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카라] 안식의 오소마츠 프롤로그 6
“아, 그거 알아. 햄릿이지?”
이치마츠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카라마츠를 돌아보았다. 너무 대놓고 무시하는 거 아니냐? 카라마츠가 입을 삐죽거렸다.
“학교에서 그거 연극을 했었거든.”
카라마츠가 기지개를 쭉 폈다. 이치마츠는 별 대답도 없이 바지를 걷어 까진 무릎에 소독약을 발랐다. 연습하다보면 늘어. 카라마츠가 이치마츠의 어깨 너머로 몰래 넘겨다보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두 사람은 야구를 포기하고 자전거에 도전했다. 카라마츠는 비록 야구는 제대로 한 적이 없었지만 자전거는 탈 줄 알았다. 이 형은 혼자서 자전거 타는 법을 터득했지만, 가르쳐달라고 하면 가르쳐줄 수도 있지.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대답도 듣지 않고 창고에서 낡은 자전거를 꺼내 훅, 하고 바람을 불어 먼지를 털어냈다.
카라마츠는 자전거를 멋진 폼으로 탈 줄은 알았어도 가르치는 건 영 젬병이었다. 이치마츠는 첫 페달을 밟고 채 5분도 되기 전에 자전거에서 튕겨져 나와 잔디밭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심각하게 다친 곳은 없었으나 무릎을 제대로 찧어 바지 위로 피가 배어나왔다.
“연극부?”
이치마츠는 상처 위로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였다. 카라마츠는 소파 팔걸이에 앉아 이치마츠가 하는 걸 보고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중학교 2학년 땐가, 문학 시간에 대본 공부하고 실습같이 한 건데 선생이 참여안하면 낙제래서 어쩔 수 없었지. 수업 많이 빠졌었거든.”
이치마츠가 얌전히 듣고 있었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가 자기 얘기를 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 이치마츠는 구급상자를 정리해 TV 밑 수납장에 챙겨 넣고 바지를 갈아입겠다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사실 낙제는 그닥 무섭지 않았다.
이치마츠는 들어간 김에 세수도 하고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면서 나왔다. 머리 빗겨줄까? 카라마츠가 주머니에서 꼬리빗을 꺼내 이리 오라며 손짓을 했지만 이치마츠는 미간을 찌푸리고 소파 반대쪽 벽에 기대 앉아 카라마츠를 올려다보았다.
“햄릿에서 뭐였는데? 나무?”
“당연히 햄릿이지.”
카라마츠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때 반에서 우리 조가 1등이었었어. 문학 선생이 신나서 반별로 한 작품씩 맡아 전교생이 다 보는 앞에서 공연하자고 그랬거든.”
“했어?”
“공연 일주일 전엔가 엄마가 아예 돌아가셨어. 사실 엄마는 그 전에 한 오륙년은 죽은 듯이 말도 안하고 누워만 있었던 터라 정말 돌아가셨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놀라지는 않았거든. 그래서 나는 공연하러 가겠다고 했는데 아빠가 어떻게 엄마가 죽었는데 연극을 하겠다고 할 수가 있냐, 나가라 그래서 그냥 그대로 집을 나갔지. 사실 아빠는 이삼일에 한 번씩 집에 들어왔으니까, 엄마랑 가장 오래 있었던 사람은 나였어.”
한밤중까지는 애들이 동네 공터 같은데서 바글바글 모여 있었어. 거기서 모닥불도 피우고 술 마시는 애들은 술도 마시고. 그런데 한 새벽 두세 시쯤 되면 애들이 하나둘씩 가버리는 거야. 나는 맨 마지막까지 남았다가 가만히 앉아 있으면 추워서 해 뜰 때까지 한참 걸었어. 그냥 길 따라 막 걷다 보면 하늘이 까만색에서 남색, 진한 보라색이 됐다가, 가로등도 꺼지고 달도 점점 산 뒤로 넘어가는데, 새 우는 소리가 들리기 직전이 제일 조용해. 그럴 때면 괜히 기분이 촉촉해져서 아무한테나 전화를 하고 싶은데 그 시간에 전화를 받을 사람이 없었어.
