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한번, 무대에 선 적이 있었다. 카라마츠는 자기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 한숨을 깊게 쉬었다. 꼭 지금 연기하는 것 같네.
이치마츠는 자신이 먼저 짐을 꾸려 집을 떠나겠다고 했다. 두 사람이 한꺼번에 나가게 되면 의심을 받을 수도 있고, 여자는 잠들기 전까지 종종 카라마츠를 불러 귀찮게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카라마츠는 여자가 잠자리에 들고, 식당 아줌마가 퇴근을 한 뒤 경비가 집의 정문과 후문을 잠그고 자기 방으로 돌아가는 10시 반에 담이 조금 허물어진 호수 쪽 샛길을 통해 도망치기로 했다. 이치마츠는 시내에 책을 사러가겠다고 핑계를 대고 간단히 짐을 꾸려 들고 나가 기차역에서 먼저 새벽표를 끊고 카라마츠를 기다릴 것이다. 카라마츠는 나중에 담을 넘어야 했기 때문에 꼭 가지고 가야 할 것들은 이치마츠에게 미리 넘겨주기로 했다. 사실 카라마츠가 챙길 것은 없었다. 여자는 기분 내키는 대로 현금다발을 주곤 했다. 카라마츠는 돈을 받을 때마다 방 서랍 구석에 숨겨놓았지만 지금 세어보니 많은 액수가 아니었다. 아쉬웠다. 카라마츠도 이치마츠도 고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해 일자리를 찾기도 힘들 것이며 어디서 머무르든 간에 다달이 월세가 나갈 것이다. 그리고 카라마츠는 이치마츠 얼굴에 남은 흉터도 제거해주고 싶었다. 뭔가 팔아서 돈을 벌 수 있는 물건이 있을까 하고 찾아봐도 온통 여자가 사준 옷가지뿐이었다. 어쩔 수 없지.
카라마츠는 옷장에서 요란하게 번쩍거리는 바지를 꺼내 그걸로 돈다발을 둘둘 말아들고 방문을 나섰다. 부엌을 지나치면서 식당 아줌마가 카라마츠를 흘깃 보았지만 뭐라 말을 걸지는 않았다. 카라마츠는 미소를 지으며 지하로 내려갔다. 이치마츠는 한참 짐을 꾸리고 있었다. 최대한 작게, 가볍게, 하지만 꼭 필요한 것은 챙기도록. 카라마츠는 돈다발을 건네주고 소파에 앉아 이치마츠가 바쁘게 방 안을 돌아다니는 걸 지켜보았다. 카라마츠가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가 없었다. 이치마츠는 방 안에 있는 서랍이란 서랍은 모두 열고 구석구석까지 뒤지면서도 카라마츠를 힐끔힐끔 돌아보았다.
“괜찮아. 천천히 해도 돼. 우리 아직 시간 많아.”
카라마츠가 웃으며 말하자 이치마츠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다시 짐을 챙겼다. 이치마츠는 언제 보더라도 늘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머리를 볼 때마다 쓰다듬고 싶었다.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하지만 카라마츠가 이치마츠의 머리 쪽으로 손을 올리기만 해도 이치마츠는 움찔거렸다. 많이 아팠겠지. 카라마츠는 문 앞에 걸린 이치마츠의 마스크를 집어 들어 써보았다. 마스크는 카라마츠의 이마부터 턱 끝까지를 완전히 덮었다. 눈도 조금 가려서 답답했고 숨 쉬는 것도 힘들었다. 마스크를 쓰고 좀 지나자마자 답답해지면서 입김 때문에 습기가 차기 시작했다.
“그건 왜 쓰고 있어?”
이치마츠가 돌아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마스크, 다른 걸로 사자.”
이치마츠는 대답이 없었다. 화난 것 같기도 했고,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카라마츠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치마츠에게 다가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릿결이 부드러웠다. 이치마츠가 다시 움찔하고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카라마츠는 충동적으로 마스크를 쓴 채 이치마츠에게 입을 맞췄다. 입술에는 딱딱한 마스크의 감촉만 느껴졌지만 숨구멍으로 이치마츠의 입김이 닿는 듯 했다. 이치마츠는 뻣뻣하게 굳었다가, 조심스럽게 카라마츠의 머리 뒤로 손을 뻗었다.
“…이거, 풀어도 돼?”
“풀고 싶어?”
이치마츠의 얼굴에서 온갖 감정이 뒤섞여 물결치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잠깐 기다렸다가, 이치마츠의 왼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이치마츠는 계속해서 망설이고 있었다.
