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션에 떨어졌다. 작은 극단에서 하는 조연이라 너무 쉽게 생각했던건가. 홈페이지의 공고를 암만 뒤져봐도 내 이름은 없다. 나도 학교에선 날리던 메소드 연기파 배우였는데, 학교를 졸업하고 나니 쉽지가 않다. 세상은 얼마나 넓고 나보다 잘난 사람은 얼마나 많은지. 아마 이 시간에 넷까페에서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 쓰레기들중에도 나보다 잘난 사람이 차고 넘칠 것이다. 사실, 나는 이제 더이상 멋진 사람은 아니다. 드넓은 강당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독백을 읊는 왕자가 아닌 것이다. 형제들과 함께 있을때는 실감하지 못하지만 이렇게 밖에 나와서, 마츠노네 여섯쌍둥이가 아닌 마츠노 카라마츠로 세상을 마주할때면 늘 이렇게 작아진다. 작고 작고 작아서 누군가가 꾹 밟아 찌그러뜨려 분리수거통에 넣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나는 한참동안 다른 극단들의 오디션공고를 스크랩하다 그만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불현듯 지금도 삼삼오오 뭉쳐서 뒹굴거리고 있을 형제들이 보고싶어진 것이다. 다들 저녁을 먹고 포커를 치고 있거나, 아님 쥬시마츠가 좋아하는 야구 보드게임을 하거나, 아님 토도마츠가 내일 알바갈 때 입고 나가려고 골라둔 옷을 망치거나 하고 있겠지. 너무 익숙해 눈앞에서 훤히 그려지는 풍경을 찬찬히 읽어보다 심장 한켠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우리의 방 한 구석엔, 그녀석이 못생긴 고양이를 한마리 끌어안고 있을 것이다. 힘이 하나도 없어보이는 흐릿한 눈으로 고양이를 품에 안고 뒹굴다가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뭘 끄적거리는 녀석이. 꼭 발에 납덩이를 매단것처럼 점점 발걸음이 느려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두렵다. 내가 품어온 감정이 두렵고, 녀석과의 그 거리감도 너무 멀어서 나는 무섭기 그지없다. 아무도 없는 이 어두컴컴한 골목길보다도 그 싸늘한 시선이 무서워 견딜수가 없다.

언제부터 한 배에서 동시에 태어난, 그리고 나랑 똑같은 얼굴을 한 형제를 마음에 두었냐고 물으면 나는 한참 고민을 하다, 내가 게이라는 걸 자각한 순간부터 녀석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부모님이 여행을 가신다고 집을 비우시고 오소마츠 형이 친구한테 빌려온 야한 비디오를 보던 밤이었다. 밝은데서 보기 부끄럽다고 쵸로마츠가 난리를 피우는 통에 거실 불을 끄고, 혹시나 이웃집에서 보이지 않을까 싶어 창이고 뭐고 다 커튼으로 가려 공기가 텁텁하고 더웠다. 비디오에선 어리게 생긴 여배우가 인터뷰를 잠깐 하다가 곧 옷을 벗고 하얗고 부드러워보이는 피부에 걸친 야한 속옷을 어쩔줄몰라하는 표정을 지으며 풀어내렸다. 오소마츠 형은 연신 오오, 이열, 하면서 추임새를 넣었고, 쵸로마츠와 토도마츠는 얌전히 무릎을 세우고 앉아 침을 꼴딱꼴딱 삼켰다. 쥬시마츠는 형제들에게 뭔가 물어볼게 있는 것 같았지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앉아 티비 화면만 응시할 뿐이었다. 나는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져 구석에 있던 담요를 두르고 거실 벽에 등을 붙이고 앉았다. 형제들과 이런 걸 보는게 어색하고 민망했다. 남자는 여자의 가슴이니 엉덩이니를 한참 주물렀고 좀 지루해질 때 쯤 얼굴에 모자이크가 된 남자가 여자의 안에 삽입하는데, 그 터지는듯한 신음소리에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나는 이정도는 야하지도 않고 여자가 섹시하니 어쩌니 하고 동생들 앞에서 오기를 부리고 싶었지만 할수가 없었다. 열 다섯살의 나이에, 나는 싸구려 AV에 출연한 남자의 단단한 등과 거친 손, 그리고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빠져들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내 옆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움츠러든 나와는 다르게 거실 벽에 늘어지듯 기대고 불규칙한 숨소리를 내며 발끝을 움찔거리는 이치마츠의 존재감이 확, 내게 밀려온 것이다. 이치마츠가 뜨거운 용암처럼 내 위로 우르르 쏟아지는 것 같았다. 입이 바싹바싹 말랐다. 옆에서 열이 오른 이치마츠가 너무 뜨거워서 나는 견디질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가 혼자서 자위를 했다. 거실에서 오소마츠 형이 조루니 동정이니 하면서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이치마츠가 무서워서 엉엉 울었다. 찬물로 한참 세수를 해도 얼굴에 오른 열이 내려가질 않았다. 

