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집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집게손가락이 따끔거려 보니 얄팍하게 베인 상처가 있었다. 아마 문집을 읽다가 종이에 베었는데 알아채지 못했던 모양이다. 카라마츠는 핏방울이 살짝 맺힌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 핥았다. 바짝 말라붙은 혀끝에 선득한 피 맛이 스쳤다.
겨우 세 권이었지만 카라마츠는 문예부의 문집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원래 책을 찾아서 읽을 만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가끔 다른 일을 하고 있다가도 문득 이치마츠가 쓴 글을 읽고 싶어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카라마츠는 하던 일을 내려놓고 이치마츠가 어디 있는지, 혹시 이치마츠가 티도 내지 않고 카라마츠가 하는 걸 지켜보고 있지는 않는지 확인한 뒤 2층 창고에 올라가 먼지 가득한 책장 사이에 꽂아둔 문집을 찾았다. 시 두 편, 단편 소설 한편, 그리고 유행하던 소설에 대한 비평. 여러 번 읽어 이미 다 아는 내용이었지만 가끔 카라마츠의 입안에서 맴도는 글귀가 있었다.
이치마츠는 좀처럼 형제들에게 자신이 쓴 글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했다. 밤새 글을 써놓고 형제들이 보여 달라고 하면 벌써 버렸다던가 아님 학교 사물함에 두고 왔다던가 하면서 피하곤 했다. 야한 거라도 쓰나보지? 오소마츠가 키득거렸지만 이치마츠는 그저 미간을 찌푸릴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마감을 맞춰야한다고 이치마츠는 사흘 밤을 새워가며 글을 썼다. 창고 문 밖으로 은은하게 새어 나오는 불빛을 보면서 카라마츠는 이번에 꼭 문예부의 문집을 사겠다고 마음먹었다. 이치마츠가 싫어할지도 모르지만, 카라마츠는 형으로서 이치마츠를 응원해주고 싶었고 한편으론 이치마츠가 보여주고 싶지 않은 자신의 한 부분을 살짝 들여다보고 싶었다. 네가 형제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부분은 뭘까. 태어난 이래로 늘 함께 해온 형제들에겐 보여주고 싶지 않지만 아예 낯선 타인들에겐 보여줄 수 있는 너의 어쩌면 연약하고, 새빨갛게 날것인 부분.
카라마츠는 일찍이 연극 홍보지를 돌리고 문예부실에 들렀다. 문예부원 둘이 나란히 앉아 문집을 팔고 있었다. 몇 권 팔리지 않은 건지, 아니면 애초에 많이 뽑은 건지 문집은 한참 쌓여있었다. 카라마츠는 부원들에게 이치마츠에겐 비밀로 해달라고 신신당부하고 돌아섰다. 카라마츠는 문예부실의 문을 닫고 나오며 문집의 차례를 뒤져 이치마츠의 글을 찾았다.
한 번도 의심을 해본 적이 없는 남자가 있었다.
이치마츠의 숨소리가 느껴졌다. 카라마츠는 단편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읽고, 한 글자 한 글자를 꼭꼭 씹었다. 네가 바라보는 세상은 이렇구나, 이치마츠. 상처받은 날의 햇빛은 고운 모래알갱이가 쏟아지듯 내리쬐어 살갗에 닿을 때마다 쓰라리고, 장대비가 쏟아지는 밤엔 세상에 빗물이 차올라 그대로 어두운 심해 밑바닥에 가라앉는 꿈을 꾸는구나.
이치마츠가 없을 때 은근히 다른 형제들에게 물어봤지만 문예부 문집을 샀다는 사람은 없었다. 카라마츠는 왠지 다른 형제들은 모르는 이치마츠를 혼자만 알게 된 것 같아 한편으론 뿌듯하고, 한편으론 부끄러웠다. 보통의 형제들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축제 때마다 문집이 나왔다. 3학년 땐 대학 입시를 준비한다고 이치마츠가 바빴기 때문에 문예부 활동도 제대로 하지 않는 것 같았는데 혹시나 하고 산 문집엔 이치마츠가 쓴 시가 실려 있었다. 이게 마지막이겠지. 카라마츠는 아쉬워하며 문집을 책장 구석에 꽂았다.
