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주제는, 요새 한창 논란이 되고있는 '역류하는 꽃'입니다. 원래 우리 쇼에서 다루는 종류의 주제는 아니지만 정확한 연구 결과가 나오기 전에 시청자분들께 미리 알려드리고자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을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역류하는 꽃이 아직 정식 명칭은 아닌거죠?
그렇습니다. 아직 이렇다 할 뚜렷한 이유도, 성질도, 밝혀진게 없어 정식으로 이름이 붙지는 않았고, 네티즌들 사이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자료화면 준비했습니다. 보시면 엄지 손톱만큼 작은것부터 손바닥만한 것까지 크기도 가지각색이고 꽃잎의 갯수도 다섯장에서 스무장까지, 정말 종류가 다양하네요.
그렇지만 의학계에서는 이 꽃들이 한 질병의 증상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요?
모양과 크기는 다를지 몰라도 이 꽃들은 대부분 같은 과정을 거쳐 몸밖으로 배출됩니다. 환자는 약 일주일에서 한 달간 가슴, 심장 부근에서 통증을 느끼게 됩니다. 여태까지 진료를 받고 혈액 샘플을 제공한 환자중에 최대 6개월간 통증을 느낀 경우도 있어 다른 질병과 혼동될 것이 염려됩니다. 그리고 환자는 꽃들을 토해내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꽃들과는 달리 뒤가 비쳐보일정도로 얇고 새빨간 꽃잎이 붙어 있으며 몸 밖으로 배출된 뒤 약 5분이 지나면 깨알만한 알갱이를 남기고 녹아내립니다.
설마, 피인가요?
완전히 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피와 물, 그리고 기타 신체 내에서 분비되는 액체들이 섞여 있으나 피의 비중이 높긴 합니다.
알갱이는 대체 뭘까요?
글쎄요. 아직 밝혀진바가 없습니다.
전염성이 있나요?
감염성은 없습니다.
만약 꽃을 토하게 되면 어떻게 해야하죠?
일단 가까운 대학병원으로 가셔서 감염자라고 말씀하시고 절차를 밟아 혈액 샘플과 간단한 건강검진을 받으시면 됩니다. 사실 시간이 지나면 증상이 호전되긴하지만 혹시나 모를 변종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감염자분들의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오소마츠가 채널을 돌렸다.
"좀 징그럽네."
"장미꽃같다."
낭만적이지 않아? 토도마츠가 마지막 계란프라이를 홀랑 집어먹으며 말했다.

함박눈이 펑펑 날리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멋을 포기하고 두꺼운 외투에 목도리를 둘렀다. 어디가? 집 앞을 쓸고 있던 쵸로마츠가 물었다.
"렌탈샵. 뭐 빌려다주랴?"
쵸로마츠가 고개를 저었다. 카라마츠는 외투 주머니에 양 손을 찔러넣었다.
감염성이 없다고 해도 형제들에게 알리기는 왠지 껄끄러웠다. 카라마츠가 가슴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한지는 반년이 넘었다. 밤중에 자다가 아파 일어나는 경우도 있었고, 한번 통증이 오기 시작하면 말을 할수도 없을 정도로 아팠다. 진통제를 먹어도 효과가 없었고 통증은 하루에도 몇 번씩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카라마츠를 괴롭혔다.
그리고 카라마츠는 지난 밤 첫 번째 꽃을 토해냈다. 동전만한 크기의 꽃이 스무 개정도, 새빨간 꽃잎이 빽빽하게 들어차 마치 공같은 모양이었다. 카라마츠가 놀라 세면대에 꽃들을 떨어뜨리자 꽃들은 곧 녹아 내려 작은 알갱이만 남기고 사라졌다. 카라마츠는 물을 틀어 알갱이를 흘려보냈다.