이치마츠는 기차표를 두 번이나 끊었다가 취소했다. 카라마츠가 늦게 와도 여유롭게 가려고 좀 늦은 시간으로 표를 끊었는데도 카라마츠는 오지 않았다. 매표소 직원은 이치마츠를 수상하다는 눈으로 보면서 두 번째 기차표를 취소해주었다. 이치마츠가 혼자 두리번거리고 있으면 주변 사람들이 눈여겨보다가 경찰에게 신고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치마츠는 남자화장실 제일 안쪽 칸으로 들어가 변기 뚜껑을 내리고 앉아 배낭을 끌어안았다. 눈이 뻑뻑해져 이치마츠는 마스크를 벗어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그리고 문득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기차역에서 저택 쪽으로 가는 버스는 이미 끊긴지 오래였다. 이치마츠는 설마, 아니겠지, 카라마츠가 날 버리고 도망간 거겠지, 하면서 한참 새벽길을 달렸다. 가로등이 저 앞에서부터 하나씩 꺼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달려본 적이 없어 순식간에 목 끝까지 숨이 턱턱 막혔다. 옆구리에서 조이는듯한 통증이 느껴지고, 종아리는 쥐가 나려는 것처럼 뻐근해졌다. 하지만 이치마츠는 아픈 줄도 모르고 한참을 달렸다.
이치마츠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주변을 살핀 뒤 조심스럽게 저택의 정문을 열었다. 정원 쪽에서 까마귀 우는 소리가 빗소리 사이로 희미하게 들려왔다. 정문 쪽 커다란 창문이 열려 비가 저택 안으로 들이치고 있었다.
피비린내가 났다. 이치마츠의 코는 귀신같이 익숙한 냄새를 잡아냈다.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이치마츠는 들고 있던 가방을 떨어뜨렸다. 가방 안에 든 망치가 바닥에 부딪치며 쿵, 하고 둔탁한 소리를 냈다. 늘 멋지게 다듬던 머리카락은 엉망으로 흐트러져 피에 엉겨붙어있었다. 샤워가운 밖으로 드러난 팔다리는 대리석처럼 새하얗게 질려서 이치마츠는 숨이 막혔다. 왜 내 인생은 이렇게 많은 죽음들 위에 세워진 걸까. 이치마츠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차라리 내가 말을 하지 말걸 그랬어. 너한테 이 집 지하에 시체가 있으니까 도망가야 된다는 얘기 같은 건 하지도 말고, 아니 경찰에 먼저 신고를 했어야 했어. 너는 그냥 아무것도 모른 채로 남았다가 여주인에게 버려져야 했어. 아니 나를 배신하고 여주인에게 나를 넘겼어야 했어. 네가 나를 모르는 게 나을 뻔했어. 네가 문을 두드렸을 때 아무도 없는 척 조용히 네가 돌아가는 걸 기다려야 했어. 네가 멀리서 반짝거리고 있어도 나는 아무것도 못 본 척 방에서 나오지 말았어야 했어. 네가 친절하게 대해줬다고 거기에 마음이 풀려버리면 안됐던 거였어. 이치마츠의 마스크 밑으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숨쉬기가 힘들었다. 이치마츠는 그 자리에 앉아 온몸을 떨다 조금씩, 조금씩 카라마츠를 향해 기어갔다.
아, 아냐, 나는 너를 만났어야 했어, 네가 나 때문에 죽은 지금까지도 이기적이라서 미안해. 이치마츠는 카라마츠를 조심스럽게 잡아 당겨 그의 무릎 위에 머리를 뉘였다. 차가웠다. 이치마츠가 처음 잡았던 카라마츠의 손은 따뜻했는데, 내 손이 차가운 게 미안해질 정도로 따뜻했는데, 카라마츠는 차가워 얼음장 같았다. 카라마츠는 눈도 감지 못하고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카라마츠가 그랬던 것처럼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눈을 감겨주려고 했지만 굳어 감기지 않았다. 아. 나는, 나는, 네가.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이치마츠는 컥컥 숨을 거칠게 들이마시며 울었다.