이치마츠는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이치마츠는 문예부 활동을 할 때처럼 밤늦게까지 글을 쓰지도, 책을 읽지도 않았다. 카라마츠는 늘 이치마츠가 뭔가 대단한 일을 해낼 것이라고 믿었다. 공부를 따로 하지 않아도 문학성적은 거의 만점이었고, 비록 문집에 실린 것밖에 보지 못했지만 이치마츠는 제법 글을 잘 썼다. 카라마츠가 전문적인 문학 비평가는 아니지만 이렇게 많이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생각난다는 건 이치마츠가 글을 잘 썼다는 뜻이 아닐까. 이치마츠는 작가도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사실 대학에 가지 않는다고 작가가 될 수 없는 것은 아닐텐데. 카라마츠는 못내 아쉬웠다.
덜컹, 카라마츠의 등 뒤에서 방문이 열렸다. 깜빡하고 문을 잠그지 않았던 모양이다. 카라마츠는 깜짝 놀라 읽고 있던 문집을 던지듯 내려놓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치마츠였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를 보고 마찬가지로 놀란 것 같더니, 곧 카라마츠가 손에 들고 있던 얇은 책을 알아보았다. 고등학생 때부터 거의 6년을 숨겼는데 이렇게 들킬 줄이야. 카라마츠는 속이 쓰라렸다.
“니가 그걸 왜 보고 있어.”
이치마츠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그는 척척 다가와 문집을 집어 들고 단숨에 반으로 찢어버렸다. 아, 카라마츠가 탄식했다. 카라마츠가 이치마츠의 글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 실린 문집이었다.
“이거 하나밖에 없어?”
카라마츠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 찾아서 나오면 진짜 죽여 버릴 거야.”
진심이다. 카라마츠는 다시 고개를 끄덕일 엄두도 내지 못하고 구석에 숨겨놓았던 이치마츠의 문집 두 권을 더 찾아 내밀었다. 씨발, 이치마츠는 문집을 건네받자마자 쫙쫙 찢어 걸레짝으로 만들었다. 그리곤 더러운 걸 만졌다는 듯 손을 바지에 문질러 닦고 다가와 카라마츠의 멱살을 잡았다.
“이치마츠! 너 지금 형한테!”
“재밌었냐? 이렇게 숨겨놓고 보면서 재밌었어? 혼자 비웃으니까 재밌었어?”
“이거 놓고 말해!”
이치마츠는 놓기는커녕 카라마츠의 멱살을 잡은 채로 바닥에 넘어뜨렸다. 쿵, 하고 찧은 허리가 아팠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위에 올라타 후드 안에 두 손을 밀어 넣고 목을 움켜쥐었다. 이치마츠의 차가운 손에 카라마츠의 동맥이 펄떡거리고 뛰는 게 느껴질 것이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손목을 부여잡고 떼어내려고 했지만 이치마츠는 단단히 힘을 줘 카라마츠의 목을 내리 눌렀다. 천천히 목이 졸렸다. 이치마츠의 무게까지 더해져 카라마츠는 있는 힘껏 발버둥을 쳤지만 이치마츠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카라마츠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자, 이치마츠가 그제서야 손에 준 힘을 풀었다. 카라마츠는 한참 헉헉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완력은 카라마츠가 훨씬 우위에 있을 텐데, 지금 놀란 탓인지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사실, 카라마츠는 동생들을 상대론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이치마츠는 이상한 표정으로 카라마츠를 한참 내려다보았다. 뭔가 물을게 많은 것 같아 보이기도 했고, 원망스러운 것 같기도 했고, 아님 화가 잔뜩 난 것 같기도 했다. 카라마츠는 숨을 고르고, 이치마츠의 밑에서 빠져나오려고 몸을 돌렸지만 이치마츠가 놓아주지 않았다.
“어땠어?”
이치마츠가 갑작스럽게 물었다. 뭐? 카라마츠는 놀라 고개를 돌렸지만 이치마츠는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로 카라마츠를 그저 응시할 뿐이었다.
“어땠냐고, 글. 저거 다 봤을거아냐.”
카라마츠는 말문이 막혔다. 그가 느낀 걸 그대로 읊을 수는 없었다. 그건 카라마츠가 글에 대해 느낀 것도 있지만, 그가 동생에게 갖는 은밀한 욕망이 뒤범벅되어 칼로 무 자르듯 분리하여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카라마츠가 망설이자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내가, 이런 걸 뭐라고 평가를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카라마츠가 운을 떼자 이치마츠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소설이 제일 좋았어.”