간호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검사지를 내밀며 이 순서대로 검사받으시면 됩니다, 하고 첫 번째 검사실을 가리켰다.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다. 카라마츠가 검사실 앞에 붙은 번호를 확인 하는데 대기 의자에 앉아있던 여자가 화들짝 놀라며 카라마츠의 소매를 잡았다. 카라마츠가 돌아보니 여자는 당황스러운 얼굴을 하다가 아, 죄송합니다. 하고 소매를 놓았다.
"아는 사람이랑 너무 닮으셔서..."
"잘생긴 사람인가보네요."
카라마츠가 웃으며 대답했다. 긴 머리를 땋아내리고 조금 촌스러운 것 같기도 했지만 귀여운 여자였다. 여자는 양 뺨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하는 사람? 여자는 잠깐 표정을 굳혔다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제 이별해야 돼요."
"왜요?"
"저는 그렇게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쓸쓸한 얼굴이었다. 평소의 카라마츠라면 여자는 모두 사랑받아야 된다고,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여자는 없다고 했을텐데 차마 그럴수가 없었다. 카라마츠는 여자의 옆 빈자리에 앉아 멍하니 맞은편 벽을 바라봤다. 여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랑하고 있어도 포기해야 하는 마음. 카라마츠는 어쩌면 이 꽃이 사랑해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사랑해서는 안되는 사람을 사랑하는 걸 그만두려고 괴로워하다가, 그 마음 조각이 꼭 진주가 되는 모래알처럼 피와 살을 뜯어내 꽃이 되는게 아닐까.
돌아가는 길에 카라마츠는 렌탈샵에 들러 코미디 영화 DVD를 하나 빌렸다. 눈은 어느 새 그쳐서 은은하게 찬바람만 불었다.

, 그거 알아. 햄릿이지?”

이치마츠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카라마츠를 돌아보았다. 너무 대놓고 무시하는 거 아니냐? 카라마츠가 입을 삐죽거렸다.

학교에서 그거 연극을 했었거든.”

카라마츠가 기지개를 쭉 폈다. 이치마츠는 별 대답도 없이 바지를 걷어 까진 무릎에 소독약을 발랐다. 연습하다보면 늘어. 카라마츠가 이치마츠의 어깨 너머로 몰래 넘겨다보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두 사람은 야구를 포기하고 자전거에 도전했다. 카라마츠는 비록 야구는 제대로 한 적이 없었지만 자전거는 탈 줄 알았다. 이 형은 혼자서 자전거 타는 법을 터득했지만, 가르쳐달라고 하면 가르쳐줄 수도 있지.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대답도 듣지 않고 창고에서 낡은 자전거를 꺼내 훅, 하고 바람을 불어 먼지를 털어냈다.

카라마츠는 자전거를 멋진 폼으로 탈 줄은 알았어도 가르치는 건 영 젬병이었다. 이치마츠는 첫 페달을 밟고 채 5분도 되기 전에 자전거에서 튕겨져 나와 잔디밭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심각하게 다친 곳은 없었으나 무릎을 제대로 찧어 바지 위로 피가 배어나왔다.

연극부?”

이치마츠는 상처 위로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였다. 카라마츠는 소파 팔걸이에 앉아 이치마츠가 하는 걸 보고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중학교 2학년 땐가, 문학 시간에 대본 공부하고 실습같이 한 건데 선생이 참여안하면 낙제래서 어쩔 수 없었지. 수업 많이 빠졌었거든.”

이치마츠가 얌전히 듣고 있었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가 자기 얘기를 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 이치마츠는 구급상자를 정리해 TV 밑 수납장에 챙겨 넣고 바지를 갈아입겠다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사실 낙제는 그닥 무섭지 않았다.

이치마츠는 들어간 김에 세수도 하고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면서 나왔다. 머리 빗겨줄까? 카라마츠가 주머니에서 꼬리빗을 꺼내 이리 오라며 손짓을 했지만 이치마츠는 미간을 찌푸리고 소파 반대쪽 벽에 기대 앉아 카라마츠를 올려다보았다.

