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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소카라/이치카라] 파카카라 썰

riverside0210 2015. 12. 26. 01:49

룸메이트는 오늘도 외박을 했다. 쵸로마츠는 방에 혼자 남아 시계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기숙사 창문 너머로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어두운 방 벽에서 번쩍거렸다. 오늘은 혼자 있고 싶지 않아. 하지만 지금 기숙사에 남아있는 사람 중에 쵸로마츠가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는 편은 아닌데, 이렇게 늦은 시간에 사적으로 불러 대화를 할 만한 사람을 사귀지 못했다. 쵸로마츠는 한참 이불을 뒤집어쓰고 뒤척이다 결국 잠자기를 포기하고 외투를 입었다. 벌써 열한 시가 넘었으니 기숙사 문을 닫았을 시간이다. 하지만 오늘 밤 쵸로마츠는 조금 일탈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쵸로마츠는 기숙사 담을 뛰어 넘었다. 고등학교 때도 해보지 않은 짓을 이제야 해보다니. 쵸로마츠는 외투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한참 걸었다. 목적지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발 닿는 대로 반쯤 잠든 도시의 거리를 이리저리 헤집고 싶었다. 노란 가로등 불빛에 그림자가 길게 지는 골목을 따라 걸으며 쵸로마츠는 이 골목의 끝에 뭔가 새로운 것이, 쵸로마츠의 무료한 일상에 알록달록하게 색을 입혀줄 무언가가 있지는 않을까하고 기대했다.

과연 뭔가가 보였다. 고만고만한 크기의 주택가의 끝에 꼭 성냥갑 같은 작은 가게가 불을 밝히고 있었다. 쵸로마츠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열두시를 한참 넘긴 시간이었다. 혹시 아직 영업을 하고 있을까? 이 시간에만 문을 여는 곳일까? 뭘 파는 가게일까? 쵸로마츠는 가게에 가까이 다가가 창 너머로 가게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창가에 두꺼운 커튼을 반쯤 묶어놔 안이 잘 보이지 않았으나, 가게가 제법 넓었고, 테이블마다 사람들이 한 명씩 앉아 뭔가를 홀짝이고 있었다. 찻집인 모양이었다. 혹시 비싼 가게면 어쩌나 싶어 쵸로마츠는 창 너머로 아마도 계산대 위에 붙어있을 메뉴판을 찾았으나 그런 것은 보이지 않았다. 쵸로마츠는 잠깐 고민을 하다 문을 열고 가게에 들어섰다.

문에 붙은 작은 종이 울렸다. 하지만 가게 안에 앉아있는 사람들 중 단 한 명도 쵸로마츠를 돌아보지 않았다. 가게 안은 훈훈했고, 구석에 놓인 축음기에서 조용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기요.”

쵸로마츠가 계산대 앞에 서서 사람을 찾았다. 잠시 후에 아마도 부엌으로 보이는 곳에서 젊은 남자가 얇은 커튼을 헤치며 나타났다. 아마도 주인인 모양이었다. 남자의 외모는 꽤 매력적이었다. 자세가 곧았고 이목구비가 뚜렷했다. 남자가 미소 짓자 입이 시원하게 호선을 그리며 입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쵸로마츠는 남자가 여자들한테, 아니, 남자들한테도 제법 인기가 좋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지갑을 꺼내들었다.

커피 될까요?”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여기는 하루에 딱 한 가지 메뉴만 팔고 있습니다.”

쵸로마츠는 다른 손님들이 마시고 있는 것을 흘끗 돌아보았다. 다들 같은 음료를 마시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오늘은 뭘 마실 수 있나요?”

메뉴는 단 한가지뿐입니다. 오늘의 차를 팔고 있어요. 다만 차의 재료가 매일 매일 달라질 뿐.”

이상한 가게다. 쵸로마츠는 왠지 그 오늘의 차라는 것도 꺼림칙해 가게를 나가려고 했으나, 어느새 주인은 쵸로마츠의 팔꿈치를 잡고 빈 테이블로 안내하고 있었다.

앉아계세요. 곧 차를 내오겠습니다.”

쵸로마츠를 테이블에 앉히고 남자는 커튼 뒤로 사라졌다. 쵸로마츠는 좀 걱정이 되었으나 의자가 편해 곧 마음이 풀어졌다. 잠시 후에 남자가 투명한 유리 주전자와 찻잔을 내왔다.

유리 주전자 안에는 여러 색의 이파리 같은 것들이 떠다녔다. 짙은 선홍색인 것이 있었고, 투명하게 노란 것도, 새벽하늘을 한 자락 잘라놓은 것처럼 파란 것도 있었다. 남자는 쵸로마츠의 테이블 앞에 서서 차를 찻잔에 따랐다. 찻잎 색과는 다르게 찻물은 연한 녹색이었다.

잠깐만 기다렸다가 드세요. 많이 뜨겁거든요.”

남자는 쵸로마츠의 맞은편에 앉아 쵸로마츠에게 미소 지었다. 주인이 차를 따라주고 테이블에 앉아 접객을 하는 찻집이라니. 낭패다. 쵸로마츠는 얼른 차를 마시고 가게를 떠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벌써부터 찻값이 걱정되었다. 쵸로마츠는 찻잔을 들어 살짝 입술을 축였다. 차향이 독특했다. 한 모금 마셔보니 온몸에 온기가 퍼졌다. 나쁘지 않다. 물도 좋은 물을 쓴 것 같고, 찻잎도, 아니, 저게 보통 말하는 찻잎 같지는 않지만 꽤 향이 좋았다.