뭔가 소설을 읽으면서 드는 감상이 있었는데 아무것도 생각나지가 않았다. 떠오르는 감각이 있었지만 말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색깔이라던가, 소설의 배경이 되는 비오는 풍경이라던가, 아니면 운동장 같은걸 표현할 수는 있겠지만 입안에서 맴돌기만 하지 밖으로 나오지가 않았다. 이치마츠는 얌전히 카라마츠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뭔가 대답을 해야 될 텐데.
“좋았어?”
이치마츠가 입을 열었다. 카라마츠는 생각할 것도 없이 응, 하고 대답했다. 이치마츠가 묘한 표정을 하고 카라마츠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너 말고 본 사람 있어?”
“아니, 아마 없을걸. 회지 산 것도 나밖에 없었고…….”
다른 형제들에게 얘기하지 않겠다고 하면 이치마츠가 놔주지 않을라나. 카라마츠는 지금 얘기를 해도 되는 건지 아닌지 이치마츠의 눈치를 살폈다. 사실 이치마츠가 목에서 손을 놓고 카라마츠의 위에 올라타 있는 지금 카라마츠는 간지러운 기분이 들어 가만히 바닥에 누워있을수가 없었다. 안그런척 하려고 애썼지만, 이렇게 밀폐된 좁은 공간에서, 낯설지만 오래된 감정을 가진 대상과 함께 붙어있는다는건 카라마츠에게 이상한 기대감을 가지게 했다. 이치마츠가 얼른 비켜줬으면, 그럼 카라마츠는 단숨에 화장실로 돌아가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고 혹시 이치마츠에게 이상한 내색을 하지 않았는지 확인해볼수 있을 텐데. 이치마츠는 카라마츠가 빠져 나오려고 계속 몸을 들썩여도 놓아주지 않았다.
이치마츠는 대뜸 한 손을 들어 카라마츠의 눈 위를 덮었다. 이치마츠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도망가고 싶으면 도망가.”
잠긴 목소리가 들렸다. 카라마츠는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리고 바짝 말라 카라마츠가 계속 혀로 축이던 입술에 천천히 부드러운 것이 내려앉았다. 부드럽고, 살짝 젖어서, 독한 담배냄새가 은근하게 나는. 카라마츠는 자기도 모르게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멈춰야 될 것 같은데. 이치마츠가, 무슨 장난을 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이렇게 누워있으면 안될 것 같은데. 하지만 입 밖으론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이치마츠의 입술이 느리게 카라마츠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스치다, 카라마츠가 헉, 하고 숨을 들이마시자 매끈한 혀가 천천히 미끄러지듯 카라마츠의 입술을 가르고 들어와 혀를 건드렸다. 살짝, 마치 무섭다는 듯. 등줄기를 타고 전기가 흐르는듯 팔다리가 움찔거렸다. 이치마츠는 잠시 기다리다 카라마츠의 혀를 휘감으며 부드럽게 쓸고, 입 안에 여린 점막을 훑다가 혀를 세워 입천장의 예민한 살갗을 건드렸다. 흡, 하고 신음소리가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카라마츠는 점점 숨이 가빴다. 지금 이치마츠의 목에 팔을 둘러도 될까? 카라마츠가 망설이다 천천히 팔을 드는 순간, 이치마츠가 순식간에 떨어져나갔다. 카라마츠는 온몸에 힘이 풀려 일어날 수가 없었다. 어느새 해가 져 방안은 어두컴컴해졌다. 이치마츠는 마른세수를 하다 바닥에 엉망으로 흩뿌려진 종잇조각을 긁어모았다. 묻고 싶은 말이 많은데, 이치마츠는 아무 것도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혹시 지금 한 게 키스가 아닌가? 아님 이치마츠가 그저 동정의 호기심에 키스가 해보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이치마츠가 지금 쓰고 있는 글에 키스장면을 넣고 싶은데 마지막으로 해본 게 너무 오래되어 제대로 기억이 안 난다던가? 아니면, 나랑 키스해서 좋았어? 나는…좋았는데. 하지만 입 밖으론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방안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이치마츠가 한때 카라마츠가 아끼던 문집이었던 종잇조각들을 후드 주머니에 쑤셔 넣고 몸을 돌려 방문 손잡이를 잡았다.
“혹시, 그 소설 주인공, 나였어?”
카라마츠는 자기도 모르게 묻고 당황해 얼굴을 가렸다. 뭐라는 거야. 지금 쌍둥이 동생이랑 키스하고 할 말이 그거밖에 없어?
“…응.”
이치마츠의 잠긴 목소리가 아주 조용히, 꼭 한숨소리처럼 대답하고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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