햄릿에서 뭐였는데? 나무?”

당연히 햄릿이지.”

카라마츠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때 반에서 우리 조가 1등이었었어. 문학 선생이 신나서 반별로 한 작품씩 맡아 전교생이 다 보는 앞에서 공연하자고 그랬거든.”

했어?”

공연 일주일 전엔가 엄마가 아예 돌아가셨어. 사실 엄마는 그 전에 한 오륙년은 죽은 듯이 말도 안하고 누워만 있었던 터라 정말 돌아가셨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놀라지는 않았거든. 그래서 나는 공연하러 가겠다고 했는데 아빠가 어떻게 엄마가 죽었는데 연극을 하겠다고 할 수가 있냐, 나가라 그래서 그냥 그대로 집을 나갔지. 사실 아빠는 이삼일에 한 번씩 집에 들어왔으니까, 엄마랑 가장 오래 있었던 사람은 나였어.”

한밤중까지는 애들이 동네 공터 같은데서 바글바글 모여 있었어. 거기서 모닥불도 피우고 술 마시는 애들은 술도 마시고. 그런데 한 새벽 두세 시쯤 되면 애들이 하나둘씩 가버리는 거야. 나는 맨 마지막까지 남았다가 가만히 앉아 있으면 추워서 해 뜰 때까지 한참 걸었어. 그냥 길 따라 막 걷다 보면 하늘이 까만색에서 남색, 진한 보라색이 됐다가, 가로등도 꺼지고 달도 점점 산 뒤로 넘어가는데, 새 우는 소리가 들리기 직전이 제일 조용해. 그럴 때면 괜히 기분이 촉촉해져서 아무한테나 전화를 하고 싶은데 그 시간에 전화를 받을 사람이 없었어.

 

이치마츠는 기차표를 두 번이나 끊었다가 취소했다. 카라마츠가 늦게 와도 여유롭게 가려고 좀 늦은 시간으로 표를 끊었는데도 카라마츠는 오지 않았다. 매표소 직원은 이치마츠를 수상하다는 눈으로 보면서 두 번째 기차표를 취소해주었다. 이치마츠가 혼자 두리번거리고 있으면 주변 사람들이 눈여겨보다가 경찰에게 신고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치마츠는 남자화장실 제일 안쪽 칸으로 들어가 변기 뚜껑을 내리고 앉아 배낭을 끌어안았다. 눈이 뻑뻑해져 이치마츠는 마스크를 벗어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그리고 문득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기차역에서 저택 쪽으로 가는 버스는 이미 끊긴지 오래였다. 이치마츠는 설마, 아니겠지, 카라마츠가 날 버리고 도망간 거겠지, 하면서 한참 새벽길을 달렸다. 가로등이 저 앞에서부터 하나씩 꺼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달려본 적이 없어 순식간에 목 끝까지 숨이 턱턱 막혔다. 옆구리에서 조이는듯한 통증이 느껴지고, 종아리는 쥐가 나려는 것처럼 뻐근해졌다. 하지만 이치마츠는 아픈 줄도 모르고 한참을 달렸다.

이치마츠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주변을 살핀 뒤 조심스럽게 저택의 정문을 열었다. 정원 쪽에서 까마귀 우는 소리가 빗소리 사이로 희미하게 들려왔다. 정문 쪽 커다란 창문이 열려 비가 저택 안으로 들이치고 있었다.

