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소리가 났다. 카라마츠는 문을 열고 들어서려다 멈추고 병원 안쪽에 귀를 기울였다. 자세히 들어보니 요즘 유행하는 아이돌이 부른 댄스곡이 병원 벽에서 진동이 느껴질 만큼 꽝꽝 울려 퍼지고 있었다. 닥터의 병원에서 아이돌 노래가? 카라마츠는 문손잡이를 잡고 잠깐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카라마츠 씨!”

카라마츠와 눈이 마주치자 쥬시마츠가 양손에 길쭉한 풍선을 이리저리 꼬아 만든 강아지와 꽃 같은걸 들고 카라마츠에게 다가와 불쑥 내밀었다. 그리고 카라마츠에게 뭐라고 막 말을 걸었는데 노래 소리에 묻혀 들리지를 않았다. 카라마츠는 일단 그걸 받아들고 병원 천장의 네 모서리에 붙어 있는 스피커를 가리켰다.

!!!! !!!!! !!!!”

쥬시마츠는 알아듣지 못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다 카라마츠가 스피커를 가리키고, 그리고 풍선을 들고 있는 양 손으로 귀를 막는 시늉을 하자 그제야 아하! 하고 달려가 리모컨으로 음악을 껐다. 병원 안쪽의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던 유리병들이 음악소리에 펄쩍거리고 있었는지 제자리에 우수수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카라마츠는 풍선을 구석에 내려놓고 먹먹한 귀를 문질렀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그러자 쥬시마츠가 책상으로 달려가더니 폭신폭신한 호랑이 앞발 모양의 장갑을 꺼내들어 손에 끼웠다. 그리곤 양손을 흔들면서 활짝 웃었다. 예전에 쥬시마츠와 놀이공원에서 데이트를 했을 때 카라마츠가 사준 것이었다.

놀이공원 스타일이에요!”

, 그래서 그랬구만. 카라마츠는 피식 웃고 쥬시마츠가 만들다 실패했는지 처참한 꼴로 널려 있는 풍선조각들을 모아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간신히 살아남은 풍선들을 주워 책상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아마도 봉제인형 가게에서 어린이 동물원이라고 나온 시리즈를 전부 다 사온 것으로 보이는 인형 세트들을 들여다보았다.

어때요?”

쥬시마츠의 목소리가 한껏 들떠있었다. 어젯밤 카라마츠가 출근을 해야 한다고 졸린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쥬시마츠가 한참을 망설이더니 카라마츠의 손을 잡고 놀이공원 일은 그만두고 하루 종일 자기랑 같이 병원에 있어주면 안되냐고 물었던 것이다. 사실 카라마츠도 쥬시마츠와 병원에서 이것저것 신기한 것들을 구경하고, 쥬시마츠가 들려주는 요상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끔은 뽀뽀도 하고 하는 일이 꽤 즐거워 쥬시마츠의 제안이 솔깃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카라마츠도 살아오면서 연애를 몇 번 해봤고, 무작정 붙어 있기만 하는 게 좋은 점만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카라마츠는 지금 그가 하는 일도, 함께 일하는 오소마츠도 좋았기에 쥬시마츠의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안 된다는 얘기를 들어도 쥬시마츠는 카라마츠의 손을 꽉 붙잡고 입을 삐죽거리며 왜 안 되는 거냐고 물었고, 카라마츠는 차마 그들이 하루 종일 붙어 있으면 질려버릴 거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놀이공원 분위기가 좋아서 일을 계속 하고 싶다고 둘러대고 말았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 모양인거지. 카라마츠는 어느새 곁으로 다가와 뒤에서 카라마츠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있는 쥬시마츠의 손을 겹쳐 잡았다. 아마 쥬시마츠는 오늘도 휴일팻말을 걸어놓고 신나게 쇼핑을 하고 병원 안을 꾸몄을 것이다. 카라마츠는 샹들리에에 걸린 빨갛고 노란 리본들을, 나름 동물원처럼 같은 우리를 쓰는 애들끼리 나눠서 늘어놓은 인형들과 그리고 쥬시마츠가 오늘 산 것으로 보이는 반짝반짝한 오디오를 둘러보았다. 카라마츠가 쥬시마츠의 손을 토닥거리며 잡고 있자 쥬시마츠의 팔에 힘이 더 들어갔다.

나랑 같이 병원에 있어주면 안돼요?”

쥬시마츠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려왔다. 그 목소리엔 두 번째 거절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과 옅은 기대감이 깔려있었다. 카라마츠는 몸을 돌려 쥬시마츠의 양 뺨을 잡고 코끝에 쪽 하고 뽀뽀했다. 쥬시마츠의 눈이 반짝거렸다.

하루 종일 붙어있으면 우리 일 안 할 거잖아요?”

할건데에....”

맨날 낚시가고 여행가고 맛있는 거 해먹고 재밌는 거 구경하러 가고 하다보면 굶어죽을걸?”

쥬시마츠가 입을 삐죽거렸다.

왜 굶어죽어요? 맛있는 거 해먹을 건데?”

쥬시마츠는 몰라도 나는 매일매일 세끼 밥이랑 고기를 못 챙겨먹으면 죽어요. 진짜로.”

카라마츠는 대답을 하고 곁에 놓여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쥬시마츠가 잠깐 생각을 하는가 하더니 자기 의자를 끌고 와 카라마츠 곁에 바싹 붙어 앉았다.

우리 농사지을까요? 그리고 돼지랑 소랑 닭이랑 양이랑 참치도 키우고?”

그걸 다?”

할 수 있어요.”

쥬시마츠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난데없이 참치라니. 카라마츠는 웃음이 나오려는걸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

열심히 키워놓은 걸 잡아서 먹으려면 슬퍼서 안돼요.”

그럼 열심히 안 키우고 씨앗만 뿌려서 다 자라면 잡아먹는 건?”

씨앗? 카라마츠는 쥬시마츠가 밭이랑에 훠이훠이 하면서 씨를 뿌리자 그 자리에서 소랑 닭, , 돼지, 참치가 쑥쑥 자라는 걸 상상했다. 바로바로 먹으면 좋을 것 같긴 한데, 매번 고기를 먹을 때마다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고기가 먹기 싫어질 것 같았다.

쥬시마츠는 병원을 해야 되니까 안돼요. 오늘은 손님 왔어요?”

카라마츠가 화제를 돌려버리는 게 못마땅했는지 쥬시마츠가 카라마츠의 손을 잡고 뾰로통한 표정을 짓다가, 아차 하고 고개를 들었다.

오늘 토도마츠한테 전화가 왔어요.”

동생분?”

동생이 취미로 바둑클럽을 나가는데 거기서 만난 친구랑 내기 바둑을 두다가 동생이 관리하는 과수원을 날려버렸나 봐요. 애가 소소한 운은 좋은데, 그런 데서는 약하다니까요.”

쥬시마츠가 혀를 차면서 고개를 저었다. 토도마츠와는 몇 번 만나서 인사를 한 적이 있었다. 한창 겨울이 깊어갈 때쯤 햇살 원액을 맞으러 주인 없는 작업장을 방문하기도 했었고. 토도마츠는 쥬시마츠와 닮았지만 조금 더 일반인 같은 느낌이 드는 사람이었다. 내키는 대로 옷을 골라 입는 쥬시마츠와는 다르게 평범한 대학생 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지. 토도마츠는 꽤 활동적인 사람으로 보였다. 바둑도 뒀구나. 카라마츠는 쥬시마츠가 바둑판을 앞에 두고 진지한 표정으로 바둑을 두는 걸 상상해보았다. 어울리지 않네. 카라마츠는 쥬시마츠가 병원 안을 이리저리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간식거리를 내오는 걸 보면서 씩 웃었다. 쥬시마츠는 그냥 쥬시마츠 그대로가 제일 잘 어울렸다.

그럼 이제 쥬시마츠랑 동생분이랑 같이 사는 거에요?”

왜요?”

쥬시마츠가 김이 오르는 커피 두 잔을 들고 오며 물었다. 카라마츠가 보너스를 탄 기념으로 캡슐커피를 사주면서 쥬시마츠는 커피에 푹 빠졌다. 캡슐커피, 믹스 커피, 그리고 핸드드립으로 이어지면서 쥬시마츠는 커피콩을 키우겠다고 옥상 화분에 커피를 잔뜩 심었다. 카라마츠는 커피를 받아 한 모금 마시고 날이 좀 더 따뜻해지면 옥상에 본격적으로 농사를 지어보기로 결심했다.

동생 분은 그 과수원에서 사는 거 아니었어요? 그런데 그걸 날려버렸으면 갈 데가 쥬시마츠 병원 밖에 없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과수원을 주면 안돼요.”

?”

그래서 과수원을 숨길 생각이에요.”

과수원을 숨겨? 카라마츠가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표정을 짓자 쥬시마츠가 커피 향을 맡더니 한 번에 다 마셔버리고 컵을 내려놓았다.

카라마츠 씨 내일 쉬니까, 오늘 병원에서 자고 내일 아침에 같이 토도마츠네 과수원으로 가요.”

쥬시마츠의 뺨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카라마츠가 거의 매일같이 퇴근을 하면 쥬시마츠의 병원으로 와 한밤중이 될 때까지 있었지만 쥬시마츠는 매일 헤어지는 걸 아쉬워했다. 그리고 카라마츠가 쉬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카라마츠가 고개를 끄덕이자 쥬시마츠가 신나게 달려가 안쪽으로 사라졌다. 세면대에 양치 컵을 떨어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카라마츠는 그의 입맛에 딱 맞는 커피를 홀짝이면서 진짜 쥬시마츠랑 여기서 살아버릴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쥬시마츠의 트럭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아무것도 없던 조수석에는 카라마츠의 야외용 선글라스와 예비용 선글라스, 고글, 카라마츠가 좋아하는 과자와 껌 같은 군것질거리가 구석구석에 자리를 잡았고 카라마츠가 좋아하는 음악 CD도 몇 개 꽂혀 있었다. 달라진 것은 트럭뿐만이 아니었다. 카라마츠도 더 이상 쥬시마츠가 그를 업고 옥상에서 바닥까지 뛰어내린다고 놀라지 않았다. 사실 다른 사람이 볼까봐 무섭긴 했지만 여태까지 운이 좋았는지 그들을 발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해가 막 뜰 무렵이었다. 초봄이었지만 해가 뜨기 전에는 좀 쌀쌀해 카라마츠는 담요를 꺼내 무릎에 두르고 창문을 닫았다. 잔잔한 바람에 길가에 핀 빨갛고 하얗고 노란 꽃들이 소리 없이 흔들렸다. 쥬시마츠가 시동을 걸고 내비게이션을 켰다.

 

















닥터 쥬시마츠와 환자 카라마츠의 외전입니다 ㅇ0ㅇ

사람잡아먹는 걸 쓰고 나니 포카포카한 걸 쓰고 싶어졌어요....

의외로 여섯 살이라는 나이 차이는 꽤 컸던 모양이다. 카라마츠는 집 앞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의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카라마츠는 쥬시마츠와 함께 살기 전까진 자기 방에 불이 켜져있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어려서 아버지가 어머니와 이혼을 하고 아버지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을 모두 연구에 쏟아 붓는 동안 카라마츠는 혼자서 자랐다. 어두운 집으로 들어가서 불을 켜는 건 일상이었고, 슬프다거나 외롭다거나 할 때는 이미 지난 지 오래였다. 카라마츠는 한숨을 푹 쉬고 현관문을 잡았다. 누군가 집 안에서 달리는 소리가 들렸고, 문이 벌컥 열렸다. 카라마츠는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던 걸 단숨에 풀고 씨익 웃어보였다.

카라마츠 형!”

쥬시마츠가 달려들어 품에 안겼다. 쥬시마츠는 한참 성장기라 그런지 하루가 다르게 자랐고, 그들이 함께 살기 시작한지 반년이 다 되어가자 어느새 카라마츠의 키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자랐다. 그만큼 무거워지기도 했다. 카라마츠는 휘청거리다 겨우 쥬시마츠를 붙잡고 손에 들려있던 아이스크림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쥬시마츠는 카라마츠를 놓고 곧바로 카라마츠의 손을 확인하더니 아이스크림을 집어 들고 부엌으로 달려갔다. 카라마츠는 쥬시마츠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쥬시마츠가 소리를 질렀다.

! 아이스크림 지금 먹어도 돼?”

그래! 잠깐만, 옷만 갈아입고!”

