올려서 썼고, 병원에서는 눈만 내놓고 붕대를 둘둘 감고 있었다. 한번도 다른 사람에게 맨 얼굴을 보여줄 용기는 없었다. 간혹 호기심 많은 친척이나 경찰, 고용주들이 이치마츠에게 맨 얼굴을 보여달라고 요구할 때가 있었다. 그럼 이치마츠는 이를 악물고 마스크를 내렸고, 그들의 얼굴에 점점 번져나가는 혐오감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치마츠 자신도 자신의 맨 얼굴을 본지 꽤 되었다. 이치마츠는 잠자리에 누워 자신의 얼굴을 더듬어보았다. 왼 얼굴 이마에서부터 거의 턱까지 녹아내린 양초처럼 우툴두툴한 흉터가 남았다. 그날 그의 집에 불타는 헬기가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날 그 지역에서 하던 군사 훈련에서 사고가 나지 않았더라면, 그의 부모님이 다른 마을에, 최소한 옆집을 샀었더라면, 이치마츠는 조금 더 상냥한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이치마츠는 한참을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다음날에도 어김없이 카라마츠가 찾아왔다.

만화책 가져왔어! 만화책 잘 안보지? 누가 놓고 간 건지는 몰라도 서재에 있어서 다 들고 왔어!”

카라마츠는 들뜬 목소리로 문을 두드렸다. 이치마츠는 문 앞에서 망설이다 결국 마스크를 내려놓고 문을 열었다. 끼이이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길었다. 다리가 약하게 떨렸다. 아예 다른 사람들에게 맨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것도 아닌데, 심장이 쿵쾅거렸다. 카라마츠가 이치마츠를 싫어하게 된다고 해도 뭐 달라질 일은 없겠지만, 그런 일이 자주 있었지. 그래도 괜찮아. 이치마츠는 이 일이 좋았고, 이 방도 제법 마음에 들었고, 이대로 계속 혼자 살아도 상관없고, 언젠간 카라마츠도 여주인에게 버려져서 집을 떠날 거고.

표정 안 좋네. 이거 본 적 있어? 식당 이모님도 모른다고 하고. 누가 갖다 둔 건지 모르겠네. 그래도 1권부터 있으니까 한번 보자!”

카라마츠가 이치마츠의 어깨를 툭툭 치고 들어가 테이블에 만화책을 올려놓고-정말 몇 다스는 되보이는 양이었다소파에 드러누워 만화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치마츠는 가만히 서 있다가 카라마츠의 발쪽에 앉아 소파에 기대 만화책의 1권을 찾아 집어 들었다. 싸구려 성인만화였다. 표지에 얼굴에 빨갛게 홍조가 오른 긴 생머리의 여자가 가슴과 엉덩이를 강조하면서 우- 하고 입을 내밀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두 사람 다 아무 말이 없었다. 작은 방 안에는 스륵하고 만화책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 울렸다.

어렸을 때 집에 사고가 났어.”

갑자기 집에 고장 난 헬기가 추락해서,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병원에 한참 있다가 이모 집으로 갔는데 키워주기 힘들다 그래서.”

삼촌집도 안 된다 그러고. 그렇게 몇 군데를 돌다가 그냥 집을 나갔어.”

귀엽지도 않는 어린애를 일부러 맡아 키우는 건 나도 싫을 거라고 생각해.”

어릴 때부터 귀염성이 없어서.”

물건도 훔치고, 쓰레기통도 뒤지고 그러다 경찰서에서 좀 있기도 하고.”

도살장에서 소를 잡았어.”

직업이긴 해도 좀불편해서.”

여기서 지내게 됐어. 이치마츠가 중얼거렸다.

나도 그래.”

카라마츠가 만화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이치마츠는 한 권을 다 읽고 다음 권을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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