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니 낯선 방이었다. 꼭 영화에서나 봤을 법한 하얀 천장과 하얀 벽, 하얀 바닥으로 이루어진 비현실적인 공간이었다. 천장에는 조명도 붙어있지 않은데 은은하게 빛이 나 창문도 하나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딱딱한 바닥에 오래 누워있던 탓인지 몸이 뻣뻣했다. 묘한 쇠 비린내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카라마츠는 대체 여기가 어딘지 알아보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바로 뒤에, 낯선 쇳덩이를 이리저리 들여다보고 있는 동생을 발견했다. 그가 사랑하는 동생이었다.
이치마츠? 혹시 지금 장난치는 거냐?”

이치마츠가 미간을 찌푸리며 총을 바로 잡았다. 철컥, 하고 총알이 장전되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장난으로 보여?”

총은 작았다. 저걸 무슨 총이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화에서 보던 것과 거의 흡사해 꼭 장난감 같았다. 그리고 그 반짝거리는 총구는 카라마츠를 향해 있었다.

그거 진짜 총이야?”

안에 총알도 제대로 들어있어. 딱 한 발.”

이치마츠가 카라마츠의 눈앞에서 총을 흔들어보이곤 카라마츠의 이마에 총구를 꾹 눌렀다가 땠다. 묵직했다. 사람을 죽이는 게 맞구나. 카라마츠는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걸 네가 왜 들고 있는 건데?”

이치마츠는 말없이 총으로 바닥에 놓인 종이를 가리켰다. 흔한 복사용지에 매직으로 대충 찍찍 쓴 문구가 적혀있었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쏘지 않으면 지구는 멸망한다.’ 하고. 카라마츠는 종이를 주워들어 읽어보고, 뒤집어서 다른 글이 쓰여 있지는 않은지, 혹시 종이에 이게 장난임을 알려주는 조그만 멘트라도 남아있진 않은지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중2병 환자의 일기장에나 쓰여 있을법한 저 글귀가 다라서, 카라마츠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도대체 누구 짓이지? 오소마츠 형? 형은 이런 공간을 빌릴만한 돈이 없을 텐데……. 컨셉 러브호텔 같은 덴가?”

이치마츠의 마스크 너머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웃음소리가 들리자 괜히 기분이 좋아져 입가에 미소가 띄려는 걸 억누르며 벽에 손을 짚고 한 바퀴 쭉 걸었다. 카라마츠와 이치마츠가 이 방에 들어온 이상 어딘가에 입구가 있을 테고,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카라마츠가 영화에서나 본 두드리면 열리는 비밀 문같은 걸 찾아 한참 방을 빙빙 돌았지만 그들을 둘러싼 벽은 그저 평범한 벽에 불과했다. 조금 매끈한 느낌의 벽. 카라마츠는 다시 이치마츠에게로 돌아와 이치마츠와 마주보고 앉았다.

문이 없는 것 같아.”

이치마츠는 아무 대답 없이 총을 만지작거렸다. 방이 꽉 막혀있어서 그런지 조금 답답했다. 온통 하얀 방에 갇혀있으니 혹시 꿈이 아닌가 싶어 손등을 꼬집어봤지만 분명한 현실이었다.

날 쏠 수 있겠어?”

이치마츠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널 쏘다니. 카라마츠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어떻게 널 쏴. 만에 하나 이게 진짜라면, 네가 날 쏴야 돼.”

이치마츠가 다시 웃었다. 그 순간 한 쪽 벽에 한가득 영상이 떠올랐다. 카메라는 빨간색의 동그란 스위치 같은 것을 찍고 있었다. 그리고 화면이 둘로 갈라지면서 다른 한 쪽에선 실시간 뉴스를 방송하고 있었다. 화면 위에 찍힌 날짜를 보니 오늘이었다.

대체 저게 뭐야?”

꼭 카라마츠의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스위치 위에 조그만 타이머가 생겨났다. 5. 그리고 동시에 타이머가 작동되기 시작했다.

진짜야? 이게 말이 돼?”

카라마츠가 이치마츠의 팔을 붙잡고 그를 돌아보았다. 이치마츠는 아무런 표정변화도 없이 총을 꼭 쥐고 놓지 않았다. 뉴스에선 사람이 바글바글한 어느 놀이동산을 비추고 있었다. 간만에 나들이를 나온 가족들이 행복한 표정으로 놀이기구를 타러 가거나 간식을 샀다.

저 타이머가 그건 아니겠지?”

이치마츠는 대답이 없었다. 그는 그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화면을 노려봤다. 꼭 노려보면 타이머가 멈출 거라고 믿는 것처럼. 카라마츠는 화면과 이치마츠를 번갈아 보다가 시간이 4분으로 줄어들자 이치마츠의 팔을 꽉 붙잡았다.

난 널 못 쏘겠으니까, 네가 쏴. 아니면 내가 자살할거야.”

이치마츠가 인상을 쓰면서 마스크를 내렸다.

쓰렉마츠, 저걸 믿어? 그냥 너 혼자 개죽음하고 끝나면 어쩔 건데.”

그래도 만약 내가 죽지 않았다가 온 인류가 다 죽어버릴지도 모르는 거잖아. 나 하나로 해결 될 문제면 내가 죽는 게 맞아.”

멍청한 새끼. 그리고 자살은 룰 위반이야. 잘 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죽여야 된다잖아.”

이치마츠가 총을 등 뒤로 숨겼다.