피비린내가 났다. 이치마츠의 코는 귀신같이 익숙한 냄새를 잡아냈다.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이치마츠는 들고 있던 가방을 떨어뜨렸다. 가방 안에 든 망치가 바닥에 부딪치며 쿵, 하고 둔탁한 소리를 냈다. 늘 멋지게 다듬던 머리카락은 엉망으로 흐트러져 피에 엉겨붙어있었다. 샤워가운 밖으로 드러난 팔다리는 대리석처럼 새하얗게 질려서 이치마츠는 숨이 막혔다. 왜 내 인생은 이렇게 많은 죽음들 위에 세워진 걸까. 이치마츠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차라리 내가 말을 하지 말걸 그랬어. 너한테 이 집 지하에 시체가 있으니까 도망가야 된다는 얘기 같은 건 하지도 말고, 아니 경찰에 먼저 신고를 했어야 했어. 너는 그냥 아무것도 모른 채로 남았다가 여주인에게 버려져야 했어. 아니 나를 배신하고 여주인에게 나를 넘겼어야 했어. 네가 나를 모르는 게 나을 뻔했어. 네가 문을 두드렸을 때 아무도 없는 척 조용히 네가 돌아가는 걸 기다려야 했어. 네가 멀리서 반짝거리고 있어도 나는 아무것도 못 본 척 방에서 나오지 말았어야 했어. 네가 친절하게 대해줬다고 거기에 마음이 풀려버리면 안됐던 거였어. 이치마츠의 마스크 밑으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숨쉬기가 힘들었다. 이치마츠는 그 자리에 앉아 온몸을 떨다 조금씩, 조금씩 카라마츠를 향해 기어갔다.

, 아냐, 나는 너를 만났어야 했어, 네가 나 때문에 죽은 지금까지도 이기적이라서 미안해. 이치마츠는 카라마츠를 조심스럽게 잡아 당겨 그의 무릎 위에 머리를 뉘였다. 차가웠다. 이치마츠가 처음 잡았던 카라마츠의 손은 따뜻했는데, 내 손이 차가운 게 미안해질 정도로 따뜻했는데, 카라마츠는 차가워 얼음장 같았다. 카라마츠는 눈도 감지 못하고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카라마츠가 그랬던 것처럼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눈을 감겨주려고 했지만 굳어 감기지 않았다. . 나는, 나는, 네가.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이치마츠는 컥컥 숨을 거칠게 들이마시며 울었다.

미안해. 나는 네가 없으면 안됐어. 차라리 너를 몰랐으면 몰라도 나는 너를 알게 된 이상 네가 없으면 안 되는 거였어. 너는 나를 만나서 죽었는데 너한테 미안한 것보다 네가 있어서 좋은 마음이 더 커서 미안해. 혼자 여기에 남겨놔서 미안해. 당연히 위험한 거였는데 너 혼자 남겨놓고 도망치라고 해서 미안해. 여길 나가는 게 무섭기도 하지만 너랑 같이 떠난다고 생각하니 설레서 기다릴 수가 없었어. 차표를 두 장 끊는 게 처음이라 좋았어. 안아줘서 고마워. 나 얼굴 징그러운데 키스하게 해줘서 고마워. 미안해. 내가 좋아해서 미안해. 네가 좋아질수록 네가 날 버릴까봐 무서웠어. 너는 착하고, 다정한데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서 무서웠어. 좋아한다고 인정해버리면 너한테도 같은 걸 바라게 될까봐 무서웠어. 욕심만 자꾸 커져서 네가 부담스러워 버릴까봐 무서웠어. 함께 있고 싶어 해서 미안해. 버리지 않아줘서 고마워. 아니 죽게 만들어서 미안해. 차라리 네가 날 버렸으면 좋았을 거야. 사랑해. 사랑하는 거였어. 사랑하는 게 맞아. 사랑하고 있어. 처음 본 순간부터 그랬을지도 몰라. 누구든 너를 보면 사랑할 수밖에 없었을 거야. 사랑해. 사랑하고 있어. 사랑해.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난 경비가 경찰에 신고를 했다. 이런 시골에서 살인사건이 나기는 오랜만이라 경찰들은 순식간에 도착해 저택에서 밖으로 나가는 입구를 통제했다. 경찰들은 이치마츠가 더 이상 시체를 건드려 범인의 흔적을 지우지 못하도록 그를 끌어냈다. 그의 가방에선 핏자국이 배인 망치와 칼이 나왔고 이치마츠의 마스크와 옷은 온통 피범벅이었다. 이치마츠는 정신을 놓아버려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고, 뒤늦게 출근한 식당 아줌마가 이치마츠는 도살장에서 일을 했었고 저 망치와 칼은 이치마츠가 원래 쓰던 도구였다고 증언했다. 또한 이치마츠는 카라마츠가 살해당한 시간에 저택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기차역에 있었다는 게 확인되어 경찰들은 그를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이치마츠는 문 옆에 서서, 경찰들이 이곳저곳을 들쑤시는 걸 멍하니 지켜봤다. 이대로 죽어버릴까. 카라마츠가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카라마츠가 원망하고 있겠지. 만나면 사랑한다고 말해도 될까. 죽어서도 나는 얼굴에 이렇게 흉이 남아서 징그러울까. 카라마츠가 나를 좋아해줄까.