“거봐. 마스크 쓰면 하나도 안 보인다니까.”
카라마츠는 고개를 옆으로 약간 기울여 직접 마스크를 묶은 끈을 풀었다. 마스크가 툭 떨어졌다. 이치마츠는 숨을 한번 몰아쉬고, 덜덜 떨면서 카라마츠의 입가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키스할 때는 눈을 감는 거야.”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뒷머리를 다시 한 번 쓰다듬고, 이치마츠의 눈을 감겨주었다. 이치마츠는 다시 눈을 떴다가, 카라마츠의 입술에 가만히 입을 맞추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카라마츠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드넓은 잔디밭을 한참 바라보았다. 비록 이 집에서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또 지하엔 시체가 네 구나 꽁꽁 얼어있었지만 카라마츠는 이 방이 좋았다. 따뜻하고, 조용하고, 방에는 욕실도 딸려 있었으며 무엇보다 자신을 좋아하는 이치마츠가 있어 좋았다. 이치마츠는 몇 살쯤 되었을까. 한 번도 물어본 적은 없다. 하지만 카라마츠는 당연히 이치마츠가 자신보다 최소한 한두 살쯤은 어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카라마츠와 별반 차이는 없어 보이지만 이치마츠는 어린 티가 났다. 생긴 게 어려 보인다던가 하는 건 아니고, 카라마츠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어린 티가 있었다. 집을 떠나기 전에 이 방에 이치마츠를 불러 밤새 놀았으면 좋았을 텐데. 카라마츠는 못내 아쉬웠다.
10시다. 이치마츠가 먼저 집을 나섰을 것이다. 카라마츠는 자기 방 침대에 앉아 초조하게 시계를 보고 있다가 자신이 집 안에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확인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복도로 나갔다. 복도는 조용했다. 카라마츠는 아무거나 생각나는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2층을 한 바퀴 돌고 1층으로 내려갔다.
“아, 마침 왔네.”
여자가 중앙 홀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좋은 와인이야. 아, 카라마츠 군은 술을 잘 못하지 참.”
여자가 카라마츠의 잔에 와인을 반쯤 따른 뒤 자기 잔에도 와인을 다시 채웠다. 이미 잠든 줄 알았는데. 카라마츠는 웃으면서 와인 잔을 들고 향을 한번 음미한 뒤 한 모금 입술을 축였다. 여자가 가르쳐준 것이었다. 여자는 좋아하면서 자신의 잔을 들어 카라마츠의 잔에 살짝 부딪치고 와인을 한 번에 반쯤 마셨다. 카라마츠는 등골이 서늘했지만 애써 참으며 미소를 지었다. 전등을 반쯤 꺼놓아 집 안이 어두침침했다.
“주무시는 줄 알았습니다.”
“사실 카라마츠 군한테 할 얘기가 있어서 기다리고 있었어.”
여자가 운을 뗐다. 설마.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거지. 카라마츠의 입이 바짝바짝 말라들었다.
“예전에 이 저택에서 남편이랑 자식들을 잃어버렸다고 얘기했었지?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건지 모르겠지만, 언제 돌아올지 몰라서 계속 이 저택을 지키고 있었거든.”
여자는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카라마츠에게 사실대로 얘기하지는 않는다. 카라마츠는 안도했다. 지금 당장 그를 죽일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이제 조금만 더 지나면, 한 시간만 버티면.
“그런데 이제는 도무지 견딜 수가 없어서.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겠고, 나도 이제 내 인생을 찾고 싶어. 새 출발을 해야 될 때가 온 것 같아. 황금 같은 젊은 날은 이미 다 흘러가버렸지만.”
무슨 그런 말씀을. 카라마츠가 씨익 웃으며 다시 여자의 잔에 와인을 따랐다. 빨리 마시고 빨리 취해서 잠들어버려.
“…카라마츠 군. 사실 카라마츠 군을 좋아해왔어.”
여자가 열띤 눈으로 미처 대비할 틈도 없이 고백을 해왔다. 카라마츠는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난 당신의 지하 창고에 뭐가 들어있는지 알고 있는데.
“함께 외국으로 가지 않을래? 어딜 가든 좋아. 카라마츠 군이 가고 싶은 곳으로 가자. 이 집도 이제 정리하고, 새로운 곳에서 시작하는 거야.”
카라마츠는 잠깐 난감한 표정을 짓고,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신 뒤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어디든 좋아요.”
그럴 줄 알았어. 여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호들갑을 떨었다. 그리고 뭔가 생각난 듯 테이블 주변을 훑어보다가 카라마츠의 팔을 잡아끌었다.
