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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카라] 객원 선수로 뛰는 카라마츠 썰

riverside0210 2015. 12. 7. 22:59

카라마츠 군, 이번에는 축구야?”

저번에는 야구부였지? 연극도 하고 운동부 객원선수도 하고……. 카라마츠 군 진짜 대단해.”

그러게……. 머리 짧은 것도 잘 어울려. 좀 풋풋한 느낌?”

이치마츠는 마지막 온점을 찍고 펜을 내려놓았다. 방과 후 부활동 시간, 이치마츠는 그날 합평을 할 때 내놓을 글을 미처 다 끝내지 못해 부실에서 마지막 퇴고를 했다. 같은 부의 여자애들은 창가에 옹기종기 매달려 운동부 남자애들을 훔쳐보고 있었다. 문예부 남자애들은 별 매력이 없다는 거냐? 같은 부원들 중 남자부원이 투덜거렸지만 여자애들은 그저 꺄르르 웃고 다시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합평 시작하지.”

이치마츠가 마스크를 내리고 말했다. 운동장에서 축구부 코치가 부원들을 윽박질렀고, !! 하는 남자애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부실까지 들려왔다. 이치마츠는 자리에서 일어나 신경질적으로 창문을 쾅 닫았다.

카라마츠가 처음 머리를 박박 밀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정말 놀랐다. 사실 카라마츠가 여자였다고 고백을 해도 놀랄 것 같지 않던 오소마츠마저 놀라 카라마츠를 붙잡고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을 정도였다. 카라마츠도 제 머리가 낯선지 자기 머리를 쓱쓱 문지르면서 웃었다. 이번 연극에서 맡을 역할 때문에 머리를 밀어버렸다고 했다. 토도마츠가 말도 안 된다고 쫑알거렸지만 카라마츠는 후회하는 기색도 없었다. 좀 길다 싶었던 머리카락을 밀어버리자 카라마츠의 얼굴이 좀 더 도드라져보였다. 짙은 눈썹, 깊은 눈, 가만히 있을 때는 고집스럽게 다물려 있지만 누군가 말을 걸면 바로 풀려버리는 쉬운 입술.

그 마츠노 카라마츠가 연극 때문에 머리를 밀었다는 소문은 점심시간도 되기 전에 전교로 퍼졌다. 카라마츠가 어디서 뭘 하든 꼬리빗을 꼭 하나씩 주머니에 넣어 다니며 시도 때도 없이 머리를 빗는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자애들은 카라마츠의 교실 앞에서 카라마츠를 훔쳐보곤 흥분된 표정으로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카라마츠 군 되게 프로페셔널하지 않아?”

연극 때문에 그렇게 아끼던 머리카락을 밀어버리다니……. 어른 같고 멋있어.”

이치마츠는 말없이 카라마츠의 교실 앞을 지나쳤다.

카라마츠의 연극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카라마츠의 머리가 홍보를 톡톡히 했을 것이다. 연극을 마치고 카라마츠는 한동안 모자를 쓰고 다니다가 머리가 좀 자라 삐죽삐죽해지자 다시 빗을 들고 다니며 빗어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길이가 아직 짧아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밤에 잠자리에 들 때면 카라마츠는 토도마츠의 비니를 빌려 눈썹까지 덮이도록 푹 눌러쓰고 잠을 청했다. 답답하지도 않나. 이치마츠는 카라마츠가 깊게 잠들었다 싶으면 조심스럽게 모자를 벗겨내 방 저 멀리로 던져버렸다. 그래서 비니는 별 효과가 없었다.

카라마츠의 머리카락은 쑥쑥 자라 어느새 앞머리가 이마를 반쯤 덮고 있었다. 꼭 어린애 같기도 하고, 운동부 애들 같은 느낌이 났다. 카라마츠가 객원 선수로 뛴다며 유니폼을 입고 있을 땐 전혀 연극부로 보이지 않았다.