그 순간 정문 쪽 벽에 난 큰 창문으로 커다란 무언가가 날아와 창문을 요란한 소리로 깨뜨리고 우당탕탕하고 안으로 굴러 떨어졌다. 이치마츠는 자신도 모르게 벌벌 떨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귓가에서 다시 그의 집과 부모님이 폭발하는 소리가 들리는듯했다. 그러나 그 불시착한 물체는 불붙은 헬기가 아니었다. , 그리고 이치마츠는 이제 어린애가 아니었다. 사고가 날 당시의 기억이 떠올라 머리가 쥐어짜는 듯 아프고 눈앞이 팽팽 돌았지만 이치마츠는 버티고 서있을 수 있었다. 그때 이치마츠의 부모님을 빼앗겼던 것처럼, 카라마츠를 그저 빼앗기고 가만히 앉아 죽어버릴 수는 없었다











이제 몇 편 안남기긴 했지만 올라올때까지 계속 서치하신다는 분들이 계셔서... 트위터 아이디 달아둘게요

올리면 트위터에 올렸다고 링크랑 같이 트윗하니까 그거 보고 다음편 보시면 더 편하지 않을까 해서.... @Qnamski

딱 한번, 무대에 선 적이 있었다. 카라마츠는 자기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 한숨을 깊게 쉬었다. 꼭 지금 연기하는 것 같네.

이치마츠는 자신이 먼저 짐을 꾸려 집을 떠나겠다고 했다. 두 사람이 한꺼번에 나가게 되면 의심을 받을 수도 있고, 여자는 잠들기 전까지 종종 카라마츠를 불러 귀찮게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카라마츠는 여자가 잠자리에 들고, 식당 아줌마가 퇴근을 한 뒤 경비가 집의 정문과 후문을 잠그고 자기 방으로 돌아가는 10시 반에 담이 조금 허물어진 호수 쪽 샛길을 통해 도망치기로 했다. 이치마츠는 시내에 책을 사러가겠다고 핑계를 대고 간단히 짐을 꾸려 들고 나가 기차역에서 먼저 새벽표를 끊고 카라마츠를 기다릴 것이다. 카라마츠는 나중에 담을 넘어야 했기 때문에 꼭 가지고 가야 할 것들은 이치마츠에게 미리 넘겨주기로 했다. 사실 카라마츠가 챙길 것은 없었다. 여자는 기분 내키는 대로 현금다발을 주곤 했다. 카라마츠는 돈을 받을 때마다 방 서랍 구석에 숨겨놓았지만 지금 세어보니 많은 액수가 아니었다. 아쉬웠다. 카라마츠도 이치마츠도 고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해 일자리를 찾기도 힘들 것이며 어디서 머무르든 간에 다달이 월세가 나갈 것이다. 그리고 카라마츠는 이치마츠 얼굴에 남은 흉터도 제거해주고 싶었다. 뭔가 팔아서 돈을 벌 수 있는 물건이 있을까 하고 찾아봐도 온통 여자가 사준 옷가지뿐이었다. 어쩔 수 없지.