이 늦은 시간에 어딜 다녀오는 길이셨나요?”

남자가 물었다. 쵸로마츠는 차를 홀짝이다 찻잔을 내려놓았다.

다녀오는 길이 아니라 나오는 길이었습니다. 산책이죠.”

여기가 산책할만한 곳은 아닌데, 어딜 가려고 하셨는데요?”

목적지를 정해 두진 않았어요. 그냥 걷고 싶었거든요. 뭔가 재밌는 걸 찾고 싶기도 했고.”

, 남자가 테이블에 팔꿈치를 얹고 턱을 괴었다. 시선은 저 멀리 가게 전면창 너머를 향해있었다. 쵸로마츠도 남자의 시선을 따라 창을 돌아보았다. 지나가는 사람도 한 명 없이, 어두운 골목뿐이었다.

사실 우리 가게에는 눈에 확 띄게 재미있는 건 없어서, 안타깝네요.”

쵸로마츠는 속으로 생각했다. 고향 친구들한테 이런 가게에서 차를 마셨다고 하면 미쳤나고 할걸요. 남자는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쵸로마츠를 돌아보았다.

제가 아는 사람 얘기 중에 꽤 흥미로운 얘기가 있는데, 혹시 들어보실래요?”

나쁘지 않지. 쵸로마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자기 몫의 찻주전자와 찻잔, 그리고 뜨거운 물이 가득 든 주전자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 쵸로마츠의 유리주전자에 뜨거운 물을 더 부어주고, 자기 몫의 주전자에 물을 부었다. 남자의 찻주전자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보이지가 않았다.

제 친구 이름을 뭐라고 할까요. , 일단 카라마츠라고 불러봅시다.”

남자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상한 이름이네. 쵸로마츠는 다시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남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카라마츠라고 하니 남자이름 같지만 사실 여자에요. 하지만 이름은 바꾸지 않을게요.”

쵸로마츠가 피식 웃었다. 여자 이름이 카라마츠라니, 남자는 센스가 없었다.

카라마츠는 연극배우가 되고 싶어 성인이 되기도 전에 극단을 들어갔습니다. 학업에는 흥미가 없어 일찍이 학교를 그만두고 배우를 할 수 있는, 최대한 빨리 무대에 오를 수 있는 극단을 찾았죠.”

딱 사기당하기 좋은 먹잇감인데. 배우가 되겠다는 여고생이라니. 쵸로마츠는 벌써부터 카라마츠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카라마츠는 물어물어 어느 작은 극단을 찾았습니다. 비록 단원이 많지는 않았으나 제법 인지도가 높은 극단이었죠. 특히 엔터테인먼트 회사 관계자들이 자주 연극을 보러와 신인 연기자를 발탁해가기로 유명한 곳이었어요. 카라마츠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연극배우도 괜찮지만, TV에 나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하고 매달렸고, 운 좋게도 오디션을 통과해 극단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카라마츠가 연예인이 되는 이야기인가? 아님 연극배우로 대성한다던가? 쵸로마츠는 어느새 차를 한 잔 다 비우고 새로 차를 따랐다.

극단 생활은 나쁘지 않았어요. 카라마츠는 단원들과 두루두루 잘 어울렸고, 그러다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상대 남자의 이름은 뭐로 할까요. 여자 이름이 카라마츠니, 남자는 오소마츠라고 부를게요.”

쵸로마츠는 웃지 않으려고 애썼다. 남자가 잔잔하게 웃으면서 얘기하는 것으로 봐선 아마 남자가 그런 유머를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쵸로마츠도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변변찮은 남자였나봐요.”

남자가 씩 웃었다.

이름은 변변찮았지만, 오소마츠는 제법 연기를 잘 하는 배우였습니다. 동시에 극단에서 큰 영향력을 휘두르는 중요한 사람이었고, 카라마츠가 오소마츠에게 호감을 갖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몰라요. 오소마츠는 자기 개성이 강한 배우들 사이에서도 늘 중심에 서서 사람들을 이끌었고, 뻔뻔하리만치 자신감이 넘쳤죠. 아마 오소마츠를 좋아하는 사람도 꽤 있었을 텐데, 카라마츠가 오소마츠를 낚아채버렸죠.”

그럼 다른 여자들이 카라마츠를 질투했나요?”

아니요. 이상하지만 아무도 카라마츠를 질투하지 않았어요. 한명쯤은 시기했을 법도 한데 그렇지 않고 모두가 두 사람을 축복하고 응원해줬죠. 그런데 딱 한 명이 카라마츠를 따로 불러내 오소마츠를 조심하라고 귀띔해주었죠. 하지만 카라마츠는 사랑에 눈이 멀어 듣지도 보지도 않고 오소마츠에게 푹 빠져버렸습니다. 그만큼 오소마츠가 매력적이었어요. 어떨 때는 장난꾸러기 소년 같았고, 어떨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모든 걸 이해해주는 포용력 넓은 남자 같았고.”

남자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순식간에 자기를 사랑하게 만드는 사람.”

쵸로마츠는 기억을 되짚어 여태 만난 사람들을 떠올려보았지만 오소마츠 같은 사람은 없었다. 타고난 연예인 타입인가? 남자는 잠깐 이야기를 멈추고 찻주전자 뚜껑을 열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쵸로마츠는 찻잔의 온기를 느끼며 남자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길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