카라마츠도 큰 소리로 대답을 하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소리가 나지 않게 조용히 문고리를 돌려 문을 잠갔다. 처음엔 그저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카라마츠는 혼자서 살던 버릇처럼 문을 열어놓고 지냈지만 언제부턴가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 그의 물건을 하나하나 만졌던 것 같았고, 그의 옷이, 심지어 속옷이 한두 벌씩 없어지곤 했다. 새어머니는 카라마츠를 어려워했다. 카라마츠를 부를 때도 문 앞에서 이야기를 마쳤고, 청소도 카라마츠가 직접 한다는 얘길 아버지에게 전해 들었는지 따로 건드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원래 카라마츠의 물건에 관심이 없었고.

남은 건 쥬시마츠뿐이다. 카라마츠는 실내복으로 갈아입다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문을 보았다. 카라마츠는 외동으로 이십여 년을 살다 갑작스럽게 동생이 생긴다는 얘기를 듣고 걱정하고 있었다. 그의 친구들은 고등학교 1학년이면 한창 사춘기일 때이고, 낯선 아저씨가 형노릇을 하겠다고 덤비면 자다가 칼을 맞을 거라고 겁을 줬다. 하지만 쥬시마츠는 처음부터 카라마츠의 손을 피하지 않았고, 카라마츠가 무슨 말을 하든 생긋생긋 웃으며 따랐다. 카라마츠도 그다지 말이 많은 편이 아니라 친해질 수 있을까 하고 걱정했는데, 쥬시마츠는 카라마츠가 돌아오면 그를 붙잡고 학교에서 있었던 얘기를 늘어놓았다. 카라마츠가 다녔던 고등학교를 다니는 만큼 제법 말도 통했고, 쥬시마츠는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르게 애교도 부렸고 카라마츠에게 애정 표현도 잘 했다. 동생이 생겨도 나쁘진 않구나. 카라마츠는 안심했다. 쥬시마츠가 카라마츠의 물건들에 관심을 갖는 건 그저 호기심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물건을 건드리지 말라고 얘기하면 사이가 어색해질 것 같아 그의 물건들을 나눠주면 쥬시마츠가 그의 의도를 알아차릴 거리고 믿었는데, 쥬시마츠는 멈추질 않았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 말자. 카라마츠는 아주 미묘하게 조금씩 위치가 바뀐 물건들을 바라보다 실내복을 마저 입고 벗은 옷을 들고 나왔다. 새어머니는 아직 오시지 않은 것 같았다. 카라마츠는 깜빡하고 잠금장치가 된 그대로 문을 열었다. , 하고 잠겼던 문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던 소리가 멈췄다가, 쥬시마츠가 고개를 불쑥 내밀고 카라마츠를 불렀다.

! 아이스크림에 초코 시럽 뿌려서 먹어볼까?”

못 들은 건가? 카라마츠는 안심하고 벗은 옷을 세탁바구니에 넣고 부엌으로 들어왔다.

그러다 이 썩는다? 고등학생인데 충치 생기면 쪽팔릴 거야.”

카라마츠가 쥬시마츠의 머리를 헝클어뜨리자 쥬시마츠가 배시시 웃으며 아이스크림을 크게 한 스쿱 덜었다. 아주 잠깐, 카라마츠는 쥬시마츠가 욕실 쪽을 향해 시선을 돌린 것을 본 것 같았다.

야구부는 어때?”

카라마츠가 먼저 말을 꺼냈다. 쥬시마츠는 아이스크림을 입에 가득 넣고 녹여먹다 머리가 아픈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고 있었다.

급하게 먹지 말라니까. 매번 아이스크림 먹을 때마다 그러네.”

쥬시마츠는 울상을 지으며 한참 미간을 찌푸리다 간신히 표정을 풀고 아이스크림을 더 덜어 그릇에 담았다.

야구부 코치님도 좋고, 같이 하는 친구들도 다 좋아! 그리고 방학하자마자 합숙 간다는데, 많이 힘들까?”

카라마츠는 비록 야구부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의 친구들 중 하나는 붙어서 3년 내내 카라마츠를 약 올리며 열심히 부활동을 했었다. 그 친구가 합숙을 가긴 갔었던 것 같은데, 재밌다고 했었나, 아님 힘들었다고 했었나.......

다른 건 모르겠고, 친구가 엄청 까맣게 타서 왔었어.”

카라마츠가 웃으며 아이스크림을 한 스푼 떠서 입에 넣었다. 쥬시마츠는 카라마츠를 빤히 바라보다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까만 게 좋을까?”

, 요샌 일부러 태닝도 많이 하니까? 하얗기만 한 것 보다는 건강해보이겠지?”

좋아하는 여학생이라도 생긴 건가? 카라마츠는 자신의 고등학교 생활을 떠올려보고 피식 웃었다.

공학이었으면 예쁜 여학생이 매니저 해줬을 텐데, 아쉽겠네?”

아니, 안 그래.”

쥬시마츠가 딱 잘라서 대답하고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의외였다. 이미 좋아하는 상대가 있으니 매니저 같은 건 상관없다는 건가? 카라마츠는 곰곰이 주변에 있는 다른 학교들을 떠올려보았다. 여고도 하나 있었고, 공학도 하나 있었다. 꼭 학생이 아닐 수도 있지. 카라마츠는 잠깐 고민하다가 스푼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카라마츠는 방으로 돌아가 지갑을 꺼냈다. 새어머니나 아버지가 용돈을 챙겨주는 것 같았지만 카라마츠도 용돈을 좀 쥐어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돈 문제로 쩔쩔매는 건 영 보기 싫으니까. 지갑을 들고 돌아오니 쥬시마츠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재채기라도 했나? 카라마츠는 자리에 앉아 지갑을 열었다. 그리곤 지폐 몇 장을 꺼내 쥬시마츠에게 내밀었다.

청춘도 잠깐이야. 여자 친구 생기면 맛있는 것도 사주고 그래야 돼.”

여자 친구 없는데.......”

쥬시마츠가 말끝을 흐리다 고개를 들었다. 고백하기 전인가? 카라마츠는 쥬시마츠를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았다. 아직 귀여운 얼굴이긴 하지만 어린 티도 많이 벗었고, 면도도 하기 시작했다. 야구부 활동을 열심히 하더니 키도 크고 어깨도 더 넓어진 것 같았고. 카라마츠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혹시 모르는 거야. 일단 받아.”

쥬시마츠는 입을 꾹 다물고 카라마츠가 내민 돈을 빤히 바라보다 받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감사합니다.”

내가 괜한 짓을 했나? 생각해보면 사춘기 남자애고, 이렇게 돈 받는 게 자존심이 상한다던가... 하지만 쥬시마츠는 곧 웃으며 아이스크림을 마저 퍼서 먹었다. 슬쩍 보니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가장 큰 통으로 사온걸 벌써 반은 되게 먹은 것 같았다. 이렇게 먹고 또 쑥쑥 크겠지. 카라마츠는 쥬시마츠가 자기보다 커져버리면 자존심이 좀 상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더 안 먹어?”

이제 씻고 공부해야지. 다 먹고 나서 뚜껑 꼭 닫아서 냉동실에 넣어놔.”

쥬시마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라마츠는 빈 그릇과 스푼을 싱크대에 가져다 놓고 욕실로 들어갔다. 카라마츠가 가려는 대학원엔 아버지와 친한 분들이 많았다. 특혜를 받을 수 있다면 받는 게 좋긴 하겠지만, 아버지의 체면을 생각하면 공부를 게을리 할 수가 없었다. 카라마츠는 뜨거운 물을 한참 맞고 있다가 쥬시마츠 생각을 했다. 쥬시마츠는 성적이 나쁜 편도 아니었고, 머리도 꽤 좋은 것 같았다. 저번에 얘기했을 땐 대학을 가면 좋겠다고 생각만 하고 있었지 집안 사정을 생각해서 포기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젠 사정이 다르다. 친 아들은 아니지만 쥬시마츠도 아버지의 아들이었고, 아버지는 웬만하면 쥬시마츠도 대학에 보내고 싶어 할 것이다. 카라마츠만큼 좋은 대학에 가진 못하더라도 어디 가서 부끄럽진 않을 정도로. 쥬시마츠가 3학년이 되어 본격적으로 수험을 준비할 때가 되면 카라마츠는 이미 출국해 이 집에 없을 것이다. 카라마츠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면서 그 전까지 쥬시마츠에게 공부를 가르쳐야겠다고 결심했다.

카라마츠는 목욕가운을 두르고 나왔다. 부엌에는 불이 꺼져있었다. 아마 쥬시마츠도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방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러다 배탈 날라. 카라마츠는 쥬시마츠의 방문을 슬쩍 돌아보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조용히 방문을 돌려 잠갔다. 카라마츠는 잠깐 거울을 보면서 보습제를 바르고 서랍에서 속옷을 꺼냈다.

그때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카라마츠는 깜짝 놀라 반쯤 푼 목욕가운 끈을 다시 고쳐 묶고 고개를 돌렸다. 카라마츠의 이불이 둥그렇게 위로 튀어나와 있었다. 그리곤 쥬시마츠가 얼굴을 빼꼼 내밀어 카라마츠를 보고 웃었다.

쥬시마츠, 안자고 뭐해?”

카라마츠는 무심결에 조금 날카로운 목소리로 묻고 후회했다. 쥬시마츠는 카라마츠의 손에 속옷이 들린걸 보고 앗! 하면서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얼른 입어!”

카라마츠는 주섬주섬 속옷을 입고 가운을 벗어 옆 옷장 문고리에 가운을 걸었다. 쥬시마츠가 다시 고개를 내밀고 카라마츠가 옷을 입는 걸 보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잠옷을 꺼내 바지부터 입었다. 쥬시마츠의 시선이 느껴졌다. 끈적끈적하다고 하기 보단 뜨겁고, 따끔거렸다. 카라마츠의 문 틈 사이로 느껴지던 그 시선. 카라마츠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상의 단추까지 다 잠그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쥬시마츠가 이불 밑에서 꼼지락거리다 카라마츠 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카라마츠를 올려다보았다. 자기 방으로 돌아가라고 해야지. 어떻게 말을 꺼내지? 하지만 쥬시마츠가 조금 더 빨랐다.

나 혼자서 공부하면 금방 졸리니까, 형 방에서 하면 안 될까? 조용히 할게.”

공부를 하겠다는데 어떻게 말리겠어. 카라마츠는 어쩔 수 없이 책상 한쪽을 치워주었다.

그럼 보조 의자 좀 가져올래? 여기 옆에 앉아서 해.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고.”

하지만 쥬시마츠는 이불 밑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머뭇거리다 이불 바깥으로 발 한쪽을 내밀어보였다. 카라마츠는 새삼 쥬시마츠의 발이 자기 발과 크기가 비슷하거나, 혹은 조금 더 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 한참 숨어있었더니 발이 저려. 형이 갖다 주면 안 될까? 보조의자가 어디있는지도 모르겠어.”

그러고 보니 쥬시마츠가 이 집으로 오고 보조의자를 쓴 적이 없었다.

그래. 저린 거 풀리면 가서 책도 가져오고.”

카라마츠는 방문을 열고 나가 부엌에 딸린 세탁실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뒤에서 타다닥, 하고 뛰는 소리가 나더니, 쥬시마츠가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발 저린 게 이렇게 금방 풀린다고? 카라마츠는 화장실을 한번 돌아보고 다시 부엌으로 들어갔다

*강신재의 젊은 느티나무를 모티브로 작성한 글입니다.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멋 부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인만큼 향수도 여러 개를 사다가 기분 내키는 대로 뿌리는 것 같지만 그의 곁에서 가만히 숨을 쉬다 보면 그 노랗고 파란 향수 냄새는 어딘가로 사라져버리고 은은한 비누 냄새만 남아 코끝을 간질인다그와 나는 같은 비누를 쓰는 게 분명한데어째서인지 그에게서 나는 비누 냄새는 더 청량하고 상큼하게 느껴진다아마도 그의 체향일지도 모른다고나는 멋대로 추측하고 있었다.

쥬시마츠시작한지 얼마나 됐다고 딴생각이야?”

