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마츠는 자리에 똑바로 누워 눈을 감고 형제들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형제들은 모두 잠든 것 같았다. 좀 더 기다려야 하나. 카라마츠가 괜히 긴장되어 몸을 뒤척이려고 한 순간, 조금 거칠고 차가운 손가락 끝이 카라마츠의 손바닥을 천천히 긁었다. 물에 새빨간 잉크 한 방울을 떨어뜨린 것처럼 그 손가락이 닿은 곳부터 가슴께까지 찌르르 저려 왔다.
이치마츠는 일주일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다른 형제들에게 물어보면 카라마츠가 집을 비웠을 때나 혹은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돌아와 해가 뜨기 전에 나갔다고 했다. 후회하고 있을 테지. 이치마츠도. 차라리 이치마츠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해주길 바랬다. 그랬으면 카라마츠는 그 무거운 실수를 한 순간의 추억으로 남겨놓고 모른 척 다시 평소처럼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치마츠의 방황은 카라마츠에게 후회와, 슬픔과, 부정한 기대감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먼저 나서서 이치마츠를 찾아보려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만약 카라마츠가 이치마츠를 맞닥뜨렸을 때 카라마츠와 똑같이 생긴 얼굴 위로 미처 숨기지 못한 혐오감이 스친다면, 카라마츠는 와르르 무너져버릴게 분명했다. 지금 이 순간을 최대한 만끽하고 싶었다. 고양이가 들어있는 상자 같은 거야. 그 안을 들여다보기 전까진 고양이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할 수 있는 거지. 언제까지 뚜껑을 닫아둘 수 있을지 모르지만.
불도 켜지 않고, 커튼도 젖히지 않았다. 카라마츠 자신의 손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방. 라면박스들과 철지난 옷가지들, 낡은 책장, 경첩이 망가진 옷장, 손댄지 한 십년은 족히 된 장난감 박스가 좁은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설핏 잠에 들었다가, 갑자기 지금 눈을 뜨면 이치마츠가 곁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잠에서 깼다. 하지만 카라마츠의 곁은 처음 잠자리에 들었을 때처럼 차갑게 비어있었다. 카라마츠는 다시 잠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척이다 창고로 올라갔다. 이치마츠의 글이 읽고 싶었다. 사실 여러 번 읽은 만큼 머릿속에 내용이 남아있긴 했지만, 활자로 남은 글을 읽고 싶었다. 어딘가에 습작이라도 남아있지 않을까. 책장 구석에 반쯤 쓰다 만 노트들이 가득 꽂혀있으니까 그중에 하나쯤은 이치마츠가 쓰던 노트일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창고 문고리를 돌려 여는 순간 카라마츠는 자신이 아무것도 읽을 수 없을 것이란 걸 깨달았다. 창고 안에는 온통 이치마츠의 숨소리와, 카라마츠의 목을 감싸던 손, 주저하던 입술의 기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카라마츠는 잠깐 가쁜 숨을 쉬다가, 비틀거리며 걸어가 벽에 기대앉았다. 카라마츠는 뭔가 오해를 하고 있었다. 직접 죽은 고양이를 얼굴에 들이밀기 전까지는 고양이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고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 이치마츠가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만약에, 자신을 고등학생 때부터, 혹은 그 전부터 좋아해왔다고 하더라도 카라마츠는 이치마츠를 말렸어야 했다. 아님 그 자리에서 바로 이치마츠에게 장난이 심했다고 주먹질이라도 했어야 했다. 아예 없던 일로 돌아간다는 선택지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아, 지금 울어야할 것 같은데. 카라마츠는 멍하니 문을 바라봤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포기했던 감정이라 눈물이 차있을 자리도 남아있지 않은 건가.
그때, 1층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카라마츠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질질 끄는 듯한 발소리가 천천히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양 손으로 입을 막았다. 비명을 지를 것만 같았다. 발소리가 계단을 올랐다. 점점 가까워졌다. 발소리는 창고 문 앞으로 다가오면서 조금씩 느려지다가, 창고 앞에 멈췄다. 상자가 이제 열리려고 하고 있었다.
문이 열렸다. 카라마츠는 이를 악물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치마츠의 등 뒤로 집안이 새벽 푸른빛으로 은은하게 물들어있었으나 이치마츠는 어두워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카라마츠는 입을 열고 뭔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치마츠는 한참 카라마츠를 응시하다가,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방안에 적막이 흘렀다.
이치마츠가 천천히 방을 가로질러 카라마츠 쪽으로 다가왔다. 이치마츠에게도 카라마츠의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전신의 신경이 바짝 곤두서서 이치마츠를 향해있었다.
“이치마츠.”
카라마츠가 바싹 마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답은 없었다. 이치마츠는 조용히 카라마츠의 곁에 주저앉아 그의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댔다. 이치마츠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카라마츠의 뺨을 간지럽혔다. 새벽 공기냄새가 났다.
두 사람은 시간 간격을 두고 방을 빠져나왔다. 꼭 약속한 것처럼 불은 켜지 않았다. 카라마츠가 여러 번 뒤를 돌아보며 창고로 올라가면 이치마츠가 간신히 형체만 구별될 정도로 어두운 방안에서 조용히 카라마츠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다 할 대화는 없었다. 두 사람은 그저 서로에게 기대앉아 가만히 체온을 느끼거나, 아니면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밤을 새우고 해가 뜨기 전에 잠자리로 돌아가면 한참 늦게까지 잠을 잤다. 낮밤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아침에 억지로 일어나 아침밥을 먹고 생활을 하더라도 반쯤 잠에 취해있었다. 밤이 낮이고 낮이 밤인 것 같았다. 창고에서 이치마츠를 만나는 순간이 정신이 또렷한 낮이었다. 카라마츠는 두 사람이 창고에서 불을 켜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창고에서 이치마츠의 얼굴을 보게 되면, 해가 떠 있을 때 이치마츠를 평소처럼 대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이렇게 촉각만으로 이치마츠를 느끼는 게 좋았다.
하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문 밑으로 은은한 불빛이 비쳤다. 카라마츠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치마츠가 작은 스탠드를 켜놓고 카라마츠를 기다리고 있었다. 은은한 백열등 불빛에 이치마츠의 얼굴이 반쯤 뚜렷하게 보였다. 카라마츠와 너무도 닮은 얼굴. 자라오면서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누가 봐도 자신의 얼굴임을 부정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카라마츠가 문을 닫고 들어와서도 계속 주저하며 서 있으니까 이치마츠가 말없이 고갯짓으로 옆자리를 가리켰다. 카라마츠가 머뭇거리다 이치마츠의 앞으로 다가오자 이치마츠가 카라마츠의 손목을 잡고 잡아당겨 그의 다리 위에 카라마츠를 앉혔다. 카라마츠가 뭐라고 물을 겨를도 없이,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보이는 게 좋아.”
이치마츠가 웅얼거렸다. 카라마츠는 잠깐 멈칫했다가, 어리광부리는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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