죽을 생각하지 마. 네가 무슨 히어로야? 지구를 위해 희생하게?”

시간은 소리 없이 흐르고 있었다. 뉴스는 이제 사람들이 들뜬 얼굴로 이리저리 걷고 있는 번화가를 비췄다.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으면 괜찮았을 텐데, 카라마츠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선택으로 죽는다고 생각하니 죄책감이 들었다. 안 돼.

어차피 살면서 한 번 죽을 거, 지금 죽고 영웅이 되면 돼.”

카라마츠는 애써 웃으며 이치마츠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치마츠가 흠칫 떨었다.

내가 여기서 죽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네가 여길 나가서 내가 영웅이란 걸 사람들에게 알려. 아마 그 날은 전 인류적 기념일이 되어 온 지구의 카라마츠 걸이 내 이름을 목 놓아 부르지 않겠어?”

지랄하네.”

이치마츠가 카라마츠의 팔을 거칠게 떼어내고 뒤로 조금씩 물러났다. 이치마츠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네가 여기서 개죽음을 하든 뭘 하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누가 믿을 거 같아? 그냥 누가 장난하는 걸 멍청하게 믿은 새끼라고 까일 거라고. 넌 진짜 머리에 든 게 있냐.”

3. 카라마츠는 마음이 조급해져 이치마츠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이치마츠의 멱살을 잡았다.

정말 모두가 나 때문에 죽어버리면 난 정말 큰 죄를 짓는 거야. 만약 이게 장난이었다 그래도 내가 여기서 나가고 집으로 가는 길에 뺑소니로 죽을지도 모르는 거잖아. 날 쏴, 이치마츠.”

이치마츠가 아랫입술을 깨물고 카라마츠의 이마에 총구를 겨눴다가 다시 내리고, 안에 장전된 총알을 꺼냈다. 누런 총알은 꼭 때 묻은 감정 같았다. 매일 닦고 닦아도 세월에 빛이 바래버린 감정. 카라마츠는 총알을 뺏으려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치마츠가 잽싸게 몸을 돌려 총으로 카라마츠의 어깨를 내리쳤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카라마츠는 어깨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끝까지 멍청한 새끼. 네가 죽는다고 진짜 지구가 멸망하지 않을 거란 보장 있어? 대뜸 사람을 가둬놓고 살인을 하라는 새끼가 약속을 지킬 것 같냐고. 그걸 어떻게 믿고 죽겠다고 지랄이야? 네가 그렇게 대단해? 네 목숨 하나가 지구랑 똑같은 줄 알아?”

아냐, 이치마츠. 이건 내 문제야.”

어깨가 욱신거렸다. 카라마츠는 간신히 일어나 이치마츠에게 달려가 총알을 뺏으려고 손을 뻗었다. 2. 마음이 조급해진다. 카라마츠가 이치마츠의 무릎을 걷어차 이치마츠를 넘어뜨리고 올라타 총을 뺏고, 총알마저 뺏으려고 몸을 돌렸다. 그러나 이치마츠가 빨랐다. 이치마츠는 꼭 입이라도 맞출 것처럼 카라마츠의 멱살을 잡아당기곤, 자기 입에 총알을 던져 넣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총알이 제대로 넘어가지 않는지 이치마츠가 오만상을 찌푸렸지만 카라마츠의 멱살을 잡은 손은 놓지 않았다. 카라마츠는 바로 눈앞에서 이치마츠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걸 멍하니 지켜봤다. , 이치마츠는 힘겹게 총알을 넘기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이치마츠, 우린 지금 엄청난 잘못을 한 거야.”

이치마츠가 고개를 돌려 시간을 확인하곤 카라마츠의 멱살을 놓았다. 이젠 화면에서 소리도 들리기 시작했다. 어느 다정한 커플이 팔짱을 꼭 끼고서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마침내 봄이 와서 너무 좋다고, 그리고 꽃이 만발할 즈음에 결혼을 할 거라고. 카라마츠는 온몸에 힘이 풀려 이치마츠의 위로 엎어졌다. 이치마츠가 카라마츠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입을 열었다.

어차피 여기서 네가 죽고 내가 살아서 나갔대도 내가 다 죽여 버렸을 거야. 우릴 가둔 놈부터 시작해서 저기 나온 사람들도 다 찾아서 죽여 버리고 엄마도 아빠도 형제들도 안 가리고 눈에 띄는 인간들은 다 죽이고 나도 죽었을 거야.”

?”

왜긴 뭐가 왜야. 너도 알고 있잖아.”

이치마츠가 일어나 앉아 다시 타이머를 돌아보았다. 1.

떡치기엔 시간이 모자라겠네.”

이치마츠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카라마츠의 양 뺨을 붙잡고 거칠게 입을 맞췄다. 카라마츠는 멍하니 이치마츠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다가 이치마츠가 입술을 깨물자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처음이자 마지막일 동생과의 키스를 느꼈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키스였다. 달칵, 하고 스위치가 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거의 동시에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리고, , , 하고 뭔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화면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바닥이 꼭 지진이 난 것처럼 진동했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이치마츠는 잠깐 입술을 뗐다가, 눈이 반쯤 풀린 카라마츠를 보고 뭔가 말을 할 것처럼 입을 달싹거리다 다시 입을 맞췄다. 말을 하기엔 너무 아까운 시간이었다. 순간 벽이 사방으로 펑, 하고 날아가면서 고막이 터질 것처럼 큰 소리로 바닥이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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