바로 곁에 그의 동맥이 뛰고 있는 하얗고 긴 목이 있다그 말랑해 보이는 목에 코를 박고 한참 비누냄새를 맡는 상상을 하다 고개를 들었다그가 웃으면서 내 이마를 샤프로 쿡 찍고 옆에 있던 컵을 들어 물을 마셨다나는 이마가 아픈 척 웃으며 이마를 문지르면서도 그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데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내가 당신의 친동생이었다면나도 여섯 살을 더 먹으면 당신처럼 섹시해질 수 있을까요나는 입술만 뻐끔거리며 뾰족뾰족하고 자극적인 말을 입안에서 굴렸다달고시고씁쓰름한 불량식품 맛이 났다.

 

그를 처음 만난 곳은 어머니의 결혼식장이었다아저씨는 나와 처음 만난 날부터 그를 소개하지 못해 미안해했다.

미리 만나서 인사도 하고 친해지는 게 좋을 텐데 카라마츠가 아직 학기가 다 안 끝났다고 못 온다고 하네미안하다.”

나는 착한 아들의 표정을 짓고 고개를 저었다카라마츠가 오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어머니의 얼굴에 어둠이 옅게 깔렸다어머니는 카라마츠가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애써 칭찬을 하려고 했지만 카라마츠가 어머니를 만나는 걸 거부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가엾은 어머니나는 한번 만나보지도 않은 형이 미워졌다아무리 공부를 하고 있어도 어머니에게 전화라도 하는 게 예의 아닌가요즘 세상에 외국이라고 연락이 안 되는 것도 아니고그런 아들을 둔 아저씨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버지가 죽고 난 이후로 나는 지나치게 어머니를 보호하려고 하고 있었다그건 머리로는 이해를 하고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만 하려고 한다 해도 그만둘 수 있는 게 아니었다나는 난생처음 와인을 맛보고 인상을 찌푸렸다포도 쥬스 같은 색깔을 해놓고 떫은맛이 났다아저씨는 어머니에게 먹을 걸 이것저것 권해가며 나에게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얼마든지 더 시켜도 좋다고 어색하게 웃었다아저씨는 좋은 남편이 될 수 있을까나는 다시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떫은맛은 가시질 않았다.그렇지만 아저씨에게 와인도 마시지 못하는 어린애처럼 보이고 싶진 않았다.

어머니는 나에게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워주고 싶다고 했지만 나에겐 아버지는 공석도 남기지 못하고 그 자리를 완전히 잃어버렸다나에게 아버지란툭하면 집을 나가 며칠이고 떠돌다 거지꼴이 되어 돌아오는 남자였고술을 마시면 집안을 엉망으로 뒤집어놓는 남자였다없는 게 좋았고없는 게 익숙한 아버지의 자리그리고 초등학생이면 모를까고등학교 신입생으로 들어가는 소년에게 진짜 남자로서의 롤모델은 꼭 집안에서 찾아야 하는 게 아니니까나는 간신히 와인 한 잔을 다 비웠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이었다나는 몸에 딱 맞는 정장이 어색해 넥타이를 조금 풀었다어머니는 둘 다 재혼인 만큼 결혼식은 하지 않고 그저 혼인신고만 하겠다고 했지만 아저씨가 고집을 부려 간단한 결혼식을 하게 되었다나는 그 편이 좋았다어느 날 갑자기 입적을 했다고 주변사람에게 알리는 것보다 당당하게 결혼식을 하면서 알리는 게 좋았으니까세간의 암묵적인 룰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았다어머니가 예쁜 옷을 입고 가족들을-우리 쪽의 가족들은 얼마 없지만모아놓고 어머니가 이렇게 사랑받는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어머니가 신부 대기실에 앉아있는 동안 나는 친척들과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구석에 앉아있었다피아노 앞엔 아저씨의 친척인듯한 여자가 앉아 손을 풀고 있었고나는 어젯밤 본 야구 경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비누 냄새가 났다그리고 찬바람에 하얗게 마른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네가 쥬시마츠구나?”

남자가 웃었다남자는 뛰어왔는지 머리가 바람에 흐트러져서 엉망이었고어깨에 아직도 눈이 조금 남아 있었다나는 얼떨결에 그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남자의 손이 차가웠다길쭉하고 가지런한 손가락이 손바닥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남자에게선 시원한 향수 냄새가 났다.

지금 돌아오느라 늦었어결혼 준비하는 거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제야 존재조차 까먹고 있었던 아저씨의 아들이 떠올랐다.

이제 고등학교 들어간다고 했나내가 형이었지?”

남자가 웃으면서 내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나는 그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가 머리를 만지는 대로 가만히 내버려두었다괜히 웃음이 나왔다.

 

어머니와 아저씨는 짧은 신혼여행을 떠났다나는 공항까지 따라가서 그들을 배웅했다어머니는 새 옷을 곱게 차려입고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형 말 잘 듣고 있어야 돼?”

나는 활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옆에서 그도 손을 흔들며 웃었다아저씨는 선물을 사오겠다고 하며 어머니의 손을 잡아끌었다어머니는 계속해서 나와 카라마츠를 돌아보았다어머니와 아저씨가 자동문 너머로 사라지고나는 이제 그와 단 둘이 남았다는 걸 깨달았다슬쩍 그를 돌아보니 그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다.

배고프지뭐 좀 먹을까뭐 좋아해?”

아무거나 잘 먹어요.”

나는 예의바르게 대답했다사실 아무거나 다 먹는다는 건 거짓말이었지만 음식을 가린다는 유치한 꼴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그는 잠깐 고민을 하다 근처 패스트푸드점으로 향했다.

일곱 살 때?”

그래서 그런지 어머니는 저를 장례식에도 데려가지 않고 옆집에 맡겨놨어요다 끝나고 홀가분해져서 데리러오겠다고 약속하고.”

나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틈 사이에서 그에게 아버지가 죽었을 때 얘기를 하고 있었다그와 이렇게 길게 얘기를 해본 건 처음이었고누군가에게 아버지의 무책임한 인생에 대해 애기하는 것도 처음이었다누군가 엿듣고 있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안심한 것도 있을 것이다우리가 앉은 테이블의 양 옆만 봐도 금발에 푸른 눈을 한 외국인들이 앉아있었으니까그는 두 번째 햄버거를 남김없이 먹어치우고 너겟을 먹기 시작했다나는 반쯤 먹은 햄버거를 들고 그가 또 뭔가를 물어봐주길 기대했다그와 얘기를 하겠다고 아버지를 팔아넘기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그가 동정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봐주는 게 좋았다그리고 아버지는 그 따뜻한 미소에 비교도 못할 정도로 값싼 인물이었고.

어머니께 섭섭하진 않았고?”

그의 낮은 목소리가 내 귀로 흘러들어왔다어머니가 아버지의 장례식에 나를 데려가지 않았다고 내가 섭섭했을 것이라고 해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나는 한참동안 얘기를 한다고 마른입에 콜라를 가득 머금었다가 꿀꺽 마셨다나는 혹시 내가 너무 어리광을 부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가만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진심인 것 같았다진심으로 일곱 살도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할 수 있고어머니를 위로하고 힘이 되어주고 싶어 한다는 걸 믿는 것 같아서나는 계속해서 콜라를 마셨다입이 자꾸 말랐다그의 짙고 까맣게 맑은 눈을 계속 보고 싶으면서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아닌 사람과 단 둘이 집에 남아 있다는 건 이상한 기분이었다그는 내가 어색해하는 걸 느꼈는지 아침에 같이 아침식사를 하고는 나갔다가 이른 저녁에 돌아왔다나는 현관에서 그를 배웅하고 나면 그의 방에 몰래 들어가 구경을 했다책장에는 남성 패션잡지가 한가득 꽂혀있었고어려워보이는 대학 교재들이 그보다 더 많이 꽂혀있었다세수를 하고 바르는 스킨로션도 있었고화려하고 조그만 향수들도 가지런히 놓여있었다나는 하나씩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았다그러나 그에게서 나는 비누냄새와 같은 향수는 없었다그런 비누냄새가 나는 향수가 있으면 하나 갖고 싶었는데나는 아쉬워하며 향수 뚜껑을 닫았다고등학생은 향수를 뿌리기엔 아직 어리다.그렇지만 나중에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스무 살이 되고아마도 그가 다니는 대학에 진학한다면 향수를 뿌려도 어색하지 않겠지나는 그가 나에게서 그와 같은 비누냄새를 맡는 걸 상상했다내가 그를 설레게 할 수 있을까나는 소리 나지 않게 옷장을 조심스럽게 열어 그의 옷 사이에 파묻혀 그의 냄새를 맡았다그가 나를 보면서 설렜으면 좋겠다고소원을 빌었다그의 검은 가죽 재킷과 트렌치코트와 후드에 나를 보고 나를 궁금해해달라고 속삭였다.

 

그는 집에 오면서 꼭 간식거리를 사들고 왔다나는 그의 방에서 한참을 놀다가 그가 올 시간이 되면 방을 정리해두고 거실에 나가 티비를 켜서 보고 있었던 척을 했다.그가 현관문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면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다이상한거야나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의 존재에 흔들리는 걸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쥬시마츠형 왔다!”

그는 평생 외동으로 자랐으면서 형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하고 있었다나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그의 존재를 알아챈 것처럼 웃으며 현관으로 달려가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셨어요?”

쥬시마츠말 놓으라니까?”

그가 웃으며 고개를 젓고는 손에 들려있던 케익 상자를 내밀었다유명한 체인점의 그것이 아니라 내가 들어본 적이 없는아마도 비쌀 게 분명한 제과점의 케익이었다.

저녁 먹고 디저트로 먹자!”

그는 겉옷을 벗으며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나는 케익을 식탁위에 올려놓고 발소리가 나지 않게 조용히 그의 방 문 앞으로 걸어갔다조금 열린 틈으로 그가 보였다그는 옷장을 열어 옷걸이를 꺼내 가디건을 옷장 문고리에 걸었다그리곤 내가 의미를 읽어낼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옷장 안을 한번 훑어보고그의 방을 쭉 돌아보았다나는 미친 듯이 뛰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꾹 누르며 숨을 참았다.

그러나 내가 그 짧은 찰나에 상상했던 최악의 경우와는 달리 그는 문을 등지고 돌아서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나는 몸을 돌려 부엌으로 돌아갔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나와 앞치마를 두르고 소매를 걷었다나는 착하게 웃으면서 그가 요리를 하는 걸 거들었다그는 그가 다녔던 외국대학 얘기를 해줬고,거기서 만났던 특이한 사람들 얘기를 했다나는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지만 그는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나는 조금 마음이 놓여 계란을 휘저으며 대학을 다닌다는 건그것도 외국에 있는 대학에 간다는 건 무슨 기분일지 상상했다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내가 모국어로 무슨 말을 하더라도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쥬시마츠는 전공으로 생각해둔 거 있어?”

그가 내 손에서 계란 그릇을 빼앗아가 팬에 부으며 말했다.

글쎄요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나는 사실 대학에 갈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어머니 혼자 일을 해서 나를 먹여 살리는데 어떻게 대학까지 보내달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그는 의외라는 눈빛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중에 결정하면 늦으니까 미리 진로를 생각해보는 게 좋아.”

“...형은 무슨 과에요?”

나는 경영학과.”

그럼 나도 경영학과로 가고 싶어요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와 저녁을 먹고설거지를 하고 케익을 잘라 접시에 담았다그는 씁쓸한 커피도 두 잔 내려 쟁반에 담았다.

쥬시마츠는 우유랑 설탕 넣어줄까?”

그냥도 괜찮아요.”

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그는 웃으면서 쟁반을 들고 그의 방으로 향했다나는 당연히 거실로 가서 먹거나 아니면 식탁에서 먹을 줄 알았는데혹시 나를 혼내려는 건가나는 쟁반을 대신 들 생각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그를 따라 들어갔다.

그는 책상위에 쟁반을 내려놓고 침대에 털썩 앉았다그리곤 향수를 쭉 훑다가 하나를 집어 들어 뚜껑을 열었다역시 내가 건드린 걸 안 건가나는 애써 웃으려고 했지만 입가가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게 제일 새 거니까 선물로 줄게향도 무겁지 않고 가벼우니까 몰래몰래 뿌리고 다녀.”

그의 커다란 손이 내 손목을 붙잡고 소매를 조금 걷어 올렸다그리곤 향수를 한번 뿌리고반대쪽 손목을 들어 맞대고 문질렀다상큼한 향이 났다그가 내 손목을 잡아 코끝에 대고 향을 한번 맡고 웃었다그의 입이 시원하게 호선을 그리며 웃었고 나는 그제야 그를 따라서 웃을 수가 있었다나도 손목을 들어 향을 맡았다꽃향기같은 게 났다그에게는 너무 가벼운 향이었고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향이었다그렇지만 나는 한참동안 손목을 코끝에 대고 향을 맡았다이 향수 냄새 밑에 그의 체향이 티끌만큼이라도 남아있을 것 같았다.