카라마츠는 옷장에서 요란하게 번쩍거리는 바지를 꺼내 그걸로 돈다발을 둘둘 말아들고 방문을 나섰다. 부엌을 지나치면서 식당 아줌마가 카라마츠를 흘깃 보았지만 뭐라 말을 걸지는 않았다. 카라마츠는 미소를 지으며 지하로 내려갔다. 이치마츠는 한참 짐을 꾸리고 있었다. 최대한 작게, 가볍게, 하지만 꼭 필요한 것은 챙기도록. 카라마츠는 돈다발을 건네주고 소파에 앉아 이치마츠가 바쁘게 방 안을 돌아다니는 걸 지켜보았다. 카라마츠가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가 없었다. 이치마츠는 방 안에 있는 서랍이란 서랍은 모두 열고 구석구석까지 뒤지면서도 카라마츠를 힐끔힐끔 돌아보았다.

괜찮아. 천천히 해도 돼. 우리 아직 시간 많아.”

카라마츠가 웃으며 말하자 이치마츠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다시 짐을 챙겼다. 이치마츠는 언제 보더라도 늘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머리를 볼 때마다 쓰다듬고 싶었다.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하지만 카라마츠가 이치마츠의 머리 쪽으로 손을 올리기만 해도 이치마츠는 움찔거렸다. 많이 아팠겠지. 카라마츠는 문 앞에 걸린 이치마츠의 마스크를 집어 들어 써보았다. 마스크는 카라마츠의 이마부터 턱 끝까지를 완전히 덮었다. 눈도 조금 가려서 답답했고 숨 쉬는 것도 힘들었다. 마스크를 쓰고 좀 지나자마자 답답해지면서 입김 때문에 습기가 차기 시작했다.

그건 왜 쓰고 있어?”

이치마츠가 돌아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마스크, 다른 걸로 사자.”

이치마츠는 대답이 없었다. 화난 것 같기도 했고,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카라마츠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치마츠에게 다가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릿결이 부드러웠다. 이치마츠가 다시 움찔하고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카라마츠는 충동적으로 마스크를 쓴 채 이치마츠에게 입을 맞췄다. 입술에는 딱딱한 마스크의 감촉만 느껴졌지만 숨구멍으로 이치마츠의 입김이 닿는 듯 했다. 이치마츠는 뻣뻣하게 굳었다가, 조심스럽게 카라마츠의 머리 뒤로 손을 뻗었다.

이거, 풀어도 돼?”

풀고 싶어?”

이치마츠의 얼굴에서 온갖 감정이 뒤섞여 물결치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잠깐 기다렸다가, 이치마츠의 왼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이치마츠는 계속해서 망설이고 있었다.

거봐. 마스크 쓰면 하나도 안 보인다니까.”

카라마츠는 고개를 옆으로 약간 기울여 직접 마스크를 묶은 끈을 풀었다. 마스크가 툭 떨어졌다. 이치마츠는 숨을 한번 몰아쉬고, 덜덜 떨면서 카라마츠의 입가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키스할 때는 눈을 감는 거야.”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뒷머리를 다시 한 번 쓰다듬고, 이치마츠의 눈을 감겨주었다. 이치마츠는 다시 눈을 떴다가, 카라마츠의 입술에 가만히 입을 맞추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카라마츠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드넓은 잔디밭을 한참 바라보았다. 비록 이 집에서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또 지하엔 시체가 네 구나 꽁꽁 얼어있었지만 카라마츠는 이 방이 좋았다. 따뜻하고, 조용하고, 방에는 욕실도 딸려 있었으며 무엇보다 자신을 좋아하는 이치마츠가 있어 좋았다. 이치마츠는 몇 살쯤 되었을까. 한 번도 물어본 적은 없다. 하지만 카라마츠는 당연히 이치마츠가 자신보다 최소한 한두 살쯤은 어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카라마츠와 별반 차이는 없어 보이지만 이치마츠는 어린 티가 났다. 생긴 게 어려 보인다던가 하는 건 아니고, 카라마츠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어린 티가 있었다. 집을 떠나기 전에 이 방에 이치마츠를 불러 밤새 놀았으면 좋았을 텐데. 카라마츠는 못내 아쉬웠다.