미안해. 나는 네가 없으면 안됐어. 차라리 너를 몰랐으면 몰라도 나는 너를 알게 된 이상 네가 없으면 안 되는 거였어. 너는 나를 만나서 죽었는데 너한테 미안한 것보다 네가 있어서 좋은 마음이 더 커서 미안해. 혼자 여기에 남겨놔서 미안해. 당연히 위험한 거였는데 너 혼자 남겨놓고 도망치라고 해서 미안해. 여길 나가는 게 무섭기도 하지만 너랑 같이 떠난다고 생각하니 설레서 기다릴 수가 없었어. 차표를 두 장 끊는 게 처음이라 좋았어. 안아줘서 고마워. 나 얼굴 징그러운데 키스하게 해줘서 고마워. 미안해. 내가 좋아해서 미안해. 네가 좋아질수록 네가 날 버릴까봐 무서웠어. 너는 착하고, 다정한데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서 무서웠어. 좋아한다고 인정해버리면 너한테도 같은 걸 바라게 될까봐 무서웠어. 욕심만 자꾸 커져서 네가 부담스러워 버릴까봐 무서웠어. 함께 있고 싶어 해서 미안해. 버리지 않아줘서 고마워. 아니 죽게 만들어서 미안해. 차라리 네가 날 버렸으면 좋았을 거야. 사랑해. 사랑하는 거였어. 사랑하는 게 맞아. 사랑하고 있어. 처음 본 순간부터 그랬을지도 몰라. 누구든 너를 보면 사랑할 수밖에 없었을 거야. 사랑해. 사랑하고 있어. 사랑해.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난 경비가 경찰에 신고를 했다. 이런 시골에서 살인사건이 나기는 오랜만이라 경찰들은 순식간에 도착해 저택에서 밖으로 나가는 입구를 통제했다. 경찰들은 이치마츠가 더 이상 시체를 건드려 범인의 흔적을 지우지 못하도록 그를 끌어냈다. 그의 가방에선 핏자국이 배인 망치와 칼이 나왔고 이치마츠의 마스크와 옷은 온통 피범벅이었다. 이치마츠는 정신을 놓아버려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고, 뒤늦게 출근한 식당 아줌마가 이치마츠는 도살장에서 일을 했었고 저 망치와 칼은 이치마츠가 원래 쓰던 도구였다고 증언했다. 또한 이치마츠는 카라마츠가 살해당한 시간에 저택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기차역에 있었다는 게 확인되어 경찰들은 그를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이치마츠는 문 옆에 서서, 경찰들이 이곳저곳을 들쑤시는 걸 멍하니 지켜봤다. 이대로 죽어버릴까. 카라마츠가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카라마츠가 원망하고 있겠지. 만나면 사랑한다고 말해도 될까. 죽어서도 나는 얼굴에 이렇게 흉이 남아서 징그러울까. 카라마츠가 나를 좋아해줄까.
그 순간 정문 쪽 벽에 난 큰 창문으로 커다란 무언가가 날아와 창문을 요란한 소리로 깨뜨리고 우당탕탕하고 안으로 굴러 떨어졌다. 이치마츠는 자신도 모르게 벌벌 떨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귓가에서 다시 그의 집과 부모님이 폭발하는 소리가 들리는듯했다. 그러나 그 불시착한 물체는 불붙은 헬기가 아니었다. 아, 그리고 이치마츠는 이제 어린애가 아니었다. 사고가 날 당시의 기억이 떠올라 머리가 쥐어짜는 듯 아프고 눈앞이 팽팽 돌았지만 이치마츠는 버티고 서있을 수 있었다. 그때 이치마츠의 부모님을 빼앗겼던 것처럼, 카라마츠를 그저 빼앗기고 가만히 앉아 죽어버릴 수는 없었다.
이제 몇 편 안남기긴 했지만 올라올때까지 계속 서치하신다는 분들이 계셔서... 트위터 아이디 달아둘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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