그는 꼭 태어날 때부터 형 노릇을 했던 것처럼 나를 앉혀놓고 그의 소지품을 하나둘씩 꺼내서 보여주며 그 중에서 제일 좋고 제일 새것인 것을 하나씩 꺼내 품에 안겨주었다그는 좋아하는 스타일의 사진을 보면 스크랩해서 모아두고 있었다취미로는 기타를 쳤고학교를 다닐 땐 야구부에 들고 싶었지만 선발테스트에서 떨어졌다고 했다그는 외국에서 가져온 조그만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 주었고 가방도 외투도 꺼내주면서 얘기를 했다형은 이런 건가.

나는 밤 열두시가 다 되어가도록 그와 웃고 떠들고 보드게임을 하다 그가 준 물건들을 한아름 끌어안고 방으로 돌아갔다부엌에서 그가 달그락거리며 설거지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아저씨가 교수로 있는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외국에는 교환학생으로 다녀왔고대학을 마치면 그 곳의 대학원으로 진학하겠다고 했다나는 그가 다녔던 고등학교에 들어갔다학교는 시골학교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넓고 세련된 곳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입학식까지 부모가 따라올 필요는 없다고 두 사람을 뜯어말렸다어머니는 꽤 서운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이제 어머니로부터 독립을 해야 된다고 느꼈기에그리고 아저씨가 그의 아들이 입었던 교복을 입은 날 보며 그의 사랑스러운 막내아들이라고 감상 젖은 눈으로 바라보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가 오겠다고 하는 것까지 말릴 수는 없었다나는 입학식 연습을 해야 된다고 모인 강당에서 탈출해 학교 정문에 서서 그가 오는 걸 기다렸다정문에서 저 멀리 지하철역까지 길이 뻥 뚫려있었고그 길을 따라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입학식 하는 날에 이렇게 빠져버리면 담임에게 찍힐게 분명했지만 나는 그가 그 꽃길을 걸어 나에게 오는 걸 보고 싶었다입학식을 하는 날이라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나는 이리저리 치이면서도 고개를 쭉 내밀고 그를 찾았다입학식이 시작할 시간이 다 되어가고사람들이 점점 줄어들었지만 그는 올 기미가 없어보였다나는 어제 어머니가 빳빳하게 다려준 교복 상의의 끝을 잡고 손을 꿈지럭거렸다안에 들어가 있으면 그가 나를 찾으러 올까하지만 나는 그에게 몇 반인지 가르쳐주질 않았고핸드폰으로 전화를 한다고 해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 틈에서 나를 찾는 건 쉽지가 않을 것이다그래도 만나기만 하면 되지 않을까그리고 나중에라도 그에게 다시 학교로 와달라고 하면 이 길을 걸어올 테니까.

단념하고 돌아서려는 찰나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저만치 멀리서 들려오는 발소리였지만 나는 귀신같이 알아듣고 고개를 들었다.

쥬시마츠!”

그가 달려오고 있었다품에는 커다란 프리지아 꽃다발을 안고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꽃잎이 날리는 그 길에 그가 있었다나는 정문을 꽉 붙잡고 그가 나에게 다가오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길쭉하게 큰 키와 긴 다리가 먼저 눈에 들어왔고아슬아슬하게 재킷에 매달린 선글라스가한 손으로 단단히 붙잡은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이 시간까지 기다린 날 보며 그가 놀랍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그의 짙은 눈썹이 보였고날카로운 코가 보였고 웃는 입이그리고 맑고 깊은 눈이 보였다아니보였다고 할 수 없다나는 그가 던지듯 품에 안겨준 프리지아의 향기를 맡으면서 그의 눈이 내 마음 어딘가에 깊이 새겨졌다고 생각했다죽을 때까지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거라고.

 

쥬시마츠는 샛노란 트럭을 타고 나타났다. 어두컴컴한 거리에 옅은 가로등 불빛을 받아 트럭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바퀴 주변이나 트럭 뒤쪽에 흙먼지가 좀 묻어있긴 했지만 꽤 현실감이 없는 광경이었다. 쥬시마츠는 도로 한가운데에 트럭을 세우고 카라마츠에게 달려와 카라마츠를 번쩍 들어 카라마츠가 뭐라고 말리기도 전에 조수석에 태우고 안전벨트를 채워주었다.

왠지 닥터는 차 같은 거 타지 않고 날아다니실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한겨울 바깥에 있었던 탓인지 트럭 안이 얼어붙을 것처럼 차가웠다. 카라마츠는 몸을 바짝 웅크리고 덜덜 떨었다. 쥬시마츠는 버튼을 이것저것 눌러가며 히터를 틀고 환기를 시켰다.

저기, 카라마츠 씨에겐 말을 못했지만.”

쥬시마츠가 차 핸들을 붙잡고 머뭇거렸다. 카라마츠는 조금이라도 덜 차가운 부분을 찾아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다 고개를 돌렸다.

카라마츠 씨도 잘 모르고 저를 찾아오신 것 같더라고요.”

?”

쥬시마츠는 뭐라고 말할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핸들에 붙어 있는 해바라기를 꾹 눌렀다. 꼭 소리 나는 인형처럼 해바라기가 납작하게 눌렸다가 원래 모양으로 돌아오면서 뾰로롱 하고 새소리를 흘렸다.

벌써 세시 이십분이네요.”

쥬시마츠가 핸들을 단단히 붙잡고 엑셀을 밟았다. 차 엔진소리가 낮게 깔렸다. 어두운 트럭 안으로 가로등 불빛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차 속도가 점점 빨라져 카라마츠는 자기도 모르게 차 문 위쪽에 붙은 손잡이를 잡았다. 쥬시마츠는 카라마츠를 한번 돌아보고 내비게이션을 켰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건가요?”

여기서 동쪽으로 한 두어 시간 달리면 동생이 돌보는 작업장이 나와요. 햇살 농축액은 해가 하늘에 떠 있을 때면 언제든지 짜낼 수 있지만, , 잠시 만요.”

쥬시마츠가 말을 멈추고 다시 해바라기를 두 번 꾹꾹 눌렀다. 그러자 이번엔 야옹, 하고 고양이 울음소리가 났다.

다행이다. 오늘은 날이 맑다네요! 카라마츠 씨, 이제 병의 원인을 알았고 또 증상도 심각하니까 이제 한 번에 해치워버립시다!”

해치워요?”

사실 카라마츠 씨가 지금까지 맞아 왔던 농축액은 100퍼센트 농축액을 시냇물 소리로 희석시킨거에요. 맞을 때 뜨겁지 않았어요?”

그러긴 했는데 심하진 않았어요.”

쥬시마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햇살 원액은 그것보다 훨씬 뜨겁고,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하는거에요. 자칫하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방법은 그것뿐이에요. 저는 카라마츠 씨가 물건을 잃어버린 사람의 저주로 그렇게 얼어붙는 줄만 알았는데, 카라마츠 씨가 직접 빈 소원이라 풀 수 있는 방법이 얼마 없어요…….”

쥬시마츠가 말문을 흐렸다. 그렇구나……. 카라마츠는 도로 옆으로 휙휙 지나가는 소나무와 잣나무 숲을 멍하니 보았다. 카라마츠가 멍청한 짓을 한 걸까?

그렇지만 카라마츠 씨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런 소원이 실제로 이뤄지려면, 온 마음을 다해서 진심으로 바래야만 실현되는거에요. 카라마츠 씨는 착하고, 상냥하고, 다정하니까.”

닥터는 이제 마음도 읽을 수 있는 건가. 카라마츠가 고개를 돌리자 쥬시마츠는 핸들을 양손으로 꽉 붙잡고 정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온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닥터도 상냥해요.”

카라마츠가 씨익 웃었다. 쥬시마츠는 눈도 돌리지 않았으면서 카라마츠가 웃는 걸 봤는지 따라서 환하게 웃었다.

사실 말은 못했지만, 카라마츠 씨는 제 첫 손님이에요.”

병원이요?”

제가 치료사가 되고 처음으로 받은 손님이요!”

치료사요? 의사가 아니라요?”

, 둘 다 닥터지만 조금 달라요.”

쥬시마츠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시험에 통과하고 병원을 차리려고 했는데 사기를 당해서 그런 외진 건물 옥상에 병원을 짓게 되어버렸어요.”

경찰에 신고는 하셨어요?”

하긴 했는데, 벌써 바다 밑으로 들어가 버려서 잡을 수가 없더라고요.”

쥬시마츠가 한숨을 푹 쉬었다. 차는 어느새 낯선 들판 위를 달리고 있었다. 작고 낡은 집들이 한 채씩 드문드문 떨어져 있었고, 알록달록하게 빛나는 운하가 그들 곁에서 도로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

손님은 오지도 않고, 혼자 있으려니까 심심한데 나가서 놀았다가 그 새에 손님이 오면 어쩌나 싶어서 혼자 병원에서 야구만 하고 있었는데, 카라마츠 씨가 온 거에요.”

그 안에서 야구가 돼요? 유리병은요?”

쥬시마츠가 활짝 웃으며 카라마츠를 한번 돌아보았다.

카라마츠 씨가 첫 손님이라서 기뻤어요. 사실 치료사로서 모든 손님을 공평하게 소중하게 대해야 된다고 배웠지만, 나쁜 사람이 아니라 카라마츠 씨라서 더 열심히, 행복하게 치료를 할 수가 있었고요.”

쥬시마츠는 카라마츠의 대답도 듣지 않고 음악을 틀었다. 차 안에 은은한 노랫소리가 흘렀다. 가사는 없었고, 여자가 하프 소리에 맞춰 허밍을 하고 있었다.

조금만 자요.”

카라마츠는 눈을 감고 조수석 구석으로 파고들었다. 여자의 목소리가 좋다고 생각하다가 카라마츠는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카라마츠 씨, 도착 했어요!”

쥬시마츠가 카라마츠의 안전벨트를 풀고 조심스럽게 카라마츠를 흔들어 깨웠다. 어느 새 차는 멈춰있었고, 하늘이 연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쥬시마츠는 카라마츠의 양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카라마츠를 번쩍 들어 품에 안았다.

무거울 텐데 내려주세요. 걸어가겠습니다.”

카라마츠가 잠긴 목소리로 웅얼거렸지만 쥬시마츠는 아랑곳하지 않고 카라마츠를 안고 저벅저벅 걸어갔다.

저어기, 저 커다란 쟁반같은 거 보여요?”

카라마츠가 뻣뻣해진 고개를 조금 돌리자 은빛 바탕에 수박 무늬 같은 게 그려진 거대한 쟁반이 들판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게 보였다. 쥬시마츠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저 밑에서 첫 햇살을 짜낼거에요. 그리고 그걸 카라마츠 씨의 심장 위로 떨어뜨리는 거죠.”

그럼 이제 낫는 건가요?”

그럴거에요. 아쉽지만......”

왜 아쉬워요?”

쥬시마츠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카라마츠 씨가 다 나아버리면 이제 병원에도 오지 않을 거고, 그럼 또 저 혼자 남아야 하는 거니까요...... 아 물론, 카라마츠 씨가 더 이상 아프지 않는 건 좋아요!”

쥬시마츠가 말을 황급히 덧붙였다.

놀러갈게요.”

카라마츠가 쥬시마츠 쪽으로 몸을 조금 돌려 안기면서 말했다.

병원 문에 부재중 팻말 걸어놓고 나가서 야구도 하고, 우리 놀이공원에도 놀러오세요.”

그래도 돼요?”

그럼요. 직원할인 받아서 표도 싸게 살 수 있어요.”

쥬시마츠가 킥킥거리며 웃곤 카라마츠를 들어 어깨에 짊어졌다.

닥터?”

금방 도착할거에요!”

쥬시마츠는 카라마츠의 허리를 단단히 잡고 거의 나는 것처럼 달려가기 시작했다. 카라마츠는 쥬시마츠의 옷을 꽉 붙잡고 쥬시마츠의 트럭이 거의 샛노란 점처럼 멀어지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쥬시마츠랑 야구를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쥬시마츠가 공 던지는 걸 받으면 카라마츠의 손이 날아갈지도 모른다고, 카라마츠는 괜한 말을 했다 싶어 후회했다.