“카라마츠 군에게 줄게 있었는데 내 방에 놓고 와버렸네.”
여자의 손이 닿은 팔에 소름이 돋았다. 역겨워. 카라마츠는 구역질이 나려는 걸 참고 애써 웃으면서 여자의 방으로 올라갔다. 여자는 잠깐만 기다려, 하고 침실과 옷방을 오가며 뭔가를 찾았다. 카라마츠는 방 입구에 서서 기다리다 여자의 침대 옆 협탁 서랍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 조용히, 여자의 눈에 띄지 않게 카라마츠는 천천히 다가가 커튼을 내리는 척 하면서 협탁 안을 들여다보았다. 두꺼운 금시계와 금반지가 하나, 백금 반지가 하나, 진주 팔찌 그리고 사파이어 반지가 아무렇게나 놓여있었다. 저 정도면 아무 금은방에나 쓱 들어가 팔 수 있지 않을까. 여자는 이제 옷방에 가득 들이찬 옷장을 온통 뒤집어엎고 있었다. 카라마츠는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하면서 하나씩 집어 그의 옷 사이사이에 끼워 넣었다.
“찾았다!”
여자가 금색 리본이 묶인 상자를 들고 카라마츠에게 다가왔다. 카라마츠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마터면 들킬 뻔 했다. 여자는 카라마츠에게 상자를 내밀며 어서 풀어보라고 졸라댔다. 카라마츠는 상자를 침대에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포장을 풀었다. 얇은 샤워가운이었다.
“카라마츠 군 몰래 가져오느라 혼났어. 자자 나는 2층에서 씻을 테니까, 카라마츠 군은 1층으로 가세요―”
여자는 카라마츠의 팔을 끌고 1층으로 내려가 욕실에 밀어 넣었다. 벗은 옷은 젖으니까 밖으로 내놓으렴, 하고 여자가 문 너머에서 소리를 질렀다. 카라마츠는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차라리 아까 거절을 했어야 했던 건가. 카라마츠는 어쩔 수 없이 옷에 숨겼던 보석을 세면대 밑 구석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옷을 벗어 속옷을 제외한 나머지를 문 밖으로 내놓았다. 여자는 깔깔 웃으면서 옷가지를 들고 갔다.
카라마츠는 일단 샤워 가운을 두르고, 가운 주머니에 보석들을 집어넣었다. 금시계는 그냥 버릴까, 너무 무거운데. 하지만 그게 제일 돈이 될 것 같았다. 카라마츠는 잠깐 고민을 하다 그냥 주머니에 넣고 복도에서 혹시 무슨 소리가 나진 않는지 귀를 기울였다. 조용했다. 욕실 안에 시계가 없어서 시간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아까 여자의 침실에 걸린 시계를 봤을 땐 열한시가 가까워져왔다. 아니, 이제 시간이 의미가 없다. 욕실에서 중앙 홀로 나가서 정문을 통해 부엌 쪽으로 빠져야한다. 아까 낮에 경비아저씨가 작업복을 빨아서 거기에 널어놓는 것을 봤다. 그걸 창고에서 갈아입고, 원래 계획대로 호수 쪽으로 달려가면 된다. 맨발인 게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이치마츠를 만나서 제일 먼저 신발을 사야겠다.
카라마츠는 심호흡을 하고 문손잡이를 완전히 돌리고 문을 열었다. 복도엔 아무도 없었다. 천천히, 한 걸음씩. 심장이 쿵쾅거렸다. 중앙 홀에 거의 다 다다랐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조금만, 조금만 더 가면.
그 순간, 카라마츠의 등에 날카롭고 단단한 것이 푹, 소리를 내며 파고들었다. 헉, 카라마츠는 숨을 삼켰다. 온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하면서 카라마츠는 울컥 피를 뱉었다. 카라마츠는 허리에 박힌 것을 뽑으려 헛손질을 하다 앞으로 엎어졌다. 카라마츠의 등 위에 올라탄 사람은 칼을 다시 뽑았다. 카라마츠는 샤워 가운이 점점 축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시야가 거뭇해졌다. 카라마츠가 애써 일어나려고 손을 짚어도 미끄러졌다. 일어나야 되는데, 카라마츠의 팔다리에 점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바닥에 피 웅덩이가 고여 샤워가운이 척척하게 달라붙었다. 칼의 주인은 다시 아까 칼을 꽂았던 자리에 칼을 맞춰서 밀어 넣고 칼을 180도 돌렸다. 칼날이 몸 안에서 우드득 소리를 내며 살점을 후비는 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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