10시다. 이치마츠가 먼저 집을 나섰을 것이다. 카라마츠는 자기 방 침대에 앉아 초조하게 시계를 보고 있다가 자신이 집 안에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확인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복도로 나갔다. 복도는 조용했다. 카라마츠는 아무거나 생각나는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2층을 한 바퀴 돌고 1층으로 내려갔다.

, 마침 왔네.”

여자가 중앙 홀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좋은 와인이야. , 카라마츠 군은 술을 잘 못하지 참.”

여자가 카라마츠의 잔에 와인을 반쯤 따른 뒤 자기 잔에도 와인을 다시 채웠다. 이미 잠든 줄 알았는데. 카라마츠는 웃으면서 와인 잔을 들고 향을 한번 음미한 뒤 한 모금 입술을 축였다. 여자가 가르쳐준 것이었다. 여자는 좋아하면서 자신의 잔을 들어 카라마츠의 잔에 살짝 부딪치고 와인을 한 번에 반쯤 마셨다. 카라마츠는 등골이 서늘했지만 애써 참으며 미소를 지었다. 전등을 반쯤 꺼놓아 집 안이 어두침침했다.

주무시는 줄 알았습니다.”

사실 카라마츠 군한테 할 얘기가 있어서 기다리고 있었어.”

여자가 운을 뗐다. 설마.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거지. 카라마츠의 입이 바짝바짝 말라들었다.

예전에 이 저택에서 남편이랑 자식들을 잃어버렸다고 얘기했었지?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건지 모르겠지만, 언제 돌아올지 몰라서 계속 이 저택을 지키고 있었거든.”

여자는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카라마츠에게 사실대로 얘기하지는 않는다. 카라마츠는 안도했다. 지금 당장 그를 죽일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이제 조금만 더 지나면, 한 시간만 버티면.

그런데 이제는 도무지 견딜 수가 없어서.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겠고, 나도 이제 내 인생을 찾고 싶어. 새 출발을 해야 될 때가 온 것 같아. 황금 같은 젊은 날은 이미 다 흘러가버렸지만.”

무슨 그런 말씀을. 카라마츠가 씨익 웃으며 다시 여자의 잔에 와인을 따랐다. 빨리 마시고 빨리 취해서 잠들어버려.

카라마츠 군. 사실 카라마츠 군을 좋아해왔어.”

여자가 열띤 눈으로 미처 대비할 틈도 없이 고백을 해왔다. 카라마츠는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난 당신의 지하 창고에 뭐가 들어있는지 알고 있는데.

함께 외국으로 가지 않을래? 어딜 가든 좋아. 카라마츠 군이 가고 싶은 곳으로 가자. 이 집도 이제 정리하고, 새로운 곳에서 시작하는 거야.”

카라마츠는 잠깐 난감한 표정을 짓고,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신 뒤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어디든 좋아요.”

그럴 줄 알았어. 여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호들갑을 떨었다. 그리고 뭔가 생각난 듯 테이블 주변을 훑어보다가 카라마츠의 팔을 잡아끌었다.

카라마츠 군에게 줄게 있었는데 내 방에 놓고 와버렸네.”

여자의 손이 닿은 팔에 소름이 돋았다. 역겨워. 카라마츠는 구역질이 나려는 걸 참고 애써 웃으면서 여자의 방으로 올라갔다. 여자는 잠깐만 기다려, 하고 침실과 옷방을 오가며 뭔가를 찾았다. 카라마츠는 방 입구에 서서 기다리다 여자의 침대 옆 협탁 서랍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 조용히, 여자의 눈에 띄지 않게 카라마츠는 천천히 다가가 커튼을 내리는 척 하면서 협탁 안을 들여다보았다. 두꺼운 금시계와 금반지가 하나, 백금 반지가 하나, 진주 팔찌 그리고 사파이어 반지가 아무렇게나 놓여있었다. 저 정도면 아무 금은방에나 쓱 들어가 팔 수 있지 않을까. 여자는 이제 옷방에 가득 들이찬 옷장을 온통 뒤집어엎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하면서 하나씩 집어 그의 옷 사이사이에 끼워 넣었다.