어느새 그 은쟁반 앞에 도착했다. 쥬시마츠는 멀미를 하느라 휘청거리는 카라마츠를 바닥에 앉혀놓고, 은쟁반 밑에 아주 조그만 입구로 다가가 입구 옆에 놓인 화분 밑을 뒤적거렸다. 화분 밑을 뒤졌다가, 창틀 구석구석으로 손으로 쓸어보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카라마츠가 앉아있는 쪽으로 다가와 거의 카라마츠만 한 바위를 번쩍 들어 그 밑에서 조그만 열쇠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열쇠로 문을 열었다.

가시죠!”

쥬시마츠가 자기 옷에 손을 슥슥 닦고 카라마츠에게 손을 내밀었다. 카라마츠는 그 손을 잡고, 어두컴컴한 실내로 들어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쥬시마츠는 길을 알고 있는 것 같아서, 카라마츠는 쥬시마츠에게 바짝 달라붙어 걸었다. 저 멀리에서 천장에 구멍이 뚫린 건지 빛이 내려오는 곳이 있었다.

멀어서 힘들지는 않아요?”

아뇨, 아까부터 계속 안아주셔서 괜찮아요.”

쥬시마츠가 카라마츠의 손을 꽉 붙잡았다.

“100퍼센트 원액을 담을 수 있는 병은 없어요. 그래서 아마 카라마츠 씨가 저 밑에 누워서 심장에 바로 햇살 원액을 맞아야 할 거에요. 제가 정말 조심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역시 쥬시마츠가 말하는 햇살 농축액이라는 건 선샤인이 맞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여태까지 받아온 쥬시마츠가 놔준 햇살 농축액이나 오일같은 건 다 효과가 있었으니까. 첫 환자라고 해도 쥬시마츠는 꽤 능력이 있었다.

걱정 안 해요.”

 

쥬시마츠는 구석에서 간이침대를 끌고 와 카라마츠를 눕혔다. 카라마츠는 윗옷을 벗어 얌전히 밑에 내려놓고 자리에 누웠다. 공기가 차가워 팔에 소름이 돋았다. 쥬시마츠는 꼭 치과에서 볼법한 작업대에 앉아 버튼을 이것저것 눌렀고, 그러자 위이이잉 하는 소리가 나더니 천장에 나 있던 구멍이 정말 바늘만 하게 줄어들었다. 쥬시마츠는 카라마츠가 누운 침대를 이리 저리 움직여 그 구멍이 정확히 카라마츠의 심장 위에 닿도록 맞췄다.

이제 움직이면 안돼요!”

쥬시마츠가 한껏 긴장된 표정을 짓고 있어서 카라마츠는 덩달아 겁이 났다.

혹시 치료를 받다가 죽을 수도 있나요?”

가능성이 없지는 않아요……. 원액을 맞고 또 한참을 요양해야 하구요.”

카라마츠는 바지 주머니를 뒤적여 지갑을 꺼냈다.

정말 만에 하나 제가 죽으면 부탁드릴게요. 나중에 치료비는 이 카드로 결제하면 되고요, 여기 신분증에 적힌 주소가 제 집입니다. 그리고 이건 오소마츠 형 전화번호니까 여기로 전화해서 제가 죽었다고 얘기해주세요.”

쥬시마츠가 지갑을 받아들고 두 손으로 꼭 쥐었다가 작업대 위에 올려놓고, 카라마츠의 손을 잡았다.

카라마츠 씨.”

?”

제가 카라마츠 씨를 좋아한다고 하면 어떨 거 같아요?”

카라마츠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면서 한참 고민했다. 쥬시마츠도 좋지만, 글쎄, 이렇게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인가? 두 사람은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또 만약 이게 고백이라면, 그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카라마츠가 신중하게 생각을 해보는 게 예의일 것이었다.

나중에 대답해도 될까요?”

쥬시마츠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쥬시마츠가 천장에 달린 길쭉한 레버를 당기자 천장이 쿵쿵 하고 울리기 시작했다.

이제 쟁반으로 햇빛을 모을 거에요. 쟁반이 꼭 우산을 접는 것처럼 점점 오므라들 거고, 그럼 안에서 햇살이 부글부글 끓으면서 툭툭 튀어오를거에요. 그걸 쟁반이 꾹꾹 눌러서 짜내면, 그게 햇살 농축액이 됩니다.”

천장에서 뭔가 톡톡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카라마츠는 배 위에 두 손을 곱게 모으고 천장에 뚫린 구멍을 올려다봤다. 쥬시마츠가 아차, 하더니 작업대 밑에서 웃기게 생긴 선글라스를 두 개 꺼내 하나를 카라마츠에게 씌워주고 남은 하나는 자기가 썼다.

꼭 쓰고 있어야 돼요! 안 그러면 눈이 타버려요!”

쥬시마츠는 초조하게 작업대 앞에 앉아 손을 꼼지락 거리다가 천장에 달린 레버를 조금씩 조금씩 더 뒤로 당기기 시작했다. 천장에서 꼭 콩이나 탁구공이 떨어지는 것처럼 톡톡거리던 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하면서, 꼭 팝콘을 튀기는 것처럼 펑펑 하고 터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천장에 난 틈 사이로 모래알 같은 게 스르륵 떨어졌다. 쥬시마츠가 카라마츠를 업고 옥상에서 떨어졌던 게 떠올랐다. 카라마츠는 화들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쥬시마츠를 소리쳐 불렀다.

닥터!”

?”

, 제가 당장 대답할 수는 없지만,”

뭐를요?”

제가 여기서 살아서 나간다면 데이트부터 시작해도 될까요?”

쥬시마츠가 레버를 놓고 카라마츠에게 다가와 카라마츠의 손을 꼭 잡았다.

데이트면, 같이 카라마츠 씨가 일하는 놀이공원으로 가는거에요?”

가서 동물원 구경도 하고, 솜사탕도 먹고, 놀이기구도 타는 건데, 닥터가 재밌어 할지는 모르겠어요.”

아뇨, 재밌을거에요.”

쥬시마츠가 활짝 웃으면서 카라마츠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리곤 잽싸게 손을 놓고 달려가 레버를 잡아당겼다. 천장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가 점점 더 커져 카라마츠는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햇살이라는 건 쉽게 짜낼 수 있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카라마츠는 눈을 꼭 감고 샛노란 옥수수 알갱이 같은 햇살이 점점 커지면서 우산처럼 오므라든 쟁반 안을 이리저리 튀어다는 것을 상상했다. 쥬시마츠가 낑낑거리면서 레버를 당기는 소리가 들렸다. 쥬시마츠는 제법 힘이 센 것 같은데 저렇게 힘들어할 정도라니. 카라마츠는 조금 겁이 났다. 펑펑 터지는 소리는 조금씩 줄어들고, 이젠 철썩 철썩 하고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햇살이 녹아 흐르고 있는 건가? 쥬시마츠가 놔주던 햇살 농축액은 황금빛이 정말 예뻤는데, 원액도 직접 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 카라마츠는 못내 아쉬웠다. 그때 쥬시마츠가 소리를 질렀다.

카라마츠 씨!”

?”

이제 진짜 꼼짝하면 안돼요!”

원액을 떨어뜨리려고 하는 것 같았다. 카라마츠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배 위에 올린 손이 하얗게 되도록 꼭 잡았다. 그 때 바늘로 가슴을 콕 찌른 것처럼 따가움이 느껴졌다. 카라마츠는 놀라 눈을 번쩍 떴고, 눈앞에 꼭 유리로 만든 기다란 바늘 같은 게 카라마츠의 가슴 위로 떨어지는 것을 멍하니 봤다. 빛이 카라마츠의 심장 안으로 파고들고 있는 걸까? 카라마츠의 심장이 꼭 불에 타들어가는 것처럼 아파왔다. 카라마츠는 신음 소리를 참으려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참으면 돼요!”

쥬시마츠가 멀리서 소리쳤다. 카라마츠의 심장에서부터 발끝까지 뜨거운 빛이 흘러가고 있었다. 뜨겁고, 아프고, 따끔거리면서 카라마츠는 꼭 전신이 활활 타는 것만 같았다. 기절이라도 하면 좋을 텐데, 온 몸의 신경이 바짝 일어서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조금만!”

다른 생각을 하자. 다른 생각을. 카라마츠는 뇌까지 녹아서 찰박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무시하고 금붕어와 팬더, 기린 얘기를 하던 아이를 떠올렸다. 여기서 살아서 나간다면 아이를 찾아봐야겠다. 아이가 부모를 찾았을까. 부모는 아이를 찾으려고 했을까. 쥬시마츠가 놀이기구를 타면 재밌어 할까? 순간 펑, 하고 카라마츠의 심장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터졌다고 생각했다. 카라마츠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땐 이미 집이었다. 카라마츠는 멍하니 이불을 덮고 천장을 보다가 심장에 손을 올렸다. 더 이상 춥거나 떨리거나 하는 증상은 없었다. 심장도 멀쩡하게 잘 뛰고 있었고,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온몸이 개운했다. 꼭 햇살 농축액을 막 맞았을 때처럼. TV를 켜보니 월요일 아침이었다. 주말 내내 잠들어있던 걸까? 카라마츠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침대에서 카라마츠의 지갑이 툭 떨어졌다. 아마 쥬시마츠가 여기까지 카라마츠를 데려다 준 모양이었다. 카라마츠는 지갑을 주워들어 이러 저리 내용물을 살펴보고, 또 침대 주변이나 탁자 위 같이 눈에 뜨이는 곳을 전부 훑어보았지만 쥬시마츠가 남겼을법한 쪽지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아니, 하나 낯선 물건이 있었다. 카라마츠는 식탁 위에 놓여있는 해바라기를 들어 그 가운데를 꾹 눌렀다. 그러자 뾰롱, 하고 새 소리가 들렸다.

 

? 카라마츠, 병원은 길 동쪽이 아니라 서쪽이라고! 대체 겁도 없이 어떻게 그런 데를 간 거야?”

오소마츠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카라마츠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렇지만 다 나았는걸?”

햇살 농축액을 맞아서? 아니 그게 마약이라던가 아니면 불법 시술일수도 있는 거 아냐? 뭘 믿고 몸을 맡긴 거야? 병원이 수상하다 싶으면 다른 병원을 찾아가봐야지!”

카라마츠는 머쓱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카라마츠는 그닥 큰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오소마츠의 귀에는 영 터무니없는 얘기로 들리는 것 같았다. 오소마츠가 혹시 사기를 당한 게 아니냐며 카드 내역을 살펴보라고 했지만 쥬시마츠의 병원에서 긁은 기록은 남아있지 않았다.

돈이 안 나갔으면 뭐 다행이긴 한데……. 혹시 카라마츠 신장같은 거 뺏긴 거 아냐?”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러면 흉터가 남아있겠지?”

사실 흉터가 남긴 남았다. 카라마츠가 아침에 샤워를 하려고 옷을 벗자 아마 그 바늘이 닿았을 법한 자리에 황금색으로 작은 나무 가지 모양의 흉터가 남아있었다. 카라마츠는 흉터를 손으로 살살 문질러 보았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쥬시마츠에게 물어보면 설명해주지 않을까? 하지만 오소마츠는 극구 말렸다. 운 좋게도 그런 시술을 받고 몸이 나았다고 하더라도, 다시 찾아갈만한 곳은 아니며 의심도 좀 해보고 살아야 한다고. 카라마츠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쥬시마츠에게 데이트부터 시작하는 게 어떠냐고 했었는데, 그리고 쥬시마츠는 나쁜 사람같이 보이지도 않았고.

실례합니다!”

누군가 분실물센터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섰다. 손님인가? 카라마츠는 그날 발견된 분실물을 적어두는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카라마츠의 책상 위에 정말 거대한, 꼭 꽃집에서 파는 모든 꽃들을 있는 힘껏 묶어 놓은 것 같은 알록달록한 꽃다발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달고 새콤한 꽃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카라마츠 씨랑 동물원 구경하러 왔는데, 잠깐 괜찮을까요!”

오소마츠는 옆에서 꽃다발을 보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카라마츠의 어깨를 잡았다.

누구야?”

카라마츠는 웃음이 나오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의사 선생님!”

사실 별 중요한 얘기가 아닐지도 모르고, 이게 제 병이랑 연관된 게 맞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

쥬시마츠의 손이 날개뼈 밑을 꾹꾹 눌러왔다. 숨이 턱턱 막히면서도 시원했다.