나같은 사람을 게이라고 하는 건 고등학교에 가서나 알게 됐다. 나는 내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티를 내기가 싫어 일부러 여자애들을 쫓아다니고 터프한 남자 배우들을 따라했다. 따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런 모방은 연극부 활동을 하는데도 도움이 많이 됐다. 여자애들은 내 적극적인 공세에 살짝 흔들리다가도 어딘가 이상하다며 돌아서곤 했다. 그러면 나는 오히려 안심이 되어 형제들 앞에서 마음껏 슬퍼할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치마츠는 점점 내게 싫은 내색을 해서, 결국엔 일상적인 대화도 세 마디 이내로 끝내는 어색한 사이가 되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대화를 오래 하면 할수록 그 무심하고 낮은 목소리와 거친 몸짓에서 시선을 돌리기가 힘들었다. 어딜가든 이치마츠의 존재감은 내 주위를 맴돌곤 했다. 화장실에서 혼자 거울을 보면서 대체 나와 똑같이 생긴 그 녀석이 왜 좋은건지 이해하려고 해본 적도 없진 않았다. 하지만 오소마츠 형도, 쵸로마츠도, 쥬시마츠도, 토도마츠로도 채울 수 없는 그 특별한 무언가가 이치마츠에게 있었다. 거울을 보면서 이치마츠가 늘상 짓는 표정을 지어보려고 해도 되지가 않았다. 나는 이치마츠처럼 먼지냄새가 나는 책을 읽지도 않고, 늘 좋고 싫은게 분명하지도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늘 누군가에게 시선을 끄는 것도 하지 못한다. 내가 연기를 할 수 있는 것은 내 자신을 버리고 완전히 그 배역이 될 수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나는 이치마츠를 내 안에서 완전히 버릴수가 없어 이치마츠가 되지 못했다. 

나는 내 자신이 무섭고 두려워질수록 더욱 더 형제들에게서 달아나 형제들과 다른 나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더 멋있고 섹시한 남자 배우를 따라했고, 형제들은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 연극이니 배우니 하는 것들로 도망쳤다. 아무런 성과도 없었지만-남자 몇 명과 짧은 만남을 가지긴 했다-, 언젠간 나는 완전히 내 안에서 이치마츠를 버리고 나를 버려서 아무렇지않게 이치마츠가 데려올 여자에게 똑같은 얼굴이 여섯이나 되는데 잘못된 선택을 하셨다고 웃어줄 수 있는 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생각에 잠겨 한참을 걷다보니 어느새 집 앞이었다. 집 열쇠를 찾느라 주머니를 뒤적거리는데 뒤에서 불쑥 열쇠를 쥔 손이 나와 문을 열었다. 이치마츠였다. 나는 다시 등줄기에 오싹하고 소름이 돋았다. 말없이 문을 열고 나를 앞질러 들어가는 이치마츠의 뒤로 알싸한 체향이 남았다. 나는 아랫입술을 한번 깨물고 바닥만 보다가 흡, 하고 기합을 넣고 웃으며 이치마츠의 뒤를 따랐다.

"고양이 먹이 주고 온거야?"

"빠칭코."

의외로 이치마츠가 바로 대답을 했다. 보니까 이치마츠의 후드 주머니가 무거웠다. 제대로 땄구만. 나는 괜히 웃음이 나와 이치마츠의 뒤를 따랐다. 

형제들이 깨지 않게 조용히 겉옷을 벗어 걸어두고 간단히 씻은 뒤 방으로 돌아와 잠옷으로 갈아입으려는데 자리에 먼저 누워있던 이치마츠가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깼어? 미안, 얼른 갈아입을게. 도로 자."

내가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여도 이치마츠는 계속 해서 내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치마츠의 시선이 따가웠다. 나는 민망해져 등을 돌리고 서서 재빠르게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이 방엔 분명 여섯 명이 있는데, 꼭 나와 이치마츠 단 둘만 남은 것 같았다. 이치마츠는 내가 누울 자리 바로 옆에서 앉아 내가 옷을 갈아입는 걸 지켜보고, 나는 그 따가운 시선을 느끼면서 긴장하는 것이다.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방이 어두워 이치마츠에게 보이지 않겠다 싶어 안심했다. 동생 앞에서 고작 옷갈아 입는 정도로 손을 떠는 형은 실격이다. 물론 동생을 보면서 발정하는 형도 합격은 아니지만.

이치마츠는 가만히 앉아 내가 잠옷을 갈아입고 로봇처럼 척척 걸어와 잽싸게 자리에 눕는걸 지켜보았다.

"자장가 불러줄까?"

나는 괜한 오기로 이치마츠에게 씩 웃어보였다. 그럼 늘상 그렇듯 이치마츠가 비웃거나, 아님 경멸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돌아누울 것이다. 그러나 이치마츠는 그러질 않고 얌전히 자리에 누워 부스럭거리며 나에게 기대 눈을 감았다. 낯설었다. 그새 샤워도 했는지 이치마츠의 부드러운 머리칼에서 샴푸냄새가 났다. 나는 지금 침을 삼키면 꼴깍 하는 소리가 이치마츠에게 들릴까 들리지 않을까 하고 한참 고민하다 천천히 조금씩 침을 삼켰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던건가. 고양이들한테 밥을 주다가 히키코모리라고 욕을 먹었다던가, 아님 아끼던 고양이가 죽었다던가, 형제들이 툭툭 던지는 장난에 상처를 받았다던가. 다른 형제들 앞에선 티도 내지 못하고, 바로 옆에 눕는 나에게 간신히 기대 위로를 받는 것일테다. 나는 아직까지도 예민하게 곤두선 전신의 감각을 최대한 가라앉히고 아무렇지 않은 척 카라마츠에게 한쪽 팔을 두르고 살짝 끌어안아 토닥였다. 이치마츠는 잠깐 내뺄지 말지 고민하는 것 같더니 곧 얌전히 안겨있다 잠이 들었다. 내 역할은 이거다. 오소마츠 형이 하지 못하는 부류의 형 노릇을 대신 하는 둘째형으로, 동생들이 어렵게 느끼지도 않으면서 가끔 이렇게 기댈 수 있는 형. 나도 눈을 감아 숨을 골랐다. 이미 셀 수 없이 많은 포기를 했고 오늘도 아마 수 백 번째 포기를 했다. 앞으로 수 천 번 쯤 더 반복하면 아예 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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