합평이 끝났다. 여자애들은 입술을 앙다물고 원고지와 가방을 챙겨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부실 문을 나섰다. 남자애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느새 이치마츠는 부실에 혼자 남아 멍하니 원고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빽빽하게 채운 원고지 가장자리엔 빨간색으로 이치마츠가 휘갈겨 쓴 흔적으로 가득했다. 그냥 버릴까. 이치마츠는 고민하다 원고지를 대충 둘둘 말아 가방에 집어넣고 창밖을 슬며시 내다보았다. 축구부는 아직도 연습 중이었다. 이치마츠는 별 어렵지도 않게 카라마츠를 찾아낼 수 있었다. 허리가 꼿꼿하고, 밤송이 같은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살짝 달라붙었다. 유니폼 밑에 타이즈를 받쳐 입은 다리가 매끈했다. 날이 어두워 공이 대체 어디를 굴러다니는지 보이지도 않을 것 같은데 카라마츠는 열심히 운동장 위를 날아다녔다. 코치도 비슷하게 생각했는지 연습을 마쳤다. 이치마츠는 바로 가방을 챙겨들고 부실을 나섰다.

이치마츠는 교문 앞에서 잠깐 서있다 축구부 애들이 와글와글 떠드는 소리가 듣고 두세 걸음 앞서 걸었다.

이치마츠! 미안, 동생이랑 같이 갈게. 내일 봐!”

그러면 뒤에서 보도블록 위를 힘차게 달리는 소리가 나고, 곧 푹 젖어서 수건을 두른 카라마츠가 왁! 하고 달려들어 이치마츠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이치마츠는 미간을 한번 찌푸려 보이고 땀 냄새 나잖아, 하고 카라마츠에게서 조금 떨어져 걸었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에게 연극 얘기를 하고, 축구 얘기를 하고, 같은 반 여자애 얘기를 했다. 머리를 기를 때보다 박박 밀었을 때가 더 인기가 좋은 것 같아서 계속 밀고 다닐까 싶기도 한다고. 이치마츠는 건성건성 들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카라마츠는 이치마츠 보다 보폭이 넓었다.

어지간히 관심받는 거 좋아하네.”

이치마츠가 톡 쏘았다. 아니, 이렇게 직접적으로 얘기를 하려고 했던 건 아닌데. 조금 돌려 말해서 놀리려고 했는데. 이치마츠는 당황해 어떻게 하면 좀 더 자연스럽게 변명을 할지 생각하느라 머리를 굴렸다. 카라마츠는 잠깐 대답이 없다가, 응, 하고 시원하게 말했다.

무대 위에서 관심 받는 것도 좋고, 축구 하면서 관심 받는 것도 좋아. 여자애들이 관심 가지는 것도 좋고, 누군가 나에게 집중하고 있으면 행복해.”

그렇게 얘기하면 부끄럽지도 않나. 이치마츠는 계속 걸었다. 카라마츠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몰라 멈춰서 카라마츠의 얼굴을 돌아볼 수도 없었다. 아니, 이치마츠는 카라마츠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다른 형제들은 따라할 수 없는 카라마츠만의 표정. 막 지구를 구하고 돌아와 지치고 힘들지만 보람차다는 히어로 같은 표정일 것이다. 물론 이번에 그를 지치고 힘들게 만든 것은 그를 질투하고 또 독점하고 싶은 동생이었다.

네가 글을 쓰는 것도 그래서잖아.”

글은 누군가가 읽어줬으면 해서 쓰는 거 아니야? 카라마츠가 이치마츠의 어깨를 툭툭 치곤 춥다, 하고 수건으로 물에 젖은 머리를 털었다. 이치마츠는 가방 속 깊숙한 곳에 묻어둔 원고지 뭉치를 떠올렸다. 어느 반짝거리고, 씩씩하고, 아량 넓은 남자를 한 글자 한 글자 그려낸 원고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