주말이었어요. 날씨도 선선하고 공기도 맑은 날이라 손님들이 정말 많이 왔었습니다. 그만큼 물건을 잃어버린 사람도 많고, 찾겠다고 모여드는 사람들도 많아서 하루 종일 정신이 없었죠. 밥 먹으러 나갈 겨를도 없어서 오소마츠 형이랑 간신히 도시락을 사다가 먹었으니까.”

쥬시마츠는 아무 대답도 없이 카라마츠의 등에 기름을 바르는데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얘기를 해도 되는 걸까? 카라마츠는 가만히 장작 타는 소리를 들었다. 누군가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저희 사무실 옆엔 미아보호소가 있어요. 놀이공원이 워낙 넓어서 그런지 미아들이 제법 많이 옵니다. 그날도 엄마 손을 놓쳤다고 우는 애들이 한 여덟 명은 됐던 것 같은데, 그 중에서 한 아이가 좀 이상했어요. 다른 애들은 펑펑 울거나 아니면 잔뜩 겁먹어서 직원들한테 안겨있는데, 그 아이는 놀라지도 않고 그냥 다른 애들이 우는 걸 이상하단 눈으로 쳐다보고만 있는 거에요. 이상하지 않아요? 그 애가 한 대여섯 살쯤 되어 보였는데, 그땐 엄마랑 떨어지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느낄 나이잖아요. 그런데 그 아이는 직원이 이름과 집 주소, 전화번호, 부모님 성함 같은 걸 물어봐도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대답도 하질 않는 겁니다. 아이가 발달이 느린 아이였거나 그러진 않았어요. 다른 건 물어봐도 대답을 잘 했거든요. 제가 과자랑 음료수를 나눠주니까 고맙다고 인사도 꾸벅 하고, 혹시 놀라서 그런 건가 싶어 아이를 안고 여기 저기 주변을 걸어 다니면서 말을 거니까 자기는 기린이 좋고, 병아리는 귀엽고, 팬더는 조금 무섭다 하는 얘기를 조잘조잘 잘도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신상에 관한 얘기는 은근히 돌려서 물어보기만 하면 금세 알아차려서, 아무 말도 없이 풀죽은 표정만 짓고 있었어요.”

쥬시마츠가 카라마츠의 등에서 손을 떼고 오일병 뚜껑을 닫았다. 그리곤 카라마츠가 옆에 벗어두었던 윗옷을 조심스럽게 입혀주고 카라마츠의 어깨에 이불을 덮어주었다.

오일은 바를 만큼 발랐으니까, 이불 덮고 있어요.”

수고하셨어요.”

쥬시마츠는 활짝 웃고 자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카라마츠에게 물었다.

그 아이가 부모를 찾았나요?”

아니요. 아이는 정말 한마디도 하질 않아서 그날 하루 종일 다른 애들이 부모님 손을 잡고 떠나는 걸 멀뚱히 보기만 하다가 결국 경찰서로 갔어요. 그 뒤에 일은 알 수 없었어요. 아마 미아보호소 쪽에서 CCTV 화면 같은걸 확인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일하는 쪽이 아니니까.”

카라마츠 씨가 속상했겠네요.”

쥬시마츠의 목소리가 따뜻했다. 카라마츠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다음 말을 꺼내기 위해 숨을 골랐다.

그날 저녁에 마감을 하고 집에 돌아가는데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아이 생각이 났어요. 병아리는 조류고, 팬더는 포유류고, 금붕어는 어류라고 얘기할 만큼 똑똑한 아이가 왜 자기 이름도, 전화번호도, 집주소도 얘길 하지 않았는지. 그런데 그날 밤 혼자 저녁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아이 마음이 이해가 되는 거에요. 아이가 어쩌면 부모님을 찾고 싶지가 않았다던가, 아니면,”

아니면?”

부모님에게 버려질 거라고 미리 예상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사실 아이가 부모님에게 반항해서 손을 놓고 도망쳤다고 하면 부모님은 당연히 놀이공원 직원들이 아이를 미아보호소로 데려올 거라는 걸 아니까, 그 쪽으로 아이를 데리러 왔겠죠? 하지만 그 아이를 데리러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엄마도, 아빠도, 할머니 할아버지도. 그냥 동네 공원도 아니고 주거지역에서 한참 떨어져있는 놀이공원인데, 아이가 거기까지 혼자 왔을 리는 없잖아요.”

부모가 아이를 버리러 온 거네요.”

카라마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쥬시마츠는 의자를 침대가로 조금 더 가까이 붙여 앉았다.

그렇게 생각을 하니까 아이의 행동들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어요. 다른 사람이 자기 부모를 찾아낼 수 있을 법한 정보는 하나도 가르쳐주지 않고, 담담하게 버려짐을 받아들인 거에요. 속상했어요. 그렇게 조그맣고 귀엽고 똑똑한 아이가 왜 버려져야 하는지, 그리고 아이는 왜 거기에 분노하거나 부모를 원망하지도 않고 얌전히 버려지는지. 이건 좀 많이 나간 것 같지만, 부모가 아이에게 계속 암시를 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넌 필요 없는 아이고, 널 어딘가에 버리고 올 거라고 하면서.”

가슴이 차가워지는 게 느껴졌다. 쥬시마츠도 눈치를 챘는지 소매를 걷어 올리고 조심스럽게 카라마츠의 심장 부근을 만졌다.

많이 슬펐나봐요. 카라마츠 씨의 심장이 다시 얼어붙고 있어요.”

슬펐어요. 속상한 건가. 사실 그 아이가 제 자식도 조카도 아닌데, 그냥 그날 하루 미아보호소 쪽에 사람이 부족해서 아이를 돌봤을 뿐인데 그냥 그 어린 아이가 버려진다는 게 속상해서 마음이 안 좋았어요. 차라리 아이가 펑펑 울면서 부모를 찾았다면 더 나았을지도 몰라요.”

버려질 준비가 되어있는 아이라니까 더 속상해져서……. 카라마츠가 말을 흐렸다. 쥬시마츠는 침대 가에 바싹 붙어 카라마츠의 한쪽 뺨을 감싸고 카라마츠의 눈을 들여다봤다. 쥬시마츠의 눈이 맑고 깨끗해서, 카라마츠는 그 눈동자에 자기가 비춰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카라마츠 씨가 소원을 빌었군요.”

소원이요?”

소원이라는 게 늘 대단한 건 아니에요. 카라마츠 씨가 진심으로 뭔가를 바라게 되면, 그게 소원이죠.”

…….”

무슨 소원이었어요?”

저는 어른이니까, 아이가 받았을 상처를 제가 받았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쥬시마츠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카라마츠는 그냥 눈을 비비는 척만 하려고 눈가에 손을 가져다 댔는데, 마른 눈에서 아주 조그만, 모래알 같은 알갱이가 툭 떨어졌다. ? 카라마츠가 놀라 눈을 비비자 양쪽 눈에서 차가운 알갱이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선생님……, 이게 뭐죠?”

쥬시마츠가 한쪽 손을 카라마츠의 눈 밑에 가져다 댔다. 조금 따끔거렸다. 쥬시마츠는 몇 분 동안 가만히 손을 대고 있다가 손안에 든 것을 카라마츠에게 보여주었다. 투명한 얼음 알갱이가 한 스푼정도 담겨있었다.

카라마츠 씨의 눈물이에요. 안되겠다. 지금 일단 작업장까지 가고, 첫 햇살을 받아야겠어요.”

쥬시마츠의 손 안에 든 것은 체온에 순식간에 녹아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카라마츠는 멍하니 녹색 카펫에 얼룩이 생기는 것을 물끄러미 보았다. 눈에서 저런 게 나오다니. 진짜 죽는 건가? 쥬시마츠는 병원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커다란 가방 안에 물건을 마구 쑤셔 넣었다. 카라마츠는 눈물 얼룩이 증발해 점점 옅어지는 것을 보다가 침대에서 일어나 이불을 정리하고, 야구배트와 글러브 위에 겹겹이 쌓여있는 겉옷을 하나씩 주워 입었다. 카라마츠가 아이의 상처까지 떠안길 바랐기 때문에 카라마츠가 이렇게 얼어붙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아이가 받았을 상처는 얼마나 심했던 걸까. 그 작은 아이가 이렇게 춥고, 아프고, 외로웠을 거라고 생각하면 카라마츠는 다시 마음이 욱신거렸다. 후회가 되진 않았다. 카라마츠가 패딩까지 껴입자 뒤에서 쥬시마츠가 아주 길고 두꺼운 목도리를 카라마츠의 목에 칭칭 둘러 감았다.

카라마츠 씨는 정말 상냥한 사람 같아요.”

쥬시마츠가 목도리를 꼼꼼하게 매듭지으면서 말했다.

아뇨, 그렇지는 않아요. 그런데 이 목도리는 뭐로 만든 건가요?”

이거요? 산건데요?”

쥬시마츠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카라마츠가 정말 한참을 잤는지 눈이 소복하게 쌓인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고, 눈보라는 어느새 멈춰있었다. 찬 공기를 들이마시니 폐가 찌릿찌릿 아파서 카라마츠는 목도리를 끌어올려 코와 입을 막았다. 쥬시마츠는 커다란 배낭을 앞으로 돌려 매더니 카라마츠에게 등을 내밀었다.

업히세요!”

아까 올라올 때도 업고 올라오셨는데, 이번엔 제가 내려갈게요.”

쥬시마츠는 고개를 저으며 카라마츠의 양 팔을 잡아 자기 목에 두르고, 카라마츠를 억지로 업히게 해서 그의 양 허벅지를 단단히 잡았다.

눈 감아요.”

?”

좀 놀랄까봐.”

카라마츠가 눈을 감자, 쥬시마츠가 순식간에 옥상을 박차고 달려 나가 그대로 뛰어내렸다. 휘이이이잉 하고 귓가로 거센 바람이 스쳤다. 카라마츠가 쥬시마츠의 목을 있는 힘껏 끌어안고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쥬시마츠가 사뿐히 땅 위에 착지해 카라마츠를 내려주었다. 쿵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꼭 깃털이 내려앉듯 가뿐했다.

지금 저기서 뛰어내린거에요?!!”

카라마츠는 비틀거리며 건물 벽을 붙잡고 미친 듯이 요동치는 가슴을 꽉 부여잡았다. 만약 카라마츠의 심장이 얼어붙었다 해도 지금 이렇게 뛰는 걸 보면 다시 살아난 게 분명했다.

눈 감고 있으면 모를 줄 알았는데…….”

쥬시마츠가 머쓱해하며 카라마츠의 어깨를 몇 번 토닥였다.

차 가지고 올게요. 저기 큰 길로 나가있어요.”

쥬시마츠가 의사 가운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 의사 용하지 않아?”

오소마츠가 카라마츠에게 커피를 건네주면서 물었다. 카라마츠는 커피를 받으면서 고개를 한번 꾸벅 하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심장까지 얼어붙는다는 게 진짜인건지 손가락이 꽁꽁 얼어붙어 뜨거운 커피 잔에 닿은 부분이 따끔거렸다. 커피가 목구멍을 타고 흘러가는 게 느껴졌고, 카라마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용하긴 용한데, 병이 나을 생각을 안해.”

그래? 주사같은 거 놔주지 않든?”

며칠째 맞고 있는데 저녁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언제 맞았냐는 것처럼 원래대로 돌아가 버려. 게다가 갈수록 좀 심해지는 것 같고.”

카라마츠가 한숨을 푹 쉬었다. 사무실엔 카라마츠와 오소마츠 둘밖에 없었고 워낙 사람들이 자주 오지 않는 곳이라 오소마츠가 카라마츠를 위해 난방을 최대한으로 올려주었다. 오소마츠는 더워 긴팔 후드 한 겹만 입고 있는데 카라마츠는 내의에 양모 스웨터, 가디건, 얇은 잠바, 그리고 오리털 패딩까지 껴입고 있어도 추워 입김이 나왔다. 오소마츠가 손을 주물러 주고 꽁꽁 얼어 꼭 떨어져나갈 것 같은 귀를 잡고 녹여주려고 해도 영 녹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안되겠다. 점심시간 아직 안됐어도 얼른 가서 주사 맞고 와.”

오소마츠가 카라마츠를 질질 끌고 사무실 밖으로 내던졌다.

의사 말만 들으면 돼!”