찾았다!”

여자가 금색 리본이 묶인 상자를 들고 카라마츠에게 다가왔다. 카라마츠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마터면 들킬 뻔 했다. 여자는 카라마츠에게 상자를 내밀며 어서 풀어보라고 졸라댔다. 카라마츠는 상자를 침대에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포장을 풀었다. 얇은 샤워가운이었다.

카라마츠 군 몰래 가져오느라 혼났어. 자자 나는 2층에서 씻을 테니까, 카라마츠 군은 1층으로 가세요

여자는 카라마츠의 팔을 끌고 1층으로 내려가 욕실에 밀어 넣었다. 벗은 옷은 젖으니까 밖으로 내놓으렴, 하고 여자가 문 너머에서 소리를 질렀다. 카라마츠는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차라리 아까 거절을 했어야 했던 건가. 카라마츠는 어쩔 수 없이 옷에 숨겼던 보석을 세면대 밑 구석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옷을 벗어 속옷을 제외한 나머지를 문 밖으로 내놓았다. 여자는 깔깔 웃으면서 옷가지를 들고 갔다.

카라마츠는 일단 샤워 가운을 두르고, 가운 주머니에 보석들을 집어넣었다. 금시계는 그냥 버릴까, 너무 무거운데. 하지만 그게 제일 돈이 될 것 같았다. 카라마츠는 잠깐 고민을 하다 그냥 주머니에 넣고 복도에서 혹시 무슨 소리가 나진 않는지 귀를 기울였다. 조용했다. 욕실 안에 시계가 없어서 시간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아까 여자의 침실에 걸린 시계를 봤을 땐 열한시가 가까워져왔다. 아니, 이제 시간이 의미가 없다. 욕실에서 중앙 홀로 나가서 정문을 통해 부엌 쪽으로 빠져야한다. 아까 낮에 경비아저씨가 작업복을 빨아서 거기에 널어놓는 것을 봤다. 그걸 창고에서 갈아입고, 원래 계획대로 호수 쪽으로 달려가면 된다. 맨발인 게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이치마츠를 만나서 제일 먼저 신발을 사야겠다.

카라마츠는 심호흡을 하고 문손잡이를 완전히 돌리고 문을 열었다. 복도엔 아무도 없었다. 천천히, 한 걸음씩. 심장이 쿵쾅거렸다. 중앙 홀에 거의 다 다다랐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조금만, 조금만 더 가면.

그 순간, 카라마츠의 등에 날카롭고 단단한 것이 푹, 소리를 내며 파고들었다. , 카라마츠는 숨을 삼켰다. 온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하면서 카라마츠는 울컥 피를 뱉었다. 카라마츠는 허리에 박힌 것을 뽑으려 헛손질을 하다 앞으로 엎어졌다. 카라마츠의 등 위에 올라탄 사람은 칼을 다시 뽑았다. 카라마츠는 샤워 가운이 점점 축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시야가 거뭇해졌다. 카라마츠가 애써 일어나려고 손을 짚어도 미끄러졌다. 일어나야 되는데, 카라마츠의 팔다리에 점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바닥에 피 웅덩이가 고여 샤워가운이 척척하게 달라붙었다. 칼의 주인은 다시 아까 칼을 꽂았던 자리에 칼을 맞춰서 밀어 넣고 칼을 180도 돌렸다. 칼날이 몸 안에서 우드득 소리를 내며 살점을 후비는 게 느껴졌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