며칠 전에 햇살 농축액이 얼마 안 남았다는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으려나. 지금이라도 큰 병원에 가봐야 하는 건 아닐까? 카라마츠는 무거운 몸을 질질 끌고 쥬시마츠의 병원으로 향했다. 아침부터 꼭 밀가루처럼 날리던 눈이 어느새 눈보라가 되어 카라마츠의 온 몸을 훑고 지나갔다. 계단은 오를 수 있으려나. 귓가에 윙윙거리는 바람소리 때문에 한참 머리가 울렸다. 카라마츠는 시야를 가리는 눈보라를 한쪽 팔로 막으면서 건물 뒤로 들어섰다.

카라마츠 씨!”

밝은 목소리가 카라마츠를 불렀다. 닥터 쥬시마츠가 이 추운 날씨에 긴팔 후드 한 장만 입고선 계단 앞에 서있었다.

닥터 쥬시마츠? 여기서 뭐하세요? 오늘은 병원 문 닫는 날인가요?”

쥬시마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쥬시마츠는 실내화를 신은 발로 소복이 쌓인 눈 위를 척척 걸어와 카라마츠를 와락 끌어안았다.

잠깐만요,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마중 나왔어요.”

점심시간이 되려면 한참 남았는데, 벌써부터? 카라마츠는 조금 놀랐지만 쥬시마츠에게서 느껴지는 온기가 좋아 가만히 안겨 숨을 골랐다. 사실 그 차갑고 얼어붙은 계단을 올라가기가 막막했었는데 닥터 쥬시마츠가 마중을 나왔다니. 쥬시마츠는 카라마츠를 한참 끌어안고 있다가 대뜸 카라마츠를 번쩍 들어 업었다.

닥터!”

금방 도착할거니까 꽉 붙잡아요!”

그리곤 닥터 쥬시마츠가 순식간에 눈 위를 달려 계단에 매달렸다. 아니, 카라마츠 같은 건장한 성인 남자를 업고 저 계단을 오른다고? 올라가다가 떨어지면 어떡하지? 카라마츠는 있는 힘껏 쥬시마츠의 목을 붙잡고 매달렸다. 쥬시마츠의 목을 조르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쥬시마츠는 아랑곳하지 않고 꼭 날아가는 것처럼 계단을 올랐다.

다 왔습니다! 조금만 참아요!”

쥬시마츠가 카라마츠를 업은 그대로 달려가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갔다. 병원 안은 여느 때처럼 훈훈하고 따뜻한데다 저 멀리에 못 보던 벽난로까지 생겨 얼어붙은 몸이 조금 녹는 것 같았다. ……. 카라마츠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쥬시마츠는 카라마츠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어딘가에서 간이침대를 질질 끌고 나왔다.

지금 상태가 많이 심각하니까, 일단 주사부터 맞고 마사지를 해야겠어요! 햇살 농축액이 남은 게 한 병뿐인데 이대로 내버려두면 카라마츠 씨가 얼어버릴 거에요!”

마사지요? 카라마츠가 책상에 엎드려 뭐라고 대답을 하려고 했지만 얼었던 몸이 녹자 수마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카라마츠는 연신 하품을 하다 결국 책상 가장자리를 붙잡고 무거운 눈꺼풀을 살며시 감았다. 쥬시마츠가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뭔가를 떨어뜨리고 깨뜨리고 하는 소리가 조금씩 멀어졌다. 손목에 따끔, 하고 쥬시마츠가 주사를 놓는 느낌이 들었고, 늘 그랬던 것처럼 주사를 맞은 곳에서부터 은은하게 따뜻한 기운이 퍼져나갔다. 쥬시마츠의 단단하고 따뜻한 손이 카라마츠의 이마에 닿았다가, 양 뺨을 감싸 안았다. 이런데서 이렇게 잠들어버리면 예의가 아닌데, 카라마츠는 잠에서 깨야지, 깨야지 하다가 결국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얼마나 잤을까? 꼭 영화에 나올법한 그림 같은 풍경 속에서 꽃과 나비와 대화를 한참 하는 꿈을 꾼 것 같은데. 분명히 처음 잠들었을 때는 책상 위였는데, 눈을 떠보니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고 있었다. 으으, 카라마츠가 기지개를 펴자 책상 앞에 앉아 안경을 쓰고 두꺼운 책을 들여다보던 쥬시마츠가 고개를 돌렸다.

마사지를 해야 되는데, 자는 사람 옷을…….”

쥬시마츠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가 또 순식간에 멀쩡해졌다.

, 죄송합니다. 제가 좀 피곤했었나봐요.”

카라마츠는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풀었다. 쥬시마츠가 자리에서 일어나 머뭇거리며 입고 있던 의사 가운을 만지작거리다 입을 열었다.

카라마츠 씨, 제가 잘못 알고 있었어요. 아까 맞은 주사가 마지막 햇살 농축액이라 내일 햇살을 짜내러 가야 됩니다. 혹시, 내일 안 바쁘면,”

쥬시마츠가 두 손을 모으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같이 가서 도와주실 순 없습니까? 원래는 동생이 도와주는데, 동생이 산을 타러 가버리고 없어서 혼자서는 힘들 것 같습니다…….”

제가 맞을 약인데 제가 가서 도와야죠.”

카라마츠는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러자 쥬시마츠가 달려와 카라마츠를 번쩍 들어 도로 침대위에 눕혔다.

안됩니다! 햇살을 짜낼 때까지 버티려면 몸을 쉬어야 해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어디 가면 안 됩니다!”

쥬시마츠가 카라마츠의 손을 붙잡고 단단히 당부를 한 뒤 책장에 줄지어 늘어서 있는 유리병 사이를 뒤졌다. 달그락 달그락 하는 소리가 벽난로에서 장작 타는 소리와 어우러져 묘하게 듣기 좋았다. 이불도 푹신푹신하고, 눈앞에 거대한 샹들리에가 아주 조용히 끼익 끼익 하고 흔들리고 있었다.

찾았습니다!”

쥬시마츠가 커다란 유리병을 들고 달려왔다. 유리병은 카라마츠가 사먹는 1리터짜리 생수병만한 크기였는데, 안에 연한 녹색이 도는 기름같은 게 가득 차있었다.

봄바람 오일이에요! 봄바람 오일이랑, 개구리 하품이랑 벚꽃 눈이 들어 있어서 햇살 농축액만큼은 못해도 오늘 하루정도는 버틸 수 있을 거에요. 카라마츠 씨, 그럼, 위에 옷 좀…….”

쥬시마츠가 눈을 내리깔았다.

개구리 하품이요?”

유통기한은 안 지났으니까 걱정 안하셔도 돼요!”

쥬시마츠가 고개를 끄덕이며 소매를 걷었다. 카라마츠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쥬시마츠가 하라는 대로 윗옷을 주섬주섬 벗었다.

개구리가 하품을 해요?”

, 개구리 하품은 신선도 유지를 위해서 넣는 거에요. 동면에서 갓 깨어난 개구리들은 하품을 엄청 하거든요.”

쥬시마츠가 진지한 얼굴로 카라마츠의 눈앞에서 유리병을 흔들어 보였다. 카라마츠는 도시 출신이라 개구리가 동면에서 깨어나는 걸 본적이 없었다. 사실 개구리도 본 일이 거의 없지만. 카라마츠가 윗옷을 벗자 쥬시마츠가 침대 앞으로 의자를 질질 끌고 와서 자리에 앉아 손바닥에 오일을 조금 덜어내 손바닥을 문질러 오일이 따끈하게 데워지도록 했다. 그리곤 카라마츠의 목에서부터 시작해 천천히 등에 오일을 바르기 시작했다. 봄바람 오일이라고 해서 그런지 풋풋한 봄냄새가 났다. 쥬시마츠의 손이 닿는 감각이 익숙하진 않았지만 카라마츠는 얌전히 쥬시마츠에게 몸을 내맡겼다. 쥬시마츠는 한참 오일을 바르다가 카라마츠에게 말을 걸었다. 진지한 목소리였다.

카라마츠 씨는 무슨 일을 하십니까?”

저는 놀이공원 분실물센터에서……. 아차! 사무실에 돌아가야 하는데!”

카라마츠가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쥬시마츠가 카라마츠의 어깨를 붙잡고 눌렀다.

이미 늦었어요! 벌써 한밤중이니까 놀이공원도 문 닫았을거에요. 내일은 주말이니까 월요일에 출근하면 됩니다!”

쥬시마츠의 병원에는 창문도 시계도 없어 시간을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카라마츠는 한참 주변을 둘러보며 시계를 찾다가 곧 포기하고 다시 쥬시마츠에게 등을 내밀었다. 쥬시마츠가 다시 오일을 바르기 시작하자 카라마츠가 말을 이었다.

놀이공원 분실물 센터에서 사람들이 잃어버린 물건을 받아주고, 또 찾아주고 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잃어버린 물건들을 주인들이 찾아가지 않으면 폐기처분도 하구요.”

놀이공원에 분실물이 많아요?”

엄청 많아요. 어떻게 이런 걸 잃어버릴 수가 있지? 하는 물건들도 많아서 오소마츠 형이랑, 그러고 보니까 오소마츠 형이 여기를 추천해줘서 온 거에요.”

오소마츠? 오소마츠가 누구지…….”

그 왜, 얼굴에 장난꾸러기라고 쓰여 있는 형인데. 여긴 예전에 왔었다고 했는데 그래서 기억을 못하시는 걸 수도 있어요.”

쥬시마츠는 대답이 없었다. 등 뒤에서 손바닥에 오일을 조금 따라내는 소리가 들렸고, 카라마츠는 잠깐 고민하다가 다시 분실물 센터에 대한 얘기를 시작했다.

아까 그 분실물센터 얘기 말인데, 이런 저런 물건들이 많이 들어와요. 지갑같은 건 정말 흔한 얘기고, 거의 한권을 꽉 채워 쓴 다이어리나 아님 손때 탄 인형, 교과서가 가득한 책가방, 낡고 헤진 가족사진까지 정말 사람이 쓰는 물건이란 물건들은 다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걸 도로 찾아가는 사람들은 정말 많지가 않아서 사무실 안에는 온통 주인 잃은 물건들뿐이에요.”

쓸쓸하겠네요.”

쥬시마츠가 대답했다. 쓸쓸한가? 카라마츠는 가만히 사무실에 앉아있을 때의 느낌을 떠올려봤다. 놀이공원 안의 사무실인데다가 가끔 손님들이 올 때가 있어서 그런지 알록달록하게 장식이 많은 놀이공원 분위기였고, 창문 너머로 놀이공원 테마곡 같은 게 늘 들려왔지만, 맞아. 분실물 센터 안은 쓸쓸해. 일을 하면서 틈틈이 오소마츠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곤 하지만 카라마츠는 분명히 쓸쓸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게요. 쓸쓸해요.”

혹시 병의 원인이 거기에 있는 건 아닐까요?”

원인이요? 그렇지만 오소마츠 형은 이런 증상 같은 건 하나도 보이질 않는데요?”

그래도 잘 떠올려보세요. 카라마츠 씨 한테만 영향을 주는 게 있을지도 몰라요.”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며칠 전에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가 센터로 왔었어요.”

여기가 맞는데……. 카라마츠는 눈앞의 비상계단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지도 앱에는 분명히 이 건물의 5층이라고 나와 있는데, 막상 건물까지 와보고 나니 4층까지밖에 없었다. 건물 안의 계단도 4층까지만 이어져있고, 카라마츠는 건물 주변을 빙글빙글 돌면서 한참 올라갈 방법을 찾다 그늘진 건물 뒤편에 건물 옥상까지 가는 계단을 발견했다. 보통 대부분의 건물의 옆면에 붙어 있는 것처럼 지그재그로 걸어 올라가는 계단이 아니라 사다리를 타고 오르듯 건물의 벽면을 따라 나있는 계단이라, 여길 올라가면 진짜 병원이 있는 건지, 아니면 지도앱에서 뭔가 착오가 있었던 건지 카라마츠는 짐작이 가질 않았다. 어떻게 하지? 그냥 이대로 돌아갈까? 하지만 카라마츠의 몸은 점점 더 거세게 떨려왔고, 제법 따뜻해진 날씨에도 불구하고 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여기까지 와봤으니 일단 가볼까. 카라마츠는 손을 뻗어 계단 손잡이를 잡았다.

아픈 몸으로 4층까지 올라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카라마츠는 기본 체력이 있었기 때문에 중간에 한번 쉬지도 않고 끝까지 계단을 올라갔다. 찬바람에 꽁꽁 얼어붙은 손을 외투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들어보니, 꼭 거대한 대나무를 한 마디 잘라 옆으로 뉘인 것처럼 길쭉한 원통 모양의 조그만 집 같은 게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니 나무로 짓고 초록색을 칠한 것이었다. 꼭 동화에 나올법한 것이라 카라마츠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어 벽을 만졌다. 벽이 따뜻했다. 그 온기를 느끼는 순간 카라마츠는 마음이 놓였다, 여기 그 어디에도 병원이라는 표시를 찾아볼 수가 없지만, 왠지 이 안으로 들어가도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카라마츠는 벽에 손을 대고 옆으로 걷다 작은 문을 찾았다. 손잡이가 황금색이었다. 카라마츠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문손잡이를 돌려 열었다.

계십니까?”

훈훈한 공기가 카라마츠를 감싸 안았다. 이 조그만 건물? ? 의 안은 전혀 병원 같아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는 꼭 잔디 같은 녹색 카펫이 깔려 있었고, 천장에는 진짜 촛불이 켜져있는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었다. 이 안이 꽤 좁은 데도 불구하고 저런 커다란 샹들리에라니. 방 한가운데엔 뭔가 이것저것 잡다한 물건들이 가득 쌓여있는 책상과 의자가 덩그러니 놓여있었고, 저 한 구석에 야구배트와 글러브, , 야구모자 같은 게 대충 걸려있는 보조의자가 있었다. 아니, 야구 모자 밑에 깔린 게 하얀 가운인 걸 봐선 의사가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문이 있는 곳을 제외한 온 벽면이 크고 작은 유리병으로 채워진 책장으로 가득 차 옅은 노란색의 벽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저 유리병 안에 든 것들을 도대체 뭘까. 카라마츠는 바로 옆에 있는 책장에 가까이 다가가 유리병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넘실거리는 보랏빛 액체 안에 은빛 가루들이 소용돌이치는 것이 있었고, 혼자서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조용히 끓고 있는 분홍색 액체도 있었다. 그 옆에는 유리병 안쪽에 물방울이 가득 맺힌 초록색 나뭇잎이 있었고, 은색에서 회색, 흰색, 그리고 다시 은색으로 계속 색깔이 변하는 액체가 담긴 것도 있었다. 카라마츠는 정신없이 유리병을 들여다보다가, 뭔가 깨지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샛노란 개나리색 점프슈트를 입은 남자가 입을 쩍 벌리고 카라마츠를 보고 있었다.
, 죄송합니다. 진료 받으러 왔는데요.”

카라마츠는 머쓱해하며 남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남자는 멍하니 카라마츠를 바라보다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면서 잔뜩 구겨져 있던 가운을 허겁지겁 입었다.

여기 앉으시죠!”
남자가 자기 책상 옆으로 작은 보조의자를 질질 끌고 와 탕탕 소리가 나게 의자를 쳤다. 사람들이 잘 안오는덴가? 아니, 그닥 병원같이 보이지는 않는데. 카라마츠는 잠깐 고민을 하다 남자에게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남자는 카라마츠가 보조의자에 앉자 다시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가 잡동사니로 엉망진창이 된 책상 구석을 뒤져 조그만 스케치북과 노란 색연필을 꺼냈다.

저는 쥬시마츠입니다! 닥터 쥬시마츠에요! 저는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 카라마츠입니다. 마츠노 카라마츠.”

쥬시마츠가 스케치북에 열심히 카라마츠의 이름을 적었다. 하얀 종이에 노란 색연필로 쓰는 게 잘 보이나? 하지만 닥터 쥬시마츠는 아랑곳 하지 않고 카라마츠의 이름을 스케치북 맨 위에 쓰더니 카라마츠를 힐끔힐끔 돌아보면서 뭔가를 계속 써내려갔다.

저기, 제가 몸살에 걸린 것 같아서요.”

몸살이요?”

닥터가 미간을 찌푸렸다. 몸살이 아닐 텐데, 하고 작게 얘기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카라마츠가 미처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기도 전에 닥터가 카라마츠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체온계를 쓰지 않고? 하지만 닥터의 크고 따뜻한 손이 닿자 카라마츠는 기분이 좋아져 따로 물어보지 않았다. 아마 닥터 쥬시마츠는 나이는 어려 보여도 제법 연륜이 있어 체온계 같은 건 신임하지 않는가보다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닥터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닥터는 카라마츠의 눈을 들여다보며 이마에 손을 얹고 있다가, 다른 쪽 손마저 들어 카라마츠의 양 귀를 조심스럽게 감쌌다. 닥터의 손은 거칠었다. 의사들은 공부만 하는 줄 알았는데 커다란 손이 굳은살투성이라 카라마츠는 조금 놀랐다. 닥터가 눈을 감더니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낯선 사람과 이렇게 가깝게 붙어있으니 낯설어 카라마츠가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위급하네요!”

닥터가 눈을 번쩍 뜨고 소리쳤다.

? 그냥 몸살이 아니에요?”

감기몸살하고는 다른 거에요, 어서 약을 맞아야!”

쥬시마츠는 책상을 순식간에 뛰어넘어 벽에 가득찬 유리병 사이를 뒤졌다. 쨍그랑 쨍그랑 하고 유리병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카라마츠도 가까이 가 신기한 유리병들을 구경하고 싶었지만 위급하다는 말을 들으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니, 대체 문제가 뭐지? 좀 춥고 그럴 뿐인데? 잠시 후 쥬시마츠는 아주 조그만, 자기 손가락 한마디만한 유리병을 찾아내 들고 왔다. 유리병 안에는 황금빛 액체가 부드럽게 일렁이고 있었는데, 안에 든 것이 뜨거운지 쥬시마츠가 양손으로 번갈아 들며 뛰어와 급히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카라마츠는 허리를 숙여 유리병 안에 든 것을 들여다보았다. 안에 조그만 알갱이같은 게 보이는 것 같기도 했고, 뭔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주사 안 무섭죠? 다 큰 어른이니까 괜찮을 거에요!”

쥬시마츠가 서랍에서 주사기를 꺼냈다. 카라마츠가 뭐라 대답을 할 틈도 주지 않고, 닥터는 유리병 안에 주사기를 꽂아 내용물을 쭉 빨아들여서 손가락으로 바늘 끝을 톡톡 튕겼다.

, 이걸 맞으면 다 낫는 겁니까?”

글쎄요, 일단 응급처치 정도는 될 텐데....”

쥬시마츠가 고개를 저었다. 카라마츠가 망설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통 이런 주사는 엉덩이에 맞던데, 카라마츠가 엎드릴만한 침대는 보이지 않았다.

저기, 닥터, 어딜 잡고 엎드리면 되는 건가요?”

다시 쥬시마츠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쥬시마츠는 옆에 조심스럽게 주사기를 내려놓고 목이 보일만큼 내렸던 점프슈트의 지퍼를 목 끝까지 올렸다.

아니, 엉덩이가 아니라 팔에 맞아도 되는 주사입니다! 괜찮아요! 이쪽 팔에 맞을까요?”

다행이다. 하마터면 책상에 엎드릴 뻔 했네. 카라마츠는 안심하고 왼쪽 팔을 걷었다. 쥬시마츠가 다시 주사기를 집어 들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카라마츠의 손목을 잡았다. 손마디가 도드라져서, 카라마츠는 의사 선생님이 저런 손이라니, 신기하네, 하면서 쥬시마츠가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쥬시마츠는 뚫어져라 카라마츠의 손목을 들여다보다가, 아무렇게나 주사 바늘을 푹 찔러 순식간에 안에 든 내용물을 밀어 넣었다. 주사 바늘이 뾰족해 카라마츠가 눈가를 확 찌푸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안에 든 내용물은 뜨겁고, 주사를 맞은 부분부터 발끝까지 순식간에 몸이 따뜻해졌다. 그와 동시에 기분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고, 머리가 개운했다. 온 몸이 훈훈하게 달아올랐다.

, 벌써 다 나은 것 같아요!”

아니에요, 중요한 건 병의 원인입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몸이 안 좋아지셨나요?”

쥬시마츠가 주사기를 내려놓고 카라마츠의 이마에 다시 손을 얹었다.

글쎄요,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보세요.”

카라마츠는 쥬시마츠의 손에 기대어 한참 기억을 더듬어보았지만 딱히 이렇다 할 계기는 없었다. 평소처럼 먹고, 평소처럼 자고, 요즘이 좀 춥긴 했어도 카라마츠는 원래 감기 같은 건 걸리질 않는 튼튼한 체질이었다. 쥬시마츠는 카라마츠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카라마츠는 우물쭈물하며 명확한 대답을 하지 못했고, 가운을 벗어 옆에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일 또 오셔야지 안 그러면 다시 병이 도질 거에요! 내일 이 시간에 꼭 다시 오세요!!”

카라마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시간에 밥도 먹지 못하고 이렇게 외진 병원에 오는 게 달갑지는 않았지만 쥬시마츠가 놔준 약의 효과가 제법 괜찮았기에 일단 쥬시마츠가 시키는 대로 다시 오기로 마음먹었다.

, 진료비는 얼마나?”

카드 결제도 됩니다!”

쥬시마츠가 책상 밑에서 카드 결제기를 꺼내 내밀었다.

 

다음날도 카라마츠는 다시 병원을 찾았다. 분명히 어제 주사를 맞고 돌아갔을 때는 잠을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몸이 개운했는데 오후 근무를 마치고 돌아가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몸이 다시 으슬으슬 추워지면서 오한이 들었다. 슬픈 생각도 나고, 울적해지고, 차가운 물에 푹 젖어 그대로 흐물흐물 해지는 것 같았다. 이게 대체 며칠째인지. 쥬시마츠가 병의 원인을 다시 생각해보라고 했는데, 글쎄, 카라마츠는 계속 생각해봐도 짐작 가는 것이 없었다. 카라마츠는 어쩔수 없이 두꺼운 외투를 최대한 껴입고 오전 근무를 하고,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다시 쥬시마츠의 병원을 찾았다.

저 또 왔습니다.”

카라마츠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병원 안이 어제완 달리 말끔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책상 위에 가득 차있던 이런저런 물건들은 어디다 다 쑤셔넣은건지 갖다버린건지 책상이 반들반들 윤이나고, 쥬시마츠도 먼지 한톨 보이지 않는 새하얀 가운을 입고 싱글벙글 웃으면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오늘은 주사부터 맞을까요?”

쥬시마츠는 카라마츠의 손을 잡고 끌고 와 보조의자에 앉히곤 가운 주머니에서 예의 그 황금색 유리병을 꺼내 주사기로 빨아들였다. 주사를 맞자, 어제처럼 다시 맞은 자리에서부터 따뜻한 느낌이 흘러들어왔고, 기분이 가벼워졌다.

어제 주사를 맞고 가니까 괜찮았는데 밤에 자고 일어났더니 다시 안좋아지더라구요. 저건 대체 무슨 약인가요?”

이거요?”

쥬시마츠가 빈병을 눈앞에서 흔들어보였다.

햇살 농축액입니다!”

햇살이요?”

, 이런 겨울에는 구하기 힘든거에요! 지난 여름에 혹시나 싶어서 몇병 뽑아다 놨는데, 이제 여분이 얼마 없어서 큰일이네요.”

쥬시마츠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저었다. 햇살 농축액? 선샤인? 선샤인을 농축했다고? 아냐, 카라마츠는 머릿속으로 드는 의심을 애써 지웠다. 아마 햇살하고 비슷한 약재 이름을 잘못 알아들은거겠지. 뭐든간에 약은 효과가 있었고, 카라마츠는 쥬시마츠와 마주앉아 대체 몸이 아픈 이유에 대해 열심히 토론했지만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곤란하네요.”

쥬시마츠가 책상 위를 손가락 끝으로 톡톡 두드리면서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이랬다간 카라마츠 씨의 심장까지 얼어붙을거에요. 매일매일 햇살 농축액을 맞는 걸로는 한계가 있거든요.”

심장이 얼어붙어요? 저희 집에 심장병 내력은 없는데?”

말이 그렇다는 거죠, 얼어붙는 거랑 비슷한거에요.”

, 카라마츠도 이게 심상치 않은 증상이란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게 들으니 정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까 햇살 농축액을 맞아 조금 나아졌지만 가슴팍을 더듬어보니 좀 심장 부근이 차가운 것 같기도 해서 덜컥 겁이 났다.

일단 오늘은 돌아가시고, 제가 좀 더 생각해볼게요.”

쥬시마츠가 카라마츠의 어깨를 끌어안고 번쩍 일으켜 옷을 털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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